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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조식선생 생가 한국가람문학회2018. 문학기행(6) * 2018.5.26. 남명 조식 선생의 생애
1) 생몰연대 ; 1501~1572 (경상좌도 이황, 경상 우도 남명이라고 손꼽음. 퇴계와는 같은 해 태어나고 남명이 두해 더 생존함. 향년 72세) 2) 고향 ; 합천군 삼가면 하판리 지동마을(부모 산소) 3) 출생 ; 외가인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마을 4) 청소년 성장기 ; 아버지 벼슬살이로 서울에서 5) 30세 때 처향 김해 탄동마을에서 산해정 짓고 학문함. 6) 26세 때 부친사망으로 고향 지동마을에서 3년 시묘, 35세 때 모친 별세로 3년 시묘, 38세 때 이언적이 추천한 헌릉 참봉 벼슬 사양 7) 48세 이후 외가인 삼가면 토동에서 뇌룡사 짓고 학문, 후진양성, 전생서 주부벼슬 사양 8) 55세 때 단성 현감 사양(단성소 ; 사양하는 이유를 밝힘, 현재 뇌룡정에 새겨진 글) 9) 61세~72세 별세때까지 산청군 시천면 덕산 이거, 덕천서원 후진 양성, 높은 학덕에 따라서 내려진 여러 벼슬도 모두 사양 10) 좌우명 ; 경의敬義 11) 광해군 때 영의정 추증, 시호 문정 * 벼슬 한번 한적 없는 데도 사후에 영의정에 추정되었으니 그만한 존경을 받았던 분이다. 1. 조식 선생의 을묘사직소(단성소, 1555년)를 새긴 현대적 비석. 명종이 단성 현감직을 제수한 것을 때가 아니라고 사양한 상소문. 2. 생기터 입구의 낡은 촌가에 줄장미만 운치를 더해 준다. 3. 생가터 복원 4. 외가에서 태어 났다. 5.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6. 생애는 1501년~1572년 , 퇴계 이황 선생과 동갑이며 두 해 더 사셨다. 7. 평생을 벼슬 한 적 없었으나 학덕과 명성이 높아서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됐다. 명종과 선조 두 임금이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모두 거절했다. 8. 이 생가지는 태어 난 곳이며, 청소년 시절엔 벼슬하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사셨으나, 부가 일찍 돌아가신 후에 처가인 김해 토동으로 옮겨 살다가 중년에 다시 고향인 이곳에 오셔서 제자들을 교육하며 학문을 연구하셨다. 생애의 마지 10년은 산청 지리산 자락 덕산으로 이거하셨다.(산천재, 덕천서원) 9. 敬경과 義의를 강조하셨다. 이론 보다는 실천적 성향이다. 경은 내적인 수양을 말하면, 의는 외적으로 강직하고 절의를 존중함을 말한다. 이 의의 정신이 제자 정인홍, 곽재우, 김면 등에 영향을 주어 임진왜란 때 의병구국운동으로 연결되었다. 10. 씀바귀 꽃 11. 이 마을 연고의 인천 이씨 가문의 영광이다. 고려 후기 문하시중을 배출한 가문의 현창 시설이다. * 조식 선생은 창녕 조씨이고, 모친 외가의 일족이 인천 이씨 가문이다. 인천 이씨는 신라 때 허기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안록산의 난 때 당현종을 호위하여 그 공로로 인천(인주)이씨 사성을 받았다. 인천 이씨는 김해 김씨, 김허 허씨 등과 같이 김해 김씨의 한 분파이다. 12. 강괘평. 마을 도로가에 세워진 석비다. 전설에 의하면 이온 효자가 가난한데 효성이 지극하니, 천지신명이 감응하여 하늘에서 궤짝이 내려오고, 그 속에 3년 동안 쌀이 가득찼다고 한다. 13. 이온 선생은 고려말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이성계 장군이 건의하여 효자비를 세웠고, 효친을 기리는 효자 비석과 사당이 세워졌다. 외토리에 고려말 1383년(조선 건국은 1392년)에 세워진 이온 선생 효자비. 세워진 연대가 확실하고, 누구를 위해 세운 것인지, 세우게 된 동기가 확실한 효자비로 가치가 있다. 이성계 장군이 병마순찰사로 있을 때 영남지방을 순찰하면서 이온 선생의 효행을 듣고 조정에 건의하여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인간됨의 한 단면을 엿볼 수가 있다. 14. 이것은 조식 선생과는 무관한 이 지방 인천이씨 집안 사대부 가문의 자랑 시설이다. 15. 이 곳 뇌룡정 정자의 명칭은 장자의 말씀을 적은 주련 즉, '깊은 연못 처럼 고요하다가 갑자기 뇌성이 치며, 죽은 듯이 조용하다가도 용처럼 불현듯 나타난다.' 는 구절에서 뇌룡이란 용어를 따 온 것이다. < 뇌룡정> 외토리 마을 남명 조식 선생 추모 시설이 뇌룡정은 남명이 학문하고 후진을 가르쳤던 곳이다. 