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연연(所緣緣)을 타파한다.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진실하고 미묘한 법 |
연(緣)이 없는 이 법에 어떻게 소연연이 있겠는가?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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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대승의 법들은, 유색(有色)ㆍ무색(無色)ㆍ무형(無形)ㆍ유형(有形)ㆍ유루(有漏)ㆍ무루(無漏)ㆍ유위(有爲)ㆍ무위(無爲) 등의 모든 법상(法相)들은 법성(法性)으로 들어간다. 모든 것은 다 공하며 상(相)이 없고 연(緣)이 없다. 비유하면 뭇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 다같이 한 맛이 되는 것과 같다.” |
진실한 법을 믿어야 하고, 방편의 말을 진실한 법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소연연이 있지 않다. |
증상연을 타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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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은 자성이 없으므로 있음[有相]이 없네. |
“이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고 하는 말은 옳지 않네.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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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에서 12연기(緣起)를 말할 때 “이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은 여러 연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자체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다. 자체에 확정된 자성이 없으므로 있음[有相]이 없다. 있음이 없는데 어떻게 이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증상연이 있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범부를 따라서 있다 또는 없다고 분별해서 말씀하실 따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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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일반 속에서도, 각각의 연 속에서도 결과를 구할 수 없네. |
연(緣)에 없는데 어떻게 연에서 나오겠는가?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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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연 일반 속에서…’란 구별하지 않은 연 일반 속에 결과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각각의 연 속에서도…’란 하나하나의 연 속에도 결과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연 일반 속에도 각각의 연 속에도 결과가 없는데 어떻게 결과가 연에서 나온다 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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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187] 쪽 |
연(緣)에 결과가 없는데도 연에서 나온다 한다면 |
이 결과가 어떻게 연 아닌 것에선 나오지 않겠는가?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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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연에서 결과를 구할 수 없는데 (연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왜 연 아닌 것에선 나오지 않는가? 예를 들어 진흙에 물단지가 없는데 (진흙에서 물단지가 나온다고 한다면), 왜 우유에선 나오지 않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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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결과가 연(緣)에서 발생한다면 이 연은 자성이 없는 것이네. |
자성이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연에서 발생할 수 있겠는가?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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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연(緣)에서 발생하지도 않으며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도 않네. |
결과가 있지 않으니 연과 연 아닌 것 또한 있지 않네.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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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결과가 연에서 발생한다면 이 연은 자성이 없는 것이다. 만일 자성이 없다면 없는 것[無法]인데, 없는 것이 무엇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도 않는다’란, 연이 부정되었기 때문에 연 아닌 것이라 말한다. 연 아닌 법은 실제로는 없다. 그러므로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그 둘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결과가 없는 것이다. 결과가 없으니 연도 연 아닌 것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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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觀去來品] 25偈 |
[문] 세간에서는 눈으로 이미 간 것[已去]ㆍ아직 가지 않은 것[未去]ㆍ지금 가고 있는 것[去時]의 3시(時)의 지음[作]이 있음을 본다. 지음이 있으니 법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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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이미 간 것에 감이 없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감이 없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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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187] 쪽 |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없네. (1) |
이미 간 것에는 감이 없다. 이미 갔기 때문이다. 만일 감[去]이 없이 감[去業]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감이 없다.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가고 있는 것이란 반은 이미 간 것이고 반은 아직 가지 않은 것이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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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이 있는 곳에 감이 있네. 이것에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네. |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없네. 그러므로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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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거동[作業]이 있는 곳마다 감이 있다.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거동이 있음을 눈으로 본다. 이미 간 것에는 거동이 이미 사라져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거동이 아직 없다. 그러므로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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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지금 가고 있는 것에 어떻게 감이 있겠는가? |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는데.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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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마치 그릇 속에 과일이 담겨 있는 것처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는 것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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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는 과실이 있네. 지금 가고 있는 것만에 감이 있기 때문이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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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187] 쪽 |
또 만일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감이 없고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실재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과실이 있다. 만일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지[因待] 않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둘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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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면 두 가지의 감이 있게 되네. |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의 감이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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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두 가지 감이 있다라는 과실이 있게 된다. 두 가지 감이란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의 감이다. |
[문] 만일 두 가지 감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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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일 두 가지 감이 있다면 두 가는 이가 있게 되네. |
가는 이 없이 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네.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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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두 가지 감이 있다면 두 가는 이가 있게 된다. 왜 그러한가? 감이 있어야 가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두 감이 있고 그래서 두 가는 이가 있게 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지금 가고 있는 것에도 감이 없다. |
[문] 가는 이 없이 감이 있지 않다는 것은 그럴 수 있다. 이제 3시(時)12)에 가는 이가 확정되어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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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가는 이 없이 감이 있다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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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앞에서 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ㆍ지금 가고 있는 것이라고 한, 과거세ㆍ 미래세ㆍ현재세를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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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있지 않은데 어떻게 가는 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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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이가 없다면 감을 얻을 수 없다. 이제 감이 없는데 어떻게 3시(時)에 가는 이가 확정되어 존재한다고 말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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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이는 가지 않네. 가지 않은 이도 가지 않네. |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의 제3의 가는 자는 있지 않네.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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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가는 이는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가는 이가 있다면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가는 이 또는 가지 않는 이이다. 이 둘 이외의 제3의 가는 자는 있지 않다. |
[문] 만일 가는 이가 간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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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가는 이가 간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는가? |
감이 없이 가는 이는 얻을 수 없는데.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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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가는 이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어서 이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감이 없이는 가는 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는 이가 없는데 감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면 가는 이가 따로 있어서 가는 작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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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가는 이에게 감이 있다면 두 가지의 감이 있을 것이니 |
하나는 가는 이의 감이고 다른 하나는 감의 감이네.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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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의 과실이 있다. 가는 이는 하나인데 두 가지 감이 있게 된다. 하나는 가는 이에게 성립하고 있는 감이고, 다른 하나는 감에 성립하고 있는 가는 이이다. 가는 이가 성립하고 난 후에 가는 작용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앞의 “3시(時)에 가는 이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이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는 것” 이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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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187] 쪽 |
은 옳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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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가는 이가 간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있다는 |
과실이 있네. 가는 이에게 감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네.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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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어떤 사람이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있다는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먼저 가는 이가 있고 후에 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옳지 않다. 그러므로 3시(時)에 가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
또 만일 확실하게 결정되어 감이 존재하고 가는 이가 존재한다면 최초의 시작[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3시에서 시작을 구한다 해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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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간 것에는 시작이 없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시작이 없네. |
지금 가고 있는 것에는 시작이 없네. 어느 곳에서 시작이 있겠는가?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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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한가? 3시에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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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때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없고 이미 간 것도 없네. |
이 둘에 시작이 있을 것이니,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어찌 시작이 있겠는가?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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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간 것이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이 없고, 지금 가고 있는 것도 없네. |
모든 것에 시작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분별하는가?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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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187] 쪽 |
만일 어떤 사람이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없으며 이미 간 것도 없다.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이나 이미 간 것 두 곳에 시작이 있다고 한다면, 둘 모두 옳지 않다. 아직 가지 않았을 때는 아직 시작이 있지 않는데,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어찌 시작이 있겠는가? 시작이 없으니 감이 없고 감이 없으니 가는 이가 없는데 어찌 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ㆍ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
[문] 만약 감이 있지 않고 가는 이가 있지 않을지라도 마땅히 머묾과 머무는 이는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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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가는 이는 머물지 않네. 가지 않는 이도 머물지 않네. |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에 어찌 제3자가 머무는 일이 있겠는가?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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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머묾이 있고 머무는 이가 있다면, 가는 이가 머물거나 가지 않는 이가 머무는 것일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한다면 마땅히 제3자가 머무는 것이겠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가고 있는 이는 머물지 않는다. 감이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감의 특징[去相]과 모순되는 것을 머묾이라 이름한다. 가지 않는 이도 머물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감이 소멸했을 때 머묾이 있는 것인데 감이 있지 않다면 아예 머묾이 있지 않다.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의 제3의 머무는 이는 있을 수 없다. 만일 제3의 머무는 이가 있다면 가는 이나 가지 않는 이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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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이가 머문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는가? |
감이 없이는 가는 이를 얻을 수 없는데.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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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감이 없이는 가는 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는 이에게 감의 특징이 있는데 어찌 머묾이 있겠는가? 감과 머묾은 모순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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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187] 쪽 |
이미 간 것이나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머묾이 있지 않네. 지금 가고 있는 것에도 머묾이 있지 않네. |
행(行)과 지(止)의 법도 모두 감의 이치와 동일하네.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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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지금 가고 있는 것이거나 이미 간 것이거나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있으면서 머무는 것이리라. 세 곳 모두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감과 머묾이 타파되었듯이 행(行)과 지(止)도 타파될 것이다. 행(行)이란 이를테면 곡식의 씨로부터 상속(相續)해서 싹ㆍ줄기ㆍ잎 따위에 이르는 것과 같으며, 지(止)란 곡식의 씨가 소멸해서 싹ㆍ줄기ㆍ잎 따위가 소멸하는 것과 같다. 상속되기에 행(行)이라 이름하고 단절되기에 지(止)라 이름한다. 또 이를테면 무명을 연(緣)해서 모든 행(行)이 있고 나아가 발생을 연해서 노사(老死)가 있는 것을 행(行)이라 하고, 무명이 멸하기에 모든 행(行)이 멸하고 하는 따위를 지(止)라고 하는 것과 같다. |
[문] 그대가 갖가지 문(門)을 세워서 감과 가는 이, 머묾과 머무는 이를 타파하긴 했지만 감과 머묾의 있음이 눈에 보인다. |
[답] 눈에 보이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만일 감과 가는 이가 실재한다면 하나의 법(法)으로 성립하는가, 두 가지 법(法)으로 성립하는가? |
둘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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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곧 가는 이라면 이것은 옳지 않네. |
감이 가는 이와 다르다면 이것도 옳지 않네.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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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감이 가는 이와 같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다르다고 해도 옳지 않다. |
[문] 같다고 하거나 다르다고 하는 것에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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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감이 곧 가는 이라고 한다면 |
행위자와 행위 이것들이 하나가 될 것이네.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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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187] 쪽 |
감이 가는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
가는 이 없이 감이 있고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있는 것이네.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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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두 가지는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만일 감이 곧 가는 이라면, 이것은 착란(錯亂)된 것이니 인(因)과 연(緣)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된다. 감에 의존해서 가는 이가 있고, 가는 이를 의존해서 감이 있다. 또 감을 법(法)이라 이름하고 가는 이를 인(人)이라 한다. 인(人)은 상주하는 것이고 법(法)은 무상한 것이다. 만일 같다면, 두 가지 모두가 상주하는 것이 되거나 두 가지 모두가 무상한 것이 된다. 같다고 하는 것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만일 다르다면, 서로 배척하는 것이 된다. 감이 아직 있지 않아도 가는 이가 있을 것이고, 가는 이가 아직 있지 않아도 감이 있을 것이다. 서로 의존하지[因待] 않으니 하나의 법이 멸하더라도 하나의 법은 남아 있을 것이다. 다르다고 하는 것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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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과 가는 이 이 둘이 만일 같은 법으로 성립한다거나 다른 법으로 성립한다고 한다면 |
두 문(門)이 모두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성립하는 일이 있겠는가?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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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가는 이와 감이 같은 법으로나 다른 법으로 성립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두 가지 모두 얻을 수 없다. 앞에서 이미 제3의 법이 성립하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만일 성립하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면, 감과 가는 이가 없는 인연을 말하는 셈이 된다. |
이제 다시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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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 가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네. |
이전에 감이 있는 것이 아니니 가는 이와 감이 있지 않네.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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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187] 쪽 |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 가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 감이 아직 있지 않을 때는 가는 이가 없으며, 또한 지금 가고 있는 것ㆍ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과 성읍(城邑)이 먼저 있고 그리고 나서 사람이 성읍으로 가는 것처럼 그렇게 감과 가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가는 이는 감에 의존해서 성립하고 감은 가는 이에 의존해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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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와) 다른 감을 쓰지 않네. |
나의 가는 이에게서 두 가지 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네.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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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와) 다른 감을 쓰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나의 가는 이에게서 두 가지 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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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하는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 |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도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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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 |
그러니 감이나 가는 이, 갈 곳이 모두 없네.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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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하는 가는 이’에서, ‘실재하는[決定有]’이란 실제로 존재한다는[本實有]것으로 감에 의존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감’이란 몸의 움직임[身動]이다. ‘세 가지의 감’이란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이미 간 것과 지금 가고 있는 것이다. 만일 가는 이가 실재한다면,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존재할 것이고 머묾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에서 ‘실재하지 않는[不決定有]’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本實無]것을 의미한다. 감에 의존할 때 가는 이라 할 수 있는데, 감이 없으니 세 가지 가는 작용을 하지 |
않는다. 감에 의존해서 가는 이가 있는 것인데, 이전에 감이 없으니 가는 이가 없다. 어떻게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가 세 가지 가는 작용을 하겠는가? |
감도 가는 이의 경우와 같다. 만일 이전에 가는 이 없이 감이 실재한다면, 가는 이에 의존하지 않고 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 감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가는 이를 어디에 쓰겠는가? |
