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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十七回 盧蒲癸計逐慶封 楚靈王大合諸侯
제67회: 노포계가 계략으로 경봉을 쫓아내고 초영왕이 제후들을 크게 모으다.
話說,周靈王長子名晉,字子喬,聰明天縱,好吹笙,作鳳凰鳴。立為太子。年十七,偶遊伊洛,歸而死。靈王甚痛之。有人報道:「太子於緱嶺上,跨白鶴吹笙,寄語土人曰:『好謝天子,吾從浮丘公住嵩山,甚樂也!不必懷念。』」(浮丘公,古仙人也。)靈王使人發其冢,惟空棺耳,乃知其仙去矣。至靈王二十七年,夢太子晉控鶴來迎,既覺,猶聞笙聲在戶外。靈王曰:「兒來迎我,我當去矣。」遺命傳位次子貴,無疾而崩。貴即位,是為景王。是年,楚康王亦薨。令尹屈建與群臣共議,立其母弟麇為王。未幾,屈建亦卒,公子圍代為令尹。此事敘明,且擱過一邊。
한편, 주영왕(周靈王)의 장자는 이름이 진(晉)이고 자는 자교(子喬)인데,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생황 불기를 좋아하여 봉황이 우는 소리를 내었다. 태자가 되어, 나이가 17살 때 이락(伊洛)에 놀러 나갔다 돌아오던 길에 죽었다. 영왕이 매우 애통해하였다. 어떤 사람이 영왕에게 고하기를, “태자가 구산(緱山) 고개 위에서 백학을 타고 생황을 불며 그곳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자의 자리를 마다하고 부구공(浮丘公)을 따라가서 숭산(嵩山)에 살고 있는데 아주 즐거우니 너무 생각하지 마시라고 전하시오.’라고 했습니다.” 했다. (부구공(浮丘公)은 옛날 신선이다) 주영왕이 사람을 시켜 왕자 진의 무덤을 파 보니 과연 빈 관이었다. 이에 그가 신선이 되어 간 줄 알았다. 주영왕 27년에 꿈에 태자 진이 학을 타고 와서 자기를 맞이하러 왔다고 했다. 꿈을 깨어도 여전히 문밖에서 생황 소리가 들렸다. 주영왕이 말하기를, “태자가 나를 맞이하러 왔으니 내가 마땅히 가야겠다.” 하고, 왕위를 둘째 아들 귀(貴)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아무런 병도 없이 죽었다. 왕자 귀가 즉위하니, 이가 주경왕(周景王)이다. 그 해에 초나라 강왕(康王)이 또한 죽었다. 영윤 굴건이 군신들과 상의하여 강왕의 동모제 웅미(熊穈)를 왕으로 세웠다. 오래지 않아 굴건도 또한 죽었다. 공자 위(公子圍)가 굴건을 대신하여 초나라의 영윤이 되었다. 이 일을 밝혔으니 또한 한쪽으로 밀어둔다.
再說,齊相國慶封,既專國政,益荒淫自縱。一日,飲於盧蒲嫳之家,盧蒲嫳使其妻出而獻酒,封見而悅之,遂與之通。因以國政交付於其子慶舍,遷其妻妾財幣於盧蒲嫳之家,封與嫳妻同宿,嫳亦與封之妻妾相通,兩不禁忌。有時兩家妻小,合做一處,飲酒歡謔,醉後囉唣,左右皆掩口,封與嫳不以為意。嫳請召其兄盧蒲癸於魯,慶封從之。癸既歸齊,封使事其子慶舍。舍膂力兼人,癸亦有勇,且善諛,故慶舍愛之,以其女慶姜妻癸,翁婿相稱,寵信彌篤。癸一心只要報莊公之仇,無同心者,乃因射獵,極口誇王何之勇。
한편, 제나라 상국 경봉은 이미 국정을 오로지하면서 더욱 음탕하고 제멋대로였다. 어느 날 노포별의 집에서 술을 마시는데, 노포별이 그의 아내를 나오게 하여 경봉에게 술을 따르게 했다. 경봉이 그녀를 보고 기뻐하여 마침내 그녀와 사통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국정을 그의 아들 경사(慶舍)에게 맡겨 놓고, 그의 처첩과 재물을 노포별의 집으로 옮기게 했다. 경봉은 노포별의 아내와 함께 자고, 노포별 역시 경봉의 처첩들과 서로 사통하여, 두 사람이 금하고 꺼리는 것이 없었다. 어느 때 경봉과 노포별의 처첩들과 한자리에 모여 술을 마시며 즐겁게 희롱하며 놀다가 술에 취하자 소란을 피웠다. 좌우에 시중들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가렸으나 경봉과 노포별은 개의하지 않았다. 노포별이 그의 형 노포계(盧蒲癸)를 노나라에서 불러 줄 것을 경봉에게 청하니, 경봉이 허락했다. 노포계가 제나라로 돌아오자 경봉은 그에게 경사를 받들라고 했다. 경사는 완력이 뛰어났다. 노포계 역시 용기가 있고 또한 아첨을 잘하여 경사가 총애했다. 경사가 그의 딸 경강(慶姜)을 노포계에 아내로 주었다. 두 사람은 옹서지간이 되어 총애하고 믿는 것이 더욱 돈독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포계는 오로지 제장공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으나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경사와 함께 사냥하던 중에 노포계가 왕하(王何)의 무용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慶舍問:「王何今在何處?」癸曰:「在莒國。」慶舍使召之。王何歸齊,慶舍亦愛之。自崔慶造亂之後,恐人暗算,每出入,必使親近壯士執戈,先後防衛,遂以為例。慶舍因寵信盧蒲癸王何,即用二人執戈,餘人不敢近前。舊規:公家供卿大夫每日之膳,例用雙雞。時景公性愛食雞跖,一食數千,公卿家效之,皆以雞為食中之上品。雞價騰貴,御廚以舊額不能供應,往慶氏請益。盧蒲嫳欲揚慶氏之短,勸慶舍勿益,謂御廚曰:「供膳任爾,何必雞也?」御廚乃以鶩代之。僕輩疑鶩非膳品,又竊食其肉。
경사가 묻기를, “왕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니, 노포계가 말하기를, “거(莒)나라에 있습니다.” 했다. 경사가 그를 불러오게 했다. 왕하가 제나라에 돌아오자 경사가 또한 그를 총애했다. 최저와 경봉이 반란을 일으킨 후부터 사람들이 남몰래 계획을 꾸밀까 두려워하여, 매번 출입할 때면 반드시 친근한 장사들을 시켜 과를 들고 앞뒤에서 호위하게 한 것이 관례가 되었다. 경사도 노포계와 왕하를 총애하여 두 사람을 시켜 과를 들게 하여 다른 사람들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옛날 규범에는, 제후의 집에서 경 대부에게 매일 닭 두 마리를 대접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때 제경공은 원래 닭발을 좋아하여 한 끼에 수천 개를 먹었는데, 경 대부의 집에서도 그것을 본받아서 모두 닭을 음식 중에 최고로 생각하게 되었다. 닭값이 폭등하여 궁중 요리사는 옛날 경비로는 음식을 준비할 수가 없어서 경씨를 찾아가 음식비용을 늘려 달라고 청했다. 노포별이 경씨들의 단점을 부추기려고 경사에게 음식비용을 올려 주지 말라고 권하면서 궁중 요리사에게 말하기를, “음식 준비는 그대에게 맡겼으니 하필 닭이라야 하는가?” 했다. 궁중 요리사가 이에 오리로 대신했다. 궁중 주방의 비복들이 오리고기는 제경공의 수라상에 올라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 고기를 훔쳐 먹었다.
是日,大夫高蠆字子尾,欒竈字子雅,侍食於景公。見食品無雞,但鶩骨耳,大怒曰:「慶氏為政,刻減公膳,而慢我至此!」不食而出。高蠆欲往責慶封,欒竈勸止之。早有人告知慶封,慶封謂盧蒲嫳曰:「子尾子雅怒我矣!將若之何?」盧蒲嫳曰:「怒則殺之,何懼焉!」盧蒲嫳告其兄癸。癸與王何謀曰:「高欒二家,與慶氏有隙,可借助也。」何乃夜見高蠆,詭言慶氏謀功高欒二家。高蠆大怒曰:「慶封實與崔杼同弒莊公。今崔氏已滅,惟慶氏在,吾等當為先君報仇。」王何曰:「此何之志也!大夫謀其外,何與盧蒲氏謀其內,事蔑不濟矣。」
이날은 대부 고채(高蠆 ; 자는 자미)와 난조(欒竈 ; 자는 자아)가 제경공을 모시고 식사를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음식을 보니 닭이 없고 오리의 뼈만 있었다. 두 사람이 크게 화를 내어 말하기를, “경씨가 국정을 맡더니 제후의 음식 비용마저 각박하게 깎는구나! 이렇게까지 우리를 업신여기다니!” 하고, 두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고 나와 버렸다. 고채가 경봉에게 따지러 가려고 하자 난조가 말렸다. 어떤 사람이 어느새 이 일을 경봉에게 전하자, 경봉이 노포별을 불러 말하기를, “자미(고채)와 자아(난조)가 나에게 매우 노해 있다고 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니, 노포별이 말하기를, “그놈들이 노하면 죽여 버리지요,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했다. 노포별이 그 형 노포계에게 알리니, 노포계가 왕하와 모의하기를, “고씨와 난씨 두 집안이 경씨와 틈이 벌어졌으니 우리가 그들의 힘을 빌릴 만하다.” 하고, 왕하가 고채를 찾아가 거짓말로 경씨가 고씨와 난씨의 두 집안을 습격할 모의를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고채가 크게 노하며 말하기를, “경봉이 사실 최저와 함께 제장공을 시해했소. 지금 최씨는 이미 멸족되었고 오직 경씨만 남아 있소. 우리가 마땅히 제장공을 위해 원수를 갚아야겠소.” 하니, 왕하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저의 뜻입니다. 대부께서는 밖에서 도모하시고 저와 노포 형제는 안에서 도모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했다.
