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소 이
시인, 여행작가
인연
-헐버트와 한국의 인연
인연의 끈이 잡아당겼음일까? 양화진 묘역을 처음 찾은 날로부터 꼭 10년 만에 다시 찾아갔다.
하얀색 건물, 마치 사각형 기둥을 포개어 세운 듯한 교회(선교 100주년기념교회)에서 열린 헐버트 박사 추모 행사. 유화로 그린 헐버트 박사의 초상화와 고등학생이 헐버트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던 기억이 전부다. 그 학생은 “한국인의 친구이며 한국을 한국인보다 더 사랑한 박사님”이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독립운동가 역사 유적지를 탐방하고 기행 수필을 써온 게 9년째 하는 일이다. 독립운동가 역사 수필집을 두 권 냈다. 세 번째 책을 준비하면서 헤이그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에 대한 글을 쓰느라 몇 달 동안 분주했다. 세 분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대한 관련 자료를 섭렵하면서, 구한말 근대사에 헐버트 박사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년 전에 뇌리에 점 하나 찍었던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 박사. ‘고종황제의 백지위임장'을 헤이그까지 가서, 밀사 3인에게 전해주고 그들과함께 한 일’에 헐버트 선교사가 깊이 연관되어있는 역사의 고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헤이그 특사 3인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간 긴 여행처럼 아득한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외국 선교사들의 묘지. 무섭다거나 어두침침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외국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고즈넉한 100여 년전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묘원이었다. 그래서 ‘기독교 성지’라고도 불리나 보다. 당산 철교가 묘원 저만치 왼쪽으로 지나간다.
구한말 역사의 한 페이지가 고즈넉하게 가을 하늘 아래 풍경화 한 폭으로 고요하다.
이곳에 영면하고 계신 분 중에 헐버트 박사의 묘지가 있다. B-7 구역.묘지마다 비석이 세워져 있고, 비석 옆에는 묘목도 심겨 있다. 누군가 관리를 잘하고 있는 듯한 정돈된 분위기다. 헐버트 박사 비석 옆에 세워진 나무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으나, 잘 다듬어진 초록빛이 소담한 나무 그늘, 그의 묘역 앞에는 ‘건국훈장 독립장, 금관문화훈장’이라고 쓰여 있다. 을사늑약에 대한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린 노력 -을사늑약이 무효하다는 고종의 친서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려다 실패한 일- 이 있었다. 고종황제의 백지위임장을 헤이그까지 가서 헤이그 특사 3인에게 전달하며 밀사들을 도왔다. 그런데, 금관문화훈장은 또 무엇인지? 의아한 호기심을 갖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종이 열강들의 침략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의 인재를 길러야겠다고 육영공원(한국 최초의 근대적 명문 귀족 공립학교)을 세웠다. 그때 헐버트 박사가 영어 교수로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¹ 사람의 운명이 따로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헐버트 선교사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는 미들베리대학 총장의 아들이었다. 가문이 좋다고 해야 할까? 그의 어머니도 다트머스대학교 창립자였다. 교육자의 가문이다. 그런 헐버트는 1886년 24세 젊은 나이로 동양의 작은 나라에 왔다. 그는 왜 그 선택을 했을까?
멀고 먼 미지의 한국 땅. 그때 조선은 미개했고, 미국인이 생활하기에는 불편한 게 많았을 텐데. 호머 헐버트 청년(24세)의 선택은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을지도 모른다. 고종황제의 교수 초빙. 그는 그렇게 조선과 인연의 첫 단추를 끼웠다. 육영공원이 재정난 등의 이유로 3년 만에 폐교하자 헐버트는 미국으로 돌아간다. 거기서 그쳤으면 어땠을까? 그는 미국에서 감리교 선교사 자격을 취득하고 다시 조선으로 귀환한다(1891년에 떠났다가 2년 만의 귀환). 무엇이 그를 다시 오도록 잡아 끌었을까? 조선에 매료된 무엇이 있었을까? 헐버트 박사와 조선의 인연의 끈은 깊었나 보다.
1) 육영공원에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으로 길모어, 벙커와 함께 조선에 입국.