이렇게 사유(思惟)하고 관찰(觀察)해 보건대 감ㆍ가는 이ㆍ갈 곳 이 법들은 모두 서로 의존한다. 감에 의존해서 가는 이가 있고 가는 이에 의존해서 감이 있다. 이 두 법에 의존해서 갈 곳이 있는 것이니, 실재한다고 말해서 안 되고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세 가지 법(法)은 허망(虛妄)하고 공(空)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가명(假名)이 있을 뿐이어서 환영과 같고 변화(變化)와 같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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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근(根)을 관찰하는 장[觀六情品] 8偈 |
[문] 경전에서는 여섯 근(根)이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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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眼]ㆍ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ㆍ뜻[意] 등의 6정(情:根)이네. |
이 눈 등 여섯 근은 색(色) 등 여섯 경계에 작용하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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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 눈[眼]이 안[內]의 근(根)이 되고 색(色)이 바깥의 경계가 되어 눈이 색을 보고, 나아가 뜻[意]이 안의 근이 되고 법(法)이 바깥의 경계가 되어 뜻[意]이 법(法)을 능히 인식한다. |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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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눈은 자기를 볼 수 없네. |
자기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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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187] 쪽 |
이 눈은 자기를 볼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마치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또 다른 것을 비출 수 있듯이 그렇게 눈이 봄[見相]을 갖는 것이라면, 자기도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게송에서 ‘자기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
[문] 눈은 자기를 볼 수 없긴 하나 다른 것을 볼 수는 있다. 마치 불이 다른 것을 태울 수는 있으나 자기를 태우지는 못하는 것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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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불의 비유는 눈의 봄을 성립시키지 못하네. |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지금 가고 있는 것에서 이미 다 이것에 답했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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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불의 비유를 제시하긴 했지만 눈의 봄[見法]을 성립시키진 못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觀去來品]」에서 이미 답했다. 이미 간 것에 감이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에 감이 없고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없듯이, 이미 탄 것과 아직 타지 않은 것과 지금 타고 있는 것 모두에 태움(燒)이 없다. 이렇듯이 이미 본 것과 아직 보지 않은 것과 지금 보고 있는 것 모두에 봄[見相]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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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아직 보지 않았을 때라면 봄이라 하지 않네. |
그런데 봄이 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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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눈이 아직 색을 대하지 않았을 때는 보지 못하니, 그 때를 봄이라 할 수 없다. 색을 대함으로 인하여 봄이라 한다. 그래서 게송에서 ‘아직 보지 않았을 때라면 봄이라 하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봄이 볼 수 있겠는가? |
또 두 경우 모두 봄이 없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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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보지 않네. 보지 않음도 보지 않네. |
봄이 타파되었다면 보는 이도 타파된 것이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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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187] 쪽 |
봄은 보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과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보지 않음도 보지 않는다. 봄[見相]이 없기 때문이다. 봄[見相]이 없는데 어떻게 보겠는가? 봄[見法]이 없으니 보는 이도 없다. 왜 그러한가? 만약 봄[見]을 떠나서 보는 이가 있다면 눈이 없는 이가 다른 감관[根]으로 보는 것이리라. 만약 봄이 본다면 봄에 봄[見相]이 있는 것이니 보는 이에게는 봄[見相]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 “봄이 타파되었다면 보는 이도 타파된 것이네”라고 말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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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없어도 봄이 없지 않아도 보는 이를 얻을 수 없네. |
보이는 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봄과 봄의 대상이 있겠는가?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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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봄이 있다 해도 보는 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봄이 있지 않다 해도 보는 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보는 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봄과 봄의 대상[可見]이 있겠는가? 보는 이가 있지 않은데 누가 봄에 의해서 바깥의 색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게송에서 ‘보는 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봄과 봄의 대상이 있겠는가?’ 하고 말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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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봄의 대상이 있지 않으니 식(識) 등 네 법(法)이 있지 않네. |
4취(取) 등의 연(緣)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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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봄과 봄의 대상이 있지 않으니 식(識)ㆍ촉(觸)ㆍ수(受)ㆍ애(愛)의 네 법이 모두 있지 않다. 애(愛) 등이 있지 않으니 4취(取)13) 등 12연기의 분지(分枝)도 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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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 성(聲), 듣는 이[聞者] 등도 |
이와 같은 이치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모두 위에서 말한 바와 같네.(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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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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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187] 쪽 |
또 봄과 봄의 대상[可見]이 뭇 연(緣)에 귀속되기 때문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어 공(空)하듯이, 그 밖의 이(耳) 등의 다섯 근(根)이나 성(聲) 등의 다섯 경계[塵]도 봄이나 봄의 대상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치가 같기 때문에 별도로 설명하지 않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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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온(五蘊)을 관찰하는 장[觀五陰品] 9偈 |
[문] 경전에서는 5온(蘊)이 있다고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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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색(色)의 원인 없이 색을 얻을 수가 없네. |
색 없이 색의 원인을 얻을 수가 없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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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色)의 원인’이란 베[布]의 원인인 실과 같은 것이다. 실을 없애면 베가 없고 베를 없애면 실이 없다. 베는 색과 같고 실은 색의 원인과 같다. |
[문] 색의 원인 없이 색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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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색의 원인 없이 색이 있다면 이 색은 원인이 없는 것이네. |
원인이 없이 법(法)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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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실 없이 베가 있다면 이 베는 원인이 없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법(法)이 있는 일은 세간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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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불교의 법(法), 외도의 법, 세간의 법에 모두 원인이 없는 법이 있다. 불교의 법에는 세 무위(無爲)가 있다. 무위는 상주하는 것이므로 원인이 없는 것이다. 외도의 법에는 허공ㆍ시간ㆍ장소ㆍ신(神)14)ㆍ미진(微塵)15)ㆍ열반 따위가 있다. 세간의 법에는 허공ㆍ시간ㆍ장소 따위가 있다. 이 세 법(法)16)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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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아뜨만(ātman)은 보통 아(我)로 한역되는데 여기서는 신(神)으로 한역하고 있다. |
15) 극미(極微)라고도 한다. |
16) 앞에서 말한 불교의 법ㆍ외도의 법ㆍ세간의 법 등 세 가지를 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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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주하는 것이기에 원인이 없다. 그런데 그대는 무슨 까닭에 원인이 없는 법이 세간에 없다고 하는가? |
[답] 이 원인이 없는 법은 그저 언설(言說)이 있을 따름이다. 사유(思惟)해서 분별(分別)한 것은 모두 있지 않은 것이다. 만일 법이 인연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라면 원인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인연이 없다면 내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
[문] 두 종류의 원인이 있다. 하나는 발생의 원인[作因]이고 다른 하나는 언설의 원인[言說因]이다. 이 원인이 없는 법은 발생의 원인이 없고 단지 언설의 원인이 있을 따름이다. 사람들이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답] 언설의 원인이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허공은 「6계(界)를 관찰하는 장」에서 타파하는 바와 같다. 그 밖의 것들은 후에 논파할 것이다. 또 눈에 보이는 분명한 것도 모두 타파되는데 하물며 극미[微塵] 따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랴? 그러므로 원인이 없는 법은 세간에 없다. |
[문] 색 없이 색의 원인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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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일 색 없이 원인이 있다면 이것은 결과가 없는 원인이리라. |
만일 결과가 없는 원인을 말한다면 옳은 점이 없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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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라는 결과가 없이 오직 색의 원인만이 있다면 이것은 결과가 없는 원인이다. |
[문] 결과가 없이 원인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답] 결과가 없이 원인이 있는 일은 세간에 없다. 왜 그러한가? 결과가 있기에 원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만일 결과가 없다면 어떻게 원인이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또 만일 원인 속에 결과가 없다면 사물이 어떻게 원인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인과 연을 타파하는 장[破因緣品]17)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결과가 없이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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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미 색이 있다면 색의 원인을 쓰지 않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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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인과 연을 타파하는 장이란 「관인연품(觀因緣品)」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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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색이 있지 않다면 색의 원인을 쓰지 않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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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두 경우에 색의 원인이 있을 터인데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미리 있는 원인 속에 색이 있다면 색의 원인이라 하지 않는다. 만약 미리 있는 원인 속에 색이 있지 않다면 또한 색의 원인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
[문] 두 경우라면 모두 옳지 않다. 단지 원인이 없이 색이 있을 따름이다.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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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원인이 없이 색이 있다면 이것은 결코 옳지 않네. |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색을 분별하지 않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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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속에 (색이라는) 결과가 있다는 것이나 원인 속에 (색이라는) 결과가 있지 않다는 것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어떻게 원인이 없이 색이 있다는 것을 얻겠는가? 그러므로 원인이 없이 색이 있다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색을 분별하지 않는다. 분별하는 이를 범부라 이름한다. 무명과 탐욕[愛染]으로써 색을 탐착(貪著)하고 그런 후에 그릇된 봄[邪見]으로써 분별과 희론을 일으켜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거나 (원인 속에) 결과가 없다고 하는 따위를 말한다. 이제 이 중에서 색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라면 분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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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결과가 원인과 유사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
만일 결과가 원인과 유사하지 않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네.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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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결과와 원인이 서로 유사하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원인은 미세하고 결과는 거칠고 크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의 색은 힘 등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베가 실과 유사하다면 베라 이름할 수 없다. 실은 다(多)이고 베는 일(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지 않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예를 들어 삼[麻]의 실은 명주를 이루지 않듯이 거친 실은 미세한 베를 만들어 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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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두 주장 모두 이치에 맞지 않으니 색도 없고 색의 원인도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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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온[受蔭]ㆍ상온[想蔭]ㆍ행온[行蔭]ㆍ식온[識蔭] 등 |
여타의 모든 법은 다 색온[色蔭]과 동일하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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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네 온(蔭)과 모든 법도 이와 같이 사유해서 논파해야 한다. |
또 이제 논을 짓는 이는 공성의 이치를 찬미하고자 게송을 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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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어떤 자에게 묻는 자가 있을 때 (어떤 자가) 공성(空性)이 없이 답한다면 |
이것은 답이 되지 못하네. 모두 그가 의심하는 것과 같게 되네.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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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어떤 자가 논박하고자 할 때 공성(空性)이 없이 그 과실을 말한다면 |
이것은 논박이 되지 못하네. 모두 그가 의심하는 것과 같게 되네.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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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논쟁을 벌일 때는 제각기 주장하는 바가 있다. 공성(空性)의 이치가 없이 묻고 답한다면, 물음은 물음이 되지 못하고 답은 답이 되지 못해서 모두 (그들이) 의심하는 것이 되고 만다. 가령 어떤 자가 “물단지는 무상하다”고 말했을 때 묻는 자가 “무엇에 근거해서 무상하다고 하는가?” 했다고 하자. 이 물음에 “무상한 원인에서 생겼기 때문이다”고 답한다면 이것은 답이라 할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원인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되어 그것18)이 상주하는 것인지 무상한 것이지 알지 못한다. 이것19)은 그가 의심하는 것20)과 같게 된다. |
만일 묻는 자가 그 과실을 말하고자 할 때 공성에 의지해서 “모든 법은 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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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물단지를 가리킨다. |
19) “무상한 원인에서 생겼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 것을 말한다. |
20) ‘물단지는 무상하다’고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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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논박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대가 무상함에 의거해서 나의 상주함을 논파한다면, 나도 상주함에 의거해서 그대의 무상함을 다음과 같이 논파한다. |
“상주함이 없다면 업보가 없을 것이다. 눈[眼]ㆍ귀[耳] 등 법(法)들이 찰나찰나 소멸하기에 분별도 없을 것이다.” |
이와 같은 과실이 있기 때문에 모두 논박이 되지 못하고 그가 의심하는 것21)과 같게 된다. |
만일 공성(空性)에 의거해서 상주함을 논파한다면 과실이 없다. 왜 그러한가? 이 사람은 공성의 상(相)에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묻고 답하고자 한다면 공성[空法]에 의거해야 하는데 하물며 고(苦)가 없는 적멸[寂滅相]을 구하고자 하는 자에게 있어서이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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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계(界)를 관찰하는 장[觀六種品] 8偈 |
[문] 6계(界)에는 각각 확정된 상(相)이 있다. 확정된 상이 있기 때문에 6계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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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허공의 상(相)이 아직 있지 않을 때 허공은 없네. |
만약 미리 허공이 있다면 상(相)이 없는 것이 되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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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아직 허공의 상(相)이 있지 않은데 미리 허공이 있다면 허공은 상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색(色)이 없는 공간[處]이 허공의 상이기 때문이다. 색은 지어진 것[作法]이기에 무상하다. 만약 색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아직 발생하지 않았으니 소멸하지 않을 것이며 그 때에는 허공의 상이 없을 것이다. 색에 의존해서 색이 없는 공간이 있다. 색이 없는 공간을 허공의 상(相)이라 한다. |
[문] 만약 상(相)이 없이 허공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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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상주함을 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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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이 상(相)이 없는 법은 어떤 곳에도 있지 않네. |
상이 없는 법에 있어서 상은 상을 띠는 일[所相]이 없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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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상주하는 법(法)과 무상한 법 중에서 상(相)이 없는 법을 구한다면 얻을 수 없다. 논자가 말하는 바와 같은 이 유위와 무위가 어떻게 각각 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답한다.) 그러므로 발생과 머묾과 소멸은 유위(有爲)의 상이고, 발생과 머묾과 소멸의 없음은 무위(無爲)의 상이다. 만약 허공이 상이 없는 것이라면 허공은 있지 않다. |
만약 전에는 상이 없다가 후에 상이 와서 상이 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전에 상이 없다면 상을 띠게 하는 법[可相]이 없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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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相)을 갖는 것에도 상을 갖지 않는 것에도 상은 거주하지 않네. |
상을 갖는 것과 상을 갖지 않는 것을 떠난 다른 곳에도 거주하지 않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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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불룩 튀어나와 있는 것, 뿔이 있는 것, 꼬리 끝에 털이 나 있는 것, 목덜미가 축 늘어져 있는 것, 이것들이 소의 상(相)이다. 이 상들을 떠나서 소는 있지 않다. 만약 소가 있지 않다면 이 상들이 거주할 곳이 없다. 그러므로 상을 갖지 않는 법에서 상은 상을 띠는 일이 없다. 상을 갖는 법에도 상은 거주하지 않는다. 미리 상이 있기 때문이다. 물[水相]에 불의 상은 거주하지 않는다. 미리 자기의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또 상을 갖지 않는 법에 상이 거주한다고 한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원인이 없는 것을 무[無法]라 한다. 상을 갖는 것[有相]과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은 항상 서로 의존[因待]하기 때문이다. 상을 갖는 것과 상을 갖지 않는 것을 떠나 다시 제3의 장소에서 상을 띠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게송에서 “상을 갖는 것과 상을 갖지 않는 것을 떠난 다른 곳에도 거주하지 않네” 하고 말한 것이다. |
상[相法]이 있지 않으니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法]도 있지 않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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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띠게 하는 것이 있지 않으니 상도 있지 않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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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상이 거주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法]이 없다. 상을 띠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상도 없다. 왜 그러한가? 상에 의존해서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이 있고 상을 띠게 하는 것에 의존해서 상이 있다.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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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제 상이 있지 않고 상을 띠게 하는 것도 있지 않네. |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을 떠나 다시 사물[物]이 있지 않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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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 연들 속에서 처음에서 끝까지 구해 보아도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의 확정을 얻을 수 없다. 이 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법들은 다 있지 않다. 모든 법들은 다 상과 상을 띠게 하는 두 법에 포함된다. 어떤 때는 상(相)이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이 되고 어떤 때는 상을 띠게 하는 것이 상이 된다. 예를 들어 연기가 불의 상이 되고 다시 불이 연기의 상이 되는 경우와 같다. |
[문] 유(有)가 있지 않다면 무(無)는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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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유(有)가 없다면 어떻게 무(無)가 있겠는가? |
유와 무가 이미 없으니 유와 무를 아는 자는 누구인가?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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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사물[物]이 스스로 괴멸했거나 다른 것에 의해 괴멸했다면 이를 무(無)라 한다. 무는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유(有)에 의지해서 있다. 그러므로 유가 없다면 어떻게 무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사물의 무이겠는가? |
[문] 유가 있지 않기에 무도 있지 않다. (그러나) 유와 무를 아는 자는 있을 것이다. |
[답] 만약 (유와 무를) 아는 자가 있다면 유에 있거나 무에 있을 것이다. 유와 무가 이미 타파되었으므로 (유와 무를) 아는 자도 같이 타파된다. |
그러므로 허공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
상(相)도 아니고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그 밖의 다섯도 허공과 같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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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서 갖가지 상(相)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듯이, 그 밖의 다섯 가지22)도 이와 같다. |
[문] 허공은 최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최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왜 먼저 타파하는가? |
[답]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은 연들이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쉽게 타파된다. 식(識)은 고(苦)와 낙(樂)의 원인이기 때문에, 무상하게 변이하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쉽게 논파된다. 허공은 이와 같은 상(相)이 없고 단지 범부가 있다고 희망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 먼저 타파한다. 또 허공은 4대(大)를 지닌다. 4대를 인연으로 해서 식(識)이 있다. 그러므로 먼저 근본이 되는 것을 타파하면 그 밖의 것은 저절로 타파된다. |
