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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석구((丁錫龜 ) : (1772-1833)
자는 우서(禹瑞), 호는 허재(虛齋)이며,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전라북도 남원 지사방(只沙坊) 내기(內基)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대 중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정연방(丁衍邦)이 처음 남원에 거주하였다. 만현(晩軒) 정염(丁焰)의 후손이다. 1790년 성암(省嵒) 이석하(李錫夏)에게 수학하였고, 1800년에는 심재(心齋) 송환기(宋煥箕)를 사사하였다. 일생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저술로 『허재유고』가 있다.
▶ 산행일 : 1818년 무인년 10월
두류산은 지리산(智異山)이라 부르기도 하고, 방장산(方丈山)이라기도 한다. 방장산이란 명칭은『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효무본기(孝武本紀)」에 보이고, 지리산이란 명칭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인다. 두류산이라 부른 것이 어느 때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대개 백두산에서 산줄기가 흘러 이 산이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세상에 전해지는 삼신산(三神山)은, 금강산(金剛山)이 봉래산(蓬萊山)이고, 한라산(漢拏山)이 영주산(瀛洲山)이며, 두류산이 방장산인데, 또한 어디에 근거했는지 모르겠다.
이 산은 기세가 풍만하고 험준하며 영남과 호남을 웅장하게 진압하고 있다. 주위는 4백여 리로 일곱 고을이 둘러싸고 있으니, 그 동쪽은 산청(山淸)이고, 동남쪽은 진주(晉州)이고, 남쪽은 하동(河東)이고, 서남쪽은 봉성(鳳城)이고 서쪽은 용성(龍城)이며, 서북쪽으로부터 동북쪽에 이르기까지는 운봉(雲峰)과 함양(咸陽) 두 고을이 자리하고 있다. 그 산맥은 덕유산(德裕山)에서 뻗어 내려 백운산(白雲山)에서 나눠졌는데, 남쪽으로는 안의(安義) 삼동(三洞)이 되고, 굽이굽이 10여리를 뻗어 내려 운봉의 고남산(古南山)이 된다. -고려 우왕(禑王) 경진년(1380)에 태조 이성계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정벌할 때 이곳에 의병(疑兵)을 두었다. 그래서 세속에서는 태조단(太祖壇)이라고 일컫는다.- 그 아래쪽이 여원치(女院峙)인데 운봉과 남원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그 남쪽으로 삐죽삐죽 솟은 돌들이 마치 묶어놓은 듯 서 있는 곳은 주지당(朱芝堂)이고, 산세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며 10여 리를 가다 푹 꺼진 곳이 망평(望坪)이며, 동남쪽으로 가파르게 솟은 곳이 정령(鄭嶺)이다. -고개 위에 둘레가 10여 리나 되는 오래된 성이 있는데, 「황령기(黃嶺記)」에 이르기를 “옛날 마한(馬韓)이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에 쫓겨 달궁(達宮)으로 피해 왔는데, 황장군(黃將軍)에겐 황령(黃嶺)을 지키게 하고 정장군(鄭將軍)에겐 정령을 지키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두 곳이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은 혹 그럴 듯하지만, 또한 무엇을 근거했는지 알 수 없다.-
왼쪽으로 산줄기가 낮아져 20~30리를 뻗어 내려 수성사(水聲寺)에서 멈춘다. 백운산 아래에서 운봉 . 함양 사이 남쪽으로 뻗어 내린 팔량재(八良峙)앞 만수동(萬水洞) 쪽으로 흘려보낸다. 오른쪽은 산줄기가 솟아 만복대(萬福臺)가 된다. 그 동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는 황령의 주능선이고, 서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가 가까이서 혈(血)을 이룬 곳이 파근사(波根寺)이며, 남쪽으로 뻗어내려 잔강(潺江)에서 멈춘다.
