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는 정감록의 십승지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고장으로 손꼽는다. 특히 금계촌은 정감록마을로 이름이 높다. 자연히 정감록 관련 설화가 많이 전승되고 있으며, 이들 설화야 말로 풍기지역의 지역적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줄 것이다. ??정감록??에 의하면 길지로 터잡아 살 만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황해도와 평안도의 서쪽 지역은 곧 삼년 안에 천리에 걸쳐 사람이 밥을 끓인 흔적을 볼 수 없게 되고 또 동협(東狹)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한다. 두 도의 서쪽 지역 사이에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피가 창천(漲天)한데 한강 남쪽 백리에 사람이 어찌 거처하겠는가. 한강 남쪽 백리에는 닭과 개 짓는 소리가 멈추고 사람의 그림자가 영원히 끊어진다. 금강산의 서쪽과 오대산의 북쪽 지역은 12년간 도적이 창궐하고 9년 동안 홍수가 있는데, 12년간의 병화(兵火)를 어느 사람이 피하겠는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는 옛 양반들이 다시 돌아오고 뒷사람들이 점점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자손들을 깊이 묻어두는 것이 마땅하다.
임진강 이북의 평안도와 황해도, 강원도 동쪽, 그리고 한강 남쪽 100리, 오대산 북쪽은 좋지 않은 지역이라며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자손들을 살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북지역에는 난리로 억울하게 죽을 사람들이 많고 인적이 끊어진다고 할 뿐 아니라, 12년간의 전쟁과 9년간의 천재지변도 피할 수 없다고 한다. 가장 전망이 밝고 안전한 지역이 태백산과 소백산의 양백(兩白) 사이에 있는 고장이다. 십승지지 가운데 8개 고장이 모두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풍기읍은 바로 양백 사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최상의 길지인 것이다.
풍기는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후손이 번성한 길지로 가늠되고 있는 지역인데다가, ??정감록??에서 거론하는 십승지지 가운데 제일 첫번째로 드는 곳이 ‘풍기 차암(車岩) 금계촌’이다. 자연히 평안도와 황해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불길하게 여겨서 고향을 떠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려는 생각을 품게 마련이다.
불길한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길한 곳으로 이주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풍기 금계촌을 비롯하여 정감록 마을로 알려진 곳에 이북 주민들이 많이 이주해 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감록마을인 금계리와 삼가리 주민들의 출신지를 조사해 보면 이북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마을에 따라서 28.5% 또는 32.0%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감록을 염두에 두고 피난온 사람들이 전체 주민의 38.4% 또는 32.7%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정감록 신앙을 어느 정도 믿는 사람이 45% 정도 되며, 이북에서 이주해 온 주민은 통일 후에도 그냥 풍기에서 눌러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70%를 넘는다.
풍기에 정감록촌이 형성된 것은 조선조 말엽인 1860년대로서 약 130여년의 역사를 지닌다. 처음에는 지금의 금계리에 감록비결을 믿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감록 신봉자들은 현재 금계 1리의 임실, 장선, 부계밭, 갓발과 용천리의 쇠바리 일대에 걸쳐 광범위하게 정착하였다. 그것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가장 명당에 해당되는 알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 지세를 읽고 해석한 까닭이다. 그러나 일제때 철로가 개설되고 역이 생기면서 읍이 형성되자 점차 금계천의 상류를 따라 웃금계인 욱금리와 삼가리 일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감록 신봉자들은 정감록의 길지 발복을 믿는 까닭에 알게 모르게 은거주의(隱居主義)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삼가리쪽 곧 금계 골짜기 상류로 갈수록 신앙심이 더 강하고 개인주의적 경향성을 보인다.
삼가리 달밭골은 비로사보다 더 골짜기에 위치한 가장 오지이다. 집들이 거의 은폐되어 있는 것처럼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산의 등성이와 숲에 가려서 길에서 쉽게 찾을 수 없다. 독가촌처럼 흩어져 있는 네 집을 찾아갔는데 셋 집은 웃대 어른들이 정감록 신봉자였으며 이북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산 속에 일가들끼리 은거한 탓인지 이화선 할머니(65 세)는 아직도 평안도 사투리를 고스란히 쓰고 있을 정도였다. 한 등 넘어 역시 외따로 사는 이화선 할머니의 시동생 최현철씨는 ‘여기는 속인들이 사는 곳이 아니고 스님이 살던 정법도량(正法道場)’이라고 했다.
