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참판댁, 노비, 김개남, 동학혁명, 박경리
[성제봉 & 최참판댁 & 고소산성 ] 지도
신라시대 고소산성 축성 시기는 약 1550년 전.
그 신라시대로부터 약 1400년 후까지 시간여행.
고소산성과는 시대적인 배경이 또 다른 최참판댁.
1550년 전까지 넘나들며 타임머쉰을 타고 바라본 지리산.
지리산에 기대어 살았던 사람들의 옛모습이 담긴 최참판댁.
최참판댁을 통해 지리산 자락 사람들의 삶을 재조명해 보자.
하동 군청과 한국 철도공사 자회사인 KTX 관광레저의 상품.
매주 금요일 정기 운행하는 서울-하동 간 직행 관광 전용열차.
마치, KTX는 세월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 달리는 타임머쉰 같다.
쌍계사, 화개장터, 섬진강을 비롯한 천년 야생차 시배지 관광.
하동 명물 재첩국, 최참판댁의 판소리 관람, 쌍계사 자연 녹차
매주 금/토 무박, 어른 6만 9000원. KTX관광레저 (02) 393-3100.
관광전용열차 : 서울→하동역→불소유황천 온천욕→악양면 평사리→최참판댁 관광→화개장터→쌍계사 차 문화센터→구례역 출발→서울.
.......................................................
.......................................................
최참판댁은 KTX 관광 상품으로 부상될 만큼 인기 높다.
최참판댁은 소설 토지의 배경무대이자 하동의 관광 명소.
소설 줄거리는 대지주 최참판댁 가문에 얽힌 비화로 시작.
....................'토지' 소설 줄거리........................
절에 불공 드리러갔다가 겁탈 당한는 최참판댁 윤씨 부인.
1862년 갑오 농민전쟁을 일으킨 주역 김개남은 쫓기던 신세.
'동학 접주' 김개남는 참수되고 윤씨 부인은 그 아들을 잉태.
'대지주이면서도 동학난에서 화를 모면한 최참판댁.'
어쩔수 없이 내연관계였던 김개남의 보이지않는 후광.
그 생모 젖 한번 못 빨고 핏덩이로 버려져 성장한 김환.
동학에 참여했다가 몸을 숨기려 최참판댁 하인이 된다.
서로 모자지간인 지 모른 채 한집에서 지내는 기구한 운명.
김한은 윤씨 부인 아들 최치수의 아내 목숨을 우연히 구한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김한은 그 별당아씨와 사랑을 하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신분차이를 넘어 지리산으로 사랑의 도피행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루게 해 준 윤씨 부인.'
핏덩이로 버렸던 자식을 또 다시 보내는 기구한 운명.
그렇게 보내며 끝내 아들에게 아들이라 못 부르는 어머니.
훗날, 윤씨부인 사후에야 김한은 생모 무덤을 찾아가 통곡.
'한편, 최치수는 아내가 집안 하인과 야반도주하자 울분.'
더구나, 김한의 출생 비밀을 알자 어머니 윤씨 부인을 원망.
최참판댁 하녀인 귀녀는 최참판댁 재산을 노려 최치수를 유혹
최치수가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성불구가 된 비밀을 알게 된다.
'강포수 씨를 받고 김평산을 꼬드겨 최치수를 교살한 귀녀.'
귀녀는 최치수 아이를 잉태한 척하며 유산을 가로채려 한다.
그러나 그 음모가 윤씨부인에게 들통 나 귀녀는 사형 당한다.
그후 윤씨 부인 역시 마을을 휩쓴 콜레라(호열자)로 병사한다.
최참판댁 재산을 강탈하려던 조준구는 서희를 몰아내고
마을 사람들을 분열시키며 일본인 힘을 빌려 재산을 강탈
여기에 더해 서희와 곱추인 아들 병수를 결혼시키려는 음모
서희는 충직한 하인 길상과 함께 용정으로 탈출한다.
서희는 윤씨 부인이 남긴 금은괴를 자본으로 장사로 성공
하인이었던 길상과 혼인하고 잃어버린 재산을 모두 찾는다.
..................................................................
토지는 국권상실, 봉건 가부장 체제와 신분 질서의 붕괴,
1900년대와 1910년 우리 사회 격변기 시대가 소설의 무대.
3, 4부는 1920~1930년대, 특히 3 1운동 실패 후 일제 치하.
민족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독립 운동의 여러 노선을 제시
지식인의 사상적 경향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시도.
.................................................
.................................................
하동포구 팔십리에 물새 나르고,
하동포구 팔십리에 달이 뜹니다..."
영호남을 잇는 뱃길의 중심지 '하동포구 팔십리.'
옛 길손들이 지나칠 때마다 탄성을 자아냈다는 곳.
하동포구 팔십리 길을 달리다가 악양면에 이르면
평사리 공원을 지나 소설 土地(박경리 作)의 무대
최참판댁을 들러 소설속 주인공이 되어보는 즐거움.
'최참판댁 서희 아씨 또는 그녀와 결혼한 머슴 길상.'
평사리가 위치한 악양은 중국 악양과 닮아 붙여진 지명.
평사리 강변 모래톱은 '금당'이고 그 안 호수는 '동정호'
최참판댁을 가는 구불구불한 길과 옛돌담을 덮은 담쟁이
그 뜰안에서 풍요로운 옛고을을 내려다보는 평사리의 풍경
SBS 대하 드라마 토지의 촬영 현장이고 세트장이기도 한 곳.
2004년~2005년에 방송한 드라마 <토지>가 촬영세트장.
촬영을 위해 최참판댁 아래로 장터가 새로이 재현된 곳.
장터의 집들은 모두 20세기 초, 평사리 모습으로 꾸몄다.
주변 가옥들도 초가를 얹어 그 시대 정취를 느낄 수 있다.
....................................................
....................................................
최참판댁의 대문에서 내려다보는 악양 들판의 풍경.
