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金浣)
1546 - 1607
자 : 언수 본관: 경주
문과 지망생 이었으나 10 여년 넘게 실패하자 30 살의 나이로 무과에 합격하였다.
사도 첨사로 있으며 이순신장군에게서 처음에는 근무 태만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임진 3월 20일 난중일기에는 " 사도첨사(김완)에게도 만날 일로 공문을 보냈는데, 혼자서 수색했다고 했다. 또 한나절 동안에 내나로도,외나로도와 대평대두, 소평대두 섬을 다 수색하고 그날로 돌아 왔다고 했다. 이 일이 너무도 엉터리 거짖이다. 이를 바로 잡으려는 일로 흥양과 사도에게 공문을 보냈다" 라고 있다.)
한마디로 장군에게 찍힌 것이다. 일은 제대로 않하고 건들 거린다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어가가 의주로 파천 한다는 말을 듣고는 " 이 국난을 당하여 죽어야 할때 죽지 않는다면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 라 맹세를 하고 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남긴다.
사도 첨사로 옥포,당포 해전에서 우척후장을 맡았으나 이는 종3품의 첨사가 우척후장을 맡은것은 같은 첨사인 방답첨사 李純信이 중위장을 맡은것을 보면 전쟁 초기에는 신임을 얻지 못하였다 할수 있다.
한산해전에서 전과를 올리는데 왜선을 격파하는데 그치지않고 왜 대선에 올라가 왜장과 결투를 벌여 그 왜장을 베어 버리고 대선을 노획하는 큰전과를 올리는 맹장이었다.
이후 이순신 장군의 인정을 받아 조방장으로 승진을 하고 수군의 최고위 장수로 활동하게 된다.
김완의 활약에 대하여 이순장군은 다음과 같이 평하여 다재다능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 왜적의 전함과 맛서 싸울때 남보다 먼저 북을 치고 용기를 돋우어 모든 군사가 더욱 용기를 내어 싸웠는데 김완의 공이 크다. 또한 생선과 소금의 흥정을 잘하여 팔고 양곡과 미숫가루를 비축하여 군사들을 배고프지 않게 한 공은 정말 대단하다."
김완의 전과는 1 차 출전 ( 옥포,합포) : 대선 3 척 2 차 출전 ( 사천,율포) : 대선 2 척 3 차 출전 ( 한산) : 대선 1 척 합계 : 6 척
2 차 당항포해전 : 중선 1 척 이다.
이순신이 채포되어 가고 사도첨사였던 김완은 원균의 휘하에서 거제도 복병도장으로 있으며 칠천량해전에 임 하게된다.
당시 유군장으로 30 여척의 판옥선을 지휘 하였는데 왜군이 야습해오자 맞아 싸우기 위해 선두에 서서 출진을 하였는데, 김완의 함대가 김완의 함선만 남긴채 후퇴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 진다. 경상 우수사인 배설의 함대도 같이 후퇴를 한다. 김완의 함대와 배설의 함대에 후퇴 명령을 내리 수 있는 것은 통제사 뿐인데 선두에 있던 김완은 전투중이라 그 명령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다. 혼자 남은 김완은 판옥선이 불타는 패전을 한다. 물에 빠져 해엄으로 창원까지 탈출을 하나 왜적에게 붙들리고 만다.
일본까지 포로로 잡혀가 온갖 굴욕에도 항복하지 않고 마침내 1598년 4 월 18일 일본 배를 훔쳐 탈출에 성공을 하여 부산에 왔다. 이 때 양산군수로 있던 박응창이 그 사연을 장계하고, 순찰사가 그 곡절을 심문하고 왜적의 정황을 물으니 도망 온 경위와 일본과 동래,양산의 적 동향을 기록하여 바쳤다. 순찰사가 말하기를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을 한 것 이나, 온갖 협박에도 굽히지 않은 굳센 뜻은 다 가상한 일이다"하고 조정에 다시 싸울 수 있도록 장계하니 허락 하였다.
1601년(선조 34년)에 함안군수를 제수 받아 봉직하고, 1606년 논공행상시 선무공신에 책봉되고 1607년(선조 40년)에 병사 하다.
