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을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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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생가
윤 준 경
남으로 갈수록
시름이 깊었다
시름이 깊을수록
정이 깊었다
정이 깊을수록
바람이 많고
아득한 바다,
섬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고독을 막아내고 있었다
여기 남은 전라남도를 말한다. 전라도는 황톳길이다. 한하운도 전라도 황톳길을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남으로 갈수록 시름이 깊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강진을 가는 길은 남해로 이어진다. 소록도도 이 길을 거쳐서 간다. 고산 윤선도가 떠오르지만 김영랑 시인도 강진에서 살았고 다산 정약용도 강진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때문에 시름이 깊었지만 정도 깊었을 게다. 남쪽 바람은 맑았고 그 바람은 바다가 몰고 오는 바람이다. 다도해는 이생진 시인이 젊을 때 거쳐 간 섬일 터이다. 이제 섬들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 많은 섬들이 인간을 그리워하고 시인을 그리워하고 육지를 그리워할 것인가. 유배지로 고독했던 강진은 지금 어떻게 변해 살고 있을 것인가.
김영랑 시인은 강진에서 태어나 45년을 살았다. 12살에 강진에서 결혼을 했다. 그러나 결혼한 지 일 년 만에 아내와 사별했다. 그의 시가 애수적인 것이 아내의 사별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영랑은 음악을 좋아했으며 많은 음악 가사를 짓기도 했다. 강진읍 남성리에 생가가 복원되어 전남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고 국가 지정 민속자료 제252호로 되었다. 다산 정약용도 강진에 유배되어 10년을 보냈다. 실학파로 정치 경제 사상가 과학자였던 다산은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강진에 유배되어 추위와 배고픔에도 많은 저술을 했다. 목민심서(牧民心書)도 강진에서 저술했다. 강진이란 이름에 시름이 가고 정이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집 '시와 연애의 무용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