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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 가설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19 6 24
류드밀라 마르코프에게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장소에 관한 기억이 있었다.
그 기억이 언제부터 어떻게 류드밀라에게 자리 잡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어린 시절 류드밀라가 자랐던 보육원의 교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그 아이는 다섯 살부터 자신이 ‘그곳’에서 왔다고 주장했어요. 우리 교사들은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지요. 어린아이들이 그런 공상을 펼치는 것은 흔한 일이고 정상적인 발달 과정의 일부이니까요. 다만, 류드밀라는 그 믿음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었어요. 교사들 중 누군가가 그 세계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태도를 보이면, 류드밀라는 아주 슬퍼하고 괴로워했어요. 그렇게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답니다. 류드밀라의 앞에서 결코 그걸 의심하는 티를 내지 않는 규칙이었죠.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우리는 다들 그 몽상이 류드밀라가 어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질 현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교사들의 예상과 달리 그곳에 관한 류드밀라의 기억은 성장한 이후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류드밀라의 재능은 어린 나이부터 두드러졌다. 보육원 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류드밀라는 색연필을 쥘 수 있는 나이부터 그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를 탁월하게 재현해냈다고 한다. 그러나 류드밀라의 생애 초기 작품들은 미술에 재능이 있는 소녀의 습작 정도로 여겨져 그녀가 보육원을 떠날 때 모두 폐기되었고, 지금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보육원은 색연필보다는 빵과 비스킷을 더 필요로 하는 곳이었다. 소녀 시절의 류드밀라는 그림을 그리는 시간보다 공상에 잠겨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열 살 무렵 그녀는 모 다국적기업의 재능발굴사업 대상으로 선정되어 보육원에서 런던의 아카데미로 옮겨 갔다. 그 이후로 류드밀라는 단 한 번도 배를 굶주리거나 벌레가 나오는 방에서 잠들지 않았다.
류드밀라는 아카데미로 옮겨간 직후부터 ‘그곳’을 그린 작품을 공개 발표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학생들의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 대여한 작은 갤러리에서 그곳의 풍경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류드밀라의 작품은 전시회 첫날부터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은 그림 앞에 멈추어 서서 눈물을 흘렸다. 대체 누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이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어떻게 이런 세계를 상상해낸 거니?”
아카데미 교사들은 거듭 감탄했다. 류드밀라는 아직 기술적인 면에서는 서툴렀고 배울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리는 풍경은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캔버스 위로 손을 옮기는 그녀의 모습에는, 무엇을 그릴지에 대한 고민과 머뭇거림이 전혀 없었다.
그 세계에 관한 기억은 어린 시절부터 생애가 끝나는 순간까지 류드밀라를 지배한 강렬한 이미지였다. 어딘가에 존재할 것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류드밀라는 평생 그곳의 풍경을 그렸다. 그 세계 자체가 류드밀라의 머릿속에 그대로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모든 그림은 매번 다른 풍경을 묘사했지만 부분의 조합은 전체 세계를 생생하고 치밀하게 직조했다.
“류드밀라, 그곳의 이름이 대체 뭡니까?”
기자들은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다. 류드밀라는 언제나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제 머릿속에는 그곳의 이름이 있어요. 하지만 말로는 어떻게 그곳을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답할 뿐이었다. 처음 몇 번은 지구의 어느 언어에도 없는 말로 그곳의 이름을 발음했다. 그러나 기자들이 받아쓸 수 없는 이름에 짜증을 내는 일이 이어진 후에 류드밀라는 그곳을 그냥 ‘행성’이라고 불렀다.
이름이 없는 행성. 그곳의 이름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 신비한 세계에 몽환적인 상상을 덧대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류드밀라의 행성이라고 불렀다. 행성의 실존과는 무관하게 그런 이름으로 합의된 어떤 세계가 있었다. 류드밀라가 기억하는, 류드밀라가 가보았던, 류드밀라가 창조한, 류드밀라가 일관적으로 그려내는 분명한 세계.
류드밀라의 초기 작품에 나타나는 행성의 모습은 다소 추상적이다. 주로 푸른색과 보라색 계통으로 채색된 그 세계에는 명확한 형태를 가진 생명체들과 형태가 없는 생명체들이 공존한다. 지표는 대부분 바다로 덮여 있고 발광성 원핵생물들이 바다를 부유하며 행성을 빛으로 물들인다. 바다 아래와 공기 중에는 그보다 복잡한 모습의 생명체들이 고유한 생태계를 이룬다. 짧은 낮과 긴 밤이 있고, 매일 해가 뜨고 지며 풍경에 기묘한 색채를 더한다.
류드밀라가 성년기에 접어들면서 행성의 모습은 아주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그때부터 그녀는 작품에 데이터를 입히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행성의 모든 특성과 속성이 정밀하게 수치화되었다. 행성 생명체를 묘사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현장의 생물학자 같았다.
캔버스와 종이 위에 작업하던 초기 회화 작품들을 지나 그녀는 평면에서 시뮬레이션으로 몇 단계를 건너뛰었다. 당시 부상하던 시뮬레이션 아트에 류드밀라는 망설임 없이 진입했고 곧 대중과 평론가들의 찬사를 거머쥐었다. 그녀는 기술과 기교만 존재하던 시뮬레이션 아트에 실재성을 불어넣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런 찬사를 받을 때 류드밀라의 반응은 항상 같았다.
“당연하죠. 그 행성은 정말로 있으니까요. 저는 본 대로 그려낼 뿐입니다.”
