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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2019년 디스크수술로 직장생활을 잠시 쉬고
구직활동과 직업상담사자격증 공부로 바쁜 생활을 하던중
내 자신을 돌아보고 지친 심신의 힐링이었던 수필동아리 활동...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과 휼륭한 장호병 교수님과 김은영 선생님의 지도 아래 알찬 한 해를 보내고
작은 책속에 나의 글이 실린다는 사실에 감격스럽습니다. 모두에게 감사드리고 더 열심히 글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편집후기
깊어 가는 가을 만큼 우리의 마음도 풍요롭고 행복한 한 해가 되며, 가슴 따뜻한 글을 많이 써서
많은 사람에게 나비효과를 내 꽃자리 회원이 많이그리고 오래도록 머무는 창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 다시 열심히 쓰여지는 한 해가 되기를...
<약력>
수필동인 꽃자리회원
커피 &토스트 운영
두 얼굴
여름 샌들을 사기 위해 조그마한 신발 가게에 들렀다. 싹싹한 아가씨는 나의 발을 보더니 발 볼이 없고 발이 작아서 참 예쁘다고 연신 칭찬하였다. 나도 덩달아 옛날에는 더 예뻤다고 자랑하며 새삼스럽게 나의 발을 내려다 보았다. 기분 좋은 가격에 신발을 사서 가게를 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샌달 신은 발을 요리조리 살펴 보다 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이젠 옅어져서 보일 듯 말 듯한 조그마한 흉터였다. 나의 기억이 삼십 년 전으로 내달았다.
열여덟 나이에 신문 배달을 하였다. 새벽 두시에 일어나서 지국까지 가면 두시반. 지국에 들어 서면 좁은 사무실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누워서 잠든 사람들 . 나는 그들에게도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라며 타이틀을 붙여 주었다.
" 왔어? " 하며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네는 총무님이 있었다 . 늘 같은 옷에 같은 스타일이었지만 나의 눈엔 상남자로 보였다. 고된 배달을 마치면 꼭 국밥집에 동료들을 데리고 가서 한 그릇씩 밥을 사먹였다. 돼지 국밥에 적응이 덜 된 내가 국밥을 남기면 스스럼 없이 내 밥그릇을 가져다 싹싹 비우는 것이었다. 처음엔 당황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졌고 그런 모습이 참 멋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고등학교 앞에서 호떡을 파시던 아주머님이 나에게 신문배달할 때 조심하라며 당부를 하셨다. 이 동네에서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며 당분간 쉬라고 하셨다. 나는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조심하겠다고 약속 드렸다. 지국에 도착하자 총무님도 자기가 돌테니 나오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난 괜찮다고 하고는 고집을 부리며 계속 나왔다. 내 몫까지 뛰려면 얼마나 힘든지 알고 폐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날은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일이 많아서 평소보다 일찍 나가야만 했다. 신문을 일일이 비닐 봉투에 넣어야만 했기때문이었다. 비에 젖지 않도록! 지국 문을 나서는 나에게 총무님이 한 가지 당부를 하셨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열심히 뛰었다. 배달을 한 지 일년이 넘어서 내 구역은 손 바닥 보듯 환한지라 열심히 달렸다. 달리고 달리고 어느 덧 내가 제일 살고 싶었던 집 앞에 도착했다. 마당에 온갖 나무들을 키우는 아담한 집이었다. 주인 아저씨도 자상 하셔서 낮에 보면 음료수 한 개라도 꼭 주시곤 하셨다. 늘 대문을 열어 놓아서 고맙기도 하였다. 대문이 닫혀 있으면 신문을 던져야 했고 어떤 땐 신문이 어디 떨어져 보이지 않다고 지국으로 전화가 오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집엔 잘 생긴 아들이 있었는데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동네에선 칭찬이 자자했고 어쩌다 얼굴을 보는 날이면 나도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집을 나오자 빗줄기가 굵어졌고 나는 이십여 부 남은 신문을 옆구리에 꼭 끼고서 걸음을 재촉했다.. 거기서부터는 산 동네를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분위기가 이상했다. 평소 느끼던 공기가 아니었다. 처음엔 비가 와서 그런가 싶었다. 내 발자국 소리에 뒤이어 들리는 또 다른 발자국 소리, 내가 멈추면 사라지는 아주 조그마한 소리! 헉!