합정동 양화진 기독교 성지에 누워 계신 헐버트 박사. 양화진은 예전에 버드나무가 매우 흐드러졌던 곳이다. 물이 깊고 큰 배들이 운항할 수 있어서, 제물포항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자들이 양화진 나루터를 거쳤다고 했다. 지금은 나루터의 흔적을 전혀 찾을 길이 없고, 강변북로로 자동차들만 쌩쌩 달린다. 오염된 한강은 느리지만 완벽하게 서해를 향해 흐르고 있다. 외세의 침입과 더불어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하던 외국 선교사들. 그들은 조선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미개한 조선을 개화하고 서구 문명과 학문, 종교를 심으려 주력했다. 덕분에 개화가 쉽게 이뤄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선교사들을 먼저 들여보내 조선의 물정을 탐
색하려 했다는, 제국주의 침략의 선행적 행보였다고 보는 비판적인 시선도 있다. 어떤 견해가 맞는지는 각자의 생각에 맡기기로 하자. 조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조선에서 대한제국,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격변했던 구한말. 우리와 고통을 함께 하며 진정으로 우리의 안위를 위해 헌신을 보인 분이 호머 헐버트 박사였다는 사실 앞에서는 마음의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다.
김춘수 시인이 〈꽃〉에서 노래한 것처럼, “잊히지 않는 하나의 의미”와 무의미한 몸짓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보이던 헐버트 박사에 관해 관심을 두고 그의 유적지를 둘러보아도 양화진 묘지와 비석이 전부다. 서재필과 양주동 박사를 도와서 〈독립신문〉 영문판을 헐버트 박사가 편집했다고 했다.
독립신문 발간 터가 정동에 있다는 것을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 독립신문 발간 터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헐버트 박사에 대한 서적을 구해서 읽는 것이 그분에 대한 여행의 전부가 될 것 같다. 그가 재직했던 육영공원도 자취를 감추었고, 그 근처에 세웠다는 독립신문사 헐렸고. 그분이 잠시 교직을 담당했다는 제중원 학당도 사라졌고. 헐버트 선교사에 관한 유적지는 오직 묘역이 전부다.
다시 그의 묘역을 찾아갔다.
세모의 끝자락 겨울의 풍경화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 마른 갈색으로 덮인 묘원, 쓸쓸해 보였다. 겨울의 풍경화 속에 여전히 “독립유공자-건국훈장 독립장-금관문화훈장”이라는 묘지 앞 푯말만이 또렷했다.
자신의 사비를 들여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어를 배운지 3년 만에 《ㅅ민필지》²라는 책을 저술한 이가 헐버트 박사다. 모국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어야 할 조선인들도 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 못한 일이다. 그 일을 미국인 선교사가 해냈다는 점이 충격적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민요 〈아리랑〉을 악보로 만든 이가 헐버트 박사다. 우리의 정체성을 버리고 사대주의에 빠져, 우리글이 있음에도 한글을 천시하여, ‘언문, 아녀자의 글’이라고 했던 조선의 유학자들. 그러나 헐버트는 한글의 우수성을 발견하고 〈한글〉(The Korean Alphabet) 논문³을 저술했다. 금속활자와 거북선 등 우리 문화에 대한 논문도 발표했다. 고종의 윤허를 받고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썼다. 역사, 산업, 사회제도 등 6개 장으로 쓰인 대한제국에 대한 외국인의 시선.
2) 사민필지:최초의 한글 지리사회 총서 교과서
3) 1902년(40세)
서재필과 주시경 선생을 도와 〈독립신문〉 창간에 힘썼다. 조선인들을 위한 한글판과 외국인들을 위한 영문판 지면이 있었다. 영문판은 헐버트박사가 편집을 도맡았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주시경 선생과 함께 우리글에 띄어쓰기와 마침표를 문장에 시행하게 된다. 영어의 띄어쓰기를 한글에 적용한 것이다. 띄어쓰기를 통해 문장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우리글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으로 우리가 해냈어야 할 일이었다. 이런 점이 그를 금관문화훈장을 받게 했나 보다. 새삼 느끼며 겨울의 양화진 묘역을 둘러본다.
유장하게 흘러내리는 한강 물소리는 들리지 않고, 합정동 시가지의 높은 빌딩들 속에 고요하게 누워계신 헐버트 박사의 비석에 “Man of Vision and friend of Korea”라는 글귀가 명징하다. “목표, 꿈의 사람이며 한국의 친구”
라는 구절이 가슴을 파고든다. 그의 비전은 무엇이었을까? 고종황제 옆에서 국권 회복을 도운 믿을만한 외국 선교사. 고종황제의 침소에서 불침번을 서면서 고종의 안위를 염려해주었던 외국인.
1907년에 헐버트 박사가 이 땅을 떠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일본에 의해서 추방당한 것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헤이그 특사를 도운 것을 일본이 안 것이다. 일본이 헤이그 특사 중 이상설에게 궐석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위종에겐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순국한 이준 열사에게까지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일로 인해 고종은 폐위되었다. 그런 기류 속에서 일본은 헐버트 박사에게 추방의 압력을 넣었던 게다.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지만, 미국인인 헐버트 박사의 행보를 강제할 수 없었을 텐데, 압박하는 분위기를 조장했을 것이다. 어떤 기록에서는, 1907년 헤이그 평화클럽에서 일본의 부당함을 질책하고 미국으로 떠났다고 적혀 있다.
