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동 별곡
최용현(수필가)
“구로동에도 아파트가 있어?”
대학에 다니는 작은딸이 학교 선배한테 들었다는 이 말이, 내가 20년 가까이 살던 구로를 떠나야겠다고 마음먹는 데 결정타가 되었다. 강남에 사는 친구로부터 학군이 어떻고, 삶의 질이 어떻고 하는 소리를 들으며 수준이 떨어지는 동네에 산다고 괄시를 받아도 참을 만했는데 딸아이가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하니 속이 뒤집어질 수밖에.
아직도 ‘구로’ 하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공장 굴뚝에서 매연이 뿜어져 나오고, 여공들이 거주하는 방 하나 부엌 하나짜리 벌집이 덕지덕지 늘어서 있고, 안양천 제방에는 우범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아니다. 요즘의 구로는. 그런 공장들은 퇴출된 지 오래고 그 자리에 들어선 최신식 건물에는 첨단정보산업, 디지털 업종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벌집들은 대부분 재개발되어 아파트단지로 변했다. 안양천변은 깨끗하게 정비되어 곳곳에 휴게 및 체육 시설이 들어서있고, 밤에는 가로등이 대낮처럼 주위를 밝혀주고 있다.
내가 구로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큰딸이 유치원에 다닐 무렵 개봉동 원풍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였다. 서민들이 사는 허름한 저층 아파트였는데, 걸어서 3분 만에 개봉역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지하철 교통이 좋았다. 거기서 정 붙이고 살면서 두 딸을 키웠다.
폭우가 세차게 쏟아지던 어느 날,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들어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아파트가 물에 잠겼으니 오늘은 집에 들어오지 말고 딴 데 가서 자고 출근하라.’는 것이었다. 집이 물에 잠겼다는데 외박이라니 그게 말이 되는 얘기인가.
나는 조퇴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지하철 1호선 인천행은 구로역까지만 운행했다. 다음역인 개봉역 철로에 물이 차서 운행이 안 된다는 거였다. 구로역에서 내려 경인국도를 따라 걸었다. 고척교를 건너면서 내려다 본 안양천은 강물이 넘칠 듯 바로 발아래에서 출렁거렸다. 누런 흙탕물에 가재도구들이 떠내려가기도 했다.
개봉입구에서 광명시 쪽으로 들어서서 고가도로에 올라서 보니 원풍아파트가 온통 흙탕물에 잠겨있었다. 나는 양복 윗도리를 벗어서 머리 위로 받쳐 들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가슴까지 차오른 물길을 헤치고 집에 들어갔다. 전기와 수도가 끊어져 있었다. 옥상에 올라가 보니 온 천지가 흙탕물 바다였다.
밤엔 촛불을 켜야 했다. 전기는 3일 만에 들어왔지만 물은 일주일 동안 급수차에서 받아서 썼다. 세수한 물은 변기에 부어 재활용했다. 이틀 만에 물이 빠지자, 주민들이 모두 나와 대청소를 했다. 땅바닥에 깔린 흙과 오물을 치우고 쓰레기를 모아서 버리고…. 그 때문에 이웃 주민들과도 친해졌고 정도 많이 들었다.
우리 집은 5층이라 별 피해가 없었지만, 상가 지하슈퍼는 천장꼭대기까지 물이 차버릴 정도로 피해가 컸다. 그 수재(水災) 때문에 아파트 재건축이 확정되었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에도 두 번 물난리가 났었기 때문에 까다롭다던 안전진단을 수월하게 통과한 것이다. 큰딸이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0년이나 이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나는 재건축 덕분에 집값이 폭등한 원풍아파트를 팔고 구로1동 연예인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새로 생긴 구일역에 가까운 구로1동은 전 세대가 아파트로만 구성되어 있는 동네다. 두 딸은 아파트단지 안에 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학교가 가깝다고 좋아했다.
구로지역은 학군이 좋지 않아서 교육환경이 별로라고 하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공부는 전적으로 본인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 딸 모두 과외는커녕 학원에도 다닌 적이 없지만, 큰딸은 2년 전에 S교대에 들어갔고, 작은딸은 이번에 Y대 영문과에 들어갔지 않았는가.
그런데, 강남역 부근에 직장이 있는 나뿐만 아니라 교대역으로 등교하는 큰딸도 지하철 2호선을 이용하는데, 이제 작은딸마저도 2호선 신촌역으로 등교를 해야 했다. 그래서 지하철 2호선을 바로 탈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구로 지역에 15년이나 살아서 정이 들긴 했지만, 이제 떠날 때가 되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은딸이 학교선배한테서 구로동에도 아파트가 있냐는 말을 들었다는 그 다음날, 부동산 업소에 집을 내놓았다. 얼마 안 있어 집이 팔렸다. 이곳에 이사 온 지 5년여 만이었다. 이제 구로를 떠나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돈으로는 강남에 전세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이 만나는 신도림역 주변을 집중적으로 둘러보았다. 신도림역은 지하철 교통이 아주 좋다. 1호선을 타면 영등포 서울역 종로 청량리 등은 물론 부천 인천 안양 수원 의정부 등 서울외곽도시들을 한 번에 갈 수 있고, 2호선을 타면 강남 잠실 을지로 신촌 등 서울 중심부를 한 번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동네 이름도 구로동보다는 신도림동이 더 낫지 않겠는가. 신도림역에서 남쪽출구로 나오니 제법 큰 아파트단지가 보였다. 새 아파트 단지라서 그런지 조경도 깔끔했고 지하주차장에서 바로 각 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었다. 역에서 단지 정문까지 오는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가까운 부동산 업소에 들어갔다.