그래서 6.25때 많은 패잔병들이 이곳을 지나갔지만 한 건의 불상사도 없었다고 믿는다. 이제 불가에 귀의한 듯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감록 이본이 많지만 어느 것이든 풍기를 십승지의 일승(一勝)으로 기록하고 있다’면서 부친의 말씀을 되새기는 것을 보면, 여전히 정감록의 예언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정감록 비결을 믿는 이들은 십승지지에는 흉년이 들지 않고 난리도 겪지 않을뿐더러 수삼년(數三年) 안에 정도령이 출현하여 신천지를 마련할 것이므로, 터만 잘 잡아서 몸을 숨기고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정감록의 믿음은 금계촌 일대에서 구전으로도 널리 전승되고 있다.
병자호란으로 임금이 남한산성에 피신을 했다가 항복을 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므로 백성들은 다 죽을 지경이나 다름없었다. 정감록을 읽었던 어느 사람은 이 난리 이름을 ‘가하지(家下地)’라 하여, 피란 가지 말고 집 안에 있으라는 뜻인 줄을 알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이웃들이 모두 피난길을 떠나자 가족들도 피난을 떠나야 한다고 극성을 부리자, 눈이 펑펑 쏟아지는 그믐 밤에 피난을 가자며 식구들을 데리고 나섰으나, 사실은 문밖을 나서서 길을 떠나지 않고 밤새도록 집안을 빙빙 돌다가 새벽녘에 도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피난을 갔던 사람들은 도중에 다 죽었는데, 이 집 사람들은 정감록을 따른 결과 피난을 가지 않고 살았다.
이 이야기는 정감록의 예언을 믿도록 하는 구실을 한다. 상식적으로 난리가 나면 피난을 떠나야 살 수 있다. 정감록은 그런 상식을 깨뜨리는 일종의 비결이다. 비결이기 때문에 표현도 암시와 상징, 비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속의 ‘가하지’도 그러한 암시적 표현의 좋은 보기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암시적 표현과 상징의 깊은 뜻을 포착하지 못하면 이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뜻풀이에 따라 이본도 많고 해석도 가지가지이다. 따라서 저마다 비결을 풀기 위해 정감록을 탐독했으며, 정감록의 이해방식에 따라 자신들의 삶을 여러 모로 선택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선택이 이른바 십승지라고 하는 길지를 고르는 일이다. 길지를 고르는 일이므로 넓게는 풍수설과 만날 수밖에 없다.
금계동의 부계밭은 연꽃을 뜻하는 부용전(芙蓉田)에서 온 말이다. 부계밭은 소백산 연화봉 남쪽 줄기를 타고 내려와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을 이루고 있는 까닭이다. 연꽃이 열매가 맺히는 연실(蓮實)이 부계밭 안에 있다.
소백산 아래 독산이 하나 있는데 등황성(登皇城)이라고 한다. 계룡산에 정씨가 도읍을 하면 왕비가 이 곳에서 막 쏟아져나온다. 등황성은 곧 왕이 산에 올라가 논다는 뜻이다.
백신 2동 뒷골에 백수동이라고 있는데, 그 안에 골짜기가 동그랗게 생겨서 6.25때 인민군들이 들어가지 않은 유일한 곳으로서, 수은하(水銀河) 산은하(山銀河) 형국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이야기는 한결같이 점감록 비결과 연관되어 있는 동시에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있는 이야기들이다. 처음 이야기의 부계밭은 풍수지리적으로 연화부수형의 연실에 해당된다. 연실은 곧 연꽃이 열매를 맺는 곳이다. 이 형국을 지닌 땅은 자손이 모두 원만하고 또한 고귀하며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해석된다. 둘째 이야기의 등황성은 정감록 비결에 따른 것이다. 정도령이 나타나서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게 되면 왕비가 쏟아지게 된다는 곳이다. 왕비가 쏟아진다면 부귀영화가 보장되는 길지임에 틀림없다. 왕이 산에 올라가 노닌다는 곳이니 더 이를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셋째 이야기의 수은하 산은하 형국은 그 의미를 자세히 알 수 없다. 풍수지리설의 형국론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형국이지만, 설명으로 보아서 외부로부터 마을이 노출되지 않는 지형이다. 외적들이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안전한 곳이다. 난리를 피하는 데 적지인 것이다. 6.25때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은 사실로서 길지임이 입증되었다.
