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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박문수 옮김 / 시공사
1. 작가소개
- 지은이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폴란드 바도비체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이다. 1938년 아젤로니아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연극활동을 하며 안드레아 예비엔이라는 이름으로 시·희곡 등을 쓰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고 연극배우생활에 전념하다가, 1942년 성직에 뜻을 안고 나치하에서 비밀리에 운영되던 크라코프신학교를 졸업, 1946년에 사제(司祭)가 된 후, 크라코프대학교 신학교수 등을 거쳐, 1964년 크라코프의 대주교가 되어, 1967년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가 등위 34일 만에 죽자, 그 후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탈리아인이 아닌 교황은 사상 처음 455년 만의 일이다. 1981년 5월 교황청 앞뜰에서 교인들을 접견 중 한 터키인의 저격으로 부상을 입었으나, 건강을 회복했다. 바오로 6세의 교회개혁 정신을 이어받아, 교회 안팎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활약을 하였다.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식 때 내한, 103위 복자(福者)에 대한 시성식(詩聖式)을 집례하였으며,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도 한국을 방문하였다. 1994년 11월에는 <3천년을 맞는 칙서(勅書)>를 통하여, 교회가 과거에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불관용(不寬容)과 전체주의 정권에 의한 인간기본권의 유린을 묵인한 것은 잘못임을 인정하는, 가톨릭으로서는 진일보의 고백을 함으로써, 요한 23세 이후에 조성된 구 ·신교 일치운동에 한층 화해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2005년 4월 2일 선종했다.
요한 23세와 함께 2014년 4월 27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성인으로 선포된다.
- 옮긴이 : 박문수
연세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한 후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대학원에서 가톨릭 신학전공으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 가톨릭문화연구원 부원장,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상임위원,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 부설 출판사 [사람과 사랑] 대표를 맡고 있다. 가톨릭계 대학과 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연구 업적으로는 [정보사회와 가톨릭교회](1998) 외 공저 포함 12권의 저서, "정보사회의 윤리문제와 신앙생활 양식", [신학사상](1995 가을호)을 비롯한 40편의 논문, 요한 바오로 2세, [희망의 문턱을 넘어], 시공사(1994)를 포함한 공역 포함 8권의 역서, 그리고 수도회와 교회 기관을 대상으로 한 다수의 연구보고서가 있다.
2. 간추림 또는 내 마음에 다가온 구절및 느낌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인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정의됩니다. 이것을 불합리하고 믿을 수 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직접 만난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이 권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루가 1,30 참조) 요셉에게도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1,30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상황 속에서, 특히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또 베드로에게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p15)
사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네 눈앞에 나타나신 분이 그들이 전에 알고 있던 그리스도 그분이신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 두려웠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는 더욱 두려웠습니다.(p15)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부질없이 외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서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p15)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진리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베드로는 이것을 깨닫고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루가 5,8) 베드로만이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아닙니다. 모두가 이것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후계자인 모든 교황들도 이 진리를 배웠습니다. 저도 이 진리를 잘 배웠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그 날 베드로에게 하신 이 말씀의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루가 5,10)
☞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도구로 쓰신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늘 매한가지입니다. 인간이 만든 체제는 항상 불완전합니다. 체제가 불완전할수록, 인간은 자기 자신을 더 믿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마음은 불안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불안한 속마음을 훤히 알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십니다.”(요한 2,25참조)(p16)
☞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하실 때마다, 당신께서는 하느님과 인간을 모두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당신께서는 하느님을, 철학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초월적 절대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와 함께 “우리 아버지”(마태 6,9)라고 부릅시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이 완전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완전해지기를 갈구하십시오. 그분은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p17)
☞ 이제는 하느님마저도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진실로 무한히 완전하신 하느님은 인간과 함께 하실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몸소 인간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베드로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한 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는 ‘당신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p17)
베드로는 비록 그 말이 그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마태 11,27 참조)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마태 16,17) 베드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 말을 했습니다. 교회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이 말을 계속 합니다. (p107-108)
베드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사람이신 하느님의 아들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매질을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받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두려웠던 것입니다. (p18)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그를 질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베드로를 거절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좋은 뜻과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거절하지는 않으셨습니다.(p18)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교황’이니 ‘성하’니 ‘성부’니 하는 표현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비롯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에서 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과 개종한 후의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진정한 증인이 되어, 피 흘리며 죽을 때까지 사명에 충실하였다는 것이 그 사례입니다. (p20)
☞ 이것이 성령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물살에 떠내려가는 한갓 모래와 같은 연약한 존재였으면서도 ‘반석’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반석이 되시어, 그 바위 위에, 곧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제자들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힘으로 사도적 교회가 됩니다.(p20)
☞ 연약한 존재인 그가 초대 교황인 것이다.
이 교회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세기를 거듭해 오면서 이것은 교회의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을 나눈 모든 사람들, 아들이 성령으로 아버지를 계시하셨듯이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아들을 계시하여 주신 모든 이들(마태 11,25~27 참조)의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p20-21)
이 계시는 결정적입니다. 사람들은 오로지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받아들여서, 전능하신 아버지시며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 그 아들로서 성부와 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p21)
그리고 어떤 이는 이 모든 것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며 이렇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에게는 아들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예언자일 뿐이다. 아니 예언자도 아니고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하다.” (p21)
☞ 유다인들의 보편적인 반응이다. 에디트 슈타인 성녀의 어머니도 그렇게 말했다.
아브라함이 일찍이 그 증인이었던 한 분이신 그 하느님을 믿는 이들조차,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하느님은 전능하고 지엄하신 절대적 초월자로서 그분의 권능은 아름답고 또 신성하여 인간으로서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 그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p21)
하느님은 그런 존재가 아니면 안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나 아들이나 성령이 되실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아낌없이 내주시는 사랑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감히 볼 수도, 들을 수도, 흉내낼 수도 없는 그런 절대자라야만 했습니다. 체포당하고 채찍질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런 분이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 그로 인해 유일신교의 위대한 전통의 한복판에서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p21-22)
교황은 하나의 신비라고 귀하는 바르게 지적하였습니다. 교황은 반대받는 표적이며 하나의 도전이라는 주장도 맞는 말씀입니다. 늙은 시므온은 아기 예수에 대해서 장차 “반대받는 표적”(루가 2,34 참조)이 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p22)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신비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사랑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나약함도 하느님의 위대함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나약한 존재임에도 위대해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수태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p23)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보이지는 않으시나 교회 안에 인격적으로 현존하십니다. 그분은 또한 세례와 다른 성사의 힘으로 모든 그리스도인 각자와 함께 계십니다. (p23-24)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표현의 참뜻이 드러납니다. 이 말은 존귀함보다 봉사를 뜻합니다. 이 말은 교회 안에서 수행해야할 교황의 의무들, 교회와 신자들의 선익을 위하여 수행해야할 베드로의 직무를 나타냅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성인은 로마 주교의 직분에 관련된 모든 칭호 중에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는 칭호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완전히 이해했던 것입니다. (p24)
세계와 인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신랑이시며 교회에 속한 모든 이들의 신랑이십니다. “신랑이 너희와 함께 있다.”(마태 9,15 참조) 교황의 한 가지 특별한 의무는 이 진리를 고백하고, 로마 교회, 나아가 모든 교회와 모든 인류와 전 세계에 이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p25)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거듭 반복하셨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주교요, 당신들과 함께 그리스도인입니다.” 더 깊게 성찰해 보면, 이 주제가 로마 주교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주교’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p25)
그리스도와 어떻게 하면 기도를 통해서 대화할 수 있을까요?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보통 일종의 대화라고들 합니다. 대화에는 항상 ‘나’와 상대자인 ‘너(you)' 또는 ’당신(Thou)'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 당신(Thou)은 대문자 T로 시작됩니다. 기도에서 내(I)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면 이건 사실과 다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에 당신(Thou)이 더 중요합니다. (P27)
기도 안에서 진짜 주인공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자녀의 영광을 위해 예속과 부패로부터 피조물을 해방시키어 자유로 이끄시는 그리스도께서 주인공이십니다. “연약한 우리를 도우러” 오시는 성령께서 주인공이십니다. (p28)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성서에서 많은 사례를 들어가며 가르쳐 주는 대로, 기도할 수 있으며 또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예입니다. 우리는 바로 성령의 간청과 격조를 맞추기 위하여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깊은 탄식’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p29)
용서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간구하시는 큰 소리(히브 5,7 참조)의 일부분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영광을 선포해야 합니다. 기도는 항상 ‘영광의 일(opus gloriae)'입니다. (p29)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상의 모든 피조물의 사제가 되기 위하여, 예언자가 되기 위하여, 왕이 되기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p29)
인간은 자신을 표현할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 기도 안에 온전히 현존하시도록 할 때 ‘기도의 충만함’에 이르게 됩니다. 동방과 서방 교회의 신비 기도의 역사가 이것을 증거하고 잇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이냐시오 데 로욜라, 그리고 동방에서 예를 든다면 사하로프의 성 세라핌과 여러 다른 성인들처럼 말입니다. (p30)
☞ 기도는 하느님을 내 안에 모셔오는 것이다.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교황님은 기도하시는지요?
