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예영 신작소시집 읽기】
길에 대한 여섯 가지 삽화
남 정 (시인)
『장자』「양생주편」중 ‘포정 해우’에서 포정은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는
다. 그가 소에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려
칼을 움직이는 동작은 모두 음률에 맞는다. 문혜군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
하여 묻는다. 어찌하여 기술이 이런 경지에 이를 수가 있느냐? 포정은 칼을
놓고 예를 갖춘다. 처음에는 소가 아닌 것이 없더니 3년이 지난 후에는 소
가 분해되어 보이고 지금은 정신으로 만난다는 것.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
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아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
에 간 것과 같다고 한다. 그가 좋아하는 도(길)를 바라보며 소를 잡아 지금
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포정해우’의 본질은 양생과 양주에 있다. 양생養生은 건강하게 오래 사
는 것이고, 양주養主는 허상에 불과한 몸을 넘어서 진정한 주인을 기르는 것
으로 풀이할 수 있다. 양생을 통한 양주 즉 진정한 주인을 기르는 이치는
순리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삶을 의미한다. 이는 생명들이 생의 명을 이루
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몸을 넘어서 진정한 주인을 기르는 일, 다시
말해 생의 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길이 여섯 개의 시편에 골고루 내재해 있
다. 여섯 개의 시 전체의 큰 흐름은 주인공들이 방향을 가지고 생의 명을
완수하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시,「 득음을위하여」에서 수탉 한 마리는 ‘목 꼿꼿하게 세우고 방향 바꾸
고 발톱으로 디딘 땅 박박 긁고 목청 틔우’는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이어
지는 2에서 사내가 목청을 가다듬고 ‘세에 탁’으로 아파트 한 동을 울린다.
이 시에서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날마다 동네를 들었다 놓는 일에 몰두하는
수탉스러운 생명들이 선을 보이고 있다.
시,「 날개 있는 것들은 말부터 밀어본다」는 ‘가슴부터 털어내’ 날아가기
에 몰두하는 새들이 주인공이다. 바다로 떠나가기에 앞서 새들은 ‘머리 모
양이 가발을 뒤집어 쓴 꼴’ ‘날마다 보는 태양과 바다가 지루하다’는 일상
을 털어 가벼워지려 애쓴다. 더불어 머리가 아픈 새 한 마리조차 한 방향으
로 날갯짓을 쉬지 않는다. 새를 새답게 하는 생의 명은 바다를 향해 새벽마
다 날개를 펴는 데 있다.
시,「 해바라기 밭이 보이는 길목」에서는 같은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아이
의 몸짓이 주를 이룬다. ‘ 헐렁한 바지에 가슴이 더운’ 청년들이 서 있는 언
덕으로 온 몸을 내미는 아이. 기차가 떠난 뒤에도 보채는 아이는 방향에 몰
두해 있다. ‘ 서둘 것 없는 길’이라고 토닥이는 할머니는 ‘입을 벌릴 때마다
해바라기가 보이는 길에서 돌아온’ 이야기를 다른 이웃과 주고 받는다. 길
의 입구에서 보채는 아이를 길의 끝에서 돌아온 할머니가 다독이는 장면이
해바라기 밭과 어우러진다. 히잡 쓴 여인이라던가 해바라기 밭이 수채화
한 폭을 연상시킨다.
시,「 엔젤 수족관을 누비다」에서도 화자의 주된 관심사는 방향이다. ‘ 오
후에도 수초의 초록을 흔드는 엔젤은 제 이름에 관심이 없’다. ‘ 귀는 퇴화
하고 같은 길을 오고 가지만 지치지 않고 열중하고’ 있다. 방향에 대한 도
전으로 존재하는 그녀는 ‘엔젤’이라고 불려진다. 그러나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주인공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수족관의 주인공은 거기. 의거하여, 생각하며, 행동
하는, 근원인 실존을 생각하게 한다.
시,「 달팽이는 지금」에서 길을 나선 주인공은 ‘몸을 덮는 그림자에 더듬
이부터 숨기고 꿈’을 다진다. 집까지 등에 지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을
간다. 달팽이를 달팽이답게 하는 생의 명은 엄숙하기까지 하다. ‘ 싸리꽃 빗
방울 머금고 새소리 엮어지는 숲’은 주인공이 온몸으로 밀고 가야할 방향.
좌우지간은 막무가내의 길이자 오른 쪽 아니면 왼 쪽을 말하는 이중적 의
미로 읽어볼 수 있겠다.
「달팽이는 지금」에서 보이던 좌우지간의 샛길은 시, 「풍경에서 풍경으
로」에서 에이 비 씨라는 세 개의 길로 나뉜다. 세 개의 길은 의도적으로 선
택되기도 하고 우연스럽게 들어설 수도 있다. 우연스럽다, 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는, 필연성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들어선 길의 풍경은 다르다. 들어선 길에서 ‘아파트
평당가’는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다. ‘푸른 초원’ 역시 누구에겐가 의미
가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풍경이랄 수 있다. 들어선 길에는 팻말(샛길)이
있다. 생명들은 컵이 되어 ‘봉곡리’나 ‘밀다원’의 풍경을 몸으로 담는다.
컵 안을 각자의 명으로 채운다.
시에 여러 가지 이름으로 참여한 주인공들은 어느 길에서나 열심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포정’처럼 자신을 연마하고 있다. 에이 비 씨로 들어섰
건, 좌우지간의 샛길로 들어섰건 방향을 정하고 그 길에 매진한다. 여섯 가
지의 삽화를 통해서 볼 때 길의 종점은 똑같다. 각자의 명을 이뤄가는, 즉
양생을 통한 양주의 길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