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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피아포에지?29
연꽃 홍수
인쇄 2014. 9. 10 발행 2014. 9. 15
지은이 정 령 펴낸이 정기옥
펴낸곳 리토피아
출판등록 2006. 6. 15. 제2006-12호
주소 402-814 인천 남구 경인로 77(숭의3동 120-1)
전화 032-883-5356 전송032-891-5356
홈페이지 www.litopia21.com 전자우편 litopia@hanmail.net
ISBN-978-89-6412-044-6 03810
값 10,000원
1. 저자
정령 시인은 충북 단양에 출생했다. 2013년 리토피아로 등단했으며, 막비시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 자서
씹을수록 달작지근한 풀내음이 돌면서
덜 익긴 하였지만 풋풋한 사과 한 알 먹는다.
그러나 먹을수록 침이 고이고
삼킬수록 배가 허전해진다.
또 다른 사과 한 알 따먹으러 간다.
언덕배기로 뒹구는 햇살이 참 곱다.
2014년 가을
정 령
3. 차례
제1부 꽃들의 봉기
연꽃 홍수 15
봄이 오는 양평길 16
호박꽃 17
꽃들의 봉기 18
연꽃, 피다 20
별사탕 먹는 법 21
종이배 22
사각의 궤를 넘기는 법 23
그런 여자 24
밥상머리대왕 모집공고 26
공친 날 27
뇌구조 테스트 28
내시나라 무수리 30
고추 32
동백·1 34
동백·2 35
굴비아가씨 맞선 보는 날 36
빨간 신호등 38
제2부 꽃달력
나비 상장 41
입춘 42
이불론 43
고장난 기타 44
더부살이 45
바람에 취하다 46
살구꽃 47
꽃달력 48
동백에게 이르다 49
사랑 50
새벽 51
신호대기 중 52
모든 맑음 53
순간 54
겨울바다 55
봄소식 56
한글 57
놀 진?소문의 진상 58
제3부 바람이 머문 자리
트루먼쇼 61
꽃물 들여주고 싶어 62
텅 63
밤참 64
칼 66
볼링을 치다 68
안다 69
도를 아십니까 70
바람이 머문 자리 72
그 남자 74
봄이니까 75
아버지와 개꼬리 76
할매 감자 77
멕시코 여인의 외도-중남미문화원에서 78
엄마를 용서해―영화 ?대지진?을 보고 80
꽃동네 1번길 82
에루화 어화둥둥 83
샤랄랄라, 여름 84
제4부 비바라기
비바라기 87
제모의 기술 88
하트 제조기 90
대상 별 고스톱치기 91
덜, 실천론 94
긴가민가 95
우리는 96
눈부처 97
네가 내게 온 날 98
법정스님과 나 100
너 102
시계 103
개화 104
엄마의 치환 105
산행 106
그릇 108
해설/박서영 109
생활에서 피어난 생명의 넋
―정령의 시세계
4. 평문
정령 시인의 신작 시집은 생활의 바닥에서 길어 올린 강렬한 생명과 호흡으로 가득하다. 생명이 있든, 없든 우리가 영적존재들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시인의 예민한 감각은 바로 그 영적인 것들을 포착해내곤 한다. 이 점은 모든 것에 생명을 그려 넣어주고 싶어 하는 물활적 태도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영적인 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정령 시인은 생활과 밀착된 상태에서 우주적 세계관을 펼치고 있다. 영적인 것들은 언뜻 평범한 일상을 벗어난 우주적 세계관 안에 가두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평범한 일상에서 영적인 순간들, 영적인 느낌들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인간 자체가 이미 영적인 존재로 넋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때 말하는 넋은 심장, 가슴, 마음, 몸 등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의 몸은 알 수 없는 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무한히 열려있고, 닫혀있는 세계의 문들이 가득하다. 인간은 그 문 앞에서 밀며 당기며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생활’이라고 부른다. 정령 시인은 바로 그 생활에 몸을 바짝 대고 시를 쓴다. 그러면서도 언어들은 사방으로 해방되어 있다. 시가 가질 수 있는 표현과 문법으로부터 자유롭다. 무엇보다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이 활기차고 힘이 있어 생명을 느끼게 해준다.
