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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두고 읽는 장자 - 김태관
노자는 ‘도법자연’이라고 했다. 진정한 도는 자연을 본받는 것이라는 뜻이다. 장자는 자연에서 도를 깨닫고, 무위로써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삶의 속박에서 벗어나 즐겁게 자연을 누리는 지락의 경지, 즉 어슬렁어슬렁 노니는 소요유의 경지를 이야기했다
(장자)33편을 이룬 수 만개의 문자는 거칠게 말하면 도와 무위, 그리고 지락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로 인수분해 된다고 할 수 있다. 존재론으로서의 도, 그 실천으로서의 무위, 그리고 가치관으로서의 지락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책도 큰 줄기를 ‘깨어라(도), 놓아라(무위), 즐겨라(지락)’의 3부로 나누어 장자의 생각을 더듬어볼 것이다
인생의 길이는 얼마나 될까. 인생 팔십의 길이는 대략 지구70바퀴라는 셈법이 있다. 사람은 보통 걸음으로 한 시간에 4킬로미터 정도 걸으니, 그 속도로 밤낮없이 80년을 간 거리를 인생의 총 길이라고 친 것이다
지구에서 달까지는 지구10바퀴의 거리니, 팔십 평생 쉬지 않고 걷기만 한다면 달까지 세 번 반 왕복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인생이 과연 그렇게 긴 것일까.
“놀라워라, 번개를 보고도 삶이 한순간인 것을 모르다니!”
이렇게 노래한 한 줄 시가 있다. 장자는 인생을 날쌘 말이 좁은 틈새 앞을 지나가는 것 같은 순식간의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심연에서 와서 심연으로 간다. 그 두 심연 사이의 빛나는 막간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어둠과 어둠 사이를 가로지르는 번개 같은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이다. 이를 길이로 따지면 몇 미터나 될까.
인생의 길이는 8밀리미터에 불과하다는 계산도 있다. 태초로부터의 시간을 길이로 환산해 본 것인데, 그 셈법은 이렇다. 지구의 나이는 약45억년이라고 과학자들은 추정한다. 이를 경부고속도로의 길이(428킬로미터)에 대입하면, 1억년은 약10킬로미터에 해당한다. 계속해서 1천만년은 1킬로미터, 1만년은 1미터, 100년은 1센티미터가 된다
이렇게 치면 인생 80년이라고 해봤자 경부고속도로 위의 8밀리미터에 불과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장자가 말한 날쌘 말이 지나가는 틈새보다도 더 작은 한낱 점에 불과하다. 스케일을 넓혀 셈법을 달리하면 인생 팔십은 하루살이나 다름없다. 소요유편에서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작은 지혜는 큰 지혜를 헤아릴 수 없고, 짧은 세월은 긴 세월을 헤아릴 수 없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아침에 나서 저녁에 시드는 버섯은 밤과 새벽을 알지 못하고,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이것들은 짧은 동안 살기 때문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라는 거북이 있는데, 오백 년을 봄으로 살고 오백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그보다 더 옛날에 대춘이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팔천 년을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팽조가 특히 오래 살았다고 소문이 나서 모두들 부러워하니 이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팽조는 하나라에서 은나라 말엽까지 800년을 살았다는 전설의 인물이다. 모두들 부러워하는 장수를 했지만 거북이나 나무에 비하면, 그 또한 한철밖에 못하는 곤충에 불과하다
“천하에 가을철 짐승의 털끝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여기거나, 태산을 작다고 여길 수도 있다. 어려서 죽은 아기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가 하면, 팽조를 일러 요절했다고 할 수도 있다. 천지가 나와 함께 생겨나고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있다. 이미 나와 하나가 되어 있으니 또 달리 무슨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을이 되면 짐승들은 털갈이를 하는데 이때 나온 털은 1년 중 가장 가늘다고 한다. ‘~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말할 때의 그 추호가 이를 뜻한다. 그런데 지극히 작은 털끝이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엄청나게 클 수도 있다고 장자는 말한다
이를테면 분자나 원자의 단위에서 보면 가을 털끝은 태산보다 더 큰 물체다. 하지만 태산이 크다고 하나 지극히 큰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 지구를 벗어나 태양계에서 바라보면 아무리 큰 태산도 한 점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 관점을 우주로 옮기면 지구의 모든 것은 티끌에 불과하다
아무리 작은 것도 무한히 작은 것에 비하면 크고, 아무리 큰 것도 무한히 큰 것에 비하면 작다. 무한대에 견주면 만물이 무한소고, 무한소에 견주면 만물이 무한대다.
