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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반도 한국의 비밀(7-1)
문헌과 사료에 근거한 조선은 지금의 한반도와는 너무나 다른 상황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한韓민족의 유래와 대륙조선의 실제를 밝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가) 조선의 북쪽에 사막이 있다
-계산기정(薊山紀程) 제5권 부록(附錄) 도리(道里), 계산기정(薊山紀程) 제2권,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중종실록 59권 22년 기록, 해봉집(海峯集) 권지(券之)2 칠언사운(七言四韻) 송김안변(送金安邊), 상촌집 9권, ‘동사강목 제8상갑신 고려 숙종(肅宗) 9년부터, 병인 고려 인종(仁宗) 24년까지 43년’의 기록, 연원직지(燕轅直指) 제6권, 담헌서(湛軒書) 외집 8권(外集 卷八) 연기(燕記) 경성기략(京城記略),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제2편 오화연필(五花沿筆) 을묘년(1855, 철종 6) 11월[17일-27일] 25일(갑신)
이상은 사막과 낙타와 연관된 기록들이다.
-자료를 분석해 보면 청(淸)의 북경(北京)은 사막지대에 있었다.
오늘날의 북경은 사막지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북경은 가짜일수 밖에 없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청의 북경이 사막에 있었다는 것은 사서(史書)에 대한
오역(誤譯) 또는 잘못된 기록이라 한다. 과연 그럴까?
청(淸)의 북경(北京)을 찾기 위한 그나마 가장 좋은 자료는 조선의 사신들이
남긴 자료일 것이다.
계산기정, 경자연행잡지는 조선 후기의 기록들이고, 책의 저자도 서로 다른 사람이다.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였다."라고 동일한 기록을 남겼다.
지금의 대륙의 상황과는 전적으로 다른 기록이다.
현재의 대륙은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지금의 북경까지는 모래땅이 아닌 거의
초원지대가 주를 이룬다.
지금의 대륙이 사막화가 많이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산업이 발달되면서
환경공해로 인한 환경재앙의 결과이다. 이 책들이 기록된 시기가 약 250년 전후이다.
계산기정, 경자연행잡지의 기록처럼 아주 가볍게 부는 미풍에서도 일반 평지의 모래가
앞을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연기나 안개가 낀 것처럼 되고 사람의 피복, 모자,
얼굴에 모래가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고, 옛적의 가마(=교자)안에서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언덕처럼 수북이 쌓이고 북경과 500리의 거리에 있는 사하역의 상황은
모래가 말배까지 묻히고, 말의 배 까지 묻히는 모래지역이 시문에 언급된 것처럼
30리에 달한다.
위의 기록을 보면 압록강 건너서부터 모래지역 즉 사막지역인데 북경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사막의 어려움이 가중되는데 그 여정 중에 요동, 산해관이 아주 심하며
더더욱 심한 지역은 영평부의 사하역으로 말의 배까지 모래가 묻히는 지역이
30여리에 달한다고 한다.
또 연원직지(燕轅直指), 담헌서(湛軒書),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의 공통된 기록은 북경(北京)과 북경 인근의 토질이
검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북경은 사막지대에 있는데 그 모래의 특징은
검은빛의 토양(회색빛) 토양을 지닌 지역이다.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서 나타난 북경은 지질적으로 세계적으로 아주 드문
아주 독특한 특질의 토양을 가지고 있다. 즉 북경은 검은 모래사막(회색빛)의 토양이다.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은 위의 기록에서 전하는 어떠한 조건도 만족하지 않는다.
또한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서 나타난 북경은 연원직지(燕轅直指), 담헌서(湛軒書),
연행일기(燕行日記)의 기록처럼 겨울에도 춥지 않다고 한다.
연원직지(燕轅直指), 담헌서(湛軒書), 연행일기(燕行日記)의 저자는 각기 다른
사람이지만 서로 공통된 현상들을 기록하고 있다.
연원직지(燕轅直指), 담헌서(湛軒書), 연행일기(燕行日記)의 저자는 북경의 겨울이
마치 남방지역의 기후와도 같다고 말했다.
