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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으로 충분한가?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장 이한석 목사) 제55회 정기총회 최대 관심사였던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이성구 목사의 제명이 노회에서까지 결의, 이 목사는 결국 고신에서 제명됐다.
이성구 교수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규정한 고신총회는 당초 중부산노회에 "총회의 결정대로 해당노회가 이성구 목사를 제명할 것"을 공문으로 발송한 바 있으며 이에 중부산노회는 총회의 안건을 받아 사무처리에 안을 상정했다. 이성구 목사의 제명건 을 두고 노회 내에서도 찬반공방이 있었으며 노회는 제명여부를 표결에 부쳤다. 투표결과 찬성 60표, 반대 35표, 기권 4표로, 고신총회가 결의한 이성구 목사의 제명은 중부산노회원들에게도 받아들여졌다. 크리스천 투데이 기사 (허난세 위원nanse7042@hanmail.net, 2005-10-15 09:09)
고신교단이 이성구 교수를 제명한 것은 (1)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 담긴 성경관이 고신교단이 수용할 수 없는 자유주의 사상이며, (2) 근년에 주창한 에큐메니칼 사상이 자유주의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이유이다.
아래는 최덕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가 2004년에 고신교단 총회의 요청에 응해 연구하여 제출한 보고서이다. 각주를 포함한 완전한 글은 최근에 출간한 최덕성 지음 "개혁신학과 창의적 목회"(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5) 제3장 "사도신경이면 충분한가?"에 수록되어 있다.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최덕성 교수의 비평적인 분석과 개혁신학적인 통찰은 최근에 출간한 최덕성 지음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5)에 실려 있다.
사도신경이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한가?
―이성구 교수의 에큐메니칼 사상 분석―
이 글은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의 요청에 따라 쓴 것이다. 동료 신학자의 사상을 분석하는 난감하고 곤혹스런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교회의 정황이 원망스럽다. 필자는 교회가 요구하는 것을 거절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교회의 방향과 생명력과 직결되어 있는 아주 중요한 주제이고, 한국교회와 고신교단의 신학적 정체성과 신앙노선을 확고히 해야 할 시점에 있기에 기꺼이 응하였다.
이성구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구약신학)는 교회연합과 일치운동과 관련하여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 나머지 고백들은 사변적 신학이다”고 말한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전제조건으로 고백일치가 선재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한 말이다. 또 “한국장로교 안에는 자유주의 신학자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하고, 고신교단과 관련하여 “완전주의적 분파주의는 잘못이다”1고 지탄한다.
이러한 주장에 이의가 제기되자, 이성구는 위 내용을 보도한 매스컴의 기사가 자신의 말을 “크게 왜곡하거나 유감스러워 보이는 점은 없다”2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정당성을 논하는 다섯 편의 해명의 글을 썼다.3 “이제 우리는 한국교회의 분열에 좀 더 책임을 느끼고…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설정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우리 신학교와 교수들이 교회의 분열에 자주 그 도구가 된 신학교와 신학자들의 전통을 벗어나 연합과 일치를 이루는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선구적 사명을 다하도록 기도하자”4고 한다. “신학을 통한 교회연합과 일치운동의 길을 모색해 낼 것”5과 “자신의 관점이나 주장을 절대화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작업에 일조할 수 있는 교단이 되도록 신학적 작업을 선도하자”6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성구는 보수와 진보라고 신학의 양극화 현상이 사라지고 있으며, 신학적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론이 과연 어디까지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 신학자들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여기는 신학적인 차이가 과연 교회를 분리할 만큼 심각한 것인가 하고 반문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사상을 반영한다. 종교다원주의, 포용주의, 신앙무차별주의(Indifferentism)에 입각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과 일치한다. 이성구의 에큐메니칼 사상은 자유주의 에큐메니즘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반면에 역사적 기독교, 특히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과 상반된다. 그의 사상은 고신교단의 신학적 정박지(碇泊地)를 위협하며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1. 사도신경을 고백하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한가?
한국의 보수계 장로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고신교단은 지난 반세기 동안 칼빈주의라고도 하는 개혁주의 신앙노선을 지향해 왔다. 성경관(무오성, 완전영감, 유기적 영감), 예정론, 하나님의 주권사상, 언약신학, ‘오직은혜,’ ‘오직성경,’ ‘오직믿음,’ 개혁교회론, 칼빈주의 문화관 등을 표방해 왔다. 장로교 정치원리, 권징조례, 예배모범을 중요하게 여기고, 계시의존 신학, 인간의 전적 부패, 이신칭의, 칼빈주의 5대 교리, 개혁교회의 3대 표지, 개혁주의 성령론을 수납해 왔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으로 신앙을 고백해 왔다.
그런데 이성구는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 나머지 고백들은 사변적 신학이다”고 말한다. 사도신경이 교회연합과 교단통합, 교파통합의 충분조건이라고 본다. ‘사변적’이란 ‘생각으로 도리를 변별하는 것’을 뜻한다. 사변적 신학이란 덧없는 신념체계 혹은 이론에 지나지 않는 신학사상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방해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한 것이므로 사도신경 외의 신학적 주지(主旨)들, 예컨대 칼빈주의 성경관, 예정론, 이신칭의, 전적부패 교리, 은총론, 5대 구원교리, 개혁교회 3대 표지 등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성구가 사도신경 외의 고백들을 ‘사변적 신학’으로 단정하는 것은 세 가지 뜻을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1)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그 동안 고백해 온 것과 고신교단이 지난 반세기 동안 믿어 온 교리. 특히 성경관은 한낱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2)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대·소교리문답이나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과 벨직신경 등은 사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3) 그리스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도 사도신경을 고백하므로 고신교단이 그 교회들과 일치할 수 있다.
이성구는 고신교단과 로마가톨릭교회의 일치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자 “대답을 하기에 앞서 분명히 할 사[항]을 우선 살펴보자”고 하면서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면 어느 집단과도 연합이나 일치를 거부할 까닭이 없다고 한다. 사도신경의 유래, 사도신경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차이,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순서 등을 언급한 뒤에 “장로교회의 고백과 감리교회나 다른 교회의 고백이 무엇이 다르며, 왜 다른 교회의 고백이 거부되어야 하는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자들과의 연합과 일치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 교회연합에 그[사도신경] 이상의 어떤 신학적 조건이 필요한가”7 하고 말한다. 이러한 발상은 그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로마가톨릭교회와 하나됨을 추진하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
이성구는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는 말에 이의가 제기되자 자신의 그 주장이 교회의 일치가 아니라 연합에 대한 것이라고 해명한다.8 연합과 일치를 나누면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 외에 성도간의 ‘연합’에 그 어떤 조건도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일치’가 아닌 ‘연합’만을 두고 한 말인가?
이성구는 ‘한국장로교대회’의 ‘연합과 일치분과’ 주관으로 열린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관한 포럼’(한신교회당, 2000.6.14.)에서 “하나의 한국교회로 나아가자”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그 내용을 고려신학대학원 새벽기도회 시간에도 발표한 바 있다.9 그는 줄곧 한국교회의 연합뿐만이 아니라 일치를 주창해 왔다.
이성구는 장로교 기장 창립 50주년 희년 행사로 개최된 ‘하나의 교회를 위한 한국교회 대토론회’(2003.6.9.) 석상에서 “예장 고신은 신사참배문제로 갈라져 나왔지만 현재 신사참배 반대 혹은 찬성한 당사자들이 모두 사라진 시점에서 더 이상 분열의 명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새 판을 짜야할 시기다”10고 말했다. “나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시발점이 된 고신교회가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교회 연합과 일치운동의 선봉에 서야 한다고 믿고 있다”11고 말했다. 이성구가 말하는 ‘새 판짜기’는 연합이 아니라 일치행위이다.
