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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메재 서낭댕이를 넘어와서 못안신월을 지나 아래신월로 가는 사람들은 화본의 기차역에서 기차를 내려
아래신월이나 쥐개 마사동 덕동 실매삽실 홍골등등 효령면 방면으로 가는 효령면 사람들이 삽작골로 와서 건너편 걸쪽
걸둑길로 해서 큰못 음달뚝으로 못밑 양지길로 쉬지 않고 걸어 갔으니 서낭댕이 부터는 줄곧 내리막 길이라 걷기가
쉽고 가까이 쉴만한 장소가 없기도 했으니 그냥 걸었을 것이다.
당시의 옥메재 길은 화본에서 서분(창평)까지는 구루마(달구지)길을 닦아 간혹 구루마도 다녔으나 못안 신월에서는
지게짐 지거나 소질매 꾸려 타처로 짐을 운반 했을 뿐 외처와의 래왕은 걸어서만 오갔을 뿐이었다.
옥메재 넘어 화본쪽으로 가고 앞산이나 비약골로 서분에 가고 못밑 양지길로 아래신월 가고 큰갓 등길이나 안마골로
이신월 가거나 각골길로 꺼뚝골 서낭댕이는 뒷산을 올라 굼에빈달로도 서낭댕이 넘어 문덕으로 쉬실로 갈수 있었지...
외처로의 찻길은 5. 16군사혁명 후에 아래신월로 찻길이 확장되고 그때 즈음 후에 전기 전화도 개통되었으며 한참
후에는 상수도 까지 연결되어 식수가 해결되는 발전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지만 너그럽고 정 두텁던 옛 어른들은 돌아
가셨거나 타처로 이사를 가셨거나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삼십여 가구가 겨우 십여가구 남았으니 이것이 세월인가보다.
타처로 출입 할려면 걷기 보다는 차를 이용하니 넘나들던 오솔길이 별 필요도 없긴 하지만 옥메재 넘어 화본가는
옥메길은 골프장 건설 하면서 산형이 다 바뀌어 길은 흔적이 없어지고 서분가는 앞산길은 등넘어 삭골에 태양열 발전
시설 한다고 길을 없엤으나 걸을 필요가 없어서인지 아무도 싫어하는 사람이 안 보인다.
해방전후와 1961년의 군사혁명 때를 지나 새마을 운동시절 지나고 국토개발 후 발전의 혜택을 받아 찻길이 생기고
경운기부터 자가용 시대가 되니 걸어서 땀 흘리며 이웃동내로 고생스럽게 드나들기를 마다하고 차를 꼭 타겠다 하니
지난날의 꼬부랑길은 밟는이가 전무하니 잡초와 가시 덩쿨이 욱어지고 흔적도 희미하니 혹간 걸어보고 싶어도 잡풀
해치며 뚤고 가기가 불가능에 가까우니 자연 산길은 없어지고 골짝까지 경운기 길이 닦여지니 논밭으로 래왕하던 좁운
길도 없어진 곳이 몇군데 있으니 못밑으로 들어와서 꺼뚝골로 가던 길, 못둑에서 안마 골짝으로 갈라지는 곳에서 큰
각골 입구 지나 쉬실로 가는 길이 양지갓 쪽으로 들을 가로 질러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젔고 못둑에서 각골로 50여 미터
가다가 큰각골로 들을 가로 질러가는 길도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어 젔더라...
삽작골 양지로 옥메재 오르는 길도 당연히 없어젔을 것이 골프장에 막혀 이길로는 고개를 넘을 수 없으니 어쩌랴..
앞산 넘어 서분가는 지난날의 주통행로 마저 태양열 발전소로 길이 끊켰으니 없어질 것은 확실 한 거고.!!..
안마골짝으로 이신월 가는길도 막혔을 거고 큰갓으로 이신월에서 못밑논에 다니던 길도 넓게 닦은 길이라 흔적은
있어도 가시잡초가 욱어저서 길이라고 가기에는 난처한 곳이 여러군데 더라...
비약골로 서분 가던 길도 골짝 끝의 밭이 끝나고 부터는 넘어가는 길은 없어지고 가시잡초가 엉켜 있더라..
이래서 지난날 못안신월에서 밖으로 서분 화본 꺼뚝골 이신원 아래신월로 다니던 다섯방향의 길 중에 아래신월
가는 길만 찻길로 확장되어 있을 뿐 병안에 가는 것 처럼 출입은 오직 한길로 밖에 더 어쩔수 없게 되었다....
