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
【배경】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이 좌절된 이후 중국공산당 내부에 사회주의 건설을 둘러싼 노선대립이 생겨났다. 최고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은 대중노선을 주장하였으나,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등의 실용주의자들은 공업 및 전문가를 우선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1962년 9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수정주의를 비판함으로써 반대파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발단】
- 1965년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 야오원위안[姚文元] 베이징[北京]시 부시장 우한[吳 ]이 쓴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이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다가 실각한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비판
- 이로 인해 실권파의 권력기반이었던 베이징시 당위원회와 삼가촌(三家村)그룹은 마오쩌둥 추종자들의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됨
- 1966년 4월 베이징 시장 펑진[彭眞]이 해임, 8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마오쩌둥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를 발표
-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전개과정】
- 1966년 8월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백만인 집회의 홍위병(紅衛兵)들 마오쩌둥사상을 찬양, 낡은 문화를 일소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
- 학교 폐쇄,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을 공격 당의 관료들을 비판, 권력을 무력으로 탈취
- 그러나 실권파들이 완강히 저항하고 홍위병에 내분이 발생, 1967년 1월 마오쩌둥은 린뱌오[林彪] 휘하의 인민해방군이 문화대혁명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것을 지시
- 인민해방군은 각지의 학교 ·공장 ·정부기관을 접수, 수백만 명의 홍위병들을 깊숙한 산골로 추방
- 1968년 9월 전국 각지에 인민군대표, 홍위군대표, 당간부의 3자 결합으로 ‘혁명위원회’가 수립됨으로써 진정국면으로 들어섬
- 1969년 4월 제9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마오쩌둥의 절대적 권위가 확립, 국방장관 린뱌오가 후계자로 옹립 à 절정
- 1971년 린뱌오가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 마오쩌둥에게 충성을 바쳤던 군부 지도자들이 대거 숙청 à 문화대혁명이 마오쩌둥의 개인적 권력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품게됨.
- 1973년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추천으로 덩샤오핑이 권력에 복귀, 문화대혁명의 정신은 여러 측면에서 공격받기 시작
- 마오쩌둥 지지하는 세력 à 이데올로기 ·계급투쟁 ·평등주의 ·배외주의를 강조
-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지지 세력 à 경제성장 ·교육개혁 ·실용주의 외교노선을 주장
- 마오쩌둥은 두 노선을 절충한 후계자를 물색, 실패
-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 화궈펑[華國鋒]에 의해 마오쩌둥의 추종자인 4인방(四人幇:王洪文 ·張春橋 ·江靑 ·姚文元) 세력이 축출됨 à 실질적종결
- 공식적으로는, 1977년 8월 제11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그 종결이 선포됨.
【평가】
문화대혁명은 한때 만민평등과 조직타파를 부르짖은 인류역사상 위대한 실험이라고 극찬을 받았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 운동으로 약 300만 명의 당원이 숙청되었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년 5월에서 1976년 10월까지 모택동에 의해서 발동되고 영도된 정치운동. 모택동은 한 무리의 자산계급과 반혁명의 수정주의 분자들이 이미 중국공산당, 정부, 군대와 문화영역의 각계 안에 섞여 들어와서 상당히 많은 단위의 영도권이 이미 마르크스주의자와 인민군중의 손에 있지 않다고 여겼고 당내 자본주의노선을 걷고 있는 當權派가 중앙에 자산계급 사령부를 형성하고 그것이 하나의 수정주의의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을 가지고 있고 각 省, 市, 自治區와 중앙 각 부문에 모두 대리인이 있고, 과거 각종 투쟁은 모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여기고 단지 "文化大革命"을 실행해서 공개적으로 전면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광대한 군중을 발동해 나와서 앞에서 기술한 어두운 면을 들추어내야만 走資派에게 탈취 당한 권력을 다시 빼앗아 올 수 있다고 여겼다. 이것은 실질상 한 계급이 한 계급을 전복시키는 정치대혁명이다. 이런 착오의 예측에 근거해서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의 발동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발단은 吳함의 경극 "海瑞罷官"에서 비롯되었다.
