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시(詩)를 읽다. 8
조재형 시집(詩集) 지문을 수배하다
글구멍이 막혀 살아온 농투성이, 말년에 인감을 내러 면
사무소를 찾았다. 직장에서 말소된 자식의 생계를 복원해
주려 남은 천수답을 내놓은 것,
맨몸으로 황무지를 개간하랴 중노동이 열손가락을 갉아
먹었다. 십지문이 실종되었다고 민원은 반려되었다. 고추
먹은 소리로 삿대질을 해본들 소용이 없다.
몰락한 가문의 정본으로 태어난 노인, 가난을 대대로 복
사한 탓에 사본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이면지처럼 나의 집
헛간을 전전하며
노인을 진본으로 탁본한 곳은 땅이다. 논배미 밭고랑 갈
피마다 삽과 괭이로 밑줄을 그었다. 땀방울로 간인한 흔적
들이 그를 소명한다.
팔순 고개 완등하고 유효기간이 다해가는 상노인. 올봄
도 황소가 끄는 쟁기에 첨부되어 논두렁으로 출석했다. 부
록으로 어깨에 멘 삽날이 지문처럼 문드러져 있다.
[지문을 수배하다 / 조제형]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조금 주책스러워져서 매사에 조금 느려지고 조금 뻔뻔해지고 그래서
조금 더 유들유들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조금 더 배려심이 늘고 조금 더 깊이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일까.
조재형 시인은 나이 먹을수록 배려심이 배가되고 한층 깊어지리라는 믿음이 가는 사람이다.
시문학 40주년 기념 행사장에서 스치듯 인사를 나눈 것이 그와의 인연의 전부지만 그는 시로든 인간으로든
정갈하다.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진실된 시선이 그의 시 속에 오롯이 들어있어서 그의 시를 읽으며
바짝 마른 마음속에 물기가 돈다.
더불어 그의 시어들은 무척이나 일상적이되 왠지 그 일상을 초월한 경지의 냄새가 난다.
벽에 갇힌 옹고집
내구연한이 다하여 빼려는데
꿈쩍도 않는다
벽 위의 그림이
걸작으로 호명되며
햇살 호위 아래 환호할 때
육중한 액자를 등에 업고
혼신으로 혼신으로 버티다
그의 생은
뻘겋게 녹이 슬었다
신념을 위해서는 한 치의 타협이 없다
살과 뼈가 문드러져도
굽히지 않는다
저 완고한 비전향 장기수
[대못 / 조제형]
참 별 것도 아닌 일상과 사물이 그가 지나치면 어느 새 두껍고 무거운 의미를 내포한 특별한 것으로 바뀐다.
그렇다고 그가 현란한 언어의 마술을 부리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의 시들은 단맛이 든 가을무처럼
시원하고 단단하다. 질박하지만 아무 때나 어디서나 만날 수 없는 특별함을 가진 시인과 시.
그리하여 나는 이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인 [지문을 수배하다]를 좋아한다.
나의 좁은 소견머리로 그가 아직은 무명시인임을 그러나 짱짱한 시인임을 은근히 감사해한다.
신발 한 켤레에 눈길이 머문다
중환자실까지 동행한 그는 아버지의 최측근, 살을 섞고
살아온 어머니도 가시밭길 진흙탕길 가리지 않은 그를 넘
어서지는 못한다
그가 평생 누빈 주무대는 아버지가 맨손으로 일궈 놓은
논두렁 밭두렁 맨바닥 길.
불뚝심으로 쌓은 내력이 밑창에 단단히 등재되었다
황소걸음으로 완독한 발자국 주름마다 고단한 그의 연
혁이 층층이 새겨져 있다
노을빛 처마 아래 허허로이 주군을 추념하던 그는, 동행
한 중절모 지팡이와 함께 순장행(旬葬行)을 결심한다
소각장 활주로를 이륙한 닳고 닳은 신발, 새 임지인 하늘
을 향해 검은 비행운을 띄우며 순항한다
아버지 앞에서는 단 한 번 등을 보이지 않은 그의 생애,
송두리째 던져보지 않은 나는 맨몸으로 독파한 그를 통독
하지 못한다
먼길 칩거에 드신 영정 속의 아버지, 줄곧 등을 보이며
살아온 탕자를 다독이려 맨발로 뛰쳐나오신다
[바닥을 읽다/조재형]
시아버지든 친정아버지든 아버지 생각을 떠올리면 조재형 시인의 시 [바닥을 읽다]를 슬며시 펼쳐보게 된다.
평생 아버지의 발이었던 신발 한 켤래가 눈에 와서 박힌다. 가슴이 짠해진다.
이런 마음 찡함과 짠함이 있어서 조재형 시인의 시는 귀하다.
시아버지 기일을 지냈다. 시어머니는 시집오자마자 제사를 물려주셨다. 그 때 내 나이 스믈 넷이고 시어머니
연세 마흔 다섯이셨다. 얼굴도 모르는 시아버지에 시할아버지 그리고 결혼해서 얼마 안돼 돌아가신 시할머니까지
경황도 없이 제사를 물려받았고 그렇게 물려받은 제사는 26년째 내 손으로 준비하고 지내는 집안의 가장 큰 행사가
되었다. 지금 스믈 넷의 아가씨들을 바라보면서 내 지나간 시절을 돌이켜 혼자 혀를 찬다. 나도 저리 어릿어릿 하였을
텐데 그 어린 것에게 덥석 당신 남편 제사는 물론 시할아버지 할머니 제사까지 턱 얹혀준 시어머니야말로 참 대단한
시부모였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투덜거림은 늘 마음속에서 혼자말로다 맴돌다 없어졌고 한 번도 제사 때문에 집안이 시끄럽거나 불편했던 적은
없었으니 이쯤이면 성깔은 못 됐음에도 맏며느리 노릇은 잘 하고 살았다고 자부해도 좋을까.
이번 제사 지방엔 아버님과 더불어 어머니의 지방이 처음으로 함께 올랐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때로는 침묵이 감정을 갈무리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 것을.
막 피어오르는 순정을 전당포에 맡겼다
투박한 눈빛을 담보로 함박꽃을 대여해준 그녀
보통은 패물 시세의 절반이 관례였다
발랄한 그녀는 화주가 맡기려는 바람보다
훨씬 더 많은 설렘으로 환산해 주었다
월 오부에 해당하는 지연금에 대하여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상계해 주었다
나는 하루하루 불면의 밤을 만끽했다
가난하게 연명하던 청춘은 풍요로웠다
질풍노도의 샛길로 접어든 나는
오랜 시간 미로 속을 헤맸다
다시 추억이 도사리는 옛 골목을 찾았을 때
연체로 쌓여가는 변심에 상심한 그녀는
폐문을 하고 멀리 이거한 뒤였다
이제는 수소문해도 찾아볼 수 없다
아, 그리운 내 전당포
[그리운 전당포 / 조제형]
누군들 지나가버린 그리운 시절의 추억 한 조각 쯤 가지고 살지 않으랴. 그럼에도 드러내지 않지만 간곡하며
담백한 표현들이 역시 조재형 시인답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쪼록 나는 그의 시들을 자주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의 시를 읽으며 인생의 깊이를 배우는 기쁨.
하여, 그와 같은 시인이 더 많아지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