낮은 언덕 산자락에 자리잡은 고향같은 평사리 마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상평마을 2,880평의 부지
건평 110평 18억원을 들여 새로 단장한 최참판 댁
안채 사랑채 별당채 행랑채 초당과 사당까지 갖췄다.
이조시대 한옥은 국법에 따라 99칸을 넘지 못했다.
오늘날도 연면적 100평이 넘으면 호화주택으로 간주.
1칸은 사방 6척으로 사방 6자인 1 평보다는 조금 작다.
최참판댁은 가난한 이웃을 배려한 가옥구조가 이색적.
나즈막한 굴뚝은 밥짓는 연기를 가리려는 목적의 구조.
가난한 이웃이 그 연기를 보고 배고플까봐 배려한 의도.
'구멍 뚫린 뒤주로 가난한 이웃에게 쌀을 나눠준 전통.'
굶주림을 모면할 만큼 뒤주 구멍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쌀.
오늘날 부자가 갖춰야할 덕목을 말없이 가르쳐 주는 가옥구조.
평사리 최참판댁은 대하소설 '토지'(박경리 作)의 배경무대이다.
박경리는 경남 통영에서 1926년 10월 28일 출생
1945년 진주여고 졸업후 결혼했으나 남편은 납북
한국전쟁 이후 홀로된 그녀는 창작활동에만 전념.
토지는 집필기간 25년, 2백자 원고지 3만 2천장, 총 5부 16권
토지를 통해 평사리와 간도, 서울과 일본을 잇는 광활한 무대
'''''''''''''''''''''''''''''''''''''''''''''''''''''''''
...........................................................
'토지 소설 속 주인공인 서희와 길상이 살던 평사리.'
지리산 남면 악양골 기슭의 평범한 산골마을이었던 곳.
지리산 자락에서는 문수골 피아골 화개골보다 넓은 들판.
30 만평이나 되는 악양 평사리 들판이 소설 토지의 배경무대.
'지리산과 섬진강 혜택을 동시에 받은 평사리.'
그곳 마을의 모든 길은 최참판댁으로 이어진다.
현재 이 마을의 초가 50 채는 토지 촬영 세트장.
사람이 살고 있는 10 여 채는 원래 평사리 마을.
'마을 칠순 노인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벌려놓은 좌판.'
곶감, 도라지, 토란대, 더덕, 늙은 호박 등이 옹색해 보인다
노인들의 거친듯한 경상도 사투리가 드라마의 한 장면과 같다.
돌담으로 이어진 고샅길 끝, 가장 높은 터에 최참판 댁이 있다.
마을에서 가장 큰 최참판댁은 평사리에 있던 집이 아니다.
소설 속의 공간을 현실에 되살려 새로 공들여 건축한 한옥.
관리인이 매일 쓸고 닦아 마치 안주인이 살고 있는 듯 하다.
'길상이 살던 행랑채, 최참판댁 마지막 당주 최치수 사랑채.'
최치수의 이복 동생인 김환과 야반도주한 별당아씨가 머물던 별당
아씨 서희와 머슴 길상이 어릴 때 함께 놀며 자랐던 최참판댁 정원.
최참판댁 솟을대문을 나서면 발아래 펼쳐지는 기름진 악양들판의 풍경
'서희가 그토록 되찾으려 했던 평사리의 토지.'
박경리 선생이 25년간 집필한 5부 16권의 ‘토지’
4만 장의 원고지에 600 만 자로 이뤄진 대하소설.
봉건질서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한 한말에서 일제시대
1945.8.15 광복에 이르기까지 60년 소용돌이 속 격변기.
한많은 삶을 살아가야 했던 여인의 애증을 그려낸 작품.
지리산 일대는 발걸음 닫는 곳마다 소설 같은 역사 현장.
평사리에서 가까운 고소산성은 백제와 나당연합군 격전지.
20∼30분 정도만 더 발품을 팔면 성벽까지 올라갈 수 있다.
.......................
소설 토지와 평사리.
.......................
평사리는 상평과 하평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지금은 상령과 외둔을 합쳐서 평사리라 하고,
하평과 대촌을 합쳐서 봉대리로 행정지명 개편.
평사리는 박경리 대하소설『토지』의 배경무대.
상평마을은 악양들판을 바라보는 산자락에 위치.
돌담길과 어우러진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정겹다.
마치 고향에 온 듯 편안함이 우러나는 상평마을.
구한말엔 악양 들판의 섬진강까지 배가 들어왔다.
상평마을 가는 길목에 높이가 약 27m 되는 팽나무.
이조시대 부사 전천상이 위민정(慰民亭)이라 명명
아직도 마을사람 쉼터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토지는 구한말에서부터 시작해 8·15광복까지,
민족의 일대 혼란기를 담아 내고 있는 대하소설
평사리를 배경무대로 하고 있는 사연은 따로 있다.
박경리의 딸이 탱화 수집차 동행했다가 발견한 평사리
'토지'의 배경무대로 점찍은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평사리는 토지 소설의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먼발치에서 평사리를 스쳐나갔을 뿐
정작 평사리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당시 큰 부잣집 최참판댁이 인근에 있었는데,
역병으로 식솔들을 잃어 추수하지도 못한 채
넓은 들판의 곡식을 버려 두었다는 말을 듣고
토지 소설의 작품 구상에 도움이 되었다 한다.
작가가 당시 전해들은 부잣집은
악양 면소재지에서 2km쯤 떨어진
상신마을의 조부잣집이라고 한다.
150년 전에 지은 집이지만,
네모 돌담 안 대지가 천 평
뒷곁의 대나무 숲, 앞뜰 연못
토지속의 최참판댁과 흡사하다.
평사리가 작품의 무대라 하지만
정작 소설속 평사리와 다른 정감
토지 소설에 등장하는 평사리는 꾸며낸 공간.
그러나, 실화인 듯 생생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많은 사람을이 문학기행 삼아 그곳을 찾을 만큼.
....
쌀.
.....