이성구가 적극 지지하는 한국장로교협의회는 회원 교단장들의 이름으로 ‘교회일치를 위한 공동선언문’(1993.5.)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선언문은 한국교회의 분열에 신학적 정당성이 없다고 선언하고, 장로교단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표명한다. “우리 한국의 장로교단들은 신앙의 본질적인 항목들에 있어서 결코 분열될 만큼 의견의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남은 문제는 우선 협의회를 통하여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지향해야 하고, 결국은 하나의 한국 장로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12고 한다. 한국장로교계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연합만이 아니라 가시적 일치, 곧 교단통합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대표자 18인 위원회는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할 것을 천명하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단일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성구는 2003년과 2004년에 이 단체의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모임 실무 9인위원회”의 서기로 활동했다. 그는 기장의 권오성 목사와 함께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선언 전문(前文) 및 기본 원칙”을 작성하여 18인 위원회에 제출했다.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기본원칙”은 “다양성 속의 일치를 지향하며… 하나의 연합기구의 조직은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목적이거나 최종 결과가 아니라 시작이며, 분열된 교회들의 연합, 건전한 신학교육을 통한 한국교회의 궁극적인 일치를 지향한다”13고 선언한다.
연합과 일치는 바늘과 실의 관계이며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성구가 주도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하고 있는 한국교회 연합일치운동은 교단, 교파 단일화를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이면… 충분하다”고 한 말이 ‘일치’가 아닌 ‘연합’만을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은 사실과 다른, 구차한 변명으로 보인다.
사도신경을 고백한다고 하여 건전성을 가진 교회라고 단정할 수 없다. 독일고백교회는 나치 치하의 독일교회가 불의와 야합하는 데에 대항하여 ‘바르멘신학선언’(1934)이라는 고백문서를 작성하여 선포했다. 신사참배거부운동교회는 한국교회가 우상숭배를 강요하고 백귀난행을 저지를 때 ‘장로교인 언약’(1940)이라는 고백문서를 만들어 배교하는 교회에 저항하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밝혔다. 나치 치하의 독일교회나 일제말기의 한국교회는 각각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있었지만, 우상숭배를 행하는 교회, 배교하는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의 보편성을 상실한 교회였다. 그리스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도 그것을 고백한다.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이단 혹은 불건전한 기독교 집단으로 여기는 ‘교회’들 가운데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그룹들이 있다.
사도신경은 귀중한 역사적 신앙고백문이다. 개혁주의 전통은 사도신경을 “믿을 만한 기독교 신조”(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7문답)로 보고 교의학 스펙트럼을 그것을 중심으로 발전, 확대시킨다. 그러나 “믿을 만하다”는 말은 그 내용이 건전하다는 뜻이지 교회연합과 일치에 필요한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는 뜻은 아니다. 사도신경의 건전성과 교회의 하나됨의 조건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개혁주의 전통은 사도신경을 교회일치의 충분조건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가능하다거나 신앙고백공동체의 하나됨의 조건으로 충분하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인이 믿고 고백해야 할 조항들을 망라하기 위해 또는 교회연합과 일치의 최소한의 조건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됨”의 조건을 담은 고백문이 아니다. 그것은 영지주의(Gnosticism)의 도전에 대항하여 중요한 교리들을 간단히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가르친 교리의 핵심들을 충분히 담고 있지는 않다. 십자가의 도리, 죄의 회개. 이신득의(以信得義), 은혜의 교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천국과 지옥, 내세와 상벌, 성경의 권위와 그것의 신적 속성에 대한 언급도 없다.
이성구의 위 주장이 제기하는 더 큰 문제는 ‘교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다. 교리란 무엇인가? 바울은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1:8, 9)고 한다. 바울이 이 말을 할 때 염두에 둔 거짓교사들은 (1) 그리스도를 믿고 (2)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 (3)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바울은 (1) 그리스도를 믿어 (2)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3) 율법을 지키기 시작한다고 가르쳤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고 고백한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교리이다. 그는 교리체계를 제시한 뒤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고 말한다. 교리는 신앙공동체가 믿고 고백한 것을 체계화 한 것이다. 역사적 개혁주의가 표명하는 신앙고백과 교리는 구구절절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개혁주의 교리는 사변 신학의 산물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요약한 것이다.
이성구가 교회연합과 일치와 관련하여 “사도신경이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고 한 말은 교리를 무시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시각을 반영한다. “사도신경이면 충분하다”는 말은 자유주의 에큐메니스트들의 상투적인 주장이다. 미국북장로교회의 좌경화와 관련이 있는 자유주의 신학자 호레이스 부쉬넬(Horace Bushnell)은 기독교의 포괄성을 신학강령으로 삼고서 모든 진리를 통합하고자 했다. “칼빈주의가 알미니우스주의를 받아들이고, 알미니우스주의가 칼빈주의를 받아들이게 하자. […] 좀 더 포괄적이 될수록 우리는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며, 좀 더 많은 진리를 소유할수록 우리가 통합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14고 했다. 모든 교파를 해체시켜 마침내 거대한 포괄적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그는 교회와 교회 사이에 교리적으로 불일치하는 부분이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형식이라고 하면서, 교리지상주의는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리, 신조, 신학 때문에 발생하는 분파, 분열은 정당하지 않다고 말했다.15 그는 사도신경이면 연합일치의 조건으로 충분하며, 나머지 교리는 사치라고 보았다. 사도신경은 비교리적 복음의 완전한 본보기이며, 사변적이지 않으며, 순수하게 역사적이며, 교리라고 부르는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북장로교회의 좌경화에 크게 이바지한 외국선교부 총무 로버트 스피어(Robert Speer, 1929년 총회장)는 사도신경을 기독교 통합과 교회일치와 선교의 유일의 토대로 보고 그것을 고백하면 신앙고백공동체의 조건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진리가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 존재한다고 보았다. 자유주의 신학에 교회의 문을 열어주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의 본질이 교리가 아니라 생활이며, 신조가 신앙과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유린한다고 본다. 교리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방해물이므로, 따라서 비교리의 전형(典型)인 사도신경을 고백하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고 말한다.16
한국장로교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내가 마땅치 않게 여기는 교파도 같은 사도신경을 믿고 있으며… 교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면서 “사도신경을 고백하면 연합과 일치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17고 한다. 이성구가 주도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은 보수와 진보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신학을 창출하자고 한다. 신앙고백, 교리, 신조를 연합과 일치를 방해물로 보는 자유주의 신학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이성구가 사도신경을 교회연합과 일치의 충분조건으로 보는 것은 자유주의 에큐메니칼 신학을,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에큐메니칼 사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2. 교리지상주의, 성경론
이성구는 사도신경을 제외한 나머지 교리와 신학이 ‘사변신학’이라고 한 말에 대한 해명에서 “신학은 시대의 산물이요, 우리의 믿음을 인식하는 인간적인 틀일뿐이다. 여러 가지 역사적 신앙고백서들을 우리가 배우지 않아도 구원에 전혀 문제가 없다. 심지어 신학적인 지식이 없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 사도신경 외에 여러 가지 신조를 이야기하고 신앙고백서를 운위하지만, 이 땅의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18라고 말한다.
또 교회가 나누어지지 않을 수 없는 교리의 마지노(marginal)선이 무엇인가 하고 묻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구원의 확신 문제”라고 스스로 답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로마가톨릭교회 신자 가운데도 구원받을 사람이 전혀 없다고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다.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하는 구원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존재 의의로 삼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 교단과 하나됨을 도모할 것인가? 연합일치의 조건과 구원의 문제가 별개는 아니지만, 우리가 따지는 것은 신앙고백과 관련된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문제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격하시키고 교리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배후에는 성경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의 신학에 따르면 성경은 유태 기독교인들의 경험의 변천 과정을 토막토막 써 놓은 것이다. 신학과 신앙고백과 교리와 신학을 시대정신에 맞게 수시로 개조해야 한다. “종교는 교리(dogma)를 전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다. 교리는 신앙심을 북돋우기 위하여 동시대가 만들어 놓은 신학적 산물일 뿐이요, 신앙심을 두텁게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교리 그 자체는 진리도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다.”19 이성구가 “역사적 신앙고백서는… 배우지 않아도”라고 말하고, “사도신경 외에 여러 가지 신조를 이야기 하고 신앙고백서를 운운하지만”이라고 하는 말은 기독교의 역사적 신앙고백서들과 교리와 신학을 평가절하 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발상이다.
