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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에 가면
9월 마지막 날 초가을 위례역사 선생님들은 세검정을 찾았다
여기서 우리는 태종 무열왕으로부터 장춘랑 파랑 계백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 안평대군
연산군과 어우동 광해군 이조 반정의 주역 이귀 김류 이괄. 김홍근과 대원군
현대의 현진건 서예가 손재형을 만나며 이런분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으로 향했다.
경관은 신선이나 도인들이 놀았을 빼어난 운치가 우리를 압도하는 곳인데
먼저오덕만 선생님은 석파정으로 안내 했다
석파정은 원래는 김홍근의 소유였으나 고종의 친 아버지 흥선 대원군이 너무도 탐이나 꽤를 내어서 뺐었다는 권력의 무소불위를 느끼게 하고 대원군은 정자 앞의 산이 모두 바위여서 바위가 파도를 이루었다하여 석파라 이름 하였다 하는데 안내판은 대원군의 아호라고 적고있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후 고아원과 병원등으로 사용하여 권력층의 놀이터에서 서민의 아픔을 대변 하기도 하는데 지금은 쓸슬히 역사의 볼거리로 뒷마당으로 물러나있다
서울시 유형 문화재 제26호(1974.115.지정)
종로구부암동 산16-1
이어서 무계동 무계정사를 찾았다
세종29년(1447년추정)에 만들어진 셋째왕자 안평대군이용의 별장이었다
문종때 황표정사를 장악하고 조정의 배후 실력자 였으며 단종 즉위후 황보인 김종서등 세력과 제휴 용트림을 하다가 수양의 계유정난으로 희생된 이야기가 권력의 무상함을 말하고 있어 못다한 역사를 풀기라도 하듯 근대 단편 소설의 개척 소설가 현진건은 그앞에 머물러 자리를 잡았었나 보다.
우리는 이용과 그를 따르던 무리가 되어 현진건이 함께했던 약수터에서 선인들의 넋을 기리며 한모금씩 음미하였다
서울유형 문화재 제22호(부암동329-4)
굽은 언덕길 따라오르니창의문이기다리고 있었다
올 바른 것을 드러내어 귀감이 되게 하자는 태종의 말씀인양 서있다
돈의문(서대문)과 숙정문(북대문)사이의 적을 감당했던 곳으로
태종13년(1413)에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이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서 훼손 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여 두문을 닫고 통행을 금지 하고 소나무를 심어 통제 하였다.
그들은 미래에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을 예측 이라도 하는듯 하였다
그랬다 그후 탕춘대성이 탄생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일대는 능금과 자두의 명산지로 자하문이라고도 하였다.
숙종때 탕춘대성을 만들고 보니 산이 높고 물이 맑아 경치는 좋으나 논밭이 없고 다른 생산수단이 없어 한성 시전에서 매매되는 포목과 관청에서 쓰는 메주와 종이 제조권리를 이곳 사람들에게 주어 생활유지를 하게 하였다.
건물 형태는 우진각으로 1396년(태조5년)돌로 쌓은 홍예위에 정면4칸 측면2칸 문루가 있고
계판에는 인조 반정 공신들의 이름이 아직도 남아있어 혁명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양주군 사람들이 드나든 문을 그들처럼 홍제천으로 내려왔다
바위가 병풍을이루며 홍제천 백로가 노니는 물가에는 삼각산 옥천암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떠한 어려움도 이루어 주겠다는 보도각 백불이 미소짓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때 이 마애불상 앞에서 기원 했다고 하여 여기가 장의사가 아닐까 생각도 드나 어쨋든 세검정 초등학교에 당간이 있고 현재로는 거기로 추측 하는 것이 무리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흥선 대원군의 부대부인 민씨가 고종의 천복을 빌었다고 하는 왕실과 관련된 관음 보살 도량으로 유명하다
재료는 화강암으로 정확한 명칭은 홍은동 보도각 마애 보살 좌상이며 흰색의 호분(조개가루)이 전체적으로 두껍게 칠해져 있기 때문에 백불 또는 해주관음 이라고도 한다.
현재 마애불은 근래에 세워진 정면1칸 측면1칸으로 보도각이라는 전각안에 있다.
서울 유형 문화재 제17호(1973.6.7)
자하문밖 도로에서도 마애보살상의 자애로운 미소를 느끼며 우리는 홍지문으로 향하였다
여기가 자하문 밖으로 나와 탕춘대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셈이다
조선 숙종41년(1715)에 서울 성곽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하여 세운 문이며1921.8월 허물어 진 것을 1977년 다시 세운 것으로 한성 북쪽에 있다 하여 한북문 이라고도 불렀다
편액은 박정희의 글로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옆으로 이어진 오간수 대문은 홍예형의 문으로 그때는 문이 달려 있거나 철창으로 들어오는 적을 막지 않았을까 생각되어 지며 이어서 석파랑으로 향하였다.
석파랑으로 오면서 나의 마음은 유적의 한모퉁이에서 토기편 한 조각을 발견한 느낌을 받는 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은 왜 일까? 그랫다 삼국유사 기이편에는 태종 무열왕과 장 춘랑 파랑이 등장 하는데 이전에 백제 군사와 황산벌에서 싸울때 진중에서 죽었는데 태종의 꿈에 나타나 “저희들은 옛날에 나라를 위해 죽었고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위협에 눌려 남의 뒤만 따를뿐 원컨대 왕께서는 약간의 세력을 주십쇼 ” 왕께서는 놀라고 괴이하여 한산주에 장의사를 짖고 그들과 백제의 계백을 모셔 명복을 빌었다. 그래서 어느분은 고양벌이 황산이고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고 하시는 분도 있다.
각설하고 이곳은 석파정의 별당이 있어서 조선 말기의 중국풍의 영향을 받은 모습으로 남아 있으며 지금은 서예가 손재형이란 분이 전국에서 헐리는 한옥 재료를 모아다 지었다는군요. 참으로 역사적인 안목이 돗보이는 건물입니다.
이어서 탕춘대와 세검정으로 향하였다
탕춘대의 건물은 사라지고 바위돌만 옛 영화를 말해 주고 있었다. 연산군은 어울우동을 비롯한 전국의 미녀들을 뽑아 들이고 어지러운 세상을 잊으려 애쓴 모습이 안타까운데 바로옆 세검정은 반듯한 세상을 꿈꾸는 사나이들이 있어서 혁명을 주도했던 김류 이귀 이괄의 기상이 가을 하늘을 찌르고 그들이 칼을 씻었다는 세검정은 무심한 홍제천만 바라 보고있었다..
이곳에 조지서라는 관청을 두어 종이와 벼루 만드는 일을 하였고 실록을 기록한 사초를 씻엇다는뜻의 조세고개 조지동이라는 땅이름도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실록에 기록된 내용이 후환이 될까 염려되어 사초를 물에 씻었다는 선조들의 지혜를 느꼈다. 이처럼 자하문 밖은 우리 역사의 큰 획을 그은 곳 이다 .
자하문 밖에서 광화문으로 골치아픈 역사를 잊으려는 듯 일행은 군중 속으로 스며 들었다.
이끌어 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아주 재미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함께 참여 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마운 말씀 가슴에 새겨 둘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