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유백언의 예언
소병가(燒餠歌)
유백온(劉伯溫)은 절강성 처주 출신으로 자(字)는 백온(伯溫)이다. 명조(明朝)의 개국재상이며 중국 삼대민간 예언 중 하나인 <소병가>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명조초기부터 줄곧 오늘날까지 발생한 모든 주요한 사건들을 똑똑하게 예언하였다. 특히 법륜대법(法輪大法)의 광범위한 전파와 인류사회에 대한 그의 심원한 의의에 대하여 예견하였다. 아래에 우리 함께 유백온과 관련된 일부 사적과 그의 예언 중에 있는 오늘을 보도록 하자.
유기(劉基) 또는 유백온(劉伯溫)이라고도 하며 명태조의 개국모사(開國謀士)이다. 유기는 22세 때 급제하여 進士(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됨됨이가 정직하고 청렴하였다. 후에 누명을 쓰고 관직을 박탈당하여 은거생활을 하였다. 주원장이 군사를 일으킨 후 유기는 出山(출산)하여 주원장을 도와 제왕의 뜻을 마침내 이루게 되었다.
주원장이 기세를 타고 일어나 혼란한 국세를 평정시키고 마지막에 원조를 뒤엎었는데 이는 모두다 유기의 모략에 의해서 힘입은 것이다. 주원장이 제왕의 업을 이룰 것이라는 유백온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다른 한 각도로부터 이야기한다면 이는 改朝換代(개조환대)로서 하늘의 뜻이다. 유백온은 <소병가>에서 머나먼 미래에 대하여 예언하였으니 당연히 원조의 운명이 다하게 되고 명조가 흥성할 것임을 볼 수 있었다. 때문에 그는 하늘의 뜻에 따라 일대의 유명한 재상으로 될 수 있었다.
먼저<소병가> 대하여 간단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군주로 되어서 명태조 주원장이 가장 관심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자신이 영원히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유백온이 道中의 인물임을 알고 유백온에게 미래에 관한 사건들을 물어 보았다. 조대의 바꿈과 대체는 자연히 정해져 있는 것이라 천기는 누설할 수 없다. 그러나 주원장이 필경은 제왕이라 거절할 수 없었기에 유백온은 알듯말듯한 시가 한 수를 지었다. 황제의 명령을 따랐을뿐만 아니라 또 후대들에게 하나의 똑똑하고도 믿기 힘든, 그러나 또 명확하게 말하지 않은 警世(경세)의 작품을 만들었다. 유백온이 임금을 만났을 때 마침 태조가 소병을 먹고 있었기에 이를 <소병가>라고 불렀다.
명태조가 하루 내전에서 소병을 먹고 있는데 금방 한 입을 맛보자 유기가 왔다고 내시가 보고하였다. 태조는 사발로 이를 덮어서 가리고 유기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예의를 마친 후 임금은 “선생은 數理(수리)에 밝으시니 사발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만 한지요?”라고 물었다.
유기가 손가락을 세어보더니 “반은 해와 같고 반은 달과 같은데 금룡이 한 입 물어서 한 조각이 모자라니 바로 이 음식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열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임금이 천하후세의 일이 어떠한가? 고 물었다. “천하지사는 어떠한지요? 주씨의 천하가 오래 갈 수 있는지요?”
유기는 “茫茫天數(망망천수)에 주인님은 萬子萬孫(만자만손)인데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매우 명확하다. 유기의 대답은 두 가지의 뜻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표면상으로 볼 때는 공경스러운 말로서 명조의 천하가 천추만대로 전해진다고 말했지만, 사실상 명조의 천하가 萬曆(만력)황제의 손자인 숭정황제까지 전해질 수 있다고 명확하게 예언하였다. 유백온이 당시에 명확히 말해줄 수가 없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를 속이는 죄를 범할 수가 없었기에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래에 계속 보도록 하자.
