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10월 중순이 되면 나의 이목을 강하게 붙잡는 곳이 하나 있다. 그곳이 어디냐? 바로 성북동(城北洞)에 자리한 간송미술관이다. 우리나라 박물관의 오랜 성지 이자 늦가을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명소로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 1년에 딱 2번, 5월과 10월 중/하순에만 문을 연다. 그외에는 들어가지 못하며, 아무리 열려라 참깨를 외치고 참깨를 집어던져도 안으로 절대 들여보내지 않는다. 문이 활짝 열리면 간송미술관은 다양한 테마로 무료 특별전을 여는데, 그 특별전에 대한 문화 인들의 관심은 지독하기 그지 없어 중독성이 매우 강하다. 그 중독에 빠지면 간송미술관 사립 문이 열리는 날만 애타게 기다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보통 10월 초면 신 문을 통해 특별전 소식이 곳곳에 알려지며, 10월 중순이 되면 빗장이 스르륵 열리면서 방방곳 곳에서 문화인들이 몰려와 박물관의 성지를 순례하며 옛것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한다.
본인 역시 간송미술관 특별전을 기다리는 1인으로 올 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들어가지 못 했다. 어쨌든 가을 특별전 소식을 접하고 토요일에 후배 여인네와 그곳을 찾았는데, 이번에도 퇴짜맞는거 아닌가 걱정이 들었으나 다행히 운이 따라주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여 정 말 느긋하게 미술관을 관람했다.
간송미술관은 나무가 무성하여 산골에 묻힌 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속세와 공기부터가 확연 히 틀려 서울 도심에 있음을 무색하게 하며, 청정한 공기는 속세(俗世)에 오염된 마음과 돌처 럼 굳어버린 머리를 정화시켜 아무리 어려운 그림 이름도 쏙쏙 머리에 들어올 것만 같다.
본글에서는 특별전 그림에 대한 언급은 뺀다. 대신 간송미술관의 내력과 간송 전형필의 생애, 뜨락에 있는 여러 석조 문화유산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간송미술관 정문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정문의 동쪽 기둥에는 '澗松美術館'이라 쓰인 명패가 있고 서쪽 기둥에는 간송미술관 스타일로 특별전 제목이 쓰인 하얀 종이가 붙여져 있다.
★☆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선생의 생애 ☆★
어둠의 시절,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후학을 양성하고자 자신을 헌신한 진정한 대인(大人)의 정석, 간송 전형필, 그는 1906년 부자집안인 정선 전씨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와 휘문고보(현 휘문중고)를 거쳐 왜국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남들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대신 가족들은 대부분 명줄이 짧아 20대에 친가족 대 부분-조부모, 친부모, 양부모<養父母, 간송의 종숙부(從叔父)인 전명기(全命基)가 후사가 없어 그의 양자로 들어감>, 친형제-을 잃었다. 심지어는 보통학교와 대학 졸업 때 그의 양부(종숙부 ) 상과 부친상을 나란히 당해 상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었을 정도다. 이렇게 가족을 죄다 여의 면서 그 집안의 자손은 간송 하나만 남게 되었고, 자연히 일가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 받아 10만 석을 일컫는 조선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와세다대학교 재학 중, 왜인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속국(屬國) 백성의 한을 한을 뼈저리게 느끼 자 '나는 무엇을 해야 되나?' 번민에 빠졌다. 허나 그 답을 구하지 못해 주변 선배와 스승에게 자문을 구했고, 휘문고보 시절 그의 미술 선생이던 고희동(高羲東)이 이 땅의 문화유산을 지킬 것을 권하면서 그의 권유에 감동해 대책 없이 방치된 이 땅의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희동은 그런 제자를 기특히 여겨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을 소개시켜 주었다. 간송은 그를 스승으로 받들며 서화와 도기/자기, 불교 문화유산 등 골동품 식견을 쌓아갔으며, 위창은 골동 품 거간(居間)인 이순황(李淳璜)을 소개하여 그를 돕게 했다. 그리고 1930년, 24살에 이른 간송 은 이순황과 함께 본격적으로 문화유산 수호 사업에 뛰어든다.
간송은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이순황에게 맡기고, 그곳을 교두보로 수많은 문화유산을 수집했다.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의 고서적, 고려청자 등의 자기류,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등 의 서화(書畵), 금동여래입상, 금동삼존불감 등의 불상을 있는데로 사들이고, 1934년 북단장과 함께 1만평 규모의 넓은 뜨락을 조성하면서 석탑과 석불 등을 아낌없이 수집했다. 또한 왜인을 상대로 고미술품을 팔아먹던 인사동(仁寺洞)을 수시로 찾아가 많은 것을 구입했으 며, 왜인들이 군침을 흘리던 문화유산은 미리 선수를 치거나 웃돈을 두둑히 얹혀 사들이니 자연 히 골동품상이 그에게 몰려들어 거래를 했다. 그리고 왜국 동경(東京)에 있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갓스비(John Gadsby)가 자기 나라로 귀국하면 서 소유하던 고려청자를 처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직접 만나 고려청자를 죄다 사들이기도 했으며, 총독부 고위층이 소유한 문화유산을 사들이고자 온고당(溫古堂) 주인인 왜인 골동상 신 보기조(新保喜三)의 도움을 받았다.
그 당시 간송과 그를 돕던 이들의 문화유산 수집 에피소드는 정말로 많았는데, 그중에서 겸재( 謙齋) 정선(鄭敾)의 화첩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왜정 때 이순황과 거래하던 골동상 가운데 장형수(張亨修)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방을 돌며 서화를 구입해 수집가들에게 팔았는데, 1933년경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추계리를 지나다가 친일 파로 악명이 높은 송병준(宋秉畯)의 고래등 기와집을 구경했다. 마침 양지면장이자 중앙자동차 주식회사를 운영하던 송병준의 손자 송재구(宋在龜, 이하 집주인)가 말을 타고 귀가하다가 누구 를 찾냐고 물었다. 그래서 '유명한 댁이라고 해서 지나다가 구경 좀 하고 있소!' 답을 하니, 악질 친일파의 손자라 발작을 하며 쫓아낼줄 알았더만 뜻밖에도 친절을 보이며 안으로 들어가자고 그런다. 사랑방에 자리를 잡자 직업을 묻길래 골동품을 수집한다고 하니, 집주인이 흥미를 보이며 오원 장승업(吾 園 張承業)의 산수화 병풍을 비롯해 고려청자 향합(香盒), 불상 등을 보여줬고, 서로 말이 잘 통해 늦게까지 대화를 하다가 푹 자고 가라고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잠을 자다가 늦은 밤, 소변이 급해 사랑방 한쪽에 붙은 변소를 가는데 마침 그 집 머슴이 군불 을 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서 뭉치를 마구 아궁이에 쑤셔넣고 있길래 문득 직업 본능이 발동하 여 확인해보니 땔감 가운데 초록색 비단으로 꾸민 책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그 책을 보니 글쎄 42폭으로 이루어진 겸재 정선의 42화첩(畵帖)이 아닌가? 그 안에 그 유명한 금강산도(金剛山圖) 가 들어있었다. 좀만 늦었으면 그 그림은 영영 되살릴 수 없는 전설이 되었겠지. 그렇게 정선의 화첩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니 장형수의 때를 잘타는 생리 현상에 우리들은 정말 감사해야 될 것이다.
그 화첩을 서둘러 들고 집주인에게 보이며, 방금 전의 일을 말하자 '그런 일이 있었소!~ 그런건 우리집에 흔하오'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불에 타 없어질 뻔했던 것이니 나에게 파시오' 제안 을 하니 집주인이 흔쾌히 응하자 얼마면 되겠냐고 물으니 '생각해서 낼 만큼만 내시오' 그런다. 그래서 20원을 주고 서울로 가져와 이순황에게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순황은 그 그림을 간송에게 보냈고, 장형수는 간송의 인품에 반해 그의 협력자가 되었다.