高蠆陰與欒竈商議,伺間而發。陳無宇、鮑國、晏嬰等,無不知之,但惡慶氏之專橫,莫肯言者。盧蒲癸與王何卜功慶氏,卜者獻繇詞曰:「虎離穴,彪見血。」癸以龜兆問於慶舍曰:「有欲功仇家者,卜得其兆,請問吉凶?」慶舍視兆曰:「必克。虎與彪,父子也﹔離而見血,何不克焉?所仇者何人?」癸曰:「鄉里之平人耳。」慶舍更不疑惑。秋八月,慶封率其族人慶嗣慶遺,往東萊田獵,亦使陳無宇同往。無宇別其父須無,須無謂曰:「慶氏禍將及矣!同行恐與其難,何不辭之?」無宇對曰:「辭則生疑,故不敢。若詭以他故召我,可圖歸也。」遂從慶封出獵。
고채가 은밀히 난조와 상의하여, 기회를 엿보아 일어나기로 했다. 진무우(陳無宇), 포국(鮑國), 안영(晏嬰) 등은 모르지 않았으나, 경씨의 전횡을 미워했기 때문에 기꺼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노포계와 왕하가 경씨들을 공격하는 데 대해 점을 쳤다. 점쟁이가 점사를 바쳐 말하기를, “호랑이가 굴을 떠나니, 호랑이 새끼는 피를 흘린다.” 했다. 노포계가 경사에게 거북점를 가지고 가서 묻기를, “제가 원수들의 집을 공격하려고 그 조짐을 점쳐보니 이런 괘가 나왔습니다. 길흉이 어떤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하니, 경사가 거북등의 갈라진 모양을 보더니 말하기를, “틀림없이 이긴다. 호랑이와 그 새끼는 부자지간이다. 집을 나가서 피를 본다고 하니 어찌 이길 수 없겠는가? 원수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했다. 노포계가 말하기를, “고향의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하니, 경사가 다시 의심하지 않았다. 그해 가을 8월에 경봉이 종족인 경사(慶嗣), 경유(慶遺) 등을 인솔하여 동래(東萊)로 사냥을 나가면서 진무우도 함께 가자고 했다. 진무우가 그의 부친인 진수무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니, 진수무가 말하기를, “경씨들이 장차 화를 당할 텐데 그들과 같이 가서 변을 당할까 근심된다. 어찌하여 사양하지 않았느냐?” 했다. 진무우가 대답하기를, “제가 사양하면 의심을 받을 것 같아 감히 사양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다른 핑계를 대어 저를 부르시면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마침내 경봉을 따라 사냥을 나갔다.
去訖,盧蒲癸喜曰:「卜人所謂『虎離穴』者,此其驗矣。」將乘嘗祭舉事。陳須無知之,恐其子與於慶封之難,詐稱其妻有病,使人召無宇歸家。無宇求慶封卜之,暗中禱告,卻通陳慶氏吉凶。慶封曰:「此乃『滅身』之卦。下克其上,卑克其尊,恐老夫人之病,未得痊也。」無宇捧龜,涕泣不止,慶封憐之,乃遣歸。慶嗣見無宇登車,問:「何往?」曰:「母病不得不歸。」言畢而馳。慶嗣謂慶封曰:「無宇言母病,殆詐也。國中恐有他變,夫子當速歸!」慶封曰:「吾兒在彼何慮?」無宇既濟河,乃發梁鑿舟,以絕慶封之歸路,封不知也。
경봉의 일행이 동래로 떠나자 노포계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점쟁이가 ‘호랑이가 굴을 떠난다.’고 하더니 이제야 맞는구나!” 했다. 장차 상제(嘗祭 ; 가을 제사)를 틈타 거사를 하기로 했다. 진수무가 그것을 알고, 그 아들이 경봉의 난리에 화를 당할까 걱정되어, 사람을 보내 그의 모친이 병이 났다고 거짓 핑계를 대고 진무우를 집으로 불러오게 했다. 진무우가 경봉에게 모친의 병이 어떠할지 거북점을 쳐 달라고 하면서, 마음속으로 진씨와 경씨의 길흉을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경봉이 불에 태워 갈라진 거북등을 보며 말하기를, “이것은 몸이 망하는 점괘다. 아래가 위를 이기고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를 이기니, 노부인의 병이 낫지 못할까 걱정된다.” 진무우가 거북등을 받아 들고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경봉이 측은하게 생각하여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경사(慶嗣)는 진무우가 수레를 타는 것을 보고 묻기를, “어디로 가는가?” 하니, 진무우가 말하기를, “모친께서 병이 위독해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말을 마치자 말을 달렸다. 경사가 경봉에게 말하기를, “진무우가 그 모친이 병들어 위독하다는 것은 거의 거짓말일 겁니다. 도성 안에서 변이 일어날까 걱정되니, 어르신은 마땅히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하니, 경봉이 말하기를, “우리 아이(慶舍)가 거기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했다. 진무우가 이미 황하를 건너서 다리를 부수고 배에는 구멍을 내어 경봉이 돌아오는 길을 끊었지만, 경봉은 몰랐다.
時八月初旬將盡矣。盧蒲癸部署家甲,匆匆有戰鬥之色,其妻慶姜謂癸曰:「子有事而不謀於我,必不捷矣!」癸笑曰:「汝婦人也,安能為我謀哉?」慶姜曰:「子不聞有智婦人勝於男子乎?武王有亂臣十人,邑姜與焉。何為不可謀也?」癸曰:「昔鄭大夫雍糾,以鄭君之密謀,洩於其妻雍姬,卒致身死君逐,為世大戒。吾甚懼之!」慶姜曰:「婦人以夫為天,夫唱則婦隨之,況重以君命乎?雍姬惑於母言,以害其夫,此閨閫之蝥賊,何足道哉?」癸曰:「假如汝居雍姬之地,當若何?」慶姜曰:「能謀則共之,即不能,亦不敢洩。」
때는 8월 초순도 다 지나갔다. 노포계가 가병을 배치하여 바삐 전투를 치를 채비를 갖추었다. 그의 처 경강이 노포계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무슨 일을 꾸미면서 저하고 상의하지 않으니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 하니, 노포계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당신은 부인인데 어찌 나와 일을 도모할 수 있겠소?” 했다. 경강이 말하기를, “당신은 지혜로운 부인이 남자보다 낫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셨습니까? 주나라 무왕 때 정사를 다스린 열 명의 신하 중에 아홉 명은 외치를 담당하고 왕후 읍강(邑姜)은 내치를 맡았습니다. 어찌 부인과 일을 도모하지 못한다고 하십니까?” 하니, 노포계가 말하기를, “옛날 정나라 대부 옹규(雍糾)가 정려공(鄭厲公)의 밀명을 받아 제중(祭仲)을 죽이려고 했다가 그의 처 옹희(雍姬)에게 그 계획을 발설하여 자기는 죽고 정려공은 제중에게 쫓겨났었소. 그것은 몇 대를 내려온 큰 교훈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그것을 매우 걱정하기 때문이오!” 했다. 경강이 말하기를, “부인은 지아비를 하늘로 생각하니 남편이 이끌면 부인은 따르는 것인데 하물며 군주의 중요한 명이겠습니까? 옹희는 그 모친의 말에 혹하여 그 지아비를 해쳤으니, 그것은 규방의 역적입니다. 어찌 족히 말할 게 있겠습니까?” 했다. 노포계가 말하기를, “만약에 당신이 옹희의 처지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소?” 하니, 경강이 말하기를, “능히 도모할 수 있다면 함께하는 것이고, 할 수 없다고 해도또한 감히 누설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했다.
癸曰:「今齊侯苦慶氏之專,與欒高二大夫謀逐汝族,吾是以備之。汝勿洩也。」慶姜曰:「相國方出獵,時可乘矣。」癸曰:「欲俟嘗祭之日。」慶姜曰:「夫子剛愎自任,耽於酒色,怠於公事,無以激之,或不出,奈何?妾請往止其行,彼之出乃決矣。」癸曰:「吾以性命託子,子勿效雍姬也。」慶姜往告慶舍曰:「聞子雅子尾將以嘗祭之隙,行不利於夫子,夫子不可出也!」慶舍怒曰:「二子者,譬如禽獸,吾寢處之!誰敢為難?即有之,吾亦何懼!」慶姜歸報盧蒲癸,預作准備。
노포계가 말하기를, “지금 제경공은 경씨들의 전횡으로 고통을 받고 있소. 그래서 난조(欒竈)와 고채(高蠆) 두 대부가 너희 경씨들을 몰아내려고 모의하여 내가 이렇게 준비하고 있소. 당신은 절대로 이 일을 누설하지 마시오.” 하니, 경강이 말하기를, “상국이 지금 사냥을 나갔으니 이때가 거사할 기회입니다.” 했다. 노포계가 말하기를, “가을 제삿날을 기다리는 참이오.” 하니, 경강이 말하기를, “친정아버지는 깐깐하고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또한 주색에 빠져 공사에 태만하십니다. 무슨 충격을 주지 않으면, 제사에 나가지 않을 것이니, 어찌하지요? 제가 친정에 가서 제사에 가지 말라고 하면 아버지는 가려고 할 것입니다.” 했다. 노포계가 말하기를, “나의 목숨을 당신에게 맡겼으니 당신은 옛날 옹희를 본받지 말기 바라오.” 했다. 경강이 친정에 가서 친정아버지 경사에게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자아(난조)와 자미(고채)가 가을 제사를 지낼 때를 이용하여 부친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 한답니다. 부친께서는 제사에 나가지 마십시오.” 하니, 경사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그 두 놈은 짐승 같은 놈들이라, 내가 밑에 깔고도 잘 수 있는 자들이다. 누가 감히 변란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이냐? 설사 그놈들이 변란을 일으킨다 한들 어찌 내가 두려워하겠느냐?” 했다. 경강이 집에 돌아와 노포계에게 알리고 미리 준비하게 했다.