-------------------------------------------------------------------------------------- 아래 글은 퍼온글 입니다.
만력 26년 무술(1598) 5월 7일 경상도 관찰사 겸 순찰사가 장계로써 말씀 올립니다.
각처에서 적진에 사로잡힌 포로들을 구출함에 있어서 동래 수령의 관저에서 경계하여 타일러 처리한 사건을 당일 접수하였는데 이와
같습니다. 금월 초3일의 문서로서 양산군수 박응창이 급히 달려와 보고한 내용입니다. 도의 명령에 따라 적들의 형세를 정탐하고 아울러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하여 양산군의 군관 김백년을 보내어 들어가려 할 때입니다.
영천에 거주하였던 한산도 주사 조방장 김완이란 사람이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그곳에서 함께 탈출한 고성 교생 문대모, 정병 정원생과 그의 처 소사가 어울려 있었는데 유인하였더니 도망하여 돌아왔습니다.
지난온 일에 의거 김완이 당초 포로가 되었던 경위와 아울러 적의 정세를 미루어 물어 보았더니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그러던 중 늦게야 손자(孫子:손자병볍)와 오기(吳起)의 영향을 받아 신묘함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기축년(1589) 겨울에 외람스럽게 선전관의 직책을 부여받았으며,
역적이 변란을 일으킬 때에는 삼가 어가를 모시고 호위하기도 하였습니다.
변방이 위태롭다고 경고하여 급히 이임하여 사도첨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부서지고 추락한 군기를 수리하고 군무를 정리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할 때 감사 이광이 장계를 올려 정3품으로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옥포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는데 처음으로 적을 만나 그들을 따라 한산도에 이르러 크게 이겼습니다.
사격으로 명중되어 죽은 숫자가 얼마나 되는 지 알 길이 없습니다. 적의 선박을 파격(破擊)한 것도 또한 알 길이 없습니다. 승리로 기록된
것은 적의 머리를 베어 바친 것이 40여 급입니다. 8월 26일에 당상관(정3품)으로 승진되니 은혜가 하해와 같이 깊으므로 죽기를 결심하고 자품(資品)에 보답하기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더 한층 스스로 격려하고 매진하여 방어하는 준비를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습니다. 을미년(1595) 가을에는 고기와 소금을 많이 구입하고 군량을 비축한 것이 500여 석이나 되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이 이러한 내력을 열거하여 상달하였으므로 조방장으로 승진이 되었습니다.
배에 승선하여 5년이나 경과하도록 바다에서만 생활하였으므로 형제나 처자를 서로 만나 볼 기회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일이 견고하고 튼튼하지 못하므로 어찌 사사로운 일을 하려고 고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듣건대, 옛사람들은 임금께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시는데 떨어진 바지를 받을지라도 오히려 귀한 것이라 하였는데 하물며 저에게는 겨울에 사용할 표범가죽으로 만든 귀막이와 여름에 사용할 삼베옷을 송구스럽게도 거듭 하사하시며 수비하고 방어하는 노고를 위로하시어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 깊이 간직하며 은택은 살과 뼈에 사무쳤습니다. 나는 하늘처럼 끝이 없는 특별한 은혜를 받아 항상 받들어 원수를 갚기 위해
괴롭고 어려운 일을 참고 견디며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정유년 6월 22일 거제도 복병도장(伏兵都將)에 승진되었고, 도장포에서 적선 4척을
만났으므로 모든 배가 힘을 합해 진격하여 적병 90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이 몸이 참획한 것이 5명이었습니다. 또한 7월 6일에는 다대포 앞바다에서 적선 10척을 만나 역시 격파하였고 말을 빼앗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 몸이 홀로 왜장의 기선 1척을 공격하여 파괴하고
풍신수길의 삽혈맹장( 血盟章)인 주봉삼과(朱封三顆)의 은으로 만든 병 1쌍을 얻었으며, 아울러 군량도 남김없이 거두어 들였습니다.
이어서 부산으로 향하니 적선 6백여 척이 바다를 덮어오고 있었습니다. 적의 주장은 모든 장수와 더불어 진열을 갖추어 출전하였으며 바람마저 역풍이고 날씨도 사나워 형세가 불리하였습니다.
