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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덕성당
합심덕적(合心德積)이라는 지명
합덕성당은 공세리성당과 더불어 충청도 최초의 본당이다. 합덕을 포함하여 조선시대 내포지방은 규모가 크고 중요한 신앙공동체가 많았다. 때문에 박해의 피해가 어느 곳보다도 극심했으며, 그로 인해 대부분의 교우촌 공동체가 와해되고 말았다. 1886년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한국천주교는 내포교회의 재건을 위해 양촌본당과 간양골 본당을 설립한다. 양촌본당은 다시 1899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합덕본당이 되었다. 이후로 본당은 충청도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성전은 1929년 페랭 신부에 의해 지어졌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성당은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근대 의식 성장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충남도 기념물 1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당 관내에는 복자 원시장·시보 형제의 우물, 복자 김사집의 비방구지 마을, 양촌공소, 세거리, 상리, 하흑공소 등 유서 깊은 유산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 성당에서는 ‘성가정 순례자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단체 피정, 연수, 신앙학교는 물론 고풍스러운 성당에서 하룻밤을 보내고자 하는 교우들에게 언제나 열려있다.
합덕은 조선 시기 순교자 외에도 6.25 순교자 페랭 신부가 시복 대상에 올라 있다. 아울러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성직자·수도자를 배출하여 교회발전에 이바지해 왔다.
# 신리성지
신리는 조선시대 천주교 수용 초기부터 형성된 교우촌으로 주민 400여 명이 모두 신자일 정도로 규모가 컸다. 신자들이 많았던 만큼 박해도 심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한 곳이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를 통해 마을 전체 신자가 순교하거나 피난할 정도였는데 인근에 있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가 이를 말해준다.
신리는 박해를 겪는 조선교회의 중심지 역할도 하였다. 서해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착지였고,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머무르며 사목활동을 한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황석두 루카, 손자선 토마스가 신리에서 체포되어 보령 갈매못과 공주에서 순교하였고 후일 성인이 되었다.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라고 한 다블뤼 주교의 말처럼 신리는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봉헌한 교우촌이다.
신리의 다섯 성인들을 기리는 기념성당이 성지 중심에 있고, 그 안에 성인들의 유해도 안치되어 있다. 2014년 5월 6일 이분들의 시성 30주년을 기리며 다블뤼 주교 기념관을 건립하여 그의 사목활동과 교회 서적 출판 업적을 기리고 있으며, 2017년 3월 기념관 지하에 이종상 화백의 ‘순교미술관’을 개관하였다.
# 솔뫼성지
솔뫼성지는 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라는 뜻의 ‘솔뫼’는 1836년 김대건 신부의 신학생 추천서에도 나올 정도로 오래된 이름이다. 김대건은 1821년 솔뫼에서 태어나 중국 마카오에서 공부를 한 후 1845년 24세의 나이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솔뫼에는 기와집 생가(대건당)가 복원되어 있고, 소나무 숲 한가운데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신앙은 솔뫼에서 대를 이어 살던 선조들의 모범으로 형성되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김진후 비오는 솔뫼에서 신앙을 받아들여 살다가 1814년 해미에서 순교하였고, 작은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는 1816년 대구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는 1839년 서울 서소문밖에서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 역시 1846년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2014년 8월 아시아의 청년들이 솔뫼에서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의 서막을 열었고, 이를 계기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였다. 교황의 방안을 기리며 ‘매듭을 푸는 성모 경당’과 몇몇 기념물이 건립되었다. 솔뫼 성지는 2014년 9월 국가지정문화재 제529호로 지정되었다.
# 성 안 안토니오(다블뤼 안토니오) - “예수님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성 마리 니콜라 앙토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안 안토니오 또는 다블뤼 안토니오)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며 주교의 세례명은 안토니오(Antonius)이다.
그는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북부 아미앵(Amiens)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 둘도 성직의 길을 걸을 만큼 신앙적으로도 모범적인 가정이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또한 어려서부터 사제직에 뜻을 두어 소신학교를 졸업한 뒤, 1834년 10월 파리(Paris) 교외의 이시(Issy) 신학교에서 입학하여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다. 이어 1836년 10월 파리의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운 다음 1841년 12월 18일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 수품 후 아미앵 교외에 있는 르와(Roye) 본당의 보좌신부로 20개월 동안 사목하다가 신학생 때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전교 신부로서의 뜻을 펼치기 위해 1843년 10월 4일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844년에 극동 선교사로 임명되어, 2월 20일 브레스트(Brest) 항구를 출발해 8월 24일 파리 외방 전교회의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845년 7월에 마침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한 페레올(Ferreol, 高) 주교를 만났다. 페레올 주교는 제3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으로의 입국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는 그의 간청을 받아들여 조선 선교를 지원하게 되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1845년 8월 초에 상해로 갔고, 8월 17일에 금가항(金家巷) 성당에서 거행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s) 부제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塘)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보좌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자기가 갈 선교지인 조선의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의 감동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러고 나서 8월 31일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등과 함께 ‘라파엘 호’로 명명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에서 출발해 풍랑을 만나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는 등 어려운 항해 끝에 10월 12일 저녁 8시경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부근 황산포(黃山浦) 또는 인접한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나바위의 후미진 장소에 상륙하였다.