이성구는 “성경론이 과연 어디까지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 …사실 신학자들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여기는 신학적인 차이가 과연 교회를 분리할 만큼 심각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의 신학은 교리논쟁의 신학에서 벗어나 다원화 사회에서 대화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신학이어야 할 것이다”20고 말한다. “신학이 복음의 해석 작업이라면 항상 새롭고,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할 수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찌 함께 부름을 입었음을 알면서 홀로 옳음을 주장하며 남의 소리를 외면해 버릴 수 있을 것인가?”21라고 지탄한다. 과연 무엇이 이 시대 교회를 위한 신학인지 치열하게 씨름해야 한다고 하면서 “생명력을 상실한 고답적인 교리지상주의만을 외치고 있지나 않은지… 고민해야 한다”22고 말한다.
위 주장들에서 드러난 것은 이성구가 (1) 개혁주의 성경론을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2) 다양한 신학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며, (3) 교리를 소중히 여기는 개혁주의 전통을 “생명력을 상실한 고답적인 교리지상주의”라고 지탄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상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론을 과소평가하고, 신학적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교리지상주의를 질타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역사적 기독교를 ‘성경문자주의자,’ ‘교리지상주의,’ ‘엄격한 신조주의’23라고 맹렬히 비난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발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성구가 “성경론이 과연 어디까지 영향을 미쳐야 하는가?”라고 하는 말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개혁신학의 마지막 보루는 성경관이다. 고려신학교의 박윤선 교수는 성경론과 관련하여 “계시의존 사색으로만 구원받음”24이라는 이상한 표현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기독교 신앙에서 성경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박윤선의 시각은 박형룡 박사와 이근삼 박사 등 고려신학교의 교수들의 시각과 일치한다. 이성구의 시각은 박윤선, 박형룡, 이근삼의 시각과 매우 대조적이다.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에큐메니스트들은 보수계의 성경론이 연합일치의 걸림돌이라고 본다. 진보주의를 따르는 교회와 보수주의를 따르는 교회가 일치하려면 타협을 해야 하는 바 보수주의계 교회들이 ‘성경이 유일한 계시다’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것을 고수하는 한 교회일치가 어렵다고 한다. 교리를 따지면 끝이 없다고 한다. ‘신학에 대한 고집이 교회일치의 저해요인이라고 한다. “과거에 한국교회가 김재준 목사를 성경론 때문에 이단자처럼 취급한 것은 잘못이다”25고 말
한다. 성령론 때문에 교회가 싸움을 하거나 교단을 분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이성구는 (1) 성경론과 관련하여 “사실 신학자들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여기는 신학적인 차이가 과연 교회를 분리할 만큼 심각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한다. (2) 오늘의 신학은 교리논쟁의 신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한다. (3) 교회가 나누어지지 않을 수 없는 교리의 마지노(marginal)선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구원의 확신 문제”로 단정한다. (4) “한국교회 안에는 자유주의자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고신이 기장과 ‘새 판짜기’를 하지 못할 이유다고 하는 생각과 성경론 때문에 갈등을 겪은 김재준 교수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는 소신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성구는 개혁주의 성경론, 특히 무오성, 축자영감, 유기영감을 믿는가? 전승된 교리가 없다면 지금 우리의 신앙이 기독교적인지, 비기독교적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기독교 교리를 통하지 않고서 기독교의 생명력인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어 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교회사는 기독교의 생명력이 정통신학과 교리를 무시하고 새로운 인간적인 비전을 만들어야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승된 교리와 성경적 신학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시의(時宜) 적절한 창의적 신학을 주조해 낼 때 유지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오늘날의 교회는 뛰어난 목회방법과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 역동적으로 대처하는 능력과 새롭게 제기되는 질문에 답을 제공하는 창의적 신학활동을 요청한다. 신학자는 교회가 당면한 현실 문제들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다가올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해야 한다. 사회, 민족, 전쟁, 핵무기, 도시화, 공해, 인권, 인종차별, 평화 등은 개혁주의 교회들과 신학자들의 관심의 지평을 넓혀야 할 분야이다.
그러나 교회가 자신을 시대에 맞게 계발,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는 것이 역사적 기독교 교리와 신학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도들이 가르치고 종교개혁자들이 재확인하고 고신교단이 지난 반세기 동안 닻을 내렸던 신학적 정박지를 ‘고답적인 교리지상주의’로 여기고 시대정신이 넘치는 자유주의 신학 사상에 영혼을 맡겨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에 충실한 정통신학운동은 생명을 주는 신앙운동이다. 신학자는 미진한 영역을 보완, 개선, 체계화하는 것과 아울러 물려받은 신앙과 신학을 보존, 유지, 전승하는 책무를 지니고 있다.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고백주의(Confessionalism)는 역사의 한 시점에서 만들어진 신앙고백을 절대시하는 위험성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점이 성경에 바탕을 둔 신조, 교리, 신앙고백을 평가절하 해야 할 근거는 아니다. 고백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신앙이 참으로 존재하는 곳에는 언제나 신앙고백이 존재한다. 신앙고백이 없이 그리스도를 믿거나, 공식화된 신조 없이 성경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하나의 신화이다. 신조와 신앙고백은 신자들을 연합시키며 강건하게 한다.26
고신교단이 신앙고백문으로 채택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은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간추려 고백한다.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믿고 고백해야 할 바와 교회연합과 일치의 조건을 담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 단체들은 간단한 공적 신앙 문건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회원의 신앙을 통제하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들은 신조의 송영(doxological) 기능을 강조하는 반면 규제 기능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27 그러나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들은 교리와 신앙고백문서에 입각하여 교회 구성원의 신앙을 규제한다. 이것에 따라 권징을 시행한다.
주목할 것은 신학과 교리와 신앙고백의 관계이다. 신학은 신앙고백과 교리를 사유(思惟)하는 학문이다. 신앙고백을 사유하려면 해석학상 특정 관점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 관점은 신앙고백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가를 결정한다. 예컨대 신앙이 인간 감정의 순화와 자발성에서 나온다는 관점으로 사유하면 신학은 개인감정의 순화를 위한 학문 이론이 된다. 어떤 관점으로 신앙고백을 사유하는가에 따라 어떤 신학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 결정된다. 신학은 사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사도신경만 고백하면…” 연합과 일치가 가능하다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평소에 교리와 신앙고백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시사한다. 교리와 신앙고백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는 신앙고백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고신교단이 수용하고 고백하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별로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관점에서 그것을 사유하지 않는다.
신학자는 미진한 것을 창의적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을 하는 동시에 전승된 신앙고백들을 전승된 신학의 관점으로 사유하여 그것을 유지, 보호, 변증, 수호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신학자의 과업은 신앙고백과 교리를 신학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은 신앙고백으로 결정(結晶)된다.28 신학교는 교회의 신앙고백을 따라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다. 신학, 교리, 사도신경에 대한 이성구의 위 주장들은 신앙고백과 신학자의 학문 활동이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것과 신학자의 책무와 고신교단의 신학적 토대를 무시한다.
3. 세계교회의 흐름에 동참해야 하는가?