시간도 마찬가지여서 인생이 아무리 길다 해도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 또한 찰나에 비하면 어떤 인생은 영원에 가깝다. 그래서 장자는 어려서 죽은 아이가 장수했다고 말하고, 장수한 팽조가 요절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소장단의 기준을 달리하면 이처럼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천지와 만물이 하나가 되어 분별이 없어지는 경지다. 태양 아래서는 횃불이나 촛불이나 차이가 없듯이, 그곳에서는 인생이나 하루살이나 마찬가지다
장자는 도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은 다 고르다고 제물론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무막대기나 기둥, 문둥이나 미인 서시, 진귀한 것이나 괴상한 것이나 도에 있어서는 하나로 통한다”
만물은 본래가 동일하지만 기준에 따라 대소장단의 분별이 생긴다. 잣대를 달리하면 길이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사물이라도 관점을 달리하면 보이는 것이 다르다.
아무리 명품을 걸쳤어도 10미터만 떨어져서 보면 보통 것과 구별할 수 없다. 원룸에 살든 맨션에 살든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그게 그거다. 높은 곳, 즉 도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만물은 차이가 없다. 다만 기준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지렁이가 용이 될 수도 있고, 용이 지렁이로 보일수도 있다
인생은 길이가 아니라 의미로 재는 것이라고 한다. 의미로 재면 하루가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고, 평생이 하루만도 못할 수도 있다. 아무리 길게 살아도 별 의미가 없다면 껍데기 인생에 불과하다
반면에 단 하루를 살았어도 의미가 담기면 천금보다 귀한 삶이 된다. 보람을 추구하기에는 어떤 인생도 짧지 않고, 헛되이 낭비하기에는 어떤 인생도 길지 않다. 의미에 따라서 하루24시간은 영원으로 통하기도 하고, 블랙홀 같은 암흑에 묻혀 버리기도 한다
‘새털처럼 많은 날들’이라는 표현이 있다. 인생 팔십 동안에 지나가는 날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소중한 날들을 깃털처럼 가벼이 날려버리고 만다. 그러나 무심히 흘려보낸 그 하루는 어떤 이에게는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날이기도 하다
“무한한 우주에 비할 때 인간 세상의 전쟁이나 달팽이 뿔 위의 전쟁이나 뭐가 다른가?”
하늘에서 지구를 내려다본다면 인간들의 다툼이란 티끌 속에서 자웅을 겨루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장자에 따르면 무한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백세의 장수나 십 세의 요절이나 머리카락 한 올 차이도 안 된다.
그러니 지구를 70바퀴 도는 인생길에서 뭐 좀 잘나간다고 으스댈 것은 없다. 아무리 탄탄대로라 해도 달팽이 뿔을 몇 바퀴 돈 것에 불과하다. 또 8밀리미터밖에 안 되는 인생길에서 뭐가 좀 안 풀린다고 풀 죽을 것도 없다
세속의 잣대는 부질없다. 인생은 길이로만 따질 것이 아니라 그 깊이를 재어봐야 한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얼마나 살았느냐보다 어떻게 살았느냐이다. 얼마만큼 이뤘는가보다 어떤 일을 이뤘는지가 그 사람의 인생을 말해준다. 인생은 성취로써 재는 것이 아니라 가치로써 재는 것이다
장자는 우리 눈에 비친 크고 작은 것은 진실로 크고 작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도의 입장에서 보면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가 천 일처럼 보람차고, 천 일이 하루처럼 한결같다
하루를 천 일처럼 살 것인가, 천일을 하루처럼 빈 하루로 흘려버릴 것인가. 인생을 길이로 잴 것인가, 의미로 잴 것인가. 그대의 척도가 그대의 인생을 결정한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 곳에 갇혀 살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시간의 제약을 받고 살기 때문이다. 마음이 굽은 선비에게는 도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 가지 가르침에 얽매여 살기 때문이다”
-장자(추수편)
인간은 누구나 제 생각에 갇혀 스스로의 삶을 해치며 산다. 화장실에 오래 있으면 냄새에 익숙해져 고약한 것을 잘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자기 생각에 갇혀 사는 이들은 자기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 의’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갇혀 평생을 사는 이들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앎의 첫 걸음이라고 한다. 갇힌 줄을 아는 것이야말로 생각의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첫걸음이다
“도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듣는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본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한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형체 없는 도가 형체 있는 물건들의 형체를 만든다는 것을 아는가.