사람들은 류드밀라의 행성을 사랑했다. 세계 어디서나 류드밀라의 행성을 볼 수 있었다. 덕분에 류드밀라의 행성은 상상 속의 세계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 지구 위에 실존하는 것 같았다. 행성에 쏟아지는 애정은 단지 작품에 대한 관심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림을 기반으로 행성의 모습을 재해석한 영화와 연극이 제작되었다. 고전 작품도 동시대의 미술도 오직 상품으로만 소비되는 시대였으나 류드밀라의 작품만은 기이할 정도로 주목받았다. 행성의 영향력은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그녀 작품의 가장 주된 특징은 무국적성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유년기를, 런던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에는 세계 각국을 떠돌아다니며 살았던 그녀의 삶이 작품에 반영된 것인지도 몰랐다. 류드밀라의 행성은 지구의 어느 장소와도 닮지 않았고 세계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행성 연작은 사람들에게 특정한 종류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류드밀라의 행성을 볼 때 사람들은 무언가 놓고 온 것, 아주 오래되고 아득한 것, 떠나온 것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모르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평론가들은 류드밀라의 작품이 어디에도 없는 세계를 묘사해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존재하는 세계를 자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류드밀라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작품들도 있다. 류드밀라가 평생에 걸쳐 작업했던 또 다른 연작이다. 단 한 번도 공개 발표된 적 없는 그 연작에는 이런 제목이 붙어 있다. ‘나를 떠나지 말아요.’ 그 작품들은 행성 연작과 달리 강렬한 감정의 이미지만 존재할 뿐, 류드밀라 특유의 다른 세계에 대한 세밀하고 분명한 묘사가 드러나지 않는다. 작품들은 극단적으로 추상적이고, 쓸쓸한 공기에 잠겨 있으며, 무언가를 간절히 호소하는 듯하다.
류드밀라는 그 연작에 관한 인터뷰를 거부했다. 그녀가 죽은 이후 다락방에서 수십 점의 작품들이 같은 제목이 붙은 채로 발견되었을 뿐이다. 한때 연구자들은 그 연작을 류드밀라의 숨겨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류드밀라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하나도 없었고, 곧 추측도 해석도 잊히고 말았다.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는 작품들을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류드밀라의 행성을 활용한 시뮬레이션과 게임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시뮬레이션 속을 거닐며 류드밀라의 세계를 그리워했고 그곳을 자신들의 이상향이라고 생각했다. 결코 찾아낼 수도 없고 도달할 수도 없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작은 위안을 주는 아름다운 세계. 비록 류드밀라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가상의 세계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영원히 머무를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 세계가 실제로 발견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날 심우주를 여행하던 우주망원경이 지구로 데이터 하나를 보내왔다. 어떤 다항성계의 특수한 궤도를 갖는 작은 행성에 관한 데이터였다. 데이터는 행성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행성은 아주 멀리 있었고 그곳까지 탐사선을 보낼 기술이 없어 정말로 생명체가 있는지를 검증하려면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러나 그 발견은 한동안 조용하던 천문대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다음 며칠 내내 관측소 오퍼레이터들은 행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수신에 오류가 없다면 데이터가 의미하는 바는 아주 흥미로웠다. 지금까지의 심우주 탐사는 외계행성만큼 명쾌한 데이터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관측된 행성의 대기 성분에는 암모니아와 메탄이 절묘한 비율로 섞여 있는데, 항성 자외선에 의해 아주 쉽게 분해되는 그 성분들이 일부만 대기에 섞여 있으려면 반드시 지표면에 탄소 생명체가 존재해야 한다는 추측이 지배적이었다. 망원경이 측정한 전자기파 스펙트럼을 가시광선으로 변환하자 오묘한 푸른빛이 드러났다. 마치 우주 어딘가에 있는 또 다른 지구, 더욱 환상적인 지구의 존재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때 조용히 도시락을 먹고 있던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데이터, 류드밀라의 행성 같지 않아?”
“에이, 설마.”
“잘 생각해봐. 류드밀라의 행성은 시뮬레이션으로 남아 있잖아. 류드밀라는 행성의 측정치를 구체적으로 남겼고, 과학자들이 실제로도 그런 행성이 존재할 수 있다고 검증을 마쳤어. 그런데 이번 데이터를 보면, 수치가 이상하리만큼 류드밀라의 행성과 같단 말야. 우연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저녁을 먹던 오퍼레이터들은 그 말에 모두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날 천문대 직원들은 잠들지 못했다. 정말로 그랬다. 관측된 모든 데이터가 그 세계의 실재를 입증하고 있었다. 행성은 류드밀라가 묘사한 세계와 일치했다. 류드밀라가 남긴 행성 시뮬레이션은 관측 데이터의 행성 부피, 질량, 공전 주기와 지름, 평균 온도까지 특성을 전부 동일하게 예측했다.
그 행성이 류드밀라의 행성일까?
그렇다면 류드밀라는 대체 그 행성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던 것일까?
더욱 기이한 사실이 연이어 보고되었다. 그 행성은 이미 오래전 모항성의 거대 플레어 폭발에 의해 불탔고, 우주망원경이 수신한 데이터는 폭발에 휩쓸리기 직전 행성의 모습을 포착했다는 것이었다.
행성 데이터를 처음으로 확인한 오퍼레이터가 카메라 앞에 서 있었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고 플래시가 끊임없이 터졌다. 오퍼레이터는 말했다.
“우리는 이미 사라진 행성을 보고 있는 겁니다. 한때 실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져버린 류드밀라의 세계를요.”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류드밀라에게는 미래를, 아니면 아주 까마득히 먼 과거를 보는 초능력이 있었을까? 하지만 그런 능력이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은 단지 엄청난 우연의 일치일 뿐일까? 어떤 예술가가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행성의 모든 특성이, 정말로 우주 어딘가에 존재했던 행성과 완벽하게 들어맞을 가능성이 존재할까? 모두가 해답을 간절히 알고 싶어 했지만, 실마리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 * *
그 이상한 소식이 전파를 타고 세계로 전해지던 시각, 서울 광진구의 한 호수 근처에 위치한 ‘뇌의 해석 연구소’는 환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새벽 2시였지만 직원들은 모두 분주했고 하나같이 초췌했다. 마감을 앞둔 연구소 특유의 긴장감이 복도에 흘렀다. 정적을 채우기 위해 켜둔 휴게실의 TV에서는 류드밀라의 행성에 관한 뉴스가 보도되었다. 그러나 휴게실에 있는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다.