[문] 세간의 사람들은 모든 법의 있음[有]이나 없음[無]을 본다. 그대는 왜 홀로 세상과 상반되게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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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지혜가 얕은 사람은 모든 법의 있음[有]이나 없음[無]를 보네. |
그러니 봄[見]이 멸한 안은(安隱)한 법을 보지 못하네.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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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사람이 아직 도(道)를 얻지 못했다면 법들의 실상(實相)을 보지 못한다. 봄[見]을 사랑하기 때문에 갖가지 희론이 생긴다. 법(法)이 발생하는 것을 볼 때 이를 있다[有]고 여겨서 상(相)을 취해 “있다”라고 말한다. 법이 소멸하는 것을 볼 때 이를 단멸한다[斷]고 여겨서 상을 취해서 “없다”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이[智者]는 모든 법이 발생하는 것을 볼 때 없다고 보는 것[無見]을 멸하고, 모든 법이 소멸하는 것을 볼 때 있다고 보는 것[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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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식(識)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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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을 멸한다. 그러므로 비록 모든 법들을 보는 것[所見]이 있다 할지라도 모두 환영과 같고 꿈과 같다. 나아가 무루도(無漏道)를 보는 것[見]도 멸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보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만약 봄[見]이 멸한 안은(安隱)한 법을 보지 못한다면 있음[有]를 보거나 없음[無]을 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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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를 관찰하는 장[觀染染者品]10偈 |
[문] 경전에서 탐욕ㆍ증오[瞋恚]ㆍ무지[愚癡]는 세간의 근본이라고 말하고 있다. 탐욕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애(愛)라고도 하고 착(著)이라고도 하고 염(染)이라고도 하고 음욕(婬欲)이라고도 하고 탐욕(貪欲)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이름들이 있다. 이것은 결사(結使)로서 중생에 의지한다. 중생을 물든 자[染者]라 하고 탐욕을 물듦[染法]이라 한다. 물듦과 물든 자가 있기 때문에 탐욕이 있다. 그 밖의 둘도 이와 같다. 증오[瞋]가 있기에 증오하는 자[瞋者]가 있고 무지[癡]가 있기에 무지한 자[癡者]가 있다. 이 3독(毒)이 인연이 되어서 3업(業)23)이 일어난다. 3업이 인연이 되어서 3계(界)24)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모든 법들이 있다. |
[답] 경전에서는 비록 3독의 이름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체를 구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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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탐욕[染法]을 떠나 먼저 스스로 탐욕을 내는 이[染者]가 있다면 |
이 탐욕을 내는 이[染欲者]에 의존해서 탐욕이 생길 것이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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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탐욕을 내는 이가 없다면 어떻게 탐욕이 있겠는가? |
탐욕이 있을 때든 탐욕이 없을 때든 탐욕을 내는 이도 이와 같네. (2) |
만약 먼저 탐욕을 내는 이가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다시 탐욕을 필요로 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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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 |
24)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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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을 것이다. 탐욕을 내는 이가 이미 탐욕을 냈기 때문이다. 만약 먼저 탐욕을 내는 이가 없다면 또한 다시 탐욕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탐욕을 내는 이가 있고 나서야 탐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먼저 탐욕을 내는 이가 없다면 탐욕의 대상이 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탐욕[染法]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먼저 사람이 없이 탐욕이 있다면, 이것은 원인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마치 장작이 없이 불이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먼저 탐욕이 없다면 탐욕을 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 ‘탐욕이 있을 때든 탐욕이 없을 때든 탐욕을 내는 이도 이와 같네.’라고 말한 것이다. |
[문]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전후로 서로 의존해서 발생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리라.) 만약 동시에 발생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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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동시에 성립한다는 것은 옳지 않네. |
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동시라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을 것이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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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동시에 성립한다면 서로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탐욕을 내는 이에 의존하지 않고 탐욕이 있거나 탐욕에 의존하지 않고 탐욕을 내는 이가 있다면, 이 둘은 상주하는 것이리라. 원인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상주한다고 한다면 과실이 많아 해탈하지 못할 것이다. |
또 이제 같음과 다름으로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를 타파해야 하겠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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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같다면 같은 법이 어떻게 합하겠는가? |
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다르다면 다른 법이 어떻게 합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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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는 같은 법으로 합하거나 다른 법으로 합한다. 만약 같다면 합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같은 법이 어떻게 자기와 합하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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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가? 마치 손가락 끝이 자기를 감촉할 수 없듯이. 만약 다른 법으로 합한다면 이것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다른 법으로 성립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각각 성립해 있기에 끝내 다시 합할 필요가 없다면, 설령 합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다르다. |
또 같음과 다름을 모두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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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아야 합한다고 한다면 짝이 없이 합할 것이네. |
달라야 합한다고 한다면 짝이 없이 합할 것이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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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같기에 합한다고 억지로 그래 본다면, 여타의 인연이 없이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있을 것이다. 또 만약 같다면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 두 이름이 있지 않을 것이다. 탐욕은 법(法)이고 탐욕을 내는 이는 사람이다. 만약 사람과 법이 같다면, 큰 혼란이 있을 것이다. |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다르기에 합한다고 말한다면 여타의 인연을 기다리지 않고 합할 것이다. 만약 다른데도 합한다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합할 것이다. |
[문] 같은 것이 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다 치자. 눈이 다른 것을 볼 때 함께 합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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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다르기에 합한다고 한다면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는 무엇인가? |
이 두 상(相)은 먼저 다르기에 연후에 합한다고 말하는 것이네.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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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먼저 다름이 있기에 이후에 합한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합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 두 상(相)은 먼저 이미 다르고 이후에 합한다고 억지로 말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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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먼저 각각 다름이 성립한다면 |
이미 다름이 성립해 있는데 왜 합한다고 말하는가? (7) |
또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먼저 각각 다름이 성립한다면 그대는 지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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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굳이 합함을 말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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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성립하지 않기에 그대는 합하고자 하네. |
합함이 끝내 성립하지 않기에 다시 다름을 말하네.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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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대는 이미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의 다름이 성립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합함[合相]을 말한다. 그러나 합함에는 과실이 있다.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는 성립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합함을 성립하게 하기 위해 다시 다름[異相]을 말한다. 그대 스스로 확정해 놓고서 확정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셈이다.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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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성립하지 않으니 합함이 성립하지 않네 |
어떤 다름 속에서 합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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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는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의 다름이 성립하지 않기에 합함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대는 어떤 다름 속에서 합함을 말하고자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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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는 합함도 합하지 않음도 성립하지 않네. |
모든 법들 또한 이와 같이 합함도 합하지 않음도 성립하지 않네.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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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증오[恚]와 무지[癡]도 탐욕[染]과 같다. 모든 번뇌와 모든 법도 3독과 같다. 전도 아니고 후도 아니며, 합해지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 같이 인과 연들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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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다르지 않다고 확정해 놓고서는 다시 다르다고 말하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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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제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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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보살 지음 |
요진삼장 구마라집한역 |
범지 청목주석 |
박인성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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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삼상을 관찰하는 장[觀三相品] |
[문] 경전에서 “유위법에는 발생ㆍ머묾ㆍ소멸의 3상(相)이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사물은 발생에 의해 발생하고, 머묾에 의해 머물며, 소멸에 의해 소멸한다. 그러기에 모든 법이 있는 것이다. |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3상(相)에는 확정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3상은 유위(有爲)이면서 유위를 짓는 것인가, 무위(無爲)이면서 유위를 짓는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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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발생이 유위라면 3상이 있을 것이네. |
만일 발생이 무위라면 어찌 유위의 상이라 하겠는가?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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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발생이 유위법이라면 발생ㆍ머묾ㆍ소멸의 3상(相)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상반되기 때문이다. ‘상반된다’란,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발생은 발생하는 법(法)과 상응하고 머묾은 머무는 법과 상응하고 소멸은 소멸하는 법과 상응한다. 법이 발생할 때는 머묾과 소멸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마치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지 않는 것과 같이 상반되는 법들이 일시에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은 유위법일 수가 없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
[문] 만일 발생이 유위법이 아니고 무위법이라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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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일 발생이 무위법이라면 어떻게 유위법을 위해 상(相)을 짓겠는가? 왜냐 하면, 무위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유위법이 멸한 것이기에 무위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을 무위의 상(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자기의 상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無法]는 법(法)을 위해서 상을 지을 수가 없다. 마치 토끼의 뿔ㆍ거북이의 털 따위가 법을 위해 상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발생은 무위법이 아니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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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상(相)은 모여 있든 떨어져 있든 상을 띠는 일[所相]이 있을 수 없네. |
어떻게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시간에 3상이 있겠는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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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각각 유위법을 위해 상(相)을 짓든, 한데 뭉쳐서 유위법을 위해 상을 짓든 둘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각각이 상을 짓는다고 말한다면 동일한 장소에 어떤 상은 있고 어떤 상은 없을 것이다. 발생할 때는 머묾과 소멸이 없고, 머물 때는 발생과 소멸이 없으며, 소멸할 때는 발생과 머묾이 없다. 만일 한데 뭉쳐서 상을 짓는다고 말한다면 서로 상반되는 법(法)인데 어떻게 동일한 시간에 함께하겠는가? |
만일 3상에 다시 3상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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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발생과 머묾과 소멸에 다시 유위의 상(相)이 있다고 말한다면 |
이것은 무한이 되네. 없다면 유위가 아니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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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발생ㆍ머묾ㆍ소멸에 다시 유위의 상이 있다고 말한다면, 발생에 다시 발생이 있게 되고 머묾이 있게 되고 소멸이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3상은 다시 상이 있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무한이 된다. 만일 다시 (유위의) 상이 없다면, 이 삼상은 유위법이라 하지 못할 것이며 또 유위법을 위해 상을 짓지 못할 것이다. |
[문] 그대가 3상이 무한이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발생ㆍ머묾ㆍ소멸은 유위법이라 하더라도 무한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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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한 발생의 발생[生生]은 그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하고 |
발생한 근본 발생은 다시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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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法)이 발생할 때는 자체를 포함해서 일곱 법이 함께 발생한다. 첫째는 법, 둘째는 발생, 셋째는 머묾, 넷째는 소멸, 다섯째는 발생의 발생[生生], 여섯째는 머묾의 머묾[住住], 일곱째는 소멸의 소멸[滅滅]이다. 이 일곱 법 중 근본 발생은 그 자체를 제외한 여섯 법을 발생하게 한다.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하고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 그러므로 3상은 유위법이라 하더라도 무한이 되는 것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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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일 이 발생의 발생이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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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발생의 발생[生生]이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한다면 이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 발생의 발생이 근본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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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근본 발생이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
근본 발생은 그것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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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근본 발생이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발생의 발생의 법(法)은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지만 지금의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발생의 발생이 아직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근본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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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
[문] 이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전에도 아니고 후에도 아니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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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
발생의 발생도 아직 있지 않은데 어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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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발생의 발생이) 아직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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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근본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
근본 발생도 아직 있지 않은데 어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겠는가?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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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이 근본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 (근본 발생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근본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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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추듯이 |
발생도 이와 같이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하네.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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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이 어두운 방으로 들어올 때 사물들을 밝게 비추고 자기도 비추듯이, 발생도 이와 같이 다른 것을 발생하게 하고 자기도 발생하게 한다. |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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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자체에 어둠이 없고 (등불이) 놓여 있는 곳에도 어둠이 없네. |
어둠을 없애는 것을 비춤이라 하네. 어둠이 없다면 비춤도 없네.(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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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자체에 어둠이 없고 밝음이 미치는 곳에도 어둠이 없다. 밝음과 어둠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어둠을 없애기에 비춤이라 한다. 어둠이 없다면 비춤도 없다. 어떻게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문] 이 등불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는 비추지 않는다. 또한 이미 발생했을 때도 비추지 않는다. 오직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자기를 비출 수 있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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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어떻게 등불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어둠을 없앨 수 있는 것일까? |
이 등불이 처음 발생하고 있을 때는 어둠에 미칠 수 없네.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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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란 반은 이미 발생했지만 반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등불 자체가 아직 성취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어둠을 없앨 수 있겠는가? 또 등불은 어둠에 미칠 수 없다. 마치 사람이 도둑을 마주쳤을 때 쫓아낸다고 하듯이. 만일 등불이 어둠에 다다르지 않았는데도 어둠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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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등불이 아직 어둠에 미치지 않았는데 어둠을 없앨 수 있다면 |
등불이 이곳에 있을 때 모든 곳의 어둠을 없애리라.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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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등불이 힘을 갖고 있어서 어둠에 다다르지 않고서도 어둠을 없앨 수 있다면 이곳에서 타고 있는 등불이 모든 곳의 어둠을 없앨 것이다. (이곳의 어둠에든 모든 곳의 어둠에든) 두 곳에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
또 등불은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을 비추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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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면 |
어둠도 자기를 어둡게 하고 다른 것도 어둡게 하리라.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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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등불이 어둠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면, 어둠 또한 등불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덮고 다른 것도 덮을 것이다. 만일 어둠이 등불과 상반되는데도 자기를 덮고 다른 것도 덮을 수 없다면, 등불 또한 어둠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등불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발생의 인연을 타파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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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기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
만일 이미 발생한 것이 자기를 발생하게 한다면, 이미 발생했는데 어째서 발생하는 작용을 하겠는가?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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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생이 스스로 발생하고 있을 때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가?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면, 법(法)이 없는 것인데 법이 없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이므로 다시 발생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마치 이미 만들어진 것은 다시 만들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면, 이 둘은 모두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이 있지 않다. 그대는 앞에서 발생은 등불처럼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
발생은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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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감과 옴에서 이미 답했네.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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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발생’이란, 뭇 연이 화합해서 발생이 있는 것이다. 이미 발생한 것에는 지음[作]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에도 지음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지음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으며,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없이 발생을 얻을 수도 없다. 어떻게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겠는가? 이것은 「감과 옴」1)에서 이미 답했다. |