그러므로 도라는 이름을 붙여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장자(지북유편)
도는 ‘불립문자’라고 한다. 언어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장자와 노자는 한 목소리로 도를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으며,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수레바퀴를 보면 가운데에 빈 구멍이 나 있다. 바퀴가 굴러가려면 빈 구멍에 끼우는 굴대가 헐렁해도 안 되고 빡빡해도 안 된다. 그 빈 공간이야말로 수레바퀴를 굴러가게 만드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와 장자는 공이요 허인 그 비어 있는 틈새가 곧 도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도는 텅 비어 고요하다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성철스님에 의해 유명해졌지만, 중국 당나라 청원유신선사가 남긴 원래 화두는 이렇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보았는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아니구나
산은 물이요, 물은 산으로 보이는데
산은 역시 산이요, 물은 역시 물이로다”
평범한 상식의 눈으로 보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뿐이다. 그런데 앎에 눈을 뜨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시각을 달리하면 산이 물로, 물이 산으로 보이는 경지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깨달음을 얻으면 다시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이게 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말은 문자로만 보면 처음이나 나중이나 똑같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의미로 보면 깨닫기 전의 산과 깨달은 후의 산은 전혀 다르다. 마음의 눈이 새로워지면 만물도 새롭게 다가온다
‘사랑을 하면 세상이 달라져 보인다’는 말도 이를 설명해주고 있다. 가령 출근길 지하철에서 매일 마주치는 청춘남녀가 있다고 하자. 관심이 없을 때는 서로 무심히 지나칠 뿐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서로 좋아하게 됐다면 매일 타도 다니던 지하철은 더 이상 그 지하철이 아니다. 출근길이 데이트 코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남여의 얼굴은 달라진 게 없지만 모든 것은 달라졌다. 마음이 새로우면 보이는 세상 또한 새로워지는 법이다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말은 사실 어린아이가 한 말처럼 평범하다. 선사들의 법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실없는 말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는 도는 특별한 곳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장자는 지북유편에서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이른바 도라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고 없는 데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말씀해주십시오”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낮은 것에 있을 수 있습니까?”
“가라지풀이나 파에도 있습니다”
“어떻게 더욱 낮은 것에 있을 수 있습니까?”
“기와나 벽돌에도 있습니다”
“어떻게 더더욱 낮은 것에 있을
수 있습니까?”
“똥이나 오줌에도 있습니다”
동곽자는 아무 대꾸도 못하게 되었다
도는 어디에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무소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두루, 언제나, 모두’라는 세 가지 말은 각각 다르지만 표현하는 것은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대가 보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아니다. 그대가 찾아 헤매는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그대의 등 뒤에 있다. 늘 보아왔던 모든 것들 속에 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있었을 뿐
세상에서 제일 빠른 것은 빛일 것이다. 초속 30만 킬로미터인 빛은 1초에 지구7바퀴 반을 돈다. 달까지의 거리가 대략 38만 킬로미터니까 3초면 빛은 달까지 넉넉히 왕복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빛보다 더 빠른 것이 있다. 장자에 따르면,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장자의 재유편을 보면, 마음은 고개를 숙였다가 드는 사이에 하늘과 땅을 두 번 왕래한다고 한다. 즉 1초면 우주를 두 바퀴 돈다는 얘기다. 우주의 크기는 한정이 없으니 마음의 빠르기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은 난센스다. 빛은 시공간 차원의 얘기고, 마음은 또 다른 차원이니 둘을 비교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장자는 마음이 세상을 벗어나 있다는 것,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비유해서 말했을 뿐이다
장자의 말처럼 마음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마음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빛보다 빠른 속도로 넘나들 수 있다.
시간을 가리키는 헬라어(고대 그리스어)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크로노스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다. 크로노스가 수평으로 흐르는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수직으로 통하는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연대기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가리킨다. 카이로스는 의미가 담긴 특정한 시간을 말한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위아래로 높고 깊어지는 질적인 시간, 변화와 기회의 시간을 말한다
객관적 시간인 크로노스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주관적 시간인 카이로스는 누구에게나 균일하지는 않다. 크로노스의 1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365일이다. 그러나 카이로스에서는 하루가 1년보다 길 수 있고, 1년이 하루보다 짧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영화(벤허)의 원작소설에 나오는 대화가 이를 설명해준다. 갤리선(노예함선)에 끌려와 노를 젓는 벤허에게 로마제독이 묻는다
“너는 여기 온지 얼마나 됐나?”
벤허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대꾸한다
“너희들 달력으로는 1000일이만 내 달력으로는 1000년이다!”
달력속의 시간인 크로노스와 의미를 담은 시간인 카이로스는 이렇게 다르다. 깨달음과 득도의 순간은 곧 영원으로 통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신라의 고승 원효가 크게 깨치는 순간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는 캄캄한 밤에 산속을 가다가 어느 동굴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곤히 자다가 목이 말라 머리맡을 더듬거려 보니 마침 물 한 바가지가 있었다.