이때부터 성 다블뤼 안토니오는 1866년 3월 30일 순교할 때까지 21년 동안 당시 조선에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고, 아울러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이튿날 그는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교우촌 공동으로 가서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1846년 1월부터 공동 주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며 전교 활동을 시작했고, 점점 더 먼 곳에 있는 신자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846년 9월 16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피신하며 큰 고초를 겪었다. 이때 여러 곳을 옮겨가며 습기 차고 불결한 방에 숨어 살면서 오른쪽 무릎 인대가 늘어나 평생 걷는 데 불편을 감내해야 했고 건강도 많이 나빠졌다. 수리치골(현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 교우촌에 도착한 뒤에는 몇몇 신자들을 모아 신심 단체인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848년 박해가 좀 잠잠해지자 건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전교 활동을 시작했고, 1850년 1월에는 병이 너무 위중해져, 사제품을 받고 갓 입국한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자 페레올 주교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에게 건강을 회복될 때까지 전교 활동을 금하고, 그동안 신학생들을 지도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 그는 1857년 3월 25일 서울에서 제4대 조선 교구장이 된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주교로부터 승계권을 가진 보좌주교로 서품되었다. 한편 그는 신학생들을 지도하면서도 틈틈이 교우들이 손쉽게 볼 수 있는 신심 서적 및 교리서를 번역 저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교 요리 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 성교 예규”(天主聖敎禮規), “천당직로”(天堂直路) 등의 번역서라든가,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등의 저서들은 모두 그의 노력에 의한 것들이다. 1856년부터 그는 조선 교회사와 조선 순교사 사료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고,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 등이 해오던 사전 편찬 작업도 이어받았다. 이 사전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 보완 작업을 거쳐 1891년 홍콩에서 “나선소사전”(羅鮮小辭典)이란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특별히 조선 교회사와 순교사의 정리는 그의 두드러진 업적에 속한다. 그는 조선 교회사 편찬을 위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저술하여 모두 1862년 파리 외방 전교회 교장 신부에게 보냄으로써 후대에 귀중한 사료를 남겼다. 나중에 달레(Dallet) 신부는 이 “다블뤼 비망기”를 바탕으로 해서 1874년 “한국 천주교회사”를 편찬 · 간행하였다. 1863년 내포 지방에 있는 주교 댁이 이웃집 화재로 소실되면서 비망기 관련 모든 자료 또한 불타버렸기 때문에 파리로 보낸 비망기는 더욱 소중한 사료가 되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1861년 6월 15일, 조선의 두 번째 사제로 12년 동안 헌신적으로 전교 활동을 펼치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선종하자 그가 활동하던 경상도 남부 지역을 맡아 사목하게 되었다. 1865년부터는 내포 지방에서 전교 활동을 시작했는데, 1866년 초 시작된 병인박해가 더욱 심해지고 급기야는 2월 23일에 성 베르뇌 시메온 교구장 주교가 붙잡혀 3월 7일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승계권을 가진 보좌주교였던 성 다블뤼 안토니오는 교구장 직을 계승하여 제5대 조선 교구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교구장 재임 기간은 겨우 23일에 불과했다.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순교하고 4일 뒤인 3월 11일, 그는 거더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서 체포되었고, 이튿날 당시 조선에서 전교 활동 중이던 성 위앵 루카(Huin Lucas) 신부와 성 오매트르 베드로(Aumaitre Petrus) 신부가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수하여 그들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 의금부에 갇힌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신문과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훌륭한 호교론을 펴기도 했다. 결국 그는 군문효수의 사형선고를 받고 함께 체포된 두 신부와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Lucas)와 성 장주기 요셉(張周基, Josephus)과 함께 처형을 위해 충청남도 보령 수영(保寧水營)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죄수복을 입고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죽음의 행진을 하던 도중, 처형 예정 날짜인 3월 30일(그해의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서 처형일이 다소 연기될 기미가 있음을 알고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성금요일에 죽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결국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소원대로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갈매못(현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처형이 시작되자 맨 먼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칼을 받았다. 이때 희광이들이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목을 칼로 한 번 내리친 다음 그대로 버려둔 채 처형의 품삯을 흥정하기 위해 한참 동안 꾸물거리다가 흥정이 결정되자 다시 두 번째 칼을 내리쳤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던 안 안토니오 주교는 한한불(韓漢佛)사전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남겼고, 10여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완성하는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프랑스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 풍속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데다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렸지만, 한국말을 잘하고 보신탕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져 있다. 1845년 10월 조선에 들어와 20여 년 동안 양 떼를 위하여 봉사하던 안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민 신부, 황석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았다. 3월 30일에 안 주교 일행을 충청도 갈매못으로 압송한 형리들은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하였지만, 마침 이날이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가 당일 집행을 요구하여 그대로 형이 집행되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를 포함해 갈매못에서 순교한 5위의 순교자 중에서 성 황석두 루카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홍산 삽티(현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를 거쳐 고향인 연풍 병방골(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 이장했고, 1982년 연풍 순교성지로 천묘(遷墓)하였다. 나머지 4위 순교자들의 시신은 사흘 뒤에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형장 부근에 묻혔다가 6월 초 몇몇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서짓골(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에 매장하였다. 그 후 1882년 3월 제7대 조선 교구장인 블랑(Blanc, 白)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 대교구의 오우라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2년 만인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30일 목록에서 한국의 갈매못에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동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 성 민 루카 (위앵 루가) 신부 (1836-1866) - “좋으신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거룩한 복음의 증인이 되어 제 피를 쏟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조선입니다.”
마르티노 루카 위앵 신부
민 신부는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으로, 1861년 사제가 되었고 1865년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안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운 뒤 홍주(洪州)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을 겪은 뒤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음으로써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한국 성 민씨인 마르티노 루가 위앵은 1836년 10월 20일 랑그르 교구의 기용벨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포도밭을 경영하는 매우 화목한 집안으로 이미 자녀 여덟을 둔 아이부자였고 루가는 아홉째로 막내였다. 또한 일에 대한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훌륭한 천주교 집안의 유산도 이어받고 있었다.
