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시조시학}/ 봄(54)호
장작/ 임성규
타다 만 뼈들이 아궁이에 뒹군다
세상의 아랫목이 슬픔에 젖는다
굴뚝 벽 사이사이에 그을음이 남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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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 틔우는 입구가 어디쯤/ 선안영
새 한 마리 들어와 쿵 쿵 쿵 부딪히다
쌍떡잎 같은 날개를 펴 창공으로 날아가고
몇 낱의 부드러운 깃털 길몽처럼 떨어졌다.
유리이길 원했으나 점점 낡은 거울이 된.....
한 영혼을 배웅하다 너무 멀리 따라갔는가
환하게 달의 귀 하나 오래도록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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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사지/ 권용욱
억센 들풀
시들어야
너덜밭 찾아가네
허공에 절을 지어 바람메 허무는데
먼 정(情)도
돌에 새기면
천 년이 만남이네
*망덕사지(望德寺址):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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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刻)을 하며/ 이한성
때깔 좋고 결 고운 귀목 한 판 엎어 와서
마음을 다 비운다, 면벽(面壁)하던 달마처럼
살아서 꿈틀댄 글자, 뿌리째 심기 위해
벼락 맞은 대추나무 이름 석 자 새겨 넣듯
화선지 보얀 속살, 여백과 먹물 사이
칼끝이 접신한 순간, 비백(飛白)에도 피가 돈다
몇 날의 시름 끝에, 예서(禮書) 몇 자 또렷하다
사방에 울을 치고 곧은 뼈 세우느니
무념(無念)의 끌리는 손맛, 칼끝이 먼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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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곤(春困)/ 오세영
자운영 꽃밭에선 황소가 하품하고
갯버들 논둑에는 염소 떼 조우는데
실개천 시린 물소리만 낭낭하게 들리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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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헌화가(獻花歌)/ 박시교
단 한 번도 꽃다운 삶 살아보지 못한 넋이
남들 다 피었다 진 철 지난 엄동설한에
마침내 온 산 들녘을 피워 내는 꽃이여
당신 계신 그곳에는 피었을 것 같지 않아
한두 송이 곱게 꺾어 보내드리고 싶지만
먼 길에 시들면 어쩌나 눈이 부신 눈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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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에게/ 백이운
백발로 오는 게 아니라 웃음으로 온다
웃을 일이 점점
많아지는가 싶더니
통쾌히
웃음에게 그냥
잡혀 먹히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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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시조시학}/ 여름(55)호
못을 품다/ 진순분
본디부터 나는 어미 가슴에 박힌 옹이
깨어나라, 깨어나라, 간절한 기도처럼
정점을 곧게 내리친 서슬 푸른 자존 하나
애당초 어미에게 시린 슬픔은 아닌 것이
끝끝내 아뜩한 벼랑 절망도 아닌 것이
먹먹한 말없음표로 가슴 치는 진눈깨비
닿지 않는 삶은 꽃 핌과 꽃 짐 그예 티끌
끊어라, 끊어라, 피 뜨거운 그리움의 죄
허울에 대못을 친다 욕망에 대못을 친다
본디부터 나는 아비 가슴에 박힌 상처
시대의 서러움을 징소리로 울음 울 때
눈물에 녹슬지 않는 견고한 목숨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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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이다/ 정혜숙
앵두나무 묘목이 첫 꽃을 피웠다
사방으로 번지는 명랑한 웃음소리
그때다, 멀리 또 드물게
새 소리가 들렸다
맑은 분홍이었다, 첫 마음은 그렇다
성근 햇살 아래 속눈썹이 떨리는
분홍이 다녀간 적 있다
오래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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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데기/ 문제완
무등산 초입에서
등산객을 맞는다
대인동 시장에서
번데기 나를 본다
취기로
어두워진 저녁
골목마다 주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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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빵 여행*/ 표문순
가격을 알 수 없는 수상한 할인율로
메인화면 장식하는 여행용 기획상품
앞뒷집 여편네들의 궁둥이를 쑤석였네
노빵인지 노다진지 헛바람을 덥석 물고
부녀회장 뒤를 따라 동남아로 떠났다가
곧바로 추가에 꿰어 발만 동동 굴렀다네
아들 딸 달달 볶아 추렴으로 이뤘건만
진짜는 다 놓치고 옵션에 발이 묶여
공연한 보신품으로 탈털 터는 대박 여행
*'노빵'이란 '노빵나다', '노낫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노다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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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 2/ 최연근
줄을 이은 개미떼
땅만 보고 달린다
허물 벗고 가랑이 찢고
파란 불은 깜박이고
갑자기 뒷다리 힘주고
돌아서는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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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되는/ 오세영
10대의 백합 향기 20대의 리라 향기
30대의 장미 향기 40대의 동백 향기
비로소, 여자가 되는 50대 그 아득한 매화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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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시조시학}/ 가을(56)호
꿈/ 홍진기
볕살이 통통 튀는 날빛 푸른 길을 가다
바람에 흔들리는 잔디풀 깔고 앉아
불러서
쓸쓸한 이름
오랜만에 불러본다
뒤태가 예쁜 너는
철들자 떠났지만
세월은 너 모르게 잊는 법을 두고 갔네
내 한 몸
순간을 살며
영원을 꿈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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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배우식
뇌종양이 코요테처럼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눈에선 모래가 줄줄... 눈물인 듯 흘러내리고,
모래알 그 아픈 시간들은 더 빠르게 쏟아진다.
내 어깨가 무너지고 허리가 주저앉는다.
사막같이 텅 빈 생애 이승의 내가 지워진다.
그 순간 모래 시간 파내고 시 한 편을 심는다.