이처럼 풍기 일대는 지리적으로 길지로 알려진 곳이 많다. 정감록 비결대로 정도령이 출현하면 발복하게 될 전망 있는 마을도 있고, 이미 길지임이 어느 정도 입증된 마을도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일정한 형국을 이루고 있어서 길지로 객관화된 마을도 적지 않다. 그러나 가장 구체적으로 정감록의 예언과 연관되어 있는 마을은 풍기 가운데에도 금계촌이다. 정감록 사상을 믿고 금계 1리 성주뜰에 이주해 온 강경빈 할아버지는 특히 정감록 비결에 밝았다. “일왈풍기 삼조지(一曰豊基 三助地)”라 하면서, “풍기는 세번 도와 준다. 천년 운이 세번 돌아올 땅으로서 삼천년 운을 지니고 있는데, 아직도 금계동에 투철한 인물이 나지 않았고 큰 혜택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앞 로 그럴 가능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전망이다. 그러면서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지를 손으로 꼽아가며 풍기 금계촌이 첫째임을 강조했다.
“정감록에 첫째는 일왈 풍기, 둘째는 이왈 봉화 춘양, 세째는 삼왈 공주 유구마을이라 했으니 풍기가 제일 좋다 이 말씀이여.”하고 풍 가 첫째임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실제 ??정감록??의 기록에도 풍기가 십승지지의 첫째로 손꼽히고 있다. ??정감록??에서는 첫째 풍기 차암 금계촌, 둘째 가야(伽倻), 셋째 공주(公州), 넷째 금당(金堂), 다섯째 영월(寧越), 여섯째 무풍(茂豊), 일곱째 호암(壺岩), 여덟째 운봉(雲峰), 아홉째 화산(花山) 열째 보은(報恩)을 들고 있다. 따라서 둘째는 봉화 춘양이 아니라, 가야(伽倻)로서 지금의 경남 합천 가야산 남쪽 만수리(萬壽里)이다. 이처럼 풍기가 아닌 지역의 경우 다소 틀리긴 해도 풍기에 관한 내용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정감록을 믿고 풍기로 이주해 온 강경빈 할아버지의 증언을 더 들어본다.
예전에 이북 사람들이 여기 많이 와갖구 돈 싸짊어지고 와서, 땅값이 다락긑이 올라가고 집값이 뛰고 그러다가 30년 전에 다 갔부렜어. 못살아서 먹고 살지를 못해서. 길지라는 것은 여간 마음이 굳은 사람 아니면 못배겨. 길지는 어디를 들어가든가 다 고생 해야 돼. 몇십 대를 기다려야 할 보배라. 그것도 적선한 집 자손이래야 되지, 적악한 사람은 들어와서 살지 못해. 몇해 살다가 지절로 가. 누가 가라 소리 안해도.
정감록 마을 주민들의 종전 거주지 통계자료를 굳이 들추어내 확인하지 않아도 이북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간다. 적어도 그들이 정감록을 믿고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면, 앞으로 전쟁의 참화와 천재지변을 겪게 된다는 이북 지역에 더 눌러 살 까닭이 없다. 정감록 비결을 믿고 고향을 떠나 이주를 할 작정이면 십승지지의 으뜸인 풍기를 택하는 것은 당연하다. 벌써 정감록을 익히고 길지를 찾아 고향을 떠날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경제적 사정이나 사회적 지체도 만만치 않다. 이 사람들이 돈을 싸짊어지고 와서 땅값이 다락같이 올랐다고 하는 말이 실감난다. 집값도 뛰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비결의 내용과 달리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어 30년 전에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믿음에 회의를 가졌다면 그럴 만하다. 수 삼년 안에 정도령이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고 했는데, 그러한 조짐이 보이지 않으니 정감록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자연히 정감록촌에 대한 신뢰감도 지속되기 어렵다. 게다가 먹고 살기 어렵다면 더욱이 정감록촌이라는 이주지에 애착을 가질 근거가 없다. 더 나은 곳을 찾아 이주해 온 사람이라면 다시 더 나은 곳을 찾아 이주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반면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생각이 다르다. 달밭골 산골짜기 은폐된 곳에 외따로 집을 짓고 사는 최현철 할아버지 역시 정감록 비결을 믿는 아버지를 따라 이북에서 이주해 왔지만 산골짜기 오두막을 떠나지 않는 까닭은 삶에 대한 남다른 생각을 깨우친 까닭이다. 길지를 찾아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중요한 건 덕을 쌓는 일”이라고 했다. 덕을 쌓아야 길지가 발복한다는 뜻이다. “잘 사는 것은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부족함이 없이 사는 것”이라고 하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길지에 대한 믿음과 삶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뀐 것이다.