1864년 6월 13일, 그는 조선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조선 만세! 제가 곧 일생을 바쳐 일하러 갈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리고 만일 천주님께서 원하시면 제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릴 수 있을 곳도 바로 여기입니다.”
그 이튿날 이내 그는 그의 기쁨을 부모님과 나누고자 했다. “제가 선교사 대열에 끼이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신 천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그리고 자상하신 어머니, 오늘 저는 두 분을 생각하고 또 두 분께서 오래전부터 희생하셨음을 알고 있기에 제 기쁨을 같이하시라고 이렇게 서둘러 이 훌륭한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두 분께서는 어쩌면 순교자가 될지도 모르는 선교사가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신 것으로 인해서 하늘나라에서 두 분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저를 두 분 곁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받으셨을 지극히 빨리 지나가고 마는 만족과 바꾸시기를 원하시겠습니까?”
1864년 7월 15일 다른 선교사 아홉 명과 함께 파리를 떠난 위앵 신부는 브르트니에르, 도리 신부들과 더불어 길고도 파란 곡절이 많은 여행을 했는데 그 여행은 1865년 5월 27일 내포지방에서 다블뤼 주교를 만남으로써 끝이 났다.
위앵 신부는 6월 18일 성체축일까지 다블뤼 주교와 함께 있었다. 그런 다음 주교가 계신 곳에서 십리 떨어진 황무실 교우촌으로 갔다. 위앵 신부는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적었다. “이것이 제 성체거동이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유럽에서 당신네의 그 화려한 예절에 참석한 것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어느 회장을 따라 걸어가면서 그는 성체 찬양가를 흥얼거렸다. 이후로 그는 쾌활에게 조선식 생활을 시작했다. 소금도 기름도 안 치고 물로만 익힌 쌀밥을 하루 세 끼씩 먹고 땅바닥에 깐 돗자리 위에서 잠을 자고 쪼그리고 앉아서 먹고 일하고 찾아오는 사람을 맞았다.
“이러한 풍습에 익숙해지기는 아주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무엇 때문에 희생이란 말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내가 죄를 속죄하고 천주님께 조금이나마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내가 스스로 그리고 일부러 선택한 몫이 아닙니까?”하고 그는 말하였다.
조선사람 집에 혼자 있으면서 위앵 신부는 한문 공부도 하면서 조선말을 열심히 배웠다. “이 조선말 공부도 천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쉽게 사람을 낙담시킬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천주님을 위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낙담이라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하기는 이러한 노력의 대가로 그의 조선말 실력은 눈에 띄게 진전해서 1866년 2월 말부터는 교우들의 고백을 듣고 교리를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교우들은 매우 좋아해서, “겉 인상은 그래도 그분은 우리들에게 자식을 교육할 줄 아는 정말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선교 일꾼은 풍성한 활동을 시작하려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천주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실 참이었고 위앵 신부는 피를 흘림으로써 조선교회를 기름지게 할 참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이 선교사는 제2의 고향인 조선을 순교자의 고장으로 생각하고 들어옴으로써 미리 내다 보고 수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또 선교활동을 하는 것도 희망했었다.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그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했다.
“내가 이처럼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과 또 이처럼 비천한 곳에 와서 죽는다는 것은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지만 다만 불쌍한 영혼 들을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것은 괴롭습니다.”
그가 500명가량의 고백을 듣고 열다섯 내지 스무 명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몇 차례 혼배 강복을 주었는데 그럴 즈음 병인박해가 시작되었다.
1866년 2월 25일 다블뤼 주교는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통해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아직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만주 교구 교구장 배롤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포졸의 수색이 얼마나 심해졌는지 선교사는 한 사람도 남아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와 함께 3월 9일 만났는데 아마 그들에게 어떤 뜻밖의 사태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하라고 일렀을 것이다. 주교는 거더리에 그대로 남아 있고 위앵 신부는 새거리로 물러갔다.
그러나 포졸들은 이미 마을마다 침입해서 집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3월 11일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고 주교는 위앵 신부에게 전갈을 보내 그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다. 바로 그날 위앵 신부는 오랫동안 고백성사를 준 다음 미사를 드리려고 하고 있는데 교우들은 밤에 떠나라고 재촉했다. 그래서 높은 뫼 마을까지 양반 교우 신 바오로의 집에서 낮시간을 보내고 밤이 되자 그곳에서 20리 떨어져 있는 쇠재로 가서 거기서 다블뤼 주교의 전갈을 받았다.
포졸들이 상관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어기고 전갈을 가져오는 사람을 따라왔다. 그들은 위앵 신부를 살펴보고, “당신이 정말 민 신부요.?” “그렇소, 내가 민 신부라는 사람이요.” “조선에 온 지 얼마나 되오?” “작년에 왔소.” “같이 온 사람이 몇이나 되오?” “여럿이 왔소.” “그중에 어떤 사람을 본 지가 오래되오?” “요전에 오 신부를 보았소.” “오 신부는 어디 있소?” “모르오.”
위앵 신부는 사슬에 묶여 다블뤼 주교 있는 곳으로 끌려 왔다. 그때가 3월 12일이었다. 같은 날 오메트르 신부도 동료들과 합류했고 그리스도를 위해 붙잡힌 이 세 사람 모두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3월 19일 서울에 도착해서 고약한 그곳 옥에 갇혔다가 3월 20일부터 22일까지 신문과 무서운 고문을 당했다. 극형인 군문효수란 사형선고를 받고 그들은 처형장소인 수영 갈매못으로 느릿느릿 끌려갔다.
