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요일 1: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한다. 이 구절에서 특이한 점은, 네 개의 중성 관계 대명사(호, ὃ)가 사용되어 강조의 성격을 가진 목적절들로 되어 있는 것이다. 목적절들의 주어와 동사는 3절의 “우리가……전함은”(ἀπαγγέλλομεν 혹은 καὶ ἀπαγγέλλομεν)이다. 그런데 2절에 “우리가 증거하여 전한다.”(μαρτυρούμεν, καὶ ἀπαγγέλλομεν)가 있어서 문장 구조상으로는 다소 어색하다. “태초부터”는 아포 아르케스(ἀπ’ ἀρχής)로서, ⑴ 복음 또는 그리스도 계시의 시작 곧 복음이 형성되던 당시에 현장에 있으면서 구속 사건들을 직접 목격했던 자에게 알려졌다는 의미에 있어서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설,① ⑵ 보이게 나타난 역사적 사건들의 기원이라는 설(R. Bultmann), ⑶ 창조 이전의 영원을 의미한다(요 1:1)는 설② 등이 있는데, 2절 이하의 내용을 미루어 ⑶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③ “있는”은 엔(ἦν)으로서, 미완료 과거형으로 영원부터 존재하였고 현재도 존재한다는 뜻이다. “생명의 말씀”(τού λόγου τής ζωής)에 대해 남성이 중성 관계 대명사로 된 점을 들어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가리키는 것(참조: 빌 2:16)이라고 하는 학자들④이 있으나, 그 내용을 미루어 생명 곧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⑤으로 보아야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A. Plummer, R. E. Brown(예수님을 본 적이 없던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을 때라고도 해석함.), R. M. Raymer, et al, ed., 박윤선. F. F. Bruce(2:7, 24에서는 복음과 친숙해진 시간을 의미한다). 2) A. Clarke, J. Wesley, G. W. Barker, C. R. Erdman, C. C. Ryrie, W. Barclay, R. C. H. Lenski, L. Morris, 黑崎幸吉, 米田豊, 이상근, 유동식. 3) 최세창, 에베소서, 1:4의 주석을 보라. 4) “Westcott, Vincent”(in 이상근), F. F. Bruce, R. M. Raymer, et al, ed. 5) “J. Calvin, Huther, H. Alford, J. A. Bengel”(in 이상근), R. C. H. Lenski, C. R. Erdman, L. Morris, 黑崎幸吉.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특히, 렌스키(R. C. H. Lenski)는 “중성 관계 대명사로 된 것은 남성 관계 대명사로 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즉, 이 인격 존재에다 이 인격 존재가 존재했었고 존재하고, 또 우리를 위해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점을 추가해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생명”(조에스, ζωής)은 물론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생명이란 말은 또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자가 받은 생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음으로써 그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새사람의 “참 생명”(T. K. Abott)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구원받은 자의 생명은 과거와는 달리,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다(골 3:3. 참조: 요일 5:11-13). 다시 말하면, “그 생명은 실제적이고도 심오한 의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C. Vaughan, p. 172, A. Clarke). 따라서, 참 그리스도인이란 영적 지각과 영적 지식, 영적 판단과 영적 갈망, 영적 기쁨과 영적 능력 등을 소유한 자로서 성령을 좇아 영적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갈 5:16-17). 그는 여기서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빌 3:20). 시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초월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다. 그는 아직 육신을 입고 있으나 신령한 삶을 살며,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롭게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 보존되어 있는 참 그리스도인을 알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골 3:3의 주석). 이 생명은 장차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되어 누릴 영원한 생명이므로, 세상에서 이 생명의 은혜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은혜는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 생명을 부여하고(요 6:33-, 8:12, 20:31), 또 누리게 하시는 이는 절대적인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시다(요 1:4, 14:6, 행 3:15).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말씀”(로구, λόγου)은 ‘말씀’ 외에 ‘신탁’, ‘이성’, ‘고려’, ‘계산’, ‘설화’, ‘광포’, ‘이유’, ‘교리’, ‘구실’, ‘도’ 등으로 번역되었다. 특히,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데 사용하였다(요 1:1-3, 14). 여기서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리스도,⑥ 생명인 말씀,⑦ 생명을 내용으로 하는 말씀,⑧ 생명을 주는 말씀,⑨ 생명을 주는 복음 또는 생명에 관한 전언(K. Grayston, J. R. W. Stott), 그리고 복음(행 5:20, 빌 2:16)⑩ 등의 견해가 있다. 2절 이하의 내용을 보아 그 밖의 모든 견해를 포괄하는 그리스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결국 “생명의 말씀”(τού λόγου τής ζωής)은 영원부터 존재했던 생명 곧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요 1:1-).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의 “들은”(아케코아멘, ἀκηκόαμεν)과 “본”(헤오라카멘, ἑωράκαμεν)은 현재 완료형으로서, 과거에 듣고 본 바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즉, 사도 요한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원부터 선재하셨다가 성육하신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직접 들었고, 그 모습을 육안으로 직접 본 바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참조: 행 1:21, 22, 22:15, 고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6) “교부들, Balz, Boismard, Schnackenbur, de Ambroggi, Michl, F. M. Braun, Coetzee, Thüsing, Schneider, Hauck, Moffatt, KJV, JB, TEV”(in R. E. Brown), M. Henry, A. Plummer, 黑崎幸吉. 7) A. Plummer, “de Ambroggi, Bonsirve, Chaine”(R. E. Brown). 8) A. E. Brooke, J. R. W. Stott, “Westcott”(in R. E. Brown). 9) A. E. Brooke, “Dodd, Michl, Thüsing, Tobac, Westcott”(in R. E. Brown. 10) “Houlden, Johnsyon, Tobac”(in R.. E. Brown), “C. H. Dodd”(in R. Bultmann), B. C. Chapman, A. N. Wilder, G. W. Barker, R. J. Drummond, W. Barclay, A. E. Brooke, R. E. Brown, F. F. Bruce, 유동식.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9:1, 벧후 1:16). 이 증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의 영으로만 이해하고, 그분의 성육하신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가현으로 규정하는 가현설에 대한 반박이며(A. Plummer), 또 케린투스설(p. 40을 보라.)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주목하고”(부정과거형인 에테아사메타, ἐθεασάμεθα: 요1:14)와 만진(부정과거형인 에펠라페산, ἐψηλάφησαν)은 과거에 겪은 경험을 나타내고 있다. 이 두 말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제자들의 동작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눅 24:39, 요 20:27. 참조: 요 1:14). 특히, “주목하고”는 ‘주의하여 보다’, ‘응시하다’, ‘주시하다’, ‘꿰뚫어 보다’ 등을 의미하는데, 앞서 언급된 “본”보다 더 강한 말이다. 요한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한 바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체험이다. 그러나 자기만의 체험이란 편견과 독선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수많은 사람과 함께 겪은 요한의 체험은 그만큼 값진 것이다. 톰손(M. M. Thompson)은 “한편으로는, 요한이 직접 경험한 것들을 증언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경험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대상 곧 예수님의 생애와 선교에 대해 주의를 끌고 싶어하였다. 이러한 자세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라고 한 세례 요한의 자세와 같은 것이다. 더욱이, 증인의 역할은 실제로 발생한 사건들을 증언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증인은 또한 그러한 사건들의 의미와 의미심장함을 선포해야만 하는 것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 안에서 발생한 사건들의 의미심장함은 ‘생명’이란 한마디로 요약된다.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의 생명이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라고 하였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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