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은 민족의 것이지 이념론자들의 소유가 아니다
-남부군총사령관, 이현상
智異風雲堂洞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伏劍千里南州越 검을 품고 남주로 넘어오길 천리로다
念向時非祖國 언제 내 마음 속에서 조국이 떠난 적이 있었을까
胸有萬甲心有血 가슴에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남부군 총사령관 李鉉相이 남긴 漢詩
이현상의 생애
이현상은 1905년 9월 27일 충남 금산군에서 태어났다. 1925년 4월 서울의 중앙고보에 편입하나 4학년때 6·10만세운동에 참가하여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중도 퇴학당했다. 1928년 4월 보성전문학교 법과 1학년에 입학하였다. 고려공상청년회의 표면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
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9월초 이른바 ‘학생공산당’사건으로 5년간의 옥살이를 한다. 그는 1933년부터 서울지역에서 경성트로이카를 조직하여 당재건 운동을 벌이다가 1934년 메이데이 투쟁으로 검거되어 4년간의 옥살이를 한다. 1939년 정월 이현상은 이관술, 이순금, 박헌영 등과 더불어 당재건 운동조직인 경성콤그룹을 조직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현상은 서울에 올라가 박헌영 등과 더불어 8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발기하여 9월 조선공산당을 조직했다. 그는 조직국을 맡아 조선공산당의 하부조직과 노동조합, 농민조합 등을 만드는데 힘을 쏟았다. 또한 그는 1946년 2월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에도 참여했다. 같은 해 결성된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및 간부부장직 당직을 맡고 기관지 ‘노력인민’의 인사부장이 되었다.
1948년 2월7일 단선반대 구국투쟁 직후, 박헌영의 지시로 모스크바에 유학하려고 했으나 김일성계인 이상조들의 ‘지도자 논쟁’사건으로 소련유학은 좌절되고 강동학원에서 3개월간의 군사훈련을 받고 같은 해인 48년 9월경에 지리산에 나타난다. 빨치산 대장으로서 이현상은 모든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흠앙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부대를 지휘하고 전투를 치러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남부군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입산한 이래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전투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앞서서 부대를 지휘했다. 예리한 판단력과 전술을 갖춘 유격전 전문가였다.
이후 그는 ‘조선 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으로서 지리산 등지에서 치열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며, 그에 대한 수많은 전설들을 만들어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경상도,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전역에 인공이 수립되자 부대를 이끌고 지리산에서 하산하였으나 미군의 인천상륙과 함께 다시입산하여 빨치산 투쟁을 전개한다. 1951년 7월 ‘남한 6개도당 위원장회의’를 주재하면서 그는 공식적으로 남한 빨치산의 사령관의 위치에 오른다.
1953년 한국전쟁의 휴전과 함께 북한에서는 남로당계열이었던 박헌영, 이승엽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된다. 그해 8월 6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열린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와 결정서9호, 9월 6일의 결정서10호에 따라 당시 제5지구당은 해체되고 위원장이었던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된다. 또한 남부군의 핵심부대였던 제5지구당 요원들과 ‘김지회부대’를 각 도/군당에 분산시킴에 따라 그는 빨치산 지도자로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다. 당시의 조직위원회를 이끌던 이는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 등이었다.
1953년 9월 18일(혹은 17일, 15일) 그는 지리산 빗점골 합수내, 너덜겅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의문의 총탄에 의해 사망한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데, 크게 보면 ⑴군토벌대에 의해 ⑵경찰토벌대에 의해 ⑶북한의 지령을 받은 빨치산에 의해 등의 세 가지 설이 있다. 그를 사살한 공적을 두고 남한에서는 법정다툼까지 벌어졌는데, 법원은 경찰의 손을 들어주었다. 공식적으로 남한에서는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경찰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것이 공식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빨치산 수기인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간접적으로 세 번째 설을 제기하고, 북한에서는 9월 17일 사망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생애와 죽음은 아직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는 지리산 빗점골에서 총탄을 맞아 숨진 시체로 발견되어 화개장터 앞의 섬진강변에서 화장되어 역사의 뒷길로 사라졌다
이현상은 그가 살아있던 1951년, 이미 북한에서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고, 1952년에는 자유독립훈장 제1급을, 53년 2월에는 영웅칭호를 받았다. 김일성은 지리산에 있는 이현상에게 영웅훈장 약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 뒤로 이현상이 죽은 후인 1968년, 북한은 ‘혁명 애국열사’로 정식으로 선정되었다. 이때 이현상은 열사증 000001번으로 첫 열사증을 추서받아 혁명열사릉에 안장(가묘)되었다. 또 이현상은 1990년 8월 조국통일상을 추서받았다.