이미 발생한 법(法)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것이 다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전개되면 무한이 된다. 마치 이미 지어진 것이 다시 지어지듯이. 또 이미 발생한 법이 다시 발생한다면 어떤 발생에 의해 발생하는 것인가? 이 발생[生相]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이미 발생한 것을 발생하게 한다면, 말한 것을 스스로 어기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발생을 말했기 때문이다.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발생이라 말한다면, 법(法)은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 것이거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것일 터인데, 그대는 앞에서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고 말했으니, 이것은 확정되지 않는다. 또 마치 이미 탄 것은 다시 타지 않고 이미 간 것은 다시 가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일 법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발생의 연(緣)과 화합할 것이다. 만일 발생의 연과 화합하지 않는다면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 만일 법이 발생의 연과 아직 화합하지 않았는데 발생한다면, 지음[作法]이 없이 짓게 되고, 탐욕이 없이 탐욕을 내게 되고, 증오가 없이 증오하게 되고, 무지[癡法]가 없이 무지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다면 모두 세간의 법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또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발생한다면, 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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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 「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觀去來品]」을 가리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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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들이 모두 모든 범부를 생기게 할 것이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보리(菩提)가 지금 보리의 괴멸하지 않는 법을 생기게 할 것이며, 아라한은 번뇌가 없는데 지금 번뇌를 생기게 할 것이며, 토끼 등은 뿔이 없는데 지금 모두 (뿔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도 발생하지 않는다. |
[문]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직 연[緣]이 없고 지음[作]이 없고 짓는 자[作者]가 없고 시간이 없고 장소 등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연이 있고 지음이 있고 짓는 자가 있고 시간이 있고 장소 등이 있다면 화합하기 때문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만일 모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들은 다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
[답] 만약 법에 연이 있고 시간이 있고 장소 등이 있어서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한다면, 미리 있어도 발생하지 않고 미리 없어도 발생하지 않고 (미리) 있으면서 없어도 발생하지 않는다. 세 가지는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으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은 이미 발생한 부분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 이미 발생한 부분이 발생하지 않으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부분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답한 바와 같다. 또 만일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
또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 발생의 과실이 있다. 하나는 ‘발생한다’할 때의 발생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 할 때의 발생이다. 둘 모두 옳지 않다. 어찌 두 발생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발생[生法]이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없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없는데 발생이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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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없다. |
이렇게 궁구해 보아도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고, 아직 발생하지 발생하지 않은 것은 발생하지 않고, 지금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이 성립하지 않고, 발생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머묾과 소멸도 성립하지 않는다. 발생ㆍ머묾ㆍ소멸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유위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ㆍ지금 가고 있는 것에서 이미 답했네’라고 말한 것이다. |
[문] 나는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거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거나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단정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저 연들이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말했을 따름이다. |
[답] 그대가 비록 이렇게 말했을지라도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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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미 성립하지 않는데 |
어떻게 연(緣)들이 화합하는 그 때에 발생을 얻을 수 있겠는가?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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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타파했다. 그대는 지금 무엇 하러 다시 연들이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말하는가? 뭇 연(緣)이 다 갖추어졌든 다 갖추어지지 않았든 모두 발생과 동일하게 타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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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법(法)이 뭇 연(緣)에 의해 발생한다면 이는 적멸[寂滅性]이네. |
그러므로 발생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이 둘은 모두 적멸이네.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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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연(緣)에서 발생한 법(法)은 자성(自性)이 없기에 적멸이다. 적멸이란 이것이 없고 저것이 없는, 상(相)이 없는 것을 말한다. 언설의 길이 끊어져 있고 희론이 소멸해 있는 것이다. 뭇 연(緣)이란 실을 연해서 베가 있고 왕골을 연해서 돗자리가 있는 것 같은 것을 말한다. 만일 실 자체에 확정된 자성[定相]이 있다면 삼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만일 베 자체에 확정된 자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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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면 실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에서 나와 베가 있으며 삼에서 나와 실이 있다. 그러므로 실에도 확정된 자성이 없고 베에도 확정된 자성이 없다. 불[燃]과 장작[可燃] 같은 것도 연들이 화합해서 형성된 것이기에 자성(自性)이 없다. 장작이 있지 않기에 불도 있지 않다. 불이 있지 않기에 장작도 있지 않다. 모든 법(法)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연들에서 발생하는 법은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에 공(空)하다. 아지랑이에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게송에서 “발생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이 둘은 모두 적멸이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대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발생[生相]을 성립시키고자 할지라도 모두 희론이지 적멸인 것은 아니다. |
[문] 삼세의 구별이 확정되어 존재한다. 미래세의 법(法)은 발생의 인과 연들을 얻으면 발생한다. 그런데 왜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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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法)이 있기에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
이 법이 미리 이미 있는데 어찌 다시 발생을 쓰겠는가?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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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미래세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있어서 발생한다면, 이 법은 미리 있는 것인데 어디에 다시 발생을 쓰겠는가? 법이 (미리) 있다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
[문] 비록 미래세에 있어서 현재의 상(相)과 같지 않을지라도 그래도 현재의 상이기에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답] 현재의 상은 미래세에는 없다. (현재의 상이) 없는데 어떻게 미래세의 발생이 발생하게 한다고 말하겠는가? (현재의 상이) 있다면 미래세의 법이 아니라 현재세의 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현재세의 법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두 가지2) 모두 발생이 없기에 발생하지 않는다. |
또 그대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며 또한 다른 것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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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래세의 법과 현재세의 법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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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며 이것이 발생할 것을 갖는다면 |
어떻게 다시 발생이 있어서 이 발생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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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을 발생하게 하며 다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면, 이 발생을 어떤 것이 다시 발생할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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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다시 발생이 있어서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면 무한이네. |
발생을 발생하게 하는 것 없이 발생이 있다면 법(法)은 모두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네.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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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발생이 다시 발생한다면 발생은 무한이다. 만일 이 발생이 다시 발생하게 하지 않아서 스스로 발생한다면, 모든 법들 또한 다 스스로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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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법(法)은 발생하지 않네. 존재하지 않는 법도 발생하지 않네. |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법도 발생하지 않네. 이 이치는 앞에서 설명했네.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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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발생이 있다 하면, 존재하는 법(法)에 발생이 있든가 존재하지 않는 법에 발생이 있든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법에 발생이 있든가이다.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이 세 가지 외에 다시 발생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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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법(法)이 소멸하는 때라면 이 때에는 발생하지 않네. |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네.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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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멸상(滅相)의 법이라면 이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두 상(相)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멸상이니, 법(法)이 소멸한다는 것을 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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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른 하나는 생상(生相)이니, 법이 발생한다는 것을 안다. 두 상은 상반되는 법이므로 동시에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멸상의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
[문] 만약 멸상의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멸상이 없는 법이 발생할 것이다. |
[답] 모든 유위법은 찰나찰나에 소멸하기에 소멸하지 않는 법이란 없다. 유위법 없는, 확정된 자성의 무위법은 없다. 무위법은 단지 이름[名字]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소멸하지 않는 법(法)을 말한다면 절대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
[문] 만약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머물고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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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아직 머물지 않은 법(法)은 머물지 않네. 이미 머문 법도 머물지 않네. |
지금 머물고 있는 법도 머물지 않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겠는가?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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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머물지 않은 법(法)은 머물지 않는다. 아직 머묾[住相]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머문 법도 머물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머묾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이 있기에 머묾이 있다. 만일 머묾이 이미 있었다면 다시 머물지 않는다. 지금 머물고 있는 것도 머물지 않는다. 이미 머문 것과 아직 머물지 않은 것 없이 다시 지금 머물고 있는 것은 있지 않다. 그러므로 또한 머물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머묾을 구해 보아도 머묾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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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법(法)이 소멸하고 있을 때라면 이것은 머물지 않네. |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네.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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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멸상의 법이라면 이 법에는 주상(住相)이 없다. 왜 그러한가? 한 법에 상반되는 두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멸상(滅相)이고 또 하나는 주상(住相)이다.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 주상과 멸상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멸상의 법(法)에 주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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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면 머물고 있을 것이다. |
[답] 소멸하지 않는 법은 없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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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모든 법(法)들은 모두 늙음과 죽음의 상(相)을 갖고 있네. |
존재하는 법이 늙음과 죽음이 없이 머물고 있는 것은 정녕 볼 수 없네.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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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은 발생할 때 무상(無常)이 항상 좇아다닌다. 무상에 둘이 있다. 늙음과 죽음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에는 항상 늙음과 죽음이 있기에 머물고 있을 때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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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묾은 자기에 의해서 머물지 않네. 다른 것에 의해서도 머물지 않네. |
발생이 자기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발생하지 않듯이.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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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머무는 법(法)이 있다면 자기에 의해서 머무는가,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무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상주하는 것이다. 모든 유위법은 연(緣)들에서 발생한다. 만일 머무는 법(法)이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유위라고 할 수 없다. 만일 머묾이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법(法)도 자기에 의해서 머물 것이다. 마치 눈이 자기를 볼 수 없듯이 머묾도 그러하다. 만약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문다면, 머묾에 다시 머묾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무한이 된다. 또 다른 법(法)에서 다른 것[異相]이 생기는 것을 본다. 다른 법을 연하지 않고서는 다른 것을 얻을 수 없다. 다른 것은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문다는 것은 옳지 않다. |
[문] 만일 머물지 않는다면 소멸할 것이다. |
[답] 소멸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
이미 소멸한 법(法)은 소멸하지 않네. 아직 소멸하지 않은 법도 소멸하지 않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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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소멸하고 있는 법도 소멸하지 않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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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소멸한 법(法)은 소멸하지 않는다. 이미 소멸했기 때문이다. 아직 소멸하지 않은 법도 소멸하지 않는다. 멸상(滅相)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소멸하고 있는 것도 소멸하지 않는다. 둘 없이 다시 소멸하고 있는 것은 없다. 이와 같이 궁구해 보아도 소멸하는 법(法)에는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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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법이 머문다면 이것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네. |
만일 법이 머물지 않는다면 이것도 소멸하지 않을 것이네.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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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법이 머문다면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주상(住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머무는 법이 소멸한다면 두 상이 있게 될 것이다. 주상(住相)과 멸상(滅相)이다. 그러므로 머묾 속에 소멸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치 태어남과 죽음이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만약 법이 머물지 않는다면 또한 소멸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주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주상이 없다면 법이 없다. 법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을 것인가? |
또 |
이 법은 이 때에, 이 때에 있는 대로 소멸하지 않네. |
이 법은 다른 때에, 다른 때에 있는 대로 소멸하지 않네.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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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 멸상이 있다면 이 법은 자기 상태에 의해서 소멸하는가, 다른 상태에 의해서 소멸하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예를 들어 우유는 우유일 때에 소멸하지 않는다. 우유일 때 있는 대로 우유의 상태가 정해져서 머물기 때문이다. 우유가 아닐 때에도 소멸하지 않는다. 우유가 아니라면 우유가 소멸한다고 말할 수 없다. |
모든 법들의 생상을 얻을 수 없네. |
생상이 있지 않으니 멸상도 있지 않네.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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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앞에서 궁구한 바와 같이 모든 법(法)의 생상(生相)은 얻을 수가 없다. 그 때에 멸상이 없다. 발생을 타파했기에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
만약 그대가 주장하기를 여전히 그치지 않는다면, 이제 다시 설명해서 인과 연들을 파괴하는 것을 타파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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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법(法)이 존재한다면 이것에는 소멸이 없네. |
한 법에 존재와 비존재가 있을 수 없네.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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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존재할 때 멸상을 구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어떻게 한 법에 존재와 비존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치 빛과 그림자는 장소를 같이하지 않는 것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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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에는 소멸이 없네. |
마치 제2의 머리가 없기에 자를 수 없는 것처럼.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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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멸상이 없다. 마치 제2의 머리와 제3의 손이 없기에 자를 수 없는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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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자기에 의해서 소멸하지 않네. 다른 것에 의해서도 소멸하지 않네. |
자기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발생하지 않듯이.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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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앞에서 생상(生相)에 관해 말할 때 발생은 자기로부터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부터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다. 만일 자기로부터 발생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모든 사물은 뭇 연(緣)에서 발생한다. 손가락 끝이 자기를 만질 수 없듯이, 그렇듯이 발생은 자기로부터 발생할 수 없다.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발생이 아직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이 발생이 있지 않기 때문에 |
또 만약 어떤 사람이 안(眼)과 이(耳) 등의 근들과 고(苦)와 낙(樂) 등의 법들을 떠나 별도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미 타파된 것이다. 이제 안과 이 등의 원인인 4대(大)의 경우를 보면, 이 4대에도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 |
[문] 만약 안과 이 등의 근들과 고와 락 등의 법들에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있지 않다면, 그럴 수 있다. 안과 이 등의 근들과 고와 락 등의 법들은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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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안(眼)과 이(耳) 등의 모든 근과 고(苦)와 락(樂) 등의 모든 법에 |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안(眼) 등도 있지 않을 것이네.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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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안(眼)과 이(耳)나 고(苦)와 락(樂) 등의 모든 법S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누구에게 이 안과 이 등이 있겠으며 무엇을 연(緣)으로 해서 있겠는가? 그러므로 안과 이 등도 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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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眼) 등에는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네. 지금도 후에도 다시 있지 않네. |
삼세(三世)에 있지 않으니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분별이 없네.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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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선행하는 존재[本住]를 사유하고 궁구해 보아도 안(眼) 등보다 이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동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삼세에 있지 않다면 발생이 없고 적멸해 있는 것이므로, 논박이 있을 수 없다.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눈 등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묻고 답하는 가운데 희론이 사라졌으며 희론이 사라졌으니 모든 법들이 공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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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불과 장작을 관찰하는 장[觀燃可燃品] 16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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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 187] 쪽 |
[문] 취착과 취착하는 자가 있다. 마치 불과 장작이 있듯이. 불은 취착하는 자이고 장작은 취착 즉 5온[蔭]이다. |
[답]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불과 장작이 모두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과 장작이 한 법(法)4)으로 성립한다고 하든 두 법5)으로 성립한다고 하든 둘 다 성립하지 않는다. |
[문] 같음[一法]과 다름[異法]은 일단 제쳐놓더라도, 만약 불과 장작이 있지 않다면 이제 어떻게 같음[一相]과 다름[異相]으로 타파할 수 있겠는가? 마치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은 있지 않기 때문에 타파될 수 없듯이. 세간에서 눈에 사물이 실재하는 것이 보여야 이후에 사유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금이 있고 난 이후에 달굴 수 있고 두드릴 수 있는 것처럼. 만약 불과 장작이 있지 않다면 같다거나 다르다고 사유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같음과 다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불과 장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있다[有]’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이미 있다[已有]’는 것이다. |