지하철 소음에서 자유로운 로얄 동, 로얄 층 매물을 잡았다. 모자라는 돈은 융자를 받기로 했다. 부동산 중개인이 계약서를 써 내려갔다.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 1267번지 신도림태영타운…. 나는 ‘구로동’이라는 글자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아저씨! 여기 신도림동 아니에요?”
중개인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구로5동입니다.”
“그럼 왜 신도림태영타운이라고 이름을 붙였죠?”
내가 되물었다. 중개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아, 그건 신도림역에서 가깝다고 붙인 이름이겠죠.”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혼자 중얼거렸다.
‘구로동 귀신이 될 팔자인가 보군.’*
첫댓글 ㅎㅎ
구로동을 벗어나긴 다 글렀네요
그래도 요즘 구로동은 예전 구로동이 아니지 않습니까?
몇년전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다음 역은 구로..구로 디지털 단지..
뭐..
그렇게 말하는 소릴 들었는데..
바깥 풍경을 보곤 정말 놀랐어요
너무나 신 세상으로 변한 모습에요....
몇십년의 세월은..
그러고도 충분하지요
어쨌거나..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아파트로의 입성을요..
비록 구로는 벗어나질 못했지만요 ㅎㅎ
오래전 얘기입니다.
물론 그때 이사 와서 아직도 신도림태영타운에 살고 있어요.ㅎㅎ
계산해보니 구로구에서 34년째 살고 있네요.
서민들이 살기에 아주 좋아요.
동네 이름 후진 거 외에는 불만이 없어요.ㅎㅎ
참, 수기 리 님은 수도권 어디에 사시는지 궁금하네요.
@월산처사 지금 외출했다가 스마트 폰으로 답글 드립니다~~^^
전 경기 광주에 살지요~~~
@수기 리 경기 광주도 지금은 집들이 어마하게 늘은것으로 생각됩니다.
2십년전에 그쪽에 골프회원권이 있어 매일 3번국도 타고 다니던생각이 납니다.
@수기 리 폰으로 답글을 쓸 정도면 문명의 이기를 잘 다루시네요.
경기도 광주라면 남한산성 있는 곳으로 알고 있어요.
수기 리 님은 저하고 연배도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영도 20년 전에도 골프를 치셨군요.
실력이 준 프로급이겠는데요.
@월산처사 폰으로야.. 더 쉽지요
문명의 이기랄것도 없을만큼요... ㅎㅎ
다음 카페 앱을 스마트 폰에 깔아놓으면 ..
자동으로 댓글에 답이 뜹니다 그걸 클릭만 하면.
바로 내 댓글에 대한 답을 쓴 것을 확인 할수 있고요
바로 답글도 쓸수 있는 것이지요
컴에 접속하는것 보다 더 쉬워서요~~ ^^
가끔 그렇게 답글을 쓰곤 한답니다
그리고.. 처사님은 나이가 어찌 되시는지. 저랑 비슷하다고 하시는지.. 궁금 하네요
거의 짐작은 합니다만... ㅎㅎ
@수기 리 제가 잘못 생각했나봐요.
처음엔 수기리 님이 제가 쓴 영화에세이에 나오는 영화를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저와 비슷한 6학년 중반으로 생각했는데,
디지털 기기를 잘 쓰시는 걸 보고 달리 생각하게 되었어요.
5학년 중후반 같아요.^^
@월산처사 딩동댕~~~
바로 맞추셨네요~~50 대 중반~~
지금 바깥인데
엄청 춥습니다
잠깐 폰으로 답글 드려요~~^^
주말 잘 보내시길요~~^^
@수기 리 그러시군요,
감사합니다. 쿨하게 답해줘서...
낼 일요일 오후에 고딩친구 부부들이 우리 동네에 와서
이번 가을에 구로 거리공원에 세운 제 목판시(자작시방 3205번 참조)에서 사진도 찍고
식사를 한 후 우리 집에도 오기로 했어요.
하필 엄청 추운 날... 날짜를 잘 못 잡았나봐요.
@영도 지금도 공을치시나요
서울을 종종가게되는데 팀이형성되면
서울근교 구경도 해보고싶어지네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9.03.17 00:42
@영도 아 그러셨군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9.03.17 11:00
우리나라 최초<?>의 공단지역으로 서울의 일자리 창출하는단지 였다.
그래서 구로공단의 공순이, 공돌이라는 별명도 있었죠.
그랬죠. 그때의 오명이 아직도 누명으로 남아있어서....
"구로동 별곡"에 한 가락 보탭니다.
영원히 내 마음에 살아있는 그 이름,
지금은 없어져버린 "00은행 구로동지점" 차장으로 재직했을 때의 추억!
20년도 더 지나버린, 까발려진 서울 시내 다른 데완 다른 소박과 질박감이 있던 곳!
아, 그런 경력이 있으시군요. 아련하시겠습니다.
그래요. 소박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죠.
글 잘 읽고 감니다
저도 작가님 팬입니다 ㅎㅎㅎㅎㅎ
아이고 감사합니다.
상전벽해가 된 곳이죠~
그렇지요.
하드웨어는 그렇게 되었는데, 소프트웨어는 아직도...
감사합니다.
매일 시간날적마다 들어와 보는 재밋게
읽고가는 꽁트 구로동 지금은 교통좋고
좋은곳 사시네요 시댁큰집이 신도림역에서 가까워요 구로디지털단지에서 내려도되고요
서울에 오시거나 큰집에 오실 때 댓글로 연락 주세요.
차 한잔 하시게요.^^
@월산처사 야호 한달에 거의한번정도 서울갑니다
딸둘이 서울살거든요
@분홍공주. 저도 딸 둘이랍니다. 기다리죠.^^
저는 담주쯤에 부산 이기대부터 동해 해파랑길 걷기 시작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