讀書志彌高
김한석
사무용 큰 봉투가 우편으로 배달되었다. 두터운 붓글씨로 쓰여 있는 내 이름 석자, 왠지 느낌이 이상하여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뒷면을 보니 발송인이 두어 달 전 세상을 뜬 친구의 이름이 아닌가. 그의 얼굴이 떠올라 반가우면서도 사자(死者)가 보낸 물건이라 뭔가 께름칙했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보니 나의 등단(登壇)을 축하하는 액자용 붓글씨가 담겨있었다. 등단한 지도 한참 되었으니 오래전에 써놓은 것이 분명한데 대체 언제 부친 것일까. 그 친구, 한량이었으니 생전처럼 팔도강산을 누비며 다니다 목을 축이려 내 집을 찾은 것일까.
영문을 몰라 친구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삼십 년 가까이 서예공부를 해왔는데 그 학원에서 사물함을 정리하다 주소가 적힌 밀봉된 봉투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걸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다 봉투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른 채 그냥 부쳐버렸다나.
그는 평소 술과 친구를 좋아했다. 그러다보니 자주 술자리에 어울렸고 돈도 잘 쓰는데다 성격도 호탕하여 여자들이 줄줄 따랐다. 그래서 세칭 장안의 한량(閑良)이라 했다. 원래 그 친구는 서울 한복판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고래등 같은 집을 지니고 있었으나 밤낮 친구 뒤치다꺼리하느라 가산을 돌보지 않아 살던 집을 팔고 말았다.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부인도 더는 남편의 하는 일을 방관하고 있을 수 없었다. 부인은 이해가 깊은 분이라, 남편이 술 마시는 그 자체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다만 주법에도 절제가 있어야 하니 그것을 좀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당장 이사를 가야하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막연했으나 어떻게든 남편이 착실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이라 나도 그 친구 못지않게 술을 좋아했다. 두주불사(斗酒不辭)라 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선친 밑에서 배운 술이라 과음을 한다거나 몸을 못 가리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자리에 오래 눌러앉아있거나 이삼차로 이어지는 일도 좀처럼 없었으니 술꾼들의 눈에는 매력 없는 사내로 비춰졌을 것이다. 하지만 술 기분은 누구에게도 못지않았다.
그런데 그 친구는 뜻밖에 내 이웃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신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랄까. 어디서 들은 소문인지 부인은 나를 아주 모범적인 친구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참 잘못짚었다는 생각에 나는 황당했다.
환경의 변화는 진정 사람의 행태를 바뀌게 하는 걸까. 여하튼 그 친구는 내 이웃에 이사 온 후로 술을 삼가고 일찍 귀가하는 버릇이 생겼다. 집에 들어올 땐 술 취한 모습 대신 웃는 얼굴로 아이에게 과자를 내밀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부인은 참 좋아했고 모처럼 웃음이 난다고 했다. 귀가하여 술을 마시고 싶을 땐 나를 찾았고, 우리 집 사람이 하는 약국에도 자주 들러 약사 보조원 노릇을 자임하기도 했다. 손님들에게 수다도 떨고 집사람과도 친구처럼 지냈다. 내가 그 친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을까만 이웃하고 있는 동안 두 부부는 매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호인이요, 사교적인 친구였건만 남에게 베풀었던 것에 비해 무엇하나 되돌려 받지 못했다. 돈 뿌리고 다닐 때는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희희낙락거리던 자들도 돈 떨어지니 거의 그 곁을 떠났다. 그래도 그들을 원망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돈에 별 욕심 없던 그는 있으면 쓰고 없으면 없는 대로 그저 분수를 쫓아 살았을 뿐이다. 그렇게 탐욕이 없다보니 세속적인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남들이야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 친구야말로 자기 나름의 인생을 마음껏 즐기며 살다 간 사람이었음을 확신한다.
가끔 그를 만나면 입버릇처럼 “자네가 더 유명해지기 전에 글 한 점 받아 두어야겠다”고 하면 “내가 무슨…” 하면서 말끝을 흐리곤 했다. 겸손함이었다. 그렇게 조를 때는 인색했던 그가 왜 지금에야 글을 내놓는 것일까. 단순히 등단을 축하하는 인사치례만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던 걸까.
그가 써 보낸 글은 讀書志彌高(독서지미고).
-책을 읽으면 지향하고자 하는 뜻을 더욱 높일 수 있다-는 글귀였다. 등단에 머물지 말고, 더욱 정진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라는 충고이리라. 평소에도 더러 듣던 교훈이긴 하나 영혼으로부터의 당부이기에 나에겐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내가 당면하고 있는 절실한 과제를 짚어준 친구.
고맙다 친구야!
첫댓글 시장님 두주불사 하실 때 뵈었었으면....저도 엔간히 마셨는데 요즘은 어떤 정많은 분한테 완전 꼬리 내리고...
빨리 끝내줬으면 합니다. ㅎㅎㅎ!
讀書志彌高
새겨듣겠습니다/구자운
시장님 거사님 일러무삼님 ..이 세분은 두주불사파 이지만 마신후의 매너가 흐트러짐이 없다는것
높이 치하드립니다 시장님의 글속에 인생의 교훈과 친구에 대한 따뜻한 우정이 배어있어서
읽는 내내 흐뭇했습니다 시장님 건강하셔요 사랑합니다 안병남
선배님의 좋은 글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진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