문화대혁명은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1966년 5월 문화대혁명 발동에서 1969년 4월中共九大召開까지이다. 1966년 5월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통과한 <五·一六 通知>와 同年8월 중공8차11中全會에서 통관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은 "文化大革命"전면발동의 표지이다. 이 두 차례의 회의는 소위 彭眞, 羅瑞卿, 陸定一, 楊尙昆 反黨집단과 소위 劉少奇, 鄧小平 司令部에 대해서 착오의 투쟁을 진행하였다.
중공중앙영도기구에 대해서 착오의 개조를 진행했고 성립된 "중앙문화혁명소조"가 중앙의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모택동의 개인 영도는 실제상으로 중공중앙의 집단영도를 빼앗아 대신 들어섰다. 모택동의 개인숭배에 대해서는 열렬한 정도로 치켜세웠다. 林彪, 江靑 등은 "중앙혁명소조"의 명의를 이용해서 기회를 타서 "打倒一切", "全面 奪權"과 전면내전을 선동했다. 중앙 여러 부문과 각지방의 당·정의 영도기구는 거의 모두 奪權과 개조를 당했다. 中共九大는 "문화대혁명"의 착오이론과 실천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임표, 강청, 康生등의 중앙에서의 지위를 강화했다.
두 번째 中共九大부터 1973년 8월 중공 제10차 전국대표대회까지이다. 1970년에서 1971년사이에 임표 반혁명집단이 최고 영도권을 탈취하려는 음모와 반혁명 무장정변을 책동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모택동, 周恩來는 임표 반혁명집단의 정변을 분쇄하였다. 모택동의 지지하에 주은래는 中共中央工作을 주재하였고 각방면공작에 轉機를 있게 하였다. 1972년 주은래는 극좌사조를 비판하는 의견을 제출하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당시의 임무가 마땅히 "極右"를 반대하는 것으로 여겼고 주은래의 정확한 의견은 관철되지 못했다. 中共十大는 九大의 착오 노선을 계속했고 王洪文을 중공중앙 부주석에 임명했다. 강청, 張春橋, 姚文元, 왕홍문은 "四人幇"을 결성했고 강청 반혁명 집단의 세력은 강화되었다.
세 번째 中共十大에서 1976년 10월까지. 1974년 초 강청일당은 "批林批孔"을 빌어서 창끝을 주은래에게 향하였다. 모택동은 강청등이 기회를 빌어 纂權활동을 진행한다는 것을 발견한 후 심한 비판을 하였다. 1975년 주은래의 병이 중하자 등소평이 중공중앙공작을 주재하고 각 戰線에 대해서 정돈을 진행했고 형세가 분명히 호전되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등소평이 문화대혁명의 착오을 교정하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批鄧, 反擊右傾飜案風"운동을 발동했다.
전국은 재차 혼란에 빠져들었고 1976년 1월 주은래가 사망하자 "四人幇"은 奪權을 음모하였다. 4월 전국에서는 天安門사건으로 대표되는 주은래 추도와 사인방 반대의 혁명운동이 발생하였다. 중공중앙과 모택동은 천안문사건에 대해서 판단착오를 하여 착오스럽게도 등소평의 당내외 모든 직무를 박탈했다. 1976년 9월 모택동이 사망하자 강청반혁명집단은 纂黨奪權의 음모활동을 가일층 진행하였다. 10월 상순 중공중앙은 사인방에 대해 격리 심사를 결정하였고 강청반혁명집단을 분쇄하였다. "문화대혁명"도 이렇게 끝나게 되었다. "文化大革命"운동은 한바탕의 영도자 착오로 말미암은 착오운동으로 임표, 강청반혁명집단에 의해서 이용되었고 당·국가와 인민들에게 커다란 재난의 내란을 가져다주었고 당·국가와 인민에게 엄중한 좌절과 손실을 주었다. 문혁으로 인해서 중국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信心의 위기 정치적으로는 人治·파벌주의로 정치제도적 불안정을 가져다주었고 경제적으로는 장기간 경제 침체와 국제적 낙후성에 대한 불안이 나타나게 되었다.