최참판댁은 지리산 일대의 대표적인 만석꾼 부자
만석(萬石)꾼은 일년에 벼 만섬 가량 수확하는 부자.
쌀은 옛부터 화폐를 대신하는 물물교환의 기본적 잣대.
쌀은 동남아 저지대 국가 민족들의 주식.
쌀은 불교처럼 오랜 세월간 동쪽으로 전파
쌀과 불교와는 밀접한 문화적인 관련이 있다.
'즉, 동남아 저지대 민족들의 주식인 쌀.'
쌀 미(米) 한자는 벼이삭을 본뜬 상형문자
八十八로 파자하면 노동집약적인 벼의 특성
(생산하는데 88번의 손질이 필요하다는 뜻).
노동집약 특성 때문에 마을 공동체가 형성
계급사회가 형성되고 빈부격차 발생의 요인
지주층과 소작층의 분화로 노비제도 원동력.
우리나라에서 쌀과 관련된 사건으로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
그해 6월 5일 선혜청 도봉소(都捧所)에서
구(舊)훈련도감 군병에게 급료로 지급한 쌀
선혜청 고직의 농간으로 겨와 모래가 섞였고
양도 절반밖에 안되 분노한 병사들이 이에 항거.
쌀은 혁명 폭동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한반도 문화의 밑바탕을 형성해 온 원동력.
........벼농사에 관련된 말들...........
못자리는 '볍씨를 뿌려 모를 기르는 곳.'
모는 옮겨심기 위해 가꾸어 기른 어린 벼.
못자리 밖에 난 모는 '벌모’
나중에 쓰려 더 키우는 '덧모'
못자리에 난 어린 잡풀 ‘도사리’
모내기를 위해 모판에서 모를 캐는 일 ‘모찌기’
이 모를 심기 좋게 서너 움큼씩 묶은 단은 ‘모춤’
모 심을 때 일정한 간격마다 표시를 한 줄을 ‘못줄’
일하다가 잠깐 쉬면서 먹는 음식을 ‘새참’또는‘참밥’
농부가 끼니 밖에 일하면서 때때로 먹는 음식을 ‘곁두리’
논밭에서 김을 맬 때 집에서 가져다가 먹는 밥은 ‘기승밥’
밥먹기 전에 첫술은 떼 귀신에게 바치는 음식‘고수레’
모를 옮겨 심은지 4~5일후 파랗게 생기 띤 상태‘사름’
모내기후, 잡초 ‘김’을 뽑는 일을 ‘김매기(논매기)’
특히, 논에 난 피를 뽑는 일은 ‘피사리’라 하고
벼 이삭이 나오려고 대가 불룩해지는 현상을 ‘배동’
벼가 알이 들 무렵‘배동바지’에 패어난 이삭‘패암’
배동바지와 패암 때 논에 대는 물을 ‘꽃물’이라 한다.
익은 벼를 거두어 타작하는 일은 ‘볏가을’
곡식의 이삭털기‘타작’‘마당질’ ‘바심’
아직 덜 익은 벼를 '풋나락’(남부지방 사투리)
가을에 농작물이 잘되고 못된 상황을 ‘작황(됨새)’
그해 쌀은‘햅쌀’이고 찧기 위해 말리는 벼를 ‘우케’
..................................................................
현재 인류의 주식 중 밀, 쌀, 옥수수가 3대 주종
옥수수 원산지는 아메리카이고 대부분 가축 사료용
옥수수를 제외한다면 밀과 쌀이 세계 주식량 2대 맥
지구 육지가 한 덩어리일 때 벼는 습열대에서 시작
인도대륙은 마다가스카르와 남극에서 9천만년 전 분리
인간은 야생벼를 화전이나 원시적 천수전(天水田)에 재배
기원전 3000년대 양자강 중류에서 하류로
기원전 3000~2400년 용산문화 시대에 발전.
기원전 2000년대 홍수제어(洪水制御)가 시작
주(周) 시대(B.C.1122~255) 말기 철제 농기구
황하 유역에서 대규모 관개공사가 추진되었다.
동주(東周)시대(B.C.255~249)에는 쌀이 주식화.
경남 김해패총 탄화미(炭化米)는 1~2세기 것인듯
충남 부여 부소산 것은 백제말기(1300~1400년 전)
벼는 아프리카, 남아메라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그리고 오세아니아(대양주)의 습지대에 널리 분포
벼의 재배는 고대 인도에서 기원전 1500~2000년경
중국 동남아(말레이지아, 필리핀, 인도네시아)로 파급
재배 기술은 중국에서 발달해 동남아로 전파되었다 한다.
인도, 부탄, 네팔, 미얀마 북서부, 라오스 등을 통해 전파
한반도 벼 재배기술은 중국 대륙으로부터 유래.
황하지역에서 출발해 만주를 거쳐 들어오는 경로,
양자강 하구에서 한반도의 남부로 상륙하는 경로.
일본 규슈를 거쳐 한반도 남단의 김해 지구로 진입
북방설은 산동반도에서 평안도 황해도로 유입설
남방설은 김해와 신라 고분에서 탄화미 출토 근거
벼는 불교처럼 동쪽으로 이동하며 전파된듯 추정된다.
쌀과 벼에 관한 고대 인도의 명칭은 '살리'와 '브리히'
이것이 티베트, 몽고, 만주를 거쳐 우리의 고어인 브살
'브살'은 '베' 또는 벼와 살의 합어(合語)일는지는 모른다.
한편으로 찹쌀의 차는 '차울'(벵골·아샘의 말),
멥쌀의 메는 중국 강남 '미'(粳米갱미)에서 유래
'입쌀'은 '브살'이 '읍쌀 입쌀 닙쌀'로 전와된 것
나락은 곡식 옛말인 낟에서 낟알, 날, 나락으로 변화
또 제삿밥은 '메'이고, 옛말에 진지(밥)를 뫼라 한다.
.....,......벼(나락)와 쌀의 어원..............
