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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尙州] - 곶감과 자전거의 도시! 가을이 익어가는 고장
상주는 자전거의 도시, 곶감의 도시로 유명하다. 경상도의 어원이 된 유서 깊은 도시이며 조선시대에는 경상감영이 있었던 시절도 있다. 국내에서 유일한 자전거박물관이 있으며. 상주의 옛이름은 낙양(洛陽)이다. 낙동강(洛東江)이라는 이름의 뜻은 낙양의 동쪽에 흐르는 강이란 의미이다. 낙양은 지금의 상주를 말한다, 또한 가락국(駕洛國)의 동쪽을 지나는 강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는 설(說)이 있다.
상주 문화관광 http://www.sangju.go.kr/tour/index.jsp
안동에서 상주까지 :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405312
경천대국민관광지[擎天臺國民觀光地]
경천대는 낙동강을 굽어보는 절벽에 세워진 건물이다. 병자호란 후인 1628년(인조 6) 봉림대군이 중국에 볼모로 갈 때 주치의로 따라갔던 우담 채득기(蔡得沂)가 터를 닦았다고 한다. 기암절벽과 강물, 소나무 숲이 절경을 이루는 곳으로 본래는 하늘이 스스로 만든 경치라고 해서 자천대(自天臺)라고 부르던 곳이었다. 그러나 채득기가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란 글을 새긴 뒤 경천대로 바꿔 불렀다. 하늘을 떠 받든다는(擎) 뜻으로 경천대라 불리었다 한다. 낙동강 제1경 경천대(擎天臺)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도 이용되었으며, 조선시대 장군 정기룡이 하늘에서 내려온 용마를 얻어 용마와 더불어 수련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정기룡이 바위를 파서 말먹이통으로 쓰던 유물이 남아 있다. 또 병자호란으로 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갈 때 따라가 함께 고생했던 우담 채득기 선생이 후일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은거했다는 무우정(舞雩亭)이 있다. 춤을 추며 비를 빈다는 뜻이요 정자도 기우제터 우담(雩潭)위에 세워졌으나, 선생은 자연을 벗삼아 도(道)를 즐긴다는 풍호영귀(風乎詠歸)의 뜻을 취하여 그 이름을 삼았노라 밝히었다.
'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정기룡 장군의 유적지인 충의사는 사벌면 금혼리에 있다. 공검면 오태리에는 오태저수지가 있으며, 사벌면 삼덕리에는 경천대관광농원이 있다. 또한 삼한시대 축조한 저수지인 공갈못 옛터도 있다.
남장사[南長寺]
남장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1989년 4월 10일 보물 제99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33cm이다. 나발(螺髮)의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肉髻)가 있고, 얼굴은 눈·코·입 각 부분이 모두 잘 정제되어 있다. 특히, 어깨에 닿을 듯한 긴 귀는 삼도(三道)와 잘 조화되어 위엄을 자아낸다.
남장사 석장승[南長寺石長]
마을의 수호신과 이정표 구실을 하는 장승은 보통 나무로 만든 목장승과 돌로 만든 석장승이 있다. 남장사(상주시 남장동) 입구에 세워진 석장승은 장승마다 표정이 그러하듯 괴이한 모습으로 사찰을 수호하고 있다. 목장승의 경우 수명이 한시적인 반면에 석장승은 수명이 영구적이라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도남서원[道南書院]
경상북도 상주시 도남동에 있는 서원.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노수신, 류성룡, 정경세, 이준 등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향하고 있다
상주 동학교당[尙州東學敎堂]
건물에 쓰인 목재는 당시 교세의 영세성을 입증하듯 여러 곳에서 헌집을 헐어 세운 것으로 보인다. 건립 당시에는 모든 가옥이 초가지붕이었으나 후에 천연 석재로 지붕을 바꾸었고, 1987년에는 서재만을 원형인 초가지붕으로 개수했다
상주 둥시곶감
곶감은 떫은맛의 감을 깎아 싸리나무 꼬챙이에 꽂아 말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네 조상들이 감을 언제부터 곶감 형태로 만들어 먹었는지 등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렵지만 조선 <예종실록>에 곶감을 의미하는 건시(乾枾)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예종실록>에 ‘예종 즉위년인 1468년 11월13일에 곶감의 진상을 경북 상주로 정했다’라고 기록돼 있어 그 훨씬 이전부터 곶감이 임금님 상에 오를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곶감’ 이야기는 곶감이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았는가를 말해 준다. 호랑이 온다는 말에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아기가 곶감을 준다는 말에 울음을 뚝 그쳤다는 이야기의 무대가 바로 상주다.
상주 박물관 사벌면 삼덕리 산 18-7
소장품은 민속생활유물 1500점과 고고유물 250점, 역사자료 130점, 고서적 50점 등 2400여 점으로, 모두 상주시에서 출토되거나 발견된 것들이다. 상설전시실에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유물, 사벌국과 신라문화, 불교문화 , 임진왜란과 조선의 유교문화, 근대 및 현대의 문화유물 등이 있다.