현대 에큐메니칼운동의 주제는 ‘세계교회’(church universal)이다.29 에큐메니칼 신학의 아버지 존 매카이(John Mackay)는 세계교회협의회와 관련하여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 곧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는 줄로 굳게 맺어져 있는 영적 실재이다. 이렇게 보면, 세계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주(主)로 되어 있는 모든 이들의 교제이다”30고 정의한다. 매카이가 언급하는 ‘세계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신학적 다양성’을 포용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거나 추종하는 교회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교단의 공적 고백문서가 표명하는 것과 실제 고백이 일치하지 않다는 점이다. 고백문서가 서술하는 것과 상반된 신앙을 가진 구성원을 규제하지 않는다. 교리, 신앙고백, 신학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이단자, 적그리스도, 거짓교사와 다를 바 없는 종교다원주의자, 자유주의자, 불가지론자가 교단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허용한다. 이런 저런 형태의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한다. 이러한 교회들은 대개 교회를 진리의 기둥, 신앙고백공동체로 이해하기보다는 친교(fellowship)나 사회단체(social organ)로 본다.31
한신대학교의 김경재 교수는 ‘유일신 신앙’을 본격 비판하면서,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여호와,’ ‘알라,’ ‘하늘님,’ ‘태극,’ ‘도’는 문화 콘텍스트에 따라 표현된 서로 다른 이름이며, 동일한 궁극적 실재라고 한다. 산(山)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등정로(登頂路)는 여럿 있으며, 어느 종교를 통하든지 절대자, 궁극적 실재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예수 이름을 듣지 못하고 죽은 “조상을 모두 구원받지 못한 자리로 내몰고 마는 그런 신앙과 신학이론에 안주하는 것은 지독한 종교적 이기심이 아닐 수 없다”32고 한다. 그런데도 기장교단은 종교다원주의자인 그의 신학을 문제 삼지 않으며 그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제재하지 않는다.
역사신학자 존 리이스(John Leith)는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가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위기가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질문하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답변을 신약성경처럼 분명하게 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말한다.33 자신이 지켜본 미합중국장로교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고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풍토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시행해 온 신학교육이 낳은 재앙이라고 지적한다. 리이스는 미국합중국장로교회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미국인들, 특히 젊은 세대의 미국인들이 가장 듣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캐나다연합교회(UCC)의 총회장 빌 필스 목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다. “예수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지 않는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항의가 빗발치자 그는 85명의 교단 집행위원들을 소집하여 며칠 동안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교단의 신학노선과 총회장 신임을 재확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캐나다연합교회는 개인 신앙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을 전통으로 삼고 있다…. 총회장의 개인적 신앙고백을 존중한다”34고 밝혔다.
미국연합감리교회의 감독 조셉 스프라그(Joseph Sprague)는 2002년 6월 25일에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의 아일리프신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나는 예수의 부활을 믿으나 그의 부활이 그의 육체적 몸의 회생(回生)을 포함한다고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배타적 생각들과 의견을 달리 한다…. 나는 다른 종교들이 열등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 밖에 있다고 혹평하는 것보다 예수의 계시를 나의 삶과 교회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한 사람의 희생 죽음이 신의 진노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묘사하는 대속의 이론을 찬성하지 않는다…. 피의 제사 개념은… 미신이다”35고 말했다.
영국국교회(성공회)의 성직자 3분의 1은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의심하고 2분의 1은 동정녀 탄생을 의심하거나 불신한다고 한다.36 호주성공회 목사 존 세퍼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 등의 교리가 역사적인 내용이 아니고 하나님의 월등한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쓰인 상징적 이야기이며, 동성애를 죄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고 한다.37
위 교회들은 모두 대표적인 ‘세계교회’들이다. 이 교단들의 공적 고백문서는 이단교리를 담고 있지 않는다. 사도신경을 고백한다. 그러나 모두 고백문서와 실제고백이 일치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중추 도리를 고백하지 않는 자를 목사와 감독으로 안수하여 세운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이단과 거짓교사의 가르침보다 더 해로운 사상을 가르치는 신학자를 용납한다.38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의 김재준 교수는 고려신학교(현 고려신학대학원)에 대해 악평하면서 한국교회가 “전 세계적인 대생명체”와 결별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정통장로교파의 암약(暗躍)에 대하여 일언(一言)합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교인들이여” 하면서, “메이첸파의 손에 우리 조선장로교회 전체를 맡긴다는 것은 조선장로교회를 전 세계적인 대 생명체에서 절단하여 일부반도(一部叛徒)에게 붙이는 것이다”39고 말했다.
김재준은 또 “저들[메이첸파=고신파]의 기독교는 인격의 종교가 아니라 관념의 종교이며, 성신의 종교가 아니라 책의 종교[이며], 성경적 계시, 교리적 신앙을 표방하고 기독교의 절대성을 성경에 둠과 동시에 성경의 권위는 그 축자적 영감에 두고 이에 부합되지 않는 자는 모조리 교역계에서 축출하려는 실제 운동을 일으킨다”40고 했다. 김재준이 말하는 ‘전 세계적인 대생명체,’ 곧 세계교회는 미국북장로교회(현 미합중국장로교회), 캐나다연합교회, 호주장로교회, 스코틀랜드장로교회 등이다.41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고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의 태도를 지닌 교회들이다. 오늘날 생명력과 정체성을 상실하고 교인 수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교회들이다.
이성구는 연합일치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고신)가 다른 개혁교회, 다른 개신교회와 다르다면 도대체 우리는 세계교회에 무엇으로 어떻게 공헌하려 하는가? 세계의 흐름과 상관이 없다면 우리가 개혁주의를 외치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42라고 한다. ‘세계교회,’ ‘다른 개혁교회,’ ‘다른 개신교회,’ ‘보편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강조한다.
우리나라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초기에 선교사들의 주도로 통합을 시도한 바 있다. 교파주의 교회를 극복하고 단일 한국교회를 건설한다는 동기로 시도했다. 그러나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가 하나 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 시대의 감리교회의 신앙은 상당히 온건했는데도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교회의 일치를 도모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무산되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한국의 교단들이 연합과 일치에 완전히 성공하여 단일 교회조직으로 통폐합된 적이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한국의 교단들을 단일화 시켜 일본기독교단에 종속시켰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은 신도교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황민화의 도구로 우상숭배와 민족배신 행각에 열성을 다했다. 유일신 신앙을 배격했다. 그리스도가 왕중왕이라는 고백을 부정했다. 신도(神道) 정신에 충실한 종교단체였다. 이 친일 에큐메니칼 교단을 이끌던 에큐메니스트들은 광복 뒤에 ‘하나의 한국교회’의 대명사인 ‘조선기독교단’이라고 하는 친일잔재 교단을 조직하여 교회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감리교 측의 탈퇴로 실패하자 이 “교단은 해산되고 그 대신 일정 때의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의 재건 형식으로 탈바꿈하여 1946년 9월 3일에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창립되었다. 여기에는 장로교·감리교·성결교·구세군 그리고 국내의 각 선교부와 교회 기관들이 가입했다.’ 이때의 주동 인물들은 물론 남부대회의 간부들이었다.”43 이러한 역사를 가진 한국기독교협의회 초대 회장에 화려한 친일전력을 가진 친일파 거두 김관식 목사가 피선되었다.
교회의 진정한 하나됨은 신앙고백과 교리의 일치를 전제로 한다. 바울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지키라”(엡4:1-6)고 말한 것은 분열된 교회들의 단일화를 독려하는 말이 아니다. 외형적 획일주의(Uniformity)나 친교(Fellowship)나 가시적 교회(a visible church)를 도모하라는 권고가 아니다. 교파통합이나 교단 ‘새 판짜기’를 하라는 말이 아니다.
교회의 통일성(Unity)은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에 대한 일치된 신앙고백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나님이 선택하고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시고 성령께서 인친 자들의 연합에 기초해 있다. 바울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라”는 말을 하기 전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2:20)고 한다. 그가 말하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들이 가르친 교훈, 교리를 뜻한다.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했던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는 신앙고백적 단일성을 가진 신앙고백공동체였다.
교회가 분립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나 분열된 상태로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하고 유해한 것은 기독교의 존립을 위협하는 신학사상의 교회 유입이다. 난잡한 현대 신학사조에 대한 경계심 없이, 자유주의 신학, 신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종교다원주의 등을 묵인하면서 연합일치를 도모하는 것은 주의 포도원을 여우에게 내어주는 격이 될 뿐이다.
현재의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은 교리와 신앙고백적 전제에 대한 논의 없이 진행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신학을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이러한 포용주의 움직임에 걸맞게, 이성구는 기존의 “관점이나 주장을 절대화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작업에 일조할 수 있는… 신학적 작업”44을 재촉하고 있다.