인도말 '브리히'가 벼, '니바라'가 나락의 어원
인도어 '사리' 퉁구스어 '시라' 우리나라에서 '쌀'
이조 후기 '동이록'에 벼를 '라록'이라 기록
이는 신라시대 관리 급료를 벼로 주었기 때문
신라 봉록이란 말에서 '나록'이 '나락'으로 변천
........................................................
쌀은 삼국시대 백제에서 제일 먼저 대중화된듯
벼농사의 발달로 빈부 격차가 심화된듯 보인다.
아울러, 막걸리는 벼농사의 소산물로 추정된다.
........
막걸리.
........
옛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전통주
곡류를 발효시켜 여과하지 않은 6~8도 의알코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탁주 기록은 삼국사기.
막걸리 이름은 고려 때 막 거른 술이라는데서 비롯
누룩을 배꽃이 필 때 만든다고 하여 이화주(梨花酒)
그외 맑지 않게 탁하기 때문에 탁주(濁酒)라 불렀고
식량 대용, 갈증 해소로 농부들이 애용해 농주(農酒).
막걸리는 탁하게 양조한 흰 백색의 주류로서
단맛, 신맛, 쓴맛, 매운맛, 떫은 맛이 어울려
적당한 감칠 맛과 청량감이 있어야 좋은 막걸리.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영고, 동맹 때 춤 노래와 함께 즐겼다는 삼국사기 기록.
노비(奴婢)
전근대 사회에 존재했던 최하층 신분의 하나.
노(奴)는 남자종, 비(婢)는 여자종을 말한다.
오랫동안 가혹한 조건 하에서 존속했던 신분층
노비는 원시 공동체사회의 붕괴 과정에서 발생
적대적 집단 또는 전쟁 포로를 노예로 부린 것.
고조선의 범금팔조(犯禁八條)에 있는 노비 규정.
물품을 훔친 자는 그 피해자 집의 노비로 삼는다
그 신분에서 벗어나려면 막대한 돈을 물어야 된다
부여의 법률에서도 살인자의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삼국시대에는 중범죄자 채무자 극빈자가 노비로 전락
그러나 구체적인 노비가 존재한 시기는 고려시대 이후.
노비의 증가는 집권층에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이조시대 노비는 고려 때처럼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
공노비는 의무부담이 선상 또는 납공 2가지로 구분된다.
선상은 일정기간 관아에서 신역을 제공하는 것,
납공은 신공(身貢)으로서 면포 등을 상납하는 것
한편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된다.
솔거노비는 상전 가족의 일원으로 생활하는 하인
인격과 몸까지 모두 상전의 소유물로 간주되었다.
외거노비는 상전으로부터 독립된 가호와 가계를 유지
행동의 제한을 크게 받지 않는 등 그 예속도에서 차이
그대신 상전에게 매년 신공 또는 소작료를 받쳐야 했다.
노비는 사회적·법률적으로 극히 낮은 처지였다.
초기에 노비는 상전에게 살해되거나 순장되기도 했다.
즉 상전이 노비를 지배했고 생살여탈권도 존재했던 것.
고려 이조시대 부모의 어느 한쪽이 노비인 경우
그 자손은 대대로 노비신분으로 규정되는 세전법
양천제 하에서 노비에서 면제는 원천적으로 차단
그러나 16세기 이후 양인으로 신분상승도 가능했다.
1801년(순조 1) 6만 6,067구 공노비 혁파가 있었다.
1894년(고종 20) 갑오개혁으로 공,사노비제가 폐지.
..........................................
..........................................
이조시대 노비는 사대부 가문 사유재산이었다.
노비는 신분제 사회의 최하층 집단으로 흔히 종.
노비 제도는 전쟁포로, 채무, 형벌에 의해 생겼다.
이조시대 외국에서의 이민 또는 귀화한 유민,
이조시대에 잦은 사화로 인한 역적 가문의 후손.
신분상 사회혼란을 막으려 삼족을 멸하기도 했다.
이조 때 노비 신분은 대를 이어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이조시대 노비는 국가나 개인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조세 부담이나 국방 의무는 없었고 주인에게만 복종
주인을 위해 각종 신역과 노동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국가 소속의 공노비는 소속된 관아에서 일했고
16에서 60세까지 1년에 6개월간 육체노동 의무
이조 후기로 갈수록 노동력 제공보다 면포 납부
노비는 대부분 농업을 생업으로 하였으므로
6개월간 노동력을 빼앗기면 노비 가정은 파탄.
노비의 경제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면포 대납제도.
'노비가 돈을 벌어 국가에 바칠 포(布)를 마련.'
따라서, 노비들은 양인 신분으로 신분적인 상승
경제적인 여건의 개선을 가능하게 했던 제도였다.
사노비는 국가에서 통제할 수 없는 사대부 소유믈
이조 초기에는 국가에 대한 권리도 의무도 없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자 사노비에게도 군역이 부과.
사노비에게 군역이 부과된 시기는 속오군 설치 이후.
속오군은 양인도 있었으나 거의 노비로 이루어진 군대.
사노비는 군대 업무는 물론 쌀과 포까지 납부하게 된다.
사노비는 사대부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상태에서
또 다시 군역을 바쳐야 했기에 공노비에 비해 불리했다.
임진왜란 국가 위기에서는 노비 신분제도의 폐단을 보완.
노비라도 국가 유공자는 양인으로 신분을 격상하고
관리로 임용될 신분상승 기회가 일시적으로 주어진다.
하여, 농민 노비 기생 중 천민 계층이 목숨걸고 싸웠다.
'그러나, 이조는 엄격한 신분제도로 운영된 사회.'
노비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해도
양인이 되어 하급직 벼슬 이상의 신분상승이 불가능했다.
양반층이 고위 관직을 장악했기에 움치고 뛸 곳이 없었다.
노비는 사회적으로 출세가 불가능했고 대대손손 노비일뿐.
여자 노비 자식은 아버지 신분과 관계없이 노비가 된 폐단.
