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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의 침략 전쟁에 끌려들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였다. 1932년에는 만주국이 세워져 청의 황제였던 푸이가 만주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만주국은 일제가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기 위해 세운 나라로, 사실 일본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만주국 황제는 일제의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만주국의 성립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일제는 1933년에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화북 지방을 침략하였으며, 1937년에는 중국과 전면 전쟁에 돌입하였다. 나아가 1941년에는 미국과 동남 아시아를 침략하여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였다.
15년을 이어 간 이 전쟁은,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어려움에 빠진 일본이 전쟁을 통해 군수 공업을 육성하고, 식민지를 수탈하여 자국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조선은 일본 상품을 소비하고, 군수 물자를 생산·조달하는 병참 기지 역할을 강요받았다. 일제는 수많은 조선인을 군인으로, 노동자로, 심지어는 군대 위안부로 자신들의 침략 전쟁에 동원하였으며, 조선에서 헤아릴 수 없는 양의 식량과 자원을 약탈해 갔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공황은 미국으로의 수출 비중이 높았던 일본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기업의 도산으로 실업자가 늘었으며, 식량 가격 하락으로 농민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은 '일본-조선-만주 또는 일본-만주-중국의 공동 발전, 백인종에 맞선 아시아 인의 단결'이란 구호를 내걸고 침략 전쟁을 벌였다.
공업 부문 민족별 자산(1945. 8.) 1940년 무렵 국내 총생산에서 광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농업과 비슷해졌고, 중화학 공업과 경공업의 비중도 비슷해졌다. 그런데 1942년 통계에 따르면, 조선에 본점을 둔 회사 자본금의 92% 이상이 일본인 소유였다. 게다가 공장 노동자의 약 93% 가 조선인이었는데 그 가운데 기술자는 18%에 불과하였다. 수치로 나타난 경제 성장은 일본인이 조선에서 이룩한 것일 뿐이다.
일제의 병참 기지로 바뀐 조선
1930년대 초 조선 총독부는 '일본을 수준 높은 기술이 뒷받침하는 정공업 지대로, 만주를 농업 지대로, 양자를 연결하는 조선을 조공업 지대로 설정'하는 이른바 '조선 공업화' 정책을 내걸었다.
일본과 조선, 만주의 경제를 통합하여 원료와 식량을 값싸게 공급받고, 상품과 자본의 수출을 확대하려는 의도였다. 조선의 북부 지방에 발전소와 화학·금속 공업 관련 공장이 들어선 것이 이때부터다.
중·일 전쟁 이후 조선은 일제의 군수 물자 생산 기지가 되었다. 일본은 자국의 대자본을 끌어들여 조선에 금속, 기계, 화학 등 중화학 공장을 대거 유치하였다. 발전소를 세우고, 대형 광산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기업의 원활한 투자를 구실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한 공장법의 적용을 계속해서 미루었으며, 노동 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국민 총동원령(1938)이나 물자 통제령(1941), 노무 조정령(1941) 등을 공포하여 조선의 인력과 자원을 강제로 동원하거나 일방적으로 배정하는 경우도 많았다.
1930년대 조선은 빠르게 공업화되었다. 그러나 일본 자본을 중심으로 조선의 노동력과 자원을 수탈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공업화는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져 버릴 사상누각 같은 것이었다.
전쟁에 동원된 슬픈 민중들
일제는 수많은 조선인을 전쟁에 직접 동원하였다. 1938년에 지원병제, 1943년에 학도 지원병제를 실시하였으며, 1944년에는 20세 이상의 남성이면 누구든지 강제로 병사로 끌고 갈 수 있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광산이나 기업, 전쟁 시설을 만드는 건축물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은 더욱 많았다. 국민 징용령(1939)이 일제의 노동력 수탈을 뒷받침하는 근거였다. 처음에는 취업을 미끼로 모집하였으나, 전쟁이 확대되자 수많은 노동자들을 강제 연행하여 기업에 할당한 뒤, 회사를 옮기지도, 그만두지도 못하게 하며 노예 노동을 강요하였다.