이는 사막지방의 아주 전형적인 특징이다. 위의 기록에서 북경 지역에 하루 종일
눈이 와도 그 다음날에는 눈이 흔적조차 없다고 한다. 지금의 북경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중앙아시아 등 사막의 겨울 날씨가 온난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을 근거해서 보면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은 가짜이다.
또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의 기록을 보면 북경(北京)에는 나무가 귀하므로
불은 모두 석탄을 쓴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리고 사막을 대표하는 동물인 낙타가
나오는데 석탄이 매우 무거우므로 꼭 낙타를 사용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많은 가축 중에 하필이면 왜 낙타를 이용했을까?
사막지대에서 사막에 적응된 동물인 낙타가 물자수송에 가장 적격이었다는 그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극히 당연한 것이므로 즉 북경은 사막지대에 있었다는
증거이다.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의 기록에 북경(北京) 부근에는 ‘수백 리 안에 나무가 있는
곳이 없고 농사로 수수를 많이 심어 나무를 대신하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위의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북경과 그 부근이 사막지역이었다.
또한 낙타는 혹한의 지역에서 살수 없는 동물이다.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北京)은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서 나타난 위의 사실 그
어느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한다. 즉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은 허구의
북경(北京)이라는 사실이 증명된다. 위의 기록들에서 역사상의 북경(北京)과
조선의 북쪽은 사막지대에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나) 조선에 총령이 있다
심전고(心田稿) 제2권 유관잡록(留館雜錄) 거등만록(車燈漫錄) 등에 효람(曉嵐)
기윤(紀昀)이 일찍이 황하의 물 근원을 가서 찾아보고 하원기(河源記)를 지어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곤륜(崑崙)은 곧 지금의 화전(和闐 신강성 지역)의 남쪽 산인데 황하의 물이 여기서 나온다. 원 세조(元世祖)가 도십(都什)을 보내어 찾았으나 겨우 성수하(星宿河 운남성에 있음)에 이르러 그치었다. 그런데, 지금은 곧바로 발원처(發源處)에 이르러 그 땅을 직접 내 눈으로 보았다.’ 장건(張騫)이 이른 데는 서역 36국인데, 무릇 그 범위가 2만 리로서 지금은 전부 중국의 군현에 들어 신강(新彊)이라 부른다. 면적의 크기가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다. 서쪽은 돌궐(突厥)을 지나가고 서남쪽은 토번(吐蕃)에서도 2, 3천 리를 더 나아간다. 신독(身毒)은 곧 인도(印度)이며, 현도(懸度)는 피산(皮山)에 있어 판도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감숙(甘肅)은 오래 전부터 내지(內地)이고 약수(弱水), 흑수(黑水)는 함께 감숙 내지에 있다.
-현재의 역사에서 총령지역을 히말라야 산맥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청조(淸朝)의 대학자 효람 기균은 총령과 관련된
감숙(甘肅) 지역에 약수(弱水), 흑수(黑水)가 있다고 했다.
현재의 감숙성 지역에 흑수, 흑룡강이 있는가?
또한 역사에서 흑룡강의 북쪽에 백야현상 이라는 자연현상이 존재하며
러시아 민족이 살고 있다고 했다. 현재의 감숙지역에 백야현상이 존재하며
러시아 민족이 살고 있는가?
또한 효람 기균은 신강(新彊) 지역의 강역이 연무(延袤) 2만리(二萬里)라 했으며
그 강역 안에 돌궐(突厥), 토번(吐蕃), 인도(印度), 현도(懸度) 등 장건(張騫)이 이른
데는 서역 36국이 있다고 했다.
현재의 신강(新彊) 지역이 연무(延袤) 즉 동, 서로 1만 리, 남북으로 1만 리의 강역인가?
또한 신강 지역 안에 돌궐(突厥), 토번(吐蕃), 인도(印度), 현도(懸度) 등 장건(張騫)이
가 본 서역 36국이 있기나 한가? 이러한 논리와 근거로 현재의 ‘히말라야=총령’설은
엄청난 모순과 오류인 것이다.