황제는 “비록 자고로 흥망에는 정수가 있고 천하는 일인의 천하가 될 수 없으며 오직 덕이 있는 자라야 누릴 수 있는 이치인데 말해도 무슨 관련이 있으리오. 대체적으로 말해보시오.”라고 말했다.유기는 “천기를 누설하면 신하의 죄 가볍지 아니하오니 폐하께선 신하의 죄를 용서해주셔야 감히 여쭐 수가 있사옵니다.”라고 말했다.
황제가 免死金牌(면사금패)를 내리자 유기는 황은에 감사를 드리고 말하였다…
고대의 제왕들은 비록 한 나라의 임금이었으나 오히려 흥성과 쇠퇴는 자고로 천명에 달렸으며 그 뜻을 거역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황제가 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 했으니 유기는 명태조가 하사한 면사금패를 받은 후 시가의 형식으로 미래의 사건들을 모두 말해내었다. 단지 대량의 은어들을 사용했기에 오로지 사건이 발생한 후에야 사람들은 예언의 정확성을 보게 된다.
<소병가>에서는 정확하게 “토목지변”, “궁신남정”, “청군입관”, “강건성세”, “청말과 민국이후”부터 오늘날의 “법륜대법의 광범위한 전파”에 이르기까지 6백여 년의 역사를 예언하였다. 이미 역사로 된 사실에 대해선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며 뿐만아니라 그에 대한 해석도 적지 않아 여기에선 더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법륜대법과 관련이 있는 오늘날과 미래의 사건을 살펴본다. <소병가>의 제일 마지막 한 단락은 법륜대법과 관련이 있으며 세부 절목에 대해서는 더 많은 해석을 않는다. 아래에 유백온과 명태조의 다른 한 단락의 명확하고 다채로운 대화를 소개하겠다.
황제는 “宋(송)에 이르러 道(도)는 누가 전할꼬?” 라고 묻자
백온은 “이를 증명할 시가 있사옵니다; 승려도 아니요 도인도 아닌지라, 머리에 넉량(4兩)의 양털모를 썼으니 眞佛(진불)은 사원에 있지 아니하고 他掌彌勒(타당미륵)은 元頭敎(원두교)이더라” 라고 말했다.
이에 황제는 “미륵은 어디에 강림하는지요?” 라고 물었다.
유백온은 “신이 아뢰옵겠습니다; 미래의 교주가 범계에 내려오되 관부의 관원도 아니요, 황궁의 태자도 아니요, 僧門(승문)과 道院(도원)도 아닌 寒門草堂(한문초당)에 강림할 것이요. 燕南趙北(연남조북)은 금을 뿌릴지어다.” 라고 답했다.
황제는 “청조의 운명이 다한 후에 대하여 경은 똑똑히 말해보시오. 후세사람들에게 보이도록 하는게 어떻소?” 라고 말하자 이에 유백온은 “감히 다 아뢰옵지 못하겠습니다. 海運未開(해운미개)는 대청이오. 해운을 열면 싸움이 있으려니 만약 運運(운운)이 다시 열리면 필히 老水(노수)가 京(경)에 돌아갔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황제가 “老水(노수)에는 무엇이 있소” 하고 묻자
유백온은 “있지요, 있지요, 있습니다. 衆道(중도)는 화합하여 수행에 들어가고, 大는 小로, 老는 少로 변합니다. 스님은 오히려 미인을 요구하니 참말로 우습고도 우스운 일이지요. 여인이 스님에게 시집가는 시기가 왔습니다.” 라고 말했다.
황제가 “경은 무엇 때문에 道(도)자를 말했소?” 라고 묻자
유백온은 “上末後時年(상말후시년)에 萬祖(만조)가 하계하고 千佛(천불)이 강림하며 온 하늘의 별자리와 阿漢群眞(아한군진), 滿天(만천)의 보살들도 이 劫難(겁난)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未來佛(미래불)이 하강하여 도를 전하니 천상천하의 모든 부처와 모든 조상들이 이를 얻지 못하면 겁난을 피하기가 어려우며 果位(과위)를 깎입니다. 末後(말후) 팔십일겁을 봉합니다.” 라고 답하였다.
