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열두 살 소년의 사랑 이야기
차 안을 감도는 감미로운 노래도 흐느끼는 아들의 숨소리에 묻히고 있다. 차창 밖엔 무심한 듯 서 있는 가로등이 어둠 속에 퍼지는 불빛 안으로 고즈넉한 가을밤의 이야기를 불러 모으는 것 같다. 불빛에 비친 나뭇가지의 실루엣이 묘하게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녀린 떨림으로 시선을 붙잡던 잎새 하나는 바람결에 흔들릴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 우리만의 아름다운 시간을…”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것 그것만이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라는 것을 은밀하게 일깨워 주는 것 같다. 때론 침묵은 방관을 가장한 위로와 격려이고, 용기와 희망을 슬며시 불어넣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한 번만 더 들려줘.” 젖어있는 아들의 떨리는 목소리. 들썩이는 작은 어깨 위로 아직도 거울 속엔 눈물이 실리고 있다.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아들의 모습은 슬쩍 실내 거울로 훔쳐보던 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걸어 준다. 늦둥이 아들 녀석은 지금 사랑의 성장통을 겪는 중이다.
한국 나이로 열두 살, 이곳 캐나다의 나이론 열한 살인 막내 녀석의 가슴 속에 자그마한 씨앗 한 알이 떨어졌다. 내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집 가까이에 깨끗하고 아담한 한 식당이 생겨 자주 드나들다 보니 어느새 단골손님을 넘어 식당의 직원들과도 가족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살짝 홍조를 띠며 평소와 조금은 다른 듯한 아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엔 늘 한 사람이 있었다. 한 번은 거치고 가야 한다는 홍역 같은 풋사랑이 가랑비에 옷이 젖듯 아들의 마음속에 스며들고 있던 거다. 아홉 살이 많은 연상의 대학생 누나는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아들 녀석의 장난기도 잘 받아 주고, 노래를 곁들인 손장난 게임도 함께하며 가끔 그 나이 또래의 소년들이 관심의 표시로 하는 짓궂은 행동도 잘 받아넘기니…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이란 감정이 자리를 잡아가게 된 것 같다.
오늘은 울 아들놈의 그녀의 생일이었다.
어젯밤 늦은 시각에 아들 녀석의 작은 어금니 하나가 빠졌다. 치과에 갈 겨를 없이 흔들거리는 이를 혀로 자꾸 건들다 보니 저절로 손쉽게 이가 빠진 거였다. 아들은 기쁜 얼굴로 깨끗하게 씻은 이를 내게 보여주며 오늘 밤 이빨 요정이 찾아올 거라며 들뜬 마음으로 꿈나라 여행을 준비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빠진 이를 지붕 위로 던지며 “까치야 까치야, 헌 이 줄게, 새니 다오”라는 구전 동요를 흥얼거렸었는데, 문화가 다른 이곳 캐나다의 어린이에겐 까치 대신 치아 요정이 다녀간다. 빠진 치아를 정성껏 깨끗이 씻은 다음 머리맡 베개 속에 넣어두면 한밤중에 이빨 요정이 베개 속에 넣어둔 이빨은 가져가고, 대신 선물로 돈을 베개 속이나 이불 안 어딘가에 감춰 두고 간다. 그런데 울 집에서도 그런 일이 마술처럼 일어났었다. 이빨 요정이 숨겨 놓았던 돈을 찾아 든 울 아들놈은 크리스마스 아침에 산타 할아버지가 두고 가신 선물을 받아서 들었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으로 눈물 콧물을 쏟아내던 그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울 아들 녀석에게 있어선 어메이징한 치아 요정의 선물을 그동안 몇 차례 받았지만, 이번의 방문은 아들아이에겐 특별했다. 때마침 이빨이 그녀의 생일 전날 밤에 빠져 준 덕분에 아들은 수월하게 원하는 선물을 준비할 수 있었다.