교황인 저는 성령께서 제게 허락하시는 대로 기도합니다. 성령께서는 확실히 기도 안에서 교황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성령은 연약한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오십니다.” (p31)
저는 ‘우리 시대 모든 이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에 대하여 기도합니다. (p31)
복음은 “기쁜 소식”을 뜻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항상 기쁨으로의 초대입니다. 그러면 복음은 무엇인가요? 복음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장엄한 긍정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에 관한 진리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기쁨과 희망의 원천이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자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 (요한 3,16 참조) (p32)
그분의 기쁨은, 세상에는 선이 악보다 더 크다고 하는 “기쁜 소식”을 통해 퍼져나갑니다. 사실 악은 근본적이지도 결정적이지도 않습니다. 이 점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온갖 형태의 실존적 염세주의와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p32)
무엇보다 복음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위대한 기쁨입니다. 인간의 창조자는 인간의 구원자이기도 합니다. 구원은 이 세상 안에 현존하는 악에 맞설 뿐만 아니라, 악에 대한 승리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충만한 약속은 파스카의 신비 안에서 발견됩니다. (p33)
그러므로 우리들 기쁨의 바로 그 원천은 우리에게 악을 물리칠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하고, 복음의 핵심을 이루는 하느님의 자녀됨을 기꺼워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힘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려는 것입니다.”(요한 3,17 참조) (p34)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계시된 불멸의 생명은 이를테면 죽음을 “삼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1고린 15,55)고 묻습니다. (p34)
교황은 그리스도의 증인이고 복음의 봉사자이기 때문에 기쁨의 사람, 희망의 사람, 존재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인정하는 사람, 창조의 가치와 내세의 희망을 품은 사람입니다. (p34)
복음은 우리에게 선과 악을 구별하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복음은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라”(로마 12,21 참조)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p34)
교황에게는, 전인류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기도를 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모든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갖고(2고린 11,28) 교회가 오늘날 인류와 나누어야할 슬픔과 번뇌뿐만 아니라 기쁨과 희망까지도 하느님 앞에 고해야 합니다. (p35)
죄는 곳곳에서 계속적으로 팽창하고 있습니다. 성 바오로는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 넘쳤다”(로마 5,20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이 심오한 진리는 세상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가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결국엔 기도야말로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세상에 현존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p35)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에게 그들 자신의 구원 여부를 맡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교회를 위임하셨고,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개인들과 전체로서의 인류에게 이 과업을 맡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울러 모든 이에게 한 개인을, 그리고 한 개인에게 모든 이를 위탁하셨습니다. 교회의 기도, 특별히 교황의 기도는, 끊임없이 이러한 인식을 반영해야 합니다. (p36)
☞ 결국 구원은 인간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가 18,8)하고 물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기도와 교황의 기도의 선교적 차원이 발원하는 것입니다. (p86)
교회와 교황은 이 사명을 구체적으로 구체적으로 위임받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수고 성소나 사제 성소를 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인 평신도 가운데서 성덕의 소명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p87)
교회는 고통받는 이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사실 고통은 육체적인 힘뿐 아니라 영적인 힘에 대해서도 항상 커다란 시험입니다. ……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기도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기도는, 교회와 교황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르짖는 커다란 외침 소리입니다. 악과 고통, 모든 오류와 인간의 불의를 통해서도 결국은 선이 승리할 것을 비는 탄원의 소리입니다. (p37)
기도는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또한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창조주와 아버지로서, 구속자와 구원자로서 계시하십니다. (p38)
“하느님의 깊은 경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통찰하시는”(1고린 2,10) 성령으로서, 무엇보다도 “인간의 마음의 비밀”(시편 44,22 참조)을 꿰뚫어 보시는 성령으로 계시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자비로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를 믿음으로 고양시키는 그 사랑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p88)
세상에서의 선의 승리는 이러한 진리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러한 진리를 고백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자비로운 사랑’이신 하느님을 이 세상에 현존하시게 합니다. (p88)
인간적인 관점에서, 인간은 하느님께서 참으로 존재하신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예언자들뿐만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말씀해 오셨다면, 하느님께 대한 철학적 사유에 무엇 때문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요? (p41)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빛과 힘을 주시어 지극히 높으신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하셨다고 교회는 믿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이 천하의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동시에 교회는 인류 역사 전체의 열쇠와 중심과 목적이 스승이신 주님 안에서 발견된다고 믿는다."(사목헌장 10항) (P42)
☞ 하느님은 믿음의 문제이지, 철학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하느님 그 자체와 그분의 존재, 그분의 본질에 관하여 자문하는 오늘날의 인간에게도 적절한 것일까요?
인간은 실로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귀로 들은 것 이상으로 그 무엇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P45)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신이나 영혼같은 개념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 감각적인 경험의 관점에서는 사실 신이나 영혼에 상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P45)
인간은 초감각적인 진리, 달리 말하면 초경험적인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어떤 것이 초경험적이라 하여 그것이 더 이상 경험적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같은 방법으로 인간의 경험, 도덕적 경험, 종교적 경험에 관한 견고한 토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험들을 말할 수 있다면, 인간 경험의 영역 안에서 선과 악,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하느님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P46)
☞ 경험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인간 경험론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서는 고유한 방식으로 이 점을 강조합니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이다.”(요한 1,18참조) (P46)
인간은 스스로를 선과 악, 그리고 이익과 쾌락의 범주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윤리적인 존재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은 신과 접촉할 수 있는 종교적인 존재로도 자신을 인식합니다. 앞서 말한 기도는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실재의 첫 번째 증명입니다. (P46)
인간은 본질적인 하느님에 대한 언급 없이는 인간에 관하여 올바르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 토마스는 실존철학의 언어로 이것을 ‘본질적인 행위’라는 개념으로 표현하였습니다.(P47)
매일매일의 일상 영역에서 인간의 삶 전체는 ‘너’와 ‘나’의 공존이며, 이는 ‘절대와 한계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의 전통은 이 ‘너(Thou)'의 둘레를 맴돕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 사도들의 하느님, 우리들 신앙의 하느님 주의를 맴도는 것입니다.(p48)
왜 하느님은 더 분명하게 계시하지 않으실까요? 왜 그분은 당신의 피조물들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시는 것일까요?
성 토마스는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사유가 아니라 존재가 사유를 규정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존재하는 나(피조물)이기 때문에 사유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존재 자체이시기 때문에 창조되지 않은 신비인 절대자이십니다. 그분이 신비가 아니었다면 계시하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스스로를 계시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p50)
인간이, 창조된 자신의 지성으로, 그리고 인간 자신의 주관의 한계 내에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거리를, 필연적인 존재와 우연적인 존재 사이의 거리를, 그리스도께서 성녀 시에나의 카타리나에게 말씀하셨다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그분’과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그녀’사이의 거리를 극복할 수 있을 때에만 귀하의 질문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p50)
왜 하느님이 실존하신다는 더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 것일까? 왜 하느님은 당신을 감추시고 당신의 피조물과 숨바꼭질을 하시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느님의 실존은 어찌하여 매우 단순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이것은 현대의 불가지론이 준비하고 있는 레파토리에 속하는 질문들입니다. (p51)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그분이 ‘사람이 되시는 특별한 방법’으로 일어납니다. (p52)
도전은 바로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나는 미친 사람처럼 말합니다.”(1고린 11,23 참조)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안에서 사람이 되셨고, 처녀의 몸에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인간성 안에서 드러나는 비가시적인 하느님의 계시가 인간 역사에서 절정에 달한 것은 바로 이 탄생 안에서, 그 다음에는 수난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입니다. (p52)
수난 전날 밤에도 사도들은 그리스도께 여쭈었습니다.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요한 14,8) 예수님의 대답은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4,9~13. 10,30 참조) (p52)
그리스도의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현대인들이 그토록 열망하는 직접 체험의 지점에 거의 가까이 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직접성은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알아보는 것”(1고린 13,12 참조). 하느님을 하느님으로서 알아보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p52)
허리를 굽히고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가심으로써, 인간이 당신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가능성이 확대되는 그 지점에서, 하느님은 과연 더 나아가실 수 있을까요? 진실로, 하느님은 가능한 한 멀리 나아가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은 더 이상 나아가실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하느님은 이미 너무 멀리 가신 것이죠! (p53)
아마도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1고린 1,23) 분이 되신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부르셨고,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 아버지를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에, 오히려 지나치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p53)
인간은 더 이상 그러한 친밀함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반항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커다란 반항에는 정확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대교 회당이고 다음으로는 이슬람입니다. 그들은 모두 그토록 인간적인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절대 초월자로 남아 계셔야만 합니다. 하느님은 순수한 권능의 존재로서 남아 계셔야 합니다. 자비가 넘치는 권능자여야 하지만, 당신 피조물들의 잘못들과 그들이 진 죄를 대신 걸머지실 정도까지는 아닐 것입니다. (p53)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너무 많이 드러내 보이셨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는 옳습니다. 가장 신적인 것은 물론 당신의 심오한 생명까지도 말입니다. (p53)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당신의 신비 안에서 계시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베일을 벗는 일이 어떤 면에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분을 보지 못하도록 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우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나친 신비를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p53-54)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지나치게 베일에 싸여 있음으로써 인간이 압도당하거나 신비가 세력을 떨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맞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는”(사도 17,28) 바로 그분이 하느님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분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확인을 받으셔야만 했을까요? (p54)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고린 15,14) (p54)
시골 구석에서 태어나 사형 선고를 받았던 이 유대인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떻게 유례없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이자 인간이시기 때문에 중재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안에 완전히 신적인 세계, 삼위일체의 완전한 신비, 현세적인 삶과 불멸의 신비를 모두 간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섞이지 않습니다. 그분 안에는 본질적으로 신적인 그 무엇이 있습니다. (p56)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인간적이셨습니다! 이 덕분에 온 세상과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느낌을 발견합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하느님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 말입니다. (p56)
태초부터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피조물 안에서 많은 선한 것을 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신 인간 안에서 특별히 좋은 것을 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선을 당신이 육화하신 아드님 안에서 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과 모든 이성을 가진 피조물들에게 이러한 ‘선’을 위한 책임이 있다고 보셨습니다. (p57)
신적인 전망을 유한한 피조물들에게 넣어 주셨으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특별히 이 선을 당신 아들의 수난과 죽음에서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p57)
이 선은 부활에서 다시 확인될 것입니다. 부활이야말로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요,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창조물의 재발견이요, 모든 피조물의 궁극 운명에 대한 재발견입니다. 이 운명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1고린 15,28)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 안에서 표현됩니다. (p57)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하고 고백할 때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중심에 있었으며, 때로 피를 흘리는 순교에 이르렀던 그들 증거의 중심에 계셨습니다. 이 신앙 덕분에 교회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체험하였습니다. (p58)
바오로의 출발점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젊은 바리사이인 바오로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영혼의 눈으로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온전한 진리를 보았습니다. (p59)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시고 또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루가 10,21~22) 여기서 루가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마태오가 인용한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마태 16,17) (p60-61)
그런데 루가의 언명과 요한 복음의 서문 곧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요한 1,18)고 하는 언급은 긴밀히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p61)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의 아버지인 하느님이 당신 자신의 아들을 잔인하게 희생시키실 필요가 있었단 말인가?
