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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豊友會 원문보기 글쓴이: 시보네/54
“풍기IC를 빠져 나와 읍내로 진입하면서 좌측을 보면 큰 건물들이 서 있을 거야 그 뒤쪽으로 들어가 차를 대 놓고 있어 내 금방 갈게”
친구가 말하는 곳은 남원다리를 채 지나지 않은 곳이니 아마 봉현이지 싶었다. 커다란 건물은 큼직한 글자를 박음질하여 저마다 건물의 용도를 밝히고 있다.
글로벌시대에 맞춤한 사과집하장이 앞머리에 풍기가 아닌 영주라는 지명을 내밀고 있었고, 내 고향 풍기의 명물을 알리기 위한 지역 특산물의 여러 명칭이 나그네 호기심을 부추긴다.
좌측으로 차의 방향을 틀고 들어간다.
도로변 건물 뒤로 들어서니 넓은 공터 같은 길이 나타나고 키 높은 건물들이 도열해있다. OO직물, OO직물 인견도매점, OO직물 공업사 라는 입간판이 입구마다 서 있고 ‘풍기 인견 백화점’ 이라는 대형 광고판이 하늘을 이고 있는데, 군데군데 주차 해 놓은 차량들 사이엔 공장으로 통하는 문들이 꽤나 당당하다.
차에서 내린다.
그 순간, 잊을 수 없는, 지울 수 없는 유년의 기억들이 맹렬하게 튀어 오르고 나는 급하게 뒤를 돌아 다 본다. 누군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는 거 같아서다.
그냥 스쳐 가면 좋으련만, 낯 선 건물의 풍경 사이로 흐르는, 익숙한 냄새와 친숙한 소리가 기어이 마중을 나왔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신이 버리고 떠나간 옛 애인과 갑자기 마주친 여자처럼 그 마중이 당혹스럽다. 오래 전 저 소리와 저 냄새에 휘감겨 살던 숱한 장면들이 쉴 새 없이 오버 랩 되면서 걸어가는 발걸음이 자꾸 휘청거린다.
골목 어귀, 녹슨 철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벼락 같이 내려치던 베틀 소리. 걸음을 멈추고 높은 담장을 올려다본다. 외로운 첨탑에 별 보기 작은 들창처럼 그 곳에도 지붕 가까이에 창문을 달고 있지만 견고한 방음재를 사용한 듯 기계소리가 요란스럽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달라졌기에 이토록 높은 담이 필요한 걸까.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듯 현대화되고 거대해진 인견 공장을 올려다보자니 낮은 담, 엉성한 유리창에 몇 겹이나 되는 비닐을 갑옷처럼 둘둘 말고 지탱해 있던 옛 집 공장이 슬프게 떠오른다.
‘저 안이 궁금하다’
끝없이 울렁거리며 치솟아 오르는 그 옛날 어둑한 공장의 영상이 20년 전에 가라 앉아 있다가 예고도 없이 떠올랐거늘 그 때의 모습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왜 그리 궁금할까. 이번엔 창문을 포기하고 긴 창살로 이어진 대문 안을 흘끔거리는데 도대체 사람 그림자를 볼 수가 없다. 이 큰 공장을 운영하려면 베 짜는 여인들이 수십 명은 넘을 텐데, 요즘은 공장 안에다 화장실과 식수대를 설치한 걸까? 여인네들 코빼기도 안보이네 그랬다.
아는 얼굴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울까. 우리 부모님과 형제처럼 지내던 분 들 중에 한 분이라도 문 밖에 서 있는 날 알아보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사항이다. 아버지 살아 계신다면 아흔이 넘는 연세.. 이곳에 그 분들이 계실 확률이 확 좁혀지면서 나는 풀이 죽는다.
다시 창문을 올려다보며 그 안에서 베를 짜는 여인들을 상상하자 슬금슬금 살아나는 얼굴들이 있다.
언젠가 풍기 아리랑을 쓴다면 인견을 빼 놓을 수 없겠지. 그 때가 온다면 그녀들 이야기를 쓰리라. 그러면서 그 자리를 떴다.
베이비 붐 시대의 마지막 주자였던 우리들은 참 많기도 많았다.
그 시절엔 한 학년씩 올라갈 때마다 선생님이 가정환경 조사표를 나눠 주며 기재해 오라고 했는데, 부모님의 직업이 뭔지, 전축이 있는지, 텔레비전이 있는지, 심지어 재봉틀, 다리미까지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특이한 문항 하나. 지붕이 기와인지 초가인지를 묻는 거였는데 어린 내 마음에도 별 걸 다 묻는구나 그랬다.