그래서 바꾸어 영등포를 공격하고 부산으로 진격하려는 순간 통제사(원균)와 종사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부에 진달할 것을 논의하였습니다.
이때 본인은 지난 전투에서 빼앗은 주봉삼과와 풍신수길이 혈맹한 삽혈맹장을 소매에서 꺼내어 보이니 통제사가 십분 위로하며 기뻐하고 사유를 구비하여 빨리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적들을 상대하여 여러 날 응전하였습니다. 같은 달 15일에 바람이 불리하게 불어 진영을 온천[칠천도]으로 옮기려
하였습니다. 16일 오경(五更)에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아 한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우리 군사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급하게 되었으므로 배를 멈추니 동작이 빠른 자는 온천으로 나아가고 둔한 자는 미처 나가지 못해 적에게 포위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전라좌수영의 군량은 이미 빼앗긴 처지이고, 주장(원균)은 명령체계를 잃어 모든 배가 무너지니 반은 진해에서 패배하였고 반은 거제도로 달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몸은 홀로 뒷배에서 호위하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휘날리며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관할하에 있는 남도포만호 강응표, 회령포만호 민정붕, 조라포만호 정공청, 해남대장, 강진대장 등은 각각 수사를 따라 먼바다로 도망하여 힘을 뭉칠 수 없었습니다.
이 몸은 홀로 군관, 사부, 노자와 함께 대포를 쏘면서 서로간에 죽고 죽이면서 있는 힘을 다해 깃발을 휘날리며 진격하였습니다.
주장이 일어나 재촉 사례하여 말하기를 '영공이 구렁텅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하였으니 가히 임금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는데 제 몸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몸이 말하기를 '적들과 격전하는 위급한 상황이 이와 같은데 방위해야 할 모든 장수가 명성만 바라며 싸우지 않고 남에게 의지하여 우물쭈물 하다가 달아나는 것이 옳은 임무인가?'
하며 곧 한 장수의 목을 베어 모든 군사에게 위엄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장(원균)이 이억기, 최호 등을 지칭하여 이미 달아난 사람이고(누구보다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두 수사들을보고 달아났다고 지껄이는 원균-_-;;)
오직 제공들은 죽을힘으로 싸워 큰 공을 세웠으니 가상하다고 하였습니다. 듣기를 다하고 적선을 돌아보니 선봉에 떠 있던 2척이 백 보(百步)안으로 가깝게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이에 배설(裵楔)과 더불어 공동으로 적선에 충돌하던 중 배설은 이미 배를 돌려 도망하여 버렸습니다.
본인만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였으나 좌우의 모든 군사가 지원하여 오지 않고 적과 더불어 서로 대들어 빠르게 포를 쏘았으나 차군관(次軍官) 유영호가 탄환에 명중되어 즉사하고,
노자 필연이 또한 명중되고, 군관 이춘연이 다음 차례로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습니다. 이 몸도 또한 왼쪽 다리에 총탄을 맞아 위태롭고 약함에
이르니 병사들은 빈주먹만 자랑하는 격이었습니다. 본인은 높은 소리로 손을 흔들어 말하기를, 『주장(主將:원균)아! 주장아! 어찌 구원하지 않느냐?』고 말하였습니다.(원균은 혼자 달아나고 김완만 후위에 남아 분전하다 위태롭게 된것 같음)
그 때 주장 원균은 술 취정으로 높이 누워 기강이란 전연 없고 다만 군관 김대복에게 명령하여 조각난 화살 10여 개를 쏘고는 노젓기를 재촉하여 점점 물러갈 뿐이었습니다.
수사 배설 또한 배멀미로 선방에 들어와 누워 인사불성이었으니 한결같이 군관의 지휘만 따르니 어찌 위급한 난관을 극복할 기회가 있겠습니까? 군관, 사부 등이 나란히 서서 관망만 할 뿐 화살을 발사할 뜻은 없었으며, 사도첨사 김익귀 또한 같았습니다. 이 몸은 가히 도망갈 수 없음을 알고 적군 한 명의 목을 베고 죽을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노자 필연이 칼을 짚고 기대서서 방패로 막고 있었습니다.