죽음 같은 적막 소릴 깨뜨린 건 따뜻한 바람.
저 바람이 풀잎처럼 모래시계 뒤집는다.
겨울 끝 손가락에는 풀꽃의 시가 피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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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고등어/ 인은주
기억하지 말아줘 꼬리의 물결들은
철없이 싱싱해서 낭비한 내 청춘도
스스로 외로운 만큼 뛰놀다 걸린 거야
우리의 꿈은 크고 때로는 위험했지
거친 숨이 만들어낸 함성들은 기억해줘
오늘을 견디는 일은 산자의 의무니까
모든 여행들은 오기 위해 가는 것처럼
바다를 떠돌수록 푸른 살은 차오르고
겨울의 먼 별들만큼 누군가를 물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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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손(孫)의 시/ 정일근
어린 새 일찍 깨면 내 상부터 찾아와서
쓰다만 시의 씨앗 입 안 가득 물고 간다
빈 가지 부리 쪼아서 시(詩)앗 시(詩)앗 파묻는데
돌아서면 열매 돋아 물앵두가 지천이다
욜랑욜랑 찾아와서 제 호주 불러내
새 손(孫)은 붉고 단 제 시(詩) 자랑하기 바쁘다.
*시(詩)앗: 필자가 만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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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豚)은 돈이다/ 유헌
돈사의 돈 소리가 요란한 저녁나절
콧구멍 들이밀고 눈 빤히 치켜뜰 땐
엽전을 흔들어대며 밥 달라는 시늉일세
돈이 입 쩍 벌려 돈 물고 웃을 때는
돈 앞에 무릎 꿇고 절하는 사람 있지
돈에게 조아리는지, 돈에게 조아리는지
돈이, 돈이 되는 그런 시절 지나왔지
돈으로 돈을 사고, 돈으로 글을 배워
지금 도 내 시(詩) 어디에선가
돈 소리 들린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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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금초/ 흙신
묵고 살 건더기 없응께 내 몸땡이 달칠 도리배끼...
시방 시상(세상) 돌라묵을라는 사람도 둘려묵을라는 사람도 너무 많애. 벼슬한다 하는 작자들 거개 다 도둑놈 뺨쳐 묵제. 나는 둘려묵고 살 궁리 할라해도 나 같은 놈한티 둘릴 사람 시상 천지에 없어. 암만... 내 몸뚱이로 일해서 묵고 사는 거이 젤로 편해. 나 이날 평생 멍텅구리로 살아. 이 시상 사람 다 나보다 똑똑허지. 똑똑헌 사람 못 이기고 배운 사람 못 이겨. 징그라, 어매 징그라, 배운 사람 징그라... 저번에 내가 병원 간다근께 영감이 돈 천 원 줌서 냉겨오라그네, 냉겨 오라고. 얼매나 부애가 나서 오죽하문 내가 돈 천 원을 짜악짝 찢어서 포르르 날려 불었것어. 후우우 불어분께 풀풀 날라가불대, 금매.
죽어야 일도 그치것제. 촌 어매들 다 그려.
자식들 알간? 모르게. 돈 한 닢 벌라고 이리 일해.
부모는 뉘 부모든 다 자석 위해서 고생길 가. 진디고 마른 디고, 물이고 불이고 자석 위한다문 어디든 다 들어가. 자식들은 이 속 모르제. 알문 못써. 가심 아퍼라고 헌께 안되야. 모르는 것이 약이제. 이녁 벌고 이녁 쓸 궁리만 허는 시상에서 아주 보물처럼 지니고 있는 거이 측은지심이제. 그러게. 내 말이... 요새는 모든 거이 흔허디 흔헌디 인정이 가물어, 인정이 가물다니께. 동동걸을 살아온 가파른 삶에서도 이 시상 흙같이 깨끗한 것은 없제.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더버기 털어내고, 털어내고 나를 지탱해온 흙신...
이 나라 봄 키우는 거이 흙신이제, 흙신이제.
*남인희, 남신희의 <헌 신, 또느 헌신(獻身)>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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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시조시학}/ 겨울(57)호
울 엄니의 유월/ 양점숙
그날 비워둔 자리에는
침묵도 피로 고여
순간의 해우는 또 한 켜의 한을 올리고
화면은 참았던 울음 소나기처럼 쏟아낸다
울음 아닌 살이
타들어가는 그리움으로
달무리 색 오르면 두레박 내리던 청상
축축한 마음 빗어 내리며 억지 잠을 청한다
바람에 등을 대고
마른 꽃을 흔들며
몸으로 우는 바위 치성의 불빛 같아
울엄니 유월의 역사는 음각의 눈물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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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시/ 노창수
자판 손을 멈추고 출력한 두께 만큼
화려한 노트 보면 고개 꺾는 이불치병
노루귀
잎을 돋우면
객혈마저 울컥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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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를 썰며/ 강경화
멀쩡한 겉모습에 추호도 의심 안 했는데
푸석푸석한 벽 칸칸이 들어앉은 비밀의 방
누구를 들여야 하나
바람 숭숭 든
마음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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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노중석
눈 덮인 천지는 한 송이 큰 꽃입니다.
세상 인심은 더 차가와졌지마는
한 가닥 맑은 향기가 바람결에 떠돕니다
세상 한 모서리 미소가 피어납니다
가지 끝에 걸린 달이 꽃향기를 담아가고
누군가 난해한 암호(暗號)를 해독(解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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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 오세영
꽃도 잎도 꾸밀 것도 이제는 허영이다.
강추위와 대적할 건 오로지 몸짱밖엔
나무도 절명의 순간엔 맨몸으로 옹부린다. 이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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