잠결에 벌컥벌컥 마신 원효가 이튿날 깨어 보니 이게 어인 일인가. 달게 마신 그 물은 해골에 괸 물이었고, 잠잔 곳은 동굴이 아니라 무덤 속이었다. 왝왝 구토를 하다가 원효는 문득 깨닫는다. 일체유심조, 즉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 것이었다. 마음에 따라서는 무덤 속에서도 단잠을 자고, 해골 물도 달게 마실 수 있었다.
“마음의 바깥에는 아무 법도 없는데 따로 무엇을 구한단 말인가”
크게 깨달은 원효는 발길을 돌려 신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장자는 대종사편에서 도를 깨달으면 시간의 변화가 없어진다고 말한다. 여우라는 도인의 득도의 단계를 설명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사흘이 지나자, 그는 세상을 잊었소. 이레 뒤에는 사물을 잊었소. 아흐레 뒤에는 삶을 잊게 되었소. 삶을 잊게 된 뒤에는 아침 햇살처럼 깨달음이 열렸소. 깨달음이 열린 뒤에는 시간의 변화가 없게 됐소. 시간의 변화가 없게 된 뒤에는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소”
깨달음을 얻자 시간의 변화가 없어지고, 시간의 변화가 없어지자 죽음도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됐다. 즉 카이로스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거기서는 죽음도 삶도 없고, 과거와 현재도 없다. 몸은 땅에 매여 있어도 마음은 시간 밖으로 유영하여 천상을 넘나들고, 아득한 과거를 더듬기도 한다
깨달음의 시간에서 3차원 세계의 장벽은 별다른 구속이 안 된다. 감방 안에 앉아서도 수억 년 전의 지구를 자유로이 넘나들 수도 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과거와 미래를 넘나든다.
3분만 지나면 삶이 끝난다는 걸 알면 그때부터 1초, 1초는 마치 정지된 화살처럼 흘러간다. 절박한 상황에서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생애 전체와 맞먹을 정도로 소중하게 다가온다.
시간은 강물처럼 부단히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그 자리에 멈춰서서 한없이 깊어지기도 한다. 시간은 거기에 담긴 의미가 무거울수록 그 흐름이 더뎌진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간은 바다에 이른 강물처럼 흐름을 멈추고 밑 모를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시간이 멈췄으면...’하는 말들을 한다. 생명이 끝나가는 사람에게는 매 순간이 그렇게 각별할 것이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놓치기 싫은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시간이 멈춘다는 것은 해와 달이 운행을 멈춘다는 뜻이다
해와 달이 운행을 멈추는 기적은 결코 드물게 경험하는 일인 것만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하여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지리산 둘레 길을 돌다 보면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인월’이라는 지명을 만날 수 있다. ‘달을 끌어올렸다’는 뜻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을 가리킨다. ‘달오름 마을’이라는 예쁜 이름도 낳은 이곳의 지명의 유래는 이렇다
고려 말에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할 때의 일이다. 내륙 깊숙히 쳐들어와 인월에 진을 친 왜구는 개경까지 진격하겠다며 기세등등했다. 이성계는 황산벌에서 진을 치고 왜장 아지발도를 기다렸다. 이성계는 백발백중의 활솜씨로 아지발도를 단번에 꿸 작정이었다. 이윽고 왜구들과 맞붙었는데, 그만 날이 저물고 말았다. 마침 그믐밤이라 사방이 칠흙같이 어두워 이편과 저편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이성계가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빌었다
“하늘이시여, 이 나라 백성을 굽어 살피시어 달이 뜨게 해주소서!”
그러자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라 개미 기어가는 것까지 보일 정도로 주위가 밝아졌다. 이성계의 부하 퉁두란이 활시위에 화살을 메웠다. 휘익 날아간 화살은 아지발도의 투구를 맞췄다. 아지발도가 놀라 입을 벌리자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와 그의 목구멍을 꿰뚫었다. 명궁 이성계가 쏜 화살이었다. 이때부터 이곳 지명은 이성계가 달을 끌어올렸다고 하여 인월이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 자락에서 보름달을 끌어올린 이성계는 하늘의 태양을 멈추게 한 여호수아 못지않다. 달이 거꾸로 솟고, 태양이 멈추는 기적이 역사적 사실인지 여부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간의 중력을 벗어난 카이로스의 세계에서는 해가 서쪽에서 뜨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인류의 삶은 햇빛에 바라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한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역사를 이루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은 신화로 이어진다.
“옛날의 진인들은 삶을 즐겁다 할 줄도 몰랐고,
죽음을 싫다 할 줄도 몰랐다.
태어남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았다.
의연히 가고, 의연히 올 따름이었다.