/박서영(시인)의 해설에서
5. 시
연꽃 홍수
몰랐었네. 비가 오면서 시나브로 개울을 덮고 논밭을 쓸고 댓돌을 넘을 때까지 그칠 거야 했었네. 못물이 차올라 있을 때는, 차마 그러리라는 것을. 물살에 휩쓸려 정처 없이 흘러가던 송아지의 애처로운 눈빛을, 가시연꽃 잎 떠다니는 혼탁한 못 속의 연보라빛 봉오리를 보고서야 알았네. 지게 한 짐 지고 건너오시던 아득한 선로 위, 눅진한 홍수 끝에 저리도 넓적한 등판으로 하늘 밑에 연잎 떡하니 벌어져 알았네. 장독 엎어지고 깨어지고 허물어졌어도 대추나무가지에 매달린 솥단지 내걸고 푹 퍼진 수제비 뜰 때, 켜켜이 연이파리 못 속에 앉아있는 걸 보고야 알았네. 흙탕물에 절은 방바닥 물 때 벗기고 푹 꺼진 마루 훔치던 후덥지근한 그 날의 태양, 발그레 붉어진 연꽃이었네. 책장에 촘촘히 꽂혀있다 물벼락 맞은 몸들 낱장 헐지 않도록 다림질하여 말리던, 한 여름의 연잎들이 책갈피 같은 연밥을 내주는 걸 보고야, 홍수였네. 연꽃 홍수. 푸른 잎 펼치고 유구한 세월을 안아 떠받치고 온, 중생들의 벅찬 환호성. 연꽃 물결, 홍수로 일렁거렸네.
봄이 오는 양평길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야. 두물머리 쌍바위골에는 노승 홀로 지키는 작은 절이 있었대. 그 분의 신심이 얼마나 깊었냐 하면 목탁을 두드리고 불경을 외울 때마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꽃들이 하나씩 하나씩 벙그러지는 거야. 처마 밑 목어는 또 어떻고. 온몸으로 잦아드는 그 소리에 댕그렁댕그렁 장단도 맞추었다잖아. 오죽하면 스님이 탁발수행하던 길에도 한 겨울 앙상한 나무들이 사그락사그락 초록잎을 피워냈겠어. 그 뿐이 아냐. 그 스님이 면벽 참선할 때에는 얼었던 골짜기물이 좔좔좔 폭포수로 흘렀다지, 아마. 지금도 봐 봐, 얼마나 염불을 많이 외고 목탁을 두드리는지.
호박꽃
햇살 좋은 담장 너머로?선발대회가 한창이다. 과시하려는?몸사위로 매혹적인 에스라인을 뽐내며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노란 별꽃들이?순번대로 피어난다.?넉넉한 프레어 스커트를 착용할 것과 도도하고 까실까실한 맵씨를 갖추고 호리호리한 허리를 감싸 안아줄 것, 지조 있는 품위와 후덕한 인상으로 관대하게 웃어줄 것과, 매일?한 번?벌에게 꽃가루를 내어 주고, 항상 의리와 정으로 돈독함을 유지할 것 그리고, 아낌없이 내어주고?담담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힘이 선발조건이란다. 서 있어야할 틈 비집고,?비비며 가야할 곁 묵묵히 견주며 더듬이처럼 덩쿨손들이 앞장서 간다.
비가 내린다.
노란 우산을 받쳐 든 소녀가 담장 곁을?총총총 나온다.
꽃들의 봉기
공습 경계경보, 꽃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제주 유채군단, 남해 동백사단을 시작으로 전라도 벚꽃여단과 경상도 배꽃특공사단이 북으로북으로 돌진해오고 있다. 노란 전령사 민들레는 현호색, 산자고, 난쟁이붓꽃, 애기똥풀, 양지꽃, 제비꽃들의 보병군단을 모아 불쑥불쑥 아무 데서나 출몰했다. 남녘을 해일처럼 뒤덮고 쳐들어오는 병사들은 일명 매화니 산수유니 벚꽃이라는 암호명을 썼고, 온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듯이 분분히 낙하하며 침투해오고 있었다. 꽃들이 꽃을 잊은, 꽃을 떠난, 꽃을 망친 자들에 대하여 항거하며 혁명을 일으켰다. 눈 돌리는 곳마다 형형색색의 사태가 벌어져 초토화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폭탄처럼 터지는 꽃들의 습격은 온갖 이름들로 특명을 받고 난무하며 흩날렸다. 초록 능선에서 지원받은 튤립부대는 출정을 기다리며 도열했고, 이미 점령해버린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에 대한 지령들은 벌써 녹색경보가 발령되어 연두색 방호벽을 두르고 있었다. 녹색 당국은 꽃들의 침투에 대하여 훈련 상황이 아니라고 밝혔고, 발령한 공습경보에 대해서는 온종일 인간들의 발자국이 지
나간 자리마다 화포를 쏘게 하는 등화관제훈련을 벌였다. 꽃들이 총을 겨누었다. 오월의 총소리!
연꽃, 피다
쇼윈도우 마네킨 같이 연지곤지 찍고 백옥 같이 하얀 드레스 걸친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문 안에 붉은 꽃들이, 핀다.
푸른 연잎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진흙탕 속 내밀한 사정이 가려질까 까맣게 타들어간 연밥 속 서리서리 타고 들어가 본들 여물지 못하고 구멍 숭숭 뚫린 채 연근, 혼탁한 방 안 밤꽃 향기 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새빨간 루즈 바르던, 동생들 학비 벌려고 애쓰던, 첫사랑 버림받고?눈물 흘리던,?호된?날에?신물이 난, 그녀들. 그 곳을 빠져나오고 있다.