뇌룡정에 최근 남명 선생이 단성현감을 사양하는 <단성소>를 새긴 큰 비석이 있다. <뇌룡정 雷龍亭>, 당호를 <雷龍舍>의 의미는? 주련 <뇌룡雷龍>에서 따왔다. 淵黙而雷聲 尸居而龍見 ; 연묵이뇌성 시거이용현 '깊은 연못과 같이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뢰처럼 소리치고, 죽은 듯이 가만이 있다가 용처럼 나타난다' 연묵은 단순이 연못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고, 안연(공자의 제자)을 좋아하는 의미가 있다. 안연이 석달동안 仁을 어기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오랫동안 한순간도 인욕人慾이 발동되지 않고 정신함양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본성을 안정시키고 밝게하여 事物에 구애되는 누累를 없앤다는 것이다. 조식이 도달하려는 경지다. 조식은 은거했지만. 항상 현실에 관심을 버리지 않았고 때가 되면 크게 소리칠 수 있다는 포부도 보였는데, 당대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그 정신이 제자에게 이어져 임진왜란때 제자인 곽재우 정인홍 등이 왜병 활동을 활발히 하여 위급할 때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설 수 있었다. 16. 조식 선생의 용암서원 <남명학파의 義利 認識>
임진의병은 조선 건국 이후 강조된 성리학지배 질서가 자리 잡힌 16세기의 사회적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 가능하였다. 정의로운 군대인 의병의 정신은 춘추의리정신, 대의명분 이라는 유학의 일관된 가치관의 시대적 반영이다. 정몽주 길재 중시, 사육신, 생육신으로 이어지고, 16세기 사림정치가 성리학적 실천유학인 도학이 조광조 중심으로 실천궁행實踐躬行이 중시되고 義의 실천이 理의 실천으로 동일시되었다, 성리학의 체계화로 학문적 다양성면에서 남명 조식이 대표적이었다. 의義는 외향적인 실천성의 강조, 출세관의 엄격성, 외침에 대한 화이론적 입장에서 의병운동으로 구체화 되었다. 제자 정인홍, 忘憂堂 郭再祐의 활약이 눈부셨다. 곽재우는 조식선생의 外孫壻요 제자였다. 곽재우는 초전에 도망한 경상 감사 김수와 대립하였다. 중화사상은 한유에서 시작하고 주희에서 완성되었다. 우리나라의 화이론은 소중화주의라는 정신적 에너지로 나타나서 의병운동의 정신적 동력이 되었다. 의병운동 자체가 춘추의리 대의명분에 입각한 義의 실천으로 보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의병운동이 전개될수 있었다. 17. 단성 현감 제수를 거절한 이유를 적어서 올린 상소문의 전문과 번역문을새긴 비석. 을묘사직소(단성소) 18. 용암서원 앞 19. 20. 21. 용암서원, 서원 시설로서는 규모가 단조롭다. 22. 23. 남명 조식 선생 흉상, 본관은 창녕 24. 남명 조식 선생 흉상 남명 조식 南冥 曺植(1501~1572)이 살던 16세기는 정치적으로 사화기士禍期였고 성리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이 정착하던 시기였다. 서경덕徐敬德(1489~1546)이 氣學에 관심을 가진 것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주자의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일부 수정하여 독자적설을 주장하는 등 폭 넓게 수용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는 사화士禍기였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은거를 택해 학문에 침잠함으로써 성리학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이황李滉(1501~1570)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학으로 경도되었다. * 이황이 평한 조식 ; 우리 학문(성리학)에 힘쓰지만 학문이 깊지 못하다. 의리에 투철하지 못해 노장사상이 침투한 것이다. (학문적으로 순정하지 못하다는 혹평) * 조식은 4서(四書)를 위주로 했지만 대학大學을 가장 중시했다. 성리학에서 핵심 문구를 뽑아 <학기學記>를 만들었다. 전체 900여 항목 중에 주자설이 350항목 기타 정이천 정명도 등의 정주학이 근간인 성리학자들의 글이었다. 25. 느티나무를 읊은 조식 선생의 시를 새긴 비석 [제목] 홀로선 나무를 읊다.