나는 뛰기 시작했다. 전속력을 다해서 내달렸다. 익숙한 길이지마는 할 수 있는 건 뛰는 것뿐이었다. 뒤에서도 뛰기 시작했다. 비는 계속 내렸고 길은 비에 젖어 미끄러웠다. 어느 순간 나는 발이 미끄러지면서 넘어지고 말았다. 그 때 발목에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래도 나의 머리 속에는 뛰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때 뒤따르던 그림자도 미끄러지는 게 나의 눈에 들어 왔다. 나는 다시 전속력을 다해서 총무님이 가르쳐 준 집을 향해서 갔다. 그 집은 배달 하는 동료의 집이었다. 나무로 된 대문이었는데 대문 밑으로 쌀뜨물이 흐르고 있었다. 동료 어머님은 늘 일찍 일어나서 새벽에 아들 밥한다고 쌀을 씻는다고 알려 주셨던 것이다. 나는 무조건 두드렸다. 그러자 뒤에 그림자도 멈추는 느낌이 왔다. 나는 다시 문을 향해 소리 쳤다.
" 아주머니 살려 주세요. 00이랑 함께 신문 배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바로 문이 열리고 중년의 어머님이 얼굴을 내미셨다. 덕분에 나는 무사했지만 나의 왼쪽 복숭아 뼈에는 나무가 박혀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내가 병원에 다니는 동안 내 대신 총무님이 신문배달을 해 주셨고 일주일쯤 지나자 다리는 어느 정도 나았다. 그리고 동네 호떡 파는 아주머님이 말씀 해주셨다. 성폭행범이 잡혔다고 . 나는 범인의 이름을 듣고 망연자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고 말았다.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집, 그 집의 잘생긴 대학생이라는 것이었다. 그 사건으로 동네는 또 한바탕 난리도 아니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총무님의 모습이 아른 거린다. 늘 단벌 옷에 머리숱이 많았고 잘 생긴 얼굴에 순대 국밥을 누구보다 맛있게 먹던 그 분! 이젠 어림잡아 칠십은 되셨을 텐데..
" 혹시라도 누군가 따라 오는 것 같거든 무조건 아는 길로 뛰고 거기 알지? 나무로 된 대문 집. 거기가 00이 집이거든 , 아침 일찍 어머님이 늘 쌀을 씻어서 쌀물이 흐를거야. 뭐 못생겨서 누가 널 쫒아오기야 하겠냐만은 하! 하!하! "
아직도 남아 있는 상흔을 보니 아련한 그때의 충격과 따스함이 함께 떠올라 눈시울 붉어진다.
군화가 우물에 빠진 날
열한살 되던 봄이었다. 오월이 되자 청춘같은 눈부심이 온 대지에 쏟아졌다. 은행잎, 대나무의 새순 소나무의 잉태된 솔방울들이 자신들의 존재감을 피우고 있다. 쑥이야 , 냉이야, 달래야 두릅이야, 나물과 고사리를 꺽고 캐느라 동네 어른들은 밥만 먹으면 산과 들로 쉴새도 없이 오르고는 했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다. 아버지, 오빠, 여동생, 나, 우리 가족은 엄마가 차려온 밥상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맷돌에서 갈은 고추와 마늘로 담근 김치에 보드랍게 끓인 쑥국, 돌미나리를 무쳐 내놓은 밥상은 조촐했지만 꿀맛이었다.
우리 집에는 작은 규칙이 있었다. 아버지가 숟가락을 놓기 전에 수돗가에 가서 물 한 사발을 떠 와야 했다.오빠는 당연히 제외되었고 여동생과 나는 안 가려고 눈싸움을 했다. 우리집의 수도는 마루에서 내려와 뜰에 있는 신을 신고 정지(지금의 부엌을 일컬음) 문턱을 넘어서 정지 안을 지나 다시 뒷문을 넘어야만 있었다. 문턱이 높아 넘어지기도 많이 했다.
버스가 오기 전에 밥상 치우게 어서 갔다 오라는 엄마의 불호령에 나는 벌떡 일어섰다.우리집은 신작로 바로 옆인지라 차가 지나가면 뿌연 먼지가 마루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시원하고 맛있는 지하수물을 꿀떡꿀떡 넘기신 아버지가 심각하게 입을 여셨다. 오늘은 아버지 어머니도 산에 안 가고 오빠한테는 소 먹이도 가지 마라 하신다.우리에겐 집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말라고 하신다. 어이없는 말에 친구들이랑 고무줄놀이 하기로 했다고 내가 징징거리자 아버지는 내 작은 어깨를 꽉 잡고 말씀하셨다. 혹시라도 군인들이 보이면 절대로 그들 앞을 지나지 말고 신작로도 건너지 말며 군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말라셨다. 동생이 지금은 군인도 없는데 놀다 오면 안되냐고 다시 징징거리자 " 총에 맞아 죽고 싶냐며" 엄마가 우리 등을 떠밀며 낮고 날카롭게 말해 겁에 질린 채 방으로 들어 갔다.