이성구가 구상하는 이러한 신학은 어떤 것일까?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지난 반세기 동안 그러한 신학을 만들어냈는데, 한국의 에큐메니스트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신학은 세계교회협의회 관련자들이 생산한 신학 그 이상이 되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 나머지 고백들은 사변신학이다”고 하는 말은 ‘세계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의 다원주의 에큐메니칼 신학, 정통신학과 교리를 사변신학으로 여겨 상대화시키는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를 반영한다.
이성구가 “기존 관점이나 주장을 절대화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자”고 하는 말은 고신교단이 기존 관점이나 주장을 절대화하는 교단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역사적 기독교를 고수하려는 고신교단의 태도가 이성구의 눈에는 “관점이나 주장을 절대화하는” 태도로 비친 것으로 보인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작업에 일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오히려 자기 자신의 세계관을 절대화하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세계교회’에 일조하기에 고신교단이 편협하다고 하는 그의 전제는 실상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편협한 세계관을 반영한다. 왜 그의 눈에는 고신교단이 편협한 교단으로 보일까? 왜 유서 깊은 기독교 신학을 가진 고신교단이야말로 세계 기독교에 진정으로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할까? 고신교단이 가진 고유한 신앙고백을 버리거나 타협하거나 탈기독교화 하는 것만이 ‘일조’하는 것인가? 그가 말하는 ‘일조’의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의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성구는 고신교단이 세계교회에 ‘일조’하자면 고유한 신앙고백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보는 까닭이 무엇인가? ‘세계교회’가 고신교단이 지향하는 신학노선 안으로 들어오면 안 되는가? 세계교회라는 거창한 슬로건은 지고의 선(善)인가? 고신교회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신앙고백, 신조, 신학을 포기해야 할 만큼 ‘세계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바람직하고 성경적인가? 세계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확고한 정체성과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가? 남의 밥그릇이 크게 보이는 식의 패배주의, 자학주의의 결과는 아닌가?
4. 세계개혁교회연맹에 가입해야 하는가?
이성구는 고신교단이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에 참여하지 않는 것과 관련하여 “과연 우리가 말하는 개혁주의는 무엇인가? 다른 개혁주의와 얼마나 다른가? 우리가 다른 개혁교회, 다른 개신교회와 다르다면 도대체 우리는 세계교회에 무엇으로 어떻게 공헌하려 하는가? 세계의 흐름과 상관없다면 우리가 개혁주의를 외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45라고 말한다.
이성구는 자신이 개혁주의자라고 하면서 “나를 비난하는 이와 나의 피 중에 어느 피가 더 개혁주의 요소가 많은지 검사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46고 말한다. 그러나 이성구가 이해하는 개혁주의와 고신교단이 이해하는 개혁주의는 같지 않다.
‘개혁주의’는 일반적으로 종교개혁 이후 스위스 중심의 개혁파 전통을 따르는 개혁파교회, 장로교회, 회중교회의 신학 전통을 일컫는다. 유럽에서는 비로마가톨릭교회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레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도 개혁주의자(개혁파 신학자)라고 불리며, 신정통주의자 칼 바르트도 개혁주의 신학자로 일컬어진다. 한편, 자유주의 신학과 신신학(바르트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는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그레스앰 메이첸과 코넬리우스 반틸과 국제기독교연합회(ICCC) 총재 칼 매킨타이어도 충실한 개혁주의 신학자이다.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의 김재준 교수와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의 박형룡 박사도 ‘개혁주의 신학자’이다.
이성구가 ‘개혁주의 피’ 운운하면서 언급하는 개혁주의는 ‘세계교회,’ ‘다른 개혁교회,’ ‘다른 개신교회’가 지향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신신학계의 개혁주의와 궤를 같이 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세계개혁교회연맹, 세계교회협의회와 관련된 자유주의계 계통의 개신교회 또는 개혁교회들, 곧 김재준이 말하는 ‘전 세계적인 대생명체’와 일치한다.
이러한 논의에서 이성구는 자신이 개혁주의자이므로 자유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논리를 펼친다. 그러나 개혁주의와 자유주의는 상반, 대립되는 신학이 아니다. 개혁주의 안에는 자유주의 노선을 걷는 개혁주의와 역사적 기독교를 지향하는 개혁주의가 있다. 이 둘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호 대립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서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이유로 자신이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하거나, 자유주의와 개혁주의가 상반, 대립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범주착각의 오류이다.
고신교단이 출범과 더불어 발표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 발회식 선포문’(1952)47은 ‘개혁주의 신앙운동’을 표명한다. 한국장로교회가 전수받은 개혁주의를 계승한다고 선언한다. 평양에서 마포삼열, 구례인, 박형룡 등이 가르친 개혁주의, 한상동·주남선·손양원 목사가 전수받은 유서 깊은 개혁주의를 계승하고자 한 것이다.
고신교단이 이해하는 개혁주의는 고려신학교의 박윤선 교수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메이첸과 반틸의 신학 전통에 따라 개혁주의를 소개했다. 박윤선의 가르침을 따라 고신교단은 개혁주의 양대 진영 가운데서 역사적 개혁주의 노선을 따랐다. 개혁파 정통주의, 칼빈주의, 전통적 개혁주의, 개혁주의 정통신학 등으로 일컬어져 온 신학노선을 따랐다. 종교개혁자, 칼빈주의자, 구프린스톤신학자, 웨스트민스터신학자, 평양신학자들이 가르치고 고백하던 신앙을 따르고 있다.
이성구가 말하는 ‘개혁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신신학자들이 말하는 개혁주의를 지칭한다는 것은 아래의 네 가지 사실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첫째, 이성구는 고신교단이 연합운동의 주류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비가맹교단이라는 것을 개탄한다. “KNCC 비가맹교단인 고신은 소위 한국교회의 주류 흐름과 상관이 없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48고 한다. 한국교회가 선교사들 때문에 ‘억울하게도’ ‘한국기독교회’라는 단일교회로 출범하지 못하고 장로교, 감리교 등 교파교회로 시작했다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그는 고신교단의 일부 인사들이 각종 연합회 임원으로 활동하는 것을 극찬한다. 고신교단이 지금까지 연합보다는 ‘교단정신 유지’에 연연하면서 “강단 교류 문제[와 관련하여] 국내외를 막론하고 칼빈주의 보수교단으로 제한하기로 한 것”에 대해 개탄한다. “‘본 교단 정신에 맞지 않는 교단은 거부키로’라는 상당히 부정적인 언어를 덧붙여 연합보다는 고신정신 유지[에 연연했다]”49고 비판한다.
둘째, 이성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다. 그는 “1924년부터 한국교회를 대표해 온 자부심을 갖고 있는 KNCC가 이전과 같은 위상과 역할을 갖지 못하고 침체기에 빠져든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을”50 안타깝게 여긴다. “KNCC는 보수주의 교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우려하는 신학이나 원리를 표방하고 있지 않다”51고 강변한다. 이 단체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한국기독교회의 연합사업과 교회일치운동을 에큐메니칼 정신에 따라 한국교회 입장에서 협의하고 실천해 가고 있으며, 특히 남북 기독교의 영적 일치와 민족의 숙원인 평화통일을 위해 남북기독교 대표들 간의 평화통일선교협의회를 해 오고 있으며, 중국, 러시아 등의 해외동포를 포함한 한민족 선교와 세계선교를 위하여 국내의 교회들과 협력하고 있다”52고 치하한다. 아울러 이 단체의 목적 다섯 가지를 설명하고, “이에 반하여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목적과 방향을 정확히 밝히고 있는 자료를 접하기가 쉽지 않다”고 꼬집는다. 이성구가 호의를 가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세계교회협의회의 한국 지부 격인 에큐메니칼 단체이다. 같은 로고(logo)를 사용한다. 이단과 오설에 무관심한 단체이며, 로마가톨릭교회와 일치를 도모하고 있다.