인간은 인간의 이성만으로,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양, 살아간다는 태도가 바로 그러한 사유의 결과입니다. 창조주와 창조주의 섭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과학에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느님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양, 하느님은 세상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양 행동할 필요 또한 있었습니다. (p66)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저절로 굴러갑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제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만일 그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한다면, 하느님은 지성이고, 영원히 인식하는 지성일 뿐입니다. 실존하는 이 세상에서, 자기 충족적인 이 세상에서, 과학적인 탐구로 말미암아 더 이상 신비로울 것도 없는 이 세상에서, 반신(半神)이 된 현대 기술로 써도 써도 다함이 필요 없는 무한정인 자원의 보고인 이 세상에서, 하느님이 개입할 필요를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세상이라면, 세상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어야 합니다.' (p68)
그런데도 그리스도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 3,16)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인간의 궁극적 행복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하십니다. 오히려 세상은 인간 파멸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지식을 발전시켜 나가는 거대한 작업장처럼 보이는 이 세상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진보와 문명이, 현대적인 통신 체제가, 아무 제한 없는 민주주의 체제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p69)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단지 창조를 묘사한 창세기의 첫 번째 언명을 되풀이하셨을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12~31) 이 구절이야말로, ‘구원의 절대적 보증’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은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질병이나 전염병, 대홍수, 재난 등 갖가지 형태의 악으로부터 인간을 구해줄 수 없습니다. 넘쳐나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하는 이 세상은, 구원과 구속(求贖)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p69)
세상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특히 죽음으로부터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성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씀하신대로, 온 세상은 ‘불안정성’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부패와 죽음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육신에 관한 한, 인간 역시 그렇습니다. 불멸성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불멸성이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인간에게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도록”(요한 3,16)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심에서 자명해지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창조된 세상에 의해서는 주어질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그리고 피조물과 함께 인간은 “덧없음”(로마 8,20 참조)에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p69-70)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 3,17 참조) 사람이 되신 ‘인자’가 바라본 세상은, 첫조상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된 인류 역사 전체가 죄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단죄받아 마땅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후기 계몽주의 사상이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또 하나의 관점입니다. 계몽주의는 죄의 실재, 특히 원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p70)
세상이 죄로 가득 차 있음을 인식시키는 것과 그 죄로 인해 단죄한다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세상이 죄로 가득 차 있음을 인식하는 것은, 세상이 구원될 수 있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려받은 죄를 포함하여, 우리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일은, 구원의 첫째 조건입니다. (p70)
두 번째 조건은, 하느님 앞에서 이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도록 오로지 이 고백을 받아들이려고 열망하십니다. 구원한다는 것은 구속적인 사랑으로, 언제나 어떠한 죄보다도 더 위대하기 마련인 그 사랑으로, 끌어안고 들어 올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탕자의 비유는 탁월한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p70)
구원사는 매우 간단합니다. 구원사는 첫째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둘째 아담,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인류의 지상 역사 안에서 펼쳐지는 역사입니다(1고린 15,45). 구원사는,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실 때”(1고린 15,28), 하느님 안에서 세상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마감됩니다. (p71)
동시에, 구원의 역사는 모든 인간의 삶을 끌어안습니다. 구원사는, 어떤 의미로는 탕자의 비유나 그리스도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 속에 잘 함축되어 있습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 죄 짓지 말라.”(요한 8,11) (p71)
구원사는 인간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거대한 개입이라는 근본적인 전망 안에서 종합됩니다. 이러한 개입은 파스카 신비 곧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그리고 승천 안에서 절정에 달하며, 오순절에 사도들 위에 내린 성령 강림으로 완성됩니다. (p72)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계시하는 구원사는 태초에 창조되고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재창조된 모든 개인과 전 인류 가족의 역사입니다. (p72)
세상에는 왜 그토록 악이 만연해 있는가?
하느님은 인간을 이성적이고 자유롭게 사고하도록 창조하셨고, 그에 따라 하느님을 인간이 심판하는 것조차 허용하셨습니다. 구원사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계속적인 심판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질문과 의혹에 대한 인간 스스로의 심판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실질적인 심판 또한 자행되어 온 것입니다. (p74)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과연 필요한 것이었는가?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방도는 없었는가? 고통으로 가득 찬 그런 일이 일어나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역사의 중심점에 놓을 필요도 없이, 하느님은 스스로를 의롭게 하실 수 있었지 않은가? 하고 말입니다. (p75)
하느님은 인간을 향해 당신을 의롭게 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것,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모든 것은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 이는 성서 속의 욥이 취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p75)
그러나 하느님은 전능하신 하느님일 뿐만 아니라 지혜의 하느님이시오, 인류를 향해 자신을 의롭게 하시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신 사랑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한, 세상 바깥에 남아 계시는 절대자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요, 인간의 운명을 함께 나누고 그 운명에 동참하는 하느님이십니다. (p75)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은 세상 바깥에만 남아 있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전지 전능하신 당신 안에서 스스로 만족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그분의 지혜와 전능하심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피조물을 위한 봉사에 주어져 있습니다. 고통이 인간의 역사 안에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왜 하느님의 전능하신이 십자가상의 수치를 당하는 전능함으로 드러났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십자가상의 수치는 인간 역사에서 그렇게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고통이라는 크나큰 신비를 해석하는 열쇠로 남아 있습니다. (p76)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비평가들조차도 이 점에는 동의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야말로 하느님께서 고통당하는 인간과 연대하시는 증거라고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인간의 편에 서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철저하게 인간의 편에 서 계십니다.(p76)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7-8)
모든 것이 이 진술 안에 담겨 있습니다. 모든 개인과 집단의 고난은 자연의 힘과 인간의 의지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전쟁, 강제노동수용소, 대학살―등도 모두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로 행한 것들입니다. (p76)
신앙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 안에 존재하는 고통들을 왜 제거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일종의 ‘신의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인간의 자유와 부딪치게 되신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 ‘무능한’ 존재가 되기로 결정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창세 1,26 참조) 지으신 인간들에게 부여한 그 위대한 선물에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p77-78)
이 선물이 인간에게 부여되기 이전에도 하느님은 여전히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분이셨으며, 인간의 심판이 있기 이전에도, “그렇다면 네가 왕이냐?”(요한 18,37 참조)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그분에게 던졌던 부당한 재판이 있기 이전에도, 하느님은 항상 존재하는 분이셨습니다. (p78)
"그렇다면 네가 왕이냐?“라는 이 도발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은 물음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모든 민족들의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너에게 있단 말이냐?“ 빌라도의 법정에서 행해진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은 이렇습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요한 18,37) (p78)
인간 역사의 법정에 하느님을 고소한 이 비극적인 재판은, 결국 진리에 순응하지 않는 쪽으로 판결이 내려지면서 막을 내립니다. 빌라도는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요한 19,6)고 말하고, 이어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그러면 데려다가 너희의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아라.”(요한 19,6) 이런 식으로 그는 그 문제에 관한 한 손을 씻었고, 성난 군중들에게 그 책임을 돌립니다. (p78)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이런 단죄는, 진리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오만과 비열한 음모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 대한 진실이고, 우리들의 시대에 대한 진실이 아닐까요? (p78-79)
우리 시대에도 똑같은 단죄가, 억압적인 전체주의 정권의 법정에서 숱하게 되풀이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민주주의 국가의 의회에서도 이런 단죄가 되풀이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인간 생명에게 죽음의 선고를 내려도 좋다는 법을 통과시키는 것이 그러한 사례의 하나입니다. (p79)
하느님은 항상 고통당하는 이들의 편에 서 계십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당신이 고통을 자유로이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되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의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하심을 보여 주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런 제안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디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나 보자. 그렇게만 한다면 우린들 안 믿을 수 있겠느냐?”(마르 15,32) 그러나 예수님은 그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p79)
예수님이 최후까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 고통받는 다른 모든 이들이 다 그렇듯이,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르 15,34)라고 외치셨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상 가장 격렬한 논쟁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상의 고난이 없었다면,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진리는 설 자리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p79)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내주시어, 당신 자신을 온전히 사랑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셨던 분입니다. 여기서 “끝까지”라는 것은 최후의 숨을 거두실 때까지를 의미합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은,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를 받아들이셔서 그것을 당신이 짊어지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p79-80)
고통받는 인자는 “모든 것을 참으시는”(1고린 13,7) 사랑의 계시이며, “가장 위대한”(1고린 13,13 참조) 사랑의 계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계시일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사랑을 부어주시는”(로마 5,5 참조)분이시라는 계시이기도 합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앞에서 구원을 나누어 가진 사람은, 자신의 삶 속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인간성 안에서, 하느님이 하신 일들에 대해 계속해서 완고하게 판단하는 사람에 비하면 그 이익이 비할 수 없이 풍성합니다. (p80)
☞ 하느님을 믿는 이는 무신론자에 비하여 풍성한 이익을 얻는다.
하느님에 대한 심판은 곧 인간 자신에 대한 심판이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신적인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서로 만나고, 교차하고, 겹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멈추어 서야만 합니다. (p81)
산상설교에서부터 시작된 복음의 길은, 타볼 산(변모의 산)을 지나 해골산에 이릅니다. 해골산의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는데 겪는 어려움과 도전은 너무 커서, 하느님은 스스로 사도들에게 경고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 금요일과 부활 주일 사이에 일어나야 할 모든 일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p81)
하느님을 심판한 우리들, 우리 자신들의 법정에 세워 놓고 그분더러 자신을 정당화시켜보라고 명령한 우리 자신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단죄받은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해 우리 자신들은 과연 책임이 없는 것인지, 하느님에 대한 그 심판이 사실은 우리 자신들에 대한 심판은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심판과 그 결과가―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우리 자신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p81)
그리스도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은 파스카 신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희망을 위해,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멈추어 서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안식일 다음날 빈 무덤 앞에 서서, 예루살렘의 여인들처럼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28,6)
☞ 우리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는,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확신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확신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p82)
☞ 그것이 확고한 믿음이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구원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구원이란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악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합니다. 죽음 자체는, 부활이 뒤따른다면 더 이상 악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리스도의 활동을 통해 일어납니다. 구세주의 활동을 통하여 죽음은 더 이상 궁극적으로 악으로 남아 있기를 그치고 생명의 권능에 종속됩니다. (p84)
세상은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킬 힘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원천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구원하십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전체를 구원하십니다. (p84)
보다 근원적인 악은, 인간이 하느님을 거부한 결과 받게 될 영원한 저주, 하느님이 인간을 거부하는 일입니다. (p84)
저주와 구원은 다 같이 인간 존재의 불멸성을 전제로 합니다. 현세의 죽음이 영원한 생명으로 부름받은 인간의 운명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p84)
그러면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과 결합되어 누리게 될 행복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결합은, 신적인 존재인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1고린 13,12) 전망 안에서 실현됩니다. (p84-85)
과학적 지식이나 과학 이전의 지식을 통하여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갖가지 부분적 진리로 인해서는, 진리의 충만한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하느님에 대한 직관만이 진리의 충만한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p85)
영원한 생명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가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생명의 계시인 동시에, 생명이란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도 현존하다는 선포입니다. (p8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1. 23~26) 라자로의 부활에 관련하여 하신 이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를 통한 육신의 부활에 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그분의 승리이며, 이는 모든 인간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구원으로 부름 받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계시된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p86-87)
그런가 하면 영원한 저주의 운명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궁극적으로 거부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친교를 궁극적으로 단절시킴으로서 생기는 저주의 운명 말입니다. 인간을 거부한 하느님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거부한 인간 때문에 생겨난 저주 말입니다.(p87)
영원한 저주는 복음서 안에 확실히 선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저주는 과연 어느 정도로, 무덤을 넘어서는 생명 안에서 실현되는 걸까요? 이는 궁극적으로, 커다란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p87)
☞ 그러므로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1디모 2,4) 바라신다는 사실입니다. (p87)
☞ 아멘.