이현상은 최문기와 결혼, 1남3녀를 두었다 큰딸은 무영(茂永.23년생), 둘째는 외아들 극(剋.27년생) 둘째딸 문영(文永.34년생), 셋째딸이 상진(尙鎭.40년생)이다. 한때 남한에 그의 딸이 살고 있다는 설이 있었으나, 확인된 바로는 이현상의 가족은 월북하여, 북한에 정착하였다.
그는 평범한 키로, 언제나 과묵하고 우수에 잠긴듯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대원들을 지극히 아끼고 솔선수범하였으며, 남부군뿐 아니라 빨치산 모든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그가 축지법을 쓰고 날아다니기도 한다는, 신비한 인물로 전해지기도 했으나, 이런 민간의 소문들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빨치산 투을 했는가를 보여준다 할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 조국독립운동으로 공산당운동에 뛰어든 이래, 평생을 혁명을 위해 투쟁하다 지리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였다. 비운의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영웅이었고 지리산에서 자신의 삶을 불태운 혁명가였다.
이현상과 무장투쟁
①한국전쟁 이전의 무장투쟁
남로당은 1948년 2·7구국투쟁 직후에 형성된 야산대를 조직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군사부를 설치한다. 한편 해방 초기에 창설한 군국준비대를 강제해산 당한 뒤 합법적으로 군사력을 키울 수 없게된 남로당은 미군정의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남로당의 무장세력을 심어 적당한 때에 합법화 하려하였다. 그러나 돌발적인 제주도 4·3항쟁과 여순무장봉기로 국방경비대내의 남로당의 무장세력이 노출되어 실패하고 이를 계기로 비합법적 비정규적인 유격대를 조직하여 ‘미제국주의자와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인 이승만 도당을 쫓아내고 민주적인 민족민주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모스크바 유학차 월북중 반김일성파로 지목되어 다시 서울로 피신해 왔던 이현상은 북한 정권의 요직에 참여한 동료들을 외면하고는 48년 11월 겨울이 휘몰아쳐 오는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경성 콤 클럽 시절부터의 동료인 이승엽이 일제시대 전행과 타협의 굴절된 경력을 가진데 대해 이현상은 그 가혹한 일제 탄압 하에서도 일체의 전향이나 타협을 몰랐고 이승엽이 한때 평양 김일성 정권의 각료반열에 올라있는데 비해 이현상은 김일성을 거부하여 자진해서 남한 빨치산에 투신한 터였다.
이현상은 1948년 10월 18일 여순무장봉기를 일으킨 세력들과 잔여무장세력 4000여명을 이끌고 10월 하순경에 지리산 유격대를 조직한다. 한편 1948년 말부터 서울의 중앙당도 이현상의 존재를 인정하여 여순 무장봉기지구 5개 시군의 당 사업 지도를 이현상에게 위임하는 특별 초치를 취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이현상은 백운산에 5개 시군당을 지도할 백운산 특수지구당을 조직한다.
빨치산 부대는 1949년 3·1절을 맞아 하동군 양양 거창군 십리 능선에서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대원 1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이현상부대는 4월 초에 그 지휘부 홍순석, 김지희 등을 반선리에서 군대의 습격에 의해 잃고 만다. 그러나 이들보다 앞서 이현상은 대원 130여명 전도를 수습하여 뱀사골에 들어와 구례군당과 같이 활동하였다.
