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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n UBF 2017년 3월 12일 주일메세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누가복음 4:16-44
누가복음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듣는 사람이 있으려면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전해야 듣습니다.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잘 듣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잘 들을 수 있도록 전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듣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배우고자 합니다. 들을 수 있도록 전하는 사명의 중요성도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잘 듣는 일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잘 듣고 믿은 것을 잘 전하는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1.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6,17절을 보십시오 갈릴리에서 첫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서서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사야 61:1,2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은혜가 함축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읽으신 것은 앞으로의 메시야 사역의 핵심과 주제를 분명히 하신 의미가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로서 특별한 권능과 영적 감화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입니다. 가난한 자는 보유 재산이 1억미만인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20평 이하의 주택에 거주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비참한 상태에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은 ‘복음’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많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절실합니다. 그중에서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복음입니다. 죽음은 절망과 허무와 두려움을 줍니다. 죄는 근심과 불안과 더러움과 불법과 정의롭지 못한 생각과 행동을 하게 합니다. 이 모든 문제들의 해답은 복음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면 가난한 자들의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자유를 주십니다.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우리는 전쟁 영화를 통해서 포로들을 봅니다. 포로의 모습은 불쌍하고 처량합니다. 전쟁사를 읽어보면 포로들의 형편은 영상물을 통하여 보는 것과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합니다. 포로들은 풀려 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눈먼 사람은 어둠에 갇힌 사람입니다. 눈먼 사람을 사로잡은 어둠은 그를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눈먼 자가 볼 수 있다면 행동과 생활에 무한한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눌린 자도 자기 몸을 누르는 짐을 얼마나 치워버리고 싶겠습니까? 군에서 행군 해보면 등에 진 짐이 가면 갈수록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 듭니다. 배낭만 벗어버려도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듭니다. 매고 가는 총 한 자루를 누가 대신 들어 준다면 군화만 이라도 가벼운 운동화로 갈아 신을 수 있다면 그렇게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19절의 주의 은혜의 해라는 것은 레위기에 기록된 유대인들의 “희년”을 의미합니다. 50년 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희년”이 되면 빚을 지거나 잘못 때문에 남에게 넘어간 재산들을 원 주인에게 다 돌려주고 남에게 종이나 하인이 된 사람들도 모두 풀어주는 예가 있었습니다.
메시야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이 전파되면 죄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 자유를 얻습니다. 죄로 인하여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눈을 뜹니다. 인생을 짓누르는 죄의 짐과 사망의 권세를 벗어버립니다. 죄의 빚을 탕감받으며, 죄의 노예가 된 데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귀에 응하였다는 말은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oday this scripture is fulfilled in your hearing”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나사렛 사람들이 다 보는 곳에 서 계십니다. 여기서 '지금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성경이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당신들 눈에 보이는 바와 같이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나사렛 사람들은 듣는 것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그들이 귀로 들은 성경 말씀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귀로 들은 성경 말씀,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잘 듣고 그것을 기초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 예수님의 세계는 들은 것을 근거로 하여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보이는 것을 붙들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손에 잡히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물질세계의 형상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금지시키셨습니다. 신명기4:15~18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유사이래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소를 형상화 한 바알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곰을 형상화한 이방인들은 그것을 몰렉이라고 불렀습니다. 생식과 풍요를 가져다 주는 여신이라면서 갖가지 여신 형상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천주교가 비판받는 것 중의 하나가, 사도들의 모양을 형상으로 세운 것입니다. 성인들의 형상을 만든 것이며, 마리아 형상을 만들고 그 앞에 기도하는 것이 복음주의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고자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붙잡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도 주의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도 성경 말씀을 기초로 하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성경 말씀 증언을 듣고 그것을 근거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성경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목에 자기 손가락을 넣어보고 예수님의 창 자국난 옆구리에 자기 손을 넣어 보아야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그렇게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듣고 믿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을 전해주신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특히 들은 것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어릴 시절 함께 보낸 목수 요셉의 큰 아들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한다면 그들의 인식 세계는 나사렛 밖의 세상으로는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을 가지고 인식하지 말고 들은 성경을 기초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점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날 나사렛 사람들은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은혜로운 메시지를 듣고 놀랐습니다. 그뿐이었습니다. 