한동안 놀다 지친 우리는 밖이 소란스러워 빼꼼히 문을 열어 보았다. 오전 열 한시쯤 된 듯 했다. 마당 담벼락 앞에 동네 사람들이 일자로 쭉 서서 마을 어귀쪽을 바라 보고 있었다.우리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 살짝 어른들 사이에 숨어 들었다. 담벼락 너머를 보던 나의 눈은 밤송이 벌어지듯이 커졌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까맣게 옷을 입은 군인들이 동네 어귀서부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서고 있었다. 저벅저벅 걷는 군화 소리는 한 여름 매미들의 합창보다 더 크게 들렸다. 군인들이 집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엄마는 나와 동생을 뒤 안 장독대 뒤에 숨겼다.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전쟁났다고 생각하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쯤 지나자 목소리가 쩌렁쩌렁한 남자가 말했다. 다섯명씩 이 집에서 물을 마시고 출발한다며 질서있게 마시고 먼저 먹은 사람은 출발 하라는 지시였다. 잠시 후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쓰고 검정색 배낭을 맨 군인들이 우리집 정지 문턱을 넘어서
수돗가로 몰려 왔다. 쪽바가지에 물을 한 바가지씩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장독대 뒤에 숨어서 끊임없이 들어 오는 군인들이 신기해 넋을 놓고 보았다. 발이 저리도록 쳐다 보다 보니 이젠 딱 두 가지만 보였다. 그들이 쓴 까만색 베레모랑 먼지 묻은 군화들. 한 시간이 넘도록 물 마시기는 계속되었고 안전하단 걸을 느낀 우리는 마당으로 나왔다. 어느 새 동네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고 없고 아버지는 소거름을 퍼 내고 계셨다. 마지막으로 물을 마신 군인이 아버지께 감사하다고 말하고 하얀색 자루를 건네며 너무 고마워 주니 애들 먹이라 하였다. 자루엔 생전 처음 보는 과자랑 먹을 것들이 가득 했다. 그런데 아무리 먹어 보려 했지만 도저히 입에 맞지 않아 먹을 수가 없었다. 결국엔 아버지가 돼지나 줘야겠다며 뒤 안으로 가져 갔다.
한 바탕 난리를 치고 난 우리집 정지 문 턱은 그야말로 참기름 들어 부은 듯 빤질빤질해져 있었다.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지금도 생생이 기억 한다.마을 어귀에 들어서든 엄청난 군인의 수.빼딱하게 쓴 베레모 모자 그리고 먼지 묻은 몇 백 켤레의 군화. 그 군화가 밟고 지나간 정지 문턱의 빤질했던 모습과 세상에 둘도 없이 맛없었던 과자 딱 하나 기억나지 않은게 있다. 그 많던 군인들의 얼굴은 단 한사람도 생각나지 않는다.
유명한 작가의 글이 떠오른다.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많던 군인은 어디로 다 갔을까?
친정 엄마의 새끼 손가락
88세 친정엄마의 생신 날! 일년만에 내려 간 지리산 친정
딸을 맞이하는 엄마의 모습은 마치 작은 돌덩어리가 거실에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다. 허리가 굽어서 두 다리가 포개진 듯한 체구. 원래 작으셨던 어머니인데 한아름 들어 올려 안을 수 있을 정도로 더 작아지신 모습. 그래도 어머니는 이 하나 없는 함박 웃음을 지으시며 내 이름을 불러 주신다. 나는 "엄마" 하고 부르며 작은 체구를 꼭 끌어 안았다. 다행히 기억력도 생생하시고 말씀도 곧 잘 하신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병치레가 많았던 나를 늘 감싸고 보듬고 안아주신 엄마!
"너는 죽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커서 시집도 가고 애도 낳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웃으신다.
달빛이 마당에 내려앉고 밤 벌레 소리가 웅웅거릴 때 잠깐 잠이 들었었나보다.
나의 얼굴을 만지시는 엄마의 거친 손길에 눈을 떴다. 엄마는 나를 지긋이 보고 계셨다.
이상했다. 얼굴은 주름과 검버섯으로 덮였는데 나를 보는 엄마의 두 눈은 부엉이 눈처럼 또렷했다.
"엄마 왜?"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하여 내가 묻자 어머니는 새끼 손가락을 보여 주셨다.