1949년 6월 남·북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서로 통합되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이 결성되고 남, 북로당이 합당해 조선노동당이 되자 남한에서의 유격투쟁은 조선노동당의 지휘체계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일원적으로 지도하지는 못한다. 즉, 북로당계와 남로당계의 유격투쟁 방침에 혼선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1948년 9월 조국전선의 지령아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1주년 기념투쟁 이른바 ‘9월 공세’를 이현상의 인민유격대 제2병사단도 수행하였다. 9월 공세에 대비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는 9월 22일 군·경 합동작전을 지휘하였다. 1950년 초여름 조국전선의 대표일행이 평화통일 호소문을 38선을 넘어 전달하는 사건 등이 일어나는 가운데 한국전쟁이 터진다.
②한국전쟁기의 무장투쟁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내려와 서울을 점령하고 7월 20일에는 미24사단의 방어선을 뚫고 대전에 진격한다. 지리산의 이현상부대는 다른 당 기관과는 달리 군, 경부대의 봉쇄선에 갇혀 정보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7월이 되도록 전쟁소식을 알 수 없었다. 그 후 진격소식을 들은 이현상부대는 창녕 밀양을 거쳐 양산에까지 유엔군 깊숙이 침투해서 인민군 진격의 지원작전을 폈다.
낙동강 후방에서 주로 미군을 상대로 싸우면서 인민군의 진격을 기다렸으나 오히려 9.28후퇴가 닥쳐왔다. 이현상은 150명으로 줄어든 대원들을 이끌고 다시 북상후퇴를 시작했다. 북상후퇴를 하는 중에 남조선 해방지구 군사전권위원으로 있던 이승엽을 만나 유격부대와 당조직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현상부대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남하에 대비하고 남한 산중에 산발적으로 잔류해서 저항하고있는 각 도당 소속 유격대의 통일적 지도기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1950년 11원 독립 제4지대인 남조선 인민유격대는 승리사단, 인민여단, 혁명지대라는 3개 부대로 이루어졌다. 이 유격대는 1951년 정월 소백산 지구로 남하하여 통칭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으로 개칭하여 이후 남부군은 ‘군경토벌대’에게는 가장 전투적이며 도전적인 그래서 가장 주목되는 빨치산부대의 이름이 된다.
1951년 1월 중남부군은 소백산 기슭인 문경군 동로지서를 기습점령하고 죽령 국도를 10여일이나 차단해서 유엔군에 막대한 작전상 차질을 주었다. 계속해서 남부군은 문경새재를 점거하고 이화령 국도에서 이동중인 미군부대를 기습하였다.
민주지산에서 남부군은 남진하여 북덕유산 송치골에서 1951년 6월경에 이현상이 6개 도당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후 6도당회의가 3차례에 걸쳐 지리산에서 열리었다. 이현상이 이 회의를 연 취지는 남한 6도 빨치산의 일원적인 개편과 통일적 지도에 있었다. 이 회의에 앞서 강원도 후평에서 이승엽과 나눈 유격대 조직개편안의 실천이었다.
1951년 6월의 덕유산에서 8월에 지리산에 돌아온 남부군은 10일에 합천군 가회 지서를 습격하고 M1실탄 30만발을 획득한다. 8월 18일 시천 삼장의 경찰 방어막을 격파하고 지리산 거림골로 들어갔는데 이는 꼭 1년 1개월만에 다시 지리산에 돌아온 셈이 된다. 이후 약 1년간 이 거림골과 대성골 그리고 주능선 너머 백무골 뱀사골은 남부군의 주 활동무대가 된다.
이현상을 총수로 하는 남부군 사령부는 45, 46, 57, 68, 81, 92사단을 거느리는 남부 6도 유격대의 통합체제를 만들었지만 그 통제력은 매우 느슨했고 결집력도 미약한 채 4개월후인 52년 1월에는 그 형태마저도 해소되고 만다.
1952년 1월 28일 남부군은 사단 편제를 해소하고 후평 출발 당시의 독립 제4지대라는 이름으로 되돌아가고 각 도 사단들도 호칭을 쓰지 않게 되고 남부군의 조직은 없어지게 된다. 1951년 8월 31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산중 유격대에게 ‘미해방 지구에 있어서의 당사업과 조직에 대하여’라는 당조직의 잠정적 해체와 활동 중인 유격대를 소조로 개편한다는 94호 결정서를 지령한다.
