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회화나무 고목들은 궁궐과의 특별한 관계를 알려준다.
2천만이 살아가는 수도 서울은 한 가운데 영원한 녹지 공간이 있어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시끄러움과 탁한 공기로 숨 막힌다는 도시지만 널찍한 후원을 포함하고 있는 창덕궁은 예외다. 정문인 높다란 돈화문을 들어서면 회화나무 고목들이 여기가 서울의 별천지임을 먼저 깨닫게 한다. 왼편 금호문으로 이어진 행각 건물을 따라 일렬로 이어 심은 4그루가 먼저 눈에 띤다. 다시 금천교 다리 남쪽으로 금천의 오른편에 자라는 여러 그루의 아름드리 회화나무는 이곳이 긴 역사를 가진 궁궐이면서 숲의 시작임을 알려준다. |
이중 크기가 큰 4그루와 금호문 쪽 4그루를 합쳐 모두 8그루가 나무나라 최고의 영예인 천연기념물 반열 에 올라있다. 나무높이는 10m남짓한 것도 있으나 대체로 15.0~16.0m정도이고, 가슴높이 지름 90~180㎝에 이른다. 줄기에 썩음 부분이 거의 없고 자람 상태도 왕성하여 왕궁의 얼굴나무로서 위엄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이 회화나무의 역사는 19세기 초에 궁 중 화공들이 그린 창덕궁과 창경궁의 상세묘사도 ‘동궐도(東闕圖)'에서 지난 세월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
사실화로 그려진 그림을 자세히 보면, 당시의 나무의 크기와 자람 상태를 알게 된다. 금호문 쪽 회화나무 는 3m남짓한 담장높이보다 낮게 그려져 있다. 물론 동궐도는 원칙적으로 사실화지만 크기마저 비례로 따져서 그린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더라도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음은 틀림이 없을 것 같다. 그 때의 나무나이는 많아야 50년 전후로 보이니 지금의 나이는 2백년 남짓일 터이다.
한편 오른 쪽 금천 건너 4그루는 여러 그루의 능수버들 사이에, 주위를 압도하는 큰 나무로 그려져 있어서 금호문 쪽 회화나무보다는 당시에도 나이를 더 먹은 나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의 나무 굵기와 동궐도의 그림으로 추정한 나이는 400~600년 정도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창덕궁을 새로 지을 때 심었거나, 아니면 1405년 창덕궁 창건당시에 심은 나무로 보인다. 조선왕조 내내 영욕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었던 셈이다. 창덕궁에는 이곳 말고도 낙선재 입구 언덕 및 신선원전 들어가는 길에도 큰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다. 한편 조선초기의 정궁인 경복궁에는 임진왜란 이후 폐궁으로 방치한 탓에 큰 회화나무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경복궁의 후원으로 짐작되는 지금의 청와대 안에 몇 그루의 굵은 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경복궁 역시 여기저기에 회화나무를 심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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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과 회화나무는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는가?. 중국의 고사를 통하여 궁궐에 회화나무를 심는 이유를 찾 아 볼 수 있다. 옛날 중국 궁궐 건축은 ‘주례(周禮)’라는 책을 기준으로 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면삼삼괴삼 공위언(面三三槐三公位焉)’라하여 회화나무 심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즉 궁궐의 외조(外朝)는 왕이 삼공 과 고경대부 및 여러 관료와 귀족들을 만나는 장소인데, 이 중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공자리에는 회 화나무를 심어 특석임을 나타내는 표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창덕궁의 돈화문 안은 바로 외조에 해당하는 곳이다.
회화나무는 이렇게 꼭 외조의 장소만인 아니라 차츰 고위 관직의 품위를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 였다. 차츰 궁궐을 비롯하여 관아의 앞뜰, 고관대작의 사저에도 회화나무는 자리를 잡아갔다. 현직만이 아 니라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만년을 보내는 고향땅에도 회화나무가 심기를 즐겨했다. 그래서 전국 어디 나 전통을 자랑하는 양반 마을에는 어김없이 회화나무를 만날 수 있다.
중국에서 들어온 나무 중에 노거수로 남아 있는 나무는 은행나무가 가장 많고 다음이 회화나무다. 천연기 념물로 지정된 곳도 이곳 이외에 4곳이 더 있고, 보호수는 2백여 그루나 된다. 그 만큼 옛 선비들은 회화나 무를 통하여 자신의 벼슬과 학문을 은연 중 뽐내는 수단으로 삼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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