간송은 문화유산 수집에만 멈추지 않고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 키고 가꿀 인재를 기르고자 1940년 적자에 허덕이던 보성중학교를 인수했고, 동성학원을 설립하 여 교육 분야에도 아낌없이 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당시 보성중교를 운영하던 고계학원은 학 교 매입금 16만 5천원 외에 학교의 부채와 학교가 소유한 물건까지 값을 매겨 무리한 가격을 요 구했는데, 간송은 쓴소리 하나 없이 장우식, 윤용섭을 통해 대금을 모두 지불했다. 또한 동성학 원 재단설립에 무려 60만원을 들였는데, 이를 위해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에 있던 3,000석 지기 땅을 처분했다.
1945년 8월 이후 11개월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이것이 간송의 유일한 공직생활이었 다. 또한 1950년 이후 고적보존위원회,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60년에는 고고 미술동인회를 세워 문화유산 연구와 서적 편찬에 동분서주하였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재산을 내던지며 문화유산과 교육 발전에 헌신했으나 위인(偉人)은 고난 속에 일찍 죽고 간신배 는 배때기에 기름칠하며 아주 지독하게 오래 사는 이 땅의 더러운 법칙에 따라 야속하리만큼 커 다란 시련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1950년 2월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시행하면서 소작농에게 농지를 분배하고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발행하여 땅주인에게 땅값을 치러주기로 하였다. 허나 6.25전쟁으로 지가증권이 모조리 휴지조 각이 되면서 앉아서 농지를 잃어버린 꼴이 되었으며, 전쟁통에 많은 문화유산과 유동자산을 잃 었다. 거기에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북단장 뜨락마저 무심한 총탄과 폭탄으로 파괴되고 만다. 그런 상 황에 전쟁에서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다시 사들이면서 재정 압박은 갈수록 커져만 갔으며, 1959 년 보성중고교 교장 서원출의 방만 경영으로 엄청난 부채가 쌓이자 이를 해결하고자 동분서주하 던 중 그만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신우염(腎盂炎)으 로 1962년 1월 26일, 56세의 한참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가 그렇게 세상을 뜬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는 문화포장(文化褒章)과 문화훈장(文化勳章)을 추서(追敍)했으며, 고고미술 동인회 회원과 간송의 아들, 제자, 벗들이 그의 수집품을 정리하여 그의 호를 딴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을 열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늘상 생각하는 거지만 그가 없었다면 미술관 수장고와 전시실에 있는 문화유 산 대부분은 일찌감치 해외로 빼돌려지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을 것이다. 1446년에 반포된 한글의 해설서인 훈민정음(訓民正音)도 예외는 아니었겠지. 다행히 하늘의 뜻이 있었는지 그의 품으로 들어갔으며, 그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훈민정음을 구경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가 큰 부자였으니 무량(無量)의 문화유산 수집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수집한 것을 비싸게 팔거나 중개상 노릇을 한 것도 아니며 어떠한 이익 행위도 취하지 않았다. 이 땅의 문화유산을 수집하여 지키고, 그것을 연구하고 가꿀 후학을 양성하고자 거액의 재산을 내던진 것이다. 허나 무리한 지출이 매년 이어지다보니 적지않은 재산을 처분했고 결국 미술관 주변(그래도 꽤나 넒음, 마음 놓고 구경할 수 있는 미술관 보화각 주변은 그 일부에 불과함)과 서울 방학동(放鶴洞) 가옥, 그리고 일부 토지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이윤을 포기한 그의 문화사업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의 큰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의 업적과 문화, 사회적 공헌의 가치는 정말로 값지다 할 것이다.
현재 미술관의 문화유산은 국가 소유가 아닌 간송 일가의 소유이다. 돈과 땅처럼 마음대로 행사 할 수 있는 재산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유동자산 대부분을 문화유산으로 바꾼 것이다. 그의 수집품은 국보나 보물, 지방문화재로 수두룩하게 지정되었고, 특별전 때 소 장 문화유산을 공개하면서 그들의 가치는 연일 하늘을 치고 있다. 왜정 때 1만원을 주고 산 그 림이 지금은 수천~수억을 호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바꿔 말하면 간송의 재산은 줄어든 것 이 아니라 숫자가 모자를 정도로 크게 증가된 셈이다. (간송미술관의 소유 문화유산이 어느 정 도 되는지 아직 구체적인 보고서도 없음) 허나 간송이 그것을 노리고 문화유산 수집에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어둠의 시절을 겪으면서 무방비로 방치된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생각만 했었지 수익을 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문화유산 수호와 민족 교육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자손들도 부유층 수준으 로 넉넉히 살고 있으니 궁색해지지 않는 이상은 문화유산을 팔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배때기를 채우고자 서민들을 쥐어짜고 나라를 팔아먹고 갖은 간계를 부리는 이 땅의 졸부와 권력층과 달리 간송은 그 돈을 정말 어디에 써야 되는지, 어떻게 써야 가치가 높은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몸소 실현한 선각자이다. 적어도 사회 지도층(부유층)이라면 간송의 그런 예를 본받고 행동에 옮겨야 진정 지도층이 아닐까? 지금 이 땅에 간송 같은 위인이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 간송미술관 보화각 2층
★ 간송미술관의 역사 간송 선생은 자신이 사들인 문화유산의 효율적인 보관과 연구를 위한 터전을 짓고자 서울 장안 에서 적당한 터를 물색했다. 1930년대까지 간송미술관 자리에는 구한말에 조선에 들어와 비료장사로 부자가 된 프랑스 사람 브레상이 별장을 짓고 팔자좋게 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로 귀국하고자 별장을 비롯한 인근 숲 1만평을 내놓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간송이 그 땅을 둘러보니 명당(明堂)의 기운이 넘치는 좋은 터였다. 그래서 그 일대를 모두 사들이고 1934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북단장(北壇莊)을 세웠다. 북단장 이란 이름은 옛 선잠단(先蠶壇) 부근에 있다는 뜻으로 오세창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이 갈수록 요란해지자 간송은 근대식 박물관을 짓기로 작정하고 1938년 북 단장 옆에 2층 규모의 보화각을 세웠다. 당시 왜정은 전시체제를 이유로 물자통제를 하고 있었 는데, 그것을 비웃듯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을 수입해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을 들여왔다. 또한 오세창과 박종화(朴鍾和, 간송의 외 종 사촌형) 등 서화계의 원로와 지식인들을 수시로 초빙해 자문을 구했다. 드디어 1938년 7월 5일 보화각 상량식(上樑式)을 가졌는데, 당시 75세였던 오세창은 너무 감격 스러워 다음의 정초명(定礎銘)을 새겼다. '때는 무인년 윤 7월 5일 간송 전군의 보화각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북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에 명(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북곽(北郭, 한양도성)을 굽어본다. 만 품(萬品)이 뒤섞여 새집을 채웠구나, 서화 심히 아름답고, 고동(古董)은 자랑할만, 일가에 모인 것이 천추의 정화로다. 근역(槿域, 우리나라)의 남은 주교(舟橋)로 고구(攷究) 검토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많은 이의 기대 속에 보화각이 탄생했지만 정작 왜정의 태클로 속세에 공개되지도 못했다. 그러 다가 어느 날,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부임기간 1936~1942년)가 보화각을 구경하고 싶다 고 연락을 했다. 총독비서인 스즈끼의 청을 받은 김승현 박사가 간송에게 이를 전하니 간송은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 허나 막상 미나미가 보화각에 도착했을 때는 마중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미나미의 표정은 잔뜩 울상이 되었고, 당황한 김승현은 급히 간송에게 달려가 총독이 왔음을 알리니 그제서야 자 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30분을 기다리게 하고서야 총독을 맞이한 간송은 보화각을 구경시켜주고 응접실에서 홍 차 1잔을 대접해 보냈다고 한다.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반도와 만주를 쥐어짠 조선총독이 간송 에게는 그야말로 하찮은 대접을 받고서도 그저 기다릴 대로 기다리고 보여주는 대로 보고 조용 히 돌아간 것이다.