책임연구원 윤수빈은 한숨을 푹푹 쉬며 앞에 놓인 종이를 한 시간째 노려보고 있었다. 눈이 빠질 지경이었다. 곧 중간보고 미팅인데 기계는 엉뚱한 결과만을 내놓고 있다. 이래서야 미팅 내내 관계자들의 따가운 눈초리만 받고 올 것이 뻔했다. 도대체 태어난 지 2개월 된 아기가 ‘살아가는 것이 외롭고 무섭다. 동료들이 보고 싶다.’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한 달 전까지는 잘됐는데.”
또 다른 데이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한나가 무심하게 말했다.
“한 달 전까지는 고양이였잖아요. 지금은 인간 아기고요.”
“고양이나 아기나. 배고파서 밥 달라고 울고, 졸리다고 울고, 무섭다고 울고, 그게 그거지.”
한나는 그 말에 픽 웃었다.
“어떻게 확신하겠어요. 알고 보면 아기보다 고양이가 철학적일지.”
정말로 고양이가 더 철학적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수빈은 당장 아기들의 울음을 해석해야 했다.
브레인 머신 인터페이스 연구팀은 생각-표현 전환 기술을 연구하고 있었다. 단분자 추적 이미징 기술을 이용해 활성화된 뉴런의 패턴을 읽고, 피험자의 생각을 언어 표현으로 옮기거나 반대로 표현된 언어를 역추적하여 원래 피험자의 생각을 추측하는 기술이었다.
뇌를 판독하려는 시도는 오랜 역사를 가진다.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고 싶어 했다. 새로운 뇌 연구 방법이 등장할 때마다 모두가 독심술의 발명을 기대했다. 덕분에 21세기 초에 뇌의 해석 연구소가 세워진 이후로 연구비가 끊길 일은 없었지만, 뉴런 활성화 패턴을 미세 수준까지 분석할 수 있는 이미징 기술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판독 기술들은 원시적인 수준에 가까웠다. 예컨대 뇌 자기공명 영상을 보고 피험자가 풍경 사진을 보았는지 음식 사진을 보았는지 알아맞힌다든가 하는 정도였다.
패러다임 변화는 2년 전 새로운 단분자 추적 기술이 등장하면서 일어났다. 뉴런 단위로 뇌 활동을 분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구팀은 새 기술을 활용하여 뇌에서 만들어내는 전기적 신호와 패턴을 분석했다. 아직 어떤 특정한 언어로 옮겨지지 않은, 사고언어라고 불리는 순수한 생각의 형태였다. 그리고 이제 연구는 사고언어를 역으로 표현에 맞추어 연결하는 작업에 접어들었다. 아직은 거대한 스캐너가 필요하고, 고작 몇 분간의 생각이나 말소리를 분석하기 위해서 며칠의 분석을 거쳐야 하지만, 발전된 형태의 기술이 갖게 될 무한한 잠재력 때문에 연구는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초기 연구는 개와 고양이의 표현에 관한 실험이었다. 전환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95퍼센트 이상의 정확도로 피험 동물이 내는 소리에서 동물의 욕구를 분석할 수 있었다. 개들이 짖는 소리를 분석해서 껌을 갖다 주거나 등을 쓰다듬어주면 개들은 만족스러워 했다. 포유류 대상 기술은 이미 상용화가 추진 중이었다. 죽음을 앞둔 반려동물들과 한 번만이라도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다는 돈 많은 클라이언트들의 요구가 쇄도했다. 물론 그들의 생각과 달리 아직 기술은 ‘대화’를 나누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만약 의도한 대로 연구가 진행된다면 말 그대로 모든 종과 종을 잇는 범용 통역기로의 발전도 기대할 수 있었다.
연구팀은 곧 분석 대상을 인간으로 바꾸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전환기가 인간에게도 작동한다면, 언어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연구에 곤란을 겪고 있는 소수언어 연구자들에게도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비록 표현이 다를지라도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갖는 이상 뇌 활동은 유사하다고 가정할 수 있을 테니까.
성인들을 대상으로 데이터를 수집할 때까지만 해도 전망은 낙관적이었다. 인간의 언어와 사고가 복잡하기에 반려동물들보다 난이도가 무척 높으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한 사실이고, 비록 현재 수준은 대화를 번역한다기보다 어떤 심상을 떠올리는지를 추측하여 단순한 문장으로 옮기는 정도였지만 의미 적합도는 80퍼센트 이상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전한기가 복잡한 언어 구사력을 갖게 하는 것은 앞으로의 도전과제일 수는 있어도, 연구 자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모두 장담했다.
수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패턴 모델을 만든 다음에는 성인뿐만 아니라 신생아를 대상으로 한 연구도 진행됐다. 아기들의 데이터를 분석하기 직전까지 연구팀은 기대에 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만약 신생아의 울음에 어쩐 의미가 있는지를 대략적으로나마 분석할 수 있다면, 부모들의 육아 보조와 보육 로봇 개발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올 것이다. 아이들의 울음 근저에 있는 욕구만이라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다면, 이 기계는 세계 각국의 신생아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도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연구는 곧 난관에 부닥쳤다.
1차 데이터 분석을 맡은 한나가 데이터 칩을 들고 연구실로 들어왔을 때, 다들 들뜬 얼굴로 한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결과가 너무 이상해요. 아기들이 할 만한 생각이 아니에요.”
분석된 데이터가 화면에 뜨기 시작하자 연구원들은 말문이 막혔다.
기계에 따르면 아기들의 울음은 각각 이런 의미를 가졌다.
‘어떻게 하면 더 윤리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다들 거기에 잘 계신가요?’
‘아냐,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곳은 여기야.’
다들 멍청한 표정으로 분석 화면을 보고 있었다. 완전히 엉망진창인 결과가 나온 것이다. 수빈이 말했다.
“데이터 오염 같은데?”
이미징 시스템의 원리를 생각해보면 오염을 먼저 의심하는 것이 타당했다. 통역은 아직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기에 노이즈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무리 정밀하게 통제해도 늘 외부의 잡음이 섞여들었고 분석 시간의 대부분은 이 잡음을 제거하는 데에 쓰였다. 성인들의 데이터 분석에도 그런 문제가 있는데, 하물며 아직 언어화가 미숙한 사고를 할 아기들의 데이터라면 말할 나위 없었다.