삶의 시작을 꺼리지도 않았거니와
삶의 마침을 탓하지도 않았다.
삶을 받으면 기뻐하고, 삶을 잃으면 제자리로 돌아갔다”
-장자(대종사편)
조선왕조의 설계사라 일컬어지는 정도전은 일찍이 이런 시를 남겼다
“예부터 죽음은 한번뿐이다. 도둑질한 편안은 편안이 아니다. 아득한 천년 후에도 영웅의 뜻은 가을하늘에 비끼리라”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의 삶을 보면 죽음이 곧 마침표는 아니다. 위대한 천재는 죽고 나서 더 오래 산다는 말이 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는 울었고, 내 주변의 사람들은 웃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나는 웃었고, 내 주변의 사람들은 울었다”
-티베트 수도승들이 제자들에게 늘 일러주는 말
‘생귀야, 사귀야’라는 말이 있다. 생은 잠시 깃들이는 것이고, 죽음은 본래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장자의 말은 아니지만, 그의 생각을 잘 압축하고 있다.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장자의 가르침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생자필멸이요, 회자정리라고 한다. 죽음 없는 생명 없고, 이별 없는 인생 없다. 울면서 태어나서 울음 속에 떠나가는 것이 인생이다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다. 큰 뜻을 품은 이들은 죽음 앞에서 담대하다. 삶의 의미가 클수록 죽음은 가벼워진다. 깨달은 이들은 죽음 앞에서 곡(哭이) 아니라 노래를 부른다
지지일사, 우자만사라는 말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한 번 죽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수도 없이 죽는다는 말이다.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만한 힘이 없다.
마당 웅덩이에 물 한 잔을 부으면 지푸라기가 뜨지만,
잔을 띄우면 바닥에 닿을 것이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람이 충분하지 않다면 날개를 띄울수없다.
구만리 상공에 오른 붕새는 큰 바람을 타야 하늘을 등지고
거침없이 날아갈 수 있다”
-장자(소요유편)
장자는 첫 장, 첫머리부터 물고기가 하늘을 나는 기적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북극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이름은 곤이라 한다. 곤은 엄청나게 커서 그 길이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은 붕이라 한다. 붕도 등의 넓이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다. 이 새가 한번 기운을 모아 날아오르면 그 날개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큰 기적을 본 적이 없다”
-몽테뉴
내가 가진 꿈은 나라는 기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나라는 기적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으키는 것이다. 그 기적은 내 꿈 안에 있다. 물고기가 하늘을 날고, 참새가 봉황이 되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그 세계로 들어가면 그것은 곧 나의 이야기가 된다
장자는 지락편에서 ‘아무리 훌륭한 음악이라도 들판에서 연주하면 새는 날아가고, 짐승은 숨어버린다’고 말한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지만 사람은 물속에 들어가면 죽는다. 반대로 물고기는 땅에 나오면 죽게 되어 있다. 만물의 각기 다른 본성을 무시하는 것은 결국 죽음의 재앙을 부르는 일이 된다
장자는 ‘천하는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지 다스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결국 본성을 해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는 말이 곧 그런 뜻이다. 변무편에서 장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길게 이어주면 괴로움이 따르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짧게 잘라 주면 슬픔이 따른다”
장자가 보기에 인위적인 모든 행동들은 자연을 해치는 일이다. 자연과 인위의 차이를 장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소나 말이 네 발을 갖고 있는 것은 자연이고, 말 머리에 고삐를 매거나 소의 코뚜레를 꿰는 것은 인위다”
장자는 인위적인 제약은 본성을 해치므로 하늘에 맡기고, 그저 있는 그대로 가만히 놔두라고 말한다. ‘무위로써 다스리는 것이 하늘’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열매를 맺는 나무에만 돌을 던진다’라는 말이 있다. 자연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만, 인간은 열심히 꺾고 또 따버린다.
인위는 나무를 상하게 하고, 자연을 파괴한다. 인위는 결국엔 인간 자신을 해치는 일이다
장자는 대종사편에서 ‘천하는 천하에 맡기고 인간은 끼어들지 말라’고 말한다. 인간이 손을 댈수록 천하는 어지러워지기만 한다는 것이다.
장자는 천운편에서 백조와 까마귀를 예로 들고 있다. 백조는 매일 목욕을 하지 않아도 희고, 까마귀는 매일 검은 물을 들이지 않아도 검다는 것이다. 매일 목욕하고 염색을 하는 등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은 본바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강물과 호수 속에 있다면 물고기는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으며,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잊고 지낸다. 천하를 천하 그대로 놔두는 것이 무위의 다스림이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듯이 천하가 천하 본연의 모습대로 있어서 어떤 인위도 불필요한 것을 가리킨다.