처형장소에 있었던 한 목격자는 위앵 신부가 처형되기 조금 전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다블뤼 주교가 목이 반쯤 잘린 채로 비참한 단말마의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있었고 그 자신도 기진맥진해 있었으 며 또 조선교회를 위해 그렇게도 일하기를 열망했던 그가 그렇게도 젊은 나이에 인간적으로 끔찍한 죽음 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감수성이 특히 예민했던 그는 흥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용기가 꺾이지는 않았다. 그날이 바로 예수 수난 기념일이었는데 스승 예수께서도 그분의 임종을 고통 중에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혐오를 맛보지 않으셨던가?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없다.”고는 하였으나 그는 그의 마지막 고난의 언덕을 용감하게 기어 올라가 머리를 망나니 앞에 내밀었다. 그의 머리는 단칼에 떨어졌다. 때는 1866년 3월 30일, 그는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 품에 안겼다.
이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성 마르티노 루카 위앵 신부의 세례명은 마르티노 루카이고, 한국 성은 민이다. 그는 1836년 10월 20일 프랑스 북동부 랑그르교구의 기용벨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포도밭을 경작하던 그의 부모는 늘 자기 가문에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자랑하면서 9남매 모두 훌륭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도록 교육했다. 막내로 태어나 신앙적인 환경에서 자란 성 위앵 루카는 1851년 본당신부의 추천으로 랑그르 소신학교에 입학해 부지런히 공부한 후 1856년 10월에 랑그르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861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아 랑그르 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수품 후 그는 2년 동안 멜레와 부아제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활동하면서도 전교 사제의 꿈을 키우다가 1863년 8월 20일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받고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자신의 선교지가 조선임을 알았을 때, 그는 기뻐하며 부모님은 물론 옛 본당신부에게도 편지를 썼다고 한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1864년 7월 15일에 함께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성 도리 헨리코 ·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와 함께 파리를 떠나 마르세유에서 상선을 타고 극동으로 향해 9월 중순 무렵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중국 상해를 거쳐 11월에 요동의 차쿠에 도착해 한문 공부를 하며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인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의 연락을 기다렸다. 이윽고 1865년 4월 17일 차쿠를 출발한 성 위앵 루카 신부와 동료들은 백령도 인근에서 주교가 보낸 배로 갈아타고 5월 27일 충청도 내포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조선 땅을 밟았다.
마침 내포에 와 있던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환영을 받은 성 위앵 루카 신부 일행은 주교의 지시를 받아 서울과 경기도로 떠났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6월 18일까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함께 내포 지방에 머물며 조선말을 공부했다. 그러고 나서 당진 합덕 지방의 세거리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초가집에 거처하며 조선의 풍습에 적응하고자 노력하고 한문과 조선말 공부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성 위앵 루카 신부는 1866년 2월에 벌써 교우들의 고해성사를 듣고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수가 있었다. 그는 박해 직전까지 5백여 명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15명에서 20명에게 병자성사를 주었을 뿐 아니라 몇몇 교우의 혼인성사도 집전해 주었다. 1866년 초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자 그는 3월 9일에 거더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로 가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를 만나 하루를 보내고 세거리로 돌아왔다. 신자들의 권유로 거처를 옮기던 중 3월 11일 거더리에서 체포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편지를 받고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날 주교의 뜻대로 자수하여 거더리로 끌려왔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도 거더리로 와서 자수하였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함께 체포된 주교와 동료 신부와 함께 홍주 관아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갇혔다. 3월 19일 포도청에서 두 차례의 신문을 받은 그는 3월 23일에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지인 충청남도 보령 수영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국혼이 가까운 시기라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 나쁜 징조라 하여 멀리 떨어진 보령 수영으로 처형지를 정했다. 그래서 성 위앵 루카 신부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 · 성 황석두 루카, 성 장주기 요셉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처형장인 갈매못(현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내 마음에 아픈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토록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도 아니요, 이곳과 같은 처절한 장소에서 죽게 된 때문만도 아니라, 이 나라 불쌍한 백성들의 구령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게 되니 그것만이 마음 아플 뿐이오.”
성 위앵 루카 신부를 포함해 갈매못에서 순교한 5위의 순교자 중에서 성 황석두 루카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홍산 삽티(현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를 거쳐 고향인 연풍 병방골(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 이장했고, 1982년 연풍 순교성지로 천묘하였다. 나머지 4위 순교자들의 시신은 사흘 뒤에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형장 부근에 묻혔다가 6월 초 몇몇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서짓골(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에 매장하였다. 그 후 1882년 3월 제7대 조선 교구장인 블랑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대교구의 오우라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2년 만인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30일 목록에서 한국의 갈매못에서 성 위앵 루카 신부와 동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 성 오 베드로(오메트르 베드로) 신부 - “저는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아 천주교 신앙이 골수에 새겨졌습니다.”
