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본의 형식
극본을 이루고 있는 것을 살펴보면, 먼저 제목이 있고, 각 장면이 있고, 등장인물, 대사, 지문이 있다. 또 한가지 극본용어(장면기호)가 있다. 이러한 극본의 형식을 생각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형식이 갖추어진 극본의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극본을 이루고 있는 구성물들은 최종적으로는 영상적 표현이 가능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극본에 쓰여진 것들은 일단은 그림으로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극본은 영상으로 표현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앞서 말한 제목, 등장인물, 대사, 지문, 장면기호.. 이런 것들이 모두 영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제목은 타이틀이나 자막으로 나타나며, 등장인물은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중심인들로서 나타나며, 대사는 사운드로, 지문은 동작으로 각각 표현되며, 장면기호나 극본용어등은 제작시 편집에 의해 표현된다. 그러므로 극본에 쓰여진 것들이 영상으로 표현되지 못한다면 그 극본이야말로 극본이 아니다. 그냥 신변잡기 스케치일 뿐이다.
극본이라는 형식에 맞추어 극본을 쓸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극본의 한 문장이라도 영상화 될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흔히 제작현장에서 감독과 스탭들이 자주 싸우는 말이 '이거 그림이 안 된다!'이다. 그 그림이란 게 바로 영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의 극본 예문을 읽어보자.
예문>...........................................................
씬1 승우의 방
승우는 자취생이다.
좁디 좁은 방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다.
라면을 끊이면서 무심코 지난 날 어머니가 해 주시던 밥이 생각이 난다.
승우 (혼잣말로) 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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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본을 보면, 영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
'자취생'을 어떻게 영상으로 표현합니까? 영상은 작은 방과 혼자 라면을 끊이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그가 자취생이라는 걸 보여주는데 충분하다. 또한 '무심코'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무심코'는 어떻게 연기자가 연기를 하며, 표현합니까? 드라마는 원인과 결과라고 했는데, 원인도 없이 '무심코' 하고 이야기가 되면, 흥미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영상적 표현이 아니다.
등장인물이나 지문 등에 관한 묘사는 영상화 될 수 있는 것들만을 표현해야 하며, 등장인물의 처지와 상황도 마찬가지로 영상화를 목적에 두고, 영상적인 것만 서술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문상으로 심리, 추상, 과거를 써 놓았다면 그것들은 영상화 될 소지가 없다. 지문에서 절대 영상화하기 어려운 것 세 가지가 바로 심리, 추상, 과거이다. 이런 것들은 동작으로 표현되어야 영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심리나 추상 과거 등은 얼마든지 인물의 동작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다. 동작으로 연결이 어렵다면, 가능한 대사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본다. 그러나 대사도 드라마에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영상적으로 표현된다고 해서 쓸데없는 대사의 남발은 더더욱 피해야 한다.
위 예문을 다시 수정해 보았다.
수정예문>....................................................
씬1 승우의 방
벽 한쪽으로 쌓여 있는 책이 보이고, 한쪽은 식기도구가 쌓여있는 작은 방.
승우가 라면을 끊이고 있다.
승우 (뚜껑열고 후적거리며) 이 놈의 자취생활... 엄마 해준 밥 한 번 원없이
먹고 싶다. (투덜투덜)
승우, 냄비 뚜껑을 열더니 라면 발 하나를 건져먹어 본다. 그리고 흘러나온 콧
물을 닦으며.
승우 (찡하게)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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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정예문이라면 훨씬 더 영상에 가깝다.
연출자는 작가의 극본을 곧이곧대로 영상화 할 수는 없다. 나름대로 새로운 극본을 만드는 것이다. 이른바 연출대본이라는 콘티를 따로 만들어 제작현장에서 사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길 위의 날들>이라는 KBS TV문학관의 작가의 극본을 보자.
씬 118 작은 방 (밤)................................................
곱게 깔린 새 이불, 베개 두 개가 놓였다.
순우가 옷을 벗고 있다.
모자를 벗으려다가 멈칫한다.
큰방 쪽에서 노모의 소리가 들린다.
노모(소리) 욱이 너 오늘부터는 아버지하고 자라.
욱 ......
노모 얼른 안 가나?
욱 (소리) .... 내일부터 같이 자께. 오늘은 할머니랑 자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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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작가가 쓴 극본이다. 군더더기 없고, 영상적인 극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극본도 연출가는 콘티를 그린다. 아래는 같은 씬의 연출가의 콘티다.
S# 118 작은 방 (밤) ...........................................
C#1, 순우 M.S. FOLLOW
곱게 깔린 새이불, 베개 두 개.
순우, 옷을 벗고, 모자를 벗으려다가 멈칫한다.
노모 (E, 큰방에서) 욱이 너 오늘부터는 아버지하고 자라.
욱 .......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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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극본과 연출가의 콘티가 별 차이는 없다. 하지만, 연출가의 콘티는 철저하게 영상화 방법만을 모색한 극본인 것이다.
콘티를 읽으면 그대로 화면이 그려진다. 순우라는 사내의 미디엄샷에, 옷 갈아입는 모습이 나오고, 곧 옆방에서 노모와 욱의 대사가 나온다. 그들의 대사는 화면에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효과음(E)으로 처리된다.
여기서 작가의 극본과 달리, 연출가의 콘티를 보여주는 것은, 영상적 표현으로서의 극본의 형식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나 또 다른 뜻은 극본과 콘티를 확실히 구분 지어주고자 함도 있다.
대개의 작가지망생들이 장면부호나 극본용어를 많이 연구하여, 극본이 아닌 콘티를 쓰는 경우가 흔하다. 콘티적인 극본은 작가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연출자의 몫인 것이다. 지나치게 극본용어를 사용하려 들지 마라. 작가의 몫은 스토리와 생생한 인물연구를 바탕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며, 그 드라마가 영상화 되기 위한 밑그림을 제공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최대한 영상을 살릴 수 있는 밑그림을 그려 넣으면 되는 것이다. 콘티적이거나 혹은 문학적인 표현 따위는 잊어버리고, 극본 자체가 영상이 되고, 드라마가 되는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