[아인슈타인의 꿀벌예언]
꿀을 찾아 나선 꿀벌들이 길을 잃고 되돌아오지 못해 벌통에는 여왕벌과 애벌레만 남아 굶어 죽는다. '밥벌이'에 나선 꿀벌들은 어디로 갔는가. 최근 도시 변두리나 시골 마을에서 비실비실한 꿀벌들이 많이 눈에 띈다. 죽은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날지 못하고 양지바른 바닥에 누워 꼼지락거리기만 한다. 주로 몇 마리나 수십 마리가 그러지만, 집단 폐사하는 경우도 있다. 부산(부산진구 연지동)의 한 찻길에 수천 마리의 꿀벌이 나타나 119구조대가 출동했다. '벌떼'같지 않은 놈들이어서 손쉽게 퇴치했다고 한다.
200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한 양봉업자가 새끼벌만 남은 꿀벌통을 당국에 신고한 것이 집단실종의 첫 사례였다. 당국은 1950년대 전국에 600만개였던 벌통이 240만개로 줄었음을 확인했다. 지구상에서 약 25%의 꿀벌이 사라진 사실도 알게 됐다. 군집붕괴현상(CCD), 집 나간 꿀벌들이 돌아오지 않아 '꿀벌사회'가 무너지는 것이다. 지구자기장을 감지해 길을 찾는 꿀벌들이 휴대폰 인터넷 등 전자파가 가득한 곳에서 방향감각을 잃는다는 추측이 유력하다. 이스라엘 급성마비바이러스(IAPV)라는 설도 있고, 농약과 살충제를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는 4년 밖에 더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꿀을 못 먹어서가 아니다. 지구 식물의 3분의 1이 곤충이 꽃가루를 옮기는 충매화(蟲媒花)이고, 나머지는 풍매화(風媒花)다. 충매화의 80%는 꿀벌의 역할에 의존하고 있다. 2006년 이후 세계 도처에서 꿀벌의 집단폐사와 집단실종이 확인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최근 경북 문경시와 칠곡군에서 유사사례가 신고됐다. 수분을 위한 꽃가루마저 중국에서 수입하는 형편에 '꿀벌 보호'는 사치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경고가 두려운 걸 어쩌나.
[녹도서(錄圖書)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황제로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던 진나라의 황제였다. 그런데 진시황은 자신의 죽음을 피하고자 한 예언서를 손에 넣었다고 한다. 28년에는 불사약을 구하기 위하여 많은 동남동녀와 함께 제나라 사람 서시를 동해에 있다고 전하여지는 봉래, 방장, 영주 등 삼신산에 보낸 적이 있었으며, 32년에는 연나라 사람 노생(盧生)이 바다로부터 동아와 보고한 가운데 녹도서(錄圖書)라는 참서(讖書)에 이르기를
「진나라를 망케할 자는 호라」는 말을 듣고 호(胡)자를 자기의 아들인 호해인 줄을 모르고 북호인 흉노인 줄로만 오해하여, 몽렴(蒙렴)이라는 장수를 시켜 군사 삼십만으로 북쪽 오랑캐를 공격하여 물리치는 동시에 다음해에는 북호가 다시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쌓게 하였던 것이다.