至期,齊景公行嘗祭於太廟,諸大夫皆從,慶舍蒞事,慶繩主獻爵,慶氏以家甲環守廟宮。盧蒲癸王何執寢戈,立於慶舍之左右,寸步不離。陳鮑二家,有圉人善為優戲,故意使在魚里街上搬演。慶氏有馬,驚而逸走,軍士逐而得之,乃盡縶其馬,解甲釋兵,共往觀優。欒、高、陳、鮑四族家丁,俱集於廟門之外,盧蒲癸託言小便,出外約會停當,密圍太廟。癸復入,立於慶舍之後,倒持其戟,以示高蠆。蠆會意,使從人以闥擊門扉三聲,甲士蜂擁而入。慶舍驚起,尚未離坐,盧蒲癸從背後刺之,刃入於脅﹔王何以戈擊其左肩,肩折。
기일이 되자 제경공이 가을 제사를 올리기 위해 태묘로 향하자 여러 대부가 그 뒤를 따랐다. 경사가 나와 제사에 임하고 경승(慶繩)이 술잔 올리는 것을 주관했다. 경씨들이 가병을 동원하여 태묘 주위를 둘러싸 지켰다. 노포계와 왕하가 과를 들고 경사의 좌우에 서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다. 진씨와 포씨 두 집안의 말을 기르는 사람으로 희극을 잘하는 자가 있었다. 일부러 어리(魚里)의 거리에서 놀이판을 벌여 경씨들의 말이 놀라서 달아나자 군사들이 쫓아가 잡았다. 이에 그 말들을 묶어놓고, 갑옷을 벗고 무기를 내려놓고 함께 가서 배우의 놀이를 구경했다. 그러는 사이에 난(欒), 고(高), 진(陳), 포(鮑) 등 네 종족의 가병이 태묘의 문밖에 모두 모였다. 노포계가 소변을 본다는 핑계를 대고 태묘 밖으로 나와 네 집안의 가병들이 약속대로 모두 모였는지를 확인한 후에 그들에게 몰래 태묘를 에워싸게 했다. 노포계가 다시 들어와서 경사의 뒤에 서서 극을 거꾸로 잡아 고채에게 신호를 보냈다. 고채가 알아채고 종인들을 시켜 문짝을 세 번 쳐서 신호를 보냈다. 태묘 밖의 무사들이 벌떼같이 안으로 쳐들어왔다. 경사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미처 자리를 뜨기도 전에 노포계가 등 뒤에서 찔렀다. 칼날이 경사의 옆구리에 들어갔다. 왕하가 과로 어깨를 찌르자 경사의 어깨가 부러졌다.
慶舍目視王何曰:「為亂者乃汝曹乎?」以右手取俎壺投王何,何立死。盧蒲癸呼甲士先擒慶繩殺之。慶舍傷重,負痛不能忍,隻手抱廟柱搖撼之,廟脊俱為震動,大叫一聲而絕。景公見光景利害,大驚欲走避。晏嬰密奏曰:「群臣為君故,欲誅慶氏以安社稷,無他慮也。」景公方纔心定,脫了祭服,登車,入於內宮。盧蒲癸為首,同四姓之甲,盡滅慶氏之黨。各姓分守城門,以拒慶封,防守嚴密,水洩不通。卻說,慶封田獵而回,至於中途,遇慶舍逃出家丁,前來告亂。慶封聞其子被殺,大怒,遂還攻西門。
경사가 왕하를 노려보면서 말하기를, “변란을 일으킨 놈들이 너희들이었구나!” 하고, 오른손으로 제사용 항아리를 들어 던지자 왕하가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노포계가 무사들을 불러 경승을 먼저 잡아서 죽였다. 경사는 상처가 중하여 고통을 참을 수 없어, 한 손으로 태묘의 기둥을 안고 흔드니, 태묘의 용마루가 진동했다. 경사가 한번 큰 소리를 지르고 숨이 끊어졌다. 제경공이 그 광경을 보고 크게 놀라서 달아나 피하려고 했다. 안영이 몰래 아뢰기를, “여러 신하가 주군을 위해 경씨를 죽여 사직을 안정시키려고 하니 다른 염려는 머십시오.” 했다. 제경공이 조금 마음이 안정되어 제복을 벗고 수레에 올라 내궁으로 돌아갔다. 노포계가 선두에 서서 네 집안의 가병들과 함께 경씨 일당을 남김없이 죽였다. 그리고 각 성씨가 성문을 맡아 물샐틈없이 지켜 경봉을 막으려 했다. 한편, 경봉은 사냥을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오던 도중에 경사의 집에서 도망쳐 온 사내 일꾼을 만나서 변란이 일어난 사실을 알았다. 경봉은 그 아들이 피살된 것을 알고 대로하여 곧 돌아와 서문을 공격했다.
城中守禦嚴緊,不能攻克,卒徒漸漸逃散。慶封懼,遂出奔魯國。齊景公使人讓魯,不當收留作叛之臣。魯人將執慶封以畀齊人,慶封聞而懼,復奔吳國。吳王夷昧,以朱方居之,厚其祿入,視齊加富,使伺察楚國動靜。魯大夫子服何聞之,謂叔孫豹曰:「慶封又富於吳,殆天福淫人乎?」叔孫豹曰:「『善人富,謂之賞﹔淫人富,謂之殃。』慶氏之殃至矣,又何福焉。」慶封既奔,於是高蠆欒竈為政,乃宣崔慶之罪於國中,陳慶舍之屍於朝以殉。求崔杼之柩不得,懸賞購之:有能知柩處來獻者,賜以崔氏之拱璧。崔之圉人貪其璧,遂出首。
성안의 방비가 튼튼해서 공격하여 이길 수가 없자, 경봉의 군사들이 차츰 도망쳐 흩어졌다. 경봉은 두려워서 마침내 노나라로 달아났다. 제경공이 노나라에 사자를 보내 역신을 받아 주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노나라 사람들이 경봉을 잡아 제나라 사람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경봉이 알고 두려워서 다시 오나라로 도망쳤다. 오왕 이매가 경봉에게 주방(朱方)에 살게 하고 녹봉도 매우 후하게 주어 제나라에 있을 때보다 더 넉넉하게 해주고 초나라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노나라 대부 자복하(子腹何)가 알고 숙손표(叔孫豹)에게 말하기를, “경봉이 오나라에서 더 부유하다니, 하늘은 흉악한 놈에게 복을 줍니까?” 하니, 숙손표가 말하기를, “착한 사람이 부유하면 상이라고 하겠지만, 악한 사람이 부유하면 재앙이라 할 것이오. 경봉에게 재앙이 미칠 것이니, 어찌 그것이 복이라 하겠소?” 했다. 제나라에서는 경봉이 이미 도망쳐 버리자 이에 고채와 난조가 정사를 맡아 보게 되었다. 두 사람이 최저와 경봉의 죄를 나라 안에 널리 알리고 경사의 시체를 조당에 전시했다. 최저의 시체를 구했으나 찾을 수가 없어 현상금을 걸어 구하기를, “최저의 시체가 묻혀 있는 곳을 아는 자에게는 최저의 벽옥을 상으로 주겠다.”고 했다. 최저의 마부가 그 벽옥을 탐내어 마침내 출두했다.