그러나 이 결정서는 통신수단 미비로 1952년 봄에 겨우 남한 산중 현지 당과 유격대에 인편으로 전달되고 지리산에는 가장 늦은 9월경에 전달된다. 이현상, 박영발 등은 지리산에 회동하여 이 결정서에 의한 광역지구당 결성에 합의한다. 그러나 박영발 등은 기존의 도당을 해체하라는 것에 반발하여 51년 덕유산에서의 6개 도당회의 때의 대립을 재현하였다. 그리하여 도당을 그대로 둔 채 5지구당을 결성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고 이현상이 5지구당 위원장이 되었으나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이었다.
한편 1952년 12월 15알 평양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제 5차 전원회의 이후부터 이승엽, 박헌영 등 남로당계 간부들을 숙청해 나간다. 이현상도 평양으로 오라는 소환명령이 밀사편에 전달되었으나 그는 이에 응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53년 4월 말에 5지구당 조직위원회는 8호를 채택해서 지구당 위원장으로서의 이현상의 모든 지휘권을 박탈했다. 조직위원회의 7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경남도당의 부위원장 김삼홍만이 5지구당 결성 때 이현상을 지지했다. 소위 ‘8월 종파사건’ 이후 이현상의 친위세력 호위대 등이 소지구당에 분산 배치된 후 5지구당 조직위원회는 8월 26일에 이현상을 간접 비판하는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조직위원회는 9월 6일에 결정서 10호에 의해 5지구당을 해체한다.
③이현상의 죽음
1953년 9원 18일(혹은 17일,15일) 그는 지리산 빗점골 너덜겅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의문의 총탄에 의해 사망한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이런 사실(?)이 공식적인 기록이긴 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그는 일제시대, 조국독립운동으로 공산당운동에 뛰어든 이래 평생을 혁명을 위해 투쟁하다 지리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였다. 비운의 한국현대사에서 그는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영웅이었고 지리산에서 자신의 삶을 불태운 혁명가였다.
군사정권 시절을 보내면서 빨치산에 대한 이야기는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부분이다. 그가 태어난 고향인 충남 금산군 외부리에서는 그러나 그를 큰 사람으로 칭송한다. 우익이 자리한 내부리와 좌익동네 외부리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남과 북의 교전이 계속되면서 ‘톱질 당했다’는 표현만큼 상처가 많은 동네이다. 지서에 끌려가 맞았고 죽음을 당했다. 한때는 과부와 외아들이 많은 동네라 했다. 그럼에도 ‘큰 사람이 나다보니 아랫사람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지’하며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에 원망은 없다’는 것이 외부리 정서이다. 전쟁후 한동안 이씨의 어머니와 형수가 살고 있을 땐 군수가 바뀔 때마다 인사를 다녀갔다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금산일원에서 이현상은 이단아 이기 앞서 지역의 영웅이었던 듯하다.
2000년 남북의 정상 회담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만수대 의사당 방문 때 소개를 맡았던 안내자가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남북 화합의 분위기에서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현상에 대해 ‘빨갱이’라는 죄목 씌우고 그의 행적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태백산맥』의 서문을 읽어보면 “조국은 민족의 것이지 무슨무슨 주의자들의 소유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민족의 운명을 위해 노력한 모든 사람들은 통일될 조국 앞에서 공평한 평가를 받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현상이 더 이상 ‘전설 속의 영웅’이 아니라 ‘역사 속의 인물’로서 제자리를 찾게 하는 작업일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의 잣대에 당연히 그의 사상적 배경이 가미되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흩어져 있는 ‘사실’들을 꿰어 맞추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라야 분단과 전쟁이라는 우리시대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의 그의 역할이 정확히 가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이현상
남과 북의 사료가 정확하게 일치될 수 없는 탓에 이현상의 생애와 투쟁, 죽음은 아직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들을 살펴볼 때, 이현상은 투철한 항일 독립운동가, 공산주의 혁명가,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지도자임에 분명하다.
먼저 그는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견디며 끝까지 투쟁한 독립운동가였다. 그와 함께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던 이승엽 등이 한때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거나 협조하는 모습을 보인데 반해 그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의지를 보여주었다. 명확하게 드러나는 면은 아니지만, 그는 상당히 민족적 정서를 가진 공산주의자였으며, 그에게 있어 진정한 해방은 일제로부터의 조국독립과 계급해방이 함께 하는 것이었다.