행복은 진리를 아는 것으로부터,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뵙는 직관에서부터,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데서부터 샘솟습니다. (p87)
모든 인간이 다 구원받고 진리를 알기를 바라는 근본적인 열망을 안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앞의 성서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계시와 어긋나는 행동을 하실 리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p87-88)
☞ 하느님은 나를 구원하실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입니다. 인간이 “살기를”(에제 18,23 참조)바라시는 하느님은, 인간이 바로 당신 안에서 부름받은 그 생명을 계시하기 위하여 당신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에게로 가까이 다가 오셨습니다.(p88)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의 십자가와 부활로 모든 인간을 끌어안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계시된 생명으로 모든 사람들을 끌어안으시며,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들을 끌어안으십니다.(p88)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이 갖고 있는 구원의 능력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가 하신 말씀에 따르면, 단순한 진리 인식의 힘보다 훨씬 더 큽니다. (p88-89)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는 것인데,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13) 사랑을 통한 구원이란 동시에, 진리의 충만함을 나눔입니다. 또한 아름다움의 충만함을 나눔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이 “거룩함과 생명의 샘”(예수 성심 호칭기도)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완전히 열어젖히신 것입니다. (p89)
그리스도교가 구원의 종교라는 사실은, 교회의 성사생활에서 표현됩니다.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오신”(요한 10,10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 생명의 원천을 드러내어 보여 주십니다. 그분은 특별히 당신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 그렇게 하십니다. (p89)
인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창조하는 성사들인 세례와 성체 성사는 바로 이 파스카 신비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파스카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는 재생력을 지닌 화해의 성사(고해성사)를 세워 주셨습니다. 부활 후에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다.”(요한 20,22~23) (p89)
☞ 성사는 구원으로 이끄는 단계이며 과정이다. 구원은 한 순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깊은 신심이 없다면 그리스도교의 성덕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를 중심에 두지 않는 성덕이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p90)
하느님께서는 왜 그리 많은 종교들을 존재하게 하셨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전인류를 온 땅 위에 살게 하시었으니, 모든 민족들은 단 하나의 기원을 가졌고, 또한 단 하나의 최후 목적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 하느님의 섭리와 착하신의 증거와 구원의 계획은 모든 사람에게 미칠 것이다.(p93)
조상 숭배 안에는, 성인들의 통공 곧 모든 성도들의 친교를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 그안에서 모든 신자들이―살아있든 죽었든―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예비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성도들의 친교에 대한 신앙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근원이요 모든 이를 위한 성덕의 유일한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입니다. 그러니,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정령 숭배자들이 동양의 위대한 종교들을 따르는 이들보다 더 쉽사리 그리스도인이 되리라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p97)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그들 모두를 구속하셨으며, 구원사의 종말론적 단계로 그들 모두를 이끄실 당신 나름의 방식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실제로, 그 지역들안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더 많은 이들이 그분에 내재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히브 11,6 참조) (p97)
☞ 구원에서 배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본질적으로 불교는 ‘구원의 교리’를 제시합니다. 이 교리는 적어도 금육적이고 신비적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대안’으로서, 혹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일종의 ‘보완’으로서, 서구인들을 점차 매혹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불교의 구원 교리는, 불교라는 체계의 중심점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교 전통과 거기에 파생된 방법론들은 거의 배타적이라 할 정도로 부정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p99)
붓다가 경험한 ‘깨달음’은,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확신, 세상은 악의 근원이고 인간에게 고통을 줄 뿐이라는 확신을 깔고 있습니다. 이러한 악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사람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러자면 영원한 실재와 우리를 묶어 놓고 있는 인연―인간 본성 안에, 우리의 정신과 육체 안에 존재하는 인연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인연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되면 될수록, 세상의 것들에 초탈하면 할수록, 우리는 이 세상에 근원을 두고 있는 악과 고통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집니다. (p99)
이런 방식으로 과연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을까요? 붓다가 전달한 ‘깨달음’에는 이런 것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불교는 크게 보면 ‘무신론적 체계’입니다. 불교의 체계에 따르면, 신에게서 비롯되는 선을 통해서는 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잘못된 세상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림으로써만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p100)
이러한 완전한 해탈은 하느님과의 결합이 아닙니다.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초탈한 이런 상태를 그들은 이른바 니르바나(열반)라고 합니다.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인 세상에 대해 무관심해짐으로써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정신적 구도 과정의 정점(頂点)입니다. (p100)
가르멜의 신비주의는 붓다의 성찰이 끝나는 지점에서, 그의 영성생활에 관한 가르침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마음을 능동적, 수동적으로 정화시키는 일, 감각과 영혼을 닦으며 특별한 밤들을 지내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살아 있는 사랑의 불꽃으로 스며들게 하는 데에 필수적인 준비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p101)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부정적인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감성과 지성과 영혼을 통해서 인간이 세상에 집착함으로써 생겨나는 악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p101)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계시에서 나옵니다. 이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과 결합할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향한 덕목인 믿음, 소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연합할 수 있는 능력을 불러일으킵니다.(p101)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세상이 인간에게는 고통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에 인간은 세상과 인연을 끊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하는 것이 부정적인 것은, 그것이 일방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과제로 맡기시고 주신 세상과 인간 자신의 발전 모두에 근본적으로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p102)
☞ 이 세상 또한 우리가 살아야 할 몫이다.
이 세계는 인류 역사의 연출 무대와 같으며 여기 인간의 노력과 실패와 승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에 입각하면 이 세계는 또한 창조주의 사랑으로 조성되었고 보존되는 것이며, 죄의 노예 상태에 떨어졌지만,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마귀의 권세가 무너지자, 해방되어 하느님의 계획대로 변혁되었고 언젠가는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사목헌장 2항) (p103)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끊어 버려야할 곳이 아니라 반드시 지나가야할 광야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은 세상 안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가장 깊숙한 자아의 신비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 그러한 절대적 초탈에 도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부터 당신의 피조물을 사랑하셨고,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요한 3,16) 주셨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세계를 ‘근본적인’ 악으로 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p103)
유일신을 믿는 모스크에 대해 말씀해 주실 차례입니다.
코란의 신에게는 사람의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이름 몇 가지가 붙여져 있지만, 그분은 결국 세상 바같에 있는 하나의 신일 뿐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 아닌, 절대 권능의 신일 뿐입니다. (p106)
이슬람은 구원의 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언급되긴 하지만, 마지막 예언자인 마호메트를 예비하는 한 사람의 예언자로서일 뿐입니다. 이슬람은 동정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구속의 비극적 요소가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의 신학뿐 아니라 인간론은, 그리스도교와는 매우 거리가 멉니다. (p106-107)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슬렘의 신앙심은 존경할 만합니다. 기도에 대한 그들의 열성에는 찬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릎을 꿇고 기도에 열중하는 알라의 신봉자들의 모습은, 참 하느님께 호소하는 모든 이에게, 장엄한 성당을 떠나고 나면 기도에 소홀하거나 아예 기도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p107)
"역사 과정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신자와 모슬렘 사이에 불목과 원한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성스러운 교회 회의가 모든 사람들에게 권고하는 바이니, 과거를 잊고 서로 이해해 주기를 진심으로 힘쓰며, 모든 이에게 사회정의와 윤리선과 나아가서는 평화와 자유를 공동으로 옹호해 주고 촉진시켜 주기를 바란다.“(비그리스도교 선언 3항) (p107)
이제 유대교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아우슈비츠는 인종적 증오와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체제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오늘날까지도 아우슈비츠는 반(反)셈족주의가 인간성에 대한 얼마나 크나큰 되었나 하는 교훈을 주고 있으며, 모든 인종 증오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기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p111)
저는 유대인들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형님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공의회의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입장에 서서 표현한 심오한 확신이기도 합니다. (p112)
통계에 따르면 2000년이 되면 역사상 처음으로 모슬렘들이 가톨릭 신자수를 능가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미 힌두교들만으로도 프로테스탄트와 그리스및 슬라브 정교회 신자들을 합친 숫자보다 많다고 합니다.
그런 식의 관점은 문제를 다소 단순하게 해석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통계는 그리 유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량화할 수 없는 가치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p116)
판단의 근거, 측정의 기준으로서 제시된 통계 숫자는, 사람의 내적 태도를 고려할 때는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신앙의 수량적 측정을 목적으로 하는 통계 숫자들, 예를 들면 종교 의례에 참석하는 사람의 수로 신앙의 깊이를 측정하는 행위는 문제의 본질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숫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p116)
☞ 단순히 숫자가 많다고 해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내 어린 양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루가 12,32)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통해 가장 적절한 답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p117)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물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루가 18,8 참조)
☞ 숫적으로는 소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리가 아닌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쉽사리 성공하도록 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을 믿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박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p117)
저는 복음의 핵심이 이 말씀 안에 들어 있다고 젊은 시절부터 느껴 왔습니다. 복음은 쉽사리 성공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복음은 누구에게나 안락한 생활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요구임과 동시에 위대한 약속입니다. 죽음의 법칙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에게는 영생의 약속이며, 많은 시련과 좌절에 부딪힐 사람들에게는 신앙을 통한 승리의 약속입니다.(p118)
☞ 복음의 약속은 이 세상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약속이다.