따라서 어릴 때 주인집 자식과 함께 놀던 노비의 자식들
성장하며 겪는 정신적 갈등은 육체적 고통보다 컸던 폐단.
노비에게는 결혼이란 말보다 동거란 말이 합당했던 폐단.
혼례를 치룰 수도 없고 주인이 혼례를 치뤄줄 리도 만무.
단 둘이 보름달 달빛 아래 정한수 한그릇 떠놓고 혼례식.
노비 주인들은 노비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여자 노비를 양인이나 사노비와 결합시켰다.
만일 주인이 노비를 첩으로 삼는다 해도 그 자식은 노비.
노비는 주인 의지에 따라 한 지붕 가족조차 될 수 없었다.
노비는 노동력 만큼 배부르게 식사를 하기조차도 어려웠다.
노비는 옷을 제대로 입기도 힘들고 살림장만도 어려웠다.
좋은 가재도구를 장만해도 수탈 당해 개인 재산이 없었다.
집안살림이라고는 의식주에 관계된 것을 빼고 거의 없었다.
게다가 농사일 외에도 주인집의 모든 잡일을 맡았으므로
어른은 물론 아이까지 나무를 하거나 물을 길어와야 했다.
노비신분 굴레에서 만족감을 찾고 사는 경우는 소수.
하여, 이조 후기로 갈수록 도망치는 노비가 늘어갔다.
좋은 주인을 만나 인간 대접을 받는 노비는 드문 때문.
훌륭한 주인도 노비 신분을 벗어나게 해주지는 않았다.
하여, 이조시대 노비는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노비가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깊은 산속이나 외딴 섬.
< 노비의 세습제도. >
노비제도 폐단을 보완한 것이 이조 말 양인제도.
노비가 많은 재산을 국가에 바쳐 양인이 된 경우.
국가 공로자가 되어 노비 신분이 수직상승되는 경우
그러나, 대부분의 노비는 물건과 같은 재산으로 취급
재산 분배에 따라 언제든 가족과도 헤어질 수 있었다.
설령 노비가 돈을 바치고 신분을 벗어났다고 해도
옛주인들은 2~3번에 걸쳐 노비에게 몸 값을 요구.
이미 문서 상 노비가 아니어도 옛 주인이 주인행세.
따라서, 노비를 면했어도 양인 대접 받기가 어려웠다.
사회적 관행 상 양반은 양반이고 노비는 여전히 노비.
노비는 개인 재산이라 소유자 폭력에 무방비 상태였다.
물론 노비 생명을 함부로 빼앗는 일은 국법으로 금지.
문제는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
한번 노비가 되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노비는 주인이 죄를 범하면 체벌까지도 대신 받았다.
'이조 노비 세습 불합리성을 지적한, 성호 이익.'
“우리나라의 노비법은 천하고금에 없는 법으로
한 번 노비가 되면 백세 토록 고역을 면치못한다.
노비 제도 폐지가 어려우면
노비 매매 만이라도 금지하고
노비 자손의 신분 세습을 금하라”
이조 지식층들도 점진적인 노비제의 폐지를 주장했다.
국가이익과 결부된 주장이라 점차 노비의 양인화 정책
이조 후기로 갈수록 노비 숫자는 점점 더 줄게 되었다.
< 자유를 위하여..>
노비신분에서 해방되는 지름길은 도망가는 것이었다.
변방의 섬이나 깊은 산속 등 인간의 발자취가 드문 곳.
도망은 개인보다 한가족 전체가 야반도주하는 형태였다.
노비는 도망을 가서도 생업을 마련해야 했으므로
여러 방법으로 그 지역에서 생활의 터전을 닦았다.
소극적 방법으론 세도가나 관가에 몸을 맡기는 것.
주인이 찾아와도 노비를 잡아갈 수 없는 공권력.
노비가 가족을 남겨둔채 도망가는 경우에는 승려.
반면 적극적으로 번 돈을 내고 양인 신분을 샀다.
노비가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호적에서 빠지거나
국가 보충대와 같은 특수 병종에 자원하기도 했다.
도망간 노비를 국가에서 법으로 보호하기도 했다.
노비 양인화는 국가 입장에서 새로운 조세 수입원.
노비의 사적인 형벌을 가하지 못하게 하여
노비의 권익이 점진적으로 개선되기도 했다.
< 이조시대 노비 신분정책 >.
노비가 양인이 되었어도 노비 대우를 받던 이조 말.
이조는 적극적으로 노비를 양인화하는 정책을 추진.
양인 숫자가 늘어날수록 정부 조세수입이 많기 때문
이조는 공노비 뿐만 아니라 사노비도 적극 양인화
기존 노비종모법(從母法)을 종량법(從良法)으로 전환
종모법은 모친이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법.
반면, 종량법은 모친이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 신분.
이조 조정의 적극적인 노비 양인화 정책에 의해
노비 중에는 어느 정도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어
양인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는 노비도 있었다.
농업 경영 변화, 상공업 발달, 사회 경제적 변화
노비들은 주인 토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토지를 빌려 재산을 증식.
노비는 신분만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을뿐
경제적으로는 독립하여 독자적인 경제활동.
노비제가 완화될 수 있던 가장 큰 배경은
중인과 서얼 등의 신분 해방운동 때문이다.
종래에는 양반 지배층만이 관직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차츰 중인 계층이 차츰 하위직 관직에 진출
노비들의 신분 해방도 이루어질 수 있는 배경이 마련.
결국 이조는 노비 신분제도를 전면 폐지하게 된다.
공노비를 1801년, 사노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
이조 말기는 대지주 계층과 소작인으로 신분이 나뉜다.
대지주 착취로 살기 어려워진 소작인 농민들
노비제도 폐지로 노동력을 잃어 몰락한 양반들.
몰락한 지식인 계층 양반들
살기 어려워진 소작 농민들.
이조 말 사회 혼란에 빠진다.
김 개남.