어머니의 오른쪽 새끼 손가락은 늘 꼬부라져 있었다. 펴지지 않는 그 모습에 왜 그러냐고 물을 때 마다 엄마는 절대 얘기 해서는 안되는 비밀처럼 엄한 표정으로 묻지 말라고 말씀 하셨다. 궁금 했지만 일하다 다치셨나 보다 했다.
"이 손이 어떻게 다쳤나 하면 말이다..."
70년이나 묻어 두었던 어머니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해방되기 2년 전 옥녀는 시집온 지 2년 밖에 되지 않은 열일곱살 새댁이었고 시집살이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밤마다 베틀에 앉아 졸면 사정 없이 날아드는 시어머니 손에 빰도 수 없이 맞고 물세례도 당했다. 그래도 자상한 남편 덕에 하루 하루를 버티고 살았다.
그해 겨울!
지리산에 혹독한 추위가 왔다. 일제 강점기라 일본 순사들이 마을에 한 번씩 나타나고는 했었다. 그 날도 순찰하다 춥고 배가 고팠던지 동네에 들어왔다 큰 기와집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더니 마당에 파닥거리던 토종닭 세 마리를 주인 허락도 없이 잡아서 고아 먹고 유유히 사라졌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주인이 온 동네를 다니며 난리를 쳤다. 심지어 지서에 찾아가서도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나서야 동네가 잠잠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날이었다.
겨울이면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기 때문에 동네 남자들은 아침 부터 종일 번갈아 가며 불을 꺼뜨리지 않고 지펴야 했다. ( 닥나무의 크기는 대나무만큼 키가 커서 작업을 할 때는 동네 남자들이 힘을 합쳐서 큰 구덩이에 열 묶음씩 차곡차곡 쌓아 그 위에 흙을 덮고 2~3일 정도 삶는다. 다 삶고 나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추위에도 닥나무 껍데기 벗긴다고 마을 어귀는 장관을 이루었다. 닥껍질을 벗기면 하얀 나무가 나오는데 나무는 말려서 땔감으로 쓰고, 껍질은 물에 불렷다가 다시 뭉특한 칼로 긁어 내야 한다. 긁어내면 하얀 속살이 들어난 껍질을 말려서 종이 만드는 곳으로 보낸다. 그러면 하얀 한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옥녀는 아들 점심 먹게 데리고 오라는 시어머님의 심부름으로 그 곳에 갔다. 훤칠하고 잘 생긴 남편을 보니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그 곳에는 남편과 남편친구부부가 활활타는 불 앞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친구의 아내는 임신 중이라 배가 불러 보였다. 네 사람은 활활타고 있는 불 앞에서 이런 저런 애길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대여섯 명의 일본 순사가 들이닥쳤다.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총을 들이대며 트럭에 강제로 태웠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동네는 난리가 났고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은 이십리나 떨어진 지서로 호송되어 갇혔다.
옥녀는 무서움에 때문에 몸이 떨렸고 오줌까지 싸고 말았다. 남편은 이유라도 알고자 순사에게 대들었지만 돌아오는건 사정업는 매질뿐이었다. 감히 대일본 순사가 닭 잡아 먹은 것을 가지고 난리를 쳤다며 빨갱이라고 몰아 붙이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아니라고 아무리 애길해도 매질은 멈추지 않았다. 남편 친구의 아내는 그나마 다행스럽게 얼굴만 여러대 맞고 이틀만에 풀려났다. 허나 옥녀는 그 작은 몸을 순사가 들어서 벽쪽으로 집어 던지길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었다. 죽음의 공포가 올 때쯤 다음 날 석방이 된다는 것이었다. 허나 고문은 마지막 날에도 계속되었다. 나무젓가락을 손가락 새에 끼워서 고통을 줬다. 그 때 새끼손가락은 뼈가 부러졌고 영원히 불구가 되었다. 옥녀는 그렇게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 때의 공포를 내색할 수 없었고 자식들에게 해가 될까 이 날 까지 숨겨 왔던 것이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가슴이 먹먹하다. 밤새 어머니의 조그만 몸을 꼭 끌어 안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죽는 날까지 고향에 살겠다며 이 하나 없는 함박 웃음을 지어신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박꽃같은 내 어머니!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
세상에는 설명으로 되어지지 않는 일들이 많다. 아침부터 긴 머리를 묶으려니 머리끈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노란 고무줄 하나도 없다. 모처럼의 휴일인데 회사에 출근해야 했기에 짜증이 났다. 그 때 하얀색 실타래가 보였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실을 길게 잘라 양쪽 머리를 묶었다. 나는 상주가 되어있었다.