셋째, 이성구는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다. 한국의 보수계 교단들이 이 단체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강변하면서 “여전히 WCC에 대한 잘못된 인상이 한국보수교단 내에 뿌리 깊은 만큼, WCC의 현재를 정확히 알리고… 왜곡된 사실들을 바로잡는 작업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53고 역설한다. 그는 이 단체가 종교다원주의를 공식 선언하고, 타종교 안에도 성령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있다고 선포한 것을 모르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이 현대판 자유주의 신학인 종교다원주의를 선호하기 때문인가?
넷째, 이성구는 고신교단이 세계개혁교회연맹에 가입하지 않는 것을 개탄한다.54 “본인은 아직 ‘세계개혁교회연맹’에 왜 참석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적시한 [고신]교단의 문서를 본 적이 없다. 무엇이 문제인지 말해 줄 수 있는가? 본인은 우리가 참이라면, 이단이 아니라면 누구와도 만나 교제하며 이해의 폭을 넓히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55고 말한다.
세계개혁교회연맹은 자유주의계 개혁파 에큐메니칼 단체이다. 1875년에 장로회 체제를 가진 유럽과 아프리카의 개혁교회 연합체로 시작했다가 1970년에 합동 과정을 거쳐 현재의 형태로 바뀌었다. 세계교회협의회와 동일한 에큐메니칼 신학을 지향한다. 그 사무실을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 사무실 곁에 두고 있을 정도로 두 단체는 밀접하며, 한 계통이다.
세계개혁교회연맹은 프로테스탄트 교회 일각에서 이단으로 여기는 안식교와 일치를 위한 대화를 하고 있다(‘세계개혁교회연맹과 안식교의 일치대화 보고서’를 보라. www.reformanda.co.kr ‘신학정보’). 이 단체는 로마가톨릭교회, 세계교회협의회, 세계루터파교회협의회(LWF)와의 연합과 일치를 모색하고 있다. 성경무오성을 부정하는 기독교 단체도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있다. 교리를 벗어나 공동교회를 이루어야 한다고 하고 사회, 정치, 화해, 평등, 대화, 인도주의, 교제, 경제적 불평등 해소 둥에 관심을 기울인다. 신앙고백의 일치보다 제도의 연합과 일치를 우선시 한다. “세계의 모든 종교들과 문화를 수용하는 폭넓은 개념의 교회”56를 지향한다. “우리는 특히 많은 교회들이 자신들을 깨닫고 있는 다종교의 상황에서 다른 종교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문을 열고 대화를 시작하고 실제적 협력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57고 한다.
장로교 기장과 통합은 여러 해 전부터 이 단체의 회원교회로 활동해 왔다. 근년에 대신교단과 합동정통교단이 이 단체에 가입했다. 지도급 인사들이 한국장로교연합회 중심으로 교회연합과 일치운동을 하다가 기장교단과 통합교단 인사들의 권유를 받아 가입했다. 이 교단들은 교회의 정체성과 생명에 직결된 신앙노선, 신앙고백과 관련된 사안을 결정하면서도 신학적 검토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한다. 전하는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외국 나들이를 좋아하는 인사들이 주도하여 정치적으로 결정했다”58고 한다.
한국장로교연합회 서기 전병금 목사는 ‘한국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 모색’이라는 제목의 주제 강연에서 “처음부터 기구적인 통합을 모색하려고 하기보다는 우선 연합교회의 형태를 갖춰가면서 점진적인 통합을 이뤄가야 한다”59고 말하면서, 모든 장로교단들이 세계개혁교회연맹에 참여하여 세계교회와 연합을 강화해 나갈 것 등을 제안한다. 이성구가 고신교단과 세계개혁교회연맹을 관련시키려는 것은 기장, 통합의 인사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권유를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신교단은 성경적 신앙고백과 개혁신학의 정체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국제개혁교회협의회(ICRC)의 회원교회이다. 이 단체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의 정체성과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세계의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다.
5. 한국장로교회 안에는 자유주의자가 없는가?
이성구는 “한국장로교 안에는 자유주의자가 없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교회 안의 자유주의 신학자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러나 총회에 제출한 소명서는 이와 모순된 말을 하고 있다. “기장을 염두에 두고 자유주의 운운하는 것 같은데, 현재 기장을 자유주의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지 먼저 그것을 총회가 규정지어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혹시 개인적으로 자유주의적 신학을 가진 학자들이 있을 것이고, 신앙의 색깔이 다를 수는 있을 것입니다”60고 한다. “개별적으로 장로교단 안에 종교다원주의자가 있을 수 있다…. 그들의 신학적 작업을 학문의 영역으로 묵인하고 있을 뿐”61이라고 한다. 한국의 그 어느 교단도 자유주의 신학, 종교다원주의를 공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자유주의 사상 때문에 연합일치를 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기장은 1953년에 자유주의 신학 문제로 스스로 갈라져 나가 독립했다. 이 교단이 급진적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고 종교다원주의자를 용납하는 등 자유주의 신학노선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교회사적으로도 규명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성구는 기장이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교회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다만 그 교단 안에 소수의 학자들이 학문 차원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교회, 교파는 신앙고백공동체이다. 그 교회를 대표하는 노회나 총회가 자유주의 신학자나 그 신학을 추종하는 자를 지지하거나 용납할 때, 제재 하지 않을 때, 그 교회, 교파를 자유주의 교회라고 보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그 교회, 교파 안에 정통신학을 고백하는 다수의 개인들이 있다고 하여 그 교회의 공식 입장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다가 근년에 교인 수가 급격하게 감소되고 있는 미국, 영국, 독일, 캐나다, 호주의 교회들의 공식문헌은 자유주의 신학을 표방하지 않는다.
이것과 관련하여 이성구의 사상에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자유주의 신학자, 신신학자, 종교다원주의자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학문의 영역’으로 여기고 허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점이다. 둘째는 교회가 소수의 자유주의자, 종교다원주의자를 용납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는 생각이다. 신학의 차이 때문에 교회연합과 일치운동이나 통폐합이나 교단 ‘판짜기’62를 주저할 까닭이 없다고 본다. 이러한 시각은 자유주의계 인사들의 보편적인 견해이다.
이성구는 “자유주의란 특정 신학이나 고백에 종속되지 않고 시대에 맞게 적절하게 신학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인간중심적으로 흐르는 등 끝이 좋지 않았을 따름이다. 크게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거나 성경을 부정하는 자가 자유주의자라고 해야 한다”63고 정의한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동정녀 탄생, 육체의 부활 등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자유주의자로 말할 수 있다”64고 정의하면서 한국장로교회 안에는 그러한 사상을 가진 신학자나 교단이 없으므로 연합과 일치가 가능하다고 본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그의 정의는 매우 독단적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해 왔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다.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났다. (1) 프레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1768-1834), 알버트 리츨(1822-1889), 창세기가 여러 가지 전승들로 편집된 것으로 보는 성경학자들,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 신학자들의 사상,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거부하는 구자유주의(Old Liberalism) 등이다. (2) 오번선언서(Auburn Affirmation, 1924)를 작성, 지지하는 자들의 사상이다. 성경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속죄사역, 육체부활, 초자연적 기적능력 등을 단지 이론 혹은 학설로 단정한다. (3) 사회복음주의 신학, 불트만의 비신화화 신학,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을 부정하는 고등비평학, 구약성경을 신화집·전승집으로 보는 성경신학, 성경적 신론을 비신화화 한 폴 틸리히와 존 로빈슨의 신학,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 알타이저의 사신(死神)신학, 하나님을 믿지 않는 기독교 신학,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하는 현대주의 신학,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등이다. 종교다원주의는 현대판 자유주의 신학이다.