그가 1907년 45세의 나이로 대한제국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게 1949년 7월 말이었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릎 쓴 혼자만의 고집이었다. 제물포항에 내리고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그는 이 땅에 묻히기 위해서, 묻힐 곳을 찾아 먼 뱃길을 헤치고 왔는지도 모른다. 42년만의 귀환이다. 그리고 그 귀환은 아무도 추방하지 않을 영원한 귀환-가족들을 미국에 남겨둔, 고독한 영면이 되었다.
그는 1886년, 1891년, 1949년 세 차례 한국 땅을 밟았다. 1886년에는 육영공원 영어 교수로, 1891년에는 감리교 선교사로, 194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빙에 의한 국빈으로 왔다. 첫 번째 방문해서 5년간 머무르면서 교육자로서의 사명을 담당했다. 《민필지》 책을 썼다. 1891년에서 1907년까지 16년 동안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영문 소설 《천로역정》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최초 출판했다. 1901년에는 〈Korea Review〉를 발행, 영문으로 《대한제국 멸망사》 등을 출판했다. 기독교 서적을 주로 출판하는 삼문출판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독립신문〉 일에도 관여했다. 1907년 미국으로 돌아가 메사추세추 스프링필드에서 목사로 목회를 했다. 1949년 한국 땅에 세 번째 방문 후 한국 땅에서 영면에 들었다. 그의 일생은 교육자, 출판 언론인, 저술인, 종교지도자 등의 길을 걸었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그를 한국독립유공자, 한글을 사랑한 문화훈장의 수여자로 손꼽는다. 누구는 자신의 나라를 팔아먹었고, 누구는 자신의 나라도 아닌 한국을 사랑했다.
나도 그의 묘지를 세 번 찾았다. 2011년 8월, 2020년 9월, 2020년 12월, 갈
때마다 묘비 밑에 누워계신 그 분은 아무 말이 없다. 8월의 따가운 햇볕과 9월 청명한 하늘, 겨울바람이 심해 발이 시렸던 12월의 행보. 말 없는 묘비는 침묵으로 웅변을 하고 있었다. 한국과 깊은 인연의 고리를 가졌던 헐버트 선교사. 뜨거웠고 시린 한국의 구한말 역사의 한페이지에 버들 꽃처럼 피어계신 분. 버들 꽃솜처럼 양화진 언덕에서 우리 한국인들의 가슴에 날리고 있을 것 같다. 날씨가 풀리면, 다시 방문해서 마음 가득 고마움을 올려드리고 싶다. 그때는 꽃 한 다발 바쳐야지. 한글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국어를 사랑
하는 문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그냥 있을 수만은 없다고. 향기 있는 꽃은 향기를 뽐내지 않아도, 10년이 지나도 그 향기를 쫓아 다시 찾아오는 이의 발걸음이 있다고 되뇌면서.
버드나무 사라진 양화진에
-헐버트 박사 묘지를 보며
강 소 이
버들가지 늘어졌던 나루터에
제물포에서 나룻배 드나들었지
물가에 버들가지 낭창낭창
찰랑이던 그림자 사라지고
당산 철교가 달린다
화물을 잔뜩 실은 바퀴가 바쁘다
철교 위로 내리는 붉은 노을 속에
달리는 강변북로를 멀리 바라보며
누워계신 버들꽃
제물포에 내려 이레 만에 묻혔지
양화나루 언저리 언덕에
버드나무 대신
지나는 바람에 실려 버들 솜 꽃으로
너에게도 산들바람 전하려고
짙붉은 마음 전하려고.
* 참고문헌:《대한독립을 빛낸 헐버트와 초기 기독교선교사》(유성실著, 현대사포럼出)
* 강소이姜笑耳 약력
본명:姜美京,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 문학과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 육 전공, 《시문학》 시부문 등단, 《서울문학》 수필 등단, 한국시문학문인회 이사, (사)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PEN한국본부 국제협력위원, 한국문인선교회 임원, 이대 동창문인회 임원, 수상:시민이 드리는 호국특별상 수상(시부문), 한국현대시인협회 작품상 수상(시부문),
풀잎문학상 大賞수상(수필부문), 사상과 문학 大賞수상(수필 부문), 국민일보 신춘문예 수상 (시부문), 한국문학상 수상(시부문), 시집:《별의 계단》, 《철모와 꽃양산》, 《새를 낳는 사람들》, 《행복한 파종》, 《바람의 눈동자》, 산문집:《유적지, 그 백년의 이야기》,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2》,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3》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