해국도지(海國圖志) /卷030 西南洋○中印度沿革(原無今補輯)
條支國臨西海 案:此西海謂地中海,魏書(謂此西渤海也)
(조지국은 서해에 임해 있다. 살펴 보건데 이 서해는 지중해를 일컫는다. 이는 위서에서 말하는 서 발해이다.)
해국도지(海國圖志) /卷003 至《北魏書》則分蔥嶺以東、流沙以西為一域,蔥嶺以西、海曲以東為一域,者舌以南、月氐以北為一域,兩海之間、水澤以南為一域,州居部畫,綱紀秩然。
其言條支,西渡海曲一萬裏,為大秦國,而指其海旁出,與中國渤海東西相直,則明知為地中海,非西洋大海。
(북위서에 의거하여 구분해 보면 총령이동은 유사 이서가 한 지역이 되며, 총령 이서는 하곡 이동이 한 지역이 되며, 자설 이남은 월저(월지) 이북이 한 지역이 되며, 양해의 사이는 수택이남이 한 지역이 되며 이 지역들에서 살고 있는 부족들의 모습은 기강이 있으며 질서가 정연하다. 그 말에 따르면 조지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해곡 1만 여리의 대진국이 되며 이는 그 바다의 측면으로 나오는 것을 가리키며 중국과 발해는 동서로 맞닿아 있어 이는 분명 지중해임을 알 수 있으며 서양대해가 아니다.)
해국도지(海國圖志)/卷074 今歐羅巴、利未亞之山,皆發脈蔥嶺,邐迤而盡於西海。
(지금의 유럽, 아프리카의 산은 다 총령에서 발원하여 그 줄기가 구불구불 이어져 서해에서 끝난다.)
-효람 기균이 말한 감숙 지역은 총령과 관련된 지역이다.
해국도지의 기록에 의하면 총령이 유럽, 아프리카의 근간이 되는 산이라 했다.
현재의 히말라야 산이 유럽과 아프리카의 근간이 되는 산 인가?
또한 해국도지의 기록에서 중국과 발해가 동서로 맞 닿아있고 또 이 발해가
지중해라 기록하고 있다. 절대로 현재의 히말라야 산을 말하는 기록이 아닌 것이다.
현재의 지중해와 관련된 코카사스 산을 말하는 기록인 것이다.
즉 코카사스 산맥이 옛날의 총령인 것이다. 이 총령이 조선에 있었다.
-숙종 23년 정축(1697,강희 36) 6월3일(신해), 숙종 32년 병술(1706,강희 45) 3월25일(계미), 숙종 37년 신묘(1711,강희 50) 5월2일(경인), 해봉집(海峯集) 권지(券之)2 칠언사운(七言四韻) 안변가학루운(安邊駕鶴樓韻), 사가시집 제21권 시류(詩類), 길성 김 태수의 ‘시에 답하다’ 2수 이상,
(다) 조선의 강역은 만리지국(萬里之國)이다
-세조실록 7권 3년의 기록, 세조실록1권 1년의 기록, 학봉일고 부록 제1권 만원서(輓轅書) [유생(儒生) 이대기(李大期) 등], 고대일록 제1권 임진(壬辰, 1592) 가을 9월, 동계집 연보 문간공 동계 선생 연보(文簡公桐溪先生年譜).
-어떤 자가 말하길 우리의 역사에서 말하는 만리지국(萬里之國)의 의미는
한반도의 해안선의 길이를 돌고 돈 길이의 총합이라 한다.
그런데 실록 등에서 역사의 강역을 말할 때 폭원(幅員)이라 했다.
폭원은 가로의 길이를 말한다.
또 금사(金史) 및 요사(遼史)에서 자신들의 강역을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 표현했다.