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누런 종이로 인쇄 되어있는 조사서를 작성하는 엄마의 얼굴은 참으로 비장해 보였다. 간간히 섞어 나오는 말 중에 ‘아이고, 촌구석에 이런 걸 가진 집이 어딨어?’부터 자신의 집안 재정 상태를 상, 중, 하 하나에다 동그라미를 쳐야 하는 문항에 부딪치면 몇 번이고 이마를 찡그리며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친구들이 고무신을 신고 다닐 때 반짝거리는 빨간 에나멜 구두를 신고 다녔던 나는 우리 집이 부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엄마는 늘 가운데 중에다 동그라미를 그렸다. 보고 있던 내가 마땅찮은 표정을 지으며
조사서를 넘겨받은 내가 상단 좌측을 확인하면 엄마의 국문 실력을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부모의 직업란이다. 농업, 상업, 공업인지를 묻는 그 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입 하나가 범처럼 무서울 때였다.
전국의 농어촌 처녀들이 보따리 싸들고 서울 구로 공단이나 동대문으로 쏟아져 들어가 하루 16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나마 타 지역보다 아리따운 처자들을 도시로 뺏기지 않아도 되는 다행한 일이 유지 된 것은 바로 풍기 직조공장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정감록이 민간 신앙으로 자리 하면서 조선 제 십 승지 중 하나였던 ‘풍기’를 찾아 내려온 이북 사람들이 ‘수직기’ 로 시작한 직물 가내 공업을 발전시키면서, 도시와 수 백리 떨어진 작은 마을에 공장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소백산이 사과와 인삼을 내 고향에 선물로 주었다면 인견은 사람 손으로 빚어진 선물이었다.
부모님은 뼈가 부서져라 일을 하며 베틀 수를 늘려갔고 그럴 때마다 집에는 베 짜는 처녀들이 하나 둘씩 늘어갔다. 울 엄마 역시 타지에서 이곳으로 와 베를 짜던 처녀였다지. 그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하루에 두 번, 교대 시간과 점심시간 때만 누릴 수 있는 고요함의 절정. 어쩌면 늘 철커덕거렸기에 그 짧은 고요가 더 절실했는지 모른다. 그 때는 걸핏하면 정전이 되곤 했는데 갑자기 찾아 온 보너스 같은 고요가 좋아서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배시시 웃곤 했다. 공장안에선 엄마야!! 비명 소리가 나는데, 갑작스런 정전으로 와장창 실을 끊고 잔인한 후유증을 안겨준 채 튕겨져 나가떨어진 북을 찾으면서 깊은 한숨을 내 뱉는 또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 때는 철들지 못한 아이였다.
드르륵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둑한 공장은 새코롬한 쇠 냄새와 들코롬한 기름 냄새로 뒤섞여 특유의 향기를 내뿜었고 흡사 백열전등을 늘어뜨린 커대한 동굴 같기도 했다. 그 곳은 바깥 세계와 단절 된 또 다른 공간이었고, 햇빛이 창조하지 못하는 또 다른 생물의 탄생지였다. 기름에 길이 든 흙바닥은 검은 모르타르를 발라 놓은 듯 반질반질 거렸고, 마치 소리폭포가 쏟아지고 있는 거대한 세탁통으로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숙련된 언니는 혼자서 베틀 7,8대를 혼자 다루었고, 조금 미숙한 언니들은 5대 정도를 맡아서 베를 짰는데 간조 때가 되면 늘 한두 대 더 베틀을 짜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 베틀기와 직원을 관리하고 있는 기사일이나, 해사기를 조정하고 나름을 하는 일은 남자들 몫이다. 늘 남녀 비율은 3대 8정도였는데, 수시로 얼굴이 바뀌곤 했다.
일 밖에 모르는 아버지는 일 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정신없이 밀린 달랭이를 빼곡하게 바구니에 채워 베틀마다 돌아다니며 북통에다 꽂아주면 언니들은 내 볼을 쓰다듬고 하얀 미소를 띄워주곤 했다. 정말 신기했던 건 폭발할 거 같은 그 소리폭포가 시간이 지나면서 감미로운 자장가처럼 몸에 착 달라붙는 거였다. 그 폭포 속에서 언니들은 귓속말 하듯이 나직나직하게 서로 대화를 했고 나까지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새벽 네다섯 시쯤 되면 여기저기서 꾸벅꾸벅 조는 언니들 모습이 보인다. 실이 다 풀린 북을 제 때 새 달랭이로 갈아 끼우지 않으면 빈 북이 천을 짜는 게 아니라 발을 짜 듯 날실만 흐물흐물 감기기 때문에 기사 아저씨는 졸고 있는 처자들을 깨우러 돌아 다녀야 한다. 그런데 유독 어떤 아가씨는 깨우지 않고 직접 베틀을 세운 뒤 익숙한 솜씨로 북 실을 갈아 끼워주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아마도 그 처녀에게 연정을 품지 않았나 싶다.