그 안쪽으로 붉은 옷을 입은 적 1명이 배를 이끌고 와서 우리 배로 기어오르므로 가슴으로 충동하여 물에 떨어뜨리니 필연이 그가 올라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칼로써 찔렀고 상포수(上砲手) 박곤 등이 창을 가지고 배 끝부분에 엎드렸다가 그의 목을 치고 하여 적군 3명을
사살하였습니다. 바다 연안으로부터 적들이 무리를 이루어 일시에 위로 올라와 칼을 휘두르며 돌격해 왔으므로 이 몸은 깜짝 놀라 급히 물에 뛰어드니 적의 칼날이 사납게 왼쪽 귀밑을 스쳤습니다.
저는 물 속으로 잠기기도 하고, 혹은 떠내려가기도 하여 죽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던 중 풀로 엮은 뗏목 한 장이 크게 바다에 떠내려오므로 이를 손으로 당겨 몸을 의지하고 잠시동안 쉬어서 간신히 한 외로운 섬에 다다랐는데
그 섬의 이름은 내서기도(乃胥岐島), 어리도(於里島)였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관아에서 심부름하는 하인 간손(艮孫)과 포수 박곤 등이 먼저 이곳에 도착하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수풀 속에 엎드려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전선들은 일제히 불길에 타오르고 연기와 불꽃이 가득하게 하늘을 덮고 있으니 참으로 보기가 참담하였습니다.
밤이 지새도록 슬피 울면서 등덩굴과 칡덩굴을 베개삼아 누웠는데 한 사람의 종이 총탄을 맞아 중상을 입었는데 즉시 죽지 않고 고통스러워하니 심히 모질고 모질었습니다.
초저녁부터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쳐 온밤이 다 가도록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스러워하였으나 전선들이 바다를 덮고 있었으므로 감히 머리를 들 수
없었습니다. 온통 천지가 망망하도록 호소할 곳이 없어 이 몸은 절해고도의 귀신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17일 저녁때쯤 적의 소리가 점점 사라지므로 간손 등과 더불어 칡덩굴을 채취하여 나무를 얽어매어 뗏목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7명이 함께 타고 곧장 진해 앞바다에 이르렀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연이어 미친 파도가 밀려와 칡덩굴이 마디마디 끊어지고 뗏목 나무가 각각 흩어지니 일행 중에 절반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간손은 원래 물 속으로 들어가 어류를 채취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고기잡이를 잘하고 바다에는 익숙한 사람이라 흩어진 나무 하나를 잡고 건너게 되었고,
이 몸 또한 나무 하나를 잡아 그 뒤를 따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도에 밀려 물 속으로 잠기기도 하고 떠오르기도 하여 구사일생으로 창원 앞바다 마산포에 이르니 먼동이 트고 있었습니다.
그때 적의 무리들은 우리 나라 포작 4명을 이끌고 갔으며 판자집을 불사르고 모든 배를 거둬들여 빠르게 되돌아가는데 가히 나를 발견하고 추격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몸은 수중에서 뜨기도 하고 잠기기도 하고 여러 날을 먹지도 못해 기력은 완전히 쇠잔하여 도저히 도망하여 피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결코 사로잡히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때 포작이 따라 들어와 새끼줄로 허리를 매어 끌어당기고 배에 실으니 또한 적이 목을 치려하였습니다.