아들 녀석은 치아 요정이 주고 간 용돈으로 꽃을 선택했다. 본인이 꽃을 고르고, 색깔과 포장까지 꼼꼼하게 챙기며 카드를 준비하는 아들의 모습은 나까지 설레게 만든다. 어린아이로만 여기고 바라보던 아들 녀석이 어느새 남모르는 비밀 하나를 가슴에 담아두는 나이가 되었는지… 한편으론 커가는 과정에 겪는 사랑의 성장통은 아들의 마음만큼 나도 아플 것 같다. 그 마음을 나 역시 경험하였기에…. 어찌 되었든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다가가 꽃을 내미는 울 아들놈의 상기된 그 표정을 난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열한 살 소년이 난생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여자를 위해 꽃을 준비하고, 숨기듯이 뒷짐을 쥔 모양새로 걸음을 옮기는 녀석의 뒷모습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 나이 그때만이 일어날 수 있는 기적 같은 시간 속의 순간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저녁도 먹고 촛불도 끄고 생일 파티는 아들의 벌어진 입이 좀체 닫히지 않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들을 제외한 모두의 시간이 그랬던 것이고 아무도 울 아들놈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나는 엄마이기 전에 사랑의 성장통을 겪은 선배로서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주변에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과 사촌 남동생들이 찾아와 함께했는데, 함박웃음 지으며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저녁 내내 울 아들놈의 심기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아니 가슴 어딘가가 찌르륵… 저몄던 것 같다. 한결같이 늘씬하게 키가 큰 형들의 모습과 막힘 없는 그들만의 공통된 화제는 아들에겐 그저 입술이 열릴 듯 말듯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즐거워 짓고 있다기 보다는 씁쓸한 미소였을 아들의 마음….
뭔지 내게 있어 아슬아슬했던 생일 파티가 끝나고 뒷좌석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마치 누가 볼 새라 후다닥 올라앉는 아들 녀석. 운전석에 앉자마자 들려오는 아들놈의 흐느낌. 정말 세심하게 신경 써야만 알 수 있는 젖어있는 가냘픈 소리였다. ‘허~어’ 길게 한숨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아들의 눈물은 까맣게 잊었던 나의 어린 시절의 풋사랑의 기억을 불러오며 그때의 눈물을 내 마음 안에 살짝 묻혀 놓는다. 잠시 아들의 모습을 실내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던 나는 심호흡조차 흐느끼는 아들 녀석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차 밖으로 나왔다. 아직 주차장을 떠나지 않은 그녀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아들의 오작교가 되어 주기로 했다.
“제임스가 우네…” 고맙게도 그 말을 들은 울 아들놈의 그녀는 나를 앞서서 아들에게로 향했다. 녀석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다음엔 누나랑 둘만 데이트하자” “하버에도 놀러 가자” “영화 보러 가자…”라며 달래주는 그녀. 속마음과는 달리 연신 싫다고 도리질 치는 아들놈을 보면서 비로소 굳게 닫혔던 내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유행가 가사에도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울 아들놈은 이다음에 멋진 사랑을 하겠구나….’라는 막연한 기대감과 설렘이 그 순간 나의 이빨을 입술 밖으로 밀어낸 것 같다. 그렇지만 울 아들놈 미래의 사랑이 눈에 보이는 듯한 흐뭇함으로 잠시 상상 속의 즐거움에 빠졌던 나는 현실을 자각하자 당혹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여전히 흐느끼는 아들 녀석을 어찌해야 할지… 아들에겐 지금, 이 순간만큼 비극적인 생애는 처음이었을 현실에, 나 역시 난감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가? 어디 다른 데로?’ 생각하던 차에 마침 신호등 정지선에 서 있었던 터라 우리 동네 가까이에 가을 풍경이 정말 아름답고 예쁜 가을 길을 떠올리고 향하기 시작했다.
길가에 나뒹굴던 낙엽 무리가 한바탕 춤사위를 보여주더니 어둠 속으로 비껴가며 또 다른 낙엽을 향해 따스한 가로등 불빛을 내어준다. 점점 어둠을 묻혀가는 주위를 보며 넌지시 말을 걸어 보았다.
“왜 울어…?” 오랜 침묵 속에 건넨 엄마의 물음에 대답 대신 아들의 훌쩍임이 잦아들었다. 아무 말이 없는 녀석에게 짓궂게 아니 정말 궁금해서 또다시 나지막이 물어보았다. “왜 울어?”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내 눈은 거울을 향했다. “몰라… 나도 몰라… 왜 눈물이 나오는지… 그냥 눈물이 나와.” 흐느낌을 멈추지 않고 낮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하는 열한 살 소년.