프랑스 앙굴렘 교구 출신인 오 신부는 1862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863년 6월에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다. 경기도 수원 근처에 있는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혔으며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전교하였다. 1866년에 박해가 일어나고 그해 3월에 안 주교가 체포되자 피신하려고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더리로 돌아와 체포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서울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3월 30일 갈매못에서 안 주교 다음으로 두 번째 칼날을 맞아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성 피에르 오매트르 신부
성 피에르 오매트르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이고 한국 성은 오(吳)이다. 그는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서부 앙굴렘교구의 뤼페크 본당에 속한 에제크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조그만 농지를 경작하며 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갔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는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부지런했지만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첫영성체 교육을 받으면서 사제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리슈몽의 소신학교에 입학하려 했을 때 큰 어려움을 겪었다. 성적 때문에 소신학교 추천을 꺼리던 본당신부도 감탄할 만큼 매일같이 본당신부와 평신도에게 라틴어를 배우러 다녔고, 결국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한 뒤에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등생이 되기까지 하였다. 5년의 소신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1857년 10월에 앙굴렘 대신학교에 진학했고, 1859년 8월 18일에 소품자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862년 6월 14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후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자신의 선교지가 조선임을 알게 되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사제가 되기까지 많은 은인의 도움을 받았던 그는 선교 사제가 되기까지도 부모의 강한 반대를 극복해야 했다. 게다가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조선으로의 파견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각오를 담아 부모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그리고 1862년 8월 18일 프랑스를 떠났으나 박해로 인해 조선으로의 입국이 쉽지는 않았다. 거의 1년 가까운 노력 끝에 1863년 6월 말 중국 어선을 타고 연평도 바다를 지나 무사히 조선 땅을 밟게 되었다. 입국 후 서울에서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함께 지낸 그는 얼마 뒤에 조선말을 익히기 위해 용인의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로 내려갔다. 그런 다음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전교하던 내포 지방에서 활동하다가 1864년 9월부터 경기도의 한 지역을 맡아 사목하였다. 당시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신자들에게 성모 신심을 키워주기 위해 특별한 일을 했는데,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 활동했던 칼레 신부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오매트르 신부는 매년 최대한 장엄하게 성모성월 행사를 거행했으며, 교우들에게 이 아름다운 신심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2년 남짓 본격적인 전교 활동을 펼치던 그는 1866년 병인박해의 소문이 나돌고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마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수원의 샘골에서 성사를 주고 있었다. 박해에 대한 소문으로 신자들이 동요하자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성사를 중단하고 신자들을 진정시킨 후 미사와 전례 용구를 모두 감추고 3월 9일 거더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있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를 찾아갔다. 여기서 그는 주교와 성 위앵 루카 신부 등과 함께 하루를 보낸 다음 거더리에서 15리 떨어진 ‘소덜’로 피신하였다. 그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으나 역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3월 11일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거더리에서 체포되자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날 거더리로 와서 자수하였다. 성 위앵 루카 신부도 주교의 편지를 받고 자수하여 거더리로 끌려왔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함께 체포된 주교와 동료 신부와 함께 홍주 관아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3월 19일 포도청에서 두 차례의 신문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이 세상의 형벌은 후세의 상”이라며 당당히 신앙을 증거하였다. 결국 3월 23일 군문효수의 사형선고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처형지인 충청남도 보령 수영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국혼이 가까운 시기라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 나쁜 징조라 하여 멀리 떨어진 보령 수영으로 처형지를 정했다. 그래서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 성 위앵 루카 신부 · 성 황석두 루카 · 성 장주기 요셉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처형장인 갈매못(현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를 포함해 갈매못에서 순교한 5위의 순교자 중에서 성 황석두 루카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홍산 삽티(현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를 거쳐 고향인 연풍 병방골(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 이장했고, 1982년 연풍 순교성지로 천묘하였다. 나머지 4위 순교자들의 시신은 사흘 뒤에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형장 부근에 묻혔다가 6월 초 몇몇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서짓골(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에 매장하였다. 그 후 1882년 3월 제7대 조선 교구장인 블랑(Blanc, 白)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 대교구의 오우라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2년 만인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30일 목록에서 한국의 갈매못에서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와 동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 성 송자선 토마스 – “나는 솔직히 죽는 것을 몹시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죽는 것보다 몇 천배 더 무서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나의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손자선은 충청도 홍주(洪州) 거더리 마을의 3대째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안 주교가 체포된 뒤 압수한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는 기별을 받았으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어, 손자선이 혼자서 물건들을 찾으러 덕산(德山) 관아로 갔다가 체포되었다. 관장은 손자선을 옥에 가두어 고문하며 배교를 강요했지만 굴하지 않자 그를 해미(海美)로 보냈다. 해미에서 두 다리가 부러질 만큼 심한 고문을 받고도 신앙을 지킨 손자선은 결국 공주(公州) 감영으로 이송되어 1866년 3월 30일에 교수형을 받아 2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손자선(孫--, 1844년~1866년 5월 18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의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토마스(Thomas)이다.
생애
손자선은 1844년에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 마을에 있는 3대째 천주교를 믿으며 순교자들을 배출한 매우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손자선은 매우 근면하고 독실한 신자였으며 강인한 신앙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아침과 저녁의 기도를 절대 거르지 않았다. 그의 가정생활은 대대로 이어져 오는 가문의 깊은 신앙을 반영했으며 그 자체가 신앙 고백이었다.
1866년 병인년에 박해가 발발하였다. 3월 11일에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고 며칠 후에, 포졸 몇 명이 손자선이 살고 있는 마을을 급습하였다. 그들은 천주교인들의 가산을 약탈하였다. 교인들의 강한 저항 때문에, 그 고을의 관장은 약탈에 대한 배상을 약속하였다. 손자선은 덕산의 관아로 가서 약탈물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관장은 되려 그에게 배교를 요구했다. 손자선은 그러기를 거절하였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죽는 것이 무섭지만, 저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손자선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거꾸로 매달려 격심하게 매질을 당했고, 그의 입에는 많은 양의 쓰레기가 넣어졌다. 그 어떤 고문도 그를 배교시킬 수 없었다.
그는 상처가 극심하여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다른 수감자들이 그를 보살폈지만, 소용없었다. 손자선은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오셔서 저를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며칠 후에 그의 상처는 모두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한다.