최참판댁 윤씨부인을 겁탈한 '토지' 소설 속 인물.
동학란 때 윤씨부인 처소에 은밀히 출입한 김개남.
그 덕분에 최참판댁은 동학혁명 때 무사했던 걸까?
동학혁명 당시 성난 농민들은 착취 지주들을 응징.
대지주 양반층을 붙잡아 보복하는 사건이 비일비재.
토지의 줄거리는 당시 사회에서 충분히 있을법한 일.
'<토지>는 실화처럼 느껴지는 대하소설일뿐..'
김개남은 전봉준과 함께 동학혁명 실질적 주도세력.
김개남은 지리산이 배출한 역사적인 인물 중의 하나.
전라, 충청 및 황해 각도에서 농민들이 봉기한 동학당
유도(儒道)와 불법(佛法)을 혼합한 천도(天道)라는 종교.
또 동학교도 수령 및 접주라는 각 지역의 우두머리들
김개남은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을 칭하기도 하고
농민들의 민심을 단결시켜 죽을힘을 다해 싸우게 했다.
-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카오루의 보고서 中 -
그러나, 동학당이 꿈꾸던 세상은 결국 오지 않았다.
전봉준, 손화중, 손병희로 이어지는 동학당의 주류.
농민혁명 막을 내렸지만, 김개남의 무리는 버티었다.
파죽지세와 같이 동서남북을 종횡무진했던 김개남
그 휘하 영호대접주 김인배 부대는 하동 진주 진출.
그러나, 김인배 부대는 마침내 광양에서 처형되었다.
'그후 지리산으로 숨어든 김개남 잔존세력.'
그들은 그 뒤 1차, 2차, 3차 지리산 의병전쟁의 주력.
진주 형평사운동에 관여하여 결국 고려공산당을 만들고
그 <김단야>는 민족민중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이어진다.
동학혁명후 남원 운봉의 서천리에 농민군 토벌 기념비.
그러나, 남원을 비롯한 전라좌도를 울린 김개남의 흔적.
백 년의 세월이 지나가도록 전설처럼 잊혀지지 않았다.
그의 가족들은 도강 김씨 족보에서 지워지고
성마저 박씨로 바꾼 채 어렵사리 살아 남았다.
“비단 할아버지에 거적 자손” 손자 故 김환옥.
1993년 5월 30일, 전주 덕진공원에 김개남 추모비.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 김개남 묘비의 글
1994년 김개남 부대를 토벌한 운봉 토호 박봉양 공덕비.
1995년 김개남 고향에 가묘(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윗지금실)
2000년 말 그가 죽은 전주 서문교회 옆 서교장터에 '김개남 길.'
지금부터 동학혁명 당시 김개남의 족적을 되살펴보자.
1890년대 호남 농민들은 3년 가뭄으로 피폐할대로 피폐.
그러던 중 1892년 전라도 고부 군수로서 조병갑이 부임.
그는 부임하자마자 부친 송덕비를 세운다며 돈을 거두고,
관내의 부자들에게 무고한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재산 갈취.
무고한 농민들을 잡아다 돈을 받고야 비로소 풀어주고,
정읍천 상류에 제방이 있는데도 새로 만석보를 쌓았다.
보를 쌓는 비용과 유지관리 비용은 당연히 농민들 부담.
1894년 1월 10일. 말목장터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녀자와 노약자를 제외하고는 이곳을 떠나지 말라”
전봉준이 민중들과 관아로 들이닥치자 조갑경은 도주.
농민 봉기는 서울의 지배세력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마지 못해 조병갑을 파면시키는 유화책도 잠시였다.
800 명의 역졸을 데리고 고부에 왔던 안핵사 이용태.
농민봉기 주모자와 참가자를 색출하고 부녀자를 강간.
안핵사 이용태가 바라는 것은 당연하게도 뇌물이었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이 1차 거병을 준비하여 무장
유정마을 뒷산 여시뫼에서 창의문을 발표하며 농민혁명.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
부안 백산 농민군이 정읍, 금구, 삼천, 전주에 무혈입성.
농민군과 조정은 이른바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에서 철수.
김개남은 태인, 순창, 옥과, 담양, 창평, 동복, 보성, 낙안,
순천, 곡성을 거쳐 6월 25일 남원성을 점령하고 전라좌도 장악.
일본군은 경복궁을 침입했으며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경부 경인 철도 부설권을 탈취했고, 한일공수동맹
이조 군사력을 일본 하부구조에 편입시켰기에 2차 농민봉기.
10월 16일 전주에 도착한 김개남은 고부군수 양필환,
남원부사 이용헌, 순천부사 이수홍 등을 처단하였다.
이후 10월 23일 금산 점령, 11월 10일 금산 진잠 점령,
11월 11일 회덕 신탄진 점령, 11월 13일 청주성을 공격
그러나, 청주성 공격 실패로 김개남 부대는 큰 타격.
논산을 거쳐 전주로 도주하였다가 부하의 밀고로 체포.
전봉준 등과는 다르게 김개남은 전격적으로 즉결 처형
하여, 실패로 돌아간 동학혁명 농민봉기는 막을 내렸다.
1895년 1월 8일 참수, 1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3일간 효수.
"김개남은 내가 왕사(王事)에 협력하자고 권고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상의한 바 있었지만
끝에는 결단코 상관하지 않았다" - 전봉준 -.
.......................................................
.......................................................
훗날 손병희를 비롯한 최시형 동학교단은 천도교로 개명.
1895년 1월 24일 동학농민 26명은, 대둔산 전투에서 산화.
일본군과 관군은 모두 전라도 일대에서 철수하기 시작한다.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농민군이 패퇴하기 시작한 때부터
동학혁명 농민군은 일본군에 의해 잔혹하게 처벌되었다.
1894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20~30만명 이상이 학살.
동학혁명.
1894년(고종 31) 반봉건 반침략 기치 하에
이조 봉건사회 해체기 문제들을 변혁하려던
농민들의 사회개혁운동을 동학혁명이라 한다.