아기들은 생후 14개월경부터 일상의 언어들을 습득하기 시작하고 간단한 동작어에 반응한다. 아기들이 어린이가 될 때까지, 그리고 어린이가 청소년으로 자라날 때까지 언어구사력은 그들의 사고력과 함께 발달한다. 상식적으로 아기들의 사고내용은 아기들의 발달 단계를 넘어설 수 없다. 사고는 언어 이해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까 노이즈겠지. 노이즈가 아니라면 아기들의 울음을 해석했을 때 기껏해야 ‘배고파’, ‘불편해’ 정도. 그것도 제대로 된 언어보다는 어떤 감정이나 불쾌한 감각 정도로만 나타나는 게 정상일 거야.”
수빈이 말했다.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죠. 그런데 데이터 오염이라고만 하기에는 미심쩍은 점이 있어요. 여길 보면 약간 성장해서 말을 할 줄 아는 아기들도 말하는 내용과 분석된 사고 패턴이 전혀 맞질 않아요. 여기 이 데이터는, ‘엄마, 저거 줘’라고 말하는 아기가 실제로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있대요. 말이 안 되죠.”
“성인들의 뇌 활성 패턴과 아기들의 뇌 활성 패턴이 극단적으로 달라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닐까?”
“가능한 얘기예요.”
한나는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죠. 모든 작업을요.”
불길한 예감이 사무실을 잠식했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이 분명하다면 풀어나갈 방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빈과 한나는 그동안 수집한 사고-표현 데이터를 전부 연령별로 분리했다. 그런 다음 언어 발달이 덜 된 아기들만의 데이터를 따로 모았다. 활용할 데이터가 많이 줄어 곤란했다. 녹음 자료를 더 보내달라고 협력 기관에 온종일 전화를 돌려야 했다. 그래도 지금의 결과대로 아기들이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댄다고 믿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데이터 분리에 일말의 기대를 걸어보았으나, 분석 결과는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아기들의 뇌 패턴은 연구팀이 처음에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차라리 어른들의 패턴을 분석하는 것이 더 쉬울 지경이었다. 실제로 성인 뇌 패턴 분석을 맡은 다른 연구팀에서는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은 언어표현에 문제가 없는 성인들의 뇌 패턴 데이터를 대량으로 수집한 다음, 발성 기관에 문제가 생기거나 모종의 이유로 언어표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험자들에게 적용하여 생각으로부터 표현을 끌어내는 실험에 돌입했다. 그에 반해 수빈의 연구팀은 아직도 아기들이 철학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분석 결과를 붙들고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데이터를 다시 모으고 분석해도, 계속 같은 결과가 나왔다.
“아기들…….”
“복잡하고 심오하고 철학적인 아기들.”
수빈과 한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어쩌면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일까. 수빈은 심오한 고민에 빠졌다. 개와 고양이와는 달리, 인간의 뇌는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다채롭게 변화하기 때문에 결코 쉽게 그 비밀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지도.
한동안 두 사람은 연구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하는지, 아니면 주제를 바꾸거나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를 논의했다. 다른 연구원들까지 같이 매달려 이 철학적인 아기 울음에 대한 돌파구를 찾았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중간 미팅이 끝나고 프로젝트를 변경하는 것이 좋겠다는 합의에 도달해 연구가 흐지부지되어갈 무렵, 사건은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수빈 언니, 이거 좀 봐줄래요?”
그날따라 출력물을 내미는 한나의 표정이 아주 이상했다. 한나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약간 깨물고 있었다. 수빈은 파일을 건네받아 펼쳤다.
몇 장을 넘겨보던 수빈은 표지를 덮었다. 뭔가 잘못 본 것 같았다. 눈이 의심스러웠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소설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게 뭔데? 무슨 의미야?”
“보시는 그대로요. 아기들의 입속말을 분석한 데이터예요. 혹시 그날 기억나세요? 류드밀라의 행성이 발견된 날이요. 그런데 그날 녹음된 데이터가 다 이런 식이었어요.”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은 두 사람이 아기들에 관한 실험을 포기해야 할지 처음으로 토론한 날이기도 했다. 그날 이후 수빈이 이미 분석한 데이터들을 붙잡고 괴로워하는 동안, 한나는 미가공 데이터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결과를 확인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출력물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수빈은 멍하니 글자들을 보았다.
‘우리가 시작된 곳이야’
‘우리의 행성이 보고 싶어’
‘류드밀라’
‘류드밀라’
‘류드밀라’
‘류드밀라는 그곳을 그대로 그려냈는데’
‘그리워’
수빈이 입을 다물지 못하는 동안 한나는 이미 수십 번의 확인을 마쳤다고 강조했다.
“저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늦게 보여드리는 거죠. 그날 아기들이, 다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요.”
한나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작업한 수만 개의 데이터 처리 결과를 가져왔다. 연구팀이 무의미한 데이터라고 판단해 제대로 분석하지 않았던 대화들이었다. 한나는 이 분석 결과들이 노이즈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결과에서 반복되는 의미들을 추출했다. 수만 개의 데이터를 분석한 도표는 연구팀이 실패했다고 생각해서 폐기한 아기 표현 분석모델을 그대로 사용했다.
데이터들은 아기의 뇌 속에서 무언가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대화는 마치 독립적인 여러 존재가 하나의 뇌 속에 공존하며 의견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방금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얘가 잘못 움직여서 그래. 의자를 넘어뜨렸거든.’
‘아까 그 화면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거지.’
‘벌써 바다에 관심을 갖는 거야?’
“이 데이터는 한 아기에게서, 동일 시간대에 나온 데이터예요. 보시다시피.”
한나가 출력물을 넘겼다.
“아기의 뇌 속에는 여러 인격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요. 아니, 그런 멍청한 소리 듣는다는 표정 하지 말고 그냥 읽어보세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의미를 추출해서 정리했어요. 선배가 안 믿을까 봐 후처리까지 완벽하게 해 왔죠. 자, 봐요.
” 그들은 마치 아기의 양육자 같았다. 그들은 도덕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기를 키우고 돌보는 관찰자처럼 서로 대화했다.