무리를 떠나 홀로 있기에, 스스로 비바람 막기 힘들겠네 늙어감에 머리는 없어졌고, 상심하여 속이 다 타버렸네 아침이면 농부가 와서 밥을 먹고 한낮엔 야윈 말이 그늘에서 쉬네 다죽어 가는 등걸에서 무엇을 배우랴 마음대로 하늘에 떴다 가라 앉았다 하네. [초계 정도준 씀]
詠獨樹 <조식>
離群猶是獨 風雨自難禁 / 이군유시독 풍우자난금 老去無頭頂 傷來毁腹心 / 노거무두정 상래훼복심 穡夫朝耦飯 瘠馬午依陰 / 색부조우반 척마오의음 幾死査寧學 昇天只浮沈 / 기사사영학 승천지부침 * 草溪 鄭道準 씀 / * 거둘색(穡) / 짝우(耦) /
穡夫朝耦飯(색부 조우반) 이란 말이 어렵다. 색부란 농부다. 농부가 이른 새벽에 밭일을 가면 아내가 밥을 지어서 머리에 이고 밭이 가까운 이 정자에서 배우자 부부가 함께 아침밥을 먹는 광경이다. 집이 그렇게 먼 곳도 아닌데, 집에서 밥을 먹지 않고 들판 이 정자에서 먹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아껴서 일을 하겠다는 부지런한 농부의 마음이며, 또 논밭일로 몸이 더러워졌으므로 씻고 식사할 수 없는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 이 시비에는 작자명이 새겨져 있지 않지만, 남명 조식 선생의 시이며, 정도준은 해석하고 글씨를 쓴 서도가다. 이 시는 현실에 거리를 두고 은거하여 부화뇌동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고목에 비유하여 읊은 것이다. 죽음에 이른 고목이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자신은 늙었지만 고목처럼 농부들과 말의 쉼터가 되고 있다. 참담한 민생의 현실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조식 자신의 모습이다. 조식 선생은 비록 은거생활을 하기는 했어도, 춘추시대 고죽국의 <백이 숙제> 형제처럼 수양산에서 고사리나 캐먹고 현실에 완전히 눈감은 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하혜 柳下惠>* 처럼 관직도 사양 않고 적극 참여하는 쪽도 아니라 백이숙제와 유하혜 그 중간 어디쯤에 쯤 위치하였다. * [참고] 유하혜 ; 춘추시대 노나라 대부 현인. 유하는 식읍 지역명이고, 혜는 시호諡號(사후에 내리는 존칭)다. 본명은 전획이다. 친동생이 부하 3천명을 거느린 그 유명한 대도大盜 도척이다. 유하혜는 오명의 군주도 기꺼이 모셨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념은 굽히지 않고 도를 행하였다. 깨끗한 현실 참여파라고나 할까~
이 큰 나무가 시에 나오는 그 나무일까? 다죽어 가는 고목나무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아직 무성하다. 자세히 보니 썩은 부분에 시멘트로 채우고 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보호하고 보살펴 가꾸어서 이 고목이 아직 건장하고 아름답다. 26. 조식은 도학자다.
-정주학파 송대宋代인의 도학道學개념은 유교정통을 회복하여 자기정화와 사회개혁을 염두에 둔 일종의 신문화 조류를 의미한다. 도덕으로 정신 무장을 하여 세상을 정화하려는 사회개혁정신을 담은 사상이다. 신독愼獨(홀로 있을 때 삼가)으로 고상함을 삼으며, 정심正心, 성의誠意, 극기복례克己復禮(사욕을 물리쳐 예로 돌아가는 것)로 일을 삼는다. -조선초기 도학 개념은 이단인 불교를 배척하고 정주학(성리학)을 밝히는 것으로 이제현, 이색, 정도전, 길재 등이 중심 학자이다. -도학은 16세기에 첨예하고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따라서 조식의 인식은 도학은 정주학 자체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성찰극치省察克治를 통해 유교의 도에 자기실천이 철저한 사람을 가리킨다, 조식의 문인 정인홍(1535~1623)에게서 더 선명한 개념이 나타난다. 조식과 정인홍은 천덕天德 측면에서 도학을 말했다. 격물치지格物致知하여 선을 밝히고 성의, 정심하여 자기 몸에 온축하면 天德이 되고 정치에 베풀면 王道가 된다. -이이李珥(1536~1584)의 도학 개념은 엄격하다. 이이의 개념으로는 정몽주鄭夢周(1337~1392)는 사직지신社稷之臣이지 도학자는 아니다. 이이는 이언적과 조식도 도학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조광조와 이황 만을 도학자로 인정하였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비로소 우리나라 도학의 비조鼻祖로 본다. 조광조는 행도行道의 측면이며, 이황은 지도知道의 측면에서 도학자로 본 것이다. 행도는 자기실천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를 말한다. 천덕 측면이 아니라 왕도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송대 사람들이 말한 신독愼獨, 천이踐履, 성의誠意, 정심正心, 극기복례는 모두 천덕의 측면(宋代인, 조식, 정인홍이 비슷한 도학 개념)이며 이이가 말한 知道의 측면은 아니다.