해방 이후로도 어수선한 시대가 계속되어 개방을 하지 못하다가 1950년 6.25가 터졌다. 불과 3 일만에 북한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북단장과 보화각 정원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고 보화각이 품은 막대한 문화유산은 북한에 의해 북송(北送)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북한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던 최순우(崔淳雨)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에게 보화각 문화유산 을 죄다 포장해서 지정된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그들은 문화유산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감 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奇)씨에게 왜국 판화로 된 춘화(春畵)를 보여주어 흥분시키게 하고 보 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곯아 떨어지게 만들었다. 또한 그 들이 무식한 것을 이용하여 문화유산 선별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서 이건 아니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며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서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오시오. 목수가 없소' 등으로 자꾸 태클을 걸었고 손 재형은 일부러 다리에 붕대를 매 뒤뚱뒤뚱 아픈 시늉까지 하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기가 막힌 지연작전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북한이 책임자를 보내 추궁하려는 찰라 우리군과 유엔 군이 때마침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되었다. 허나 1951년 1.4후퇴로 간송이 급히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유물 대부분을 챙기지 못해 상당수는 분실되고 말았다. (분실된 것 중 상당수는 전쟁 이후 다시 사들임) 6.25이후로도 그의 생전에는 공개되지 못했으며, 그가 별세한 후, 그의 아들 전성우가 부친의 유업을 이어받아 유물을 정리하여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을 세우면서 비로소 천하에 공개되었다.
1971년 '겸재(謙齋)전'을 시작으로 매년 봄, 가을에 특별전을 열고 있으며, 그 특별전에 한해 달랑 30일만 공개하여 상당한 아쉬움을 건넨다. 또한 관람객은 폭증하고 있는데, 전시 공간은 여전히 보화각 1동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관람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많이 부족하고 미술관 홈페 이지도 아직 갖추지 않아 편함을 가중시킨다. 게다가 관람객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경우에는 2~3 시간 심지어는 4~5시간 이상 줄을 서야 되는 등, 관람객을 위한 배려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부디 입장료를 받아도 상관없으니 미술관의 오랜 명성과 간송의 뜻에 걸맞게 이제라도 전시공간 을 확충하고 관람객 편의 제공과 개선에 많은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큰 아쉬움은 보화각 주변을 빼고는 관람객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 (통제의 정 도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음) 통제 사유는 이 일대가 전씨 일가의 소유로 그 일가의 집이 보화각 을 중심으로 북쪽과 동쪽에 넓게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곳곳에 배치된 상당수의 석조 문화유산과 숨겨진 아름다운 공간을 눈에 넣지 못해 무척이나 섭섭하다. 집 뜨락까진 아니더라 도 일단은 보화각과 가깝고 사생활 침해가 미미한 호랑이상과 괴산 외사리 승탑(僧塔,보물 579 호)까지는 적어도 쿨하게 공개를 해주면 좋겠다. 아니면 2012년 11월에 개방된 부암동 석파정( 石坡亭)처럼 입장료(좀 비싸도 상관은 없음)를 받아도 좋으니 공개 범위를 더욱 넓혀주었으면 좋겠다.
간송미술관은 훈민정음과 동국정운, 청자기린형뚜껑향로,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금동3존불감, 혜 원풍속도 화첩 등 국보 13점과 백자박산형뚜껑향로, 금보(琴譜), 금동여래입상, 문경5층석탑 등 보물 10점, 3층석탑과 석조팔각승탑 등 서울지방문화재 4점을 간직하고 있다.
※ 간송미술관 찾아가기 (2013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03번 마을버스를 타 고 성북초교 하차, 버스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100m가면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5분 정도 가볍게 걸어가는 것도 괜찮다. * 미술관 내에 주차시설은 없으며 전시기간 중에는 바로 앞에 있는 성북초교 운동장을 임시로 개방한다. 하지만 가급적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간송미술관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10시~18시이다. (인원이 많은 경우 관람시간 약간 연장 가능) * 특별전 기간에는 전시하는 그림과 문화유산를 다룬 도록을 판매한다. 가격은 2만원선, 내용이 좀 어려운 경향은 있으나, 그런데로 볼만하며 소장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 (☎ 02-762-0442)
♠ 간송미술관의 문턱을 들어서다
▲ 금지된 곳에 아련히 보이는 호랑이상 (사진 중앙에 있음)
미술관 정문을 들어서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 미술관의 본관인 보화각에 이르는데, 왼쪽 대신 매서운 기세로 출입금지라 쓰여진 정면의 길을 보면 수풀 너머로 귀여움이 묻어난 석상 2기가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들이 바로 이 땅에 흔치 않은 호랑이상이다. 예전에 는 눈치를 살살보며 저들까지 올라가곤 했는데, 열정이 많이 식었는지 이제는 그것도 귀찮다.
▲ 호랑이상의 위엄
요즘은 카메라나 스마트폰이 워낙 잘되어있어서 최대한 줌을 땡기면 그들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래도 직접 앞에까지 가서 보는 게 더 좋음) 그들은 무섭고 소름이 돋는 호랑이보다는 밝은 표정에 앙증맞고 귀여운 고양이 같다. 그들은 간 송 선생의 구원으로 이곳에 들어왔는데, 고향과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다.
호랑이상에서 길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숲속에 가려진 주택이 하나 있다. 간송 일가가 머무 는 집의 하나로 여겨지는데, 좀처럼 접근을 못하게 하니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괜히 몰래 접근 하다가 잠복근무중인 멍멍이에게 호되게 쫓기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하기 바라며, 적어도 호랑이 상까지는 접근을 허가해도 괜찮을 듯 싶은데,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보듯 해야 되니 속이 참 쓰릴 정도이다.
▲ 무인석(武人石)들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을 지켰을 그들은 간송 선생에 이끌려 지금은 미술관을 지킨다. 칼을 짚고 서 있는 눈맵시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 날렵한 몸매의 3층석탑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塔身)과 노반, 상륜(相輪)을 갖춘 탑으로 그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 탑으로 여겨진다.
▲ 애꾸눈 석불좌상
간송 선생의 흉상 좌측 수풀 속에 애꾸눈 석불좌상이 숨어있다. 이 불상은 왼쪽 어깨는 옷으로 가리고 오른쪽 어깨는 훤히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하고 있는데, 얼굴은 상당히 망가져 있으며, 오른쪽 눈은 파열되어 거의 애꾸눈처럼 되었다. 머리 부분도 3도 화상을 입었는지 매우 울퉁불퉁하여 무견정상(無見頂相 = 육계)과 머리 스타일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석불의 조성시기는 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로 여겨지나 자세한 신상정보는 모른다. 그 역시 간 송 선생의 구원으로 이곳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가 앉아있는 네모난 대좌(臺座)에는 불법(佛法) 을 지키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 애꾸눈 석불좌상 대좌에 새겨진 다문천왕(多聞天王) 사천왕의 하나로 북쪽을 수호하는 다문천왕이 3층보탑(寶塔)과 창을 들고 있다. 이 석불을 미술관에 올 때마다 꼭 사진에 담았지만 다문천왕은 이번에 처음 본다. 왜 이제서야 그를 보게 된 것일까...? 그의 얼굴이 몸의 2/3를 차지할 정도로 신체비례가 맞지 않는 것처럼 나의 눈도 그리 잘 맞지 않는 모양이다.