(4) 한국교회는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를 자유주의에 포함시켜 왔다. 신신학(바르트주의, 신정통주의)은 성경고등비평학, 아빙돈주석 사건, 교회 안에서의 여자 위치, 바르트주의 성경관 등과 관련하여 자유주의 신학으로 일컬어져 왔다.65 바르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며, 정통신학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자유주의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 왔다. 신학구조, 성경관-계시관, 만인구원주의적 경향은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과 상반된다. 바르트주의를 수용하면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게 된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코넬리우스 반틸 박사가 신신학을 자유주의보다 더 교묘한 기독교의 적으로 여기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성구는 “공교회로서의 한국장로교 [안에는 그리스도의 양성, 동정녀 탄생, 육체부활 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를 공인하는 교단이 없다”66고 말한다. 자신이 한국교회 안에 자유주의자가 없다고 말한 것은 자유주의를 공인하는 교단이 없다는 뜻이라고 해명한다. 그는 자유주의를 위 (2)의 정의, 곧 1920년대 미국의 ‘현대주의―근본주의 논쟁 시대’의 개념에 고정시킨다.
자유주의에 대한 이성구의 정의(위 2)에 따르면 김재준, 문희석, 윤성범, 변선환, 정현경, 김경재는 자유주의 신학자가 아니다. 종교다원주의를 공식 표방하는 세계교회협의회도 자유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에큐메니칼 단체가 아니다. 그들이나 그 단체가 직접적으로는 사도신경이나 기독교의 근본 도리들을 부정한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슐라이에르마허, 리츨, 불트만, 로빈슨도 자유주의자가 아닐 수 있다. 모세오경의 모세저작을 부정하는 신학, 성경을 신화집·전승집으로 보는 신학, 성경적 신론을 비신화화 하는 사변신학, 비신화화 신학, 사신(死神)신학도 자유주의가 아니다. 성경무오성과 완전영감과 유기적 영감을 부정하는 사람도 자유주의와 무관하다는 것이 된다. 장로교 기장도 자유주의와 무관하고, 조선신학교에 항거하여 고려신학교로 편입해 온 학생들이 총회에 올린 ‘진정서’(1947)67가 열거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사실상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라는 것이 된다. 출옥성도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선전하는 조선신학교에 한국교회의 목회자 교육을 맡길 수 없다는 동기로 고려신학교를 설립한 것도 무의미한 것이고, 고신교단이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면서 ‘정통신학운동’을 기치로 삼아 출범한 것도 허황된 일이 된다.
어느 교회가 공적 고백문서에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죽음, 육체부활, 이적능력, 성경의 권위 등을 공적으로 부인하면 더 이상 기독교회가 아니다. 역사상 공적인 고백문서에 근본도리를 부정하는 고백을 담은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68 자유주의의 첨단을 걷는 미국과 유럽의 교회들, 한국의 진보주의계 장로교, 감리교 교단들도 그런 것을 고백문서에 공공연히 명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공적 문헌에 자유주의를 공인하는 교회가 없다고 하는 이유로 한국교회 안에 자유주의 교회가 없다고 보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자유주의에 대한 이성구의 위 정의는 보편성을 결(缺)하고 있다. 그는 독단적인 정의를 가지고 자기가 자유주의자가 아니며 “한국장로교 안에는 자유주의자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바, 이것은 오히려 자신이 자유주의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논거가 된다. 위 (2)를 제외한 나머지 정의에 해당될 수 있다. 신학계는 (1)과 (3)의 개념으로도 자유주의 신학을 언급한다. 한국교회는 여기에 (4), 곧 바르트주의를 덧붙인다.
자유주의 신학은 단일 신학체계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확고한 신조나 정연한 신념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정통신학과의 거리도 일정하지 않다. 온화한 자유주의가 있는가 하면 과격한 자유주의가 있다. 극단의 자유주의를 배제하는 자유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기독교의 중추 도리를 신봉하지 않는 자유주의도 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지만 성경을 신화, 영웅담, 전설집으로 취급하는 자유주의자도 있다. 정통주의, 신정통주의를 큰 폭으로 수용하는 자유주의도 있고,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자유주의도 있다. 한국 장로교계는 금세기에 나타난 신학 학설들 가운데서 정통신학과 상반되는 이론들을 총 망라하고 포괄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으로 일컬어 왔다.
용어는 그것이 사용되는 콘텍스트에 따라 정의된다. 그러므로 이성구가 자신이 자유주의 신학의 일부분을 비판한다고 하여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거나 개혁주의 진영 교단에 속한 신학자라는 이유로 자신이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은 범주착각의 오류이다. 이성구는 “나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를 대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나는 정통신학을 지향하는 고신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에 충실한 개혁주의자이다”고 말하고 그것을 입증할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성구는 고신교단의 신학교에서 교수하는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라 목회자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교회사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6. 고신교단은 완전주의적 분파주의 집단인가?
이성구는 고신교단이 1960년에 승동파와 합동을 한 것을 고신운동의 중단으로 본다. “고려파의 존재는 역사적으로 항상 그 정당성을 갖는가? 1960년의 합동사건은 46년에 시작된 고신운동의 중단을 선언한 행동이 아니었는가?”69라고 한다. 그가 합동을 고신운동의 중단으로 보는 것은 현재의 고신교회의 존립의 가치와 정당성을 부인하는 말이다. 이른바 ‘고신교단 신학자’로 자기가 속한 교단의 존립의 가치와 정당성을 부인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비단 이성구 한 사람에 제한된 문제는 아니다.
이성구는 “완전주의적 분파주의는 잘못이다. [고신]교단 신학자 중 그런 입장을 가진 이가 있는데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70고 말한다. 그는 고신교단과 ‘완전주의적 분파주의’를 동일시한다. 고신교단에 대해 말하면서 “‘완전주의를 주창하며 결국 분열을 정당화하는 자세는 옳지 못하다’[고 하]는 칼빈의 견해는 우리 교단이 두고두고 주의 깊게 새겨야 할 명제다”71고 말한다. “신사참배[거부운동으]로 시작된 교단이라는 자기 의, …선민의식”72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고신교단이 연합일치운동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까닭이 완전주의적 분파주의 때문이라고 본다.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이형기 교수는 고신교단이 ‘완전주의적 분파주의’ 때문에 태동했다고 하면서 고신파가 가시적 거룩성(visible sanctity)에 너무 집착하여 장로교회에서 분열해 나갔다고 말한다. 경남의 출옥성도들이 가시적 거룩성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신사참배에 동조했던 교회들과 목사들과 장로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고신분열의 원인이라고 한다.73 이것은 날조에 가까운 역사왜곡이다.
이성구는 고신교단과 ‘완전주의적 분파주의’를 관련시킨다. 근거 없이 고신공동체를 비난하고 폄하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의 시각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고신교단 신학자 가운데 ‘완전주의적 분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누구며, 왜 그가 정직하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는다. 필자가 파악하는 바로는 고신교단 안에 완전주의적 분파주의 교회관을 가진 신학자는 없다. 고신교단을 완전주의적 분파주의와 관련시키고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을 고대 도나투스주의자들과 동일시하여 분리주의자로 단정하는 왜곡된 역사인식을 교정하고, ‘진리 안에서 연합과 일치’를 강조하는 신학자는 있다.74
이성구는 고신교단과 그 교단 신학자들과 관련하여 “보편성이 유지되지 않으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특수성을 갖지도 못했으면서, 마치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지나치게 자신의 신학을 미화하는 작업을 이제 중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무슨 특별한 것이 있는가? 고신의 특수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이제 좀 더 허심탄회하게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작업에 일조할 수 있는 교단이 되도록 신학적 작업을 선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75고 한다.
이러한 주장이 고신공동체의 개혁과 발전 과제에 대한 언급이라면 긍정적 제안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 나머지 고백들은 사변적 신학이다”는 말에 대한 해명으로 한 말이다. 신사참배를 죄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없고 그것을 찬성하거나 반대한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으므로 고신교단의 존재명분이 사라졌으며, 따라서 장로교회들이 ‘새 판짜기’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한 말이다. 교단의 벽이 허물어지고 특수성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으며 일치를 넘어서 갱신으로 가야하는 마당에 고신교단이 특수성에 집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고신교단의 존립의 가치와 정당성을 부정하는 말이다.