-남명학 ; 경상우도 지역에는 당색이나 학파를 떠나 조식을 도학자라고 칭하는 데는 조금도 이견이 없다. 18세기 경상우도 대표적 학자 박태무(1677~1756)의 조식 칭송 ; “소장疏章-근면하고 간절, 경세제민(經世濟民) ; 이윤(伊尹) 부설(傅說)” “기절(氣節)-태원太原의 후한 광무제때 사람들인 엄광(嚴光) 주당(周黨)” “학문이 순수 심원하여-정자, 주자의 학문 경지에 올랐다.” “성인의 진퇴를 터득한 높이- 봉황(鳳凰)새, 홍곡(鴻鵠)(만리상공 나는 큰 기러기)” 조식은 불교 도교도 수양에 필요하다면 수용할 수 있다는 개방적 학문 성향 남명사상 핵심은 경의(敬義) 27. 마을 입구 느티나무 옆에 조식 선생 시를 새겼다. < 조식의 시 몇 편 감상>
<頭流作> 천척이나 되는 고회(高懷) 걸 곳이 없네, / 高懷千尺掛之難 방장산 상상봉 꼭대기에 걸어 볼까, / 方丈于頭上上竿 옥국관(玉局觀)에 삼세의 문적이 있을 테니, / 玉局三世須有籍 훗날 내 이름자 몸소 볼 수 있겠지. / 他年名字也身看
자신의 이상인 高懷가 하도 커서 이 세상에 걸어 둘 곳이 없다. 그래서 하늘과 맞닿은 지리산(두류산) 천왕봉이다. 거기를 거대한 이상을 걸어 둘 현실세계로 삼았다. 만년 10년을 지리산 곁 산청 덕산에 이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漫成> / 漫만 天風은 큰 사막에 거세게 불고, / 天風振大漠 쏜살같은 구름은 가렸다 흩어졌다 하네. / 疾雲紛蔽虧 / 蔽虧폐휴 솔개가 날아 하늘에 오름은 당연하지만, / 鳶騰固其宜 / 鳶연 까마귀가 하늘에 이르러 무엇을 하려는지? / 烏戾而何爲 / 戾려
앞 2구는 우주의 근원, 태초의 역동적인 모습 묘사. 혼란스러운듯한 天理를 인간은 볼 수없다. 연등鳶騰은 시경에 나오는 ‘연비어약鳶飛魚躍’의 의미를 지니며 천리가 유행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까마귀는 사이비, 부화뇌동하는 소인배들을 비유한다. .
< 詠蓮 > 연꽃에 유하혜 풍도가 있는 것이 사랑스러워, /只愛芙蕖柳下風 / 蕖거 잡아당겨 보았더니 연못뻘 속에 뿌리 내렸네. /拔而還止于潢中 / 潢황 孤竹君은 생각이 편협해 응당 싫어하겠지만, /應嫌孤竹方爲隘 / 隘애 맑은 향기 멀리 뿌려 나에게까지 이른다네. /遠播淸香到老翁 / 播파
연못 진흙뻘 속에 뿌리 내린 연꽃은 더러운 현실의 세속에 살면서도 자신의 지조를 잃지 않았다. 백이숙제 라면 더러운 곳을 버리고 떠났겠지만 조식은 출사는 포기했으나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살았다. < 우음偶吟 > 사람들이 바른 선비를 사랑하는 것이 人之愛正士 호피를 좋아하는 것과 흡사하다. 好虎皮相似 그가 살아 있을 적엔 죽이려고 하다가 生則欲殺之 그가 죽은 뒤엔 한 껏 칭찬을 하지. 死後方稱美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뒤에, 충신이라고 치켜세운 것이 이 시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당대에는 죄인으로 죽음을 당했으나 사후에 복권된 관료 선비가 부지기수였다.
남명은 시인이라기 보다 도학자였다. 자득自得으로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려는 성향으로 사화士禍기에 도를 구해서 왕도를 구현하고 사회기강을 이루려는 시대정신이 투철했다. 그는 25세 때 안연(공자 제자)이 자신의 모델이고 이상이었다. 고사리로 상징되는 백이 숙제보다 연꽃으로 상징되는 유하혜에 자신의 정체성을 둔 현실주의자였다. 연꽃은 더러운 곳에서도 꽃 자체는 더럽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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