수빈은 황당한 기분으로 한나의 말을 듣고 있었다. 분석한 결과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당혹스러운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무언가가 아기들의 뇌 안에 있어요.”
한나가 말했다.
“인간이 아닌 무언가요. 이건 외부의 어떤 요인을 도입하지 않고는 설명이 안 돼요.”
“노이즈일 거야.”
“노이즈라고 가정해도 말이 안 되죠. 노이즈가 이렇게 일관적인 대화를 나눌 수가 있나요? 노이즈가 도덕, 윤리, 이타성에 관한 대화를 나눌까요?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요?”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수집한 데이터는 수천 명의 아기들한테서 왔어. 모두 다른 아기들이라고. 그런데 그 모든 뇌 안에 아기를 돌보는 것마냥 행세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그게 아니라면 뭐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가끔 한나는 누구보다도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주장을 펼쳐서 모두를 기가 막히게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황당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수빈은 문자 그대로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잠시 했다가, 진정하고 다시 물었다.
“아기들의 머릿속에 우리와 다른 지성적 존재가 있다는 거야?”
“그렇게 설명하면 모든 것이 명쾌해요.”
수빈은 일단 한나의 가설을 다른 연구진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아기들의 뇌 속에 자리 잡은 어떤 존재라니. 너무 허황된 가설이었다.
그러나 일단 한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고려해보기로 하자 이전에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던 정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생아부터 이제 막 언어를 배운 아이들까지 데이터는 일관된 경향성을 보이고 있었다. 겉으로 표현되는 울음 혹은 입속말과 뇌의 의미 패턴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아이들 뇌의 의미 패턴은 피험자의 연령에 맞지 않는 고차원적인 사고 결과물을 출력하며, 한나가 표현한 대로 마치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여러 인격이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수빈과 한나는 그 인격들을 ‘그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들은 감정과 마음, 사랑, 이타심에 관해 토론한다. 그들은 아기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은 신생아들 외에도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의 데이터를 대량으로 수집했다. 나이대별로 아이들의 말소리를 정렬했다. 겉으로 들리는 ‘엄마,’ ‘아빠,’ ‘저거 줘’ 같은 소리 이면에 혹시 그들의 대화가 여전히 숨어 있을까.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아이들의 표면적인 의사표현과 그들의 대화가 혼합되어 나타났다. 하지만 오직 일곱 살까지만 그랬다. 세 살 이후로 그들의 대화로 추정되는 패턴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각 이동마다 차이가 존재하지만 대략 일곱 살 전후로는 패턴이 사라졌다. 그 괴상한 대화는 아이들이 자기표현을 완벽하게 하기 전까지만 존재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들’이 모습을 완전히 감추는 것처럼 보였다.
수빈은 그들에 대해 생각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 아직 ‘그들’에 대한 가설을 아는 것은 수빈과 한나뿐이었다. 미분석 데이터를 처리하며 그들에 관한 새로운 단서를 찾았다. 다른 팀 연구원들은 날이 갈수록 초췌해져가는 두 사람을 걱정했다. 실패하더라도 어쩔 수 없고, 과학 연구란 원래 시행착오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는 위로까지 전해 들었다.
수빈은 끝까지 해석 오류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더 많은 데이터를 분석할수록 오직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분석은 정확했고, 아기들의 머릿속에는 ‘그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어떻게 모든 아기들의 뇌 속에 자리 잡았다가 떠나는 것인가? 그들의 존재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는 무엇인가?
“상자 속의 아이들.”
며칠 뒤 소파에 늘어져 있던 수빈이 말했다.
“네?”
한나는 꾸벅꾸벅 졸다가 고개를 들었다.
“몇 년 전에 말야. 보육자의 접촉이 아기에게 필수적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이 있었어. 기억나?”
그제야 한나도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눈을 크게 떴다.
“맞아요. 그, 보육 로봇을 이용한 육아 실험…….”
“그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
“어떻게요?”
상자 속의 아이들 실험은 로봇만으로 아이들을 키워도 괜찮을지를 증명하려는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신생아들을 태어날 때부터 바깥 세계와 완전히 격리해서 자라게 하고, 오직 보육 로봇만을 이용해서 아기들을 키우는 실험이었다. 그 외의 모든 양육 환경은 잘 통제되었다. 말하자면 거대한 인큐베이터에서 아기들을 좀 더 오래 기르는 것과 비슷했다. 연구진은 실험이 결코 아기들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엄격하게 통제할 것을 전제로 당국의 허가를 받았다고 밝혔지만, 실험 윤리에 대한 논란이 컸다. 실험 결과가 밝혀지자 연구는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고 큰 비난을 받았다.
“결과가 아주 엉망진창이었지.”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요. 아기들은 보육 로봇에게서 길러지는 동안 오직 욕구만을 위해 행동했고, 인간성이나 선한 성향이 전혀 발달하지 않았다고요. 다행히도 상자 밖에서 자라면서 괜찮아졌지만요.”
“맞아. 그런 실험을 해선 안 됐지. 하지만 그 실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수빈은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보육 로봇은 인간 보육자를 완벽하게 재현하거든. 근데 단지 보육자가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 아이들의 성향이 그렇게까지 달라진다고? 난 항상 그 실험 결과가 의심스러웠어. 인간 보육자야말로 감정과 상황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는 불완전한 보육자란 말야. 그런데 만약, 그렇게 된 결과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만약에 뇌 속의 ‘그들’이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되는 것이라면 어떨까? 마치 기생충이나 미생물이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전염되듯 말이다. 그들은 공기 중에 분포해 있거나, 바이러스처럼 환경에 널리 퍼져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감염을 위한 최초의 접촉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기에 상자 속의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그들’을 받아들일 기회가 없었던 것이라면?
한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영상이 남아 있을 거예요. 그 아기들의 울음을 분석해 봐요.”
온라인에서 영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댓글란에는 어떻게 이런 잔인한 실험을 아기들에게 할 수 있냐는 비난이 잔뜩 달려 있었다. ‘아기들을 로봇에게 맡기다니, 끔찍한!’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사람의 손길이 필요해요. 이 불쌍한 아이들이 피도 눈물도 모르는 존재로 자란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에요!’