만복대에서 뻗은 산줄기는 조금 아래로 내려와 솟아 묘봉(玅峯)이 되니 산동(山洞)의 주봉이다. 곧장 남쪽으로 뻗어 내리다 조금 동쪽에 종봉(鍾峰)이 있는데, 남악사(南嶽祠) . 천은사(泉隱寺) . 화엄사(華嚴寺)의 주봉이다. 산줄기가 낮아졌다가 동쪽으로 뻗어 노구당(老嫗堂)이 되는데, 문수동(文殊洞)의 주봉이 된다. 산줄기가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반야봉(般若峰)으로, 묘봉과 마주서 있으며, 나머지 산줄기는 반선동(半仙洞)에서 그친다. 산줄기가 북쪽으로 방향을 튼 곳에서 곧장 동쪽으로 뻗어 토현(兎峴, 토끼봉)을 지나면 이 아래는 문수사(文殊寺)와 연곡사(燕谷寺)가 있는데 두 절사이의 주능선이다. 중반야(中般若)가 되니, 연곡사 골짜기와 화개동 사이의 주봉이 된다. 동쪽으로 뻗어 오개(五介)에서 그친다.
북쪽으로 낮아지며 뻗어 내린 산줄기는 영원암(靈源庵) . 마천(馬川) . 실상사의 주능선이 되는데, 동쪽으로 취령(鷲嶺)까지 이른다. 남쪽으로 낮아지며 뻗어 내린 산줄기는 신흥사(新興寺) . 쌍계사(雙溪寺) . 불일암(佛日庵)의 주능선이 되고, 동쪽으로 영신사(靈神寺)까지 이른다. 남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는 악양 . 청암(靑巖) . 덕산의 주능선이 된다. 다시 동쪽으로 뻗어가다 북쪽으로 돌아 제석당(帝釋堂)이 된다. 북쪽으로 뻗어 내려서 금대암(金臺庵) . 벽송암(碧松庵) . 마천의 안산(案山)이 된다. 산줄기가 다시 한번 불쑥 솟구쳐서 천왕봉 일월대(日月臺)가 되니, 이것이 두류산의 최고 봉우리다. -남쪽은 덕산(德山)의 뒤이고, 북쪽은 국동(國洞)의 뒤인데, 국동엔 또한 성터와 집터가 있다. 어느 시대 누가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산줄기가 조금 낮아져서 ○○봉이 있다. -이 봉우리는 벽송암과 의틈(義闖)의 주봉이 된다.- 상봉(上峰)으로부터 보면 거리나 높이가 제석봉과 나란하다. 천왕봉이 엄연하여 그 중간에 우뚝하게 황제처럼 군림하는 듯하고, 이 두 봉우리는 신하가 좌우에서 함께 호위하는 듯하다.
이곳으로부터 위로 더 이상 산세의 기복은 없고, 동북쪽으로 점점 낮아져서 문수암(文殊庵) . 왕산(王山)이 되고 -가락왕(駕洛王) 김구형(金仇衡)이 신라에 나라를 넘겨주고 이곳에 숨어 살다 죽었기 때문에 왕산이라고 한다.- 쌍령(雙嶺)의 주봉이 된다. 곧장 산줄기가 낮아져서 산청현의 안산이 된다. 천왕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진주의 여러 산이 되고 -여러 골짜기 중에 횡계(橫溪)가 가장 크다.- 그 나머지 산맥은 곧바로 김해(金海)로 내달리니, 이것이 이 산 형세의 대략이다.
이 산 북쪽의 물줄기는 반야봉의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심원(深院)으로부터 달궁 . 덕동(德洞)을 지나 반야봉의 동쪽에서 합류하여 북쪽으로 흘러나가고, 백암(白巖) 계곡과 와운(臥雲) 계곡에서 흘러온 물은 반선동(半仙洞)을 지나 서북쪽으로 부운동(浮雲洞)에서 흘러온 물과 합치고, 동쪽으로는 개선동(開仙洞)에서 흘러온 물과 합쳐져 팔량 . 횡치(橫峙) . 내령대(內靈臺) . 원수(元水) . 삼화(三華)를 지나 실상사에 이르러 운봉 한 고을의 물이 흘러온 것과 합한다.