於是發崔氏祖墓,得其柩斵之,見二屍,景公欲並陳之。晏嬰曰:「戮及婦人,非禮也。」乃獨陳崔杼之屍於市,國人聚觀,猶能識認,曰:「此真崔子矣!」諸大夫分崔慶之邑,以慶封家財,俱在盧蒲嫳之室,責嫳以淫亂之罪,放之於北燕,盧蒲癸亦從之,二氏家財,悉為眾人所有。惟陳無宇一無所取。慶氏之莊,有木材百餘車,眾議納之陳氏。無宇悉以施之國人,由是國人咸頌陳氏之德。此周景王初年事也。其明年,欒竈卒,子欒施嗣為大夫,與高蠆同執國政。高蠆忌高厚之子高止,以二高並立為嫌,乃逐高止。止亦奔北燕。
이에 최씨 조상묘의 곁을 파헤쳐 관을 얻어 그 뚜껑을 뜯으니 두 구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 제경공이 두 구의 시체를 나란히 늘어놓으려 하니, 안영이 말하기를, “부인의 시체를 육시(戮屍)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하니, 제경공은 최저의 시체만을 거리에 늘어놓았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여 알아보고 “이것은 틀림없는 최저다!”라고 했다. 제나라의 대부들이 최씨와 경씨의 봉읍들을 나누어 가졌다. 경봉의 모든 재산은 노포별의 차지가 되어 자기 집으로 옮겼다. 대부들이 보고 노포별의 음란한 짓을 비난하고 북연으로 추방했다. 노포계 역시 그를 따라갔다. 최씨와 경씨 두 집안의 재산은 모두 여러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오직 진무우만은 한 가지도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들이 상의하여 경씨의 장원에 있던 백여 수레의 목재를 모두 진무우에게 주니, 진무우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나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일로 해서 백성들은 진씨의 덕을 칭송하게 되었다. 이것은 주경왕 원년(기원전 544년)의 일이었다. 다음 해에 난조가 죽자 그의 아들 난시(欒施)가 대부가 되어 고채와 같이 국정을 맡게 되었다. 고채는 고후(高厚)의 아들 고지(高止)를 시기했는데, 이고(二高)로 나란히 불리는 것을 싫어해서였다. 그래서 고지를 쫓아냈다. 고지 또한 북연으로 달아났다.
止之子高豎,據盧邑以叛。景公使大夫閭邱嬰帥師圍盧。高豎曰:「吾非叛,懼高氏之不祀也。」閭邱嬰許為高氏立後,高竪遂出奔晉國。閭邱嬰復命於景公。景公乃立高酀以守高傒之祀。高蠆怒曰:「本遣閭邱欲除高氏,去一人,立一人,何擇焉。」乃譖殺閭邱嬰。諸公子子山,子商,子周等,皆為不平,紛紛譏議。高蠆怒,以他事悉逐之,國中側目。未幾,高蠆卒,子高彊嗣為大夫。高彊年幼,未立為卿,大權悉歸於欒施矣。此段話且擱過一邊。
고지의 아들 고수(高竪)가 노읍(盧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제경공이 대부 여구영(閭邱嬰)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노읍을 포위하게 하니, 고수가 말하기를, “내가 반역하는 게 아니라, 고씨의 제사가 끊기지 않을까 두려웠을 뿐입니다.” 했다. 여구영이 고씨의 후사를 세우는 것을 허락했으나, 고수는 마침내 진(晉)나라로 도망쳤다. 여구영이 돌아와 제경공에게 복명하니, 제경공이 곧 고연(高酀)을 세워 고혜(高傒)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고채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원래 여구영을 보낸 것은 고씨를 제거하려고 한 것인데, 한 사람을 쫓아내고 한 사람을 다시 세웠으니 무엇을 택한 것인가?” 하고, 곧 여구영을 참소하여 죽였다. 자산(子山), 자상(子商), 자주(子周) 등 제나라의 공자들이 모두 불평하며 어지러이 비난했다. 고채가 노하여 다른 일로 그들을 모두 내쫓았다. 제나라 사람들이 고채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고채가 죽었다. 그의 아들 고강(高彊)이 대부의 직을 이었으나 고강의 나이가 어려 경으로 세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제나라의 대권은 모두 난시의 수중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는 또 한쪽으로 밀어두자.
是時晉楚通和,列國安息。鄭大夫良霄字伯有,乃公子去疾之孫,公孫輒之子,時為上卿執政。性汰侈,嗜酒,每飲輒通宵。飲時惡見他人,惡聞他事,乃窟地為室,置飲具及鐘鼓於中,為長夜之飲,家臣來朝者,皆不得見。日中乘醉入朝,言於鄭簡公,欲遣公孫黑往楚修聘。公孫黑方與公孫楚爭娶徐吾犯之妹,不欲遠行,來見良霄求免。閽人辭曰:「主公已進窟室,不敢報也。」公孫黑大怒,遂悉起家甲,乘夜同印段圍其第,縱火焚之。良霄已醉,眾人扶之上車,奔雍梁。良霄方醒,聞公孫黑攻己,大怒。
이때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화친하여 여러 나라가 평화로웠다. 정나라 대부 양소(良宵)는 자가 백유(伯有)인데, 공자 거질(公子去疾)의 손자이고 공손 첩(公孫輒)의 아들이었다. 그때 상경이 되어 국정을 맡았다. 양소는 성격이 지나치게 사치하고 술을 좋아했으며,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곤 했다. 술을 마실 때는 다른 사람은 만나 주지 않고, 다른 일을 듣기도 싫어하여, 땅을 파서 방을 만들고는 그 속에 술 그릇과 종과 북을 비치해 놓고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가신들이 와서 아침 문안을 드리려 해도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다. 어느 날 대낮에 술에 취해 입조하여 정간공(鄭簡公)에게 공손 흑(公孫黑)을 초나라에 사절로 보내야겠다고 말했다. 공손 흑은 공손 초(公孫楚)와 서오범(徐吾犯)의 여동생에게 장가들려고 다투고 있는 중이라, 멀리 기고자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양소를 만나서 면해 주기를 청하려고 했다. 공손 흑이 양소의 집에 찾아가니 문지기가 거절해 말하기를, “주인께서는 이미 지하실에 들어가셔서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공손 흑이 대로하여 마침내 가병들을 모두 끌고 나와 밤을 틈타 인단(印段)과 함께 양소의 집을 포위하여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양소가 이미 취해 여러 사람이 부축하여 수레에 태우고는 옹량(雍梁)으로 달아났다. 양소가 술에서 깨어나서 공손 흑이 자기를 공격한 것을 알고 크게 노했다.
居數日,家臣漸次俱到,述國中之事,言:「各族結盟,以拒良氏,惟國氏罕氏不與盟。」霄喜曰:「二氏助我矣!」乃還攻鄭之北門。公孫黑使其姪駟帶,同印段率勇士拒之。以霄戰敗,逃於屠羊之肆,為兵眾所殺,家臣盡死。公孫僑聞良霄死,亟趨雍梁,撫良霄之屍而哭之曰:「兄弟相攻,天乎,何不幸也!」盡斂家臣之屍,與良霄同葬於鬥城之村。公孫黑怒曰:「子產乃黨良氏耶?」欲攻之。上卿罕虎止之曰:「子產加禮於死者,況生者乎?禮,國之幹也,殺有禮不祥!」黑乃不攻。鄭簡公使罕虎為政,罕虎曰:「臣不如子產。」乃使公孫僑為政。時周景王之三年也。
며칠이 지나자 양소의 가신들이 점차 옹량에 모두 도착하여 나라 안의 일을 말하기를, “각 종족이 연합하여 양씨에 대항하려고 하는데 오직 국씨(國氏)와 한씨(罕氏)만 연합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양소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두 집안이 우리를 돕겠구나!” 하고, 돌아가 정나라 도성의 북문을 공격하였다. 공손 흑이 그의 조카 사대(駟帶)를 시켜 인단(印段)과 함께 용사를 인솔하여 막게 했다. 양소가 싸움에 패하여 양을 잡는 가게로 도망쳤으나 군사들에게 살해당하고, 그의 가신들도 모두 죽었다. 공손 교(公孫僑)는 양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옹량으로 달려가서 양소의 시체를 어루만지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형제가 서로 공격하니, 하늘이여, 어찌 이리 불행한 일이 있단 말입니까?” 했다. 공손 교는 양소와 가신들의 시신을 모두 거두어 투성촌(鬪城村)에 장사를 지냈다. 공손 흑이 노하여 말하기를, “자산(공손 교)은 곧 양소의 일당인가?” 하고, 공격하려 하니, 상경 한호(罕虎)가 말리며 말하기를, “자산은 죽은 사람에게도 예를 갖추었는데, 하물며 산 사람이겠습니까? 예란 나라의 근본이라 예를 갖춘 사람을 죽이는 일은 좋지 않습니다.” 했다. 공손 흑이 이에 공격하지 않았다. 정간공이 한호에게 국정을 맡기려고 하자, 한호가 말하기를, “신은 자산보다 못합니다.” 했다. 이에 공손 교에게 국정을 맡겼다. 그때가 주경왕 3년(기원전 542년)이었다.
公孫僑既執鄭政,乃使都鄙有章,上下有服,田有封洫,廬井有伍,尚忠儉,抑泰侈。公孫黑亂政,數其罪而殺之。又鑄《刑書》以威民,立鄉校以聞過。國人乃歌詩曰:「我有子弟,子產誨之。我有田疇,子產殖之。子產而死,誰其嗣之?」一日,鄭人出北門,恍惚間遇見良霄,身穿介冑,提戈而行﹔曰:「帶與段害我,我必殺之!」其人歸述於他人,遂患病。於是國中風吹草動,便以為良霄來矣!男女皆奔走若狂,如避戈矛。未幾駟帶病卒。又數日,印段亦死。國人大懼,晝夜不寧。公孫僑言於鄭君,以良霄之子良止為大夫,主良氏之祀,并立公子嘉之子公孫洩,於是國中訛言頓息。
공손 교(公孫僑)가 정나라의 국정을 맡자, 곧 도성과 시골에 질서를 바로잡고, 공경대부의 복식을 정하고, 논밭의 경계를 정했으며, 마을에서 다섯 집을 한 조로 오(伍)를 만들고, 백성들에게 충성과 근검절약을 숭상하게 하며, 지나친 사치를 억제하였다. 공손 흑이 국정을 어지럽히자 죄를 따져서 죽였다. 형법의 조문을 주조하여 백성에게 위엄을 보였으며, 향교(鄕校)를 세워 잘못을 깨닫게 했다. 나라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우리의 자제를 자산이 가르치고, 우리의 논밭을 자산이 늘려 주네. 자산이 죽는다면, 누가 그것을 이어받으리?” 했다. 하루는 어떤 정나라 사람이 북문을 나가는데 정신이 황홀해지면서 양소를 보았다. 몸에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창을 잡고 가면서 말하기를, “사대(駟帶)와 인단(印段)이 나를 죽였으니 내가 반드시 그들을 죽이리라!” 했다. 그 사람이 돌아와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는 곧 병이 들었다. 이에 도성 안에는 바람이 불어 풀이 움직이는 것처럼 양소가 왔다고 생각하게 되어 남녀가 모두 미친 것처럼 뛰어다니며 창을 피하듯이 했다. 오래지 않아 사대가 병들어 죽었다. 또 며칠이 지나자 인단도 역시 죽었다. 나라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편한 때가 없었다. 공손 교가 간공에게 말하여 양소의 아들 양지(良止)를 대부로 삼아 양소의 제사를 지내게 하고, 아울러 공자 가(公子嘉)의 아들 공손 설(公孫泄)도 같이 대부에 제수하게 하였다. 이에 나라 안의 헛소문이 잠잠하게 되었다.