복음은 근본적인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잃어야 하고, 태어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고,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역설 말입니다. 이것이 언제 어느 곳에서나 인간의 저항에 부딪치게 되는 복음의 핵심 진리입니다. (p118)
복음은 언제나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도전에는 복음 자체의 권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도전을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사실 인간은 자아를 초월하여야할 내적욕구를 느끼고 있습니다. 자기 초월을 통해서만 인간은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p118)
☞ 자신을 거슬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에 관한 가장 심오한 진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진리를 안 최초의 인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 안에 있는 것”(요한 2,25)을 진실로 아십니다. 당신의 복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심오한 진리를 다루셨습니다. (p118)
당신은 누구보다도 먼저 십자가를 통해 이 진리에 이르셨습니다. 채찍으로 맞으신 다음 가시관을 쓰고 계신 나자렛 예수를 가리키면서 “보라, 이 사람을!”(요한 19,15참조)하고 말했던 빌라도는, 그 자신이 본질적인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p118)
성하께서 끊임없는 가르침과 권고를 통해 줄곧 상기시켜 오신 복음화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복음화라는 위대한 재도약의 촉구는, 다양한 여러 길을 통해서 현재의 교회 생활로 다시 돌아가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고린 9,16) 타르소에서 바오로가 한 이 선언은, 교회 역사의 모든 시대에 통하는 진리였습니다. (p119)
저는 이미 아시아에서는 아주 소수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어린 양떼’는 확실히,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도들에게 주신 하느님 나라의 일부분입니다. 몇몇 아시아 교회의 역동성은 괄목할 만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이러한 역동성은 박해의 결과라는 것을 말씀드려야겠군요. 이는 특히 한국과 베트남,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확인된 바입니다.(p124)
아프리카는 선교 성소의 대륙이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소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유럽에서는 성소가 줄어들고 있는데 비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것입니다.(p125)
참으로, 희망을 버릴 근거는 없습니다. 교파적인 관점에서 보아 전 세계가 가톨릭은 아니라 할지라도, 복음은 이미 온 세상에 깊이 침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신비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 모로는 세상 안에 현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p126)
세상의 영에 맞서서, 교회는 매일매일 새로운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세상 안에는 복음과 복음화가 이미 현존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과 복음화에 강력히 반대하는 잘 조직된 반(反)복음화 세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현대 세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싸움은 이 세상의 영이 가장 강해 보일 때 그 절정에 달합니다.(p126)
복음화는 언제나 인간과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서, 세대의 변화에 연결되고 있습니다. 세대는 오고 또 갑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로부터 거리를 두었던 세대들, 세속적인 사고와 생활 방식을 받아들였던 세대들, 혹은 그러한 방식들이 의무로 부과되었던 세대들이 오고 또 갑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교회는 항상 미래를 지향합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새로운 세대를 만나러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들은 그들의 선배들이 거부해 왔던 것들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p126)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토록 젊으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께서 끊임없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놀랍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일하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진리는 인간을, 특히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계만을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p126-127)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활동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겪어온 모든 상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의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희망이란 성령의 능력의 표지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은, 언제나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에 비추어 판단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고린 9,16참조) (p127)
성지를 향한 순례자들의 발길이 나자렛으로, 베들레헴으로, 예루살렘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의 하느님 백성은 20세기말을 살아가는 오늘의 젊은 세대 안에 살아 있으며,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목소리를 따라 신앙의 순례를 시작했던 아브라함과 똑같은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마태 8,22)는 이 말씀보다 우리가 더 자주 들을 수 있는 복음서의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바로 오늘의 사람들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길을 따르라고 촉구하는 부르심입니다.(p130)
복음화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전 교회가 젊은이들을 특별한 희망의 눈으로 지켜보아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혹시 우리 어른들이, 새로운 세대는 우리보다 또는 이전의 모든 세대보다 더 나으리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젊은이들이 전통적인 가치를 거부했다거나 그들이 교회를 떠났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p139)
젊음은 단순히 인생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일정한 기간일 뿐만 아니라 섭리로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시간이고 하나의 책임으로서 부여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 기간 동안에 젊은이들은, 복음서에 나오는 한 청년처럼,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추구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일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행로를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방법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p134)
인생에서 청소년기야말로 자신을 발견하는 시기입니다. 청소년기는 또한 공동체를 알아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젊은이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삶이 ‘거저 주는 선물’이 될 때라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p135)
젊은이들에게 결혼을 준비하게 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물론 사랑은 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랑을 배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p136)
만일 우리가 인간의 사랑에 대해 애정을 갖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순결한 사랑’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순결하며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젊은이들은 언제나 사랑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p136)
그들은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느님만이 이러한 사랑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젊은이들은 으레 따르기 마련인 갖가지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p136-137)
어디에서나 교황이 가는 곳이면 교황은 젊은이들을 찾고 젊은이들 역시 교황을 찾으려고 합니다. 사실, 그들이 찾는 것은 교황이 아니라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요한 2,25) 그리스도입니다. 특별히 젊은이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물음에 진정한 답변을 해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 말입니다. 답변을 요구할 때에도, 젊은이들은 그 답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답변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p137)
세계 청년의 날은 결코 어느 개인이 창안한 것이 아닙니다. 그날을 만들어낸 사람은 바로 젊은이들 자신이었습니다. 청소년의 날, 젊은이들의 만남은 나중에는 전세계의 모든 젊은이들이 바라게 되었습니다. 청소년의 날은 번번이 사제들과 주교들에게,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게 하고 있습니다. (p137)
세계 청소년의 날은 이미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보여주는 훌륭하고 매혹적인 증거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강력한 복음화의 기수가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선한 것과 창조적인 것을 위한 엄청난 가능성이 있습니다.(p138)
"제가 드리는 말씀은 여러분이 제게 하려는 이야기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굳이 말로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분의 존재 자체, 여러분의 노래, 춤, 풍자, 그리고 여러분의 열정으로도 얼마든지 많은 말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p138)
우리에게는 젊은이들의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생생한 삶의 기쁨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맛보셨던 그 기쁨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이와 똑같은 기쁨을 경험합니다. (p138)
1978년 10월 22일, 저의 교황 즉위식이 열렸던 바로 그 날의 전례를 마치며, 저는 베드로 광장에 모인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와 세상의 희망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저의 희망입니다.” 저는 이 말을 자주 되풀이하곤 합니다. (p139)
젊은이들은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루가 10,25)라는 물음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는 가운데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교회와 만나게 됩니다. 교회 역시 젊은이들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습니다. (p139)
젊은이들의 생애에 정말 중요한 날은, 바로 그리스도만이 젊은이들의 진정한 친구이며, 항상 젊은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이라는 점을 확신하는 날일 것입니다. (p139)
성하께서는 무신론적인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을 통해서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공산주의 몰락에 관여하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 말씀은 과연 무엇에 대해 언급하신 것이겠습니까? 삼위일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이루는 결합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본질적 필수 요소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p141)
☞ 하느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은 시작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하느님이라고 하신 말씀은, 직접적으로 영원성을 언급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점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141)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지식의 종교나 명상의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활동하는 종교입니다. (p141)
신비생활과 명상의 위대한 성인이었던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생이 저물어갈 때, 우리는 우리의 사랑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빛과 사랑에 관한 말씀. 60) 예수께서도 마태오 복음서의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에서 이와 똑같은 진리를 더욱 간결하게 표현하고 계십니다.(마태 25,31-6참조) (p141)
☞ 최후의 심판은 ‘사랑에 대한’ 심판이 될 것이다. 얼마나 사랑하였는가?
우리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좀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그분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의 마음이 그분을 향해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p142)
이런 뜻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가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거나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데도,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는”(마태 13,13 참조) 이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p142)
☞ 하느님을 체험하려면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야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위대한 활동입니다. 말씀의 활동이 성사의 활동이 된 것입니다. (p143)
성사(聖事)가, 그 모든 성사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자의 활동이 아니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교회가 세례를 줄 때는 곧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용서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시는 것이며, 교회가 성찬을 거행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나의 몸이다.” (p143)
☞ 성사는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 것이다.