-계속-
6. 27일
산을 오르는 길도 없어진곳이 많을 것이니 양지갓 등을 오르는 길과 큰각골 첫 비신등 길, 큰각골 안망챙이
들어가는 바닥의길과 넙덕등을 오르는 지게길도 당연히 없을 거고, 동편 능선 진등(긴등)길은 경사가 완만한듯
보이지만 중간 몇군데는 가팔라 좌우로 갈지자 오솔길이 더러 있는데 지금은 당연히 없겠지만 거기 진등 생각
하면 ... 진등 최 상층부에서 꼬지배기 한짐을 해서 지고 진등으로 내려 오는데 내 키에는 버거운 어른들 지시는
큰 지게라서 중 2년인 내게는 미끈을 목발에 한바퀴쯤 돌려감아 짧게해서 젔지만 그래도 어설프고 조금 긴 목발
이라 가파른 길에 아차 실수로 목발이 뒷땅에 받치니...
어어라 앞으로 숙여지며... 그냥 앞으로 넘어지니 꼬지배기 한 짐무게에 눌려 내가 빈대떡이 되거나.. 이마와
코가 문드러질 아찔한 순간인데, 다행이고 당연하게도 꼬지배기 짐은 지게꼬랭이로 짐을 묶지않고 지고 다니는
습관이라 등걸이가 먼저 앞으로 흩어 떨어지고 지게 미끈도 순간적으로 벗어버렸으니... 나는 금방 벌떡 일어
서서 상처와 아픈데를 찾아 주물러 보니 전혀 다친데는 없고 뒤에 오던 한조형님이 놀라서 지게 받처놓고 뛰어
와서는 여기저기 만지며 아픈데 없냐고 물어 보더니 짐지고도 조심 안 한다고 나무라며 언짢은 표정만 짓는다.
당시에는 두렵고 겁도나고 서운 하기도 했었지만 지난세월을 회상하니 형님의 깊은 마음이 느껴저 보고싶고
그리워 못견딜 만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구나.... 감정이 격해서 지금은 더 못쓰겠다. -계속-
큰각골 입새를 지나 진등밑 길로 계속 들어가면 약물래기 초입에 각골 마지막 수오댁(상덕 상수 상록조부)
밭이 있었고 그 끝에서 약물래기 거렁을 건너 서낭댕이로 가파른 갈지자 좌우로 왔다갔다하는 길을 숨 가쁘게
올라 큰 돌배나무 있는 서낭댕이에 올라 꺼뚝골 쪽을 내려다 보면 당시에는 나무없는 민둥산 계곡 저 밑에 더러
일하는 사람들이 콩알 만하게 보이고 왼쪽으로 보구리집 만댕이 까지는 완만한 경사의 등성이라 가 보기도 했다.
나무 별로 없는 약물래기 골짝은 경사는 가팔라도 소먹을 풀이 무성하고 골짝 입새에서 놀면 소들이 밭에
내려와 저지레 하지도 못하고 우리는 걱정없이 감자모지 밀서리 하다가 늦여름에는 콩서리한 적도 있다.
감자모지 방법은 먼저 구덩이를 지름4~5십 센티에 깊이 20센티쯤 파고 밑에는 마른 갈비를 윗쪽에는 마른
나무 가지를 얹고 불을 지피며 그 위에 주먹만한 돌을 수북히 얹어 달구여 돌이 달게 되면 감자를 돌위에 얹고
생나무 가지로 덮은 후에 흙으로 봉하고 나뭇가지로 구멍을 둟고 고무신으로 떠온 물을 부어 김이 나도록하여
그 뜨거운 김으로 감자를 익혀서 먹는데 잘못 되면 설익은 감자를 먹으며 서로를 처다보면 온통 황칠을 검게
한 도깨비 같은 친구의 하얀 잇빨을 보면서 즐겁게 떠들곤 했었다.
감자서리는 각자 집에서 몇개씩 가지고 와서 먹었지만 밀서리 콩서리는 남의집 밭에서 몰래 갖어 와야 히기
때문에 어른이 안오신날 악동들이 의기 투합되면 이밭 저밭에 흩어저서 훔처 오되 표가 안 나도록 여러 곳에
조금씩 채집하도록 하였으니 어릴적에는 시키면 시키는데로 했고 좀 커서 내가 시킬나이 때는 중 고등 학생이
감히 남의 곡식을 해칠 수가 없어 한번도 호기롭게 콩서리 밀서리를 못해본 것이 지금도 아쉽기만 하다...