行人游吉字子羽,問於僑曰:「立後而訛言頓息,是何故也?」僑曰:「凡凶人惡死,其魂魄不散,皆能為厲。若有所歸依,則不復然矣。吾立祀為之歸也。」游吉曰:「若然,立良氏可矣,何以并立公孫洩?豈慮子孔亦為厲乎?」僑曰:「良霄有罪,不應立後,若因為厲而立之,國人皆惑於鬼神之說,不可以為訓。吾託言於存七穆之絕祀,良孔二氏並立,所以除民之惑也。」游吉乃嘆服。再說,周景王二年,蔡景公為其世子般娶楚女羋氏為室。景公私通於羋氏。世子般怒曰:「父不父,則子不子矣!」乃偽為出獵,與心腹內侍數人,潛伏於內室。
행인(제후 접대 담당) 유길(游吉)의 자는 자우(子羽)인데, 공손 교(僑)에게 묻기를, “두 사람을 대부로 삼으니 헛소문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공손 교가 말하기를, “무릇 흉악한 사람이 비명에 죽으면 그 혼백이 흩어지지 않고 원귀(寃鬼)가 된다고 모두 믿습니다. 만약 원귀가 돌아갈 곳이 있으면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한 것은 그를 위해 돌아갈 곳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했다. 유길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양씨만 대부로 세우면 되지, 어찌하여 공손 설도 함께 세웠습니까? 어찌하여 자공(子孔 ; 공자 嘉)도 또한 원귀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까?” 하니, 공손 교가 말하기를, “양소는 죄를 지었으므로 응당 후사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양소의 원귀 때문에 후사를 세우면, 백성들이 모두 귀신 이야기를 믿게 되어,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칠목(七穆 ; 정목공의 일곱 아들)의 끊어진 제사를 잇게 한다는 핑계를 대고 양씨와 공씨(孔氏)를 같이 세워서 백성들의 의혹을 바로 잡은 것입니다.” 했다. 유길이 탄복했다. 한편, 주경왕 2년(기원전 543년)에 채경공(蔡景公)이 세자 반(般)를 위해서 초나라 왕녀인 미씨(羋氏)를 부인으로 삼게 했다. 채경공이 며느리 미씨와 사통하니, 세자 반이 노하여 말하기를, “부친이 부친답지 않은데 아들이라고 아들답겠는가?” 하고, 이에 거짓으로 사냥을 나간다고 하고 심복 내시 몇 사람과 내실에 잠복했다.
景公只道其子不在,遂入東宮,逕造羋氏之室。世子般率內侍突出,砍殺景公,以暴疾訃於諸侯,遂自立為君﹔是為靈公。史臣論般以子弒父,千古大變!然景公淫於子婦,自取悖逆,亦不能無罪也。有詩嘆云:「新臺醜行污青史,蔡景如何復蹈之?逆刃忽從宮內起,因思急子可憐兒!」蔡世子般雖以暴疾訃於諸侯,然弒逆之跡,終不能掩。自本國傳揚出來,各國誰不曉得。但是時盟主偷惰,不能行誅討之法耳!其年秋,宋宮中夜失火,夫人乃魯女伯姬也。左右見火至,稟夫人避火。伯姬曰:「婦人之義,傅母不在,宵不下堂。火勢雖迫,豈可廢義?」
채경공은 다만 그의 아들이 없는 줄 알고 곧 동궁으로 들어가 곧바로 미씨의 방으로 갔다. 세자 반(般)이 내시들을 거느리고 돌출하여 채경공을 칼로 베어 죽였다. 그리고 채경공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고 제후들에게 부고하고, 마침내 스스로 채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채영공(蔡靈公)이다. 후에 사관이 논하기를 세자 반(般)은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죽였으니 천고에 없는 변란이다. 그러나 채경공이 며느리와 관계하여 스스로 패역을 저질렀으니 또한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시를 지어 탄식하기를, “위성공이 신대에서 추행하여 청사(靑史)를 더럽히더니, 채경공이 어찌하여 그것을 다시 답습했는가? 반역의 칼날이 홀연 궁중에서 일어났으니, 무고하게 죽은 급자(急子)만 가련하구나.” 했다. 채나라 세자 반(般)이 비록 채경공이 폭질(暴疾)로 죽었다고 제후들에게 부고를 보냈으나, 부왕을 죽인 반역의 흔적을 끝내 감추지 못했다. 채나라에서 소문이 퍼져나가 다른 나라에서도 다 알게 되었다. 다만 그때 맹주(盟主)인 진평공은 직분에 게을러 토벌하여 죽이지 않았다. 그해 가을 송나라 궁궐에서 밤중에 불이 났다. 송평공(宋平公)의 부인은 노후(魯侯)의 딸인 백희(伯姬)였다. 좌우에서 불길이 다가옴을 보고 부인에게 불을 피하라고 아뢰었으나, 백희가 말하기를, “부인의 법도는 보모가 없으면 밤에 마루를 내려서지 않는다. 불길이 비록 다가왔지만, 어찌 법도를 어길 수 있겠느냐?” 했다.
比及傅母來時,伯姬已焚死矣。國人皆為嘆息。時晉平公以宋有合成之功,憐其被火,乃大合諸侯於澶淵,各出財幣以助宋。宋儒胡安定論此事,「以為不討蔡世子弒父之罪,而謀恤宋災,輕重失其等矣。此平公所以失霸也。」周景王四年,晉楚以宋之盟,故將復會於虢。時楚公子圍代屈建為令尹。圍乃共王之庶子,年齒最長,為人桀驁不恭,恥居人下,恃其才器,陰畜不臣之志,欺熊麇微弱,事多專決。忌大夫薳掩之忠直,誣以謀叛,殺之而併其室。交結大夫薳罷伍舉為腹心,日謀篡逆。
보모가 왔을 때는 백희는 이미 불에 타서 죽었다. 백성들이 모두 탄식했다. 그때 진평공은 진(晉)나라와 초나라의 화평을 이루게 한 공이 송나라에 있다고 생각하고, 궁궐 화재에 백희가 죽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전연(澶淵)에서 제후들을 크게 모아 각국에서 재물을 내어 송나라를 돕게 했다. 남송 때 유학자 안정(安定) 호원(胡瑗)이 이 일을 논하기를, “채나라 세자 반이 부왕을 죽인 대역죄를 토벌하지 않았으면서도, 송나라의 재난을 도운 것은 무겁고 가벼운 것을 분별하지 못한 행위다. 이것이 진평공이 패자의 자리를 잃게 된 까닭이다.”라고 했다. 주경왕 4년(기원전 541년)에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송나라의 주선으로 괵(虢)에서 모여 다시 회맹을 맺고자 하였다. 그때 초나라 공자 위(圍)가 굴건(屈建)을 대신하여 영윤이 되었다. 공자 위는 초나라 공왕(共王)의 서자로 형제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았다. 그는 사람됨이 사납고 불공했으며 남의 밑에 있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자기의 재주를 과신했다. 마음속으로 신하 노릇만 할 수 없다는 뜻을 품어 어리고 힘이 없는 웅미를 업신여겨 많은 일을 제멋대로 처리했다. 대부 원엄(薳掩)의 충직함을 꺼려하여, 그가 모반을 꾸미고 있다고 무고하여 그의 아내와 함께 죽였다. 대부 원파(薳罷)와 오거(伍擧)를 심복으로 삼아 날마다 찬탈을 모의했다.