모든 성사는 그리스도의 활동이자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활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침묵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p143)
레오 13세는, 유럽인의 몰락을, 더 나아가 인류의 값비싼 희생을 요구했던 공산주의의 몰락을 예견했습니다. 1891년에 반포한 그 회칙에서 ‘오히려 치료약이 질병 자체보다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교회 교도권의 권위로서 진지하게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p144)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날 밤, 느닷없이 “러시아는 회개할 것이다. 결국 나의 성심이 승리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던 ‘파티마의 세 어린이’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예언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나 지리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추지 못했고, 더욱이 사회 운동이나 이데올로기의 발전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그들이 우리에게 말한대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p144-145)
교황이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불린 이유는 아마도 이것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1981년 5월 13일 베드로 광장에서 열렸던 파티마의 첫 번째 성모 발현기념일에, 저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던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더욱 더 투명하고 분명하게 이 발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시대의 징표’를 통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더욱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p145)
성부께서는 언제나 활동하고 계시며 성자께서도 언제나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성령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끊임없이 창조하고 구원하며 성화하고, 생명을 주는 활동입니다. (p145)
그러므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공산주의의 몰락에 관여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공산주의는 그 자체가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체제였습니다. 스스로의 실수와 해악으로 몰락한 것입니다. ‘오히려 치료약이 질병 자체보다 위험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사회 개혁을 담보하지 못했으며, 궁극적인 세계에 대한 힘 있는 도전이나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결함으로 몰락한 것입니다. (p145)
북반구의 부자 나라와 남반구의 가난한 나라 사이에 점증하고 있는 격차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과연 이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책임은 바로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 자신, 이데올로기와 철학 체계 따위에 있는 것입니다. (p146)
또한 하느님께 대항하는 인간과 그리스도교적인 모든 것을 조직적으로 배제하는 것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맞서는 이러한 생각과 삶은 지난 3세기 동안 서구 사회를 크게 지배해 왔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집산주의(集産主義)는 이러한 계획의 ‘얄팍한 변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고 있는 위험성이나 오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똑같은 계획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p146)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계약에 충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류와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의 나라라고 단호하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그 약속을 절대로 철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p147)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통해 교훈을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역사의 구불구불한 뒤안길을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p147)
하느님은 결코 당신의 활동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본질적인 활동은 십자가 위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언제나 살아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진리와 사랑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사들 안에서 하느님이 활동하시는 영원한 원천인 것입니다. 그분의 활동은 사람의 마음과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그런 활동입니다.(p147)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심지어는 몇몇 가톨릭 신자들까지도 의문을 갖습니다. 왜 모든 그리스도교 교파 중에서 유독 가톨릭 교회만이 복음의 충만함을 간직하고 또 그것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는지를 말입니다.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사도 4,12)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계시된 진리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단지 이 구원 사업의 도구일 뿐입니다. (p149)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사와 비슷하다. 즉 교회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주는 표지요 도구인 것이다.“(교회헌장 1항)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p149)
공의회는 교회의 신비를 매우 깊이 있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성자는 당신이 취하신 인성(人性) 안에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죽음을 이기심으로써 사람을 속량하시어 새로이 창조하셨다(갈라 6,15; 2고린 5,17참조), 즉 모든 민족 중에서 불러 모으신 당신 형제들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써 신비로이 당신 몸을 형성하시었다.”(교회헌장 7항) (p149-150)
이러한 이유로 치프리아누스 성인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보편적인 교회는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일치로 함께 모인 백성”(주일강론 23)으로 나타납니다. 하느님 안에,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온 이 삶은 구원의 실현입니다.“(p150)
인간은 교회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와 하느님의 심오한 생명의 신비로 인도됨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오로지 교회의 가시적인 측면만을 바라보는 것으로는 결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몸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혜안(慧眼)을 가지고 이것을 표현하신 바 있습니다(골로 1,18 참조) (p150)
교회의 심장에 바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희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피조물의 제단과 세계의 제단 위에 바쳐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골로 1,15)이시며, 부활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골로 1,18)이십니다. (p150-151)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적인 희생으로 모든 피조물을 당신 주위에 불러 모으시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피조물의 영원한 운명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비록 이러한 과정에 고통이 따른다고 해도, 그것은 바울로 사도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오히려 희망으로 충만한 삶입니다.(로마 8,23-24 참조) (p151)
"하느님의 백성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현세적 성격의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천상적 성격의 시민으로서 자기 시민을 모으고 있으므로, 하느님의 백성은 인류 안에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은 성령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으며, 따라서 ‘로마에 살고 있으면서 인도 사람이 자기 지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보편성으로 말미암아 각 부분은, 그들이 받은 고유한 은혜를 다른 부분들은 교회에 제공하여, 전체와 각부분이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가지며 일치의 완성을 함께 지향하면서 자라게 된다.“(교회헌장) (p151)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방법은 다를지라도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친교로서의 교회의 특징은, 교회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의 친교를 닮게 합니다. 이러한 친교에 힘입어 교회는 인간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교회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구속 희생의 신비를 포함하고 있고, 그 신비를 향해 다가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받을 길을 마련해 주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하느님의 지성소로 들어가십니다.”(히브 9,12 참조) (p151-152)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주관하시는 진정한 주재자이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p152)
"당신의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재자시요 구원의 길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과 세례의 필요성을 강조하시면서(마르 16,16, 요한 3,5참조), 동시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하신 것이니, 문을 통해서 집에 돌아오듯이 사람들이 세례를 통해서 교회에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구원될 수 없는 것이다.“(교회헌장 14항) (p152)
사람들은 교회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서입니다. 구원의 영역에서는, 교회와 교회의 공식적인 구성원 외에도, 다른 형태로 교회와 연관을 맺고 있는 이들도 포함되어야 합니다.(p152)
☞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듯하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는 우리 모두를 꿰뚫고 있으며, 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지니고 있는 신비적, 영성적 차원은 그 어떤 통계로도 드러낼 수 없을 만큼 위대한 것입니다.(p155)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하나로 일치시키려는 노력인 ‘교회 일치 운동’을 살펴보면 아무래도 실망스러운 양상을 보여 주는듯 싶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분열이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기도와 상반된다는 사실에 대해 깊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에 믿게 될 것입니다.”(요한 17,21참조) (p157)
많은 교회나 공동체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인지를 알아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교회만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p158)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요한 23세는 이렇게 말씀하곤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우리를 갈라놓은 것이 우리의 일치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p158)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이 우리를 갈라놓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p158)
사실, 우리 모두는 같은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제1천년대에 일곱 번 열렸던 공의회의 가르침이 전해 준 근본적인 유산입니다. 우리에게는 대화와 일치의 증진을 위한 토대가 있으므로, 일치의 증진은 우리가 분열을 극복하는 그만큼 가능해질 것입니다. 분열은 대부분, 진리를 독점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p159)
이러한 분열은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신 바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베드로의 토대 위에 설립하신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p159)
그리스도를 믿고 이해하는 이러한 다양한 접근법들은, 어떤 경우에는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런 다양한 해석과, 다양한 신앙의 실천 방식이 서로 협력하고 보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선한 의지가 필요합니다.(p159)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 사이의 간격은 사실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후에 생겨난 교회와 공동체들 사이에는 그 간격이 비교적 크다는 점을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확립하신 근본적인 요소들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p159)
☞ 성사가 사라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일을 할 기회를 빼앗다.
공의회는,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우리의 ‘형님’이라는 인식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발전은 대화, 특히 일치를 위한 대화의 결과입니다.(p162)
진정한 일치는 인간 혼자만의 힘으로 맺어지는 열매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주인공은 성령이십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라도, 일치의 과정이 이젠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결정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p162)
우리는 기꺼이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 기도하셨던, 일치를 향한 길을 따라 나아가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일치는 실로 엄청나게 값진 것입니다.(p163)
어떤 의미에서 세계의 미래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미래 또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함과 편견이 결코 이 세계와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파괴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훌륭히 일을 시작하신 하느님께서 그 일을 완성시킬 것”(필리 1,6 참조)이라고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p163)
왜 성령께서는 그토록 잡다한 분열과, 저마다 복음의 사도라고,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증오를 허락하신 걸까요?
왜 성령께서는 이러한 모든 분열을 허락하신 것일까? 우리는 이러한 분열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전개 양상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분열에 초자연적인 원인이 개입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p164)
이 물음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합니다. 우선 부정적인 답변을 하자면, 이러한 분열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범한 죄악의 쓰디쓴 열매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p165)
☞ 중세 교회가 저지른 잘못의 결과다.
좀더 긍정적인 답변이라면, 인간의 나약함이나 심지어 악마에게서도 선함을 이끌어 내실 수 있는 그분을 신뢰함으로써 이런 분열을 통해서도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분열을 통해서 좀 더 선한 것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다. 어쩌면 그 당시 분열되지 않았다면 교회는 부패되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하나의 가정이지만.
그러나 우리를 분명하게 일치시킬 수 있는 사랑의 시간은 반드시 도래할 것입니다. (p165)
베드로의 임무는 일치를 돕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애물을 제거하고 일치의 길을 활짝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임무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위임하신 “너의 형제들을 믿음 안에서 강하게 하라.”(루가 22,32 참조)라는 의무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p166)
그리스도께서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바로 그 순간에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기를 원하시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너는 약하고, 또한 끝없는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네 자신의 약함을 알고 있는 한 너는 다른 이들을 강하게 만들 수 있다. 나는 너에게 하느님의 위대한 진리, 곧 인간 구원을 위한 진리를 너의 책임으로 맡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 없이는 선포할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라.“(에페 4,15참조)는 말씀은 언제나 필요합니다.(p166)
교회와 공의회
공의회는 바로 ‘성령의 신학교’였습니다. 성령께서는 공의회를 통해서, 전세계에서 모인 주교님들과 비가톨릭 교회와 그 밖의 공동체의 대표자들이 면밀히 숙고하여 내놓은 교회의 보편성을 종합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p170)
성령의 말씀은 언제나, 영원한 신비를 향한 깊은 내면을 묘사해 주며, 현대 세계에 이러한 신비를 전달할 의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 걸어야 할 길을 가리켜 줍니다.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공의회가 열리는 동안 함께 듣고 기도하고 생각을 나누며 창조했던 사실은,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비롯된 새로운 복음화 운동의 기틀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p170-171)
구원의 대화
이 대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비그리스도교들과 비신앙인들을 포함한 현대 세계 전체에 대화를 개방한 것이었습니다. 진리를 가둬 둘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한 사람을 위함과 동시에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진리가 사랑을 통해 온다면(에페 4,5 참조), 진리는 더욱 보편적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형식이었으며, 공의회 개최의 정신이었습니다.(p173)
특히 오늘날 평신도가 느끼는 교회에 대한 공동 책임 의식은 교회의 새로운 원천입니다. 이 책임 의식이야말로 제3천년대를 바라보는, 그리고 다가올 세대를 위한 교회상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p174)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한 성령의 말씀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향한 새로운 개방의 가능성이 보이고 있고, 교회는 이 진리를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디모 4,2 참조) 선포해야 합니다.(p175)