남쪽으로 흘러 내려 마천에서 흘러내린 물과 만나고, 북쪽으로 흘러가서 엄천(嚴川)에서 만나 동쪽으로 생림(生林)을 지나, 안의삼동(安義三洞)과 백운산 백전(柏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본통(本通)에서 합쳐진 것과 만난다. 남쪽으로 흘러 내려 남강이 되는데, 다시 청암 . 덕산. 횡계의 물과 합해져 동쪽으로 낙동강에 유입된다.
지리산 남쪽의 물줄기는 묘봉과 종봉에서 발원하여 숙성치(宿星峙)에서 월천(月川)으로 흘러내린 물줄기와 합류한다. 남쪽으로 흘러가서 구례에 이르러 천은사와 화엄사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합류하고, 또 호남 좌도의 여러 물줄기가 문강(汶江)으로 합류한 것과 만난다. 동쪽으로 가서 오봉(五峰)을 지나 남쪽으로는 백운산의 여러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과 만나고, 북쪽으로 흘러 문동(文洞) . 연곡계곡 . 화개계곡 . 악양계곡의 물과 합쳐지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섬강(蟾江)이 되어 남쪽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이것이 이 산 주변 수세(水勢)의 대략이다.
주거지로는 운봉의 산내(山內), 함양의 엄천, 마천, 산청의 쌍령 . 생림, 진주의 횡계 . 덕산 . 청암, 하동의 횡보(橫甫) . 악양 . 화개, 구례의 토지(吐旨) . 마산(馬山) . 방광(放光), 남원의 소의(所義) . 산동(山洞) . 원천(源泉)이 있는데, 살기 좋은 곳으로는 토지가 제일이고, 화개가 그 다음이고, 엄천 . 마천이 또 그 다음이다. 산수의 형세로는 화개가 제일이고, 덕산이 그 다음이고, 실상사 있는 곳이 또 그 다음이다. 깊숙하고 그윽한 곳으로는 남쪽엔 직전(稷田) . 단천(檀川) . 묵계(墨溪) . 순두(鶉頭)이고, 북쪽엔 심원 . 백암. 경장(景庄)이다. -심원과 백암엔 지금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것으로는, 높은 지역은 화전을 일구고, 나지막이 경사가 완만한 곳은 논농사를 지으며, 곡식 농사가 되지 않는 곳은 목기를 만들거나 누에를 칠 뿐이다.
물자는 두치(豆峙)로부터 개치(開峙) . 원탑교(院塔橋) . 연곡 . 구례읍 . 산동(山洞) . 남원부 . 번암(磻巖) . 장수읍 . 운봉읍 . 인월(引月) . 마천 등의 시장까지 유통된다. 또 횡보 . 덕산 . 운곡 . 진주읍 . 산청읍 . 생림 . 사근(沙斤) . 함양읍 . 안의읍 등의 시장은 남해 . 곤양(昆陽) . 사천(泗川)으로부터 유통된다. 사찰은 쌍계사 . 칠불암 . 연곡사 . 화엄사 . 천은사 . 파근사 . 황령사 . 실상사 . 수성사 . 백장암 . 약수암 . 군자사 . 영원사 . 무주암(無住庵) . 금대암 . 벽송암 . 법화사 . 엄천사 . 문수사 . 지곡사 . 왕산사(王山寺) . 오대사(鼇臺寺) . 불장암(佛藏庵) . 청암사 등이 있다. 거기에 속한 부속 암자는 모두 기록할 수 없다. 그 장엄하고 화려함은 화엄사가 제일이고, 맑고 깨끗함은 금대암과 벽송암이 제일이고, 기이하고 빼어남은 칠불암 . 불일암 . 무주암이 제일이다. 간혹 고승과 특이한 선사가 있어 도량을 개설하고 현묘한 이치를 말한 자취가 있었지만, 우리 유가에서 거론할 바는 아니다.