嘗因出田郊外,擅用楚王旌旗,行至芋邑,芋尹申無宇數其僭分,收其旌旗於庫,圍稍戢。至是,將赴虢之會,圍請先行聘於鄭,欲娶豐氏之女。臨行,謂楚王熊麇曰:「楚已稱王位,在諸侯之上。凡使臣乞得用諸侯之禮,庶使列國知楚之尊。」熊麇許之。公子圍遂僭用國君之儀,衣服器用,擬於侯伯,用二人執戈前導。將及鄭郊,郊人疑為楚王,驚報國中。鄭君臣俱大駭,星夜葡匐出迎,及相見,乃公子圍也。公孫僑惡之,恐其一入國中,或生他變,乃使行人游吉辭以城中舍館頹壞,未及修葺,乃館於城外。
어느 날 공자 위가 교외에 사냥을 나가면서 멋대로 초왕의 깃발을 꽂고 우읍(芋邑)에 이르게 되었다. 우읍 사또 신무우(申无宇)가 그 참람하게 분수를 모르는 짓을 꾸짖고, 그 깃발을 빼앗아 창고에 넣어 두었다. 이 일로 공자 위의 기가 조금 꺾였다. 이윽고 괵 땅에서 열리는 회맹에 참석하면서 정나라에 들러 사절의 임무를 행하고 풍(豊)씨의 딸을 아내로 삼으려고 했다. 공자위가 길을 떠나면서 초왕 웅미에게 말하기를, “초나라는 이미 왕위를 칭하여 제후들의 위에 있습니다. 신으로 하여금 제후들의 예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제후들로 하여금 초나라가 존귀하다는 것을 알게 하겠습니다.” 하니, 웅미가 허락했다. 공자위는 마침내 군주의 의례와 의복 기구들을 후백(侯伯)의 것으로 흉내내어 두 사람에게 과를 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정나라 교외에 도착하니 정나라 교외 관리들이 초왕의 행차인가 의심하여 놀라서 나라 안에 알렸다. 정나라 군주와 신하들 모두 크게 이상해하며 밤중에 길에 나가 맞이하고 보니 공자 위였다. 공손 교(자산)가 미워하여 그가 나라에 들어오면 다른 변란이 일어날까 걱정하여, 행인 유길을 시켜 성안의 관사가 낡아 무너져서 수리를 못했다며 성 밖 관사에 머물게 했다.
公子圍使伍舉入城,議婚豐氏,鄭伯許之。既行聘,筐篚甚盛。臨聚時,公子圍忽萌襲鄭之意,欲借迎女為名,盛飾車乘,乘機行事。公孫僑曰:「圍之心不可測,必去眾而後可。」游吉曰:「吉請再往辭之。」於是游吉往見公子圍曰:「聞令尹將用眾迎,敝邑褊小,不足以容從者,請除地於城外,以聽迎婦之命。」公子圍曰:「君辱貺寡大夫圍,賜以豐氏之婚,若迎於野外,何以成禮?」游吉曰:「禮,軍容不入國,況婚姻乎?令尹若必用眾,以壯觀瞻,請去兵備。」伍舉密言於圍曰:「鄭人知備我矣,不如去兵。」乃使士卒悉棄弓矢,垂櫜而入。
공자 위가 오거(伍擧)를 정나라 도성 안으로 들여보내 풍씨와의 혼사를 의논하니, 정나라 군주가 허락했다. 공자 위가 결혼 예물을 보내니 광주리가 아주 많았다. 드디어 혼례식 날이 되자, 공자 위는 갑자기 정나라를 습격하려고 생각하여, 여자를 맞이하러 간다는 핑계로 수레를 치장하고 기회를 틈타 일을 벌이려고 했다. 공손 교(자산)가 말하기를, “공자 위(圍)의 마음을 전혀 예측할 수 없으니, 반드시 많은 사람을 떼어놓고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시오.” 하니, 유길이 말하기를, “제가 다시 가서 우리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했다. 이에 유길이 공자위를 찾아가서 말하기를, “영윤께서 많은 사람을 데려와서 혼례식을 올리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도성은 협소하여 따라온 사람들을 받아들이기에 부족합니다. 청컨대 성 밖의 땅을 골라 그곳에서 부인을 맞이하는 의식을 치르기 바랍니다.” 하니, 공자 위가 말하기를, “군주께서 과분하게도 저에게 풍씨와 혼인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고, 만약 야외에서 신부를 맞이하라고 하시면 어찌 혼례를 치를 수가 있겠습니까?” 했다. 유길이 말하기를, “예로 말씀하시니,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의 나라 도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예는 없습니다. 하물며 혼인이겠습니까? 영윤께서 만일 사람들을 동원하여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리려면 청컨대 군사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기 바랍니다.” 했다. 오거가 귓속말로 공자 위에게 말하기를, “정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계획을 눈치챈 것 같습니다. 군사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니, 공자 위는 즉시 사졸들에게 활과 화살을 버리고 활집을 떼어놓게 하고 성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迎豐氏於館舍,遂赴會所。晉趙武及宋、魯、齊、衛、陳、蔡、鄭、許各國大夫,俱已先在。公子圍使人言於晉曰:「楚晉有盟在前,今此番尋好,不必再立誓書,重復歃血。但將盟宋舊約,表白一番,令諸君勿忘足矣。」祁午謂趙武曰:「圍之此言,恐晉爭先也。前番讓楚先晉,今番晉合先楚,若讀舊書,楚常先矣。子以為何如?」趙武曰:「圍之在會,緝蒲為王宮,威儀與楚王無二。其志不惟外亢,將有內謀,不如姑且聽之,以驕其志。」祁午曰:「雖然,前番子木衷甲赴會,幸而不發,今圍更有甚焉,吾子宜為之備。」趙武曰:「所以尋好者,尋弭兵之約也。武知有守信而已,不知其他。」
이윽고 풍씨를 관사에 맞이한 후, 마침내 공자 위는 괵 땅의 회맹 장소로 갔다. 진(晉)나라 조무를 위시하여 송(宋), 노(魯), 제(齊), 위(衛), 진(陳), 채(蔡), 정(鄭), 허(許) 등의 각국 대부들이 모두 먼저 와 있었다. 공자 위가 사람을 시켜 진(晉)나라 조무에게 말을 전하기를, “초나라와 진(晉)나라는 전에 이미 회맹을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우호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니 반드시 서약서나 삽혈을 다시 할 필요 없이 단지 우리가 송나라에서 맺은 규약이나 읽어서 여러 제후께서 잊지 않게 하면 족할 것이오.” 하니, 기오(祁午)가 조무에게 말하기를, “공자위의 이 말은 진(晉)나라와 선두자리를 다투려는 것입니다. 지난번 송나라 회맹 때 초나라가 진나라보다 먼저 하게 양보했으니 이번에는 진나라가 초나라보다 먼저 하는 게 맞습니다. 만약에 옛날 규약이나 읽는다면 이것은 초나라가 항상 먼저 하겠다는 것입니다. 원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했다. 조무가 말하기를, “공자 위가 회맹에 온 모습을 보니 거처를 왕궁처럼 꾸미고 그 거동이 초나라 왕과 다르지 않소. 그의 뜻은 밖으로 오만방자할 뿐 아니라, 장차 안으로 반역을 꾀할 것이오. 잠시 내버려 두어 그의 뜻을 교만하게 해 줍시다.” 하니, 기오가 말하기를,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지난번 송나라 회맹 때 자목(굴건)이 무장병을 데리고 참석하였지만, 다행히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공자 위가 그보다 심하니 원수께서도 마땅히 대비하십시오.” 했다. 조무가 말하기를, “우리가 우호를 맺으려는 것은 전쟁을 그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신의를 지키는 일만 알지, 다른 일은 모릅니다.” 했다.
既登壇,公子圍請讀舊書,加於牲上。趙武唯唯。既畢事,公子圍遽歸。諸大夫皆知圍之將為楚君也。史臣有詩云:「任教貴倨稱公子,何事威儀效楚王?列國盡知成跋扈,郟敖燕雀尚怡堂。」趙武心中,終以讀舊書先楚為恥,恐人議論,將守信之語,向各國大夫再三分剖,說了又說。及還過鄭,魯大夫叔孫豹同行,武復言之。豹曰:「相君謂弭兵之約,可終守乎?」武曰:「吾等偷食,朝夕圖安,何暇問久遠?」豹退謂鄭大夫罕虎曰:「趙孟將死矣!其語偷,不為遠計,且年未五十,而諄諄焉如八九十歲老人,其能久乎?」未幾,趙武卒,韓起代之為政。不在話下。
모두 단에 오르자 공자 위가 옛날의 규약들을 읽고 희생을 제단에 올릴 것을 청하니, 조무는 ‘예, 예’할 뿐이었다. 회맹이 끝나자 공자 위는 급히 돌아갔다. 여러 대부가 공자 위가 장차 초나라 군주가 될 것임을 알았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귀하고 거만한 공자를 제멋대로 하게 하고, 무슨 일로 초나라 왕의 의장을 본받게 했는가? 열국의 대부들은 모두 그의 발호를 알았는데, 초나라 왕 겹오는 멋모르고 조당에서 기뻐했도다!” 했다. 조무는 마음속으로 초나라 공자 위가 옛날의 규약을 먼저 읽은 일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사람들이 그 일을 의논할까 걱정하여 신의를 지킨다고 하면서 각국 대부들에게 재삼 해명하고, 반복해서 말했다. 조무는 본국으로 돌아가며 정나라를 지나가는데 노나라 대부 숙손표가 동행하자 다시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반복했다. 숙손표가 말하기를, “상국께서는 전쟁을 그친다는 약속을 말씀하시는데 그 약속이 끝내 지켜지겠습니까?” 하니, 조무가 말하기를, “우리는 식사나 잘하고 아침저녁으로 편안하면 되지, 어찌 한가로이 먼 후일까지 묻습니까?” 했다. 숙손표가 조무와 헤어져서 정나라 대부 한호(罕虎)에게 말하기를, “조맹(조무)이 머지않아 죽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이 구차하고 먼 계획이 없으며, 또한 나이가 아직 오십도 안 된 사람이 팔구십 먹은 노인처럼 말이 간곡했습니다. 그가 오래 살겠습니까?” 했다. 오래지 않아 조무가 죽었다. 한기(韓起)가 그를 이어 진(晉)나라 정사를 맡은 것을 말할 것도 없다.
