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1편 1~6절
[서론] 두 개의 길
1586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어느 정원. 서른두 살의 한 지식인이 무화과나무 아래 몸을 던지듯 주저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우구스티누스. 그는 당대 최고의 수사학자였고, 철학적으로도 명민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삶은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훗날『고백록』에서 이렇게 씁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지으셨기에,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쉼이 없습니다." 그날 정원에서 그는 이 방향과 저 방향으로, 이 철학과 저 철학으로, 이 욕망과 저 욕망으로 끝없이 표류하던 자신의 '길'이 얼마나 뿌리 없는 것이었는지를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담장 너머에서 어린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톨레 레게, 톨레 레게(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그는 곁에 있던 로마서 두루마리를 집어 눈에 들어온 구절을 읽습니다. "낮에 행하듯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 순간, 그의 표현대로 "의심의 모든 어둠이 사라졌습니다." 표류하던 사람이, 그 자리에서 심겨진 나무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시편 1편은 바로 이 장면을 시로 미리 그려놓은 본문입니다. 시편 전체의 대문 역할을 하는 이 시는, 인생에 오직 두 개의 길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의 길과, 시냇가에 심긴 나무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에 쓰인 히브리어 원어의 결을 따라가면서, 아우구스티누스라는 한 사람의 생애를 거울삼아, 이 말씀이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세 가지로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존재의 방향이 결정하는 행복
본문은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 쓰인 히브리어 '아쉬레(אַשְׁרֵי)'는 감탄사에 가까운 단어로, 단순히 '행복하다'는 감정 상태가 아니라 '아, 참으로 바르게 서 있구나!' 하는 존재론적 탄성에 가깝습니다. 서양 철학이 오래도록 씨름해온 질문, 행복(eudaimonia)이 감정인가, 아니면 잘 정돈된 삶의 상태인가를 성경은 이미 답하고 있습니다. 아쉬레는 감정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시인이 이 복을 정의할 때 무엇을 '한다'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는다'로 먼저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원어를 보면 '걷다(할라크) → 서다(아마드) → 앉다(야샤브)'로 동사가 점층됩니다. 처음엔 그저 스쳐 지나가듯 걷다가, 점점 멈춰 서게 되고, 마침내 눌러앉아버리는 흐름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두려워했던 자기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마니교라는 사상을 '걷듯' 접했다가, 거기 '서게' 되었고, 결국 여러 해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죄란 대개 갑작스러운 추락이 아니라, 이런 점진적 표류입니다.
교회와 성도에게 아쉬레는 오늘 우리가 무엇에 발걸음을 두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큰 죄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무심코 즐겨보는 콘텐츠, 습관처럼 흘려듣는 냉소, 아무 생각 없이 동조하는 분위기, 그 첫걸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가 결국 우리가 어디에 '앉게' 될지를 결정합니다. 참된 복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둘째, 되새김질하는 신앙
2절은 복 있는 사람의 적극적 성격을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 '묵상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가(הָגָה)'는 사실 조용한 사색을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구약 다른 곳에서 사자가 먹이를 물고 으르렁거리는 소리(사 31:4), 비둘기가 낮게 우는 소리(사 38:14)를 묘사할 때 쓰입니다. 즉 하가는 입술을 움직여 되뇌고, 소리 내어 곱씹고, 온몸으로 말씀을 삼키는 행위입니다. 낭독 없는 고대 세계에서 묵상이란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하듯 텍스트를 몸에 새기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병, 빠르게 스크롤하고 요약본으로 소비하는 얕은 독서에 대한 정확한 처방이기도 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하가는 정보 습득(knowing about)이 아니라 존재의 재형성(being formed by)을 지향하는 행위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원에서 로마서 한 구절을 '집어서 읽은' 것은 우연한 한 번의 독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전 몇 해 동안 이미 바울 서신을 곱씹고 또 곱씹던 사람이었고, 그날은 그 오랜 되새김질이 열매 맺은 순간이었을 뿐입니다.
신약은 이 묵상의 대상을 더 분명히 합니다. 요한복음 1장은 율법이 가리키던 그 '말씀'이 마침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신약적 관점에서 하가는 율법 조문을 되뇌는 것을 넘어, 그리스도 자신 안에 거하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요 15:7)이라 하셨습니다. 하가는 결국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의 다른 이름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정보로서의 성경이 아니라, 되새김질하는 성경 읽기를 가르쳐야 합니다. 짧게 읽고 넘기지 마십시오. 한 구절을 하루 종일 마음에 물고 다니십시오. 그것이 하가이며, 그런 사람만이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가집니다.
셋째, 옮겨 심겨 뿌리내린 존재
3절의 핵심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여기 '심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샤툴(שָׁתוּל)'은 자연히 씨앗이 떨어져 자란 나무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옮겨 심겨진' 나무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 나무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란 것이 아니라, 물 있는 곳으로 '이식된' 존재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복 있는 사람의 견고함은 자기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은혜로 옮겨 심겨진 결과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무는 대조됩니다. 4절,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겨(모츠, מֹץ)는 뿌리가 없기에 무게도 없고, 무게가 없기에 바람이 부는 대로 흩날립니다. 철학적으로 이것은 실체(substance)와 우연(accident)의 대조라 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후일 악을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라 정의하는데, 이 시편의 겨의 이미지와 정확히 공명합니다. 악인의 존재는 그 자체로 실체가 없고, 뿌리가 없기에 결국 존재의 무게를 갖지 못한 채 흩어지고 맙니다.
신약은 이 뿌리내림의 이미지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확장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요 15:5).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이제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가지로 성취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원에서 옮겨 심긴 그날 이후, 그는 실제로 시절을 좇아 열매 맺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고백록』과 『신국론』이라는 열매는 16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마르지 않고 교회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교회는 스스로 뿌리내리려 애쓰는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함께 시냇가, 즉 말씀과 성찬, 기도와 교제로 옮겨 심겨지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열매 맺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뿌리내려진 자리, 곧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의 자연스러운 결과여야 합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친히 돌보신다
본문은 마지막 6절에서 이렇게 맺습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기 '인정하시나'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야다(יָדַע)', 곧 '아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한 정보적 앎이 아니라, 언약적으로 친밀하게 돌보시고 함께하시는 앎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오랜 방황의 길 위에서도 결국 정원으로 인도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찾아낸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이미 '아시고' 붙들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의 삶에도 아직 서성이는 걸음이 있고, 아직 얕게만 스치는 되새김질이 있고, 아직 뿌리내리지 못해 흔들리는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ㆍ당신의 발걸음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아쉬레, אַשְׁרֵי).
ㆍ당신은 말씀을 소리 내어 곱씹고 있습니까(하가, הָגָה).
ㆍ그리고 당신은 시냇가에, 그리스도 안에 옮겨 심겨져 있습니까(샤툴, שָׁתוּל).
아우구스티누스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일으켜 세운 그 음성이, 오늘 이 자리에도 동일하게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집어서 읽으라." 그리고 그 말씀 따라 우리 모두가, 바람에 나는 겨가 아니라 시절을 좇아 열매 맺는 나무로, 이 시대 가운데 굳건히 서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