♠ 보화각 주변 둘러보기
▲ 간송미술관 보화각(?華閣)
간송미술관이 뜨락은 참 넓지만 건물은 보화각 하나가 전부이다. (그 외에 집들은 간송 일가의 생활공간) 2층 규모의 보화각은 1938년 북단장 옆에 세운 것으로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대리석으로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을 들여 내부를 꾸 몄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인 박길용(朴吉龍, 1898~1943)이 설계한 건물로 의미가 큰데, 이렇게 많은 돈과 정성을 들여 1938년 7월 5일 상량식을 가졌으며, 이때 오세창은 너무 감격하 여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란 뜻에서 보화각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간송미술관 전시실로 쓰이고 있는데, 건물이 워낙 단단하여 크게 손을 보거나 수정을 가한 부분이 없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 관이자 간송의 정신과 체취가 서린 현장으로 요즘 흔한 등록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하여 그 예 우를 해줘야 될 듯 싶은데, 아직 그런 소식까지는 들리지 않는다. 2012년에 방학동에 있는 간송 의 가옥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마당에 말이다.
저 작은 건물에 지금까지 수십만 명이 발걸음을 했고 70년이 넘는 연세에도 끄떡이 없으니 20~ 30년만 넘으면 비리비리해지는 오늘날 건물과 견주어 참 대단한 건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간 송의 정성과 혼이 아낌없이 담긴 탓일 것이다.
◀ 미술관(보화각)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보화각으로 가려면 꽃과 나무, 화분으로 가득한 녹음의 오솔길을 지나야 된다. 이 조그만 오솔 길에는 벽돌이 박혀 있으며, 길 양쪽에는 화분 과 수풀이 가득해 분재(盆栽)시장이나 숲속 산 책로를 거니는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미술관이 맞을까? 의문이 들 정도 로 말이다. 자연물 사이로 망향(望鄕)의 한을 달래는 온갖 석물이 서로를 보듬고 있고, 다른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볼 거리인 공작의 보금자리(사육장)까지 지니고 있 어 관람객의 눈길을 단단히 잡아맨다. 이는 다 른 미술관에서는 감히 상상 조차 거부하는 특이 하고도 살아있는 특별 전시물(?)로 문화와 자연 이 공존하는 간송미술관 만의 묘한 매력이라 하 겠다.
▲ 간송미술관 만의 매력, 공작의 보금자리
▲ 사람 구경에 한참 넋이 나간 하얀 공작의 위엄
▲ 공작의 보금자리 옆에 놓인 녹아버린 2개의 석물 잘 다듬어진 석대(石臺, 무덤의 혼유석이나 석물로 여겨짐) 위에 타다 만 흔적처럼 일부만이 남은 돌덩어리가 초췌하게 놓여져 있다.
▲ 항아리나 함처럼 생긴 조그만 석물
▲ 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호
오솔길을 장식하고 있는 3층석탑은 바닥돌 위에 2중의 기단(基壇)을 얹히고 그 위에 3층의 탑신 을 세운 형태로 1층의 탑신이 2, 3층보다 크다. 지붕돌 받침이 3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고려 초 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탑 높이는 약 3m이다. 기단부의 상대갑석(上臺甲石)과 하대갑석(下 臺甲石)에 새겨진 연꽃무늬가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탑의 고향은 알지 못하며 탑에 관련된 어떠한 정보도 전해 오지를 않는다. 다만 왜인들이 빼 돌리려 한 것을 간송 선생의 구원을 받았으나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기억상실증에 걸 린 양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미술관 뜰의 장식물이 되었다.
◀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1호 3층석탑 옆에는 듬직하게 생긴 석불 1구가 높은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두 손을 위아래로 잡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어 비로자나불 임을 알 수 있는데, 석불의 전체 높이는 약 3m 정도이다. 그의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로 머 리 꼭대기에는 상투 비슷하게 육계(肉? = 無見 頂相)가 솟아 있으며 얼굴은 살이 많아 인심이 후박한 뚱보 아지매 같다. 불상이 앉은 대좌(臺座)에는 연꽃(앙련)이 새겨 져 있고, 대좌 아래 기단(基壇)에는 결가부좌를 한 조그만 석불이 4면에 새겨져 있다, 이들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끝없는 명상에 나래를 누리 고 있는데 그 뒤로 두툼하게 생긴 동그란 두광( 頭光)과 신광(身光)이 눈에 띈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고려 중기로 여겨지며 자세한 정보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 역시 간송 선생 의 구원에 이끌려 이곳에 안착했으며, 평퍼짐한 엉덩이가 인상적인 그의 뒷모습도 풍만스럽다.
▲ 대좌 기단에 새겨진 석불 - 선정인의 포즈로 웅크리고 앉아 명상의 나래를 펼친다.
▲ 주인 잃은 광배(光背)의 비애
광배에 새겨진 꽃무늬들이 마치 살아 숨쉬는 것 같다. 저 광배에 등을 기댔을 석불은 어디로 간 것일까? 광배는 혹여 찾아올지도 모를 자신의 님을 기다리며 오늘도 화사한 무늬를 펼쳐 보인다. 내가 저 앞에 앉으면 나도 광배를 갖춘 부처나 보살이 되는 걸까? 다음에 오면 그 앞에 결가부 좌로 살짝 앉고 싶다. (그러다가 관람객들에게 싸대기 맞는건 아닌지..?)
◀ 석조비로사나불 옆에 자리한 석등(石燈) 그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다.
▲ 오랜만에 문을 연 보화각 현관
▲ 보화각 현관 좌측 석사자
▲ 보화각 현관 우측 석사자
보화각 현관 주변에는 제법 무서운 티가 풍기는 3개의 석사자가 미술관을 지킨다. 현관 바로 옆 에 자리한 석사자는 크게 으르렁거리듯 입을 대문만큼 벌리며 관람객들에게 조용히 관람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현관 앞에는 석사자 2개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모습은 비슷하다.
현관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우측 사자는 오른쪽 발로 구슬을 축구공처럼 만지고 있고, 좌 측 사자는 특이하게 그의 새끼와 발을 맞대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발 밑에 새끼 사자가 누워 어미의 발과 맞장구 치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 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보화각 남쪽 산책로
▲ 금지된 땅 - 간송미술관 북쪽(서북쪽) 언덕
보화각 북쪽에는 녹음이 짙은 언덕길이 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사색하며 거닐고 싶은 그 언 덕길의 끝에는 간송 일가의 저택이 있으며, 길이 3갈래로 갈린 중턱에는 석조팔각승탑과 석인( 石人)이 있다. 예전에는 중턱까진 접근이 가능했으나 이번에 갔을 때는 바리케이트도 모자라 사 람까지 배치해 감시를 한다. 그래서 간송미술관에 갈 때마다 무조건 사진에 담는 석조팔각승탑(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호)와 괴산 외사리 승탑(보물 579호)을 사진에 담지 못했다. 저렇게 길 을 막는데 내가 권력층이 아닌 이상 무슨 수로 들어가겠는가..? 금지된 구역에 들어가는 경우 관계자의 허가를 받아야 되나 그것도 쉽지가 않다. 눈치껏 살짝 들어가 사진에 담아도 되지만 통제가 심해지니 이러다가는 저 언덕길도 오르지 못하는 것은 아 닌지 모르겠다.
통제구역과 간송 저택 뜰에는 망향의 한을 간직한 석탑, 불상, 승탑, 문인석 등 다양한 석조문 화유산들이 베일에 가린 채 은둔해 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입장료를 받아도 좋으니 제발 속세에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괜찮은 것들만 추스려 보화각 주변에 끄집어내는 것도 괜 찮을 것이다.
이번에 못본 석조팔각승탑과 괴산 외사리 승탑. 문경5층석탑 등이 궁금하다면 이전에 쓴 간송미 술관 답사기를 쿨하게 참조하기 바란다. (☞ 관련글 보러가기)
▲ 내년 봄을 그리며 간송미술관과 작별을 고하다.