감탄은 하였지만,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은혜는 받았으나, 눈에 보이는 인식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왜 은혜로운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안목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인류의 구원자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하나님의 메시야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23절에서 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앙적 자세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사람들이 의사에게 “의사라면 당신부터 고쳐보시지”라고 하듯이 예수님더러 “가버나움 같은 곳에서 행한 기적을 여기서도 해보시지”하며 불신할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불신당하고 배척받으시는 것에 대하여 열왕기상17장과 열왕기하5장에 기록된 구약의 사건들을 인용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역사상 많은 선지자들 중에서 대표가 되는 선지자입니다. 능력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를 하나님의 종으로 대하며 섬긴 사람은 시돈(지금의 레바논)에 있는 사렙다 과부였습니다. 엘리야의 계승자인 엘리사도 그러하였습니다. 수리아의 군대장관의 시종이 문둥병 든 자기 주인 나아만 장군에게 엘리사에게 가보자고 한 것을 보면, 엘리사의 능력에 대한 소문이 여러 곳에 퍼져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나환자들이나 병자들은 누구도 엘리사에게 가보지 않았습니다. 겸손한 마음과 열린 마음으로 먼 길을 찾아가 나병을 낫고 온 사람은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은혜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에 대하여 인간적인 안목을 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례를 통하여 고향에서 배척 받으신 것을 소화하셨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을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고향 사람들이 인간적인 안목을 회개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분기가 가득하여서 예수님을 해하려 하였습니다. 듣는 것을 잘 들어야 합니다. 들은 것을 가지고 잘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와 같이 살인하고자 하는 죄에 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2.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다른 동네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크게 놀랐습니다. 이처럼 권세있고 은혜로운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으며 내면에 깊이 임하는 힘, Power가 있습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회당에 나온 사람들 중에는 귀신들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속에 들어간 귀신이 예수님의 권세앞에 견디지 못하고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이 거룩한 자니이다” 우리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귀신이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 들어가 있습니다. 귀신은 악한 영으로써 사람들 속에 들어와 그 사람을 망하게 하고 함께 심판에 떨어지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듣는 사람들은 은혜를 받았지만, 사람속에 들어가 있던 귀신들은 견딜 수 없어서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지극히 높은 권위를 가지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 순종하고자 하지 않고 발작을 일으키며 떠들었습니다. 귀신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어야 힘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 귀신이 스스로 정체를 드러낸 것은 예수님의 말씀 권위가 강력하여 그 권위 앞에 스스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님의 명령 앞에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쫓겨났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강한 생명력이 있어서 자신의 내면에 큰 은혜로 임하는데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악한 귀신들을 쫓아내는 강한 권위가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우리는 변화를 원하는 때가 많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나라가 변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큰 대상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변했으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식이 변했으면 바라는 부모가 많습니다. 부모가 좀 변했으면 하는 자식들도 많습니다. 친구가 변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직장 상사가 변하기를 바라기도 하고 새로 들어온 후임 직원이 빨리 변하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목자는 양이 변했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변하기를 바라는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 실체가 뚜렷하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 말을 하지만 본심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우리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그 어떤 논리로도 다른 사람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 어려운 양들의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바뀌었으면 하며 바라는데 바꿀 수 없고, 실체를 알고 싶은데 알 수 없어서 우리는 답답하고 갈등에 빠져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임하면 변화가 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사람들의 내면은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사람 속에 숨어 있는 악한 귀신들이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힘으로 사람을 바꾸려고 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임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내 논리와 노력으로 무엇인가 드러내려 하기 보다 예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역사하도록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오셔서 시몬의 집에 심방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가셔서 열병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병이 떠나고 장모가 곧 일어나서 예수님께 맛난 음식을 대접하고 섬겼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해가 지는 저녁때가 되어 이제 쉬어야 할 때인데,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이나 병든 사람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마구 몰려들었습니다. 40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일일이 하나 하나 개인적으로 손을 얹으시고 안수하사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병든 여러 사람들에게서는 귀신들이 쫓겨 나갔습니다. 귀신들은 예와 다름없이 예수님이 누구신 줄 알고 떠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아니어서 귀신들이 떠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고 수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안수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모든 질병과 귀신들을 명령하고 떠나게 하는 영적 권위와 힘을 가지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날이 밝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침 일찍 이미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 간곡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버나움에 모셔두고 싶었습니다.