층층이 쌓인 바위, 높이 걸린 폭포, 깊은 못, 기이한 새와 짐승, 진기한 나물, 신선의 약초 등 갖가지가 곳곳에 있어 낱낱이 들어 말하기 어렵다. 봄날의 화창한 기운이 밝게 빛나면 온갖 꽃이 화려하게 피어 숲의 빛깔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고, 가을 산에 남기가 걷히면 온갖 나무가 붉게 물들어 형형색색의 단풍이 높은 곳에서 내려온다. 봄이 되면 푸른 병풍이 겹겹이 쌓이고, 가을이 되면 비단 장막이 찬란히 빛나며 온갖 새들은 즐거이 노래하고, 모든 물줄기는 다투어 흘러내린다 . 이때 시인과 유람객은 나막신을 신고 산을 오르기도 하고, 강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며, 혹은 노래를 부르고, 혹은 시를 읊조리기도 하며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른다. 호걸스런 선비와 은거한 사람은 그물을 펼쳐 매를 잡기도 하고, 자루를 메고 약초를 캐기도 하며, 혹은 노래를 부르고, 혹은 화답을 하기도 하며 늙음이 장차 이르는 줄도 알지 못한다. 뽕잎 따고 나물 캐는 아낙네와 나무하고 소먹이는 동자들이 줄을 지어 오가며 계속 끊이질 않는다.
여름이면 무성한 나뭇잎이 그늘을 이루어 온종일 산행을 하여도 찌는 듯한 더위를 모른다. 겨울이면 눈이 쌓여 산에 가득하고, 봄과 여름이 바뀌는 청명한 시기에만 비로소 산 정상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깊숙한 음지에는 5월이 되어야만 얼음이 녹고, 높은 봉우리엔 6월이 되어야만 꽃이 만발하다. 이것이 이 산의 사계절 풍경이다.
남강과 섬진강이 지리산의 동남쪽을 빙 둘러 흐르는데, 고깃배와 땔감을 실은 배가 끊이질 않고 서로 이어진다. 섬진강 하류 동쪽 언덕이 이른바 두치시(豆峙市)인데, 영남과 호남의 사람들이 크게 모이는 대도회지이다. 매번 장날이 되면 섬에서 온 수백 척의 배가 해산물을 싣고 거슬러 올라오고, 강에서 내려온 배 10여 척은 육지에서 난 물산을 포장하여 강을 따라 내려와 긴 언덕에 줄지어 정박한다. 구름 같은 돛은 바람에 나부끼고, 노는 줄지어 모여 있다. 부유하고 큰 규모의 장사치와 거간꾼들이 줄지어 가게를 열고서 다투듯이 소란스럽게 외쳐댄다. 해가 거의 떨어질 쯤 시장이 파하는데, 조수에 돛을 올리기도 하고 바람을 타고 닻줄을 풀기도 한다. 혹은 끊어지기도 하고 혹은 이어지기도 하며 다투어 노래 부르며 뱃머리를 두드린다. 이것이 산 아래 강가의 풍경이다.
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서려있는 모양은 용과 뱀이 또아리를 튼 듯 하고, 불끈 솟은 모양은 호랑이와 이리가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높고 높아서 잡을 수가 없고, 넓고 넓어서 더할 수가 없다. 옷소매를 떨치며 산에 올라 표연히 홀로 서면, 인욕이 깨끗이 사라지고 천리가 유행하여 봉황이 천 길 위로 날아오르는 듯한 기상이 절로 생긴다. 천기가 맑고 깨끗해져 아지랑이가 사라지면 뭇 산들은 낮게 보여 마치 바둑알을 점점이 놓은 것 같고, 큰 바다도 넓게 보이지 않아 작은 웅덩이의 물이 출렁거리는 듯하다.