‘무위로써 하지 않는 일이 없다’ 진정한 무위란 행동하지 않는 행동을 말한다. 행위의 정지나 포기가 아니라 더 높은 차원에서 도를 따라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무위는 풀은 풀로, 꽃은 꽃으로 놔두는 것이다. 꽃을 꽃으로 놓아두며 본연을 지켜나가는 것이 무위인 것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래가 있다. 노랫말처럼, 그대는 꽃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그대다. 그대에게 그대는 천하와도 바꿀 수가 없이 귀하다
그대라는 꽃은 어떤가. 꽃을 꽃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혹시 꽃으로 화(禍)를 빚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최대 적은 나 자신이었다’는 말이 있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의 탄식이다. 그대라는 꽃을 해치는 손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대 자신일수도 있다. 무위는 무적이라고 한다
도룡도장이라는 곳이 있다. 말 그대로, 용을 때려잡는 무예를 가르쳐주는 도장이다. 하늘을 나는 용을 무찌를 수 있다면 땅에서는 무적일 것이다.
“용을 때려잡아 천하에 이름을 날리리라!”
용꿈을 가슴에 품은 주평만이라는 사내가 도룡도장의 문을 두드렸다. 도장의 사부인 지리익도사가 말했다
“백일도 천일장 만일검이니라!”
도(刀는) 100일, 창은 1000일, 검은 1만 일을 수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용 잡는 수업료로 갖다 바친 돈은 천금짜리 집 세 채 값이나 되었다. 모든 무예를 다 배우고 용을 찾아 나섰으나 이 세상 어디에도 용은 없었다. 용은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상상의 동물인 까닭이다. 용이 없으니 용을 잡는 무술도 쓸 곳이 없었다. 주평만의 용꿈은 헛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장자(열어구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인간은 허상을 좇느라 돈과 시간을 낭비하기 일쑤다.
미국 서부 애리노자 주에는 세도나라는 관광명소가 있다. ‘신은 그랜드캐니언을 창조한 뒤에 세도나를 안식처로 삼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비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자기장이 뿜어져 나온다는 세도나는 인디언의 영혼이 숨쉬는 땅으로도 유명하다. 옛날에 말을 타고 달리던 인디언들은 이곳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에서 내린 뒤 바위에 앉아 쉬어 갔다고 한다. 너무 빨리 달려와서 몸과 떨어진 영혼이 뒤쫓아 오게 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몸이 너무 빨리 달리면 영혼이 쫓아오지 못한다. 영혼이 떨어져 나간 몸은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허깨비에 불과하다. 영혼 없는 질주는 없는 용을 쫓아다니는 것처럼 허망한 결과만 낳을 뿐이다. 영국의 시인 T.S.엘리엇은 (바위)라는 시에서 이렇게 묻고 있다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인생은 어디에 있는가?
지혜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생활은 어디에 있는가?
지식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정보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지식은 어디에 있는가?”
영혼이 제자리에 돌아오게 하려면 세도나의 인디언처럼 달음박질을 멈추고 쉬어야 한다.
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식을 얻으려면 매일 하나씩 쌓아야 하고, 도를 얻으려면 매일 하나씩 버려야 한다”
쌓으면 무겁고, 버리면 가볍다. 얻으려고 하는 마음은 고달프고, 버리려고 하는 마음은 자유롭다.
그대는 무엇을 좆고 있는가? 없는 것을 좇으면 생을 잃는다. ‘대혹자 종신불해’라고 했다. 무엇에 미혹되어 있는 사람은 평생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뜻이다. 얻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라
“질그릇을 걸고 활쏘기 내기를 한다면,
질그릇은 흔한 물건이기 때문에 잘 맞힐 수 있다
하지만 허리띠 고리를 걸고 내기를 하면
귀한 것이기 때문에 맞히지 못할까 봐 마음이 켕긴다.
더구나 황금을 내기를 걸면,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덜덜 떨린다.
활쏘기 기술은 똑같지만,
내기에 걸린 물건에 마음이 쏠렸기 때문이다.
밖의 물건에 마음이 기울면,
그 사람의 속은 졸렬해지기 마련이다”
-장자(달생편)
공자는 나이 마흔을 불혹이라고 했고 맹자는 마흔에 부동심을 얻었다고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초연하기란 공맹 같은 성인이 아니고는 쉽지 않다.
‘흔들리는 것은 깃발이냐, 바람이냐’라는 유명한 화두가 있다. 두 스님이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움직이는 것이 무엇이냐를 놓고 다퉜다. 이를 본 육조 혜능은 이렇게 일깨워줬다.