[답] 세속의 법을 따라서 언설(言說)하는 것이니 과실이 있을 수 없다. 불과 장작이 같다고 말할 때도 다르다고 말할 때도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세속의 언설이 없이는 논증할 길이 없다. 불과 장작을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것들의 있다는 것을) 타파할 수 있겠는가? 말하는 일이 없이 주장을 표명할 수는 없다. 가령 어떤 논자가 있음[有]과 없음[無]을 타파하려 한다면 반드시 있음과 없음을 말해야 한다. 있음과 없음을 언표했다고 해서 있음과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세간의 언설을 따르는 것이기에 과실이 없다. 만약 입으로 말했다고 해서 이것이 곧 인정하는 것이라면, 그대가 ‘타파한다’는 말을 하자마자 그 말이 타파되어야 할 것이다. 불과 장작도 이와 같다. (불과 장작이란) 말을 하더라도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같음[一法]과 다름[異法]으로 불과 장작을 사유한다면 둘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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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같은 법이라는 뜻이다. |
5) 다른 법이라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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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 187] 쪽 |
만약 불이 곧 장작이라면 행위와 행위자는 하나일 것이네. |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장작을 떠나서 불이 있을 것이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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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태우는 것[燃]이고 장작은 태워지는 것[可燃]이다. 짓는 자[作者]는 사람이고 지음[作]은 행위[業]이다. 만약 불과 장작이 하나라면 행위와 행위자도 하나일 것이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라면 도공과 도자기는 하나일 것이다. 행위자는 도공이고 행위는 도자기인데 어떻게 하나이겠는가? 그래서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불과 장작도 하나가 아니다. 만약 하나일 수 없으니 다른 것이리라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장작을 떠나서 따로 불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장작이다’, ‘이것은 불이다’ 하고 분별하면 곳곳에 장작을 떠나 불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다름 또한 있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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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항상 타오를 것이네.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생길 것이니 |
불을 지피는 노력이 없을 것이네. 또한 지음이 없는 불이라 해야 할 것이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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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불은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항상 타오를 것이다. 만약 항상 타오른다면 스스로 그 본체에 머무는 것이 된다. 인연에 의지하지 않으니 사람의 노력이 공허할 것이다. 사람의 노력이란 불을 지켜서 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이 노력이 지금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불이 장작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불은 지음[作]이 없을 것이다. 장작을 떠나 불은 어디에서 타오르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불은 지음이 없을 것이다. 지음이 없는 불은 있을 수 없다. |
[문] 왜 불이 인연에서 생기지 않을 때 사람의 노력도 공허하다고 하는가? |
[답] 불이 장작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뭇 연(緣)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네. |
만약 불이 항상 타고 있다면 사람의 노력은 공허하게 될 것이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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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불이 있을 것이다. 만약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불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연에서 생기지 않는다.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항상 타고 있을 것이다. 만약 항상 타고 있다면 장작[可燃]을 떠나 따로 불이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다시 사람의 노력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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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장작이라 말한다면 |
그 때는 장작이 있을 뿐인데 어떤 것으로 장작을 태우겠는가?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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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먼저 장작이 있어서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장작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불을 떠나 따로 장작이 있다면 어떻게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장작이라 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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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다르다면 다다르지[至] 못하네. 다다르지 못한다면 타지 못하네. |
타지 않으니 꺼지지 않네. 꺼지지 않으니 상주할 것이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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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불은 장작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서로 의존하지 않고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만약 불이 의존하지 않고서 성립한다면 스스로 그 자체에 머무는 것이 된다. 그러니 어디에 장작을 쓰겠는가? 그러므로 다다르지 못한다. 다다르지 못한다면 장작을 태우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다다르지 않고서 태우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타지 않으면 꺼지지 않으니 자체에 상주할 것이니, 이것은 옳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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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불은 장작과 다르니 장작에 다다를 수 있네. |
마치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다다르고 저 사람이 이 사람에게 다다르듯이. (6) |
불은 장작과 다르기 때문에 장작에 다다를 수 있다. 마치 남자가 여자에게 다다르게 여자가 남자에게 다다르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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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 187] 쪽 |
[답] 만약 불과 장작 둘이 모두 서로 떨어져 있다면 |
그렇다면 불은 저 장작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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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불을 떠나 장작이 있고 장작을 떠나 불이 있어서 독립적으로 성립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불이 장작에 다다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불을 떠나서 장작이 있지 않고 장작을 떠나서 불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남자를 떠나서 여자가 있고 여자를 떠나서 남자가 있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되었다. 비유가 성립하지 않으니 불은 장작에 다다르지 않는다. |
[문] 불과 장작은 서로 의존해서 있다.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고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다. 두 법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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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고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다면 |
어느 것이 먼저 확정돼 있기에 불과 장작이 있는 것일까?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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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면 또한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할 것이다. 이 중에서 만약 장작이 먼저 확정돼 있다면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할 것이고, 만약 불이 먼저 확정돼 있다면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할 것이다. 이제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면, 먼저 장작이 있은 이후에 불이 있을 것이니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장작이 전에 있고 불이 후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불이 장작을 태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장작이 성립하지 않는다. 또 장작은 다른 곳에 있어도 불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장작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불도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전에 불이 있고 후에 장작이 있다면 불 또한 이와 같은 과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과 장작은 두 가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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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다면 불은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네. |
그렇다면 장작에 불이 없는 것이네.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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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면 불은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불은 불 속에 스스로 머문다. 만약 불은 그 자체에 스스로 머무는 것이기에 장작에 의지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불은 장작에 의지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지금은 불이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또 장작에 불이 없는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장작이 불을 떠나 스스로 그 자체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과 장작이 서로 의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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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법[法]이 의존함을 성립시킨다면 이 법은 다시 의존함을 성립시키네. |
지금은 의존함이 없으니 또한 성립하는 법이 없네.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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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함을 성립시킨다면 이 법은 다시 본래의 의존함을 성립시킨다. 이와 같이 결정돼 있는 것이니 (의존하는) 두 법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고 다시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한다. 그러니 둘 모두 확정된 것[定]이 없다. 확정된 것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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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법이 의존해서 성립한다면 아직 성립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
만약 이미 성립한 것이 의존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이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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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법이 의존해서 성립한다면 이 법은 아직 성립하지 않은 것이다. 성립하지 않은 것은 있지 않은 것이다.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만약 이 법이 이미 성립했다면 이 성립한 것이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이 두 가지6)는 모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앞에서 불과 장작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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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직 성립하지 않은 것과 이미 성립한 것 두 가지를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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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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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는 것이 아니네. 의존하지 않고서 있는 것도 아니네. |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네. 의존하지 않고서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네.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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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제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장작도 이와 같아서, 불에 의존하는 것과 불에 의존하지 않는 것 두 가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이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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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다른 곳에서 오지 않네. 불이 타는 곳에도 불은 있지 않네. |
장작도 이와 같네. 그 밖의 것은 감과 옴에서 말한 바와 같네.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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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불은 다른 곳에서 와서 장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장작 속에도 불은 있지 않다. 장작을 쪼개 불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작도 이와 같다. 다른 곳에서 와서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불 속에도 장작은 있지 않다. 가령 이미 탄 것은 타지 않고, 아직 타지 않은 것은 타지 않고, 지금 타고 있는 것은 타지 않는다. 이 이치는 감과 옴에서 말한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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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은 불이 아니네. 장작과 다른 곳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네. |
불은 장작을 소유하지 않네. 불 속에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네. |
장작 속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네.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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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장작은 불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앞에서 이미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일 때의 과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장작과 다른 곳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타는 등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불은 장작을 소유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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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속에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장작 속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름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7)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
[문] 무엇 때문에 불과 장작을 말하는가? |
[답]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듯이 취착에 의존해서 취착하는 자가 있다. ‘취착’이란 5온을 말하고, ‘취착하는 자’란 사람을 말한다. 불과 장작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취착과 취착하는 자도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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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장작에 의해서 취착과 취착하는 자를 말하고 |
물단지나 옷 등 모든 법들을 말하네.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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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이 불이 아니듯이 취착은 취착하는 자가 아니다.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라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취착을 떠나 취착하는 자가 있지 않다. 다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름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8)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취착과 취착하는 자와 같이 바깥의 물단지나 옷 등의 모든 법들도 다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다. 발생이 없고 완전히 공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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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사람이 ‘나[我]’의 있음과 법(法)들의 다름을 말한다면 |
이와 같은 사람은 부처님 가르침의 맛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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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모든 법은 본래 발생이 없고 완전히 적멸해 있다. 그래서 이 품(品) 끝에서 이 게송을 읊은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나[我]’를 말한다면, 가령 독자부(犢子部)의 무리들은 “색(色)이 곧 ‘나’라고 말할 수도 없고 색을 떠난 것이 ‘나’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나’는 제5의 불가설장(不可說藏)에 있다”고 말하고, 살바다부(薩婆多部:說一切有部)의 무리들은 “모든 법에는 다름이 있다. ‘이것은 선(善)이다’, ‘이것은 불선(不善)이다’, ‘이것은 무기(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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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불은 장작을 소유한다, 불 속에 장작이 있다, 장작 속에 불이 있다는 세 가지를 말한다. |
8) 여기서 세 가지는 불과 장작, 취착과 취착하는 자, 행위와 행위자를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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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이다’, ‘이것은 유루이다’, ‘무루이다’, ‘이것은 유위이다’, ‘이것은 무위이다’ 하는 등의 다름이다”고 말하는 바와 같은데, 이와 같은 사람들은 모든 법의 적멸성(寂滅性)을 얻지 못한다. 부처님 말씀을 두고서 여러 가지 희론을 지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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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최초의 궁극을 관찰하는 장[觀本際品] 8偈 |
[문] 최초의 궁극[本際]은 있지 않다. 경전에서 “중생은 생사 윤회한다. 최초의 궁극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생이 있고 생사가 있다고 말한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 말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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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위대한 성인께서 말씀하신 바 최초의 궁극은 얻을 수 없네. |
생사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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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에는 세 부류가 있다. 첫째는 5신통(五神通)9)의 외도(外道), 둘째는 아라한과 벽지불, 셋째는 신통(神通)을 얻은 대보살이다. 부처님은 세 부류 중에서 가장 높기 때문에 “위대한 성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한 말이 아닌 것이 없다. 생사에는 시작이 없다. 왜 그러한가? 생사의 최초와 최후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시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최초와 최후가 없다면 중간은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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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이 없는데 어찌 중간이 있겠는가? |
그러니 이것에는 전도 후도 동시도 있지 않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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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과 최후에 의존해서 최초가 있는 것이다. 최초와 중간에 의존해서 최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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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ㆍ신족통(神足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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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는 것이다. 최초와 최후가 있지 않은데 어찌 중간이 있겠는가? 생사에는 최초와 중간과 최후가 있지 않다. 그래서 전과 후와 동시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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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태어남이 전에 있고 늙음ㆍ죽음이 후에 있다면 |
늙음ㆍ죽음이 없이 태어남이 있게 되고 태어남이 없이 늙음ㆍ죽음이 있게 되리라.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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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늙음ㆍ죽음이 전에 있고 태어남이 후에 있다면 |
이것들은 원인이 없는 것이 되리라. 태어나지 않은 것에 늙음ㆍ죽음이 있겠는가?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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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고 죽는 중생에게 만약 전에 태어남이 있고 잠시 늙음이 있고 후에 죽음이 있다면, 태어남에는 늙음ㆍ죽음이 있지 않을 것이다. 사물[法]의 태어남에는 늙음ㆍ죽음이 있고 늙음ㆍ죽음에는 태어남이 있는 것이다. 늙음ㆍ죽음이 없이 태어남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태어남에 의존하지 않고서 늙음ㆍ죽음이 있게 된다.10) |
만약 전에 늙음ㆍ죽음이 있고 후에 태어남이 있다면 늙음ㆍ죽음은 원인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태어남이 후에 있기 때문이다. 또 태어남이 없는데 어찌 늙음ㆍ죽음이 있겠는가?11) |
만약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은 전과 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동시에 성립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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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동시에 함께할 수 없네. |
태어날 때 죽음이 있을 것이고 이 둘은 다 원인이 없는 것이 될 것이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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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상 게송 3를 풀이한 것이다. |
11) 이상 게송 4를 풀이한 것이다. |
만약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동시라면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태어날 때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물[法]은 태어날 때에는 있고 죽을 때에는 있지 않은 것이다. 만약 태어날 때 죽음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동시에 생긴다면12)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마치 소의 뿔이 동시에 나오기에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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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 후와 동시 이것이 모두 옳지 않은데 |
왜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있다고 희론해서 말하는가?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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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태어남ㆍ늙음ㆍ죽음을 사유해 보면 세 가지 모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발생이 없고 완전히 공하다. 그대는 지금 왜 태어남ㆍ늙음ㆍ죽음을 탐착(貪著)하고 희론(戱論)해서 확정된 상(相)이 있다고 말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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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과 결과,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법[可相], |
느낌과 느끼는 자 등의 모든 법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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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생사에 있어서만 최초의 궁극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
이와 같은 모든 법들도 모두 최초의 궁극이 없네.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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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모든 법들’이란 이른바 원인과 결과,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 느낌[受]과 느끼는 자[受者] 등을 말한다. 모두 최초의 궁극[本際]이 없다. 비단 생사에만 최초의 궁극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간략하게 보여 주고자 생사에는 최초의 궁극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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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고를 관찰하는 장(觀苦品) 10偈 |
어떤 이가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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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동시에 생긴다면’이라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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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 187]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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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짓는 것이다, 타자가 짓는 것이다, 양자가 짓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다 |