눈길 닿는 데까지 가보면 파촉(巴蜀)까지도 뚫어 볼 수 있고, 몸을 솟구치면 부상(扶桑)까지도 손에 닿을 듯하다. 남극과 북극은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발로 걸어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비 갠 새벽에 운무가 운해를 이루면 분명히 천지가 혼돈한 듯하다. 나 홀로 먼저 나가 우두커니 서서 음양이 서로 갈마들고 일월이 서로 바뀌는 것을 보노라면 황홀하여 형용할 수가 없다. 해가 뜰 무렵에는 붉은 빛이 사방을 에워싸고 붉게 물든 구름이 층층이 덮여 있다가, 갑자기 신기루가 영롱해지는 듯하고, 문득 천병만마의 깃발과 창검이 만 리나 늘어선 듯하다. 그러다 불현 듯 파도가 넘실거리고 섬들이 이어져 있어 천태만상을 그림으로 그릴 수 없고 글로 기록할 수도 없게 되니, 이것이 산 위에서 바라본 광경이다.
이 두류산이 생긴 이래로 몇 개의 세계가 지나고, 몇 연기(年紀)를 거쳤으며, 몇 명의 물을 낳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특별히 드러나게 전할 만한 행적은 없고, 삼신산 신선의 설화는 더욱 허망하다. 오직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문장(文章)으로써 쌍계사에서 이름을 떨쳤고,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은 명현(名賢)으로서 화개동에 발자취를 남겼으며,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은일(隱逸)로서 덕산에 터를 잡았고, 덕계(德溪) 오건(吳健)은 유사(儒士)로서 산청에서 노닐었으며, 도탄(桃灘) 변사정(邊士貞)과 운제(雲堤) 노형필(盧亨弼)은 행의(行誼)로써 잠시 내령대와 외령대, 마천 등지에서 시를 읊조렸다. 그 나머지 이 산에 뜻을 둔 선비들이 남쪽 . 북쪽에서 잠시 혹은 오랫동안 출입하기도 한 것들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나 또한 평생 동안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이 산에 은거하였다. 북쪽에서 산 것 30년, 남쪽에서 산 것 7~8년, 지금 서쪽에서 산 지 2년이 된다. 동쪽에는 아직 깃들어 살 겨를이 없었다. 산과 골짜기마다 발자취를 거의 남겼는데, 때론 강과 바다로 배를 타고 가서 섬사람들의 실정을 모두 알았다. 그러나 나는 호방한 선비가 아니니, 어찌 계속해서 이 산을 오르내릴 수 있었겠는가. 나는 반야봉에 10번 오르고, 천왕봉에 2번 올라 해와 달의 출몰을 우러러 보고, 산과 바다의 높고 넓음을 굽어보았다.
이 신선이 사는 곳이 침략을 당했으니 어느 날에 싹 쓸어 없애리. 섬 오랑캐가 창궐하였으니 그 치욕을 설욕할 자가 누구인가. 비록 공자가 태산에 오른 뜻을 가지고 있더라도 어찌 유자산(庾子山)이 잃어버린 고향 땅 강남을 슬퍼한 생각이 없겠는가. 검을 어루만지고 머뭇머뭇하니 마음속 생각이 끝없이 일어난다. 그런데 병든 이 몸 창가에 누웠으니 내 뜻대로 할 수가 없구나. 유람한 대강을 간략히 적어 가슴속의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날려본다. 용집(龍集) 무인년(1818) 10월, 종서(鐘西)에 숨어 사는 사람이 쓰다.
<최석기>님의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서
자료 : http://www.jiri99.com/25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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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빨간색의 글은 지리산 엄천골과 관련된 부분이며 1818년 상황에서 지리산을 읊은 글이기에 당시의 생활상이나 인문학적인 면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여겨집니다. 위의 글 중 국립 지리원이 생기기 훨씬전 1818년에 마천- 휴천- 생초를 흐르는 강 이름을 엄천이라 기록해 놓은 부분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현재 국립지리원 표기에는 임천이라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행정구역상 현재의 함양군 휴천면은 그 이전에 엄천이라 명명해 놓은 것도 귀중한 자료로 여겨지고 구형왕릉이 불교유적지 탑이다. 왕무덤이 아니다 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1818년에도 이미 왕산의 구형왕릉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글 자료가 담겨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