어떤 자의 주장대로 라면 금나라나 요나라나 한반도 크기만 한 강역을 가진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라) 조선은 천자의 수도를 가지고 있다
다산시문집 제9권 책문(策問) 의 글을 보면
‘..,황제(皇帝)의 도읍(都邑)은 동경(東京)ㆍ서경(西京)ㆍ남경(南京)ㆍ북경(北京)이 있는데, 그 웅거한 형세가 어느 곳이 가장 나은가...’ 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국조보감 제10권 세조조(世祖朝)의 기록을 보면 ‘양성지가 상소하여 여러 조항의 정책을 진달하였다. 그 내용은 1.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는 일, 2.한성을 상경(上京)으로, 개성(開城)을 중경(中京)으로, 경주(慶州)를 동경(東京)으로, 전주(全州)를 남경(南京)으로,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함흥(咸興)을 북경(北京)으로 정하는 일..,’이라 했다.
(마) 조선의 임금은 천자(天子)의 관모(통천관(通天冠))를 사용했다
-승정원일기 영조 즉위년 갑진(1724, 옹정2) 9월 30일(경오)맑음, 현종 즉위년 기해(1659,순치 16) 5월8일(무진) 오시에 대렴을 하다.
-현재의 역사에서 조선이 천자(天子)의 관모인 통천관(通天冠)을 사용한 시기가
대한제국 때 이다. 그러나 실록에서는 대한제국 그 이전에 천자(天子)의 관모인
통천관(通天冠)을 이미 사용했다.
(바) 조선 임금은 천자의 어복(御服)을 입었다
-세조 12년 병술(1466,성화 2) 3월6일 (정미), 사가시집 제21권 시류(詩類), 사가시집보유 제1권 시류(詩類) 동문선(東文選)의 시, 사가시집 제31권 시류(詩類), 사가시집 제52권 시류(詩類).
-사극이나 조선 임금의 초상화의 자색(紫色) 계열의 임금 복식은 거짓이다.
위의 사가시집 31권의 기록에서 사가시집의 저자는 울금(鬱金)이 썩어 한스러워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울금(鬱金)이란 한약재이면서 그 당대 황색(黃色)계열의 염료로
임금의 옷을 황색으로 염색하여 바치려 했는데 이 울금(鬱金)이 썩어서 이를
한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대만(臺灣)의 국립대만예술교육관의 자료를 보면
옛날에 울금(鬱金)의 뿌리로 염색하여 황제(천자)의 옷을 만든다고 한다.
이 울금(鬱金)의 색깔이 자황색(赭黃色)이라 한다.
울금(鬱金)으로 염색한 임금의 복식은 울금포(鬱金袍), 자황포(赭黃袍)라 하며
줄여서 자포(赭袍)라 하기도 한다. 여러 고문헌에도 자포(赭袍), 자황포(赭黃袍)는
천자(天子)를 말하는 것이라는 기록들이 많다. 조선의 임금은 이런 천자의 복식을 입은
그 당대의 진정한 천자였던 것이다.
(사) 조선은 천자(天子)의 사당을 가지고 있다
문헌-난중잡록 2(亂中雜錄二) 임진년 하 만력 20년(선조 25년(1592년), 난중잡록 4(亂中雜錄四) 경자년 하 만력 28년, 선조 33년(1600년), 다산시문집 제22권 여문(儷文) 양청계(梁靑溪) 유사시 서(遺事詩序).
난중잡록 2(亂中雜錄二)와 다산시문집 제22권의 기록은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인데
조선의 종묘사직이 구묘(九廟)임을 기록, 청음집 제 13 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지천(遲川)이 지은 시의 운을 차운하다,
순조실록 6년 병인(1806, 가경 11) 10월 22일(을미), 선조(1590, 만력 18) 4월 1일(임신),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2월 20일(을사), 광해군 14년 임술(1622, 천계 2) 5월 3일(무술),
효종 2년 신묘(1651, 순치 8) 6월 12일(정사), 숙종 15년 기사(1689, 강희 28) 7월 18일(임자), 숙종 15년 기사(1689, 강희 28) 7월 25일(기미), 선조실록 51권 27년(1594년)의 기록,
난중잡록(亂中雜錄) 계사년 하, 기축록(己丑錄) 하의 기록 외 다수의 기록.