再說,楚公子圍歸國,值熊麇抱病在宮。圍入宮問疾,託言有密事啟奏,遣開嬪侍,解冠纓加熊麇之頸,須臾而死。麇有二子,曰幕,曰平夏,聞變,挺劍來殺公子圍,勇力不敵,俱為圍所殺。麇弟右尹熊比字子干,宮廄尹熊黑肱字子晳,聞楚王父子被殺,懼禍,比出奔晉,黑肱出奔鄭。公子圍赴於諸侯曰:「寡君麇不祿即世,寡大夫圍應為後。」伍舉更其辭曰:「共王之子圍為長。」圍於是嗣即王位,改名熊虔,是為靈王。以薳罷為令尹,鄭丹為右尹,伍舉為左尹,鬥成然為郊尹。太宰伯州犁有公事在郟,楚王慮其不服,使人殺之。因葬楚王麇於郟,謂之郟敖。
한편, 초나라 공자 위가 귀국하여 보니, 웅미가 궁중에서 병이 들었다. 공자 위가 병문안을 하러 입궁하여 비밀리에 아뢸 말씀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주위의 비빈들과 시종들을 물러나게 했다. 공자 위가 갓끈을 풀어 웅미의 목을 조르니 잠시 후에 죽었다. 웅미에게 두 아들 막(幕)과 평하(平夏)가 있었는데, 궁중에서 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칼을 빼 들고 달려와 공자위를 죽이려고 했으나 용기와 힘이 부족하여 적수가 되지 못하고 모두 공자 위에게 살해당했다. 웅미의 동생으로 우윤 웅비(자는 子干)와 궁구윤(宮廐尹) 웅흑굉(자는 子晰)이 있었다. 초나라 왕 부자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웅비는 진(晉)나라로 달아나고, 웅흑굉은 정나라로 달아났다. 공자 위가 제후들에게 부고를 보내기를, “주군 웅미께서 복이 없어 일찍 세상을 떠나 대부 위(圍)가 뒤를 이었다.”하고 하니, 오거가 그 말을 바꾸어, “주군 웅미께서 복이 없어 일찍 세상을 떠나, 공왕의 아들 중 연장자인 공자 위가 뒤를 이었다.”라고 했다. 공자 위가 초나라의 왕위를 잇고 이름을 웅건(熊虔)으로 바꾸었다. 이가 초영왕(楚靈王)이다. 원파(薳罷)를 영윤으로, 정단(鄭丹)을 우윤으로, 오거(伍擧)를 좌윤으로, 투성연을 교윤(郊尹)으로 삼았다. 그때 태재 백주리(伯州犁)는 일이 있어 겹(郟)땅에 머물렀는데, 초나라 군주는 백주리가 복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죽였다. 웅미의 시신을 겹 땅에 장사지내고, 겹오(郟敖)라고 불렀다.
以薳啟疆代為太宰。立長子祿為世子。靈王既得志,愈加驕恣,有獨霸中原之意。使伍舉求諸侯於晉﹔又以豐氏女族微,不堪為夫人,并求婚於晉侯。晉平公新喪趙武,懼楚之強,不敢違抗,一一聽之。周景王六年,為楚靈王之二年,冬十二月,鄭簡公許悼公如楚,楚靈王留之,以待伍舉之報。伍舉還楚復命,言:「晉侯二事俱諾。」靈王大悅,遣使大徵會於諸侯,約以明年春三月為會於申。鄭簡公請先往申地,迎待諸侯。靈王許之。至次年之春,諸國赴會者,接踵不絕。惟魯衛託故不至,宋遣大夫向戌代行。其他蔡、陳、徐、滕、頓、胡、沈、小邾等國君,俱親身赴會。
초영왕은 원계강(薳啓疆)을 태재로 삼고, 장자 녹(祿)을 세자로 세웠다. 초영왕이 이미 뜻을 얻자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여 중원에서 홀로 패자(霸者)가 되고 싶었다. 오거를 사자로 삼아 진(晉)나라가 제후들을 소집시킬 것을 요청하게 하고, 풍씨의 딸은 그 집안이 한미하여 초왕의 부인으로 세우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여, 진(晉)나라 군주에게 혼인을 청했다. 진평공은 조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초나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어기지 못하고 일일이 들어줬다. 주경왕 6년(기원전 539년)은 초영왕 2년이 되는데, 겨울 12월에 정간공(鄭簡公)과 허도공(許悼公)이 초나라에 가니, 초영왕이 그들을 머물러 두고 진(晉)나라에 간 오거의 보고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오거가 돌아와 초왕에게 복명하기를, “진나라 군주가 두 가지 청을 다 허락했습니다.” 하니, 초영왕이 크게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어 제후들에게 회맹을 소집하여 다음 해 봄 3월에 신(申)에서 모이기로 약속했다. 정간공이 신 땅으로 먼저 가서 제후들을 영접하겠다고 청하니, 초영왕이 허락했다. 그 다음 해 봄에 제후들이 회맹에 참석하기 위해 줄을 이어 왔다. 오직 노나라와 위나라는 사고를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고, 송나라는 대부 상술(向戌)를 대신 보냈다. 그밖에 채(蔡), 진(陳), 서(徐), 등(滕), 돈(頓), 호(胡), 심(沈), 소주(小邾) 등의 군주들이 모두 몸소 회맹에 참석했다.
楚靈王大率兵車,來至申地,諸侯俱來相見。右尹伍舉進曰:「臣聞欲圖霸者,必先得諸侯﹔欲得諸侯者,必先慎禮。今吾王始求諸侯於晉,宋向戌,鄭公孫僑,皆大夫之良,號為知禮者,不可不慎也。」靈王曰:「古者合諸侯之禮何如?」伍舉曰:「夏啟有鈞臺之享,商湯有景毫之命,周武有孟津之誓,成王有岐陽之蒐,康王有酆宮之朝,穆王有塗山之會,齊桓公有召陵之師,晉文公有踐土之盟,此六王二公所以合諸侯者,莫不有禮,惟君所擇。」靈王曰:「寡人欲霸諸侯,當用齊桓公召陵之禮,但不知其禮如何?」
초영왕이 전차를 많이 거느리고 신(申)에 도착하자 제후들이 모두 와서 접견했다. 우윤 오거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패업을 도모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제후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고, 제후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극진한 예로써 대해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대왕께서 진(晉)나라에 부탁하여 제후들을 소집하게 되었는데, 송나라의 상술, 정나라의 공손 교는 모든 대부 중에 어진 사람으로 예를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초영왕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제후들과 회합하는 예가 어떠했는가?” 했다. 오거가 말하기를, “하(夏)나라의 계왕(啓王)은 균대(鈞臺)에서 잔치하고, 상(商)나라 탕왕(湯王)은 경박(景亳)에서 명령을 내렸습니다. 주무왕은 맹진(孟津)에서 맹세했고, 성왕(成王)은 기산(岐山)의 남쪽에서 제후들을 모이게 했으며, 강왕(康王)은 풍(酆)의 궁궐에서 제후들의 조례를 받았습니다. 목왕(穆王)은 도산(塗山)에서 대회를 열었고, 제환공은 소릉(召陵)에서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진문공은 천토(踐土)에서 회맹을 맺었습니다. 이렇게 여섯 왕과 두 패주(霸主)가 제후들을 모았는데, 다들 예가 없지 않으니 오직 주군께서 택하여 시행하십시오.” 했다. 초영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으니 마땅히 제환공이 소릉에서 행했던 예에 따르겠소. 다만 그 예를 모르니 어찌하오?” 했다.
伍舉對曰:「夫六王二公之禮,臣聞其名,實未之習也。以所聞齊桓公伐楚,退師召陵,楚使先大夫屈完如齊師,桓公大陳八國車乘,以眾強誇示屈完,然後合諸侯與屈完盟會。今諸侯新服,吾王亦惟示以眾強之勢,使其怖畏,然後徵會討貳,不敢不從矣。」靈王曰:「寡人欲用兵諸侯,效桓公伐楚之事,誰當先者?」伍舉對曰:「齊慶封弒其君,逃於吳國,吳不討其罪,又加寵焉,處以朱方之地,聚族而居,富於其舊,齊人憤怨。夫吳,我之仇也。若用兵伐吳,以誅慶封為名,則一舉而兩得矣。」靈王曰:「善。」於是盛陳車乘,以恐脅諸侯,即申地為會盟。以徐君是吳姬所出,疑其附吳,繫之三日。徐子願為伐吳嚮導,乃釋之。
오거가 대답하기를, “여섯 왕과 두 패주가 행한 예는 신도 그 이름만 들었지, 실상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제환공이 초나라를 정벌하러 왔을 때, 소릉까지 군사를 물리고 굴완(屈完)을 제나라 진영으로 보냈습니다. 제환공은 8국 제후들의 전차를 크게 벌이고 그 많고 강한 위세를 굴완에게 보여주고 난 후에 제후들과 굴완을 모아서 회맹을 거행했습니다. 지금 제후들이 처음으로 복종했기 때문에, 대왕께서도 역시 군사가 많고 강하다는 위세를 보여주어 두렵게 한 후에, 대회를 열고 복종하지 않는 나라를 토벌한다면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초영왕이 말하기를, “과인도 제환공이 초나라를 정벌했던 것을 본받아 제후들에게 군사를 쓰고 싶은데 어느 나라부터 먼저 해야 하겠는가?” 했다. 오거가 대답하기를, “제나라의 경봉이 그 군주를 시해하고 오나라로 도망쳤는데, 오나라는 그 죄를 묻지 않고 그를 총애하고 주방(朱方)의 땅을 주어 그 족속이 모여 살게 하니 옛날보다 더 부유하다고 하여 제나라 사람들이 분하고 원통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나라는 우리나라의 원수입니다. 만약 군사를 쓴다면 오나라를 정벌하여 경봉을 잡아 죽이는 것을, 명분으로 삼으면 이것은 일거양득일 것입니다.” 하니, 초영왕이 말하기를, “좋은 계책이오.” 하고, 이에 전차를 성대하게 도열시켜 제후들을 두려움으로 위협하고, 곧 신지(申地)에서 회맹했다. 서(徐)나라 군주가 오나라 여인의 소생이었으므로 오나라에 붙을까 의심하여 사흘 동안 구속했다. 서나라 군주가 오나라를 치는 데 향도가 되겠다고 했으므로 풀어주었다.