34년에는 승상인 이사가 글을 올려 말하기를, 지금은 세상이 안정되어 백성은 집에서 일만 부지런히 하고 선비는 법령만 배워 익히면 될터인데, 모든 선비들이 그렇지 않아 옛 학문만 하고 지금 것을 배우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새 법령이 나오면 입즉심비하고 출즉항의하여 나라 일을 훼방만 하고 인심을 현혹시키니 이런 일을 일절 금하는 동시에 역사책도 진나라 역사가 아니면 전부 불살라버림은 물론이오,
백가시서를 가지고 있는 자도 모두 관에 가지고 나와 불살라 버리되 만약 시서를 가지고 말썽을 부리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목을 베고, 또 옛날 도리만 옳다하고 지금 정치를 비방하는 자는 일가족을 전멸하고, 만약 관리로서 이것을 알고도 집행하지 않는 자는 같은 죄로 다스리며, 명령이 내린지 30일내에 불살으지 않는 자는 묵형(墨刑)을 가하여 강제노동을 시키도록 하고, 다만 없애지 않은 책은 의약에 관한 것과 점서책 그리고 곡식과 초목을 심는데 관한 것 뿐이고, 법령을 배우려는 자는 관리를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 대체의 내용이었는데 시황은 이것을 옳게 여겨 그대로 실행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35년에는 후생(候生) 노생(盧生)등이 시황을 비방하고 어디론지 도망해 버렸다. 시황은 크게 노하여 함양에 있는 선비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비방한 자를 문초한 결과 선비들은 자기 발뺌만 하고 남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워 서로 불어넣는 것이 460여명에 달하였다. 시황은 이들을 모두 함양에 구덩이를 파고 산채로 묻어버렸던 것이다. 이것을 본 맏아들 부소가 극력 간하였지만 시황은 간하는 말에 또 노하여 부소를 북쪽으로 내쫓아 그곳에 가 있는 몽렴(蒙렴)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 해에는 또 조궁(朝宮)을 지으려고 먼저 전궐(前궐)인 아방궁을 짓게 되었는데 그 규모는 동서가 5백보(3천척)요, 남북이 50장으로 위에는 만명가량 않을 수 있고 아래에는 오장기치(五丈旗幟)를 세울 수 있는 굉장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모든 궁전에는 악기와 미인을 가득 채워 놓고 수시로 이곳저곳 가서 마음대로 즐기기도 하였던 것이다. 언젠가는 시황이 양산궁에 갔다가 산위에서 거리에 지나가는 승상의 행차에 수레와 말탄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좋지 않게 여긴 적이 있었는데 그 후 승상은 시황의 시종 가운데 한사람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듣고 수레와 말탄 사람의 수효를 많이 줄였다.
그 다음 승상의 행차규모가 전보다 많이 줄어진 것을 본 시황은 이것은 필시 전에 양산궁에 같이 갔던 수행원 가운데 누가 말한 것이라 보고 한 사람 한사람 불러 물어보았으나 누구 하나 실토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황은 성이 날대로 나서 그 당시 같이 갔던 사람을 전부 잡아 죽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 부터는 시황의 간곳을 아는 사람도 없었으며, 모든 정사의 결재는 대소를 막론하고 오직 함양궁에서만 친히 행하여 그의 사생활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37년에는 시황이 지방순시에 나섰는데 좌승상 이사와 작은 아들 호해와 중거부령 조고와 근신 몇 명 등이 수행하게 되었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던 중 시황은 무서운 해신과 싸운 꿈을 꾸고 그만 병이 생겨 점차 중하게 되었다. 죽음을 각오 하였던지 자기가 죽으면 함양에 와서 장례를 같이 지내도록 하라는 편지를 써서 만리장성 쪽에 가있는 맏아들 부소에게 전하려고 옥새(玉璽)까지 찍어 놓은 후 이 서신이 조고에게만 넘겨지고 사신이 채 떠나기도 전에 시황은 그만 사구평대(沙丘平臺)에서 죽게 되었다. 그때의 나이는 50세.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어떤 변란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여 승상 이사는 이것을 절대로 비밀에 붙이고 식사 올리는 것과 보고사항 등 생시와 다름없이 하였기 때문에 시황의 죽음을 아는 사람은 호해, 조고등 근시자 5,6명 뿐이었다. 