43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가버나움은 인구가 조밀하고 어업이 왕성 했던 곳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비교적 풍부하고 사람들의 수도 일정 수준에 이르므로 예수님께서는 이곳에 터를 잡고 가버나움 지역중심 사역을 섬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도 예수님을 인정하고 인기와 관심이 예수님께 집중되는 곳입니다. 이곳은 바람을 탄 곳입니다. 이런 때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동네에 가야겠다고 하십니다.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 복음 전하는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한 일들을 성과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이 보면, 선교사들이 한 일은 학교를 세운 일이었습니다. 여성운동가들이 볼 때 선교사들이 한 일은 소외받는 여성들을 계몽 시킨 일이었습니다. 보건 의료 종사자들이 볼 때, 선교사들이 한 큰 일은 병원을 세우고 고통받는 병자, 버려진 나환자들을 돌 본 일이었습니다. 언더우드가 연세대학교를 세웠습니다. 이화여대, 숭실대학교, 한남대학교, 나사렛대학교, 배제대학교, 배화여대 수많은 학교들이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졌습니다. 세브란스 병원, 예수 병원, 광혜원, 제중원, 이화여대 부속 병원, 그외 많은 병원들이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사회적 산물들 입니다. 예수님의 선교 명령에 순종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동한 선교사들은 이런 외적 활동이 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일들은 닫혀 있는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 위한 사업이었을 뿐, 선교사님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한 일은 복음 전파였습니다. 선교사님들은 보수적이고 딱딱한 생각을 가진 조선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여러모로 섬겼지만, 중점적으로 힘쓴 일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사경회를 열어 한글 성경을 가지고 성경공부를 시켰습니다. 가는 곳마다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 땅에 심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예수님의 핵심 사역은 복음 전파입니다. 이 예수님께 순종하고 이 예수님을 배워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경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전파 사명에 대한 방향을 분명하게 하셨으므로 초대 교회 사도들과 이후 선교사들도 복음 전파 사역이 핵심 사역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 은혜로 오늘날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다른 동네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동네입니다. 다른 동네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동네입니다. 다른 동네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한 구원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하는 동네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떠나 다른 동네로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다른 동네로 가서 말씀을 전하여야 합니다. 전해주어야 듣습니다. 로마서 10:17절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4,15절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전해야 합니다. 아직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전해야 듣고 들어야 믿고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 처럼 다른 동네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서 다른 동네로 가야 합니다. 가서 말씀을 전하여야 합니다. 전할 때 생명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전할 때, 구원 얻지 못한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날 전하기 어렵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지난 주 단국대 캠퍼스 현관 문들에는 종교단체나 외부 상업행위 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정보를 주지 말라는 공고문이 아주 많이 붙여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동안 여러 선교 단체들이 앙케이트 조사 등을 빙자해서 학과 학년 전화번호를 따는 일을 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이나 지방의 여러 학교 캠퍼스에서는 전도하고 있으면 교직원이 나와서 금지 시킨다는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이런 일들은 전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어느 시대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물리계에는 관성이 있습니다. 정지되어 있는 물체는 계속 정지되어 있기를 원합니다. 운동하던 물체는 계속 운동하기를 원합니다. 정지되어 있는 것이 운동을 시작하려면 굉장히 큰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육체의 본성대로 살던 사람이 영적인 소원을 따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돈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세상이 생명과 사랑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어렵다고 해서 중단하면 생명 역사는 없습니다. 힘들다고 해서 그만두면 영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하는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줄기차게 전하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에서 고향 나사렛에 가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하신 일도 말씀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을 떠나는 것도 다른 동네에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입니다.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우리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겠습니다. 우리가 들은 말씀을 잘 간직하고 잘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듣고 믿은 말씀을 잘 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동네로 우리도 가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Asan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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