오빠가 죽었다. 담배 한 갑때문에 싸움이 붙어서 야산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2월에 눈이 오고 등이 시린 날 우리 가족은 충격에 휩싸였다. 집에 혼자 계신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나는 고향으로 먼저 왔다. 넋을 놓으셨던 어머니는 울지를 않으셨다. 울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에 나는 적잖이 당황 했다. 다음날 아침이면 오빠의 운구가 집으로 오기로 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 얼핏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다. 새벽 네 시쯤이었다.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서 다가갔다. 뒷문을 열었다.
뒤안에 놓여 있는 아궁이에는 불이 활활 타고있었다. 솥에는 탕국이 모락모락 김이 오르며 끓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데 어머니는 탕국을 쉼 없이 젓고 계셨다. 쪽진 머리 위로는 눈이 하염 없이 쌓였다. 나는 어머니의 그 모습이 참으로 경건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그 모습이 어떤 슬픔보다 가슴이 아려왔다.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온다. 이때쯤 눈 감으면 오빠가 보인다. 가마솥에 가득 탕국을 정성을 다해 끓이던 어머니 그 어머니 머리 위로 쏟아지던 함박눈. 한 폭의 그림 같았던 기억이다.
며칠 전에 절에 다녀왔다. 부처님 앞에 영가등 하나를 달고 먼저 간 오빠의 평화와 어머님의 만수무강을 빌며...
흐르지 않는 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멀리서 닭의 울음 소리가 일정하게 들린다. 지금은 새벽 여섯시다. 나는 소파에 앉아 계속 하나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글이란 내 마음의 한을 풀어내는 실타래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써보기로 마음 먹고 노트북을 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 가지씩 마음에 지워지지 않은 상처를 품고 산다. 그 상처가 가벼울 수도 때로는 너무 깊어 차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 혼자만의 웅덩이가 되어 가슴에 고여 있을 수 있다. 내가 그렇다. 40년 된 나의 가슴 속 웅덩이를 글로 무너뜨려 보려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나팔바지가 유행하던 때였다. 새로 오신 담임 선생님은 긴 생머리에 세련된 나팔바지를 자주 입고 다니신 미모의 선생님이었다. 그 시절에는 위생 검사를 자주 하던 때였다. 새마을 운동이 정점을 찍을 때이기도 했다.
그 날도 위생 검사를 했다. 머리,손톱 ,발톱..쭉 검사를 하던 선생님이 교단으로 가더니 나를 나오라고 하셨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불려 나갔다. 칠판 한가운데 서라고 하셨다. 뭔지는 모르지만 부끄럽게 엉거주춤 섰다. 그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자 여러분 잘 보세요! 요즘 세상에 이런 거지는 없지요! 여러분이 아무리 시골에 산다지만 이렇게 더럽게 하고 다니면 안돼요."
그러면서 손에 들고 있었던 막대기로 나의 머리를 헤집었다. 찬 바람에 튼 나의 두 볼에도 막대기를 들이밀고 두 손을 쭉 펴라고 해 두 손을 펴자 손등을 때리며
" 까마귀가 울고 가겠지요. 손이 터서 논바닥 같아 씨를 심어도 되겠어요."
그렇게 선생님은 나를 십여 분간 더 막대기로 귀며, 다리며, 옆구리를 찔러 가며 학생들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으면서도 수치스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앞으로 위생 검사 때 쟤보다 깨끗하면 통과다. 알겠어요? "
" 네!! " 하고 학생들이 우렁차게 대답하자 나보고 들어가라 했다. 나는 창피스러움에 죽을 것 같으면서도 친구들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웃는 얘들이 없었고 표정들이 한결같이 굳어 있었다. 나는 얘들의 그 표정이 왜 그렇게 고마웠는지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이제는 안다. 얘들은 비웃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4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그 때의 기억은 또렷하다. 선생님의 나팔바지. 생머리. 이름. 발가 벗고 서 있었던 듯한 부끄러움과 창피함. 누군가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 허나 때때로 기억이 기억을 밀고 올라 올 때면 나의 가슴은 그림 속의 흐르지 않는 물 같이 아프다.
사람은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상처를 준 사람에게는 별개 아닐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사람이기에 실수도 한다. 그러나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들에게는 실수를 하지 않는 어른들이 사는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 이 글을 쓰고 나니 나의 가슴속 웅덩이의 둑이 조금씩 메꿔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프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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