복음을 전하는 모든 봉사자들은 공의회라는 선물을 주신 성령께 감사하고, 성령께 빚을 졌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p175)
성하께서 ‘복고(復古)’를 추진하지 않나 의심하고 공의회를 ‘반동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파성과 단견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공의회 이후로 우리는 먼저 질적 쇄신을 목격해 왔습니다. 사제들이 여전히 부족하고, 성소(聖召) 또한 부족하지만 종교 운동은 끊임없이 생성되어 번영을 구가하고 있습니다.(p177)
그러나 새로운 운동들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쇄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회 변화와 역사 변화의 원동력인 인간이 스스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려면,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자신을 쇄신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미래를 위한 희망의 지침입니다.(p177)
오늘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p178)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세계 주교들의 강력한 단체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과 구원 사명에 대한 봉사자로서, 정의와 평화의 촉진자로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 봉사해야 합니다.(p178-179)
분열된 세계에서 국가라는 경계를 초월한 가톨릭 교회의 일치는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 정치와 국제 조직들에 여전히 엄존하고 있는 적대자들에게도 그렇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힘이 모든 사람에게 편안한 것은 아닐지라도, 교회는 사도들의 말을 되풀이하여 전합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이리하여 교회는 그 자신에게 충실하면서, 성령께서 당신의 신부에게 쏟아부은 진리의 광채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p179)
그러나 대화를 하고자 하는 교회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말씀이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도덕 문제에 관한 한, 무엇보다도 성윤리에 대하여, 교회와 교황은 더 큰 행동의 자유를 지향하는 현대 세계의 경향에 발맞추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세계가 이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든가 아니면 세계가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세계가 교황으로부터, 또한 교회로부터 떠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p180-181)
이러한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해도, 저는 이것이 매우 틀린 견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p181)
교황 바오로 6세는 이것을 깊이 통감하였고, 인간의 본질적인 선을 위해 그러한 상대주의와 싸워야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황님은 회칙 ‘인간 생명’에서 사도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시오 ……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듣기 싫어할 때가 올 것입니다.”(2디모 4,2-3) 불행히도 사도의 이 말씀이 오늘의 상황을 특징짓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p181)
언론 매체들은 듣기 원하는 것만 듣도록 사회를 조정해 왔습니다(2디모 4,3 참조). 더욱 열악한 것은 신학자들, 특히 윤리신학자들이 매체에 편승하여, 언론이 ‘건전한 교리’를 반대할 때도 자신들이 말해야 할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p181)
사실, 참된 교리가 인기가 없다고 해서, 쉽게 인기를 끌 방법을 찾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교회는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마태 9,16)라는 질문에 정직하게 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한 길이 넓거나 편안하지 않고 좁고 어렵다고(마태 7,13-14 참조)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우리에겐 그 전망을 포기하거나, 바꿀 권한이 없습니다. 이것이 교도권이 권고하는 바입니다. 또한 신학자들, 무엇보다 윤리신학자들은 교도권과 협력하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p182)
사실상 그리스도의 말씀은, 자신은 짐을 지려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짐을 지우려 하는 사람들을 엄중히 경고할 때(루가 11,46 참조) 진실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p182)
낙태는 물론 피임 또한,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진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진리로부터 떠나는 것이 발전의 상징은 아닐뿐더러, ‘윤리적 진보’의 척도로 고려될 수도 없습니다. (p182)
교회에 대한 신앙은 하느님의 위대한 신비에 대한 신앙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교회를 믿을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가 교회이기도 합니다. 공의회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신비를 믿듯이 교회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p183)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우리 자신이 교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교회의 구조에 속한 사람으로서 교회 자체임과 동시에, 무엇보다도 예언직, 사제직, 왕직이라는 삼중의 특성을 갖는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p183)
☞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도구이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능력에 맞게 그리스도의 예언직, 사제직, 왕직의 사명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p184)
동방과 서방에서 수세기 동안 발휘되어 온 교회의 힘은 성인들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성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따라 그리스도가 가셨던 길을 따르며,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삶을 살았습니다. 동방과 서방 교회 안에서 성인들의 증거가 부족한 적은 없었습니다.(p185)
우리 시대의 성인들은 대부분 순교자들입니다. 20세기 중반 유럽을 휘둘렀던 전체주의의 횡포로 많은 순교자들이 생겼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공할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던 강제 수용소, 그 죽음의 수용소는 가톨릭 교회나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진정한 성인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분들은 참된 순교자였습니다.(p185)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와 에디트 슈타인, 그리고 에스파냐 내전의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특히 동유럽 정교회의 거룩한 순교자들의 무리는 어마어마합니다. 여기에는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로루시인, 그리고 우랄 산맥을 넘어 광대한 지역의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p185)
가톨릭 순교자들 역시 러시아, 벨로루시, 리투아니아, 발트 국가들, 그리고 과거 유고슬라비아에 있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요한의 묵시록에 쓰인 대로, “어린 양을 따라”(묵시 14,4 참조) 갔습니다. 이들은 순교자로서 그들의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을 완성했으며(골로 1,24) 동시에 새로운 세상, 새로운 유럽, 새로운 문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p185-186)
'영원한 생명‘은 존재합니까? 천국과 연옥, 그리고 지옥이 정말 존재합니까?
인간은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책임이 따릅니다. 인간의 책임은 개인적이고 사회적 책임인 동시에 하느님 앞에서의 책임이며,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책임입니다.(p188-189)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자비이십니다. 그분은 탕자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시는”(요한 3,16 참조) 아버지이십니다.(p192)
하느님에 대하여 복음이 가르쳐 주는 이 진리는 종말론이 말하는 핵심을 어느 정도 바꾸도록 요청합니다. 첫째, 종말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지상의 삶이 마감된 후에 일어날 어떤 것입니다. 종말은 그리스도가 오시면서 이미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궁극의 종말론적 사건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 참조)의 시작입니다.(p192-193)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은 모든 사람들을 다음과 같은 신앙 긍정에 연결시킵니다. “나는 육신의 부활을 믿나이다. 나는 죄의 사함과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 이것이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입니다.(p193)
☞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1디모 2,4) 바라신다는 것을 세상에 밝혀 주셨습니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이 말씀은 최후의 사건들에 대한 이해와 설교에 매우 중요합니다.(p193)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그 때문에 당신 아들을 주셨으며, 이제 성령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일하십니다. 이를 안다면 인간이 어찌 하느님을 비난할 수 있겠으며, 하느님께 거절당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p193)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거절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고통의 형벌을 허락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그는 분명히 어떤 이들은 영원한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마태 25,46 참조). 누가 영원한 벌을 받게 될까요? 교회는 결코 이 문제에 대해 단언할 수 없습니다. (p193-194)
이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양심을 한데 끌어안고 있는 참으로 불가해한 신비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침묵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적절한 자세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배반자 유다에 대해서도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마태 26,24)라고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확실히 영원한 저주는 아닌 것입니다.(p194)
☞ 지옥은 하느님께 온전히 맏겨드릴 신비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과 일치시키기 위해, 감각적이고 정신적인 본성의 내적 연옥을 통과시킵니다. 우리는 단순히 법정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 그 자체의 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p194-195)
모든 것에 앞서, 그것은 ‘심판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사랑으로 심판하십니다. 그것은 정화를 요구하는 사랑입니다. 인간의 궁극적 소명이자 운명인 하느님과의 일치에 앞서 인간은 먼저 정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p195)
☞ 사랑이신 하느님과 함께 살려면 우리는 사랑으로 정화되어야 한다. 이 세상은 사랑으로 정화되는 훈련장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연옥이다.
교회는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만일 교회가 이것을 포기해 버린다면,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맺으신 새로운 계약과 자신의 소명에 대한 충실성도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p195)
믿으면 무언가 좋은 것을 얻습니까? 복음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도 정직하고 고결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신을 믿고 신뢰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이사야서(이사 55,11 참조)의 말씀과도 같이, 열매를 맺어 하느님께로 되돌아갑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그의 말씀에 억지로 응답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p197)
☞ 신앙은 온전히 그 사람의 자유의지인 것이다.
누구나 진리를 억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진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자유만이 그가 충심으로 진리를 찾도록 해주고, 진리를 발견했을 때 확신을 갖고 바른 행동으로 진리를 따르도록 인도해 줍니다.(p198)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안방이요 인간이 저 혼자서 하느님과 같이 있는 지성소이며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사목헌장 16항) (p199)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을 촉구하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믿음과 인간을 위한 믿음을 바라고 계십니다. 당신께 기적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했다.”(마르 10,52) (p200)
성서의 가나안 여인의 예화는 특별히 이 경우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딸을 구해달라는 이 여인의 간절한 청을 짐짓 모르는 척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으로 하여금 “그렇기는 합니다만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마태 15,27)라는 떨리는 신앙 고백을 하도록 자극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 질 것이다.”(마태 15,28)라는 말씀을 하시려고 그 이방 여인을 시험하신 것입니다.(p200)
☞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에게 믿음을 촉구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마음 안에 믿음을 일깨워 주려 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말씀에 응답하길 원하셨으나, 스스로의 존엄성을 간직한 채 그러길 바라셨습니다. 바로 그러한 신앙을 추구하는 데에 참된 믿음이 존재하며, 그럼으로써 구원의 필요 조건을 충족하게 되는 것입니다.(p200-201)
☞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믿음을 바라신다.
“자기의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을 아직 명백히 인정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올바로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섭리가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치 않으신다.”(교회헌장 16항)
삶이 참으로 고결하다면 그것은 의식으로 안 것이 아니고, 거절할 수 없는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실 정직한 노력으로 진리를 찾고 이것을 알게 되자마자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이미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지가 바로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은총의 현존인 것입니다. 성령은 불고 싶은 곳으로 붑니다(요한 3,8참조). 성령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를 만나 이를 충만하게 성취시킵니다.(p201)
진리는 인간이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선한 삶은 구원의 조건이며, 구원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p202)
궁극적으로 하느님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기에,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에게 협력하길 바라십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협력한다는 사실이 바로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을 웅변해 주는 것입니다.(p202)
하느님과 함께 인간은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 자신의 구원을 ‘창조’합니다. 인간의 신성화는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주목할 것은 인간이 하느님께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p202)
☞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으로 이루어 진다.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입니까? 참된 ‘인권’이란 무엇입니까?
창조주께서는 창조의 질서 속에서 인권을 이미 자명하게 새겨 놓으셨습니다. (p203)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부여하신 완전한 존엄성을 되찾아 주심으로써, 인권을 확증해 주셨습니다.(p203)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마르 10,17)라고 예수께 질문한 복음서의 젊은이가 보여 주었듯이, 우리는 항상 선과 악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p207)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인격체로서입니다. 인간이 그런 것처럼 하느님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인간을 하나의 인격체로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을 쾌락의 대상으로 취급할 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p208)
사랑의 계명은 인간을 단순한 쾌락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모든 행동을 거부하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그 이상을 요구합니다. 사랑의 계명은 인간을 인격체를 지닌 인간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합니다.(p208)
"주 예수께서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한 17,21-22) 하시며 성부께 기도하실 때 인간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시야를 열어 주시며, 하느님의 삼위일체와 사랑과 진리 안에서 결합된 하느님 자녀들의 일치 사이의 어떤 유사성을 시사하신 것이다. 이 유사성은 이 자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줌으로써만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음을 밝혀준다.“(사목헌장 24항)(p208-209)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계명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발견합니다.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이라는 분명한 표현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인격체라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가치를 지닌다는 원리를 발견합니다.(p209)
동시에 공의회는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합니다.(p209)
☞ 하느님도 인간을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다.
