군위오씨(軍威吳氏) 입도조(入道祖)
지난 주말,
제주올레 2코스에 있는 입도조의 묘를 찾아 참배하였다.
서귀포시 성산읍 대수산봉(큰물뫼) 동남쪽 아래에 위치한
군위 오씨(軍威 吳氏) 입도조(入道祖) "석자 현자" (吳碩賢) 할아버지의 묘소이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조상님의 묘를
정년을 기다리는 나이가 되어 이제야 찾아 보면서 사죄하는 마음이었다.
종친회에서 매년 4월 총회를 겸하여 입도조의 묘제를 지내고 있지만
그 묘제는 형님들이 몫이어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참석해 보지 못했다.
그동안 나는 업무상 또는 나들이 중에 여러 차례 이 대수산봉을 지나 다녔지만
입도조의 묘가 저 오름에 있구나 생각했을 뿐 찾아보지는 못하였는데
주말에 올레 2코스 점검이 있어 갑자기 입도 시조묘를 떠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경북 군위군이 본관인 군위오씨(軍威吳氏) 시조는
'숙자 귀자'(오숙귀 吳淑貴) 할아버지로 고려 때 비안군(比安君)에 봉해진 분이다.
그리고 입도 시조는
조선 세조 때에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였던
나주영장 통정대부(羅州營將 通政大夫) 오석현(吳碩賢) 시조가 관직을 버리고
신양리 마을 '간돈지' 부근에 들어와 4대까지 살면서 군위오씨 제주 입도조가 되었다.
제주에서 군위오씨는 입도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장파, 중파, 중말파, 말파로 4개의 파가 갈려 있으며
나는 중말파 제18세손으로
우리 집안에만도 20세손까지 무려 300여명이 살고 있으니
제주도에서 군위오씨가 차지하는 비중은 5위 정도 벌족으로 알려져 있다.
(입도조묘의 시문 : 죽어서도 망자의 혼령이 집으로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출입문)
입도시조의 묘가 있는 큰물뫼(대수산봉)는
풍수학적으로는 누운 소의 형국(臥牛形)이며
입도조의 묘는 바로 누운 소의 젖통에 해당하는 부분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이 자리는 왕혈(王穴)이라 하여 제주에서 첫손꼽는 명당이라고 하는 자리인데,
지관이 묫자리를 잡을 때 오래도록 자손이 많은 '누만년 품관지지를 쓰겠느냐,
아니면 칠대에 걸쳐 정승이 나오는 '칠대 정승지지'를 쓰겠느냐?'라고 묻자
상주가 자손이 많은 '누만년 품관지지를 쓰겠다'고 하여
이렇게 자손들이 오래도록 풍성해 졌다고 한다.
<사진:수암풍수지리연구소>
지관이 풍수지리 예측이 맞았는지는 모르지만
2000년 현재 전국 군위 오씨 인구는 22,406명인데
그 중에서 75%인 16,850명이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이렇게 '누만년 품관지지'는 묘터는
입도시조의 자손들을 오래도록 번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어진다.
지난 2011년 입도 시조의 묘역(軍威吳氏 入島祖 瑩域)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1674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이 나왔다.
이 비석은 민간 차원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이며
비석 옆면에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이란 글씨가 선명하고
또 비를 세운 후손이 이름도 적혀있다.
그 때 발견된 비석은
입도 시조 봉분에 세워진 비석을 옮기는 과정에서
비문에 ‘이전 만들었던 비석을 산담 시문 아래 묻었다’는
기록을 확인하면서 세상의 빛을 봤다.
그리고 입도 시조 묘소에는 이번 발견된 비석을 포함,
묻혀있던 비석의 존재를 기록한 두 번째 비석(광무 15년 기원후 을묘년)과
이후 만들어진 것까지 총 세 개의 비석이 확인됐다.
이 묘는 원래 방묘였었는데
일제강점기 '금바둑판과 기물들이 있을 것'이란 전설 때문에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어 한때는 친족들이 밤낮으로 보초를 서며 지켰었다.
그래서 문중회에서는 회의를 거쳐
유물들을 도굴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직경 21척이나 되는 큰 봉분으로 덧쌓은 것이다.
이 작업에는 신풍리와 고성리 오씨 장정 30여명이 동원되어 하루에 마쳤다고 한다.
군위오씨의 집성촌은 모두 제주도 일원에 퍼져 있다.
서귀포시 성산읍 일대 신양리, 난산리, 신풍리와 안덕면 창천리와 함께
내 고향 위미리가 있는 남원읍 일대가 군위오씨의 텃밭이다.
제주시에는 구좌읍 세화리, 한동리, 하도리 등에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우리나라 오씨는 2000년 현재 해주오씨가 422,735명으로 가장 많다.
보성오씨 59,914명, 동복오씨 55,517명, 함양오씨 26,339명, 나주오씨 25,546명,
군위오씨 22,408명, 고창오씨 16,716명 등이며 나머지 본관은 모두 몇 천 명에 불과하다.
군위 오씨 시조 오숙귀(吳淑貴)는
도시조 오첨의 24세손 오현좌(동복오씨의 시조)의
둘째 아들로 고려 때 벼슬을 하면서 군위군(軍威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군위에 대대로 살면서 동복오씨에서 분관하여 오숙귀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군위로 하였다.
나는 육지부에서 들어와 제주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우스개 소리로 말 하곤 한다.
우리 시조 할아버지가 600여년 전에 제주에 들어와 입도조가 되었듯이
자기들이 바로 입도조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웃는다.
그리고 덧 붙여서 말한다.
입도조가 되려면 묘를 잘 써야 하는데 큰 오름을 구입해야 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