그러나 중요한 건 인간 보육자의 유무가 아닐 수도 있다. 인간 보육자가 아니라 ‘그들’이 아기들을 피와 눈물이 있는 존재로 키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특성은 인간 밖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빈은 그 증거를 확인하려 하고 있었다.
수빈은 영상에서 소리 데이터를 추출해서 전환기에 넣었다. 그냥 듣기에는 다른 평범한 아기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울음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유무가 아기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여기서는 다른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들의 대화가 아닌 아기들의 욕구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은 긴장된 얼굴로 결과를 기다렸다.
곧 의미 분석 프로그램이 실행되기 시작했다. 1차 결과는 추상적인 의미 단위에 가까웠다. 아직은 해석할 수 없었다.
한나는 떨리는 손으로 기계에 손을 올렸다. 버튼을 누르자, 의미 단위가 문장으로 변환되었다. 결과가 화면에 나타났다.
영상 속 아기들의 울음이 가진 의미였다.
‘배고파’
‘졸려’
‘무서워’
수빈과 한나는 흥분해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이 괴이한 결과에 경악해야 할까?
상자 속의 아기들이 떠올린 것은 생각이 아니었다. 순수한 욕구였다. 사람들이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 기대하는 그대로였다. 태어난 이후로 외부 세계와 전혀 접촉하지 않은 아기들은, 아마도 ‘그들’을 뇌 속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아기들은 처음 기대했던 아기들의 뇌 패턴을 보이고 있었다. 아직 언어를 습득하기 전, 세계와 삶에 대한 생각을 시작하기 전, 생존을 위한 욕구만 존재하는 사고 패턴을.
그러나 수빈은 다음에 일어난 일 역시 알고 있었다. 그 아기들은 사람들이 기대한 대로 성장하지 않았다.
상자 속의 아기들은 이타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 * *
아주 이상한 가정 하나를 해보자.
수만 년 전부터 인류와 공생해온 어떤 이질적인 존재들이 있다고 말이다.
미토콘드리아가 세포 내로 들어와 핵과 별도로 DNA를 가진 채로 수십억 년의 공생을 시작한 것처럼, 별개로 출발한 두 종이 서로의 이득을 위해 공생하는 일은 흔하다. 인간은 수많은 체내 미생물과도 공생한다. 사람들은 외부에서 유래한 그들을 이질적 타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인간의 일부이다.
하지만 만약 공생의 대상이 지구상의 생물이 아니라면 어떨까? 지구에서도 유래하지 않은 것, 수만 년 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에 지구 밖의 어느 행성에서 온 것이라면. 그것이 우리의 뇌에 자리 잡았고, 우리의 유년기를 지배했고, 우리를 윤리적 주체로 가르쳐왔다면. 인간을 비인간동물과 구분하는 명백한 특질들이 사실은 인간 밖에서 온 것들이라면.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이었군요.”
수빈의 각설을 들은 연구팀장이 말했다.
연구원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아기들의 대화 분석 내용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재미있게 듣긴 했지만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딱 잘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 급진적이에요. 누구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겁니다.”
“못 믿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한나가 말했다.
“하지만 데이터를 부인할 수는 없잖아요?”
수빈은 아기들의 뇌 속을 당장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들을 관찰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그들의 물리적 실체가 존재할까? 그들은 어떤 입자로 이루어져 있을까? 당장은 검증이 어려웠다. 지금 조사하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뇌인데다가, 대상의 물질적 특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뇌만 살펴본다고 바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만약 그게 가능했더라면, 이 연구실에서 그들의 존재를 알아내기 전에 이미 의학계에서 모든 유아의 뇌에 기생하는 생물이 보고되었을 것이다.
“물리적으로 관찰되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관찰 가능한 형태의 외견을 가졌다면 그동안 긴 해부의 역사에서 이미 발견되었을 거예요.”
수빈은 팀장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들여다볼 뇌 샘플이 있다면 온종일이라도 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생각해야 할 문제는 많았다. 공생 관계의 생물들은 서로에게 이득을 주기도 하지만, 일방적으로 이득을 얻거나 한쪽 종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인간과 그들의 관계는 어느 쪽일까? 인간 아닌 무언가가 유년기 인간의 뇌에 기생한다면 그들이 얻는 이득은 무엇일까? 그들은 인간과 같은 탄소생명체일까? 그들의 대화로 추정되는 것처럼 정말로 그들이 아기들에게 윤리와 이타성을 가르친다면 그들은 그 대가로 인간에게서 무엇을 가져갈까? 다른 생물이 아닌 인간의 뇌에 자리 잡은 이유가 있을까?
“저는 그게 류드밀라의 행성과 관련이 있다고 봐요.”
한나가 말했다.
“그들은 류드밀라의 행성을 고향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행성은 이미 오래전에 불타버렸죠. 그들은 고향을 떠나 살 곳을 찾아 헤매다 지구로 오게 된 것 아닐까요? 류드밀라의 행성은 그들의 존재를 알린 결정적 단서였다. 정확히는 실제로 우주 어딘가에 있었고 지금은 사라진, 류드밀라가 생생히 묘사했던, 한때 그들의 터전이기도 했던 행성 말이다.
그들이 인간을 가르칠 만큼 발달한 지성 생명체라면 아마 그들은 자신들 행성의 종말을 미리 예측했을지도 모른다. 모행성을 떠난 그들이 우주를 떠돌다 우연히 지구에 도착하면서, 그들과 인류의 공생이 시작된 것이다.
수빈이 말했다.
“대화에 따르면 그들은 고도의 지성 생명체입니다. 우리 인간의 언어로 그들의 대화를 옮기는 것이 그 대화를 원래보다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예요. 그들이 인간을 압도적으로 넘어서는 존재일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인간의 뇌 활성 패턴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어요. 지성 활동을 위해 숙주가 필요한 종류의 생명체일지도 몰라요. 다른 생물이 아닌 인간의 뇌가 필요했던 이유이겠죠. 만약 그들이 정말로 수만 년 전에 지구에 도착한 것이 사실이라면……. 인간 지성의 진화와 문명의 탄생은 그들과의 공생을 통해 촉발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을 가르칠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공생 과정에서 그들의 지성이 인간에게 전이되었을 거예요.”