이렇게 고(苦)를 말하네.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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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고(苦)를 자기가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는 타자가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는 자기가 짓는 것이면서 타자가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는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다.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네’란, 중생은 뭇 연(緣)에 의해 고(苦)에 이르게 되고, 고를 싫어해서 멸하고자 하지만 고의 진정한 연들을 알지 못해서 네 가지 오류13)를 범하므로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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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고(苦)를 자기가 짓는 것이라면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 것이네. |
이 온(蘊)이 있기에 저 온(蘊)이 발생하는 것이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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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고(苦)를 자기가 짓는 것이라면 뭇 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짓는 것’이란 자성(自性)에서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전세(前世)의 5온[蔭]에 의존해서 후세의 5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苦)는 자기가 짓는 것일 수 없다. |
[문] 만약 이 5온이 저 5온이 된다면 이것은 타자가 짓는 것이다. |
[답]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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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5온이 저 5온과 다르다고 말한다면 |
그렇다면 타자에 의해 고(苦)가 지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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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자기가 짓는 것이다, 타자가 짓는 것이다, 양자가 짓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다라는 네 가지 오류를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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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 187]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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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5온이 저 5온과 다르고 저 5온이 이 5온과 다르다면, 타자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리라. 예를 들면 실이 천과 다르다면 실을 떠나서 천이 있고 실을 떠나서 천이 있지 않다면 천은 실과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그렇듯이 저 5온이 이 5온과 다르다면 이 5온을 떠나서 저 5온이 있고 이 5온을 떠나서 저 5온이 있지 않다면 이 5온은 저 5온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고(苦)가 타자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
[문] 자기가 고(苦)를 짓는다면 개체[人]마다 자기가 고를 짓고 자기가 고를 받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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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면 고를 떠나서 어떤 개체가 있기에 |
그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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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면, 5온의 고를 떠나 어디에 따로 개체가 있기에 스스로 고를 짓는 것일까? 이 개체를 말해야 하는데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개체가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한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체가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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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고(苦)를 다른 개체가 지어서 이 개체에게 주는 것이라면 |
고가 없는데 어떻게 이 사람이 받는 일이 있겠는가?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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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다른 개체가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준다면, 5온이 없으니 이 개체가 이 사람이 받는 일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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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고를 다른 개체가 지어서 이 개체에게 주는 것이라면 |
고가 없는데 어떤 사람이 있기에 이 개체에게 준다는 것일까?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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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다른 개체가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준다고 말한다면, 5온의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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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어떻게 다른 개체가 있기에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준다는 것일까? 만약 있다면 그 상(相)을 말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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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짓는 고(苦)가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타자가 짓는 고가 성립하겠는가? |
타자가 고를 짓는다면 또한 자기가 고를 짓는 것이기도 하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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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타자가 고를 짓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자기와 타자[此彼]는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만약 타자가 그 타자에게 고를 짓는다면 또한 자기가 고를 짓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가 고를 짓는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논파했다. 그대가 자기가 고를 짓는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타자가 고를 짓는다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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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苦)는 자체가 짓는 것이 아니네. 사물[法] 자체가 사물을 짓는 것이 아니네. |
타자는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타자가 고를 짓겠는가?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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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자체가 고(苦)를 짓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가령 칼이 스스로를 벨 수 없듯이 사물[法]은 자체가 법을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가 지을 수 없는 것이다. 타자가 짓는다는 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고(苦) 없이 타자의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고 없이 타자의 자성이 있다면 타자가 고를 지을 것이다. 타자 또한 고인데 어떻게 고가 고를 짓겠는가? |
[문] 만약 자기가 짓는 것과 타자가 짓는 것이 옳지 않다면 양자가 짓는 것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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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자기나 타자가 고(苦)를 짓는 것이라면 양자가 고를 짓는 것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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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
자기나 타자가 짓는 일이 없는데 하물며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겠는가?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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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짓는 것도 타자가 짓는 것도 과실이 있는데 하물며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랴? 원인이 없다면 많은 과실이 있다. 행위와 행위자를 타파하는 장에서 말한 바와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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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고에 대해서만 네 가지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 게 아니라 |
모든 바깥의 사물들에 대해서도 네 가지의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네.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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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불교에서 5취온[聚陰]을 고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어떤 외도의 사람들은 고수(苦受)를 고(苦)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비단 고에 대해서만 네 가지의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 게 아니라 바깥의 사물들인 대지ㆍ강ㆍ산ㆍ나무 등 모든 법들에 대해서도 (네 가지의 주장이) 다 성립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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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행을 관찰하는 장[觀行品] 9偈 |
[문]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셨듯이 속이는 것은 허망하게 취한 것이네. |
모든 행(行)들은 허망하게 취한 것이기에 이는 속이는 것이네. (1) |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속이는 것[虛誑]은 허망하게 취한 것[妄取相]이다. 제일의 진실(眞實)은 열반이니, 허망하게 취한 것이 아니다.” |
이 같이 경전에서 말씀하신 까닭에 모든 행(行)들은 속이는 것이며 허망하게 취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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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속이는 것은 허망하게 취한 것이라면 이 중에 무엇을 취할 수 있을까? |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것을 말씀하셔서 공성의 이치를 보여주고자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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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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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허망하게 취한 것은 속이는 것이라면 이 행들 중에서 무엇을 취할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셔서 공성의 이치(空義)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문] 모든 행(行)들이 다 공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
[답] 모든 행(行)들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공(空)하다. 모든 행들은 발생하고 소멸해서 머물지 않아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모든 행들이란 5온이다. 행에서 생긴 것이기에 5온은 행이다. 이 5온은 다 허망해서 확정된 상[定相]이 없다. 왜 그러한가? 예를 들면 갓난애 때의 색(色)은 기어다니는 애 때의 색이 아니다. 기어다니는 애 때의 색은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이 아니다.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은 어린애[童子] 때의 색이 아니다. 어린애 때의 색은 청년[壯年]일 때의 색이 아니다. 청년일 때의 색은 노년일 때의 색이 아니다. 색과 같은 것은 찰나찰나 (생멸해서) 머물지 않기 때문에 확정된 자성을 분별할 수 없다. |
갓난애 때의 색은 기어다니는 애 때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의 색과 같은가, 다른가? 두 가지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만약 갓난애 때의 색이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의 색과 같다면, 오로지 이 갓난애 때의 색이 있을 뿐이어서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의 색의 구분이 없을 것이다. 또 가령 진흙덩어리 같은 것은 항상 진흙덩어리여서 결코 물단지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색이 항상 확정돼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갓난애 때의 색이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과 다르다면, 갓난애는 걸어다니는 애가 되지 않을 것이고 걸어다니는 애는 갓난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두 색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린애[童子]ㆍ소년(少年)ㆍ청년ㆍ노년의 색이 상속(相續)하지 않을 것이다. 혈연 관계[親屬法)를 상실해서 아버지가 없게 되고 자식이 없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오직 갓난애만이 아버지를 얻게 되고 여타의 것 즉 기어다니는 애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는 (상속의) 한 부분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모두 과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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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색이 확정돼 있지 않다고 하지만 갓난애의 색이 소멸하고 난 후 상속해서 다시 발생해서 나아가(=어린애ㆍ소년ㆍ청년) 노년의 색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과실이 없다. |
[답] 갓난애의 색이 상속해서 발생한다면 소멸하고 나서 상속해서 발생하는 것인가,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해서 발생하는 것인가? 만약 갓난애의 색이 소멸했다면 어떻게 상속하겠는가?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장작과 불이 있다 하더라도 불이 소멸했을 때는(꺼졌을 때는) 상속하지 않는다. 만약 갓난애의 색이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한다면 갓난애의 색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상주하는 본체[本相] 또한 상속하지 않는 것이다. |
[문] 나는 소멸하거나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해서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머묾이 없이 서로 유사하게 발생하기에 상속해서 발생한다고 말할 따름이다. |
[답] 만약 그렇다면 확정된 색이 있고 (색들이 거듭해서) 다시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만 가지의 색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니 또한 상속이 없다. 이렇듯 모든 곳에서 색을 구해 보아도 확정된 상[定相] 없다. 그저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있는 것일 따름이다. 가령 파초나무[芭蕉樹]는 실체를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단지 껍질과 잎이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이는 색의 상(相)을 구할 때 찰나찰나 소멸하기 때문에 다시 실체의 색[實色]을 얻지 못하므로 색의 형체[色形]나 색의 상[色相]에 머물지 않는다. 서로 유사하게 순차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가령 등불과 같은 것에서 확정된 색[定色]을 명확하게 구별해 내고자 하더라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색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그저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있는 것이다.14) |
수(受)도 이와 같다. 지혜로운 이가 여러 가지로 관찰해 볼 때 순차적으로 서로 유사하게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별해서 인식하기가 어렵다. 마치 물의 흐름이 상속(相續)하는 것과 같다. 그저 거칠게 지각해서[覺] 세 가지 수(受)가 몸에 있다고 말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수(受)도 색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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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상 색(色)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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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하게 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15) |
상(想)은 이름[名相]에 기인해서 발생한다. 이름이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이름[名字相]을 분별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상(想)이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먼저 확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다. 확정된 자성이 없기 때문에 그림자와 형체의 관계와 같다. 형체에 의지해서 그림자가 있는 것이니, 형체가 있지 않다면 그림자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림자에는 확정된 자성이 없다. 만약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형체 없이 그림자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뭇 연에서 발생하는 것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다. 상(想)도 이와 같다. 단지 바깥의 이름[名相]에 기인해서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존재할 따름이다.16) |
식(識)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등과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 등에 의지해서 발생한다. 눈[眼] 등의 근(根)들이 상이하기 때문에 식도 상이하다.17) 이 식은 색에 있는가, 눈에 있는가, 그 중간에 있는가? 확정되지 않는다. 단지 발생하고 나서 대상을 인식하고 이 사람을 인식하고 저 사람을 인식한다. 이 사람을 아는 인식은 저 사람을 아는 인식과 같은가, 다른가? 이 두 가지는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안식과 이식도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같다고도 말하고 다르다고도 말하는 것이다. 확정된 구별이 없다. 단지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에 의지해서 눈[眼] 등을 구별하는 것이기에 공하고 자성이 없다. 마치 마술사[伎人]가 구슬 하나를 입 안에 머금고 있다가 뱉어내 사람들에게 보여 줄 때 ‘본래의 구슬과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하고 의심을 품듯이, 식(識)도 그와 같은 것이다. 발생하고 나서 다시 발생할 때 본래의 식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러므로 식은 머묾[住]이 없기에 자성이 없다. 속이는 것[虛誑]이어서 환영과 같다.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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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상 수(受)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
16) 이상 상(想)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
17) 눈 등의 감관들이 상이하기 때문에 인식도 상이하다. |
18) 이상 식(識)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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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行)도 이와 같다. 모든 행이란 신행(身行)과 구행(口行)와 의행(意行)이다. 행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청정한 것과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것들이 청정하지 않은 것들인가? 중생을 뇌란(惱亂)하게 하는 탐착(貪著) 따위를 청정하지 않은 것[不淨]이라 한다. 중생을 뇌란하게 하지 않는 진실한 말과 탐착하지 않음 등을 청정한 것[淨]이라 한다. 어떤 때는 감소하고 어떤 때는 증가한다. 청정한 행(行)은, 인간[人]이나 욕천(欲天)이나 색천(色天)이나 무색천(無色天)에서 과보를 받고 나면 감소한다. 다시 짓기 때문에 증가라 한다. 청정하지 않은 행(行) 또한 이와 같다. 지옥ㆍ축생ㆍ아귀ㆍ아수라에서 과보를 받고 나면 감소한다. 감소했는데 다시 짓기 때문에 증가라 한다. 그러므로 행들은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하기 때문에 머묾[住]이 없다. 마치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적절하게 병을 잘 다스리면 낫지만 잘 다스리지 않으면 다시 병이 생기는 것과 같다. 모든 행은 이와 같아서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하기 때문에 확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있다고 할 따름이다.19) |
세제(世諦)에 의지하기 때문에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볼 수 있다. 이른바 무명에 의존해서 모든 행이 있고, 모든 행에 의존해서 식(識)의 집착이 있고, 식의 집착에 의존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에 의존해서 6입(入)이 있고, 6입에 의존해서 촉(觸)이 있고, 촉에 의존해서 수(受)가 있고, 수에 의존해서 애(愛)가 있고, 애에 의존해서 취(取)가 있고, 취에 의존해서 유(有)가 있고, 유에 의존해서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에 의존해서 늙음과 죽음[老死]ㆍ근심ㆍ비애ㆍ고뇌ㆍ사랑하는데 이별하는 고통[恩愛別苦]ㆍ미워하는데 만나는 고통[怨憎會苦] 따위가 있다. 이와 같은 고(苦)들은 모두 행(行)을 근본으로 삼는다. |
부처님께서는 세제에 의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제일의제를 얻어 진실한 지혜가 생기면, 무명(無明)이 그친다. 무명이 그치기에 여러 가지 행이 일지 않고, 여러 가지 행이 일지 않기에 4제(諦)20)를 볼 때 끊어지는[見諦所斷] 견(見)ㆍ의(疑)ㆍ계금취(戒禁取) 따위가 끊어지고 수습(修習)을 할 때 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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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상 행(行)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
20)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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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는[思惟所斷] 탐욕ㆍ증오ㆍ색염(色染)ㆍ무색염(無色染)ㆍ조희(調戲)ㆍ무명도 끊어진다. 이것이 끊어지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분지[分]가 소멸한다. 이른바 무명ㆍ모든 행ㆍ식ㆍ명색ㆍ6입ㆍ촉ㆍ수ㆍ애ㆍ취ㆍ유ㆍ태어남ㆍ늙음과 죽음ㆍ근심ㆍ비애ㆍ고뇌ㆍ사랑하는데 이별하는 고통ㆍ미워하는데 만나는 고통 따위가 모두 소멸한다. 이것들이 소멸하기에 5온의 몸[身]이 완전히 소멸해서 다시 남는 것이 없으니 오직 공성[空]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공성의 이치를 보여 주고자 “모든 행은 속이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또 모든 법들은 자성이 없기에 속이는 것이고 속이는 것이기에 공하다. 이렇게 게송을 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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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에는 다른 것이 있기에 다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아네. |
자성이 없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네. 모든 법은 공하기 때문이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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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들은 자성이 없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은 비록 발생하더라도 자성에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자성이 없는 것이다. 가령 갓난애가 확정되어 자성에 머문다면 결코 기어다니는 애가 되지 못할 것이며 나아가 노년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갓난애는 순차적으로 상속하고 다른 것[異相]이 있기에 기어 다니는 애가 현현하고 나아가 노년이 현현한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다른 것이 보이기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아네’ 하고 말하는 것이다. |
[문] 만약 모든 법에 다른 것[異相]이 있기에 자성이 없으니 자성이 없는 법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답] 자성이 없는데 어찌 법(法)이 있겠으며 어찌 상(相)이 있겠는가? 왜냐 하면, 근본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자성을 논파하고자 자성이 없다고 말할 따름이다. 만약 이 자성이 없는 법이 있다면 모든 법이 공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법이 공한데 어찌 자성이 없는 법이 있겠는가? |
[문]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갓난애에서 |
노년에 이르기 까지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여러 가지의 다른 것이 있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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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면 다른 것[異相]이 없는 것인데, 그대는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 자성이 있다. 모든 법에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이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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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있다면 어떻게 변이가 있을 수 있을까? |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변이가 있을 수 있을까?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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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어떻게 변이[異性]를 얻을 수 있겠는가?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변이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순금이 변이할 수 없듯이. 또 마치 어둠이 변이해서 밝음이 되지 않고 밝음이 변이해서 어둠이 되지 않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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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이 변이하는 것이 아니네. 다른 법이 변이하는 것도 아니네. |
마치 젊은이가 늙은이가 될 수 없고 늙은이도 젊은이가 될 수 없듯이.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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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법이 변이한다면 마땅히 변이의 상(相)이 있을 것이다. 즉, 이 법이 변이하든가, 다른 법이 변이하든가 이다. 이 둘은 옳지 않다. 만약 바로 이 법이 변이한다면 늙은이가 늙은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늙은이가 그대로 늙은이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다른 법이 변이한다면 늙은이는 젊은이와 다른 것이니, 젊은이가 늙은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젊은이는 늙은이가 되지 않는다. 두 가지 모두21)에 과실이 있다. |
[문] 만약 법이 변이한다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예를 들어 지금 눈에 나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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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바로 이 법이 변이하는 것과 다른 법이 변이하는 것 두 가지를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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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사람이 세월이 지나 늙은이가 되는 것이 보이는 경우와 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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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이 법이 변이한다면 우유가 곧 타락일 것이네. |
우유 외에 어떤 사물[法]이 있어서 타락[酪]이 될 수 있겠는가?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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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법이 변이한다면 우유가 곧 타락일 것이어서 다시 인과 연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우유와 타락은 여러 가지의 다름이 있기 때문에 우유가 곧 타락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법은 변이하지 않는다. 만약 다른 법이 변이한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우유 외에 어떤 사물[物]이 있어서 타락이 되는 것인가? 이와 같이 사유해 보면 이 법이 변이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법이 변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편벽되이 집착해서는 안 된다. |