7. 이성구의 자유주의 에큐메니즘
이성구의 에큐메니칼 신학은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교단, 교파 난립이라는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굽어지고 흐트러진 한국교회의 분열상은 어떤 형태로든지 바로잡고,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성구의 주장은 우리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자고 하는 자책을 담고 있다. 함께 고민해야 할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국교회의 분열 상태만을 걱정했지 연합일치운동이 가져오는 파괴적 요소와 생명력 상실의 위험을 문제 삼지 않는다. 자유주의 신학에 바탕을 둔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자다운 통찰을 보여주지 않는다. 바울이 기대하는 복음진리 파수꾼의 사명이나 고신교단 신학자가 가질 법한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에큐메니칼 사상은 자유주의 노선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일치하는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 태도로 일관한다.
고신교단 총회(신학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제출한 이성구의 소명서(疏明書)는 자신이 평소에 쓴 글들과 다소 차이가 있다. 연합일치운동과 관련하여 그가 글로 남긴 것들을 종합해 볼 때 그의 에큐메니칼 사상은 자유주의 에큐메니칼 신학과 일치한다. 신조, 교리, 성경관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신념과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과 상반되고 고신교단의 신앙고백과 신학에 역행하는 사상을 펼친다. 그는 고신교단의 존립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성경론을 상대화 한다.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개혁주의 전통을 규탄한다. 다양한 신학을 포용해야 하고, 신학을 시대의 요구에 따라 자유롭게 변개해야 하고, 교리에 대한 고답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사도신경이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고 하는 말을 포함한 앞에서 언급한 이성구의 여러 가지 주장들은 그가 고신교단의 신앙고백과 교리와 신학 전통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고신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에 충실하고자 하는 신학자가 ‘완전주의적 분파주의’ 또는 ‘편협한 교회관’을 가진 사람으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 고신교단이 기존의 관점과 주장을 절대화하는 ‘고답적인 교리지상주의’ 교단으로 여겨질 것이다.
사도신경이 오늘날의 교회의 연합과 일치 조건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것은, 곧 연합과 일치의 충분조건이라고 하는 말은 역사성과 현실성을 무시한 발상이다. 초대교회에서 만들어진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앙의 신앙상징(symbols)이지만, 21세기의 교회연합과 일치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초대교회는 자유주의, 신신학, 종교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를 알지 못했다. 기독교회가 2천년의 역사를 거쳐 오면서 만들어진 수많은 고백과 신조들은 왜 생겨났는가? 사도신경으로 충분하다면 우리의 신앙선배들은 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을 만들었는가? 왜 장로교회들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교리표준으로 채택했는가? 교회와 교리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논쟁을 하고 고백문들을 만들고 독자적인 교회를 유지한 종교개혁자들과 교회의 우상숭배에 맞서 싸운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과 교회의 신학적 좌경화에 맞서서 항거하거나 그 틈바구니에서 제재를 당하고 불가피하게 자유를 선택한 신앙 선배들의 노력은 헛된 것인가?
신학자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가 고백하는 신앙고백, 신조를 개혁주의 전통에 근거하여 사유하며 정통신학을 수호하고 보호하고 흡족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성경에 충실하게 창조적으로 발전시킬 사명을 가지고 있다. 고신교단의 신학자는 자기가 속한 교단의 신앙고백적 기초와 신학적 지향점을 존경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가지고 있다. 신학교는 동일한 교리에 입각한 신앙고백과 그것에 상응하는 신학전통을 가진 교회들이 모여 교단을 이루고 그 교단의 발전을 위해 세워지고 교회들의 기도와 금전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목회자 양성기관이다. ‘학문의 자유,’ ‘학문의 영역,’ ‘세계교회의 흐름’을 빌미로 그 교단의 정박지를 허무는 사상을 펼치고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그 신앙공동체에 대한 정면도전이며 도덕성이 결여된 행동이다.
이성구는 고신교단이 역사적 개혁주의라고 하는 신학적 정박지를 버리고 자유주의 신학에 바탕을 둔 세계교회의 흐름에 따라 갈 것을 재촉한다. 유서 깊은 개혁주의 전통과 상반되며 자유주의 신학과 그 에큐메니칼 사상에 일치하는 이성구의 주장들을 아래와 같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다시 열거한다.
(1) “사도신경을 고백하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고 한다. 교회가 “나누어지지 않을 수 없는 교리의 마지노선”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구원의 확신 문제”에 제한시킨다. 고신교단이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로마가톨릭교회나 이단집단과 연합, 일치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친다.
(2) 사도신경을 제외한 “나머지 고백들은 사변적 신학이다”고 말한다.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가 중요하게 여겨 온 신학 주제들과 신앙고백 내용들을 하잘것없는 것으로 본다. 교리와 신조를 격하시키는 자유주의 신학의 반(反)교리적 특성을 드러낸다.
(3) “신학은 시대의 산물이요, 우리의 믿음을 인식하는 인간적인 틀일뿐이다. 여러 가지 역사적 신앙고백서들을 우리가 배우지 않아도 구원에 전혀 문제가 없다. 심지어 신학적인 지식이 없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한다. 구원을 얻은 자라면 극단의 자유주의 신학과 이단사상을 가진 자들과 하나 될 수 있다고 본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것과 동일한 교리관과 신학에 대한 이해를 드러낸다.
(4) “신학이… 항상 새롭고,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할 수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찌 함께 부름을 입었음을 알면서 홀로 옳음을 주장하며 남의 소리를 외면해 버릴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한다. 그리고 “오늘의 신학은 교리논쟁의 신학에서 벗어나 다원화 사회에서 대화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신학이어야 할 것”을 주창한다. 신학을 수시로 시류(時流)와 시대정신에 맞게 개조해야 한다고 보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 일치한다.
(5) “보수와 진보의 양극화 현상은 사실상 사라지고 있다. 이젠 신학자들이 나서서 교회일치를 위한 신학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개혁주의 정통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신학을 제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개혁주의 신념체계를 무위(無爲)로 돌리면서 신학이 시대 기류에 동조, 편승해야 한다고 보는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반영한다.
(6) “한국교회 안에는 자유주의자가 없다”고 한다. 다양한 형태의 현대판 자유주의 신학의 실체를 부정함으로써 자유주의자를 포용하려고 한다.
(7) “성경론이 과연 어디까지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 …사실 신학자들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여기는 신학적인 차이가 과연 교회를 분리할 만큼 심각한 것인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개혁주의 신학의 최후의 보루인 성경관을 격하시키고 교리를 경시한다.
(8) “생명력을 상실한 고답적인 교리지상주의만을 외치고 있지 않은지…”라고 말한다. 신앙고백, 교리, 신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교회들과 고신교단의 신앙고백적 특성과 상반된다.
(9) 이성구가 말하는 개혁주의와 고신교단의 ‘개혁주의’에 대한 개념은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주의-신신학계의 개혁주의 개념과 일치한다.
(10) 고신교단이 세계개혁교회연맹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개탄한다.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개혁파 교회와 장로교회들로 구성된 이 단체의 신학노선은 고신교단이 회원교회로 가입한 국제개혁교회연합회와 다르다. 양편이 모두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개념이 다르다.
(11)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해 호의적이다. 한국의 보수계 교단들이 이 단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강변한다. 이 단체가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12) 에큐메니칼 신학의 주제인 ‘세계교회,’ ‘세계교회의 흐름,’ ‘보편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세계교회는 세계개혁교회연맹과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교회들과 자유주의계 교회들이다.
(13) 고신교단이 한국기독교회협의회의 비가맹교단이라는 점을 안타까워한다. 이 단체는 대부분 자유주의 신학에 열린 태도를 가진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다. 광복 전후로 친일파 인사들이 주도해 왔다.
(14) 고신교단과 ‘완전주의적 분파주의’를 동일시한다. 고신교단을 폄하하는 자유주의자들 또는 그들과 궤를 같이 하는 자들의 발상과 일치한다.
(15) 고신교단이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일치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교회연합에 그[사도신경] 이상의 어떤 신학적 조건이 필요한가” 하고 답한다. 고신교단이 로마가톨릭교회와 일치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본다. 세계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로마가톨릭교회와 일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최덕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