동학의 종교조직을 이용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개혁 지도자를 중심으로 농민 도시민 소상인 몰락양반·
봉건사회 해체 과정에서 몰락한 계층이 광범하게 참여
[사회경제적 배경]
19세기 후반 이조 봉건사회는 지주제가 확대되고,
농촌은 지주·부농·소농·빈농·임노동자로 분화
지주제도로 인해 농민에게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다.
1860년대부터 군현 단위로 농민항쟁이 확산된다.
조정은 지주제와 신분제의 모순을 개혁하지 않고
단지 부세제도 부분 수정으로 이를 무마하려 했다.
한편 개항을 계기로 제국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종래의 봉건적 모순은 더욱 심화 확대되어갔다.
지주 부농층은 대일 미곡수출로 많은 이익을 얻어
토지를 사 모으고 지주제를 점점 더 강화시켜갔다.
이에 반해 농민들은 고리대 수탈로 더욱 몰락한다.
영세수공업자 상인도 외국상인 침투에 따라 같은 운명.
호남은 전통적으로 대지주 봉건적 수탈이 심했던 지역.
강경·법성포·줄포·논산포 등은 대일 미곡수출이 활발
지주층의 지주제 강화로 인해 소농·빈농층이 몰락
농촌사회 내부 분화 및 계급대립이 전면에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의 교세가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봉건사회를 변혁하려는 일군의 혁명적 지식인들과 결합.
호남 전통을 잇는 부안(扶安) 동림서원(東林書院)
오랫동안 강진에 유배되었던 다산 정약용 등 실학자
진보적 사상이 암암리에 몰락양반을 비롯한 지식인들
'농민전쟁 지도자 전봉준도 그중에 한 인물.'
이들은 체제 개혁을 위한 대규모 농민전쟁을 계획
농민들을 동원할 수단으로서 동학 조직을 주목한다.
동학(東學)은 몰락 양반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이다.
후천개벽 만민평등 지상천국 건설이 동학 이념
1892년 11월 삼례집회와 1893년 3월 보은집회에서
전봉준 등은 동학조직을 이용해 농민군을 결집하고
동학혁명을 기도하며 사회혁명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 고부민란 >
갑오경장은 1894년 1월에 일어난 고부민란에서 비롯.
고부지역은 전통적으로 봉건지배층의 수탈이 심한 곳.
1880년대 말경부터 봉건정부 스스로도 궁장토의 확대
특히 농민토지를 수탈하고 지주제를 확대 발전시켰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고율 세금을 징수,
농민들은 1893년 11월경 조병갑에게 민장(民狀)을 제출
시정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농민 봉기.
전봉준을 중심으로 최경선·정익서·김도삼 등
농민 봉기로 고부성 격파후 군수 조병갑을 효수
전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향할 행동방침을 결정.
1893년 12월, 전봉준은 60여 농민을 거느리고
새로 온 군수에게 고부군의 폐정 시정을 요구
그러나, 고부군 군아의 뜰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듬해 1월 9일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재부임
전봉준은 사발통문 결의사항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1894년 1월 11일 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습격
아전을 처벌하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장한 후,
불법 수탈한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 밑에 새로 쌓은 둑을 허물고
거둬들인 수세를 군량으로 확보한다.
정부는 민란 수습책으로 고부군수를 새로 임명
유화책을 쓰며,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 실태 조사
이에 따라 전봉준이 이끈 농민군은 일단 해산한다.
전봉준 등 농민지도자들은 보다 확대된 민란을 계획.
안핵사 이용태는 주모자를 폭도로 몰아 처벌했기 때문
[1차 농민전쟁]
그해 3월 전봉준은 무장(茂長)으로 가서 농민군을 조직
손화중·김개남과 함께 약 15일 동안 4,000여 명을 규합.
전봉준은 탐관오리 숙청과 보국안민 창의문(倡義文)을 발표.
무장·고창·흥덕·태인·정읍·김제·금구 농민들이 호응
3월 25일 <호남 창의 대장소>를 조직해 농민군을 정비했다.
연합부대의 대장에는 전봉준이 되고,
손화중과 김개남이 부대장이 되었다.
이들은 서울로 진격하여
부패한 봉건지배층을 타도하고
외래침략자들을 내쫓을 것을 제시하며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일어나자는 격문 발표.
백산에서 혁명 대오를 편성한 농민군은
4월 7일 황토현에서 전주 감영군 격파 후,
정부군과 정면대결을 피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
정읍·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장성을 공략.
진격하는 곳마다 관청을 습격
감옥에 갇힌 백성들을 석방하고
무기를 압수하고 탐학관리를 징계
아울러 양반·지주·부호들을 징계하고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정부는 4월 2일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
장위영병을 현지로 파견했으나 농민군들에게 패배.
이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장성을 떠나 북상길
원평·정읍을 거쳐 5월 31일에 전주성에 입성했다.
[전주화약과 집강소체제]
전주성이 점령 당했다는 소식에 놀란 정부
자력으로 농민군과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
그해 4월 29일에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청군과 일본군은 한반도로 출병.
그러나 농민군은 외세의 출병 구실을 없애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폐정개혁안 제시,
이를 받아들이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정부측이 이에 응해 6월 10일 화약이 체결한다.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을 양도해 주며 사태 관망.
그러나, 전주화약 이후 폐정 개혁이 이뤄지지 않자,
농민군은 폐정개혁을 전라도 53주에서 집행하기 위해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직접 개혁사업에 착수했다.
전봉준은 금구 원평에 본거를 두고 전라우도를,
김개남은 남원에 본거를 두고 전라좌도를 통할.
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지방통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이속과 행정의 말단조직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고서
무기와 군량을 모으는 한편, 민간의 송사을 처리했다.
집강소를 운영하는 주체는 신분적으로 하층민,
경제적으로 소작농민, 토지 없는 농민이 중심.