使大夫屈申,率諸侯之師伐吳,圍朱方,執齊慶封,盡滅其族。屈申聞吳人有備,遂班師,以慶封獻功。靈王欲戮慶封,以狥於諸侯。伍舉諫曰:「臣聞『無瑕者,可以戮人。』若戮慶封,恐其反脣而稽也。」靈王不聽,乃負慶封以斧鉞,綁示軍前,以刀按其頸,迫使自言其罪曰:「各國大夫聽者:無或如齊慶封弒其君,弱其孤,以盟其大夫。」慶封遂大聲叫曰:「各國大夫聽者:無或如楚共王之庶子圍,弒其君兄之子麇而代之,以盟諸侯。」觀者皆掩口而笑。靈王大慙,使速殺之。胡曾先生詠史詩云:「亂賊還將亂賊誅,雖然勢屈肯心輸﹔楚虔空自誇天討,不及莊王戮夏舒。」
초영왕은 대부 굴신(屈申)을 시켜 제후들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굴신이 주방을 포위하여 제나라 경봉을 사로잡고 그 족속을 모두 죽였다. 굴신은 오나라 사람들이 방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군사를 물려 돌아와 경봉을 초왕에게 바쳤다. 초영왕이 경봉을 처형하여 제후들에게 조리돌리려고 했다. 오거가 간하여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 ‘흠이 없는 자만이 죄인을 처형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경봉을 처형하다가 입을 삐죽거리며 논의할까 걱정됩니다.” 했다. 초영왕이 듣지 않고, 경봉에게 부월(斧鉞)을 등에 짊어 지게하고 포승줄로 묶어 군사들 앞에 보이고, 군리를 시켜 칼을 목에 대면서, 자기의 죄를 말하라고 윽박질러 말하기를, “각국의 대부들은 들으시오! 혹시 제나라 경봉과 같이 군주를 시해하고 어린 임금을 능멸하며, 대부들을 하늘에 맹세시키는 짓은 하지 마시오!” 하니, 경봉이 마침내 큰소리로 외치기를, “각국의 대부들은 들으시오! 혹시 초나라 공왕의 서자 위(圍)와 같이 그 군주인 조카 웅미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여 제후들을 회맹시키는 짓은 하지 마시오.” 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영왕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빨리 죽이라고 했다. 호증 선생의 영사시에 이르기를, “난적이 다시 난적을 벌주어 죽인다고 하니, 비록 형세가 불리해서 죽기는 했지만 승복이야 했겠는가? 초영왕 웅건은 공연히 하늘을 대신해서 경봉을 죽인다고 자랑했지만, 하징서를 죽였던 장왕에 미치지 못했네.”라고 했다.
靈王自申歸楚,怪屈申從朱方班師,不肯深入,疑其有貳心於吳,殺之。以屈生代為大夫。薳罷如晉,迎夫人姬氏以歸,薳罷遂為令尹。是年冬,吳王夷昧帥師伐楚,入棘、櫟、麻,以報朱方之役。楚靈王大怒,復起諸侯之師伐吳。越君允常恨吳侵掠,亦使大夫常壽過帥師來會。楚將薳啟疆為先鋒,引舟師先至鵲岸,為吳人所敗。楚靈王自引大兵,至於羅汭。吳王夷昧,使其宗弟蹶繇犒師。靈王怒而執之,將殺其血,以釁軍鼓。先使人問曰:「汝來時曾卜吉凶否?」蹶繇對曰:「卜之甚吉!」使者曰:「君王將取汝血以釁軍鼓,何吉之有?」
신 땅에서 초나라 도읍으로 돌아온 초영왕은 주방에서 오나라로 깊이 들어가지 않고 회군한 굴신을 괴이하게 생각하여, 그가 오나라에 두 마음을 품고 있지 않나 의심하고 굴신을 죽였다. 초영왕은 굴신을 대신하여 굴생(屈生)을 대부로 삼았다. 원파를 진(晉)나라에 보내 부인 희씨(姬氏)를 모셔 돌아오게 하고, 원파를 마침내 영윤으로 삼았다. 그해 겨울에 오왕 이매가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쳐서 극(棘), 역(櫟), 마(麻)땅을 공격하여 주방에서의 싸움을 보복했다. 초영왕이 대로하여 제후들의 군사를 다시 일으켜 오나라를 쳤다. 월(越)나라 군주 윤상이 오나라의 침략을 항상 원망하다가 또한 대부 상수과(常壽過)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돕게 했다. 초나라 장수 원계강이 선봉이 되어 수군을 이끌고 작안(鵲岸)에 먼저 이르렀으나 오나라 수군에게 패배했다. 초영왕이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나예(羅汭)에 도착했다. 오왕 이매가 그의 종제인 궐요(蹶繇)를 시켜 초나라 군사를 호궤하게 했다. 초영왕이 노하여 궐요를 잡아 장차 죽여서 그 피를 군용 북에 바르려고 했다. 초영왕이 먼저 사자를 보내 묻기를, “그대가 이곳에 올 때 길흉을 점쳐 보았소?” 하니, 궐요가 대답하기를, “점을 쳐봤는데 아주 좋았습니다.” 했다. 사자가 말하기를, “우리 왕이 너를 죽여서 그 피를 군용 북에 바르려고 하는데 어찌 좋겠는가?” 했다.
蹶繇對曰:「吳所卜,乃社稷之事,豈為一人吉凶哉?寡君之遣繇犒師,蓋以察王怒之疾徐,而為守禦之緩急。君若驩焉,好迎使臣,使敝邑忘於儆備,亡無日矣。若以使臣釁鼓,敝邑知君之震怒,而修其武備,於以禦楚有餘矣。吉孰大焉!」靈王曰:「此賢士也!」乃赦之歸。楚兵至吳界,吳設守甚嚴,不能攻入而還。靈王乃嘆曰:「向乃枉殺屈申矣!」靈王既歸,恥其無功,乃大興土木,欲以物力制度,誇示諸侯。築一宮名曰章華,廣袤四十里,中築高臺,以望四方,臺高三十仞,曰章華臺,亦名三休臺。(以其高峻,凡登臺必三次休息,始陟其顛也。)其中宮室亭榭,極其壯麗,環以民居。凡有罪而逃亡者,皆召使歸國,以實其宮。宮成,遣使徵召四方諸侯,同來落成。
궐요가 대답하기를, “오나라가 점친 것은 사직의 일이라 어찌 한 사람의 길흉을 말하겠습니까? 우리 오왕께서 나를 보내어 초나라 군사를 호궤하라고 한 것은 대개 초나라 왕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 이로써 방어태세의 완급을 조절하기 위해서입니다. 초나라 왕이 만약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해 준다면 우리 오나라는 경계를 잊고 곧 망하게 될 것이며, 만약에 사신의 피를 북에 바른다면 우리 오왕께서 진노하여 무장을 정비하면 초나라를 막고도 남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좋겠습니까?” 했다. 사자가 돌아가 초영왕에게 보고하자 초영왕이 말하기를, “그 사람은 현명한 선비다.” 하고, 곧 용서하여 돌려보냈다. 초나라 군사가 오나라 경계에 도착했으나 오나라의 방비가 매우 엄중하여 쳐들어갈 수가 없어서 돌아갔다. 초영왕이 곧 한탄하며 말하기를, “전날 내가 굴신을 무고하게 죽였구나!” 했다. 초영왕이 이미 돌아가서 공을 세우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여겨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물산과 제도를 제후들에게 과시하고자 했다. 한 궁궐을 지었는데 이름이 장화궁(章華宮)으로 가로 세로가 40리이고, 한가운데 30길이나 되는 높은 대(臺)를 쌓아 사방을 조망할 수 있으며 이를 장화대(章華臺) 또는 삼휴대(三休臺)라고 했다. (그 누대가 너무 높아서 누대의 꼭대기에 오르려면 반드시 세 번을 쉬어야 했다.) 그 안의 궁실과 정자들도 극히 웅장하고 화려하였고, 그 바깥에 백성들의 거처가 둘러 있었다. 죄를 짓고 도망친 자들을 모두 귀국하게 하여 장화궁을 축조하게 했다. 궁이 완성되자 초영왕은 사자를 보내어 사방의 제후들을 소집하니 낙성식에 함께 왔다.
不知諸侯幾位到來,且看下回分解。
제후들이 몇이나 왔는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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