-6. 28 일 06;30"에 계속-
웃못(윗마을)에서 쉬실가는 각골 서낭댕이에 가려면 각골로 가지 않고 뒷산으로 올라 뒤산 만댕이 까지는
덜가고 왼쪽 아랫뒤산 윗쪽에서 넘어가면 굼빈달을 가로 질러 서낭댕이로 질러가는 솔로길이 있었는데 지금
에야 당연히 없어젔을 거고, 여름날 밤에 비가 오거나 비가 안 와도 풀섶에 이슬이 많을 아침식전에는 소를
뒷산에 목감아 올리고는 아침 먹고 걸뚝길에서 살피면 우리 소가 어디 있는지 보일때도 있고 안 보여도 핑겅
(풍경)소리 들으면 용하게 시시마금 자기집 소를 구분하고 찾아내곤 했었다.
웃 뒤산 골짝 건너 큰 삽짝골 까지를 그때는 '동내갓'이라 했는데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모르고 '동내갓'
하면 화천어른(아명 동원이)이 성낸 표정으로 동내갓 아니라고 퉁명스럽게 말 했었고...
동내갓 밑 부위를 점양지라 하며 서노댁의 좁다란 계단 밭이 있고 그 밑에는 작은 웅덩이도 있었는데 지금
도 있는지 모르겠고, 점양지 윗쪽은 팥청석이 보일 정도로 토심이 얕고 야생 대추나무가 여러그루 있었으며
위로 오를 수록 풀도 자라고 소나무도 제법 많았었다.
큰 삽짝골 초입 옥메가는 길왼쪽 평평한 곳에 산소 몇기와 도래솔로 외솔나무(해송)멏그루 있고 거렁 왼쪽
가파르고 풀이 적어 소를 올리면 계곡 바닥과 오른쪽으로 다니며 윗쪽으로 공동묘지 근처에 까지흩어저 풀을
뜯으니 찾으러 자꾸 올라가면 정상 근처에는 경사가 완만하고 토심이 깊으며 습한곳이라 갈미꽃(원추리-언처
리)이라는 꽃과 보라색 작두(잔대)꽃과 도라지꽃이 많았던 기억이 회상된다.
7. 7 일
큰 삽작골 입구를 지나 양지쪽 산록에 옥메가는 길을 끼고 칠곡댁 약간 붉은색 찰흙밭이 있고 지나 약간
높은 왼쪽에 서노댁 작은 밭에는 돼지감자를 심은 적이 있었다.
서노댁 밭을 지나 조금센 오르막길을 올라 걸을 건너 서낭당 산등을 오르려면 경사가 심해서 사람 다니는
길은 서낭당 고개로 바로가게 되고 소 짐싣고 다니는 길은 우로 좌로 덜 가파르도록 다른길이 나 있었다.
서낭당 여나믄 발자국 밑에 거대한 붉은 적송 한그루가 우뚝 홀로 있었는데 유독 크고곧아 어린 생각 에도
언젠가는 요긴 하게 쓰이겠다 싶었는데 초등 졸업후 중학 때 드문드문 가다가 보니 어느날 없어지고 안 보였다.
서낭당 돌무더기 가운데 무명의 잡목가지에 형형색색의 천 조각이 걸려 나풀거리고 고개 만댕이 정상에는
꺼뚝골에서 서분장 가는 길이 가로질러 십자길을 이루었는데 그 동북쪽에 위가 반반한 사방 1 미터가 넘을
방구돌이 40 여 센티 높이 솟아 있었으나 골프장 공사 전 까지는 보이다가 골프장 생기고 돌은 없어젔더라...
지난날 옥메 서낭댕이에 올라서면 멀리 새람산과 오른쪽 더멀리 화산이 보이고 경사 거의 없는 옥메에는
가까이 황토밭에는 밀이나 목화가 갈려젔고 조나 콩밭일때도 있고 더 아래 토심 좋은 큰밭은 구동댁(경화네)
밭이었다가 저 밑에 논밭을 일궈서 외딴집도 생기고 논으로도 일구고 옹당못 까지 생겨 참한 농장이 조성 될
까 했더니 부계와 산성면간에 도로가 닦여지고 중장비 동원하여 골프장이 닦여저 산형이 바뀌고 화본 가던
추억 서린 길도 흔적없이 사라지고 각가지 이바구 많던 아삼삼한 이웃들도 어느 하늘아래 계시는지.!!....