-세종실록 11년 기유(1429, 선덕 4) 4월 7일(임오) 근정전에 나아가 책문을 내어
선비들을 시험하다의 기록을 보면
‘옛날에 천자(天子)는 칠묘(七廟)를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오묘(五廟)를 제사하고, 대부(大夫)는 삼대(三代)만 제사하고, 관사(官師)는 이대(二代)만 제사하고, 서민(庶民)은 일대(一代)만 제사하는 것이 예경(禮經)에 나타나 있으며 국가에서도 따르는 바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에 의하면 천자(天子)는 칠묘(七廟)를,
제후는 오묘를 제사한다고 했다.
유교적 군주제도에 있어서 법치 질서의 근간인 예경(禮經)=예기(禮記)의 기록을
토대로 한 기록이며 태조실록에서는 예조(禮曹)에 부탁하여 논의하여 일정한
제도로 삼겠다고 했으며, 세종실록에서는 예경(禮經)=예기(禮記)에서 말하는
질서를 국가에서도 따르는 바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껏 배워왔던 역사 지식을 토대로 보면 조선은 소위 명(明)나라에
제후로서 사대를 한 나라이므로, 칠묘(七廟)의 종묘사직이 아닌 오묘(五廟)의
종묘사직을 가진 나라이어야 한다. 그러나 위의 언급한 문헌을 보면
조선은 천자(天子)의 사당인 칠묘(七廟) 또는 칠묘(七廟)의 변형인 구묘(九廟)를
가진 나라라 기록하고 있다.
즉 조선이 천자국(天子國) 이었다는 증거의 기록인 것이다.
(아) 조선 임금의 죽음은 천자(天子)의 죽음이다
-단종 1년 계유(1453,경태 4) 4월23일(경술), 상촌선생집 부록2 유제문(諭祭文), 연산군 1년 을묘(1495,홍치 8) 2월28일(임오), 명종 22년 정묘(1567,융경 1) 5월21일(을해), 숙종 9년 계해(1683,강희 22) 12월28일(을축), 영조 즉위년 갑진(1724,옹정 2) 9월22일(임술) 순조 3년 계해(1803,가경 8) 12월28일(기축)
-천자(天子)가 죽으면 붕(崩)이라고 하고, 제후는 훙(薨)이라고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배워온 지식으로 조선은 제후국이므로 훙(薨)이 맞다.
그러나 위의 기록은 조선의 임금의 죽음에 대해 붕(崩),천붕(天崩)이라 했다.
즉 조선의 임금들이 천자였다는 것이다.
황제(皇帝)의 죽음에 대해 높임말로 선어(仙馭), 안가(晏駕)라고 하며
왕이나 왕족이 죽으면 훙서(薨逝), 훙거(薨去)라고 한다.
황제(皇帝)의 죽음에 대해 높임말로 昇遐(승하), 登遐(등하), 上賓(상빈), 崩逝(붕서),
天崩(천붕), 禮陟(예척), 陟方(척방) 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조선 임금의 죽음에 대해 왕이나 왕족이 죽으면
훙서(薨逝), 훙거(薨去)라는 용어와 더불어 천자의 죽음을 말하는
선어(仙馭), 안가(晏駕), 上賓(상빈), 승하(昇遐), 천붕(天崩) 등의 용어가 무수하게
등장 한다.
즉 조선의 임금들은 천자들이었으며 조선왕조실록은 천자와 제후의 역사가 뒤섞인
역사이다.
혹자는 말하길 조선에서 황제의 죽음에 대해 붕어(崩御),붕서(崩逝)라 하는데
제후 왕의 죽음에 대해 天崩(천붕)이라 한 것은 ‘소중화(小中華)의식이나
모화(慕華)사상에 따른 것’으로 본다고 했다. 이는 말도 되지 않는 말이다.
진정으로 소중화, 모화사상을 가졌더라면 유교질서의 가치관에 따라 표본인
예기(禮記)의 기록대로 천자의 신하로서 그 시대는 질서를 절대로 순종해야만 하는
시대였다.