[문] 이 법을 논파하고 다른 법을 논파해도 여전히 공한 것[空]이 있다. 공한 것이 곧 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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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공하지 않은 법이 있다면 공한 법이 있을 것이네. |
공하지 않은 법이 없는데 어떻게 공한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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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공하지 않은 법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한 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공하지 않은 법을 논파해 왔다. 공하지 않은 법이 없기 때문에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서로 의존하지 않는데 어찌 공한 법이 있겠는가? |
[문] 그대가 “공하지 않은 법이 없기 때문에 공한 법도 없다”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공한 것[空]을 말한 것이 된다. 다만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으니 집착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상대가 없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으니 상(相)이 없고, 상이 없으니 집착이 없다. 이와 같다면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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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위대한 성인께서 공성[空法]을 말씀하신 것은 모든 견해를 벗어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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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위해서이네. |
만약 공성[空]이 있다는 견해를 갖는다면 부처님들께서 교화하지 못하시네.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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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성인께서는 예순두 가지의 견해들, 무명과 애(愛) 따위의 번뇌들을 타파하기 위해 공성[空]을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공성에 대해서 다시 견해를 낸다면 이 사람은 교화할 수 없다. 비유하면 병에 걸린 사람은 약을 복용해야 치유되는데 약으로 말미암아 다시 병이 들면 치유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이 장작에서 나왔다면 물로 끌 수 있겠지만 만약 물에서 생겼다면 무엇으로 끄겠는가? 공성이 물과 같을 때 온갖 번뇌의 불을 끌 수 있다. |
죄가 무겁고 탐착(貪著)하는 마음이 깊은 사람들은 지혜가 무디기 때문에 공성에 대해서 견해를 내서, 공성이 있다고 말하거나 공성이 없다고 말하는데 있음[有]과 없음[無]으로 인해서 다시 번뇌를 일으킨다. 만약 공성으로 이 사람을 교화한다면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나는 영원히 이 공성을 안다. 이 공성을 떠나면 열반의 도(道)가 없다. 경전에서는 ‘공ㆍ무상(無常)ㆍ무작(無作)의 해탈문22)을 떠나서 해탈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언설(言說)일 뿐이다’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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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합함을 관찰하는 장[觀合品] 8偈 |
위의 근(根)을 타파하는 장23)에서 봄[見], 봄의 대상[所見], 보는 자[見者]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셋은 다름[異相]이 있지 않기 때문에 합하지 않는다. 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제 설명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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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3해탈문(解脫門)이란 해탈에 이르는 방법이 되는 세 종류의 선정(禪定)을 말한다. 아(我)와 법(法)의 공함을 관하는 것이 공(空)해탈문, 차별의 상(相)을 떠나는 것이 무상(無相)해탈문, 원구(願求)의 생각을 버리는 것이 무원(無願)해탈문 또는 무작(無作)해탈문이다 |
23) 제3 「6근(根)을 관찰하는 장[觀六情品]을 가리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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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왜 이 안[眼] 등 셋은 합하지 않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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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 이 셋은 각각 다른 곳에 있네. |
이렇듯 세 법(法)은 달라서 결코 결합할 때가 없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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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안근(眼根)을 말한다. 봄의 대상[可見]은 색인 경계[色塵]를 말한다. 보는 자는 ‘나[我]’를 말한다. 이 셋은 각각 다른 곳에 있어서 결코 합할 때가 없다. ‘다른 곳’이란, 눈[眼]은 몸 안에 있다. 색은 몸 바깥에 있다. ‘나’는 어떤 이는 몸 안에 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모든 곳에 편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합하지 않는다. 또 만약 봄[見法]이 있다고 말한다면 합해서 보는가, 합하지 않고서 보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합해서 본다면, 경계[塵]가 있는 곳마다 근(根)이 있고 ‘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합하지 않는다. 만약 합하지 않고서 본다면 근(根)과 ‘나’와 경계가 각각 다른 곳에 있어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가령 안근(眼根)은 이곳에 있기에 먼 곳의 물단지를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두24) 보지 못한다. |
[문] ‘나’와 의(意)와 근(根)과 경계(塵) 넷이 합하기에 인식 작용[知]이 발생해서 물단지나 옷 등의 사물들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봄과 봄의 대상과 보는 자가 있다. |
[답] 이것은 근을 논하는 품25)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그대가 넷이 합하기에 인식 작용[知]이 발생한다고 말했는데 이 인식 작용은 물단지나 옷 등의 사물을 이미 보고 난 후에 발생한 것인가, 아직 보지 않았는데 발생한 것인가? 만약 이미 보고 난 후에 발생한 것이라면, 인식 작용은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만약 아직 보지 않았는데 발생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아직 합하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인식 작용이 발생하겠는가? 만약 넷이 동시에 합할 때 인식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만약 동시에 발생한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왜 그러한가? 전에 물단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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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근(根)과 ‘나’와 경계가 합하는 것과 합하지 않는 것 두 가지를 말한다. |
25) 주 14)와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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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 187] 쪽 |
있으면 후에 보고 그리고 나서야 인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동시라면 전과 후가 없는 것이다. 인식 작용이 있지 않기 때문에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도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법들은 환영과 같고 꿈과 같아서 확정된 상[定相]이 있지 않다. 그러니 어떻게 합할 수 있겠는가? 합하지 않기 때문에 공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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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染]ㆍ탐욕의 대상[可染]ㆍ탐욕을 내는 자[染者]도 또한 그러하네. |
그 밖의 입처[入]와 그 밖의 번뇌도 또한 이와 같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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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가 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듯이 탐욕[染]ㆍ탐욕의 대상[可染]ㆍ탐욕을 내는 자[染者]도 합하지 않는다.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의 세 법에 대해서 말한 것과 똑같이 들음[聞]ㆍ들음의 대상[可聞]ㆍ듣는 자[聞者]ㆍ그 밖의 입처[入] 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탐욕, 탐욕의 대상, 탐욕을 내는 자에 대해서 말한 것과 똑같이 증오ㆍ증오의 대상ㆍ증오하는 자ㆍ그 밖의 번뇌 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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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법들이 합하는 것이네. 봄 등에는 다름[異]이 있지 않네. |
다름[異相]이 성립하지 않는데 봄 등이 어찌 합하겠는가?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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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무릇 사물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합한다. 봄 등에서는 다름[異相]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합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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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봄 등의 법에서만 다름(異相)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
모든 법들에는 다 다름이 있지 않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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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비단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 등의 셋에서만 다름[異相]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법들에는 다 다름이 있지 않다. |
[문] 왜 다름[異相]이 있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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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다른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 다른 것이네. 다른 것은 다른 것을 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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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 187] 쪽 |
서 다른 것이 아니네. |
어떤 법이 원인에서 나왔다면 이 법은 원인과 다른 것이 아니네.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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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말하는 다른 것[異] 이 다른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것[異]이라 한다. 다른 것[異法]을 떠나서는 다른 것[異]이라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약 어떤 법이 연(緣)들에서 생겼다면 이 법은 원인과 다른 것이 아니다. 원인이 괴멸하면 결과도 괴멸하기 때문이다. 마치 대들보와 서까래 등에 의존해서 집이 있는 것과 같다. 집은 대들보나 서까래와 다르지 않다. 대들보와 서까래 등이 괴멸하면 집도 괴멸하기 때문이다. |
[문] 만약 확정된 다른 법[異法]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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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다름을 떠나서 다른 것이 있다면 여타의 다른 것과 다름이 있는 것이리라. |
다름을 떠나서 다른 것은 없네. 그러니 다름이 있지 않네.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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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다름[異]을 떠나서 다른 것[異法]이 있다면 여타의 다른 것과 다름[異法]이 있을 것이다.26) 그러나 실제로는 다름을 떠나서 다른 것[異法]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여타의 것과 다름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다섯 손가락이란 다른 것을 떠나서 주먹이란 다른 것이 있다면, 주먹이란 다른 것은 물단지 등의 다른 것[異物]과 다름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다섯 손가락이란 다른 것을 떠나서 주먹이란 다른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먹이란 다른 것은 물단지 등과 다름[異法]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문] 우리 학파의 경전에서는 “다름[異相]은 연들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상[總相]를 분별하기 때문에 다름[異相]이 있고 다름에 의존하기 때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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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異)나 이상(異相)은 ‘다름’을, 이법(異法)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이 차이를 적용하면 뒤의 응리여이유이법‘(應離餘異有異法)’은 “여타의 다름을 떠나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가 되어야 하겠지만, 문맥을 통하게 하기 위해 “여타의 다른 것과 다름이 있을 것이다”로 번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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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 187] 쪽 |
에 다른 것[異法]이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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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다른 것[異]에 다름[異相]이 있지 않고 다르지 않은 것[不異]에도 있지 않네. |
다름이 있지 않으니 이것은 저것과 다르지 않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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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전체의 상[總相]를 분별하기 때문에 다름[異相]이 있고 다름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것[異法]이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다름[異相]은 뭇 연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뭇 연(緣)의 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다름[異相]은 다른 것[異法]을 떠나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름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 있지 독립해서 성립할 수 없다. 지금 다른 것[異法]에는 다름[異相]이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미 다른 것[異法]이 있는데 어디에 다름[異相]을 쓰겠는가? 다르지 않은 것[不異法]에도 다름[異相]이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다름이 다르지 않은 것에 있다면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두 경우 모두27)에 없다면 다름이 있지 않은 것이다. 다름[異相]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법(法)과 저 법이 또한 있지 않다. 또 다른 것[異法]이 있지 않기 때문에 또한 합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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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법(法)이 자기와 합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법이 합하는 것도 아니네. |
합하는 자도, 지금 합하고 있는 것도, 합함도 모두 있지 않네.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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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法)은 자체와 합하지 않는다.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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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다른 것[異法]이나 다르지 않은 것[不異法]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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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 187] 쪽 |
손가락이 자체와 합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른 법도 합하지 않는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름이 이미 성립했기 때문에 합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사유해 보건대 합함[合法]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합하는 자[合者]ㆍ지금 합하고 있는 것[合時]ㆍ합함[合法]을 모두 얻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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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제3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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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보살 지음 |
요진삼장 구마라집한역 |
범지 청목주석 |
박인성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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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있음과 없음을 관찰하는 장[觀有無品] 11偈 |
[문] 모든 법에는 각각 자성이 있다.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단지에는 물단지의 자성이 있고 천에는 천의 자성이 있다. 이 자성들은 뭇 연이 합할 때 출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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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뭇 연(緣)에 자성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네. |
자성이 뭇 연에서 발생한다면 만들어진 것[作法]이리라.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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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있다면 뭇 연에서 출현하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뭇 연에서 출현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만들어진 것[作法]이라 확정된 자성이 없다. |
[문] 만약 법들의 자성이 연들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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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자성이 만들어진 것[作]이라 한다면 어떻게 이런 주장이 있을 수 있는가? |
자성은 만들어진 것[作]이 아니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성립하네. (2) |
마치 금이 구리와 섞여 있으면 순금이 아닌 것과 같이, 만약 자성이 있다면 연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만약 연들에서 출현한다면 순수함[眞性]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자성이 확정되어 있다면 다른 것에 의존해서 출현하지 않는다. 마치 긴 것과 짧은 것, 저것과 이것에 확정된 자성이 없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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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 187] 쪽 |
이 다른 것에 의존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문] 만약 법들에 자성이 없다면 타성이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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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법에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이 있겠는가? |
타성에 있어서 자성을 또한 타성이라고 하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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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들의 자성은 연들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또 의존해서 성립한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 만약 그렇다면 타성은 타자에 있어서 또한 자성이다. (이것) 또한 연들에서 발생하고 서로 의존해서 성립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법들이 타성에서 발생한다고 말하겠는가? 타성 또한 자성이기 때문이다. |
[문] 자성이나 타성을 떠나 법들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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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어떻게 존재[法]가 있을 수 있겠는가? |
자성과 타성이 있을 때 존재가 성립할 수 있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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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만약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존재[法]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존재[法]가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자성과 타성이 있을 때 존재가 성립한다. 가령 물단지 자체는 자성이고 (이에) 의지하는 사물[依物]은 타성이다. |
[문] 자성과 타성에 의해서 존재[有]가 타파되었으니 이제 비존재[無]가 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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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존재[有]가 성립하지 않는데 비존재[無]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는가? |
존재[有法]가 있기에 존재가 괴멸한 것을 비존재라고 하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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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대가 존재[有]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다면 또한 비존재[無]가 있지 않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왜 그러한가? 존재[有法]가 괴멸
한 것을 비존재라 한다. 이 비존재는 존재의 괴멸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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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사람이 존재와 비존재, 자성과 타성을 본다면 |
그렇다면 부처님 가르침의 진실한 의미를 보지 못하네.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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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어떤 사람이 법들에 깊이 집착한다면 반드시 있다[有]는 견해를 구하게 된다. 자성을 타파하면 타성을 보고, 타성을 타파하면 존재[有]를 보고, 존재를 타파하면 비존재[無]를 보고, 비존재를 타파하면 미혹하게 된다. 만약 근기가 예리하고 집착하는 마음이 얇다면 온갖 견해들이 소멸한 안은[安隱]함을 알기 때문에 다시 네 가지의 희론(戱論)1)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 사람은 부처님 가르침의 진실한 이치를 본다. 그러기에 위의 게송을 읊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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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존재와 비존재를 부정하셨네. 가전연(迦旃延)을 교화하는 |
경전에서 말씀하셨듯이 존재도 없고 비존재도 없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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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산타가전연경(刪陀迦旃延經)에서 부처님께서 바른 견해의 이치를 말씀해 주시고자 존재를 부정하셨고 비존재를 부정하셨다. 만약 모든 법(法)이 조금이라도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부처님께서 존재와 비존재를 타파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존재를 타파하면 사람들은 비존재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모든 법의 상(相)에 통달하셨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존재한다[有]’나 ‘존재하지 않는다[無]’는 견해를 버려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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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법에 자성이 실재한다면 후에 변이하지 않을 것이네. |
만약 자성이 변이하는 일[異相]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결코 옳지 않네.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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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성ㆍ타성ㆍ존재ㆍ비존재의 네 가지에 대한 희론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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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 187] 쪽 |
또 만약 법들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결코 변이(變異)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확정되어 자성이 존재한다면 변이[異相]가 있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순금의 비유와 같다. 지금 모든 법에 변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게 보이니 확정된 상(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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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 자성이 실재하는데 어떻게 변이할 수 있겠는가? |
법에 자성이 실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변이할 수 있겠는가?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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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법에 자성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변이할 수 있겠는가? 만약 자성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변이할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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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상주에 집착하는 것이고, 확정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단멸에 집착하는 것이네. |
그러니 지혜로운 이는 존재성[有]과 비존재성[無]에 집착해서는 안 되네.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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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법의 존재성[有相]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결코 비존재성[無相]이 없을 것이니, 이것은 상주하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삼세(三世)를 말하는 경우와 같다. 미래세에 존재[法相]가 있는데 이 존재가 현재세로 들어와서 과거세로 굴러 들어가면서 본래의 상(相)을 버리지 않으니, 이것은 상주하는 것이 된다. 또 원인 속에 먼저 결과가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상주하는 것이 된다. 만약 비존재[無]가 확정되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 비존재는 반드시 전에는 존재하다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니, 이것은 단멸하는 것이 된다. 단멸하는 것은 상속이 없는 것이다. 이 두 견해로 인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멀리하게 된다. |
[문] 왜 존재[有]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은 상주의 견해[常見]이고 비존재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은 단멸의 견해[斷見]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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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만약 법에 확정된 자성이 있어서 존재하지 않게 되지 않는다면 상주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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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 187] 쪽 |