긴 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온다. 기사아저씨는 “어어이!!” 큰 소리를 지르고 팔을 번쩍 든다. 그리고 전기 소켓에 손을 갖다 대는 시늉을 하면 언니들은 베틀을 멈추기 시작한다. 철컥철컥 하는 소리가 찰칵찰칵 하다가 끝엔 딸깍딸깍 소리로 변한다. 모조리 멈추어선 베틀 뒤엔 기계를 움직이게 하는 피대만 윙윙 돌아가는데 고음의 소프라노급베틀 소리보다 훨씬 웅장하고 묵직하다. 드디어 전선이 끊어지면서 피대는 휘힝! 돌아치는 말울음 소리를 지르며 사라지고 그 순간 동굴 안은 적막이 쌓이는 것이다.
그때부터 처녀들은 더 바빠진다. 고장 나지 않고 밤새 기계가 잘 돌아 간 언니들은 피곤한 얼굴위에다 그래도 미소를 입히지만, 북이 튀어 와장창 실이 끊어지거나 말썽을 일으킨 베틀을 세워 놓은 언니들은 교대자 얼굴보기가 괴로운 거다. 필을 재고 후다닥 집에 돌아가 밥 한 술 먹고 다시 공장으로 와 끊어진 실을 이어야 하는데 그게 예삿일이 아니다. 참빗같이 촘촘한 바디 사이로 쇠 비녀를 꽂아 가느다란 실을 얹어 빼준 다음 일일이 참깨만한 종강 구멍으로 연결을 해야 한다. 손과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인데다 늘 반쯤 구부린 자세로 일을 해야 하기에 고통스럽다.
그런 작업을 거뜬히 해치우면서도 도대체 불평조차 포스라운 소리로 치부했던 그녀들 내부는 무엇으로 채워진 걸까.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강인하게 만들었을까. 어떤 이는 학교 교실에서 시를 읊으며 미래를 꿈꾸고, 어떤 이는 시커먼 기름 꽃을 묻히며 현실을 사는데, 과연 어느 시점에 가서야 서로가 같다고 인정 하게 되는 걸까. 왜 나는 그녀들이 훨씬 위대했노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마치 눈의 요정이 밤새 뿌린 눈을 쓸어 담아 차곡차곡 눈 시루떡을 만든 것처럼 도투마리를 풀 때마다 소복소복 쌓여가는 하얀 천들. 그녀들의 동맥 같은 시퍼런 꿈이 공장 바닥에 인견으로 내려앉을 때마다 내 고향은 조금씩 몸을 일으켰으리.
세상은 늘 그렇듯이 양면의 얼굴을 하고 진행한다.
툇마루 한 쪽 끝에 고개를 숙이고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앉아 있는 여자 아이는 바로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아닌가. 그 순간 도로 방으로 들어가 나가지도 못한 체 어른들 대화가 끝나기만 기다리는 내 심장이 자꾸 벌렁거렸다. 도둑질하다 들킨 아이처럼, 못 볼 걸 본 아이처럼 그 친구의 출현은 충격이었다. 얌전하고 얼굴도 아주 고운 친구였는데 당연히 다른 중학교에 입학했으리라 믿었던 나는, 교복 대신 사복에 긴 머리를 하고 있는 그 아이 모습이 낯설었고, 그 많은 공장 중에 하필 우리 집을 찾아 온 그녀를 어떻게 마주 봐야할 지 걱정스러웠다.
한 동안 피해 다니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막상 얼굴을 부딪치자 담담하게 웃어주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 우리 집에서 베를 짰던 그 친구는 키가 큰 해사기 다루는 기사의 각시가 되어 떠나갔다. 그녀 나이 고작 열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내가 고등학교 교복을 입었을 때 한복을 입고 떠나간 친구. 여릿여릿한 아픔으로 기억되는 그녀는 내 추억의 진열장 안에 늙지도 않고 때 묻지도 않은 어린각시탈로 보관되어 있다. 때때로 그녀가 보고 싶기도 하고...... 차라리 안보고 싶기도 하다.