조고는 호해 이사등과 공모하여 한가지 꾀를 내었다. 그것은 시황의 조서를 위조하여 호해로 태자를 삼고, 공자 부소와 장군 몽렴에게는 족음을 주는 서신을 보내는 동시에, 시황이 죽기 전에 써놓은 부소에게 보내는 글은 몽땅 없애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길을 재촉하여 함양으로 향하는데 며칠이 지나는 동안 시신이 썩기 시작하여 냄새가 나므로 이것을 속이기 위하여 썩은 복어를 한섬가량 수레에 실어 냄새를 풍기기도 하였던 것이다. 함양에 돌아와서는 즉시 시황의 붕(崩)한 것을 발표하는 동시에 호해가 뒤를 이어 황제의 위에 오르고 시황은 여산(驪山)에 장례 지내기로 하였는데, 여산은 황금과 미옥(美玉)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시황의 무덤은 천광(穿壙)할 때에 70여만명을 동원 하였으며, 무덤안에는 여러 가지 이상한 보물을 간직함은 물론이오,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금은으로 오리와 학을 만들어 기계로 오락가락하게 하였으며, 또 사람이 가까이 오면 저절로 화살이 발사되는 장치를 하여 누구나 근접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자식없는 후궁들은 전부 순장하고, 내부시설을 한 장인들도 그 시설을 세상에 알릴까 봐 전부 그 속에서 죽여 버렸다고 전하여지고 있는데 무덤의 크기는 높이가 50장, 주위가 5리나 되었다고 한다.
2세 황제인 호해는 나이가 21세로 조고의 공작으로 황제가 되었으니만치 언제나 조고를 가장 가깝게 하는 동시에 모든 정치를 조고에게 맡기고, 조고 역시 호해에게 아첨하는 동시에 법을 가혹하게 운용하여 자기의 지위를 더욱 굳혀갔던 것이다. 그런데 다만 이사가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어 먼저 이사를 제거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사는 본래 초나라에 태어나 순자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언제인가 변소에 갔더니 그곳 쥐는 더러운 것만 먹고 사람을 보면 자주 놀래어 달아나기만 하는데, 창고엘 갔더니 그 곳 쥐는 사람을 겁내는 일도 없고 깊숙이 들어박혀 배부르게 맛있는 곡식만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쥐는 마찬가지 쥐인데 어떤 놈은 편안히 잘 살고, 어떤 놈은 잘 먹지도 못하면서 놀래기만 하니 그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처할 탓에 달렸으니, 사람도 이와 같아 좋은 곳에 처하면 잘 되고 나쁜 곳에 처하면 못될 것이 뻔하니 무엇보다 좋은 곳에 처해야 되겠다 하고 즉시 시골을 떠나 진나라 서울로 가서 길을 밟아 벼슬이 차츰 높은데 올랐던 것이다.
그 후 진나라에는 축객령(逐客令)이 내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다른 나라 사람은 모두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때에도 그는 저 유명한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라는 글을 지어 시황을 감동케 하여 쫓겨나지 않음은 물론이오, 시황의 신임을 더욱 얻어 승상이 되는 동시에 통일사업과 문물제도의 개혁에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일을 너무 가혹하게 처리하여 백성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는데 순자의 문하에서 같이 공부하였던 한비자가 자기보다 우수한 것을 알고, 그 후 한비자가 진나라에 왔을 때에 임금에게 음해하여 잡아가두는 동시에 제멋대로 사약을 주어 그를 죽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사가 그만 조고의 모하에 걸려들게 된 것이다. 그것은 시황이 죽은 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맨처음 진승(陳勝), 오광(吳廣) 등은 기(蘄)에서, 항양(項梁)과 항적(項籍)(項적) 등은 강동인 오에서, 유방은 패(沛)에서 각각 기병하여 온 천하가 어지럽게 되었다. 조고는 임금인 호해에게 대하여 이렇게 나라가 어지럽게 된 것은 이사가 승상으로서의 책임을 제대로 못한 것은 물론이오, 삼천군수로 가있는 그의 아들 이유가 진승등 적과 내통하여 있다고 허위로 이유를 만들어 일가족과 함께 모두 잡아 죽였던 것이다.