“왜…? 너도 빨리 저 형들처럼 크고 싶어서? 우유를 잘 마시면 내년엔 너도 저렇게 클 수 있어. 아니 이다음엔 저 형들보다 더 클 거야.” 열한 살 소년에게 이 말이 위로되는 것인지 나도 모를 말을 은근슬쩍 우유를 권장하는 엄마가 되어 있다.
“흑흑… …” 꼭 다문 아들의 두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흐느낌이 조금 전과 조금 다른 듯하게 느껴졌다.
“누나도 내년엔… 또 내 후년엔 와! 제임스가 정말 멋지게 컸네… 할 거야. 엄마는 알아, 울 제임스는 멋진 남자가 될 거라는 것을.” 확신에 찬 엄마의 목소리가 힘이 되고 격려가 되었는지 그제야 “정말? 나도 저 형들처럼 키가 클까? 누나보다 더 키가 클까?” 말끝에 희망적인 기대감이 묻어 있다. “그럼… 두고 보렴. 내년 이맘땐 누나도 와!!! 제임스 정말 멋진 남자가 되었구나. 매력 만점의 제임스를 보고 누나가 정말 기뻐할 거야.” 아들이 좋아할 어휘를 떠올리며 소년은 아무래도 남자가 되고 싶을 거라는 생각에 열심히 주절거렸다.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아들 녀석은 “엄마, Let it be 틀어줘.”
요즘 울 아들놈이 좋아하는 음악은 비틀스의 ‘렛잇비’이다. 좋아하는 곡을 연달아 몇 차례 듣는 것까지 나를 닮은 울 아들놈. 문득 아들 나이 때 보았던 ‘초원의 빛’ 영화가 떠오른다. 비껴간 청춘남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 나의 풋사랑의 열병을 앓게 한 남자 주인공이었던 워렌비티, 버드. “사랑은 젊은 날 우리를 휘몰아치고 간 소나기인걸…” 영화의 여주인공이 되어 마지막 장면에서 나탈리 우드, 디니가 버드의 배웅받으며 읊조리던 말을 수없이 뱉어냈었다. 앤딩 자막으로 윌리엄 워즈워스의 ‘초원의 빛’ 시가 나오며 시 앓이로 십 대를 장악했던 적도 있다. 비록 스크린 속의 대상이었지만, 사랑의 성장통을 겪어본 엄마이기에 아들의 눈물이 사랑스럽기만 하다. 흐느끼던 열한 살 소년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가 먼 훗날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아들 녀석은 지금은 모를 거다. 자신의 풋사랑 추억 속에 엄마의 오작교도 한몫했다는 것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름다운 이 시간, 아쉬움으로 남겨진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 추억이고 즐거웠던 시절이었는지 청년이 된 아들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면 좋겠다. 연초록빛 청포도 알처럼 싱싱하고 상큼한 사랑으로 미래가 송골송골 맺히기를 꿈꾸어 본다.
이렇게 열한 살의 울 아들놈은 사랑의 성장통을 겪으며 한 발 한 발 어른이 되어가는 길목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2008년 십일 월의 초입, 사랑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아들을 응원하며…
*한국 나이로 열두 살, 이곳 캐나다 나이론 열 한 살 : 한국 사람의 나이는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태아는 나이를 갖는다. 일테면 태어나 처음 맞는 첫 생일부터 첫 돌이라 부르지만 두 살이 되고, 새해가 될 때마다 생일과 관계없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
*이빨 요정이 빠진 이빨 대신 주고 가는 돈은 대체로 캐나다 달러로 $5~10을 주지만 때에 따라 더 주기도 한다.
첫댓글 2009년 5월 캐나다 한인문학가 협회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작으로 나를 글의 세계로 이끌어 준 시발점.
일상을 일기대신 써나가던 글이 마트에서 집어 온 신문 한 부로 인해 보여주는 일기로 자리매김을 하게 했으니...
풋풋한 아들의 사랑 이야기도... 시간이 지나감에 그 또한 하나님의 이끄심이라는 것을...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