문화창작공간이 부족한 우리 상주시에서는 폐교를 활용하여 지역 예술인들의 창작공간을 조성하여 창작의욕을 고취하고, 학생 및 시민들의 예술체험과 작품제작 실습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예총상주지부(상주예술촌 운영위원회)로 위탁운영 음악캠프, 수채화교실, 통키타교실등 각종 이벤트 행사 운영 관내 학생 및 시민들의 예술체험 실습장으로 공간활용하고 있다
상주 자전거박물관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423466
대한민국 자전거 축전은 올해 3회째로 21C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에너지, 교통체증 등의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녹색교통 패러다임으로 자전거가 부상함에 따라 녹색성장사회를 구현하고 전 국민의 자전거타기 붐을 조성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자전거 축전을 추진할 예정이다. 축전기간 2011.04.16(토) ~ 2011.04.24(일)
1813년 독일의 귀족으로 당시 산림국장으로 있던 칼 폰 드라이스(Karl von Drais) 남작이 발명하고 1818년 프랑스에서 자전거로서는 처음으로 특허를 얻은 <드라이지네>를 세계 최초의 자전거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엄복동[嚴福童] 서울 출생. 자전거 판매상 점원으로 일하던 중 1913년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 우승하였다. 1922년 같은 대회에서도 일본 선수를 물리치고 우승함으로써 '하늘에 안창남, 땅에 엄복동'이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냈다.
1930년대 초 은퇴 후 떠돌이생활을 하는 등 불우하게 살았다. 1977년부터 대한사이클연맹 주최로 '엄복동배 쟁탈 1km 도로사이클대회가 매년 열리고 있다
우복종택
이 집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선생의 종가로 16대 손이 살고 있다. 선생의 유적은 공검면 부곡리에 묘소와 신도비, 사벌면 묵하리의 유허비, 청리면 율리에 유허비가 있고 이 곳에 사당과 서실 강당 등이 있다.
조선시대 시호(諡號)의 행정처리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고문서 원본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의해 발굴됐다. 지금까지 시호 연구는 법전이나 왕조실록 등 간접자료를 통한 연구가 전부였으며 실제 시호가 내려지는 과정 전체를 알 수 있는 문헌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7일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최근 경북 상주의 진주 정씨 우복 종택에서 ‘우복시장(愚伏諡狀)’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우복 정경세(鄭經世)는 유성룡의 수제자로 인조 때 영남 남인의 영수였다. 그가 죽자 그의 공덕을 기려 우암 송시열이 그의 행적을 정리한 시장(諡狀)을 작성했고, 그 시장이 행정 관청을 거쳐 임금의 재가를 받기까지의 과정이 함께 담긴 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이 시장의 내용을 지은 이가 송시열이고 글씨를 쓴 사람은 당대 명필로 유명했던 동춘당 송준길(우복의 사위)로 추정돼 더욱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임난 북천 전적지[壬亂北川戰跡地]
이경류, 박지 등의 3충신과 김준신, 김익의 2의사를 충의단, 판관 권길과 호장 박걸은 현지단에, 찰방 김종무는 충렬단에 모셨다. 1990년 경역을 보수·정화하여 호국애족의 교육장으로 쓰이고 있다.
전사벌왕릉[傳沙伐王陵]
삼층석탑 옆에 왕릉에 속한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석탑의 서북 편에는 상산박씨 문중에서 건립한 재실이 있다. 현재 능 앞에 세워져 있는 석물들은 오래된 것이 아니며 신도비는 1954년에 세워진 것이다. 상주시가 1981년 12월 능역을 확장하고 왕릉, 영사각등 주변을 보수·정화하였다.
능 아래에 사벌국왕릉사적비와 사벌국 왕 신도비가 있다. 또한 근처에는 화달리 3층석탑(보물 제117호)도 있다.
효자정재수기념관 화서면 사산리 구 사산초등 학교
정재수군은 1974년 1월 22일 아버지 정태희 씨와 함께 경상북도 상주군(현 상주시) 화서면 소곡리의 집에서 약 12km 떨어진 충청남도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에 있는 큰집으로 설을 지내기 위해 길을 나섰다. 큰집으로 가려면 보은군 마로면에 있는 험준한 고갯길인 마루목재를 건너야 했는데 당시 이 고갯길에는 이틀 전부터 내린 눈이 33cm 가량 쌓여 있었고, 기온도 영하 20℃까지 내려갔다 한다.
그 다음날 사람들은 고갯길에서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였다. 부자가 동사한 상태로 땅에 움츠리고 누워 있는데 아버지의 몸에는 아이의 외투가 덮여 있었고, 아이는 아버지를 꼭 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술기운이 있었던 아버지가 눈길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자 아이가 옷을 덮어 주고 몸을 일으키려 애를 쓰다가 지쳐 잠들어 결국 동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눈물겨운 이야기는 당시 여러 신문기사에 실려 전국으로 알려졌고, 후에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 실렸으며,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정재수군이 목숨을 잃은 고갯길인 마루목재에 묘가 만들어졌고, 1974년 묘 옆으로 정재수효행비가 세워졌다.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정재수군의 효행이 점점 잊혀져가자 지역의 뜻있는 이들이 효자정재수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1993년 3월 폐교가 된 정재수군의 모교에 기념관을 마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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