이렇게 하여 간송미술관 가을 특별전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미술관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답 사객의 발길은 여전했다. 봄과 가을이 한참이나 머물렀다 가는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곳, 미술 관을 알록달록 수놓은 늦가을 풍경은 내년 특별전에서도 변치않는 모습으로 문화에 목마른 사람 들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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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10월 중순이 되면 나의 이목을 강하게 붙잡는 곳이 하나 있다. 그곳이 어디냐? 바로 성북동(城北洞)에 자리한 간송미술관이다. 우리나라 박물관의 오랜 성지 이자 늦가을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명소로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 1년에 딱 2번, 5월과 10월 중/하순에만 문을 연다. 그외에는 들어가지 못하며, 아무리 열려라 참깨를 외치고 참깨를 집어던져도 안으로 절대 들여보내지 않는다. 문이 활짝 열리면 간송미술관은 다양한 테마로 무료 특별전을 여는데, 그 특별전에 대한 문화 인들의 관심은 지독하기 그지 없어 중독성이 매우 강하다. 그 중독에 빠지면 간송미술관 사립 문이 열리는 날만 애타게 기다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보통 10월 초면 신 문을 통해 특별전 소식이 곳곳에 알려지며, 10월 중순이 되면 빗장이 스르륵 열리면서 방방곳 곳에서 문화인들이 몰려와 박물관의 성지를 순례하며 옛것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한다.
본인 역시 간송미술관 특별전을 기다리는 1인으로 올 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들어가지 못 했다. 어쨌든 가을 특별전 소식을 접하고 토요일에 후배 여인네와 그곳을 찾았는데, 이번에도 퇴짜맞는거 아닌가 걱정이 들었으나 다행히 운이 따라주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여 정 말 느긋하게 미술관을 관람했다.
간송미술관은 나무가 무성하여 산골에 묻힌 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속세와 공기부터가 확연 히 틀려 서울 도심에 있음을 무색하게 하며, 청정한 공기는 속세(俗世)에 오염된 마음과 돌처 럼 굳어버린 머리를 정화시켜 아무리 어려운 그림 이름도 쏙쏙 머리에 들어올 것만 같다.
본글에서는 특별전 그림에 대한 언급은 뺀다. 대신 간송미술관의 내력과 간송 전형필의 생애, 뜨락에 있는 여러 석조 문화유산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간송미술관 정문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정문의 동쪽 기둥에는 '澗松美術館'이라 쓰인 명패가 있고 서쪽 기둥에는 간송미술관 스타일로 특별전 제목이 쓰인 하얀 종이가 붙여져 있다.
★☆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선생의 생애 ☆★
어둠의 시절,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후학을 양성하고자 자신을 헌신한 진정한 대인(大人)의 정석, 간송 전형필, 그는 1906년 부자집안인 정선 전씨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와 휘문고보(현 휘문중고)를 거쳐 왜국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남들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대신 가족들은 대부분 명줄이 짧아 20대에 친가족 대 부분-조부모, 친부모, 양부모<養父母, 간송의 종숙부(從叔父)인 전명기(全命基)가 후사가 없어 그의 양자로 들어감>, 친형제-을 잃었다. 심지어는 보통학교와 대학 졸업 때 그의 양부(종숙부 ) 상과 부친상을 나란히 당해 상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었을 정도다. 이렇게 가족을 죄다 여의 면서 그 집안의 자손은 간송 하나만 남게 되었고, 자연히 일가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 받아 10만 석을 일컫는 조선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와세다대학교 재학 중, 왜인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속국(屬國) 백성의 한을 한을 뼈저리게 느끼 자 '나는 무엇을 해야 되나?' 번민에 빠졌다. 허나 그 답을 구하지 못해 주변 선배와 스승에게 자문을 구했고, 휘문고보 시절 그의 미술 선생이던 고희동(高羲東)이 이 땅의 문화유산을 지킬 것을 권하면서 그의 권유에 감동해 대책 없이 방치된 이 땅의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희동은 그런 제자를 기특히 여겨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을 소개시켜 주었다. 간송은 그를 스승으로 받들며 서화와 도기/자기, 불교 문화유산 등 골동품 식견을 쌓아갔으며, 위창은 골동 품 거간(居間)인 이순황(李淳璜)을 소개하여 그를 돕게 했다. 그리고 1930년, 24살에 이른 간송 은 이순황과 함께 본격적으로 문화유산 수호 사업에 뛰어든다.
간송은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이순황에게 맡기고, 그곳을 교두보로 수많은 문화유산을 수집했다.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의 고서적, 고려청자 등의 자기류,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등 의 서화(書畵), 금동여래입상, 금동삼존불감 등의 불상을 있는데로 사들이고, 1934년 북단장과 함께 1만평 규모의 넓은 뜨락을 조성하면서 석탑과 석불 등을 아낌없이 수집했다. 또한 왜인을 상대로 고미술품을 팔아먹던 인사동(仁寺洞)을 수시로 찾아가 많은 것을 구입했으 며, 왜인들이 군침을 흘리던 문화유산은 미리 선수를 치거나 웃돈을 두둑히 얹혀 사들이니 자연 히 골동품상이 그에게 몰려들어 거래를 했다. 그리고 왜국 동경(東京)에 있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갓스비(John Gadsby)가 자기 나라로 귀국하면 서 소유하던 고려청자를 처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직접 만나 고려청자를 죄다 사들이기도 했으며, 총독부 고위층이 소유한 문화유산을 사들이고자 온고당(溫古堂) 주인인 왜인 골동상 신 보기조(新保喜三)의 도움을 받았다.
그 당시 간송과 그를 돕던 이들의 문화유산 수집 에피소드는 정말로 많았는데, 그중에서 겸재( 謙齋) 정선(鄭敾)의 화첩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왜정 때 이순황과 거래하던 골동상 가운데 장형수(張亨修)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방을 돌며 서화를 구입해 수집가들에게 팔았는데, 1933년경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추계리를 지나다가 친일 파로 악명이 높은 송병준(宋秉畯)의 고래등 기와집을 구경했다. 마침 양지면장이자 중앙자동차 주식회사를 운영하던 송병준의 손자 송재구(宋在龜, 이하 집주인)가 말을 타고 귀가하다가 누구 를 찾냐고 물었다. 그래서 '유명한 댁이라고 해서 지나다가 구경 좀 하고 있소!' 답을 하니, 악질 친일파의 손자라 발작을 하며 쫓아낼줄 알았더만 뜻밖에도 친절을 보이며 안으로 들어가자고 그런다. 사랑방에 자리를 잡자 직업을 묻길래 골동품을 수집한다고 하니, 집주인이 흥미를 보이며 오원 장승업(吾 園 張承業)의 산수화 병풍을 비롯해 고려청자 향합(香盒), 불상 등을 보여줬고, 서로 말이 잘 통해 늦게까지 대화를 하다가 푹 자고 가라고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잠을 자다가 늦은 밤, 소변이 급해 사랑방 한쪽에 붙은 변소를 가는데 마침 그 집 머슴이 군불 을 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서 뭉치를 마구 아궁이에 쑤셔넣고 있길래 문득 직업 본능이 발동하 여 확인해보니 땔감 가운데 초록색 비단으로 꾸민 책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그 책을 보니 글쎄 42폭으로 이루어진 겸재 정선의 42화첩(畵帖)이 아닌가? 그 안에 그 유명한 금강산도(金剛山圖) 가 들어있었다. 좀만 늦었으면 그 그림은 영영 되살릴 수 없는 전설이 되었겠지. 그렇게 정선의 화첩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니 장형수의 때를 잘타는 생리 현상에 우리들은 정말 감사해야 될 것이다.
그 화첩을 서둘러 들고 집주인에게 보이며, 방금 전의 일을 말하자 '그런 일이 있었소!~ 그런건 우리집에 흔하오'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불에 타 없어질 뻔했던 것이니 나에게 파시오' 제안 을 하니 집주인이 흔쾌히 응하자 얼마면 되겠냐고 물으니 '생각해서 낼 만큼만 내시오' 그런다. 그래서 20원을 주고 서울로 가져와 이순황에게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순황은 그 그림을 간송에게 보냈고, 장형수는 간송의 인품에 반해 그의 협력자가 되었다.