차이는 게 돌멩이고, 넘치는 게 여자라, 코 밑에 까끄름한 수염이 올라오는 풍기 남자들은 덩달아 바빴다. 교련복 바지에 줄 세우고 교련 모자 빼뚜름하니 머리통에 얹고 예쁜 공장 아가씨가 있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교대하고 나오는 그녀를 자전거 뒤에 태우지 못해 안달을 했다. 꼭 혼자 하지도 못하고 응원군 친구 한명을 달고 다니다가 연애에 성공하면 언제 봤냐는 듯 친구는 내팽개치고 아가씨 출퇴근 기사를 자청하며 씽씽 페달을 밟으며 급하게 읍내를 탈출한다. 어쩌다 기다리는 골목길에서 그녀와 함께 일하는 남자 직원과 부딪치면 못 본체 고개를 돌리고 능청을 떠는데, 대단히 꼬라지가 난 남자 직공은 티꺼운 눈빛으로 그 남학생을 노려보다가 ‘에이 씨’ 하면서 손에 든 연장을 내리치고 집지키는 강아지를 걷어찼다. 퇴근하는 아가씨가 쌩 하니 지나치면 뭐라 말 한마디 못한 체 한숨만 내쉬고.
비록 토막잠을 자고 책보다 인견장부를 목숨처럼 여겼던 그녀들이지만 맹렬한 청춘의 욕구를 잠만 재울 수 없는 법. 틈이 나면 서너 명씩 모여 풍기 극장, 동보 극장으로 영화도 보고, ‘선데이 서울’ 돌려 보며 바깥세상을 키득거리며 짐작도 하고, 연애도 했다. 나는 언니들 손에 이끌려 ‘별들의 고향’을 몇 번이나 보았고, 수많은 연애 영화를 섭렵하면서 친구들보다 훨씬 빠른 연애학 개론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아홉시만 되면 쇠사슬달린 자물통을 대문에 거는 무서운 아버지 땜에 담벼락에 붙어서서 망만 보다가 화장실 가는 언니들 도움으로 담을 타 넘어 간신히 들어오기도 했다. 재미있는 연애 소설책을 구하면 서로 바꿔보기도 하고 밤참으로 먹는 김치 볶음밥을 함께 둘러 앉아 퍼 먹기도 하면서 누가 누구랑 연애를 하고 누구누구는 삼각관계에 속상해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기도 했다.
조금 머리통이 굵어지면서 건방이 들었다.
풍기의 여름을 말하면서 시냇가 자맥질을 빼 놓으면 그것은 가운데 구멍이 그려져 있지 않은 과녁과 같다. 앞뒤로 흐르는 남원다리와 뒷창락은 풍기 사람들의 대중 목욕탕이자,삶의 충전소였고, 낭만의 영화 세트장이었다. 지금도 뒷창락 개울 차가운 여름 밤 목욕을 잊을 수 없다. 도저히 잊을 수 없다. 얼굴은 가무끄름한데 속살은 어찌 그리 백옥 같은지, 달빛에 드러나는 그녀들의 봉긋 솟은 가슴은 누구도 손 댈 수 없는 성스러운 열매 같았고, 젖은 인조 속바지 사이로 드러난 그들의 둔부는 달빛이 키운 초가지붕 위 뽀얀 박과 같았다. 벗은 몸으로 그녀들 등에 바짝 매달려 물살을 가르면, 매끈거리는 살결의 촉감과 부드럽게 애무하는 물결이 부딪치면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평화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것은 생이 가져다 준 아주 멋진 경험이었다.
나는 지금껏 살아도 그녀들처럼 아름다운 몸매를 본 적이 없다. 비키니 입은 날씬한 해변의 아가씨가 매끈거리는 물고기 같다면 개울가 물속에서 달빛을 조명삼아 자맥질하는 그녀들의 나신은 영혼이 깃든 달맞이 꽃이었다. 풍기는 그녀들이 있어서 행복했다. 뒷창락도 행복했다.