인간을 인격체로 받아들이는 것과 자신을 아낌없이 남에게 내어주는 두 측면은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북돋고 완성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남에게 내어 줌으로써 가장 완벽하게 자신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p209)
그리고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줌으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진리이며, 역사 속에서 많은 성인들과 이웃사랑의 영웅들이 받아들이고 실천해온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전통이기도 합니다.(p209)
성하께서 낙태를 합법화하려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반복해서 비난하셨던 데 대해, 몇몇 문화권과 특정 정파에서는 이를 ‘강박 관념’이라고 정의하면서 ‘인도주의적 근거’를 자신들의 무기로 삼아 정부로 하여금 낙태를 허용하게 만들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권리는 인간의 기본권입니다. 그럼에도 현대 문화 가운데 일부는 이 기본권을 ‘성가신’ 것으로 치부하면서 부인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권리입니다.(p211)
인간의 실존에 이토록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는 권리는 없습니다. 생명에 대한 권리는 태어나서 자연사를 맞을 때까지 누릴 권리입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 권리가 있습니다.”(p212)
임신과 태아의 문제는 아주 미묘하긴 하지만 명백한 것입니다. 임신 중절을 합법화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태아의 생명을 어른들이 임의로 선택할 수 있도록 법률로써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부당한 일이 있을까요? 아무 죄도 없으면서 스스로 방어할 힘이 없는 인간에 대한 생명권을 옹호하는 것, 곧 모든 선한 양심을 가진 이들에 대한 기본 권리를 다루는 이와 같이 중요한 문제를 간단히 ‘강박 관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p212)
문제는 종종 여성이 자신의 내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곧 자궁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태아에게 생명을 줄 것인지, 아니면 없애 버릴 것인지를 여성 자신이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p212)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매우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행하려는 일에 명백한 도덕적 악이 포함되어 있을 때, 더구나 그것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관련되어 있을 때, 선택할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p212)
이 계명에도 예외가 허용될 수 있을까요? 대답은 말할 나위도 없이, “아니오‘입니다.(p212)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임신된 태아는 절대로 불의한 공격자가 아닙니다. 태아는 따뜻한 환영과 도움을 기다리는, 스스로는 방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p213)
우리는 직접적으로 인권을 유린하고 개인과 가족의 생명뿐 아니라, 사회 자체에 근본적인 가치들을 완전히 파괴하게 만드는 양식들에 관용을 베풀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문화’라는 표현 속에 슬픈 진리가 들어 있지 않습니까? (p214)
책임있는 부모의 역할은 인간 사랑에 필수 조건이며, 또한 진정한 부부애의 필요 조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무책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은 책임이 낳은 열매입니다. 사랑은 진실로 책임성이 있을 때, 그 사랑은 진실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p214-215)
최고의 입법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시나이산에서,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할 도덕 규율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유대인 학살을 깊이 체험한 레비나스는 십계명의 이 근본 계명에 대해 주목할 만한 정식, 즉 ‘그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낸다’라는 철학적 명제를 내놓았습니다.(p216-217)
이 얼굴의 철학은 구약성서의 시편과 예언서들에서 발견되는데, 거기에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시편 27,8)이라는 언급이 자주 나옵니다. 인간은 그의 얼굴로 말하며, 특히 학대당하는 모든 이들은 얼굴의 표정을 통해서 “나를 죽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p217)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서조차 사형제도를 수월하게 인정해 버리는 일그러진 우리 시대의 한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p217)
“마리아여, 저는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Totus Tuus)라는 말은 성하께서 교황직을 맡으시면서 선택하신 좌우명입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께 더 초점을 맞추기 위해, 제가 어린 시절에 갖고 있었던 마리아 신심으로부터 다소 멀어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몽포르의 성 루이 덕분에, 저는 하느님의 어머니께 대한 진정한 신심이 실제로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고, 이것은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와 육화와 구원의 신비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p218-219)
그리스도의 탄생 예고로부터 베들레헴에서의 탄생과 갈릴래아의 가나 혼인 잔치, 골고타의 십자가,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에 이르기까지,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 안에 두신 새 하와이십니다. 구세주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p219)
마리아 신심은 신앙심의 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태도, 곧 여인으로서 한 여성을 향한 자세를 나타내 주기도 합니다.(p222)
여성에 대한 존중, 여성성의 신비에 대한 경탄, 그리고 구원에서 표현되었듯이 부부사랑에 비유한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랑, 이 모든 요소들은 교회의 신앙과 교회 생활에서 항상 있어 왔던 것들입니다.(p223)
성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는 외침으로 교황직을 시작하셨습니다.
1978년 10월 22일 저는 베드로 광장에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 의미는 그 말을 한 사람이 아니라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위로자 성령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p224-225)
당신 스스로 만든 것을 두려워 마십시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인간이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다는 두려움을 갖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여러분 자신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p225)
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진리 속에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의 가장 심오한 근거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요한 3,16)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후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사도들(루가 24,36 참조)과 여인들(마태 28,10 참조)에게 말씀하셨습니다. (p226)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를 통해 승리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승리가 언제나 마리아와 연결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p227)
사람의 의식은 지나가는 이 세상의 운명을 손에 쥐고 계시는 분, 죽음과 지옥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분(묵시 1,10 참조), 인간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이신 분(묵시 22,13 참조)이 존재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p228)
이분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 참조). 온전한 사람이 되신 사랑이며, 십자가에 못박혀 주었다가 부활하신 사랑이며, 사람들 가운데에 쉼없이 현존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사랑이며, 친교의 무한한 원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만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확신을 주실 수 있습니다.(p228)
복음은 분명히 힘든 요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당신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복음에 대한 어떤 환상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면에 그분은 그들이 언제라도 믿음을 포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적 외적인 모든 형태의 어려움에 그들을 준비시키는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p228)
그러므로 그분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분이 요구했던 바를 무효로 만들려고 하신 말씀은 분명히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 말씀을 통해 그분은 복음의 온전한 진리와 복음에 담긴 요구들을 확인하시는 것입니다.(p228-229)
그러나 그분은 당신의 요구가 인간의 능력을 절대로 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만약 인간이 능력을 갖고 이런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하느님께서는 필요한 힘을 은총으로 주실 것입니다.(p229)
복음이 도덕적인 삶을 상기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이 구속과 구원의 증거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복음의 윤리대로 살아갈 수 있음을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공한 인생이란 바로 복음의 윤리대로 살아가는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p229)
☞ 그리스도인에게 성공한 삶이란 복음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복음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 인간 모두를 긍정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이 원하셨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며, 하느님의 능력의 빛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루가 18,27)라고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p229)
인간에게 부과하신 도덕적 요구들과 구원을 약속하는 사랑의 요구, 곧 은총의 선물은 하느님 안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p229)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이 예정해 놓으신 일을 인간이 완성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내 멍애와 짐은 편하고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1,30 참조). (p229)
☞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되시길 간절히 바라신다. 또한 그 길은 편하고 가볍다고 말씀하신다.
희망의 문턱 앞에 멈추어 서지 않고 인도를 받아, 그 문턱을 넘어서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p229)
☞ 희망의 문턱을 넘어 구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희망은 구원으로 완성된다.
‘희망의 문턱’을 넘어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재발견하는, 이런 모든 일이 정말로 가치있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할까요?
시편 작가는 “주님을 두려워함은 지혜의 시초”(시편 111,10)라고 합니다. 성서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지니도록 하는 꾸준한 권고를 담고 있습니다. (p231)
지혜의 시작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사 중 으뜸가는 것은 바로 지혜입니다. (p232)
성서를 통해 우리는 지혜의 근본인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노예가 갖는 두려움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로서의 두려움이지 노예의 두려움은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진실로 현존하시는 세상, 곧 하느님의 지혜가 있는 세상에서는, 오로지 자녀로서의 두려움만이 존재합니다.(p232)
이 두려움에 대한 진정하고 완전한 표현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는 일에 사람들이 두려워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를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 해방되었습니다. 사랑은 모든 선(善)중 으뜸가는 선입니다. 성 요한은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몰아낸다고 하였습니다.(1요한 4,18 참조) (p232)
원죄는 하느님의 단호한 계명을 어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계명 속에 표현된 하느님의 의지를 어기는 것입니다. 원죄는 창조된 세상에 퍼져있는 부성의 광채를 파괴하고, 사랑이신 하느님께 대한 진리를 의심하며, 인간을 오로지 주인과 종의 관계에만 놓으려고 하면서 부성을 폐기시키려고 합니다.(p233-234)
그 결과로 주님은 세상과 인간을 그의 힘으로 지배하는 질투의 신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께 대항하여 싸우도록 자극을 받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노예가 된 인간은 자신을 노예로 삼은 주인을 몰아내려고 대항합니다.(p234)
현대인들이 자신과 세상, 타인, 지상의 권력, 억압적인 제도 등에서 해방되려면, 또 신자들이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전능하신 힘’ 앞에서 노예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인간의 자신의 마음 속에 지혜의 시작이신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두려움을 간직하고 키울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p234)
☞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꾸준하게 이어가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복음의 구원하는 힘’입니다. 이것은 건설적인 두려움이지 결코 파괴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책임감을 갖도록 하고, 책임 있는 사랑에 이끌리도록 합니다. 이것은 거룩한 남자와 여자들을 창조하며, 세상의 미래는 궁극적으로 이들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것입니다.(p234)
3. 이 책을 읽고 앞으로 내 삶에서 실천할 것
- 자신을 내어주는 일에 인색했다. 내가 가진 것을 내어주는 일에, 연습하고 노력하겠다.
첫댓글 요한 바오로2세 교황님의 시성을 준비하면서 교황님이 쓰신 책을 읽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마음지기님 수고하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묵상을 했습니다. 사순시기 잘 보내시고 기쁜 부활 맞이 합시다. 감사합니다.
명금당님도 기쁜 부활 맞으시기 바랍니다..^^*
"노예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인간이 자신의 마음속에 지혜의 시작이신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두려움을 간직하고 키울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사순절의 막바지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구원을 주시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열심히 올려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긴 글 읽느라고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