배 경
문화대혁명은 중공에서 1966년 5월부터 76년 10월까지 모택동에 의해 계획, 추진된 대규모적인 상층구조의 이념투쟁 및 권력쟁탈 운동으로 그 배경으로는 1956년경부터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대중노선과 공업우선 전문가 우선의 노선 간에 뚜렷한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 58년부터 대중노선이 추진되었으나 그 위 복잡한 경로를 거쳐 62년 과도기 투쟁이론으로 정식화되기에 이르렀다. 사회주의란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에 이르는 과도기이며 게급투쟁이 존속하고 있다는 생각에 따라 63년부터 농촌의 인민공사에서는 사회주의 교육운동이라는 대중투쟁이 전개되고 중공군 내에서는 모택동사상 학습운동이 예술분야에서는 갖가지 혁신이 때맞춰 일어났다.
[해서파관] 비판
1961년 1월 북경에서 해서파관이라는 연극이 공연되었다. 해서는 16세기 후반 명의 가정제 시대의 고관으로서 청렴하고 강직한 청관으로서 연극등을 통하여 서민들에게 퍽 인기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처음 공연되었던 당시에는 정치적 사건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1962년이래 청과 강생이 이것을 정치문제로서 비판하도록 모택동에게 강력하게 호소하였다. 1965년 강청은 문예평론가 요문원을 점찍어 그에게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을 쓰도록 하였다. 요문원의 논문은 해서파관 속에 나오는 얘기인 토지의 반환 억울한 죄의 명예회복을 앞서 말한 단강풍 번안풍과 연결지어 이것이야 말로 당시의 프롤레타리아 독제와 사회주의 혁명에 반대하는 부르조아지 투쟁의 초점이었다는 것으로서 "해서파관은 이와같은 계급투쟁의 한 형태의 반영이다"라고 단정하였다. 이후 11월29일 군 중앙기관지 해방군보가 이를 전재하면서 전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해방군보가 이를 전재하면서 전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해서파관 비판은 일거에 중대한 정치문제로 변하였다.
文革의 開始
5월4일 부터 26일 까지 북경에서 76명으로 개최된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팽지, 나서경, 육정일 등의 파면과 심사 2월제강의 철회와 문혁 5인소조의 해산등 모택동 임표파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중앙문혁소조의 설립을 결정하였다. 5월16일에는 "5,16통지"를 채택하여 전당에 공표하였다.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큰 깃발을 높이 올려 철저하게 반당- 반사회주의의 학술권위 부르조아지의 반동적 입장을 폭로하고 학술계, 교육계, 신문계, 문화계, 출판계의 부르조아 반동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하여 이들 문화영역에서의 지도권을 탈취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시에 당, 정부, 군대와 문화의 각 영역에 잠입하여 있는 부르조아지의 대표적 인물을 비판하고 이들 인물을 깨끗하게 씻어 어떤 자는 그 직무를 바꾸어 줄 것 등의 문화대혁명의 기본적내용과 목적을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文革은 이통지의 공표와 함께 대중운동으로서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文革의 특수한 성격
문화대혁명은 1962년 이래 당의 최고지도부 내부에 생기고 있던 내외정책을 둘러싼 대립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모택동의 주도로 발동되었다. 그가 보기에는 중국의 현실은 사회주의의 진정한 모습으로 부터 일탈되어 있는 것으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은 당과 국가의 중추기관을 지배하며 혁명대중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택동이 목표로 한 것은 중앙으로 부터 지방말단에 이르기까지 뿌리깊게 존재하던 유소기, 등소평파의 영향을 일소하여 행정기관, 학교, 기업, 마을조직, 농촌에 빠리꼼뮨형의 새로운 권력기관을 만들어 내는것. 이에의해 과거 수천년 동안 모든 착취계급이 남겨놓은 낡은사상, 문화, 풍속과 싸울것을 그는 목표로 하였던 것이다. 빠리꼼뮨형의 권력이란 혁명적인 대중이 충분히 상의한 다음 후보자 명부를 제출하고 다시 대중이 여러차례 토론한 다음에 행해지는 선거에서 선출되는 대표에 의해 구설되며 대중은 이 대표를 언제나 비판할수가 있고 그직책에 적합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토론을 거친 다음 개선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꼼뮨을 둘러싼 항쟁과 군사독재
