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김은영
피곤하지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SNS를 보고 있자니 핸드폰 화면에 뉴스 한줄 뜬다. ‘대통령 계엄 선포’ 가짜 뉴스일 거라 여기며 포털 뉴스 화면을 열자 진짜 뉴스다. 아니, 이런 바보같은 일을! 텔레비전 켜 보니 여기저기 기자들과 앵커들의 흥분된 음성. 완전 무장을 한 군인들과 국회 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시민들. 급히 국회로 향하는 의원들의 우왕좌왕하는 숨찬 음성.
눈을 좀 붙이기로 했지만, 선잠을 자며 새벽 세 시에 다시 뉴스를 켜보니 국회에서 비상계엄 무효 결의안이 통과되었다고 해서 그제야 잠에 들었다. 아침이 되니 대통령이 계엄 해제를 선언했다고 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80년대 비상계엄이란 이름 안에 일어난 일련의 일을. 다시 꺼내 입에 올리기도 무서운,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지 않아야 할 일을.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그녀가 맨부커상을 수상했을 때 작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채식주의자’와 함께 사두었지만 읽지 않았다가 이번에 노벨상 수상 소식에 다시 꺼내 읽게 되었다. 80년대 말 임철우의 ‘붉은 방’을 읽고 나는 내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지함에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를 지나오며 세상에 너무나 무심했던 소시민으로서 비겁했던 나를 발견하고 무척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의 잔인함과 그 잔인함이 인간의 자존을 어떻게 부수고 짓밟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조금 다르게 5.18에 접근했다. 동호, 유령이 된 정대, 은숙, 선주, 동호의 어머니 입장에서 들려주는 자신들의 이야기. 희생된 죽은 이와 살아남은 자들이 조곤조곤 독백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들에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아려와 숨쉬기가 어려웠다. 한강의 섬세하고 세밀한 묘사와 흡인력 있는 문장력에 끌려 숨차게 책을 읽어 나갔다. 작품 속 젊은이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나는 그저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사건을, 책을 읽으며 눈앞에 목도하는 것 같은 충격과 목젖 너머로 밀고 올라오는 울분을 삼켜야 했다.
‘에필로그’ 작가의 이야기에서 한강은 이 소설을 쓰기까지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나는 글 쓰는 사람의 사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작가는 자신이 사는 세계를 기록하고 표현해야 한다. 누군가의 시선에 맞지 않더라도 작가는 자신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기록해 가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그러하듯 시간이 흐르며 이루어질 것이다. 한강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자신의 시각으로 기록한 것일 것이다. 그 점을 한림원이 높이 평가해 노벨 문학상에 선정했을 것이다.
-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
글에서 인용한 문구 뒤에 서술자의 독백을 빌려 질문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나라의 한 도시에서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던 계엄 기간인 어느 날, 9시 통행금지 시간쯤 나는 친구에게 빌려준 책을 받으러 가야 했다. 시국이 어지러운 때이니 엄마는 남동생을 데리고 다녀오라고 했고, 함께 철도 건널목을 건너려던 때 팔뚝에 ‘정화’라는 완장을 찬 남자에게 붙잡혔다. 우악스런 태도로 어디를 가느냐며 바로 집으로 가라는 말에 책을 받지도 못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그 ‘정화’라는 완장의 위력이 대단했으니, 광주였다면 우리의 운명도 어찌 되었을지.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군부 독재의 시대를 보내고 어렵게 민주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아픈 기억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않았는데 계엄이라는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는 무지는 절대 없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군중의 힘을 빌린 야만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