덕산 관장은 손자선을 해미 감옥으로 이송시켰다. 거기서 손자선은 다시 고문을 받았다. 그는 주리를 틀려 다리가 부러졌다. 해미의 관장은 손자선에게 손의 살가죽을 스스로 물어 뜯어내라고 강요하였고, 손자선은 그렇게 하면서까지 배교를 거부했다. 결국 관장은 그를 공주의 감영으로 이송시켜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였다.
그 무렵, 배교하였던 손자선의 삼촌이 찾아와 손자선을 설득했으나, 손자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손자선은 감옥에서도 기도를 거르지 않았고 단식까지 하였다. 공주 관찰사는 손자선이 의식을 잃을 때까지 태형을 가했지만, 손자선은 결코 배교치 않았다. 1866년 5월 18일 결국 관찰사는 손자선의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그렇게 손자선은 2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열흘 뒤에 그의 장례가 치러졌는데, 일설에 따르면, 그의 시신이 썩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시복 · 시성
손자선 토마스는 1968년 10월 6일에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성 손자선 토마스는 충청도 덕산군 홍주면 신리 마을 거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3대째 천주교를 믿는 열심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과 아버지는 1868년에 순교하였고, 그의 당숙 손 니콜라우스(Nicolaus)도 순교하였다. 본래 부지런하면서도 성품이 침착한 그는 나무랄 데 없이 신심이 두텁고 명성이 높았으며, 자기 부인과 함께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을 만큼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전교했고, 순교 자료를 모아 성직자들에게 전하였으며, 그의 집에서 모든 공소 예절을 하였다.
1866년 드디어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포졸들이 손 토마스가 살고 있는 거더리 마을에 들어와 신자 집을 샅샅이 뒤져 많은 물건을 빼앗아 가면서, “손씨 집안에서 누구든 사람을 보내 몰수된 물건을 찾아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고 용감한 손 토마스가 자진하여 덕산 관가에 나가서 찾아온 사유를 밝혔다. 이때 원님이 그에게 천주교인인지 묻자, 그는 자기가 천주교 신자임을 밝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관가에서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고, 곤장을 치다 못해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토마스의 입에 여러 가지 쓰레기를 쏟아부으면서 그때마다 “야, 좋지” 하고 놀려댔다. 손 토마스가 “좋습니다.”라고 응수하자 “그래 무엇이 좋단 말이냐?” 하고 되물었다. 이때 손 토마스는 “나는 오늘까지 며칠을 두고 세수를 못 했었는데 여러분들이 내 얼굴을 씻어 주고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를 흘리게 한 죄인에게는 이같이 좋은 일이 없으며, 또한 목이 몹시 탔었는데 쓸개와 식초 대신 이런 것들을 내 입에 넣어주니 나는 마치 내가 범한 죄들을 마셔버리는 듯해서 무척 즐겁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덕산 원님은 손 토마스를 해미로 압송하였고 해미에서는 더 심한 형벌이 가해졌다. 두 무릎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 양쪽에서 틀자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졌다. 이 참혹한 형벌에도 태연히 버티는 그의 모습이 더욱 가증스러워 더 고생을 시키기 위해서 공주로 압송하였다. 공주에서 원님은 특수한 수단을 생각하여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써 이빨로 너의 손 살점을 물어뜯어 보아라.”고 하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 이빨로 손등을 물어뜯어 피가 흐르게 하였다. 관헌은 배교한다는 고백을 받기 위해 세 번씩이나 곤장을 쳤으나 그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성 손자선은 1866년 부활 전날인 3월 31일 공주 감영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성 황석두 루카 -“나는 이미 천당 가는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이 세상의 과거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재건’이라고도 불렸던 황석두는 충청도 연풍(延豊)의 양반 가문에서 자라나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다가,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하였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하였고, 이에 감동한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나고 교리 지식이 풍부하여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고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으며, 안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 서적 출판에도 참여하였다. 1866년 3월에 먼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안 주교를 몇십 리나 따라간 황석두는 결국 함께 체포되어,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성 황석두 혹은 황재건이라고도 하는 루카(Lucas, 또는 루가)는 충청도 연풍의 부유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가문을 화려하게 번영케 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열심히 글공부를 시켰고,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역시 아버지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15세에 혼인하고, 20세가 되던 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했는데, 그가 묵은 어느 주막에서 천주교 신자를 만나 성교회의 도리를 듣고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천주교 교리책을 여러 권 얻어 집을 떠난 지 3일 만에 부친에게로 되돌아갔다.
부친은 아들이 되돌아온 이유를 알자 분노가 치밀어 아들을 마구 때리고 급기야는 작두를 마당 가운데에 놓고 아들의 목을 작두에 걸게 하였다. 그러나 황 루카가 태연히 목을 내밀자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친의 책망과 모진 매질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그는 2년 이상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벙어리처럼 살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루카는 아버지 앞에 나아가 천주교 교리책을 한번 읽어 보시라고 설득하니, 이때부터 온 집안이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를 서두르게 되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비신자들까지도 루카의 신심과 열성 그리고 이에 못지않은 그의 훌륭한 예의범절에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그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자 루카는 성교회를 위해서 자기 일생을 바칠 것을 주님께 서약하였고, 페레올 주교는 처와 별거한다는 조건 하에 루카를 사제품에 올리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교황청에서 당시 조선 땅에는 여자 수도회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후 페롱(Feron, 權) 신부의 한문 선생 겸 전교회장 일을 맡아 수행하던 황 루카는 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돕게 되었다. 그는 주교와 함께 “회죄직지”를 위해 원고를 썼고,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도와 번역 출판과 그 교정에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포졸들이 다블뤼 주교를 잡으려고 몰려오자, 다블뤼 주교는 루카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권하였다. 그러자 루카는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오늘까지 주교님을 모셔온 제가 피신하다니 될 말입니까? 그래, 주교님은 혼자 천당 가시려는 심사인가요?”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주교와 신부들과 함께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윽고 그는 1866년 3월 23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다블뤼 주교와 다른 두 신부들과 함께 보령 갈매못으로 끌려가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30일이요,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복자 원시장 베드로 (1732-1793)
원(元)시장 베드로는 1732년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 무렵, 곧 56~57세가 되었을 때 사촌 형인 원시보 야고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시장’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어느 날 원 베드로는 집을 떠나 1년 이상 다른 지방에 가서 생활하면서 교리를 공부하였다. 그동안 그는 ‘천주교 신앙이 수천 년 동안 목숨을 보전해 주는 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친척과 친구들에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설명에 힘을 보태 주었고, 친척과 친구들은 마음이 움직여 하느님을 믿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때까지도 그는 세례를 받지 못하였었다.