모두 짧은 침묵에 잠겼다. 그들과의 공생이 그렇게 오랜 기간 이어져왔다면, 이 연구실 밖에서도 증거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수빈은 어쩌면 공생 가설의 증거가 인류 사회 전체에 편재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직접 말을 걸어보면 어떨까?”
누군가 제안했다. 수빈 역시 같은 의견을 내려고 했고, 다른 연구원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뜻 실행할 수는 없었다. 지금 연구팀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서 얻은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과 직접 그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일은 완전히 다르다. 특히 그 대화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예상할 수 없을 때는, 대화를 거는 행위가 그들을 자극하게 된다면? 자신들의 존재를 인류에게 숨기고 살아왔던 그들이 인간이 직접 말을 걸어오면 달가워할까? 섣불리 말을 걸었다가 피험자에게 위해를 끼치기라도 한다면?
“그런데, 지금 우리 뇌 속에는 없는 거 맞죠?”
비슷한 걱정을 했던지 누군가가 그렇게 물었다. 수빈은 그들에게 직접 말을 거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들의 고향이 정말로 류드밀라의 행성이라면, 아기들에게 류드밀라의 회화 작품이나 시뮬레이션을 보여주는 행위가 특정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애초에 아기들이 행성을 보며 했던 생각의 패턴들이 최초의 단서가 된 셈이니, 위험성도 없었다. 그 데이터를 대량으로 수집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정보를 더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예상대로예요. 엄청난…… 정말로 엄청난 뇌 패턴의 활성 정도가 보여요. 그리고 평소보다 너무나 활발하게 움직여서 오히려 분석이 제대로 안 될 정도예요.”
한나의 말 그대로였다. 류드밀라의 행성을 본 아기들은 아기답지 않게 무척 조용해졌고, 움직이는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패턴을 보았을 때 실제로 열광하는 것은 아기들 뇌 속의 ‘그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뇌 속에서 폭발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보통 때의 대화보다 훨씬 빠르고, 복잡하며 여러 의미가 섞여 있었다. 너무 많은 정보가 혼재되어 있어 분석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류드밀라의 행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보였다.
연구팀은 이 연구 결과를 대중에게 공표해야 할지에 관해 토론했다.
“우리가 숨기더라도 사람들은 언젠가 이들의 존재를 알아낼 거예요. 범용 통역기는 누구나 욕심내는 기술이고 그걸 아기들에게 시도해보는 연구팀이 우리뿐일 리는 없어요.”
한나가 말했다.
“설령 사람들이 외계 생명체의 존재에 거부감을 느끼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을지 몰라요. 아기들의 뇌에서 그들을 쫓아내는 게 가능할까요?”
“이 분석 결과를 보면 우리가 그들에게 함께 살아달라고 빌어야 할 것 같은데. 그들이 떠나면, 우리는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특성들을 잃게 되니까.”
“과연 인류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할지 궁금하군요.”
“그런데 여전히 이 결과를 믿기 힘든 건 지금의 우리가 그들과 완전히 분리된 존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만약 그런 지성 생명체가 정말로 우리의 뇌 속에 있었다면, 어른이 된 지금의 우리에게도 무언가 남아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누군가 중요한 의문을 제시했다. 그들이 인간의 뇌 속에 서식하며 영향을 미친다면, 성인이 된 뇌에도 그들이 머물렀던 흔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의 뇌에서는 그들의 대화와 유사한 패턴이 전혀 검출되지 않는다. 듣고만 있던 팀장이 조심스레 한 가지 가정을 더했다.
“추측이지만, 유년기 이상으로 성장한 인간에게 머무르는 것은 그들에게 부담을 주는 듯합니다. ‘떠나고 싶지 않지만 이제는 떠나야 한다’라는 의미의 대화가 몇 군데 있었어요.”
마침 데이터를 보고 있던 수빈은 차트에서 한 지점을 짚었다.
“저는 이 시점이 좀 마음에 걸려요. 만약 그들이 우리를 완전히 떠나는 게 사실이라면, 일곱 살 때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데이터는 일관적이에요. 일곱 살 이하의 아이들만이 아주 희미하게라도 그들의 패턴을 나타내죠. 그 이후에는 전혀 없고요.”
일곱 살 전후로 표현 분석 결과에서 그들의 대화는 완전히 사라진다. 성장한 어린이들에게서는 성인과 마찬가지로 사고-표현이 완전히 일치한다. ‘그들’은 인간의 유년기에만 뇌 속에 자리 잡고 있다가 일곱 살의 아이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나는 것 같았다.
“혹시, 유년기 기억 상실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일곱 살 이후로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대부분 잊어버리잖아요.”
한나가 말했다.
“그동안은 해마가 장기 기억에 관여하고, 어린아이들의 기억이 상실되는 것은 그 해마의 발달과 관련되어 있다는 게 정설이었죠. 새로운 신경 조직들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어릴 적의 기억은 사라져버린다고요.”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 특히 자전적 사건에 관한 기억들은 일곱 살을 기점으로 대부분 사라진다. 신생아 때의 일이나 세 살 무렵의 사건을 기억하는 어른은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과거 사진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회상을 듣고 당시를 기억하는 것처럼 느낄 뿐이다.
“그런데 얼마 전 제가 인상 깊게 본 논문 하나가 있어요. 신경과학 저널에 실린 짧은 리포트예요. 그 신경 발달 가설을 뒤집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는 주장이었죠. 유년기 기억 상실을 겪는 연령대의 아이들을 새로운 이미징 기술로 분석했을 때, 신경 발달 단계와 기억의 상실 정도가 전혀 일치하지 않았던 거예요. 통계적으로 완전히 무관했죠.”
한나가 설명하는 동안 연구원들은 논문을 찾아 화면에 띄웠다.