산성 국민학교 마지막 다니던 내가 여든이니 멀지않아 옥메재는 누가 기억이나 해 주랴..!!!
7. 8일
어제 7. 7일 늦게 15;40 분에 출발하여 한티재 터널길의 개통상황이 궁금하고 하여 한티재로 가 보니 아직
개통은 언제일지 알수없고 곳곳에 통제차단 표시만 요란하여 부계지서에 들어가 물어보니 인상좋고 아주 후덕
하게 생기신 경찰관이 개통날자는 미정이고 연말이라는 말이 있지만 추석에 개통하도록 할지 모른다고 하신다.
참 씁쓸한 것은 한티재 터널 공사가 언제적 인데 아직도 밍그적 거리고 책임지고 완성 해 보겠다는 주체가
죽었는지 사라(?살아)젔는지 없고 흔히 예산이 순차적으로 편성 집행되어 그렇다 지만 몇년째인가 말이다....
잘 생긴 경관의 친절에 기분이 고조되어 밝은 마음으로 신월에 가니 사람은 아무도 안 보이고 못물은 바짝
말라 아래쪽 20 % 정도 지출이 자라는 흙탕 꾸정물이 있으나 파래 구덩이 말뚝 몇개가 보일 만큼 윗쪽 바닥은
말라 쩍쩍 갈라진 틈이 흉하게 흠집을 만들어 안타까웠다. 지난 6 월 22일에 왔을 때는 못둑 관정에서 모타로
계속 물을 퍼올리는 소리와 둑 안쪽에는 물이 들어가는 모양이 보였는데 지금은 양수는 정지 상태였다.
다시 예날 삽작골과 두리봉 근처로 화본(신냄이)에서 서분가는 길을 그려보면 옥메 재를 넘어온 구루마
길이 두리봉 동쪽 잘룩한 서낭댕이로 넘어 두리봉 상부 남쪽 8부높이 즈음을 돌아 삭골 안망챙이 (신월 앞산
넘어)등성이를 왔다 갔다 갈지자로 계곡 바닥으로 낮게 내려가 서편으로 길이 닦여 골짝을 벗어나면 서낭댕이
에서 가파르게 내려온 오솔길과 합처저서 서분까지 넓직한 구루마길이 이어젔었다.
큰삽작골 입새에서 보면 높다랗게 두리봉 서낭댕이로 이어진 구루마길에 다니는 사람도 더러 보였었다.
이런 옛길은 세월과 함께 산천은 풀밭에서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덮혔고 옥메구루마 길은 그 남쪽으로 낮게
아스팔트 찻길이 닦이고 깎여 낮아진 두리봉 서낭댕이로 비까번쩍 택시로 넘나들고 숟한 추억어린 옥메길은
골프장 잔디밭이 되어 지나가기는 커녕 들어가 사진을 찍을 수도 없게 되었더라... 아아 예엣 날이 여 어....
그래서....
두리봉 서낭댕이 에서 서분가던 가파른 솔로길은 아스팔트 호기로운 길이 되어 포옴나게 휘익돌아 내려
서분으로 내달리고 삭골 골작으로 두리봉 넘던 구루마길은 구루마 없어진 6. 25전쟁 전 부터 없어지더니
지금은 삭골 안망챙이 갈지자 등을 까뭉개고 정지작업 잘 하여 태양열 발전소 시설을 조성 설치 하여 걸어서
서분장 가던 길은 흔적도 없어지고 추억 더듬어 가 볼려해도 철조망 막혀 허망하기 그지없게 되었다.
앞산으로 올라 서분에 갈려면 천신만고 철조망 밖으로 더듬어 비약골 넘어 원등으로 가는 길을 찾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전무한 실정이다.... <지난 시절 다시 없나 그으나알.... 예엣 날이 여어~~~>
팔공산 서봉에서 삭골에 신설한 태양열 발전소를 찍어 봤음...
역시 서봉에서 본 팔공산 방송 송신탑 봉우리를 담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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