본디 원 베드로의 성격은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앙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 성격이 변하여 어떠한 일에서나 온화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거나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데 열중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관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원 베드로와 원 야고보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사촌인 원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원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내 원 베드로는 홍주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관장의 어떠한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천주를 배반하거나 동료들을 밀고할 수 없으며, 교회 서적이 있는 곳도 말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관장은 화가 나서 형리들에게 주리를 틀고, 치도곤 70대를 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하느님과 부모님에 대한 본분과 천주교의 참된 도리를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러 달을 옥에 갇혀 있으면서 원 베드로는 자주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고 형벌을 받았는데,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포졸과 형리들에게 전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우가 그를 만나러 옥으로 찾아왔고, 이때 원 베드로는 그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홍주 관장은 감사에게 모든 사실을 보고하였으며, 감사에게서 ‘원시장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관장은 다시 원 베드로를 옥에서 끌어내 갖은 형벌을 가하였지만, 한결같은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관장은 마지막으로 혈육의 정에 호소해 보기로 하였다. 원 베드로를 기다리고 찾는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식들 이야기를 듣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는 제 마음을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 목소리에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홍주 관장은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짓고자 하였다. 그래서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음식을 가져다주도록 하고는, 죽을 때까지 매질하도록 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관장은 다른 방법을 생각한 끝에, 그의 몸에 물을 붓고 밖에 내다 놓아 얼어 죽게 하라고 명하였다.
원시장 베드로가 덮어쓴 물은 이내 얼음으로 변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오로지 주님의 수난만을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에게 바쳤으니, 그때가 1793년 1월 28일(음력 1792년 12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원시장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 복자 원시보 야고보 (1730-1799)
원(元)시보 야고보는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 출신이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 무렵, 곧 그의 나이 60세가 다 되어서야 사촌 동생 원시장 베드로와 함께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시보’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본디 성품이 어질고 순하며 정직하고 활달하였던 원 야고보는, 입교하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며 온갖 덕행을 실천하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재산을 희사하였고, 금요일마다 단식하였으며,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점차 인근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홍주 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즉시 원 야고보와 사촌인 원 베드로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원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원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갖가지 혹형을 받은 뒤 순교하였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원 야고보는 사촌과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795년 무렵, 원 야고보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첩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주 신부에게 성사를 받지 못하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바로 첩을 내보냈다.
이로부터 2년 뒤에는 정사박해가 충청도 전역을 휩쓸게 되었다. 이 와중에서 원 야고보도 1798년에 체포되어 덕산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혹형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를 섬기고 제 영혼을 구하기 위해 천주교를 봉행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홍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덕산으로 끌려와 몹시 두들겨 맞았으며, 형벌로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1799년에 원 야고보는 감사의 명령에 따라 병영(兵營)이 있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가 덕산을 떠나는 날 아내와 자식과 친구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을 따라가서는 안 되네. 모든 고통을 참아 낸다면 기쁨 가운데서 주님과 착하신 동정 마리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그대들이 여기에 있으면 내 마음이 흔들리니 돌아가게. 이성을 잃고 대사(大事)를 그르칠 수는 없네.”
청주에 도착하자마자 원 야고보는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당하였다. 관장은 그를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순교의 원의로 가득 찬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덕산에서 이미 두 다리가 부러졌던 원 야고보에게 다시 온갖 혹형이 가해졌으며, 그는 결국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가 1799년 4월 17일(음력 3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9세였다. 원시보 야고보가 순교한 뒤 그의 육체는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 같았으며, 이 광경을 목격한 약 50가족가량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원시보 야고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 복자 김사집 프란치스코 (1744-1802)
‘성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金)사집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의 비방고지(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창말)에 있는 양가(良家)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공부를 하던 도중에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세속 학문을 버리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에만 노력하였으며, 일상을 기도와 독서로 보냈다.
김 프란치스코의 타고난 슬기와 재능,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 대한 희사와 애긍은 복음 전파의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하여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2년 동안 육식을 삼가면서 교회의 가르침대로 예를 다하였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김 프란치스코가 교우들에게 나누어준 책들은 하나둘씩 포졸들에게 압수되었다. 이내 그의 이름이 관청에 보고되었고, 관청에서는 배교자 2명으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그들이 김 프란치스코의 집을 탐문하고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덕산 관아로 압송된 김 프란치스코는 관장에게 유혹과 형벌을 번갈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관장이 죄수들에게 매질하는 천한 임무를 그에게 맡겼지만, 이것마저도 그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김 프란치스코는 옥중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교우답게 살아가는 데 힘쓰도록 하여라. 그리고 다시는 나를 볼 생각은 하지 말아라.”하고 당부하였다.