(자) 조선은 임금의 신하들 중에 왕작(王爵)을 가진 신하가 있다
-중종 5년 경오(1510,정덕 5) 8월18일(신축), 명종 8년 계축(1553,가정 32) 3월14일(경인), 선조 27년 갑오(1594,만력 22) 12월4일(정미), 선조 32년 기해(1599,만력 27) 4월4일(계축), 경종수정실록 1년 신축(1721,강희 60) 12월6일(임술).
-지금껏 배워온 역사에서 조선의 임금은 명조(明朝)이나 청조(淸朝)의 천자(天子)에게
왕작(王爵)의 작위를 받은 제후이다. 그런데 실록에서는 조선의 임금의 신하들 중에
왕작(王爵)의 작위를 가진 신하들이 나온다.
지금껏 배워왔던 역사지식을 바탕으로 보면 조선의 임금은 상국에서 제후로 봉작을
받는 왕작(王爵)을 받는 신분인데 전제군주 시대에 제후가 자신의 신하에게 왕작을
하사할 수 있을까? 이는 절대로 타당치 않다. 즉 조선의 임금이 천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지방명(地方名)+군(君)이 왕작과 같다고 했다.
남양군(南陽君), 흥해군(興海君), 달성군(達城君)은 왕작과 같은 신분으로 이들의 그
실체는 지방의 제후인 것이다.
(차) 조선의 임금은 신하에게 천자(天子)만이 할 수 있는 제후의 작위를 주고 그
제후에 걸 맞는 봉토(封土)를 주었다.
조선의 임금은 신하에게 천자(天子)만이 할 수 있는 철권(鐵券)을 주었다.
-선조 40년 정미(1607,만력 35) 12월28일(병술), 선조 40년 정미(1607,만력 35) 12월28일(병술), 선조 41년 무신(1608,만력 36) 1월3일(신묘), 숙종 6년 경신(1680,강희 19) 8월30일(병술), 숙종 7년 신유(1681,강희 20) 5월21일(계유),
경종 3년 계묘(1723,옹정 1) 3월13일(임진), 영조 4년 무신(1728,옹정 6) 7월19일(무진), 영조 14년 무오(1738,건륭 3) 2월14일(병신), 기축록상(己丑錄上) 황혁(黃赫), 택당선생집 제7권 교서(敎書) 정사공신 능성군 구굉에게 내린 교서[敎靖社功臣綾城君具宏書]
-고종 1년 갑자(1864, 동치3) 8월 2일(경오)비의 기록을 보면,
‘제후는 천자에게서 봉토(封土)를 받는데, 천자가 대사(大社)에서 봉하는 방위의
색인 흙을 흰 띠[芧]로 싸서 주므로 이것을 모토(茅土)라 하며, 제후가 받은 흙을
국도(國都)에서 사로 삼습니다.’라고 했다. 모토(茅土)라는 것은 천자(天子)가
제후(諸侯)에게 내리는 봉토(封土)를 의미 한다.
이는 일개의 제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위의 선조, 숙종, 경종, 영조실록과 기축록, 택당선생집의 기록에서
조선의 임금이 신하들에게 천자(天子)가 제후(諸侯)에게 내리는 봉토(封土)를 의미하는
모토(茅土)를 하사 한다.
위의 경종실록, 영조실록은 더욱더 황당한 기록이 있다.
기록을 보면 신하에게 철권(鐵券)을 주었다고 했다.
이 철권(鐵券)이라는 것의 이칭으로 단서철권(丹書鐵卷),금서철권(金書鐵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천자(天子)가 제후(諸侯)에게 세습적으로 면죄권을 주는 증서로,
이 경우는 매우 드물고 제후로서의 관작이나 봉토, 봉읍을 준다는 증표이다.
이러한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조선의 임금이 진정한 천자(天子)였다는 것이다.