집강소가 설치된 후 농민군의 조직은 크게 확장
양반 유생들도 참가했으며 무기와 군량을 모으고
무기의 조작법을 익히는 등 군사활동까지 펼쳤다.
그리고 충청도의 동조세력과 연락을 취하며
본격적인 반침략·반봉건 전쟁을 준비해 갔다.
한편 전라도 농민군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경기도 죽산·안성, 경상도 하동·진주, 강원도
홍천 등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고 있었다.
[2차 농민전쟁]
1894년 6월 21일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군은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도발하고,
민씨 세력을 내쫓고 대원군 개화파 연립정권을 수립
이어 갑오개혁이 추진되어 전반적인 개혁사업을 추진.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내정에 적극 간섭
농민군을 토벌하려 하자 농민군은 삼례에 투쟁본부 설치.
전봉준은 동도창의소(東徒倡義所)란 이름으로
반침략 항일투쟁에 충의지사들의 거병을 촉구
한편, 전라도 각지 집강소를 통해 농민군을 동원
전봉준은 제1차 봉기 때 반대한 최시형을 설득
연합전선을 구축 9월 하순 공주를 향해 북상한다.
당시 공주는 일본군과 관군들이 주둔한 거점이었다.
농민군은 공주 외곽의 이인·효포·우금치 등지에서
약 20일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논산으로 후퇴
이어 논산 전투에서도 농민군은 다시 패퇴했고,
금구·태인 전투에서 전봉준의 핵심부대도 패퇴
이후 황해도·경상도 등지 저항 농민군들도 괴멸.
양반·부호·관료·이서층이 조직한 민보군들은
도주한 농민군들의 집에 방화하고, 재산을 약탈.
귀순한 동학교도들까지도 체포 살해하며 초토화.
[역사적 의의]
1894년 갑오경장은 탐관오리의 제거,
민씨정권의 타도와 봉건적 폐단의 시정,
봉건제도 폐지, 친일정권 타도, 식민 저지.
민중 운동과 사상을 단계적으로 발전시켜갔다.
특히 제2차 농민전쟁을 통해
일본 침략세력을 몰아내려는
반제·반봉건 민족운동을 전개,
당시 갑오정권과 일본세력 및 보수유생들에 의해 압살
그렇지만, 농민전쟁은 반봉건 투쟁 세력을 강화시킨 계기
덧 말.
갑오경장 당시 동학혁명 개혁에 실패한 농민군들
깊은 산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며 이상향을 건설.
지리산 '하늘 아래 첫 동네' 대부분 그러한 마을들.
임진왜란, 갑오경장, 일제치하에서 적극 항일투쟁.
국란 때마다 앞서 나라를 지킨 지리산의 산간마을.
반란의 역사에 휘말려 말 못할 고초를 겪기도 한다.
박경리(朴景利)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결혼했으나,
6·25전쟁 때 남편이 납북된 후 딸과 함께 생활했다.
시인 김지하는 그녀의 사위이다.
1970년대 후반에 강원도 원주시로 거처를 옮기고 창작활동에 전념 1994년 8월 대하소설 〈토지〉완결.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 計算〉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黑黑白白)이 〈현대문학〉에 발표
이어 〈현대문학〉에 단편 〈군식구〉·〈전도 剪刀〉·〈불신시대〉·〈영주와 고양이〉·〈반딧불〉·〈벽지 僻地〉·〈암흑시대〉 등의
문제작을 계속 발표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단편을 쓰다가
1959년 〈표류도〉(현대문학, 1959. 2~10)를 발표
1963년 단편 14편을 모아 소설집 〈불신시대〉를 펴냄.
〈암흑시대〉가 〈불신시대〉를 잇는 작품임을 암시했다.
두 작품은 여주인공의 형편이나
아들의 죽음이라는 극적 체험과
심적 변화 등의 면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불신시대〉가 종교와 병원을 중점적으로 비판한 반면에
〈암흑시대〉는 무책임하고 경박한 의사와 간호원들의 횡포에 초점.
이어 장편 〈시장과 전장〉(1964)을 발표했는데,
6·25를 소재로 한 각종 소설 유형을 종합한 듯.
전쟁, 이데올로기 소설, 지식인, 빨치산 소설 등
주인공 '하기훈'을 중심으로 그와 석산(石山) 선생,
그와 장덕산 사이의 갈등은 이데올로기 소설에 가깝고,
제2부만 따로 보면 빨치산 소설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다.
그녀 소설에서 중요한 주제는 여성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대표작 〈토지〉에서 최씨 집안의 중심인물이 두 여성인 것
〈김약국의 딸들〉〈시장과 전장〉〈파시 波市〉주요인물도 여성.
〈김약국의 딸들〉에는 한 가정에서 운명과 성격이 다른 딸들
〈파시〉에는 6·25 직후 부산과 통영을 무대로 살아가는 여성들
주로 전쟁 미망인을 등장시켜 악몽 같은 전쟁으로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모습을 그린 초기의 작품들을
작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 또는 사소설.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간 쓴 대하소설
1890년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를 배경으로 했다.
이 작품에 등장인물들은 실존인물이 아닌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가공의 인물들이다.
이 작품은 몇몇 제한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지 않고,
'평사리'와 '간도' 주민들 전체를 다 주인공으로 썼다.
작가의 시점이나 화법이 자유롭고 선악관에 의해
인물이나 상황 및 사건을 저울질하지 않는다는 것
유방암 선고와 사위 김지하의 투옥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토지〉의 집필을 계속하여 그녀는 윤씨부인-별당아씨-서희,
그리고 그 자식들 세대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인물들을 통해
민중의 삶과 한을 부각시켰고, 이로써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소설집으로 〈표류도〉(1959)·〈김약국의 딸들〉(1962)·
<가을에 온 여인〉(1963)·〈파시〉(1965)·〈박경리단편선〉
(1976)·〈박경리문학전집〉(1979)·〈토지〉(1989) 등이 있다.
1957년 현대문학상, 1959년 내성문학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 등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