그러나 포작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정상으로 보아 목을 베지 않아도 지금 추위로 얼어 있고 피곤하여 얼마 있지 않아 죽게 될 것이니 죽이지
말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이로서 포로가 되어 안골포로 돌아와 관청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때 원주에 살았던 지체가 높은 집안의 한 여인이 사로잡혀 감옥에 나타났습니다. 그도 죄수로 옥중에 굳게 갇히었는데 흰죽을 주면서 위로하였고,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자는 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순천의 기생과 보성, 영광, 진주의 활을 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곳에서 3일을 지난 뒤 적장이 나타나 자기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를 가려내어 앞으로 목을 치겠다고 하며 너는 무엇을 했던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원호서(元虎瑞)가 나를 소개하는 말로 주사의 선봉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적의 무리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반드시 높은 관직에 있으니
머리를 깎아 관백에게 헌납하여야 한다고 운운하였습니다. 이 몸은 스스로 죽기를 맹세하고,「어찌 머리를 깎으리오」하고 말했습니다. 적병 한 사람이 머리를 깎아 중이 되면 가히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지난날에는 적을 토벌하고 오늘날에 창을 돌려세우는 것은 나의 뜻한 바가 아니니 오직 빨리 죽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적장은 크게 노하여 그의 아들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여 나의 목을 베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군사의 위용을 크게 베풀고 창검을 빽빽하게 벌려 철사줄로 얽어매어 족쇄를 채우고 손목에는 수갑을 채워 좌우에서 구타하는 무리가 3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원호서, 윤덕립(尹德立)이 옆에 있다가 간곡하게 애걸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문자를 조금 알고 있으니 원컨대 일본으로 송환하여 조선의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적장의 아들은 원호서와 더불어 옛날부터 친교가 두터운 사이였던 모양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들은 급히 그의 아버지에게 전하니 적장이
말하기를 죽이지 말고 급히 일본으로 송환하라고 하였습니다. 7월 25일 배에 실릴 때는 저는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니 원호서 또한 나를 위해 눈물을 닦으며 옷을 벗어 주었습니다. 26일에 배가 출발할 때 영광에 사는 아이 1명과 순천에 사는 아이 1명, 낙안에 사는 아이는 제가 떠난다는 소리를 듣고 함께 목놓아 울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마치 저들의 아버지를 잃은 것같이 하였습니다.
초저녁에 대마도에 다다랐고, 8월 4일에는 일기(日岐)에 도착하고, 7일에는 낭고야(浪古也)에 도착하고, 10일에는 범전군(梵田郡)에 도착하였습니다.
14일에는 곡고라 소창(曲高羅小倉)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은 적군의 장군이 기거하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감관도산(監官道山)의 집에 구치되었는데,
성문이 사방으로 닫혀있고 앞으로는 자물쇠가 말(馬)처럼 크므로 마치 귀신의 감옥보다 심하여 영영 살아 돌아갈 희망은 없었습니다.
이 몸은 욕되게 사는 것보다 스스로 죽고자 하였습니다. 그 무렵 우리 나라 사람 30여 명이 찾아와 접견할 것을 요청한 며칠 후에 성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오게 되었으니 남녀가 서로 상관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다투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권하였으나 기력이 없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언양에 사는 도공 김윤필(金允必)이 마을의 대표이고, 밀양의 이금상(李今尙)은 보좌하는 색장으로 기와를 판매하는데 의복과 먹는 것은 두루 족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울산의 정병(正兵)이었던 구막선(仇莫先)은 포목 한 필을 주었으며,
충청도 보은의 전희수(田希守)는 옷을 벗어 주는 등 하나같이 위로하고 구휼을 받으면서 도산가(道山家)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김해 포작 이장춘(李長春), 홍해 포작 신수연(申守連)이 있었는데 항상 조그만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조용한 시간에 은밀히 말하기를,「너희들이 나를 태워 조선으로 나아가면 은혜가 막심하다」고 했습니다. 장춘 등이 대답하기를 쾌히