또, 그는 조선공산당, 후에는 남로당이라는 해방전후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을 이끈 혁명가였다. 당시 공산당에는 남로당과 북로당, 해외파와 국내파 등 수많은 계파간의 갈등이 존재했고, 이들 계파들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변화해갔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이현상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며 지리산으로 찾아들었고 지리산에서 죽어갔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이견들이 있지만, 그는 죽기 전에 ‘제5지구당 위원장’직을 박탈당하고,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또 그는 이런 결정을 수용하였으며 조선공산당 내부의 갈등 속에서 정해진 길을 걸어간 것이다.
이현상에 대하여 이태가 남긴 “그는 분명 코뮤니스트였지만, 철저한 이론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라는 평가를 통해 그의 공산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추측해볼 수 있다. 또, 그가 죽을 때 가졌던 물품 중 ‘염주’가 있었으며 어느 정도 ‘불교’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빨치산 대장으로서 이현상은, 모든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흠앙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부대를 지휘하고 전투를 치러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남부군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입산한 이래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전투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앞서서 부대를 지휘했다. 예리한 판단력과 전술을 갖춘 유격전 전문가였다.
그 어떤 일 앞에서도 화를 내는 일이 없고, 그 어떤 문제를 놓고도 장황하게 말하는 법이 없고, 당 이론에 관한 것이면 안 읽은 게 거의 없으면서도 토론을 즐기지 않았다는 분. 지쳐 쓰러진 대원의 짐을 손수 짊어지고, 대원들의 시체를 볼 때마다 땅 깊이 묻어주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했고, 유일한 반찬으로 마련된 고추장 한 보시기를 굳이 가져오게 해 손수 나뭇가지를 꺾어 일일이 찍어 먹였다는 분.
- 조정래 『태백산맥』 10권 부분
또 그는 대원들에게 언제나 겸손하고 친절한 대장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유격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어떠한 어려움에서도 살아남아 민간에 무슨 신통력을 가진 영웅처럼 전해지기도 했지만, 실제 그는 과묵하고 진지한 표정을 잃지 않는 중년신사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현상은 엄혹한 시대를 살다간 ‘독립운동가’였으며 ‘혁명가’였고, 전쟁에 있어 용맹하고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 겸손한 ‘빨치산의 대장’이었다. 그런 그가 시대가 준 것은 끝없는 시련이었고, 결국은 비극적인 죽음뿐이었다. 그는 엄혹한 시대를 자신의 신념으로 끝까지 밀고간 영웅이었고 동료와 부하들의 아픔을 함께 한 따듯한 영웅이었다. 험준한 능선에서 고독한 표정으로 서있는 이현상의 모습은 ‘지리산’속에 서있는 또 하나의 ‘지리산’인 것이다.
참고 자료
‘빨치산 이현상’의 딸, 김대중 대동령 만수대 안내 《스포츠투데이》 2000년 06월 14일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월 13일 평양에서 지리산 ‘빨치산 대장’의 딸을 만났다. 6·25때 남부군 사령관(조선인민유격대)으로 활약했던 이현상의 무남독녀 이상진씨. 김대통령이 만수대의사당(국회의사당)을 찾았을 때 이상진씨가 안내를 맡은 것. 이상진씨의 직책은 만수대의사당 부총장, 의사당 관리운영의 실무 책임자다.
그는 6·25때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할 때 어머니와 함께 월북한 후 김일성 주석의 관심 속에서 성장했다. 이현상이 1953년 9월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뒤 김주석은 ‘혁명 유자녀’로 그의 학업이나 생활문제를 직접 챙겨줬다.
이상진씨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대학 동창이다.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의 동급생으로 인연을 맺었다. 김정일 위원장도 자신의 글에서 이상진씨에 대한 학창시절의 추억을 언급할 정도다.
몸이 약한 이상진씨가 병에 걸려 강의에 자주 빠지자 자신이 직접 아버지에게 얘기해 약을 지어 이상진씨 집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강의 노트까지 베껴주며 우정을 싹틔웠다는 것. 이상진씨는 대학졸업 후 외무성 등 대외업무를 맡은 부서에서 일했으며 외교관(煎 르완다 대사)인 남편(이형연)을 따라 해외공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