(카) 실록에서 조선은 만승지국(萬乘之國)=천자국(天子國)이라 기록했다
-경세유표 제7권 지관 수제(地官修制) 전제(田制) 9, 석담일기 하권(石潭日記卷之下) 만력 구년 신사(萬曆九年辛巳) 1581년(선조 14), 약천집 제13권 의(議), 용재총화 제1권, 우계집 제3권 장소(章疏) 2 선조, 율곡선생전서 제15권 잡저(雜著) 동호문답(東湖問答),
태종 13년 계사(1413,영락 11) 9월9일(을유), 태종 18년 무술(1418,영락 16) 8월9일(병술), 세종 31년 기사(1449,정통 14) 2월9일(경신), 인조 14년 병자(1636,숭정 9) 9월22일(계해) , 효종 6년 을미(1655,순치 12) 5월11일(갑오) , 현종개수실록 1년 경자(1660,순치 17) 7월16일(기사).
-상촌선생집 제51권 구정록 상(求正錄 上)의 기록을 보면
‘1봉(封)은 사방 3백 66리로서 합계 10만 정이니 최소한 병부(兵賦)로 6만 4천 정ㆍ융마 4천 필ㆍ병거 1천승을 낼 수 있는데, 이는 제후의 봉토 가운데 큰 것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를 일컬어 ‘천승지국(千乘之國)’이라고 한다. 천자의 기내(畿內)는 사방 1천 리로서 합계 1백만 정이니 최소한 병부로 64만 정ㆍ융마 4만 필ㆍ병거 1만 승ㆍ융졸(戎卒) 70만 인을 낼 수 있는데, 이런 까닭에 천자를 ‘만승지주(萬乘之主)’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네이버 백과에 만승(萬乘)의 의미를 보면 ‘승(乘)은 병거·전차(戰車)의 뜻이다.
1만 대의 병거를 갖출 수 있는 광대한 영토를 만승지국(萬乘之國)이라 하며,
그 영주를 만승지군(萬乘之君)이라 하였다.
중국 주(周)나라 때의 천자(天子)는 자기 직할영토에서 1만 대의 병거를 갖추어야
하는 제도가 있었으므로 만승은 천자의 호칭이 되었다.
천승(千乘)은 병거 1,000대를 갖출 수 있는 제후라는 뜻이며,
그 영지를 천승지국(千乘之國)이라 하였다. 백승지가(百乘之家)는 병거 100대를 갖출
수 있는 가문이라는 뜻이며, 경(卿)·대부(大夫)의 지위를 가리켰다.’라고 되어 있다.
병자호란 그 당대 혹은 그 후대의 기록인 인조실록, 효종실록, 현종실록,
남구만의 약천집,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제7권의 기록에서 이 당대는 소위
청(淸)때이며 조선은 청에 항복이라는 굴욕을 겪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이 당대의
조선은 만승의 나라 즉 만승천자의 나라라 기록하고 있다.
하늘의 해가 둘 일수는 없다. 전제군주 시대에 조선이 사대를 하는 나라가 명이며
청인데 실록에서 조선은 스스로가 만승지국=천자국이라 기록하고 있다.
(타) 조선의 경기도 면적은 동.서 1천리요 남.북 1천리의 면적이다
-고종 16년 기묘(1879, 광서5) 8월 10일(신해) 맑음, 삼봉집 제1권 육언절구(六言絶句) 신도 팔경의 시를 올리다[進新都八景詩]
-상촌집의 기록을 보면, 1봉(封)이 10봉이 되면 기(畿)이니 1기는 사방 1천리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천자의 기내(畿內)는 사방 1천 리라 했다.
또 1봉(封)은 사방 3백 66리로 제후의 봉토 가운데 큰 것에 속하는 것이라 했다.
즉 천자의 기(畿)는 제후의 1봉(封)이 10개가 모인 것으로 이 기(畿)는 사방
1천리이며 이것을 일컬어 기봉(畿封), 기전(畿甸)이라 하며 또 다른 말로 경기(京畿)라
하며 또 다른 말로 중국(中國)이 되는 것이다.
기록에서 이러한 경기도의 면적이 동.서 1천리, 남.북 1천리의 면적이라 기록했다.
이를 한반도에 대입해 보면 경기도의 면적이 한반도의 1/3이나 되는 크기이다.
