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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은1919년3월1일 기독교(16명), 천도교(15명), 불교(2명) 등 민족대표33인이 태화관에 모여서 조선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킨 날이다. 독립선언서의 역사적 배경은1918년 초반부터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1919년1월18일에 파리 강화회의가 열리자 당시 식민지 내지 반(半)식민지 상태에 있던 여러 나라에서는 독립할 수 있다는 기대가 크게 일어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상해 등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2월1일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고, 2월8일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동경에 모여서 조선 독립을 선언하였다. 더구나1월21일 고종황제가 승하(僧下)하자 일제(日帝)에 의한 독살(毒殺)설이 유포되면서 그동안 폭압적인 일정의 무단정치(武斷政治)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더욱 높아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국내 기독교, 천도교, 불교의 지도자들은 각기 독립운동을 모색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의 경위와 내용을 살펴보면 이들 단체의 첫 움직임은1월20일 경부터 이승훈, 길선주, 이갑성 등 기독교 측과 손병희, 오세창, 최린 등의 천도교 측 중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월 중 두 차례 모임에서 독립선언서를 동시에 발표하기로 합의했다. 2월 중순경에 이승훈과 최린은 최남선의 주선으로 불교 측의 한용운 등과 협의하여 원서 작성에 합의하고, 그 작성은 최남선에게 일임하여 만들어진 것이3·1독립선언서이다.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평화적이고 온건하여 감정적으로 흐르지 말 것, 둘째,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조선의 독립이 절대 필요함을 강조하고, 셋째,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독립이 전통정신에 입각한 정의와 인도의 운동임을 강조할 것을 기본 내용으로 삼았다. 그리고3·1독립선언서의 전체 정신은 첫째,한민족의 독립정신 및 그 유례를 철두철미 민족 고유의 양심과 기능에서 발동하도록 하고, 둘째,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결코 배타심 특히 단순한 배일(排日) 정신에서 온 것이 아니라, 민족의 생존 발전상 당연한 지위를 요구하는 것임을 명백히 하고, 셋째,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한국인 독자의 이기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동양 전체의 평화 및 세계의 역사에 추세에 비추어 불가분한 것으로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넷째,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고, 그 목적을 완수하기까지 어디까지나 지속할 성질의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3·1독립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일제(日帝)에 의한 고종황제의 독살(毒殺)설 때문이었다고 보겠다. 이때 시위에 가담한 연인원은200여 만 명 이상으로 전국218개 군(郡) 중에서211개 군이 가담했으며, 참집횟수는1,500여 회나 되었다. 구속된 사람은46,948명, 피살자가7,509명, 부상자는15,961명, 불탄 민가가715가, 제암리교회 등 교회당이47개소, 학교가2곳이 이른다. 이 독립운동이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일제는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文化政治)로 정책을 전화하고,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4.13.)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이 독립운동은 중국, 미국,러시아 등 세계 각처에서 조기 해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3·1절을 맞이할 때마다 느껴지는 절실한 교훈과 바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가호하심과 평화통일을 열망하는 국민들의 단합된 힘과 든든한 국력, 외교적 역량(力量)이 있어야만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대한민국을 잘 지킬 수가 있다는 신념(信念)과‘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참다운 지도자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장로신문 논단에서 [[제1631호] 2019년 2월 23일] 김상태 장로<교육학 박사 ‧모스크바 장신대 객원교수 ‧면목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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