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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절 | 성경에 대한 호칭 | 성경의 특성 |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 |
7절 | 율법, 증거 | 완전함, 확실함 | 영혼을 소성, 지혜 |
8절 | 교훈, 계명 | 정직함, 순결함 | 기쁨, 눈을 밝게 |
9절 | 도, 법 | 정결함, 진실함 | 영원까지 이르게 함. 다 의로움 |
이것을 표로 만들어 봅시다.
10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말씀은 세상지식처럼 연구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어느 정도 안다고 자랑할 것도 아닙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랑할 사랑의 대상이고, 꿀처럼 달게 아멘 아멘 받아먹어야 하는 것이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아멘 아멘 많이 많이 받아 먹으십시오. 내게 양약이 되며 나를 힘 있게 할 것입니다.
내 안에 말씀이 채워지지 않으면 겉만 번지르르한 풍선과 같은 것입니다. 시험이 찾아오면 아무것도 없어서 뻥 터져버리거나, 쉭 바람이 빠져나와서 쪼그라들고 마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받아 내 배에 채워야 합니다.
에스겔 3: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러므로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시편 1편처럼 말씀의 사람인 것입니다.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말씀)을 즐거워해서 그 말씀 가운데 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이 성장 성숙해져서, 이기는 자가 되며,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많이 많이 맺을 줄 믿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 성경이란 무엇인가? 네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① 판이성(判異性):성경은 출처가 하늘의 하나님입니다. 세상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과 땅처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② 시종성(侍從性):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 나도 모르게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순간 내가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③ 수호성(守護性):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수호(지켜주심)해 주십니다. 사자 굴에 들어간 다니엘, 풀무불에 들어간 다니엘의 세 친구, 하나님은 저들을 다 지켜주셨습니다.
④ 절대성(絶對性):말씀이 절대적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내 상황, 내 생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에 절대적으로 맞추는 것입니다.
이중 3번의 수호성 안에 치유성, 기적성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말씀의 수호성이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해서 고쳐주시는 치유성, 기적성으로 나타나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지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주님의 말씀이 산상수훈을 통하여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서 선포되었고 이후에는 정말 셀 수 없이 많도록 기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성경의 글자를 연구해보니 성경 전체를 6이라는 숫자로 치자면 말씀이 1이고, 기적이 2이고, 기적에 대한 증거가 3이랍니다.
불교에서는 자기들의 말씀을 불경이라고 하지요. 불경은 말씀만 있지 기적도 증거도 없습니다.
방편이라는 것은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방편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방편은 원래 불교용어였다. 방(方)은 방법(方法)을 말하는 것이고, 편(便)은 편리(便利)를 말하는 것으로서, 사람의 근기에 알맞은 방법을 이용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묘한 방법을 말한다. 이렇게 방편은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일시적인 수단이나 편리한 방법을 말한다.”
그래서 이 방편을 당연시하고 칠보설, 윤회설 등등 한마디로 설일 뿐인 이야기들을 믿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말씀과 기적이 함께 역사하고 그 역사한 것을 증언한 것이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본문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관리의 딸을 살리시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의 병이 고쳐졌습니다.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말씀이 똑같이 마가복음 5장에도, 누가복음 8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누가복음이 다 비슷한 내용이기 때문에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자들이 연구한 바로 마가와 마태와 누가가 처해있었던 현실은 서로 아주 먼 다른 곳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가 박해를 받고 있었던 터라 서로 왕래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 공동체, 마가 공동체, 누가 공동체와 같이 서로 어쩔 수 없이 떨어진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믿고 전하기 위해서 복음서가 탄생되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복음서가 기록 장소, 사람, 기록 목적 등등 다 다릅니다. 이렇게 출발은 다양성에서 출발되었는데 그 결과는 놀랍게도 ‘공관(共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용이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상황을 보자면 한 관리가 찾아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회당장 야이로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 제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그 몸에 손을 얹어서 기도해 주셔서 살려 주소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가십니다. 그 가시는 길에 어느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입니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여자가 12년 동안 하혈을 했다는 것은 아무런 생식기능이 없는 여자로서 존재가치가 사라진 부정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감히 이 부정한 여자가 누구에게 손을 댑니까? 그런데 이 여인은 살고자 하는 마음, 예수님의 말씀을 능력을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에 몰래 손을 댑니다. 이 때 이 여자의 혈루증이 낫지요. 할렐루야!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 길을 가십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가야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가서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예수님께서 이러시니까 죽었던 이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할렐루야!
이 내용이 동일하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시다가 열두 해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의 딸을 살리시고...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서 이걸 삼아서 자기 종교를 설파한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들이 보았고, 경험했고, 느꼈던 그 상황들을 도저히 잊지 못해서 기록해 놓았더니 서로 짝이 딱딱 맞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지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진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은 실제입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수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판이성을 믿고, 말씀을 높이고 말씀에 순종하면, 그것이 바로 영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영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첫째, 열두 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을 봅시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병을 고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있었습니다. ①자신을 부정한 여자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 ②자신만이 아닌 접촉하는 상대방도 부정하게 만든다는 죄의식 ③그녀를 막고 선 수많은 무리들... 그러나 이 여인은 이 산들을 넘고 넘어서 예수님 앞에 이르러 예수님의 옷깃에 손을 대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겉옷에는 긴 술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 술을 붙잡고 유대인들은 기도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한 그 술, 그 옷을 나도 만진다면 병이 나으리라, 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시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걸 믿고 손을 댄 것입니다.
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이 선포되어지면 그것이 말씀입니다. 나의 삶에서 예수님이 증거되어지면 그것이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교회 밖에도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입니다.
넘어야 할 산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예수님께 도달해서 예수님을 붙잡아, 말씀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둘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봅시다.
18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마찬가지로 넘어야 할 산이 많았습니다. ①남들에게 존경받는 랍비인데 이제 새파란 서른살 청년에게 와서 부탁을 해야 하다니 ②내가 예수에게 부탁했다가 일이 안되면 어떻게 하나 라는 의심들 ③산사람은 고칠 수 있지만 죽은 사람까지 어떻게 고칠까? 죽은 사람은 고치는 것이 아니고 살려 내는 것인데 예수가 과연 죽은 내 딸을 살려낼 수 있을까?
이런 넘어야 할 산 앞에서 이 관리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절을 했습니다. 딸의 죽음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내 마음, 그 어떠한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완전히 버려진 그 마음을 아예 예수님 발 앞에 나아와 무너져버립니다. 그리고 주님 도와달라고 애원합니다.
23절을 보니까 피리부는 자, 떠드는 자가 있어요. 유대인들은 장례식 때 두 명을 고용합니다. 피리부는 자와 애곡하는 자, 이 둘을 고용해서 계속 슬픈 노래를 부르게 하고, 엉엉 울면서 장례를 치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예수님이 갔더니 이 두 사람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왜? 야이로의 딸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4절, 물러가라.
내가 넘지 못할 산을 넘어서 예수님께 이르면 예수님께서 다 아시고 이제는 예수님께 이르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떠한 것도 물러가게 하십니다. 치워버리십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이릅시다.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말씀 가운데 거하십시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혈루증이 고쳐지고...
예수님 앞에, 말씀 앞에 능치 못함이 없음을 믿고 오직 예수의 사람, 오직 말씀의 사람이 되어서 날마다 살아계신 기적이 증거되는 모든 성도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동문교회 강순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