십여 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 대부도에 있는 작은 해변 마을을 갔다가 늦은 밤에 혼자 수영을 한 적 있었다. 보름달이 떠 있어 어둡지 않았다. 뻘을 갖고 있는 바닷물이건만 신기하게도 파도가 없이 잔잔했다. 흡사 바닷물을 끌어다 가둬 둔 드넓은 호수 같았다. 조금씩 조금씩 헤엄쳐 들어가며 오래오래 자맥질 했다. 마을과 꽤 멀리 떨어졌다고 느낀 지점에서 나는 입고 있는 수영복을 물속에서 벗어 버렸다. 그것을 팔목에 감고 조용히 부유하며 물살에 몸을 내맡기고 가만히 달을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울 때였다. 저 바깥엔 꽤 많은 사람들이 일행이라는 명분으로 함께했지만 나 홀로 이방인 같이 느껴지고 외톨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기존의 가치관으로 학습된 자아와 그것을 견디지 못해 하는 또 다른 자아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수영복을 팔목에서 풀어 버리고, 그것을 흘러 버리고, 나도 몸을 놓아 버리고 싶은 충동에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다.
그러는 중에.....
그 때 나는 알았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풍기 인견이 전국 유일한 생산지로 소문이 나고 인정을 받으면서 직조 공장은 점점 늘어났고 규모도 커져갔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니 베 짜는 처녀들이 자연 줄어들었고 공장 집마다 숙련된 여직원을 구하지 못해 안달이 났다. 유능한 기사의 명성은 자신이 확보할 수 있는 여직원 숫자가 몇이냐에 따라 달라졌다. 그녀들은 대우가 나아지고 급여도 올라가면서 웬만큼 가계가 기지개를 펴자 알뜰히 모아 저축도 하고 사업 밑천도 만들면서 지역의 중상층으로 발돋음 했고, 근면과 성실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증명해 보였다. 자본주의라 해서 경영주만 성공한다는 마르크스 이론이 다 맞는 건 아니라는 것도 입증해 보였다.
어디든 선구자가 있어야 한다.
백년의 가난과 무지함을 단 십여 년 만에 뒤집어버린 국가의 저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를 묻는 질문에 ‘한강’ 을 적어선 안 된다. 대통령 이름 하나만 적어서도 안 된다. 똑똑한 경영자 이름을 적으면 어딘가 미흡하다. 하지만 거대한 공룡의 잠을 깨운 재봉틀 소리, 망치 소리, 베 짜는 소리의 주인공들을 말한다면 적어도 반론을 제기할 자는 없을 것이다.
모르겠다.
그들이 제2의 고향으로 먼먼 소백산 귀퉁이로 쏟아져 들어 왔을 때 등짝에 업고 온 자신들의 고향이 얼마나 사무쳤겠는가. 먹고 살기위해 시작한 ‘수직기’ 가 명민한 특산물로 자리 잡고, 베 짜는 처녀들 이라는 아름다운 일화가 탄생되고, 내가 밥을 먹고 살았으며 그녀들이 터를 잡고 살고 있으니 일단은 성공신화라 해도 되지 않을 런지. 특이한 지역민 구성을 배경으로 하고도 수십 년째 평화로운 조화가 이루어지는 내 고향. 일 승지다운 정승감 심성을 가진 풍기 사람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옛길을 보러갔다가 우연히 ‘블리스’ 라는 인견 매장에 갔는데, 그 옆에 있는 인조공장 안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엄청난 숫자의 베틀이 쉴새없이 돌아가는데, 사람이 베를 짜는게 아니라 레이저가 베를 짜고 있었다. 120대를 단 네 사람이 맡아서 돌리는데 그게 컴퓨터 덕분이란다. 우지끈! 하고 내 상상이 부러지면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렇다면? 여름은 인견의 계절이다. 언제 인견 박물관을 조용히 찾아가보고 싶다.
정말, 애 많이 썼노라고, 당신들의 노고를 우리 모두 잊지 않고 있노라고. 혹시 마음 상하고, 슬펐던 기억이 남아 있다면 잊으라고. 다들 똑 같이 아프고, 힘든 상처 한 두개쯤은 다 갖고 산다고. 나는 당신을 위로하러 온 게 아니라 당신들에게 위로 받고 싶어 여기에 왔노라고,
그리고나서 두 번째 인견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이경진 에세이 모음 . 풍기 아리랑1...금선정, 옛길
◈사진에 마우스를 올려 놓으면 사진 설명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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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며칠 전 24회 동문 (우병흥) 부인이 정성스럽게 그리고 이쁘게 만들어 보내온
꽃무늬 인견 원피스를 입고 이 감동의 글을 읽었어요
늘- 고향의 아련한 추억과 애틋한 정서를 담은 좋은 글 감사드리며
경진님은 이길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