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겨울 앳된 얼굴로 키보드와 기타를 앞세운 강력한 사운드와 보컬로 대학가요제 현장을 뒤집어 놓았던 그는 현란한 라이트핸드 주법으로 기타의 간주를 넣고 마지막에 '내 삶이 끝날 때 까지 언제나 그댈 사랑해...'란 가사처럼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과 작별을 했다.
우리 가요계에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밴드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 가시밭길을 가는 것으로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로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기회가 온다.
방송에서 라이브음악을 한다는 건 너무나 힘들고 공연장을 스스로 개척하며 다녀야 하고 그나마 음반을 만드는 과정에서 밴드음악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이합집산되는 구조에서 신해철이 나름 분투하고 대중예술인의 권익을 위해 노력한점은 그의 독설과 기행에 대한 세간의 엇갈리는 반응을 제처 두고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한다.
또한 음악에 대한 혜안도 없이 라다오의 음악DJ 가 되는 우리나라 방송계에서 몇 남지 않은 방송인으로서 그가 청취자 특히 청소년에게 끼친 영향력은 지대하다.
군시절 무한궤도의 첫 독집음반을 사들고 들어가 듣고 곧이어 파생된 01OB의 객원가수로 그리고 솔로 가수로 다시 NEXT라는 슈퍼밴드의 활동을 하면서 실험적이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발표하고 공연한 그는 대단한 가인이고 난사람이었다.
혼탁한 세상에서 자신의 솔직함을 드러냈던 '신해철'
아쉽게도 그의 노래를 현장에서 들어 본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앞으로 육성으로 그를 만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9년전이던가 간호사인 아내가 아기의 마사지를 부업으로 하러 다닌적이 있었다.
우연히 가게 된 것이 당시 용산의 한 아파트에 살던 '신해철의 자택'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면서 집에 보관하고 있던 음반과 비디오테입을 보내 '사인' 을 부탁 한적이 있었다.
일을 다녀온 아내는 빈손으로 돌아와서 난 궁금했고 음반의 행방을 물으니 집엔 아이와 신해철씨의 부인만 있어 부탁을 하기 어려웠는데 부인은 흔쾌히 보관을 했다가 신해철씨에게 사인을 받아 퀵서비스비까지 부담하여 내가 사는 안산으로 다음날 아침 정성껏 보내주었던 적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연예인이라는 거리감이나 까다로움은 없었고 부인도 부인이지만 신해철씨는 기분좋게 사인으로 응답해줘 큰 감동을 받은적이 있었다.
다시 음반을 내고 콘서트를 할 것이란 기대도 있었고 힘찬 날개짓을 할것이라 믿었건만 아까운 사람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 우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