“흔들리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닌 그대들의 마음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세상이 흔들린다.
‘반전무인’이라는 말이 있다. 바둑판 앞에 아무도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눈앞의 상대를 의식하면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다. 강자에겐 두려움을 느끼고, 약자 앞에선 교만해지게 된다. 누구와 겨루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대국에만 몰입하는 것을 바둑에서는 최고의 경지로 여긴다
‘무인’의 경지는 곧 ‘무심’의 경지이기도 하다. 무심의 경지에 들어선 사람은 마치 목석인 것처럼 무표정하다. 달생편에 등장하는 ‘목계’이야기가 마음이 목석처럼 된 경지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준다
지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은 마음이 마치 나무토막과도 같다.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고, 감정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지위는 무위이고, 지언은 무언이며, 지기는 무기라도 한다. 지극한 행위는 행하지 않는 것이며, 지극한 말은 말하지 않는 것이며, 지극한 기량은 기량을 숨기는 것이다.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가 떠내려 와 뱃전에 부딪쳤다. 성질 급한 뱃사람이라도 빈 배에다 화를 내지는 않는다. 만약 그쪽에 한 사람이라도 타고 있으면 저리 비키라고 불같이 소리 지를 것이다. 한 번 소리쳐 못 들으면 두 번, 세 번 소리치고 욕까지 해댈 것이다. 빈 배일 때는 아무 감정이 없지만 사람이 타고 있으면 분노가 일어난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텅 비우고 빈 배가 되어 인생의 강을 건넌다면 누가 그를 해치겠는가!”
내 안에 품은 것이 없으면 인생의 풍랑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인생에 풍파가 일어난다는 것은 내 마음이 뭔가를 붙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대의 인생길은 풍파가 심한가. 물결과 싸우지 말고 그대의 마음을 재워라. 요동치는 것은 물결이 아니라 그대의 마음이다. 욕심이 사나우면 인생의 풍랑도 사납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의 일화다. 다빈치는 그림 속 인물들의 얼굴을 밀라노 거리의 행인들을 관찰하여 그렸다고 한다. 예수의 얼굴은 교회의 한 성가대원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용모가 수려한 19세의 청년에게서 다빈치는 그가 상상해오던 선하고 인자한 예수의 얼굴을 발견했던 것이다
몇 년 동안의 작업을 거쳐 예수와 11명의 제자들은 다 그렸으나 마지막 난관에 부딪쳤다.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의 얼굴만은 마땅한 모델을 찾지 못해 그림을 완성시킬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떤 이가 다빈치에게 감옥에 있는 사형수들을 뒤져보라고 조언했다. 감옥을 찾은 다빈치는 흉악한 살인을 저지른 어느 죄수에게서 가룟 유다의 얼굴을 찾아냈다. 그 흉악범을 모델로 삼아 몇 달을 작업한 끝에 다빈치는 마침내 불후의 명작(최후의 만찬)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델이었던 흉악범이 감옥으로 들어가며 뜻밖의 고백을 했다
“선생님, 아직도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제가 바로 저 그림 속에 그려진 예수의 모델이었습니다!”
용모가 수려했던 19세 성가대원이 몇 년 만에 흉악한 사형수로 돌변해 있었던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 얽힌 이 뒷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천사와 악마는 백지 한 장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 앞에 거지 있다고 한다. 거지도 부처가 될 수 있고, 부처가 거지의 행색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논상 불여논심’이라는 말이 있다. 드러난 상을 논하는 것은 마음을 논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다.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도 논상보다 논심을 강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민족의 지도자였던 김구 선생이지만 관상만 놓고 본다면 거지 팔자였다고 한다.
소년 시절 김구는 (마의상서)한 권을 빌려다가 독방에서 두문불출하며 석 달 동안 관상공부에 열중했다. 그런 다음 자신의 관상부터 살펴봤는데, 결과는 낙심천만이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부귀와는 거리가 먼 빈상인데다가 천하고 고단한 흉상일 뿐이었다. 비관에 빠진 김구는 세상을 등질 마음까지 들었는데, 문득 이런 구절을 발견하고는 새 힘을 얻었다
“얼굴 잘난 게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게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얼굴 잘난 사람보다는 마음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김구는 심기일절하여 마침내 현대사의 거목으로 우뚝 설수가 있었다. 성인과 거지의 차이는 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다.
장자는 덕충부편에서 ‘흐르는 물은 거울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제 모습을 비춰보려면 고요히 멈춰있는 수면을 찾아야한다.
흐르는 물처럼 늘 변하는 겉모습은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없다.