간송은 문화유산 수집에만 멈추지 않고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 키고 가꿀 인재를 기르고자 1940년 적자에 허덕이던 보성중학교를 인수했고, 동성학원을 설립하 여 교육 분야에도 아낌없이 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당시 보성중교를 운영하던 고계학원은 학 교 매입금 16만 5천원 외에 학교의 부채와 학교가 소유한 물건까지 값을 매겨 무리한 가격을 요 구했는데, 간송은 쓴소리 하나 없이 장우식, 윤용섭을 통해 대금을 모두 지불했다. 또한 동성학 원 재단설립에 무려 60만원을 들였는데, 이를 위해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에 있던 3,000석 지기 땅을 처분했다.
1945년 8월 이후 11개월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이것이 간송의 유일한 공직생활이었 다. 또한 1950년 이후 고적보존위원회,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60년에는 고고 미술동인회를 세워 문화유산 연구와 서적 편찬에 동분서주하였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재산을 내던지며 문화유산과 교육 발전에 헌신했으나 위인(偉人)은 고난 속에 일찍 죽고 간신배 는 배때기에 기름칠하며 아주 지독하게 오래 사는 이 땅의 더러운 법칙에 따라 야속하리만큼 커 다란 시련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1950년 2월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시행하면서 소작농에게 농지를 분배하고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발행하여 땅주인에게 땅값을 치러주기로 하였다. 허나 6.25전쟁으로 지가증권이 모조리 휴지조 각이 되면서 앉아서 농지를 잃어버린 꼴이 되었으며, 전쟁통에 많은 문화유산과 유동자산을 잃 었다. 거기에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북단장 뜨락마저 무심한 총탄과 폭탄으로 파괴되고 만다. 그런 상 황에 전쟁에서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다시 사들이면서 재정 압박은 갈수록 커져만 갔으며, 1959 년 보성중고교 교장 서원출의 방만 경영으로 엄청난 부채가 쌓이자 이를 해결하고자 동분서주하 던 중 그만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신우염(腎盂炎)으 로 1962년 1월 26일, 56세의 한참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가 그렇게 세상을 뜬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는 문화포장(文化褒章)과 문화훈장(文化勳章)을 추서(追敍)했으며, 고고미술 동인회 회원과 간송의 아들, 제자, 벗들이 그의 수집품을 정리하여 그의 호를 딴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을 열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늘상 생각하는 거지만 그가 없었다면 미술관 수장고와 전시실에 있는 문화유 산 대부분은 일찌감치 해외로 빼돌려지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을 것이다. 1446년에 반포된 한글의 해설서인 훈민정음(訓民正音)도 예외는 아니었겠지. 다행히 하늘의 뜻이 있었는지 그의 품으로 들어갔으며, 그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훈민정음을 구경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가 큰 부자였으니 무량(無量)의 문화유산 수집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수집한 것을 비싸게 팔거나 중개상 노릇을 한 것도 아니며 어떠한 이익 행위도 취하지 않았다. 이 땅의 문화유산을 수집하여 지키고, 그것을 연구하고 가꿀 후학을 양성하고자 거액의 재산을 내던진 것이다. 허나 무리한 지출이 매년 이어지다보니 적지않은 재산을 처분했고 결국 미술관 주변(그래도 꽤나 넒음, 마음 놓고 구경할 수 있는 미술관 보화각 주변은 그 일부에 불과함)과 서울 방학동(放鶴洞) 가옥, 그리고 일부 토지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이윤을 포기한 그의 문화사업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의 큰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의 업적과 문화, 사회적 공헌의 가치는 정말로 값지다 할 것이다.
현재 미술관의 문화유산은 국가 소유가 아닌 간송 일가의 소유이다. 돈과 땅처럼 마음대로 행사 할 수 있는 재산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유동자산 대부분을 문화유산으로 바꾼 것이다. 그의 수집품은 국보나 보물, 지방문화재로 수두룩하게 지정되었고, 특별전 때 소 장 문화유산을 공개하면서 그들의 가치는 연일 하늘을 치고 있다. 왜정 때 1만원을 주고 산 그 림이 지금은 수천~수억을 호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바꿔 말하면 간송의 재산은 줄어든 것 이 아니라 숫자가 모자를 정도로 크게 증가된 셈이다. (간송미술관의 소유 문화유산이 어느 정 도 되는지 아직 구체적인 보고서도 없음) 허나 간송이 그것을 노리고 문화유산 수집에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어둠의 시절을 겪으면서 무방비로 방치된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생각만 했었지 수익을 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문화유산 수호와 민족 교육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자손들도 부유층 수준으 로 넉넉히 살고 있으니 궁색해지지 않는 이상은 문화유산을 팔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배때기를 채우고자 서민들을 쥐어짜고 나라를 팔아먹고 갖은 간계를 부리는 이 땅의 졸부와 권력층과 달리 간송은 그 돈을 정말 어디에 써야 되는지, 어떻게 써야 가치가 높은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몸소 실현한 선각자이다. 적어도 사회 지도층(부유층)이라면 간송의 그런 예를 본받고 행동에 옮겨야 진정 지도층이 아닐까? 지금 이 땅에 간송 같은 위인이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 간송미술관 보화각 2층
★ 간송미술관의 역사 간송 선생은 자신이 사들인 문화유산의 효율적인 보관과 연구를 위한 터전을 짓고자 서울 장안 에서 적당한 터를 물색했다. 1930년대까지 간송미술관 자리에는 구한말에 조선에 들어와 비료장사로 부자가 된 프랑스 사람 브레상이 별장을 짓고 팔자좋게 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로 귀국하고자 별장을 비롯한 인근 숲 1만평을 내놓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간송이 그 땅을 둘러보니 명당(明堂)의 기운이 넘치는 좋은 터였다. 그래서 그 일대를 모두 사들이고 1934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북단장(北壇莊)을 세웠다. 북단장 이란 이름은 옛 선잠단(先蠶壇) 부근에 있다는 뜻으로 오세창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이 갈수록 요란해지자 간송은 근대식 박물관을 짓기로 작정하고 1938년 북 단장 옆에 2층 규모의 보화각을 세웠다. 당시 왜정은 전시체제를 이유로 물자통제를 하고 있었 는데, 그것을 비웃듯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을 수입해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을 들여왔다. 또한 오세창과 박종화(朴鍾和, 간송의 외 종 사촌형) 등 서화계의 원로와 지식인들을 수시로 초빙해 자문을 구했다. 드디어 1938년 7월 5일 보화각 상량식(上樑式)을 가졌는데, 당시 75세였던 오세창은 너무 감격 스러워 다음의 정초명(定礎銘)을 새겼다. '때는 무인년 윤 7월 5일 간송 전군의 보화각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북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에 명(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북곽(北郭, 한양도성)을 굽어본다. 만 품(萬品)이 뒤섞여 새집을 채웠구나, 서화 심히 아름답고, 고동(古董)은 자랑할만, 일가에 모인 것이 천추의 정화로다. 근역(槿域, 우리나라)의 남은 주교(舟橋)로 고구(攷究) 검토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많은 이의 기대 속에 보화각이 탄생했지만 정작 왜정의 태클로 속세에 공개되지도 못했다. 그러 다가 어느 날,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부임기간 1936~1942년)가 보화각을 구경하고 싶다 고 연락을 했다. 총독비서인 스즈끼의 청을 받은 김승현 박사가 간송에게 이를 전하니 간송은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 허나 막상 미나미가 보화각에 도착했을 때는 마중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미나미의 표정은 잔뜩 울상이 되었고, 당황한 김승현은 급히 간송에게 달려가 총독이 왔음을 알리니 그제서야 자 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30분을 기다리게 하고서야 총독을 맞이한 간송은 보화각을 구경시켜주고 응접실에서 홍 차 1잔을 대접해 보냈다고 한다.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반도와 만주를 쥐어짠 조선총독이 간송 에게는 그야말로 하찮은 대접을 받고서도 그저 기다릴 대로 기다리고 보여주는 대로 보고 조용 히 돌아간 것이다.