금계촌에 머물러 사는 강경빈 할아버지의 생각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위에 인용한 바처럼, 길지에 아무나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누구든지 길지에서 발복의 혜택을 누리려면 몇십 대를 고생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누구나 발복하는 것도 아니다. 적선한 집안의 후손이 고생하며 참고 견뎌야 비로소 길지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적악한 사람들은 길지에서 부지하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발복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길지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은 금시발복을 기대하지 않고 오랜 기간 적선하며 덕을 쌓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윗대 조상이나 이야기꾼 자신도 악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정감록촌에 기대를 걸고 이주해 왔다가 실망하고 마을을 떠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없이 땅과 명당에 대한 일방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라면, 지금까지 계속 머물러 살며 덕을 쌓아가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땅과 사람, 명당과 발복에 관한 건강한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이라 하겠다. 그들은 이미 길지의 혜택을 받고 사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최현철 할아버지는 “잘 사는 건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부족함이 없이 사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는 이미 그런 상태에 이르러 있다. 마음에 부족함 없이 달밭골에서 자연과 더불어 만족한 삶을 누리고 있다. 강경빈 할아버지 또한 적선한 사람의 후예로 자부하면서 계속해서 덕을 쌓아나가리라 믿으며 금계촌에 살고 있다. 땅이 사람의 행복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삶의 양식과 깨달은 정신이 땅의 발복을 보장한다는 생각이다. 땅에 종속되어 있는 타력적 삶이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자력적인 삶을 긍정한다.
자력적인 삶의 인식은 길지를 예언하는 정감록의 믿음에서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감록이 예언한 길지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의 적덕을 더 소중하게 여길 따름이다. 어디서든 덕만 쌓으면 발복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정감록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길지에 대한 발복의 해석이 한층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했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정감록과 같은 비결에 관한 설화나 정도령과 같은 이인에 관한 설화가 적지 않다. 이들 이야기는 정감록의 세계관적 맥락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먼저 비결을 적어놓은 책, 곧 정감록 같은 책에 얽힌 이야기를 본다.
어떤 선비가 비결책을 보니 자기 아들이 몇월 며칠에 벼락맞아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아들이 집안에서 벼락맞아 죽는 꼴을 보지 않기 위해 그 날 멀리 심부름을 보냈다. 아들이 심부름을 가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서 어느 원두막에 비를 피하러 들어갔다가 마침 원두막을 지키던 여자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벼락이 떨어져 여자는 죽고 아들은 살았다. 살아온 아들을 보고 아들로 여기지 않았다. 그 영혼이 찾아온 것으로 알고 문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정확하게 심부름을 다녀온 사실을 확인하고 비결을 의아하게 생각한 선비가 다시 비결책을 들여다 보았더니, 책 한 장이 다른 장에 딱 붙어 있었다. 그 덕에 아들은 죽을 운명을 모면하고 다른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비결책의 신비를 말하는 것이되, 얼핏 들으면 비결이 빗나간 것처럼 듣긴다. 비결의 예언을 믿는 선비와, 그 예언에 따른 운명을 비켜나가는 아들의 이야기인 까닭이다. 사실은 벼락맞아 죽을 아들이 죽지 않음으로써 비결의 신이성이 더 확실하게 입증된다. 비결을 굳게 믿는 선비는 아들을 집밖으로 내 쫓았다. 자기 눈으로 아들이 벼락맞아 죽는 꼴을 차마 볼 수 없어서이다. 그런데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다. 비결을 믿는 사람으로서는 아들이 살아온 것을 믿을 수 없다. 귀신이 온 줄 알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나중에서야 아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비결책을 의심한다. 다시 검토해 보니, 자기 아들의 운명을 기록해 둔 부분이 다른 책장에 딱 붙어 있었음을 발견한다. 책장이 붙어 있는 책의 상태와 같이, 죽을 아들의 운명이 다른 사람에게 붙어서 죽음이 전이(轉移)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비결책은 기록되어 있는 예언의 내용도 정확할 뿐 아니라, 책의 낱장이 지닌 상태까지 운명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러므로 비결이 얼마나 영험한가 하는 것을 절묘하게 나타내고 있다. 풍기지역 주민들이 정감록을 굳게 믿는 근거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마련되기도 했으며, 또한 그러한 믿음이 이러한 설화들을 지어내고 전승하는 동력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