(파) 조선은 동번(東蕃), 서번(西蕃), 남번(南蕃), 북번(北蕃)의 번후(蕃侯)를 두었다
-숙종 33년 정해(1707,강희 46) 2월30일(계축) , 영조 5년 기유(1729,옹정 7) 11월2일(임신), 숙종 24년 무인(1698,강희 37) 7월25일(정유), 영조 11년 을묘(1735,옹정 13) 9월9일(을사),
선조 30년 정유(1597,만력 25) 1월22일(계축), 영조 9년 계축(1733,옹정 11) 12월22일(기사), 숙종 39년 계사(1713,강희 52) 윤 5월10일(병진), 경종 3년 계묘(1723,옹정 1) 12월15일(경신).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은 명조(明朝), 청조(淸朝)에 사대를 하는 나라이며
명조(明朝), 청조(淸朝)에서는 조선을 동번(東藩)이라 일컫는 기록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참으로 어이없게 일개의 제후국 조선은 동번, 서번, 남번, 북번을 둔 천자국
시스템의 국가이다. 즉 조선은 동,서,남,북의 번후를 둔 천자국 이었다는 것이다.
(하) 조선은 천자(天子)의 관학(官學)을 두었다
-고종 13년 병자(1876, 광서2) 8월 1일(기축) 맑음, 점필재집 시집 제17권 시(詩) 인일 조강을 마친 뒤에 중사가 선사주를 승정원에 전해 주다[人日朝講後中使傳宣賜酒於承政院],
정조 15년 신해(1791,건륭 56) 11월7일(무인), 고종 3년 병인(1866, 동치5) 3월 10일(기사) 맑음 영돈녕부사 김좌근에게 궤장을 하사하고 내린 교지, 우계연보보유 제3권 문묘에 종향할 때에 내린 교서(敎書) [제학(提學) 이민서(李敏敍)]
-조선의 학문적인 특징으로 사학(四學) 또는 오학(五學)이 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천자는 사학(四學)을 설치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은 사학(四學) 또는 오학(五學)이 존재한 국가였다.
오학(五學)편제는 주대(周代)에 성립된 제도로서 중학(中學)은 벽옹(璧=辟雍),
남학(南學)은 성균(成均), 북학(北學)은 상상(上庠), 동학(東學)은 동서(東序),
서학(西學)은 고종(瞽宗)을 말한다.
여기서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에 의하면 ‘벽옹(璧=辟雍)은 천자(天子)의 학교라 한다.
점필재집, 고종실록의 기록에서, 벽부(璧府)는 벽옹(璧=辟雍)을 의미하는 기록으로 즉
천자(天子)의 학교, 중학(中學)을 의미’하는 기록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대한제국이 처음으로 황제국이 된 시기가
1897년인데 고종실록을 보면, 그 시기 이전에 조선은 천자의 학교
벽옹(璧=辟雍)이 있었다. 또한 점필재집의 저자 김종직은 조선 중기 때의 사람이다.
이 당대에도 천자의 학교 벽옹(璧=辟雍)이 있었다.
즉 조선이 천자국=황제국 이었다는 증거의 기록인 것이다.
고종실록의 주석에서 천자의 학교 벽옹(璧=辟雍)을 성균관이라 주석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벽옹(璧=辟雍)은 중학(中學)이며 성균은 남학(南學)이다.
또 위의 기록 정조실록에서 상상(上庠)의 유생은 북학(北學)의 유생을,
고종실록에서 말한 동서(東序)는 동학(東學)을, 우계집에서 말한 고종(瞽宗)은
서학(西學)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두다 조선의 학교를 말하는 것이며 이 학교는
조선의 동, 서, 남, 북, 중의 그 방위별 학교를 둔 것은 동, 서, 남, 북의 번후를 둔
것과 무관치 않다. 조선의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四方)의 번후와 그 방위별 학교를
두었고 그 학교는 각 번후 지역 학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것이 조선의 붕당정치의 근간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거치면서
전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동, 서, 남, 북인의 사색당파라는 아주 배타적인
정치 행태로 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