일본군의 성 노예로 끌려가 죽음보다 못한 삶을 강요받은 여성도 많았다. 1930년대부터 군 위안소를 운영해 온 일제는,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수많은 조선 여성을 강제 연행하여 전쟁터로 보냈다. 끌려가지 않은 이들의 삶도 고단하긴 마찬가지였다.
신고산이 우르르르 화물차 가는 소리에
지원병 보낸 어머니 가슴만 쥐어뜯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양곡 배급 적어서 콩깻묵만 먹고 사누나
신고산이 우르르르 화물차 가는 소리에
금붙이 쇠붙이 밥그릇마저 모조리 긁어갔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이름 석 자 잃고서 족보만 들고 우누나
- 〈신고산 타령〉을 개작한 〈화물차 가는 소리〉
노골적인 물자 동원은 민중의 삶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공출이란 이름으로 식량을 싼값에 강제로 거두어 간 것은 물론이고, 무기 제작에 쓰기 위해 집 안의 온갖 쇠붙이, 심지어 교회의 종까지도 빼앗아 갔다.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간 남성들의 빈 자리를 메워야 했던 여성들은 하루하루 가족의 생계를 꾸리며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었다. 대다수 조선 기업들도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경성 방직처럼 일제의 정책에 호응하여 만주와 중국으로 뻗어 나간 기업도 있었으나, 대다수의 중소기업은 일제의 물자 통제령과 기업 정비령으로 위기를 맞고 문을 닫아야 했다.
일제의 전쟁에 동원된 조선인들 1930년대 이후 전쟁의 규모가 커져 감에 따라 일제는 조선을 전쟁 물자 공급 기지로 만들어 인적, 물적 자원을 수탈해 갔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강제 징용되어 북해도 탄광에 끌려간 노동자들, 징병 검사장에 선 조선인 청년,
조면 공장에 동원된 부녀자들, 놋그릇 등을 공출해 가고 대신 지급된 사발, 일본군 위안부의 모습이다.
한국인 원자 폭탄 피해자 위령비 일본 히로시마 평화 공원 안에 있다.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어 69만 1,500명이 피해를 입었고, 사망자만도 23만 3,167명이나 되었다. 한국인 희생자도 약 7만 명이었다. 3만여 명이 목숨을 건졌으나, 일본이나 미국은 물론 한국 정부로부터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였다.
"온몸이 타고 살점이 벗겨진 한국인 징용자들이 공장에 꽉 차 있었지.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조센진끼리 알아서 하라.'며 못 본 체하더라고. 부리던 개라도 그렇게 하진 않았을 텐데……."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 지 꼭 61년째 되는 날, 대전에서 만난 원폭 피해자 김한수 옹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였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덮치면서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방공호로 달려가 보니 온몸이 시커멓게 탄 시체들이 즐비하였다.
"조선소에서만 한국인 징용자 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는데도 일본인 관리자들은 속속 공장을 떠났어.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생지옥이었지."
몇몇 생존자는 부상자를 공장 숙소로 옮기고 조를 짜 이들을 돌봤다. 대다수 부상자가 화상으로 입조차 벌리지 못해 대나무를 입에 꽂고 멀건 죽을 먹였지만 합병증으로 대부분 숨을 거두었다.
김 옹은 1944년 봄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징용에 끌려가 '자살 잠수함'에 쓰이는 동(銅) 파이프를 만들었다. 한국인 징용자에겐 콩깻묵을 쪄 만든 밥과 바닷물에 고구마 넝쿨을 넣어 끓인 국이 유일한 먹을거리였다.
김 옹은 아흔이 다 된 나이에 다시 일본어를 익히고 있다. 눈을 감기 전 일본 정부를 직접 찾아가 사과라도 한마디 듣기 위해서다.