해방 이후로도 어수선한 시대가 계속되어 개방을 하지 못하다가 1950년 6.25가 터졌다. 불과 3 일만에 북한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북단장과 보화각 정원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고 보화각이 품은 막대한 문화유산은 북한에 의해 북송(北送)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북한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던 최순우(崔淳雨)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에게 보화각 문화유산 을 죄다 포장해서 지정된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그들은 문화유산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감 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奇)씨에게 왜국 판화로 된 춘화(春畵)를 보여주어 흥분시키게 하고 보 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곯아 떨어지게 만들었다. 또한 그 들이 무식한 것을 이용하여 문화유산 선별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서 이건 아니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며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서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오시오. 목수가 없소' 등으로 자꾸 태클을 걸었고 손 재형은 일부러 다리에 붕대를 매 뒤뚱뒤뚱 아픈 시늉까지 하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기가 막힌 지연작전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북한이 책임자를 보내 추궁하려는 찰라 우리군과 유엔 군이 때마침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되었다. 허나 1951년 1.4후퇴로 간송이 급히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유물 대부분을 챙기지 못해 상당수는 분실되고 말았다. (분실된 것 중 상당수는 전쟁 이후 다시 사들임) 6.25이후로도 그의 생전에는 공개되지 못했으며, 그가 별세한 후, 그의 아들 전성우가 부친의 유업을 이어받아 유물을 정리하여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을 세우면서 비로소 천하에 공개되었다.
1971년 '겸재(謙齋)전'을 시작으로 매년 봄, 가을에 특별전을 열고 있으며, 그 특별전에 한해 달랑 30일만 공개하여 상당한 아쉬움을 건넨다. 또한 관람객은 폭증하고 있는데, 전시 공간은 여전히 보화각 1동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관람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많이 부족하고 미술관 홈페 이지도 아직 갖추지 않아 편함을 가중시킨다. 게다가 관람객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경우에는 2~3 시간 심지어는 4~5시간 이상 줄을 서야 되는 등, 관람객을 위한 배려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부디 입장료를 받아도 상관없으니 미술관의 오랜 명성과 간송의 뜻에 걸맞게 이제라도 전시공간 을 확충하고 관람객 편의 제공과 개선에 많은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큰 아쉬움은 보화각 주변을 빼고는 관람객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 (통제의 정 도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음) 통제 사유는 이 일대가 전씨 일가의 소유로 그 일가의 집이 보화각 을 중심으로 북쪽과 동쪽에 넓게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곳곳에 배치된 상당수의 석조 문화유산과 숨겨진 아름다운 공간을 눈에 넣지 못해 무척이나 섭섭하다. 집 뜨락까진 아니더라 도 일단은 보화각과 가깝고 사생활 침해가 미미한 호랑이상과 괴산 외사리 승탑(僧塔,보물 579 호)까지는 적어도 쿨하게 공개를 해주면 좋겠다. 아니면 2012년 11월에 개방된 부암동 석파정( 石坡亭)처럼 입장료(좀 비싸도 상관은 없음)를 받아도 좋으니 공개 범위를 더욱 넓혀주었으면 좋겠다.
간송미술관은 훈민정음과 동국정운, 청자기린형뚜껑향로,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금동3존불감, 혜 원풍속도 화첩 등 국보 13점과 백자박산형뚜껑향로, 금보(琴譜), 금동여래입상, 문경5층석탑 등 보물 10점, 3층석탑과 석조팔각승탑 등 서울지방문화재 4점을 간직하고 있다.
※ 간송미술관 찾아가기 (2013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03번 마을버스를 타 고 성북초교 하차, 버스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100m가면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5분 정도 가볍게 걸어가는 것도 괜찮다. * 미술관 내에 주차시설은 없으며 전시기간 중에는 바로 앞에 있는 성북초교 운동장을 임시로 개방한다. 하지만 가급적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간송미술관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10시~18시이다. (인원이 많은 경우 관람시간 약간 연장 가능) * 특별전 기간에는 전시하는 그림과 문화유산를 다룬 도록을 판매한다. 가격은 2만원선, 내용이 좀 어려운 경향은 있으나, 그런데로 볼만하며 소장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 (☎ 02-762-0442)
♠ 간송미술관의 문턱을 들어서다
▲ 금지된 곳에 아련히 보이는 호랑이상 (사진 중앙에 있음)
미술관 정문을 들어서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 미술관의 본관인 보화각에 이르는데, 왼쪽 대신 매서운 기세로 출입금지라 쓰여진 정면의 길을 보면 수풀 너머로 귀여움이 묻어난 석상 2기가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들이 바로 이 땅에 흔치 않은 호랑이상이다. 예전에 는 눈치를 살살보며 저들까지 올라가곤 했는데, 열정이 많이 식었는지 이제는 그것도 귀찮다.
▲ 호랑이상의 위엄
요즘은 카메라나 스마트폰이 워낙 잘되어있어서 최대한 줌을 땡기면 그들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래도 직접 앞에까지 가서 보는 게 더 좋음) 그들은 무섭고 소름이 돋는 호랑이보다는 밝은 표정에 앙증맞고 귀여운 고양이 같다. 그들은 간 송 선생의 구원으로 이곳에 들어왔는데, 고향과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다.
호랑이상에서 길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숲속에 가려진 주택이 하나 있다. 간송 일가가 머무 는 집의 하나로 여겨지는데, 좀처럼 접근을 못하게 하니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괜히 몰래 접근 하다가 잠복근무중인 멍멍이에게 호되게 쫓기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하기 바라며, 적어도 호랑이 상까지는 접근을 허가해도 괜찮을 듯 싶은데,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보듯 해야 되니 속이 참 쓰릴 정도이다.
▲ 무인석(武人石)들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을 지켰을 그들은 간송 선생에 이끌려 지금은 미술관을 지킨다. 칼을 짚고 서 있는 눈맵시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 날렵한 몸매의 3층석탑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塔身)과 노반, 상륜(相輪)을 갖춘 탑으로 그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 탑으로 여겨진다.
▲ 애꾸눈 석불좌상
간송 선생의 흉상 좌측 수풀 속에 애꾸눈 석불좌상이 숨어있다. 이 불상은 왼쪽 어깨는 옷으로 가리고 오른쪽 어깨는 훤히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하고 있는데, 얼굴은 상당히 망가져 있으며, 오른쪽 눈은 파열되어 거의 애꾸눈처럼 되었다. 머리 부분도 3도 화상을 입었는지 매우 울퉁불퉁하여 무견정상(無見頂相 = 육계)과 머리 스타일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석불의 조성시기는 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로 여겨지나 자세한 신상정보는 모른다. 그 역시 간 송 선생의 구원으로 이곳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가 앉아있는 네모난 대좌(臺座)에는 불법(佛法) 을 지키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 애꾸눈 석불좌상 대좌에 새겨진 다문천왕(多聞天王) 사천왕의 하나로 북쪽을 수호하는 다문천왕이 3층보탑(寶塔)과 창을 들고 있다. 이 석불을 미술관에 올 때마다 꼭 사진에 담았지만 다문천왕은 이번에 처음 본다. 왜 이제서야 그를 보게 된 것일까...? 그의 얼굴이 몸의 2/3를 차지할 정도로 신체비례가 맞지 않는 것처럼 나의 눈도 그리 잘 맞지 않는 모양이다.