승낙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8월 30일에 새벽닭이 울 때 아무도 모르게 배를 타려 하였는데 비밀이 누설되었는지 적의 무리가 알게 되어 장춘 등은 도주하여 면하게 되었고, 나는 혼자 잡히어 결박되어 이어 다리가 있는 근처에서 목을 베려 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모두 집결하여 말하기를,「이 사람은 일본말을 알지 못하고 또한 병이 들어 있으므로 비록 도망한다 하더라도 뜻을 이룰 수 없을 것이며 만약 도망하게 되면 우리들이 스스로 죽음을 당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적들은 중지하게 되었고 우리 나라 사람들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돌아가면서 먹을 것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삼동에는 많은 눈이
내려 산처럼 쌓였고 얼어붙은 추위를 지내면서 개나 말같이 변변치 못한 그들을 증오하는 마음이 어찌 한시라도 마음에 새기지 않았겠습니까. 몸과
그림자가 서로 서러워하며 항상 목놓아 울었습니다. 울산 병영의 진무(鎭撫) 정세원(鄭世元)이 매일처럼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부지런히 찾아와 보고 도망할 것을 도모하고 성중에 갇힌 몸인데다
적들의 눈이 사방에서 번개같아 뜻은 있어도 성취할 수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은화 네 냥을 주면서 반은 배삯으로 사용하고 반은 가는 길에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고 하였으므로 저는 그것을 받으면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이에 1월 25일 야밤에 고성 교생(校生) 문대모(文大謨)와 도주할 것을 약속하고 돌아오는데 마치 뒤를 따르는 것 같아 몹시 두려웠습니다. 산을 넘고 험한 길을 걸으니 길은 막히고 양식은 떨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조그만 절간을 찾았더니 한 사람의 늙은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나무로 만든 평상을 깨끗이 쓸고 맞이하여 앉히고 잠깐 사이에 밥을 지어와 말하기를 밥이 심히 검으나 귀공자께서 많이 먹으라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글을 써서 표시하였습니다. 이 몸 또한 글을 써 이르기를,
「나는 본래 조선 사람으로 포로가 되어 타국에 왔으니 의리로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구차하게 삶을 도모하고 있으니 신하의 직분으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으리오」하였습니다. 스님은 두 번 절을 하고 위로하면서 승방으로 안내하여 등불을 밝혔습니다. 그리고는 시(詩) 한 수를 적어 줄 것을 청하며 훗날 잊지 않을 기념이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몸이 곤란한 재액으로 망명된 처지에 있으면서 어찌 시를 지을 수 있으리요마는 다만 그의 뜻만은 사양할 수 없어 입으로 사성 시를
불러주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2월 2일 범전군 화대가(化大加) 선창에 이르니 조선으로 드나드는 배는 이미 다 닻을 올리고 출발하였는지라 이 몸은 땅을 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 무렵 나이 많은 일본 사람이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조선으로 건너가려는 사람인데 미처 배를 타지 못하여 울먹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금명간에 또 돌아가는 배가 있을 것이니 울지 말라고 하며 나를 데리고 그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침 그의 집에 고기를 팔러 다니는 김해 사람이 들렀습니다.
저는 우리 나라 사람이 어느 곳에 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즉시 고성사람 정원생(鄭元生)의 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원생이 저를 보고 곧 눈물을 흘리며 옷을 지어 입혀주고 정성을 다하여 먹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귀국하고 싶은 생각이 괴롭게 재촉하므로 급히 밖으로 나가 돌아갈 배를 물으니 사람들은 한결같이 만약 행상하는 사람의 배를 타면
오히려 일본의 남쪽 지역인 같은 오랑캐 땅에 팔리는 경우가 되므로 모름지기 믿을 수 있는 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분한 생각으로 주먹을 쥐면서 절박한 고민을 하였습니다. 한 달이 넘고 열흘을 지나려니 또한 먹을 것이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돌아가면서 먹게될 터인데 울산의 박경택(朴慶澤), 김해의 박말생(朴末生), 창원의 박마동(朴麻同), 언양의 두리동(豆里同), 밀양의 황대복(黃大福), 동래의 정순걸(丁順乞) 등의 가정이었습니다.
이즈음 당나라 사람 현묘(玄妙)라는 자가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 정중하게 절을 하고 글을 써서 의사를 표시하였습니다. 그의 글에 의하면 자기 아버지가 남경에서 포로로 잡혀와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면서 만리타향에서 같은 포로의 처지로 만나니 반갑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집에서 한달 동안 부지런히 먹여 주면서 대우해 주었습니다.
3월 24일 세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귀로에 올랐습니다. 27일 일기도에서 순풍을 기다렸고, 4월 9일에는 대마도에서 순풍을 기다렸고, 18일에는 다대포에 도착하여 유숙하였고, 19일에는 부산에 도착하였습니다.
