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수 자문위원(이북5도민 영천시연합회장)은 개성방문을 마치고 영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향에 가지 못한 회한을 가슴속에 새기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영천시협의회(회장 이소영)에서는 19일 고려 500년 역사와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절이 살아 숨쉬는 분단의 땅 개성을 방문했다.
32명의 자문위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새벽 1시 금호강 둔치에서 버스로 출발해 임진각에 도착하니 6시가 조금 넘었다. 현대아산에서 준비한 셔틀버스로 집결지인 경의선도로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발권 및 출국수속을 했고 북측의 승인이 떨어진 후 북측출입사무소에서 입경수속을 했다.
2000년 8월 현대아산과 북측(아태ㆍ민경련)이 개성공업지구 2,000만평(6.6㎢) 개방을 합의한 후 2003년부터 1단계 330만㎡ 조성사업이 진행중인 개성공단은 2007년 10월 기반시설공사가 완료됐고 200여개 공장용지가 분양돼 제품생산과 공장건축이 병행되고 있다.
개성공업지구 개발사업이 완료되면 개성지역은 35만명의 북측근로자와 3만명의 남측근로자가 2,000여개의 기업에서 연간 200억달러를 생산하고 남북이 함꼐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계적인 경제평화특별도시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초상화를 가운데 두고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 만세’,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 만세’ 등의 문구가 걸려 있었고 유난히 자전거가 많이 다녔으며 청춘남녀가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도 간간이 보였다.
개성공단을 거쳐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개성시 북쪽 16㎞ 지점에 있는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의 웅장한 화강암 암벽에 걸쳐 있는 박연폭포. 서경덕,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로 널리 알려진 이 폭포는 금강산 구룡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폭포로 꼽히는 곳이다.
박연(朴淵)은 폭포 위쪽에 있는 직경 8m의 바가지 모양으로 패여 생긴 못이며, 이 박연에 담겼다가 떨어지는 것이 바로 박연폭포이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는 고모담이라는 큰 못이 있고 고모담 동쪽 언덕에는 폭포의 절경을 감상하기 좋은 범사정이라는 정자가 놓여있다.
또한 서쪽에는 용바위라고 하는 둥근 바위가 못 속에서 윗부분만 드러내고 있는데 이 용바위에는 황진이가 폭포의 절경에 감탄해 머리를 붓 삼아 써내려갔다고 알려진 시가 새겨져 있다.
폭포 위에는 고려 때 축성한 둘레 약10㎞되는 대흥산성(大興山城)과 함께 북측의 국보문화유물 125호로 지정된 관음사가 있지만 얼마전 집중호우로 길이 유실돼 보수중이라 관광을 통제해 아쉽게도 관람할 수가 없었다.
개성시내로 이동해 전통 기와집을 개조해 1989년 개장한 개성 민속여관 백송식당에서 개성의 맛으로 유명한 13첩 반상기로 점심식사를 했다.
예로부터 손꼽히는 민속 음식으로 유명한 개성음식은 재료가 다양하고 손이 많이 가며 매우 화려하다. 다양하고 맛있는 개성음식은 놋으로 만든 반상기에 담아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식당 앞 실개천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는 고도 개성의 멋을 한껏 느낄 수 있게 했다.
숭양서원(崇陽書院)
이박 정동재
裎朱去世過千年 = 정주거세과천년
萬疊塵埃覆講筵 = 만첩진애복강연
人沒殿荒腐草苑 = 인몰전황부초원
經霜老栢獨祠前 = 경상노백독사전
정자, 주자 세상 떠난지 천년이 넘었으니
첩첩이 쌓인 먼지 옛 설강자리 덮었구나.
사람없이 버려진 성전 썩은 풀 동산에
바람 서리 지낸 늙은 측백만이 사당 앞에 홀로섰네.
院上書聲朗朗時 = 원상서성낭낭시
樵兒牧老禮儀知 = 초아목노예의지
星移物換千年后 = 성이물환천년후
此地民生太平夷 = 차지민생태평이
숭양서원 글소리 낭랑할때는
초아 목로도 예의를 알았었다.
세월가고 시절바뀐 천년후 지금은
이 땅의 민생들 태반이 오랑캐라.
영천의 한학자 정동재씨가 쓴 ‘숭양서원’을 음미하면서 개성시가지에 있는 포은선생을 배향한 숭양서원에 도착했다.
이곳은 포은 선생의 옛집터로 1573년(선조 6) 문충당(文忠堂)을 창건하고 정몽주(鄭夢周)ㆍ서경덕(徐敬德)의 위패를 모셨다가 1575년에 ‘숭양’이란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했다.
1668년(현종 9)에 김상헌(金尙憲)을, 1681년(숙종 7)에 김육(金堉)ㆍ조익(趙翼)을, 1784년(정조 8)에 우현보(禹玄寶)를 추가 배향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그대로 남아 있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였다.
서원 안으로 들어서니 규모가 크진 않아도 동서재와 강당, 사당 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특이하게도 한석봉의 글씨로 정문에 걸린 ‘崇陽書院’을 빼곤 현판이 한 군데도 걸려있지 않았다. 안내원에게 물으니 원래부터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옛 이름이 선지교(善地橋)인 선죽교는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 동쪽 기슭의 작은 개울에 있으며, 919년 고려 태조가 송도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하천정비의 일환으로 축조한 것이다.
1780년(정조 4) 정몽주의 후손인 유수 정호인(鄭好仁)이 주위에 돌난간을 설치하고 별교(別橋)를 세워 보호했다. 정호인 역시 영천사람으로 대전동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후손들이 그 자리에 양계정사를 건립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리 동쪽에는 선죽교라는 3자가 한호(韓濩)의 글씨로 씌어진 비가 있고, 다리 서쪽에는 비각(碑閣) 안에 1740년(영조 16) 어제어필의 포충비(褒忠碑)와 1872년(고종 9) 어제어필의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또 부근에는 1641년(인조 19)에 부임한 유수 목서흠(睦敍欽)이 건립한 읍비(泣碑)가 비각 안에 있는데 여기에는 ‘一大忠義萬古綱常’이라 새겨져 있다. 이 읍비 앞에는 1797년 유수 조진관(趙鎭寬)이 찬한 녹사비(錄事碑)와 1824년(순조 24) 유수 이용수(李龍秀)가 찬하고 신위(申緯)가 쓴 녹사비도 있다.
고려박물관(高麗博物館)은 개성시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成均館)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었으며 1987년에 개관했다. 12동의 본관, 6동의 분관으로 구성돼 있으며, 총면적은 7만 평방㎞이다. 내부는 약 1,000건의 역사적인 유물, 외부는 석탑 등이 전시돼 있다.
새벽 1시에 출발해 밤 11시30분에 도착한 22시간30분간의 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짧은 하루 동안의 일정이었지만 처음가본 북녘 땅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60여년이 지난 세월의 장벽도 남과 북 동포들의 문화를 갈라놓지 못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휴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광경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짧은 시간에 너무나 가까워진 것 같은 남과 북, 올해 귀순 여가수 초청강연회와 평양민속예술단을 초청해 통일의지를 불태웠던 민주평통 영천시협의회 자문위원들은 한결같이 통일의 날이 하루빨리 오게 되기를 기원했다.
민주평통 영천시협의회 이소영 회장은 “감회가 새롭다. 멀게만 느꼈던 북쪽 동포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며 “국민모두가 각자 맡은바 일에 최선을 다해서 국력을 키워 평화통일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나가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