중국의 4대 미녀로 꼽히는 월나라의 서시, 한나라 원제의 궁녀 왕소군, 삼국지에 등장하는 처선, 당나라의 양귀비. 뭇 사람이 부러워하는 절세가인
4대 미녀가 있으니 4대 추녀도 있다. 중국 사람들은 역대 추녀로 막모, 종이춘, 맹광, 완녀를 꼽는다. 이중에서도 대표적 추녀는 종이춘으로, ‘서시 같다’고 하면 미인을 뜻하듯이 ‘종이춘같다’고 하면 못생겼다는 뜻으로 통용되는 여인이다
그대 속에는 천사와 악마라는 두 얼굴이 들어 있다. 예수를 그릴 것인가, 유다를 그릴 것인가. 부처를 만들 것인가, 거지를 만들 것인가. 그대의 마음이 그대의 얼굴을 결정한다
“그대는 마음을 통일하여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그 다음에는 마음으로도 듣지 말고 기로 듣도록 하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사물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기는 텅 빈 채로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도란 텅 빈 곳에 모이게 마련이다
텅 비우는 것을 마음의 재계라고 한다”
-장자(인간세편)
하늘의 소리를 들으려면 세상의 소음을 꺼야 한다.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천성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천성의 귀에 들리는 것이다
노자는 ‘아주 큰 소리를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우주가 운행하는 소리, 별들의 음악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직 마음을 텅 비우고 자기를 잊어버린 망아의 경지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하늘이 연주하는 대자연의 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육체의 귀가 아니라 영혼의 귀로만 들을 수 있는 소리 없는 노래다
‘의심암귀’라는 말이 있다. 의심이 귀신을 낳는다는 뜻이다. 마음에 의심하는 바가 있으면 온갖 망상이 일어나 사람을 미혹시킨다. 의심으로 어두워진 마음에는 온갖 귀신이 춤을 춘다.
도는 깨달음으로 보고, 신은 믿음으로 본다는 말이 있다. 귀신은 공포의 눈으로 보아야 보인다. 그런데 이를 뒤집으며 공포심이 없으면, 귀신도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귀신은 두려움을 먹고 산다고 한다. 두려움이 없는 곳에는 귀신도, 징크스도 없다
“뱁새가 깊은 숲속에 둥지를 친다 해도
차지하는 것은 나뭇가지 하나일 뿐이고
두더지가 황하의 물을 마신다고 해도
자기 배를 채우고 나면 그만일 뿐이다”
-장자(소요유편)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 “뭐 좀 도와드릴 일 없소?”하고 묻자 “햇살을 가리니 조금만 비켜주시오”라고 대답한 일화로 유명하다. 디오게네스가 값싼 야채를 구하다가 시냇가에서 씻고 있는걸 보고, 지나가던 아리스티포스가 딱하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고개를 조금만 수그릴 줄만 알아도 호의호식할 수 있을 텐데”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응수했다
“야채 먹는 법을 조금만 알아도 폭군에게 굽실대지 않을 텐데”
부귀에 목이 매여 허리를 굽실거리는 것은 노예나 다름없다. 현명한 사람은 소유를 위하여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다. 소유하는 것은 결국 소유당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소유하려는 마음을 버리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에 눈을 뜨면 사랑에 눈을 뜬 것처럼 모든 게 눈부시다. 깨달음이란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변화의 마법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경이와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다만 사람들이 미혹에 빠져 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도는 모르는 사람들이 즐거움으로 여기는 것들은 참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다
“나는 무위야말로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것을 크게 괴로운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지극한 즐거움이란 즐거움을 초월하는 데 있고, 지극한 명예란 명예를 초월하는 데 있는 것이다”
어른들은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들고, 아이들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든다는 말이 있다. 작가 최인호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글에서 인간의 불행은 완전한 어린아이에서 불완전한 어른으로 뒷걸음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완벽한 인격체란 갓난아이가 자라면서 어른이라는 괴물로 탈바꿈한다. 따라서 인격을 수양한다는 것은 자라면서 산산조각 난 마음의 거울을 다시 짜 맞추는 것이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것은,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한 인간 정신변화의 마지막 단계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낙타에서 사자, 어린아이의 단계로 변화한다. 어린아이로 돌아갈 때 세상은 새롭게 시작하며, 인간은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창조적인 삶을 즐길 수 있다. 장자는 도를 터득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한다
장자(대종사편)에 나오는 도인 여우는 나이가 많아도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어린아이처럼 타고난 본성을 해치지 않고 온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즐거움을 찾으려면 불완전한 어른에서 완전한 어린아이로 돌아가야 한다. 어른들의 완고한 눈을 버리고, 동심의 천진난만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참된 즐거움은 어른들의 익숙한 세계 밖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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