“저자들은 유년기 기억 상실에 다른 외부 요인이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주장했는데 아주 혼란스러워 보였어요. 굉장히 논쟁적이었어요. 반박하는 논문이 곧장 쏟아져 나왔고요. 하지만 만약 정말로 신경 발달의 문제가 아니라면 유년기의 기억이 외부 요인에 의해서 상실되는 것이라면 그건 대체 뭘까, 무엇이 아이들의 기억을 데려가는 걸까. 계속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이유가…….”
“그들”
수빈이 말했다.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기억과 함께 우리를 떠나는 거야.”
* * *
류드밀라의 존재는 이 가설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이었다.
류드밀라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유일하게 그들의 존재를 자각한 사람이다. 류드밀라가 행성 연작을 본격적으로 작업하기 시작한 건 유년기 이후였다. 그들은 류드밀라가 성장한 이후에도 그녀를 떠나지 않았고, 그녀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 것인지도 모른다. 류드밀라가 죽을 때까지 행성의 풍경을 그려냈고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뇌 속에 있는 그들을 분명하게 인식했거나, 혹은 그들의 기억이 류드밀라에게 완전히 전이되었음을 뜻한다.
“모든 지구인들에게 그들이 머물렀지만 오직 류드밀라만이 그 행성의 존재를 알았으니까요.”
연구팀은 류드밀라 마르코프의 생애를 조사했다. 명성에 비해 남겨진 이야기는 적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류드밀라의 삶이 고독했다는 것이다.
“류드밀라는 아주 어릴 때부터 창작에 두각을 드러냈죠. 섬세하고 예민했을 거예요. 내면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였을 것이고요. 류드밀라는 아마 그들의 존재를 아주 일찍부터 알아차린 걸지도 몰라요. 심지어 어릴 때는 류드밀라를 돌보아줄 사람조차 없는 환경이었으니…… 그들이 류드밀라를 더 특별히 보살핀 것인지도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류드밀라는 뇌 속에 자리 잡은 그들이 보여주는 풍경을 옮겨 그렸을 것이다. 풍경뿐만 아니라 그들이 기억하는 행성 자체가 류드밀라의 머릿속에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류드밀라는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그녀는 정말로 행성에 가보았던 셈이다. 류드밀라의 머릿속에 살았던 그들을 통해서.
수빈이 말했다.
“류드밀라가 행성에 관한 그림을 남김으로써 그들과 그 행성을 더욱 분명히 기억하게 된 게 아닐까요. 그들의 기억을 재현하는 운동적 기억이 행성에 대한 삽화적 기억에도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해요. 두 종류의 기억은 기본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한 종류의 기억이 다른 기억과 연계되기도 하니까요.”
“그들이 기억과 함께 유년기의 인간에게서 떠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인류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기를 조심스러워하는 듯한데요. 그럼에도 류드밀라가 행성을 그림으로 재현하는 것을 막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가 살펴본 대화에 따르면, 그들은 류드밀라가 그리는 행성을 아주 특별하게 생각했어요. 그들도 자신들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사랑했을 테니까요.”
수빈이 말했다. 일순간 연구실이 조용해졌다.
만약 수만 년 전 사라진 행성에서 이곳 지구로 온 존재들이 여전히 고향 행성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리워한다면. 모든 지구인들이 언젠가 그들의 행성을 잊게 되더라도 류드밀라만큼은 그 행성을 기억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행성을 선명하고 아름답게 재현해내는 데에 성공했던 단 한 사람. 수만 년 전 존재했을 어떤 행성…….
이제 연구팀은 마지막 질문에 도달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류드밀라의 세계에 열광하고 환호했을까. 왜 사람들은 류드밀라의 세계를 보며 눈물을 흘렸을까. 왜 사람들은 그녀의 그림에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세계에 대한 향수를, 오래된 그리움을 느꼈을까. 인류 역사상 수많은 가상 세계가 창조되었지만 왜 오직 류드밀라의 행성만이 독보적이고 강렬한 흔적을 세계 곳곳에 남겼을까.
“우리에게 그들이 머물렀기 때문이겠죠.”
한나가 말했다.
수빈은 그것이 그들의 존재에 대한 결정적 증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뇌에 자리 잡은 그들의 흔적. 막연하고 추상적이지만 끝내 지워버릴 수 없는 기억. 우리를 가르치고 돌보았던 존재들에 관한 희미한 그리움.
류드밀라의 행성을 보며 사람들이 그리워한 것은 행성 그 자체가 아니라 유년기에 우리를 떠난 그들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수빈이 말했다.
“그 연작 말인데요. 다들 기억하시나요? 류드밀라의 또 다른 연작이 있었잖아요.”
“나를 떠나지 말아요. 나는 그 연작도 좋아했어. 행성 연작에 비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연구팀장이 말했다.
“네. 그런 제목이었죠.”
여전히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그 연작은, 류드밀라의 일생에 관한 가장 중요한 단서일 것이라는 생각이 수빈에게 떠올랐다.
“그건 류드밀라의 부탁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부탁?”
“그들의 존재를 유일하게 알아차린 류드밀라가…….”
수빈은 어딘가 벅찬 기분이 되었다.
“그들에게 이야기한 거죠. 연작의 제목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연작들이 일관적으로 그려내는 애틋함과 슬픔, 외로움의 정서도요. 혼자이고 고독했던 류드밀라는 그들의 존재가 간절했을 겁니다. 그들은 류드밀라의 유일한 친구였고, 부모였고, 동료였겠죠.”
류드밀라는 그들에게 말한 것이다. 떠나지 말라고. 그 아름다운 세계를 가져가지 말라고. 자란 다음에도 계속 곁에 머물러달라고.
연구실은 짧은 정적에 잠겨 들었다.
한나가 중얼거렸다.
“그들은 류드밀라를 끝까지 떠나지 않았던 거예요.”
그때 그 장소에 있었던 모두는 같은 풍경을 생각했을 것이다. 류드밀라가 그렸던 행성. 푸르고 묘한 색채의 세계. 인간과 수만 년간 공생해온 어떤 존재들이 살았던 오래된 고향을.
수빈은 순간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고 느낀 적 없는 무언가가 아주 그리워지는 감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