별사탕 먹는 법
알사탕이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거리네.
그 밤 흔들리는 다닥나무 그늘에 숨어있던
달콤한 입맞춤을 주워 함께 오물거리네.
사랑니에 비릿한 풀맛이 스미네.
흐려지는 불빛 따라 바다가 흐르고,
놀란 어금니가 와작, 응어리 오지게 깨트리네.
오톨도톨 밤별들이 와르르 쏟아지네.
입안으로, 목구멍으로, 가슴 언저리로,
싸늘한 바람이 불어간 꼭 그 자리에 스미네.
비릿하게 넘어가네.
너도 나도 넘어가네.
종이배
노아의 방주가 오랜 세월 종이로 탈바꿈 했겠다. 산을 깎고 아스팔트가 난 길 석조 울타리에 나앉은 걸 보았거든. 하늘이 까매지고 통곡하는 소리 격하게 들렸거든. 그럴 때가 있었거든. 온몸에 흐르던 핏줄기가 거꾸로 솟아 멈추지 않고 귓속에 선바람 소리만 쌩하니 지나고,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하던 세상이 무너지던 날, 모든 생명의 연장을 위해 단 하나의 짝들만 탈 수 있었던 안식처, 홍수를 이겨낸 후, 방주의 문을 활짝 열고 힘차게 내디딘 맨땅, 이 종이배도 그랬겠다. 조금씩 말라가며 또 다시 물 위에 뜰 그 날을 위해 당분간은 제 몸을 깎아 종이로라도 있어야 했겠다. 작은 개울에서 뜨는 연습을 하며 반가움에 눈물 조금 흘렸겠다. 아무도 그 심정 몰랐겠다. 오늘 이 배도 하늘이 무너지고 거센 비바람 몰아칠 때 통곡하며 짝지어 오던 그 기억, 오도카니하겠다.
사각의 궤를 넘기는 법
사십의 나이에는 반드시 치명적으로 외로울 것.
울고 싶어질 때에는 꼭 그 시절로 돌아가 열어볼 것.
준비 되었으면 아련한 기억의 버튼을 온On.
물보라 날리며 반사되는 햇빛에 물장구 두둥 처연한 무지개 소녀의 얼굴 위에 파장이 인다. 시간의 궤를 넘어선 한 점의 몸짓 망원되는 사물의 촛점이 흐려지는 망각 속에 어린 시절이 머문다. 쎄쎄쎄, 아이의 눈동자 속 망막 안으로 줌이 되어 비치는 나비의 날개짓이 파르르 떨린다. 초경량의 바람이 전하는 소문에도 까딱없이 너는 의사가 되었고, 말없이 너는 시집을 갔다. 때때로 멈춤, 하는 렌즈의 손가락은 돌아가고 돌부리에 걸려 날아오른 몸뚱이, 순간 웃음이 일다가 무릎이 먼저 시려온다.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소리가 깜깜한 적막 속에 흩날리면 돌아가지 못하는 젊은 날 당분간 오프Off.
다만 오늘부터 바삐 찰칵대며 다시 진행 중일 것.
그런 여자
아이스크림 사오라는 데 아이스케키를 사들고 왔다.
친구 따라 시장엘 갔더니 만두피를 산단다. 만두 싸먹는 거란다. 별 게 다 있구나. 어머니는 김치 썰고 두부 짜고 고기 다지고 당면 불려 간하고 밀가루 밀어 하느라 반나절은 걸려야 만두를 먹을 수 있었다. 희한하다. 친구는 별 걸 다 아는구나.
번개탄을 사들고 오면서 불 피우는 거라 한다. 비닐에 싸여있는 저 걸로 어떻게 불을 붙이나. 친구는 단번에 불을 켠다. 그건 뭐냐 하니 라이터란다. 별세계 별천지구나. 우리 집은 아궁이에 장작불 때고 성냥곽을 사용해야 비로소 불을 붙이는데, 무서워 만지지도 못했는데. 친구는 다 하는구나.
화장실에 꽃향기가 가득하다. 무궁화 표백비누란다.
옆집 새댁이 식혜가 먹고 싶다고 엿기름을 사온다. 입덧이 나 먹고 싶으니 해달란다. 물 붓고 찬밥 넣고 설탕 간하고 식혀서 먹으라 갖다 줬다. 엿기름을 물에 가라앉히고 앙금을 건져내어 팔팔 끓인 후 설탕으로 간하고 찬밥 넣고 삭히는데 여덟 시간, 은근한 불에 두면 밥알이 동동 뜨는 식혜가 된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런 늦된 여자가 예쁜 눈을 가진 맑은 아이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