20일에는 동래의 선암사(仙巖寺)에 도착하니 스님이신 탄웅(坦雄), 탄일(坦一) 등이 심히 정답고 친절하게 접대해 주었습니다.
모든 스님에게 물으니 한결같이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가 사방에서 공격하니 왜병은 지난날보다 갑절이나 되는 병사를 동원하여 복병을 설치하고 사람의 눈을 속이고 있다. 그러므로 도저히 예측할 수 없으나 반드시 비어 있는 곳이 있을 터이니 그곳을 찾으면 가히 있지 않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길을 찾기 위해 3일 동안 만류된 채 그곳에 있었습니다. 24일에는 탄일 등이 친히 자원하여 지휘하고 나설 즈음에 양산군의 적을
정탐하는 군관 김백년(金百年)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돌아오면서 구법곡(仇法谷)에 왜병들이 막사를 조작해 놓은 부근 고기를 파는 집에서
3일을 머물며 사방으로 적세의 동정을 살폈습니다. 29일 동래의 주산인 전원적(田圓積)에 올랐으며, 그 다음날 언양 석남(石南)에 도착하였는데 양산군수 박응창(朴應昌)이 적의 형세를 정탐하기 위해 와 있었습니다. 저는 난리가 일어난 처음부터 참전하여 다른 것은 돌보지 않고 적의 목을 베어 바친 것이 40여 급이나 되고 힘을 다해 싸웠으므로 받은 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한 은혜로운 임관에 지극히 감사하는 마음이 실로 깊으므로 미력하나마 나라에 보답하는데 일익이 되도록 진력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에서 해임되고 원균이 대신 지휘하였으나
그 작전이 전승(全勝)은커녕 전선은 적들의 불길에 잃어버리고 저는 포로가 되어 적국에 사로잡혀 임금님께 수치를 드리게 되었으니 그 죄가 천지에 가득하여 속죄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도에 따르면 남은 목숨이 죽어야 하는 것이 의리가 되는 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함을 머금고 통분을 참으로 살아 돌아온 것은 근성[芹誠 임금에게 미나리를 바치는 정성 즉, 지극한 정성이라는 뜻이다]하며 한 하늘 아래서 살아야 되겠다는 일념이 밥을 먹거나 쉴 때에도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간절히 기약하기를 밝은 땅에 나타나 남은 생명을 바쳐 작은 정성이라도 계속하겠사오니 죽지 못한 죄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군인으로 임명해 주시어 영천, 경주의 요충지를 지키게 하시면 한 번 죽을 것을 거울삼아 지난날의 부끄럽고 욕된 일을 만분의 일이라도 설욕하겠다"고 아뢰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국의 형세 및 부산, 동래, 양산의 적 정세를 아울러 별도로 진달하였습니다. 이는 그를 불러들여 말한 것을 아뢰는
바입니다. 또한 지난해 전선과 병사가 패할 때 주장의 군령이 엄하지 아니하였으며 능히 손을 쓰지 않고 모든 장수가 후퇴하여 피하므로
김완이 일단 변란 초기부터 죽음을 무릅쓰고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홀로 능히 자진하여 싸우는데 시종 한결같이 적과 칼날을 부딪치며 격전함에 목을 베어 얻은 숫자가 많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원균의 잘못으로 왼쪽편에 탄환을 맞아 사로잡히게 될 즈음 바다에 투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절해고도에 올라 진해로 돌아오다가 적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굽히지 않고 의리와 말로써 맹렬히 항거하였고, 고래가 일으킨 파도인 듯, 악어가 일으킨 물결인 듯 위험 속에서도 오히려 나라를 잊지 않고 남몰래 배를 타고 탈출하여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 때 인정과 의리가 지극히 가상스럽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같은 사람이 오래도록 적의 칼날에 잡혀있었고, 거친
바다물결에 잠기며 떠오르며 시달려 왔으므로 뜻이 꺾이고 담력이 떨어져 정신을 잃었으니 아직은 진중에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후 적을
토벌할 계책을 알아보는 것이 옳을 듯하여 장계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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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虛戇(팔불출) 원문보기 글쓴이: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