이 때에 이사는 자기의 작은 아들을 돌아보며 「내가 부귀공명은 고사하고, 이제는 고향에서 누런 사냥개를 데리고 토끼사냥이나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은들 어찌 이것이 가능하겠는가」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이사를 죽인 조고는 호해마저 죽이고 나라를 빼앗을 작정으로 먼저 한 가지 시험을 하였다. 그것은 모든 신하들이 호해를 따르는가 또는 자기를 따르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일부러 사슴 한 마리를 바치면서 이것은 말이라고 하였다. 호해는 웃으면서 이것은 분명 사슴인데 왜 말이라고 하는가 하고 두 사람은 서로 「말이다 사슴이다」하고 우겨댔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아 말인지 사슴인지 판단 짓기로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은 조고의 위세에 눌리어 사슴인줄 뻔히 알면서도 양심을 속여 조고의 편에 들어 말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그저 묵묵부답으로 있기도 하였다. 그래도 정직한 사람은 사슴이 틀림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 조고는 이런 사람들을 눈여겨 봐뒀다가 그 후 자기 의견에 반대한 사람은 모두 잡아 죽였다. 이것이 유명한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이 생겨난 동기인데 이쯤 되고보니 인심은 극도로 공포에 휩싸여 있고 조고의 위세는 황제인 호해를 누르게 되었다.
드디어 조고는 자기의 사위인 함양령염락(咸陽令閻樂)과 동생인 조성등과 공모하여 호해를 없애기로 하였다. 먼저 적이 쳐들어오니 막아야겠다고 거짓 꾸며대어, 사위인 염락(閻樂)을 시켜 군사 천 여명을 이끌고 엉뚱하게도 호해가 있는 망이궁을 포위하였다. 호해를 모시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가 버리고 오직 한사람만이 남아 있었는데 호해는 그 사람에게 물었다. 「왜 이런 기미를 미리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그러나 그 사람의 대답이 아주 걸작이었다. 「제가 미리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껏 목숨이 붙어있지, 미리 말 하였더라면 벌써 죽은지 오랬을 것입니다」라고.호해는 아무리 성을 내고 아무리 안타까워했지만 이제는 별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염락에게 향하여 승상 조고와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였다. 그러면 황제의 자리를 내놓을 터이니 한 고을의 왕이나 되게 해달라고 하였지만 안된다고 하였고, 그러면 만호가량 되는 지방에 제후로나 있게 해달라고 하였지만 역시 안된다고 거절당하였다. 마지막에는 할 수 없이 그러면 일개 평민으로 처자와 함께 목숨이나 살려달라고 애원하여 보았지만 염락은 이것마저 안 된다고 거절한 후 「나는 승상의 명령을 받아 너의 목을 베러 여기에 왔다」고 하지 않는가. 호해도 이제는 할 수 없었던지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조고는 여러 대신과 공자(公子)들을 불러놓고 「시황제 때에는 천하를 통일하였기 때문에 황제라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각국이 모두 자립하여 진나라는 더욱 작아졌으니만치 이름뿐인 황제보다도 옛날과 같이 왕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후 호해의 형의 아들인 공자 영을 진왕으로 정하기로 하고 호해는 평민장으로 하였는데 호해가 임금의 자리에 있은지 겨우 3년,
그 후 조고는 공자영(公子嬰)에게 찔려죽고 그의 삼족도 전멸을 당하였으며, 공자 영도 왕이 된지 46일 만에 진군을 격파하고 관중에 들어온 패공(沛公)에게 항복하고 말았는데, 항우가 함양에 들어와서는 공자 영과 제공자 빛 종족들을 모조리 죽이고, 각종 보물을 탈취하였으며, 아방궁을 위시한 모든 궁실에는 불을 질러 그 불길이 석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하며, 진시황의 무덤도 항우에게 무참히 발굴되어 진나라는 여기에서 망해버리고 만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