같은 해 10월, 김 프란치스코는 해미로 이송되어 치도곤 90대를 맞아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2개월 뒤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청주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엄동설한에 해미에서 청주로 가는 3일간의 180리 길은 김 프란치스코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인종(忍從)과 마음의 평온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청주로 이송된 지 얼마 안 되어 김 프란치스코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많은 구경꾼이 모여 있는 장터(현, 충북 청주시 남주동)로 끌려 나가 곤장 80대를 맞고는 그 자리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5일(음력 1801년 12월 22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목격한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신·망·애 삼덕(三德)이 끝까지 아주 열렬한 것 같았고, 마음이 철석같이 굳었다고 한다.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 신앙의 증인 : 필립 페랭 신부(1885-1950)
필립 페랭(Philippe Perrin, 白文弼 필립보) 신부는 1885년 6월 17일 프랑스 오탱(Autun)교구의 리니쉬르아루(Rigny-sur-Arroux)에서 피에르 페랭(Pierre Perrin)과 바틸드 미쉘(Bathilde Michel)의 2남 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7년 9월 14일 오탱교구 신학생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한 그는 1910년 9월 24일 사제품을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이듬해 1월 14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필립 페랭 신부는 1911년 6월 경기도 능말 본당(현 용문 본당)의 주임으로 사목을 시작하였다. 1912년 4월 경기도 하우현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1919년 9월 다시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 뒤 중국 간도의 삼원봉 본당(현 용정시 영암동) 주임을 거쳐 1921년 5월 충청도 합덕 본당 주임으로 임명된 그는 30년가량 이곳에서 사목하였다.
필립 페랭 신부는 청빈하게 생활하였고, 지역 사회의 복음화 사업, 신자들의 교리 교육과 신심 함양, 성소 계발에 힘썼다. 일찍부터 성영회(聖嬰會) 사업을 통하여 고아들을 돌봐 주었고, 1947년에는 고아원인 소화 보육원을 설립하였다. 또 의무병 시절에 배운 방법으로 약품을 제조하여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손수 치료해 주었고, 가정 형편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교무금을 내도록 하였다. 1929년에는 새 성당을 완공하여 봉헌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필립 페랭 신부는 박노열(바오로) 보좌 신부를 피신시킨 뒤 신자들의 피신 권유에도 이를 뿌리치고 성당을 지켰다. 7월 13일 합덕에 진입한 북한군들은 며칠 뒤 성당에 와서 미사를 드리지 말라고 지시한 뒤 돌아갔다. 그렇지만 필립 페랭 신부는 감시가 소홀한 새벽을 택하여 날마다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으로 들이닥친 북한군들은 수녀들을 찾아내라며 행패를 부렸고, 십자가를 겨누어 총을 쏘려고 하였다. 그러자 필립 페랭 신부는 “거기에 쏘려면 나에게 쏘라.” 하고 외치며 그들을 막아섰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보호할 수 있었다.
7월 말 무렵, 신자들이 다시 필립 페랭 신부를 찾아가 피신을 권유하였다. 그러자 필립 페랭 신부는 이를 뿌리치면서 자신의 단호한 결심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전쟁 후의 교회를 위해서 보좌 신부님은 피난을 보냈지만 나는 안 가지. 북한 노동당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지. 나는 천안의 심 신부(즉 Désiré Polly 신부), 당진의 공 신부(즉 Marius Cordesse 신부) 등 신부님들과 모두 순교하기로 결정했어. 끝까지 남아 교우들과 함께 있다가 순교할 것이야. 고국을 떠날 때 부모님들과 천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이렇게 순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에 왜 가나? 천주께 감사해야지.”
8월 14일, 필립 페랭 신부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하루 앞두고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있었다. 바로 그때 북한군 장교와 내무서원들이 성당으로 들이닥쳤다. 고해소에서 나와 이들을 본 페랭 신부는 이렇게 일갈하였다.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버릇없이 마구 들어와. 너희들은 방에 들어갈 때 신을 신고 무례하게 들어가니? 여긴 성체를 모셔 둔 거룩한 곳이다.” 그러나 북한 노동당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체포하여 당진 내무서로 연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본당의 윤복수 라이문도 회장과 송상원 요한 복사도 함께 체포되었다.
북한 노동당원들은 그 세 명을 일단 당진으로 압송하였다가 8월 22일 또는 24일, 필립 페랭 신부와 당진 본당의 마리우스 코르데스(공 마리오) 신부를 대전 형무소로 이송하였다. 필립 페랭 신부는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도 늘 기쁨 가운데 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정신을 깨우쳐 주었다고 한다. 또 음식이 나오면 조금만 들고 다른 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 뒤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군은 퇴각을 준비하면서 9월 23~26일(또는 9월 25~26일) 사이에 대전 형무소에 감금된 사람들을 형무소 안팎과 우물 등지에서 모두 처형하였다. 이때 필립 페랭 신부도 처형되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나이는 6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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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 강론에서 듣고, 자세하게 쓰여진 순교자들의 삶을 차근차근 읽고 재조명 해보면서 미약한 신앙심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예수님을 가진 사람은 모든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오래전에 가족들과 순례했던 솔뫼성지와 합덕성당~
프란치스꼬 교황님의 기도하시는 동상과 팔짱끼고 한컷하고
감동받고 돌아온 추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조그마한 조선땅으로 하느님을 전하기위해
어떠한 박해도,힘듦도,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던 선교사들,순교자들,성인들~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것이었어라~~
자세히 읽어 내려가면서 눈물,콧물 다뺏습니다~^^
그분들이 계셨기에 우리는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