♠ 보화각 주변 둘러보기
▲ 간송미술관 보화각(?華閣)
간송미술관이 뜨락은 참 넓지만 건물은 보화각 하나가 전부이다. (그 외에 집들은 간송 일가의 생활공간) 2층 규모의 보화각은 1938년 북단장 옆에 세운 것으로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대리석으로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을 들여 내부를 꾸 몄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인 박길용(朴吉龍, 1898~1943)이 설계한 건물로 의미가 큰데, 이렇게 많은 돈과 정성을 들여 1938년 7월 5일 상량식을 가졌으며, 이때 오세창은 너무 감격하 여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란 뜻에서 보화각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간송미술관 전시실로 쓰이고 있는데, 건물이 워낙 단단하여 크게 손을 보거나 수정을 가한 부분이 없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 관이자 간송의 정신과 체취가 서린 현장으로 요즘 흔한 등록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하여 그 예 우를 해줘야 될 듯 싶은데, 아직 그런 소식까지는 들리지 않는다. 2012년에 방학동에 있는 간송 의 가옥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마당에 말이다.
저 작은 건물에 지금까지 수십만 명이 발걸음을 했고 70년이 넘는 연세에도 끄떡이 없으니 20~ 30년만 넘으면 비리비리해지는 오늘날 건물과 견주어 참 대단한 건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간 송의 정성과 혼이 아낌없이 담긴 탓일 것이다.
◀ 미술관(보화각)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보화각으로 가려면 꽃과 나무, 화분으로 가득한 녹음의 오솔길을 지나야 된다. 이 조그만 오솔 길에는 벽돌이 박혀 있으며, 길 양쪽에는 화분 과 수풀이 가득해 분재(盆栽)시장이나 숲속 산 책로를 거니는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미술관이 맞을까? 의문이 들 정도 로 말이다. 자연물 사이로 망향(望鄕)의 한을 달래는 온갖 석물이 서로를 보듬고 있고, 다른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볼 거리인 공작의 보금자리(사육장)까지 지니고 있 어 관람객의 눈길을 단단히 잡아맨다. 이는 다 른 미술관에서는 감히 상상 조차 거부하는 특이 하고도 살아있는 특별 전시물(?)로 문화와 자연 이 공존하는 간송미술관 만의 묘한 매력이라 하 겠다.
▲ 간송미술관 만의 매력, 공작의 보금자리
▲ 사람 구경에 한참 넋이 나간 하얀 공작의 위엄
▲ 공작의 보금자리 옆에 놓인 녹아버린 2개의 석물 잘 다듬어진 석대(石臺, 무덤의 혼유석이나 석물로 여겨짐) 위에 타다 만 흔적처럼 일부만이 남은 돌덩어리가 초췌하게 놓여져 있다.
▲ 항아리나 함처럼 생긴 조그만 석물
▲ 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호
오솔길을 장식하고 있는 3층석탑은 바닥돌 위에 2중의 기단(基壇)을 얹히고 그 위에 3층의 탑신 을 세운 형태로 1층의 탑신이 2, 3층보다 크다. 지붕돌 받침이 3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고려 초 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탑 높이는 약 3m이다. 기단부의 상대갑석(上臺甲石)과 하대갑석(下 臺甲石)에 새겨진 연꽃무늬가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탑의 고향은 알지 못하며 탑에 관련된 어떠한 정보도 전해 오지를 않는다. 다만 왜인들이 빼 돌리려 한 것을 간송 선생의 구원을 받았으나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기억상실증에 걸 린 양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미술관 뜰의 장식물이 되었다.
◀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1호 3층석탑 옆에는 듬직하게 생긴 석불 1구가 높은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두 손을 위아래로 잡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어 비로자나불 임을 알 수 있는데, 석불의 전체 높이는 약 3m 정도이다. 그의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로 머 리 꼭대기에는 상투 비슷하게 육계(肉? = 無見 頂相)가 솟아 있으며 얼굴은 살이 많아 인심이 후박한 뚱보 아지매 같다. 불상이 앉은 대좌(臺座)에는 연꽃(앙련)이 새겨 져 있고, 대좌 아래 기단(基壇)에는 결가부좌를 한 조그만 석불이 4면에 새겨져 있다, 이들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끝없는 명상에 나래를 누리 고 있는데 그 뒤로 두툼하게 생긴 동그란 두광( 頭光)과 신광(身光)이 눈에 띈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고려 중기로 여겨지며 자세한 정보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 역시 간송 선생 의 구원에 이끌려 이곳에 안착했으며, 평퍼짐한 엉덩이가 인상적인 그의 뒷모습도 풍만스럽다.
▲ 대좌 기단에 새겨진 석불 - 선정인의 포즈로 웅크리고 앉아 명상의 나래를 펼친다.
▲ 주인 잃은 광배(光背)의 비애
광배에 새겨진 꽃무늬들이 마치 살아 숨쉬는 것 같다. 저 광배에 등을 기댔을 석불은 어디로 간 것일까? 광배는 혹여 찾아올지도 모를 자신의 님을 기다리며 오늘도 화사한 무늬를 펼쳐 보인다. 내가 저 앞에 앉으면 나도 광배를 갖춘 부처나 보살이 되는 걸까? 다음에 오면 그 앞에 결가부 좌로 살짝 앉고 싶다. (그러다가 관람객들에게 싸대기 맞는건 아닌지..?)
◀ 석조비로사나불 옆에 자리한 석등(石燈) 그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다.
▲ 오랜만에 문을 연 보화각 현관
▲ 보화각 현관 좌측 석사자
▲ 보화각 현관 우측 석사자
보화각 현관 주변에는 제법 무서운 티가 풍기는 3개의 석사자가 미술관을 지킨다. 현관 바로 옆 에 자리한 석사자는 크게 으르렁거리듯 입을 대문만큼 벌리며 관람객들에게 조용히 관람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현관 앞에는 석사자 2개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모습은 비슷하다.
현관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우측 사자는 오른쪽 발로 구슬을 축구공처럼 만지고 있고, 좌 측 사자는 특이하게 그의 새끼와 발을 맞대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발 밑에 새끼 사자가 누워 어미의 발과 맞장구 치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 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보화각 남쪽 산책로
▲ 금지된 땅 - 간송미술관 북쪽(서북쪽) 언덕
보화각 북쪽에는 녹음이 짙은 언덕길이 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사색하며 거닐고 싶은 그 언 덕길의 끝에는 간송 일가의 저택이 있으며, 길이 3갈래로 갈린 중턱에는 석조팔각승탑과 석인( 石人)이 있다. 예전에는 중턱까진 접근이 가능했으나 이번에 갔을 때는 바리케이트도 모자라 사 람까지 배치해 감시를 한다. 그래서 간송미술관에 갈 때마다 무조건 사진에 담는 석조팔각승탑(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호)와 괴산 외사리 승탑(보물 579호)을 사진에 담지 못했다. 저렇게 길 을 막는데 내가 권력층이 아닌 이상 무슨 수로 들어가겠는가..? 금지된 구역에 들어가는 경우 관계자의 허가를 받아야 되나 그것도 쉽지가 않다. 눈치껏 살짝 들어가 사진에 담아도 되지만 통제가 심해지니 이러다가는 저 언덕길도 오르지 못하는 것은 아 닌지 모르겠다.
통제구역과 간송 저택 뜰에는 망향의 한을 간직한 석탑, 불상, 승탑, 문인석 등 다양한 석조문 화유산들이 베일에 가린 채 은둔해 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입장료를 받아도 좋으니 제발 속세에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괜찮은 것들만 추스려 보화각 주변에 끄집어내는 것도 괜 찮을 것이다.
이번에 못본 석조팔각승탑과 괴산 외사리 승탑. 문경5층석탑 등이 궁금하다면 이전에 쓴 간송미 술관 답사기를 쿨하게 참조하기 바란다. (☞ 관련글 보러가기)
▲ 내년 봄을 그리며 간송미술관과 작별을 고하다.
이렇게 하여 간송미술관 가을 특별전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미술관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답 사객의 발길은 여전했다. 봄과 가을이 한참이나 머물렀다 가는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곳, 미술 관을 알록달록 수놓은 늦가을 풍경은 내년 특별전에서도 변치않는 모습으로 문화에 목마른 사람 들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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