- 《동아일보》, 2006. 8. 10.
일제의 전쟁에 동원된 한국인의 수를 정확히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많은 자료가 사라졌고, 엉뚱하게 끌려간 이들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강만길 등이 지은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에 따르면, 군인이나 전쟁을 지원한 민간인을 합해 37만 명, 강제 연행되어 중노동에 시달렸던 이들이 192만여 명(국내 42만, 해외 약 150만 명), 성 노예로 끌려간 여성이 10만여 명에 이르며, 근로 보국대로 각 도내에 동원된 사람도 4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해외로 끌려간 사람들 중 다수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으며,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이들도 일본의 아무런 사과나 보상을 받지 못한 채 대부분 어려운 삶을 이어 갔다.
·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www.womenandwar.net
· 태평양 전쟁 희생자 유족회
www.victims.co.kr
· 태평양 전쟁 피해자 보상 추진 협의회
www.pacificwar.or.kr
· 일제 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 진상 규명 위원회
www.gangje.go.kr
내선 일체, 행복한 장래를 위한 선택?
내선 일체란 '일본과 조선은 하나'란 뜻으로, "조선인을 천황께 충성하는 신민으로 만들자."는 황국 신민화와 같은 말이다. 이는 일제가 조선인을 자신들의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내세운 주장이었다.
일제는 학교나 관공서에서 조선어 사용을 금지시켰으며, 한글로 발행된 신문을 모두 폐간시켰다. 1941년에는 소학교를 황국 신민 학교란 뜻의 국민 학교로 바꾸고 조선어 교육을 금지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조상이 물려준 성과 이름을 부정하고, 일본식 성명을 쓰도록 강요하였다.
1. 창씨를 하지 않은 자의 자제는 각급 학교에 입학·진학할 수 없다.
2. 창씨를 하지 않은 아동에 대해 일본인 교사는 이유 없이 힐책·구타해 아동으로 하여금 부모에게 호소하여 창씨하게 한다.
- 문정창, 《군국 일본 조선 강점 36년사》 하권
학교나 관공서의 모든 행사는, "저희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마음을 합해 천황 폐하께 충의를 다하겠습니다."라는 황국 신민의 서사를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날마다 천황이 사는 곳을 향해 절을 하고(궁성 요배), 신사를 찾아 천황의 조상에게 참배하여야 했다.
일제는 야만적인 폭력을 내세워 내선 일체 정책을 추진하였다. 아주 미미한 항일 활동도 가혹하게 처벌하였으며, 단체를 만들거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권조차 부정하였다.
민족 운동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에게 일제 지지 의사를 밝히게 하는 전향 공작을 벌였으며, 전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형벌을 부과하였다. 자발적으로 일제의 앞잡이가 된 이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은 내선 일체를 영광으로 받아들이고 일본인으로서 의무를 다하자고 하였다.
내선 일체의 길 말고 조선인이 나아갈 길이 있겠습니까? 그 길을 거부한다면 조선인이 나아갈 길은 공산주의밖에 없습니다. …… 이들을 배제하고 박멸하는 것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입니다. 내선 일체야말로 유일한 민족적 진로이며, 이 길 위에서 행복한 장래를 전폭적으로 기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 윤치호, 《동양지광》, 1939
노골적으로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나선 이들도 많았다. 조선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문인이나 교육자 들 가운데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인 최남선·모윤숙·서정주, 교육자 김활란 등이 대표적이다. 현제명이나 김은호 같은 예술가는 음악이나 미술 작품으로, 김연수나 박흥식 같은 기업인은 돈으로 일제의 전쟁을 도왔다.
친일 행위는 일제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었을까, 아니면 일제의 식민 지배가 지속될 것이라 믿고 스스로 선택한 행동이었을까?
황국 신민화 정책은 조선 민족 말살을 추구하는 것과 동시에 국가를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정책이다. 일제가 물러난 뒤에도 전체주의 사고는 남아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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