꼼뮨의 이념과 운동은 더욱 동란을 장기화시키고 그 이상주의적인 이념과는 반대로 군사독재형 권력을 낳는 요인이 되었다. 꼼뮨을 이념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지배기구와 그것을 바꾸는 일이 불가결하였다. 그리하여 꼼뮨을 지향하는 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이 혼란상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택동의 개인적 권위가 한층 강조되었고, 인민해방군에게 좌파를 지원하여 군사통제 군사훈련을 하는 강대한 권한이 주어졌다. 그리하여 군의 행정에 대한 전면개입이 시작되었다. 군의 전면개입은 군민관계 군과 행정간부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들과 함께 문혁기간에 자기계통의 고급장령을 다수 군수사령관으로 내보낸 임표의 권력과 지위를 현저하게 높여주었다.
文革의 종언
4인방 타도후 화국봉은 모택동의 정통후계자로 스스로를 위치시키고 모택동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계속혁명]이론을 전면적으로 긍정하였다.그는 혁명정신을 고양시켜 사회주의의 방향을 견지해 나가며 생산력의 급속한 발정에 의한 현대화를 추진하는 것을 이 이론의 본질로 삼고, 4인방이 생산력발전의 측면을 무시하고 생산을 파괴한 것을 극우노선으로서 비판하며 그들을 타도한 것을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또 하나의 위대한 승리로 규정하였다. 경제정책 측면에서 화국봉 정권은 1977년에 열린 일련의 회의에서 인민공사의 기본단위를 생산대로 부터 생산대대로 옮겨 1980년대까지 거의 전국의 농업기계화를 실현할 것, 이에 의하여 20세기 말까지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4대 현대화를 실현시켜 세계의 가장 전열에 나선다는 대약진 계획을 내걸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의 제2차 대약진은 이전의 대약진기 만큼 대규모는 아니었으나 또다시 중공업, 경공업, 교통, 운수, 농업의 균형상실을 초래하고 말았다. 1977년 8월에 개최된 당 제11회 전국대표대회에서 화국봉은 그 정치보고속에 제1차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선언하고 당 내외와 국내외의 모든 적극적 요소를 동원하여 모든 단결될 수 있는 힘을 단결시킴으로써 금세기 안에 중국을 위대한 사회주의 강국으로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과
문화대혁명은 10년 동안 중공을 혼란에 몰아넣었고, 장기간 대학을 폐쇄하여 교육 과학 기술 등 전문분야의 지도를 당성이 강한 비전문가가 장악하여 전문성보다 당성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전문분야의 지식 수준이 저하되었고 老 전문가의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하여 사회 발전에 큰 장애를 초래하였다. 그 뿐 아니라 문화대혁명으로 피해를 본 부류와 이를 통해 부상한 그룹의 대립문제, 구간부의 복직으로 인한 관료포화 상태 등은 중공의 당면문제로 아직도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중공은 81년 6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제6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건국이래의 몇가지 역사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를 통하여 문화대혁명을 평가하면서 이는 당 국가 인민에게 건국이래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모택동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라 규정하였다.
고, 경제는 피폐해지고 혼란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은 당 ·국가 ·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