는 것이고 |
전에는 존재하다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면 단멸하는 것이네.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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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법에 자성이 있다면 이것은 존재[有相]이지 비존재[無相]가 아니니, 결코 비존재[無]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법에 자성이) 없다면 존재[有]가 아니니, 비존재[無法]일 것이다. 앞에서 이미 과실을 말했기 때문에, 그렇다면2) 상주의 견해에 떨어지게 된다. 만약 법이 전에는 존재하다가 괴멸해서 비존재가 되었다면 이것은 단멸하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존재는 비존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존재와 비존재는 각각 확정된 상[定相]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만약 단멸의 견해나 상주의 견해를 갖는다면, 죄나 복 등이 없게 되어 세간의 일들을 파괴하게 된다. 그러므로 버려야 한다. |
16. 계박과 해탈을 관찰하는 장[觀縛解品] 10偈 |
[문] 생사에는 결코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생사를 중생은 윤회한다. 모든 행(行)이 윤회하는데, 그대는 무슨 이유로 중생과 모든 행이 모두 공해서 윤회하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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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모든 행(行)이 윤회한다면 상주하는 것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고 |
무상한 것이 윤회하는 것도 아니네. 중생도 그러하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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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들이 6도(道)의 생사를 윤회한다면 상주하는 것[常相]이 윤회하는가, 무상한 것[無常相]이 윤회하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만약 상주하는 것이 윤회한다면 생사의 상속(相續)이 없을 것이다.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고 자성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무상한 것이 윤회한다면 또한 생사를 윤회하는 상속이 없을 것이다.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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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약 법에 자성이 있다고 말한다면’이라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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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 187] 쪽 |
만약 중생이 윤회한다면 또한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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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중생이 윤회한다면 온(蘊)ㆍ계(界)ㆍ처(處)들에서 |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모두 존재하지 않네. 누가 윤회하는 자이겠는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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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생사와 온ㆍ계ㆍ처는 동일한 의미이다. 만약 중생이 이 온ㆍ계ㆍ처에서 윤회한다고 한다면, 이 중생은 「불과 장작을 관찰하는 장[觀燃可燃品]」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었다. |
누가 온ㆍ계ㆍ처에서 윤회한다고 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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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몸에서 몸으로 윤회한다면 몸에 없는 것이리라. |
만약 몸이 없다면 윤회하지 않을 것이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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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중생이 윤회한다면 몸을 갖고서 윤회하는가, 몸을 갖지 않고서 윤회하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몸을 갖고서 윤회한다면 한 몸에서 다른 한 몸으로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회하는 자는 몸이 없을 것이다. 또 만약 이전에 이미 몸이 있었다면 다시 한 몸에서 다른 한 몸으로 가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이전에 몸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생사를 윤회하겠는가? |
[문] 경전에서는 “열반은 모든 고(苦)를 소멸시킨다. 이 소멸은 행(行)들의 소멸이거나 중생의 소멸일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
[답]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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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모든 행(行)이 소멸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결코 옳지 않네. |
만약 중생이 소멸한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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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대가 모든 행의 소멸이나 중생의 소멸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미 앞에서 답한 바 있다. 모든 행에는 자성이 없다. 중생도 여러 가지로 구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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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 187] 쪽 |
보아도 생사를 윤회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행도 소멸하지 않고 중생도 소멸하지 않는다. |
[문] 만약 그렇다면 계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을 것이다. 근본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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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모든 행(行)은 발생과 소멸의 상(相)을 띠고 있어서 계박되지도 해탈하지도 않네. |
중생 또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계박되지도 해탈하지도 않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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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모든 행과 중생이 계박되고 해탈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모든 행은 찰나찰나 발생해서 소멸하기 때문에 계박되고 해탈하지 않는다. 중생은 앞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계박되고 해탈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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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몸[身]을 계박이라 한다면 몸이 있는 것은 계박되지 않을 것이고 |
몸이 없는 것도 계박되지 않을 것이네. 어떤 것에 계박이 있겠는가?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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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5온(蘊)의 몸[身]을 계박(繫縛)이라 한다면, 중생이 이전에 5온이 있을 때는 계박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한 사람에게 두 몸이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몸이 없다면 또한 계박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몸이 없다면 5온이 없고 5온이 없다면 공하다. 그러니 어떻게 계박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세 번째 것3)은 계박되는 일이 없다. |
만약 계박될 것에 앞서 계박하는 것이 있다면 계박될 것을 계박하게 될 것이네. |
앞서 계박이 있지 않다. 그 밖의 것은 감과 옴에서 답한 대로이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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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계박될 것[可縛]에 앞서 계박하는 것[縛]이 있다면 계박될 것을 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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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온(蘊)의 몸을 가리키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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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 187] 쪽 |
박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계박될 것을 떠나 앞서 계박하는 것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중생에게 계박하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이는 중생이 ‘계박될 것’이고 5온이 ‘계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5온 중의 번뇌들이 ‘계박하는 것’이고 나머지 5온은 ‘계박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5온을 떠나 앞서 중생이 있다면 5온이 중생을 계박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5온을 떠나 별도로 중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5온을 떠나 별도로 번뇌가 있다면 번뇌가 5온을 계박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5온을 떠나 별도로 번뇌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미 간 것을 가지 않고, 아직 가지 않은 것을 가지 않고, 지금 가고 있는 것을 가지 않는다. 이렇듯이 아직 계박되지 않은 것을 계박하지 않고, 이미 계박된 것을 계박하지 않고, 지금 계박되고 있는 것을 계박하지 않는다. |
또 역시 해탈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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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박된 자는 해탈하지 않네. 계박되지 않은 자도 해탈하지 않네. |
지금 계박되고 있는 자가 해탈한다면 계박과 해탈이 동시일 것이네.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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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박된 자는 해탈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계박되었기 때문이다. 계박되지 않은 자도 해탈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계박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계박되고 있는 자가 해탈한다고 말한다면 계박과 해탈이 동시일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또 계박과 해탈은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문] 도(道)를 닦아서 현재에 열반에 들어가서 해탈을 얻은 자가 있다. 그런데 왜 없다고 말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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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법들에 취착하지 않는다면 나는 열반을 얻을 것이다.” |
만약 어떤 자가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다시 취착에 계박될 것이네.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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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자가 “나는 취착을 여의었으니 열반을 얻을 것이다”고 이와 같은 생각한다면, 이 자는 취착에 계박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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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 187]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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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를 떠나서 별도로 열반이 있는 것이 아니네. |
실상(實相)의 이치가 이와 같은데 어찌 분별하겠는가?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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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제일의(第一義)에서는 생사를 떠나 별도로 열반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경전에서는 “열반이 생사이고 생사가 열반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법들의 실상에서 어떻게 ‘이것이 생사이다’, ‘이것이 열반이다’ 하고 말하겠는가? |
17. 업을 관찰하는 장[觀業品] 33偈 |
[문] 그대가 비록 여러 가지로 법(法)들을 타파했지만, 업(業)은 확정되어 존재한다. 그래서 모든 중생이 과보를 받게 만든다. 경전에서 “모든 중생은 다 업대로 태어난다. 악한 자는 지옥에 들어가고, 복을 닦은 자는 천계에 태어나고, 도(道)를 수행하는 자는 열반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법들은 공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업이란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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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자기) 마음을 다스려 잡을 수 있고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
이것을 자선(慈善)이라 하네. 2세(世)의 과보의 씨앗이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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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3독(毒)4)이 있다. 타인을 뇌란(惱亂)하게 하기 위해서 일어난다. 선을 행하는 자는 먼저 스스로 악을 소멸시킨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을 다스려 잡고 타인을 이롭게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타인을 이롭게 한다”란,보시ㆍ지계ㆍ인욕 등을 행해서 타인을 뇌란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타인을 이롭게 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자선(慈善)과 복덕(福德)이라고도 하고 금세와 후세의 즐거운 과보의 씨앗이라고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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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탐욕[貪]ㆍ증오[瞋]ㆍ무지[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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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 187] 쪽 |
위대한 성인께서 두 업(業), 즉 사(思)와 사(思)에서 생긴 것을 말씀하셨네. |
이 업의 종류를 여러 가지로 구별해서 말씀하셨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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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위대한 성인께서는 업에는 크게 보아 두 종류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는 사(思)이고 또 하나는 사(思)에서 생긴 것이다. |
이 두 업을 아비달마에서 어떻게 상술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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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思)란 이른바 의업(意業)이네. |
사(思)에서 생긴 것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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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思)는 심소법(心所法)이다. 심소법들 중에서 ‘능동적인 일어남[能發起]’에는 지음[所作]이 있기 때문에 업(業)이라 하는 것이다. 이 사(思)에 의존해서 바깥의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 일어난다. 그 밖의 심법(心法)과 심소법에도 지음[所作]이 있지만 오직 사(思)만이 지음[所作]의 근본이기 때문에 사(思)를 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
이제 이 업의 특성을 설명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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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업과 구업, 작업(作業)과 무작업(無作業), |
이 넷에는 선(善)도 있고 불선(不善)도 있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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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하는 데서 생기는 복(福)과 죄(罪)도 이와 같네. |
그리고 사(思)가 일곱째가 되네. 업의 특성을 밝힌 것이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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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업(口業)이란 네 가지 구업이다. 신업(身業)이란 세 가지 신업이다. 이 일곱 가지 업에는 두 종류의 구별이 있다. 작업(作業)과 무작업(無作業)이다. 지금 짓고 있을 때의 것을 작업(作業)5)이라고 하고, 짓고 난 후에도 항상 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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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표업(表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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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니며 일어나는 것을 무작업(無作業)6)이라고 한다. 이 두 종류에는 선(善)과 불선(不善)이 있다. 불선이란 악을 그치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선이란 악을 그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또 향유[用]하는 데서 생기는 복(福)이 있다. 예를 들어 베푸는 자가 받는 자에게 베풀 때 만약 받는 자가 받아서 향유[受用]한다면 베푸는 자는 두 종류의 복을 얻는다. 하나는 베풂에서 생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받는 자가) 향유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화살로 다른 사람을 쏠 경우 만약 화살로 다른 사람을 죽인다면 두 종류의 죄가 있게 된다. 하나는 (화살을) 쏨에서 생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죽임에서 생기는 것이다. 만약 쏘긴 했으나 죽이지 않았다면 쏜 사람은 쏜 죄를 얻을 뿐이지 죽인 죄는 없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죄와 복은 향유하는 데서 생긴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여섯 종류의 업7)이라고 한다. 일곱째는 사(思)라 한다. 이 일곱 종류는 업의 특성을 구별한 것이다. 이 업은 금세와 후세의 과보를 갖는다. 그러므로 업이 확정되어 존재하고 과보가 확정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법들은 공하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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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만약 업(業)이 과보(果報)를 받을 때까지 머문다면 이 업은 상주하는 것이 되리라. |
만약 소멸한 것이라면 업이 없는데 어떻게 과보를 낳겠는가?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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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업이 과보를 받을 때까지 머문다면 이것은 상주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업은 발생해서 소멸하는 것이어서 한 찰나도 머물지 않는데 어떻게 과보를 받을 때까지 머물겠는가? 만약 업은 소멸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소멸한 것은 무(無)이다. 그런데 어떻게 과보를 낳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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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컨대 싹 등의 상속(相續)은 모두 씨로부터 생기고 |
이것에서 열매[果]가 생기네. 씨가 없다면 상속이 없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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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무표업(無表業). |
7) 작업(作業)과 부작업(不作業), 선(善)과 불선(不善), 죄(罪)와 복(福)의 여섯 가11지를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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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로부터 (싹 등의) 상속이 있고 (싹 등의) 상속으로부터 열매가 있으니 |
씨를 앞으로 해서 뒤에 열매가 있는 것이므로 (씨와 열매는) 단멸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네.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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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이 최초의 마음[心]으로부터 마음[心法]의 상속이 생기고 |
이것으로부터 과보가 있네. 마음이 없다면 (마음의) 상속이 없네.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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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부터 (마음의) 상속이 있고 상속으로부터 과보(果報)가 있으니 |
업(業)을 앞으로 하고 뒤에 과보가 있는 것이므로 단멸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네.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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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곡식의 씨로부터 싹이 있고 싹으로부터 줄기와 잎 등의 상속(相續)이 있고 이 상속으로부터 열매[果]가 생긴다. 씨가 없으면 상속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곡식의 씨로부터 상속이 있고 상속으로부터 열매[果]가 있는 것이다. 씨를 앞으로 해서 뒤에 열매가 있다. 그러므로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는다. 곡식의 씨의 비유와 같이 업(業)의 과보(果報)도 이와 같다. 최초의 마음[心]이 죄와 복을 일으키는 것이 마치 곡식의 씨가 열매를 낳는 것과 같다. 이 마음이 원인이 되어서 그 밖의 심법과 심소법의 상속이 생기고 나아가 과보가 생긴다. 업을 앞으로 하고 과보를 뒤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는다. 만약 업이 없이 과보가 있다면 단멸함과 상주함이 있는 것이다. |
이 선업의 인연과 과보란, 이른바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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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福)을 성취하는 것은 10백업도(白業道)이네. |
2세(世)의 5욕락(欲樂)8)은 깨끗한 업[白業]의 과보이네.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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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色(색)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다섯 경계를 향략(享樂)하는 것이다. |
‘깨끗한[白]’이란, 선하고 청정한 것이다. ‘복의 인연을 성취하는 것’이란 이 10백업도(白業道)9)에 의지해서 살생하지 않고[不殺] 도둑질하지 않고[不盜] 그릇된 성관계를 하지 않고[不邪婬] 거짓말하지 않고[不妄語] 이간질하지 않고[不兩舌] 욕하지 않고[不惡口] 꾸미는 말을 하지 않고[不無益語] 질투하지 않고[不嫉] 증오하지 않고[不恚] 그릇되게 보지 않는 것[不邪見]이다. 이것을 선(善)10)이라 한다. 몸[身]과 말[口]과 생각[意]으로부터 이 과보가 생기는 자는 금세에 명예와 이득을 얻고 후세에 천계나 인간계의 귀한 곳에 태어난다. 보시나 공경(恭敬) 등에는 여러 가지 복[福德]이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10선도(善道)에 들어가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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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만약 그대처럼 분별한다면 그 과실이 매우 클 것이네. |
그러니 그대가 말한 것은 옳지 않네.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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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업과 과보가 상속하기 때문에 곡식을 비유로 삼은 것이라면 그 과실이 매우 크다. 그러나 이것11)에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대가 곡식의 비유를 말한다면 이 비유는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곡식은 만질 수 있고 형체가 있어서 상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이 점을 생각해 보니 이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물며 마음[心]과 업(業)과 같이 만질 수 없고 형체가 없으며 볼 수 없는 것이랴? 발생하고 소멸하기에 머묾이 없는 것인데 상속(相續)을 바란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곡식의 씨로부터 상속이 있다고 한다면 소멸하고 난 후에 상속하는 것인가,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하는 것인가? 만약 곡식의 씨가 소멸하고 난 후에 상속한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리라. 만약 곡식의 씨가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한다면 이 곡식의 씨에서 항상 곡식이 생기리라. 만약 이와 같다면 한 톨의 곡식의 씨가 모든 세간의 곡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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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0선업도(善業道) 또는 10선도(善道)라고도 한다. |
10) 10선(善)이다. |
11) 바로 앞의 게송을 가리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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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생기게 할 것이니 이것도 옳지 않다. 그러므로 업과 과보가 상속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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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제 다시 부처님들과 벽지불들과 성자들이 찬탄한 |
업(業)과 과보(果報)에 부합하는 이치를 설명하겠네.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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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다음 게송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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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실되지 않는 법(法)은 채권과 같고 업(業)은 빚진 재물과 같네. |
이것의 성품은 무기(無記)이고 분별하면 네 종류가 있네.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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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제(諦)를 봄으로써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사유(思惟)함으로써 끊어지는 것이네. |
이 망실되지 않는 법 때문에 모든 업들에는 과보가 있네.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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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4제를 봄으로써 끊어지고 업이 서로 유사하게 이전(移轉)한다면 |
업을 파괴하는 따위와 같은 과실이 있게 되네.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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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업은 서로 유사하든 유사하지 않든 |
한 계(界)에서 최초로 몸을 받을 때 그 때 과보가 홀로 발생하네.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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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두 종류의 업은 현세에 과보를 받네. |
어떤 이는 과보를 받고 난 후에도 업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하네.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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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를 넘어서고 난 후에 소멸하거나 죽고 난 후에 소멸하네. |
이것에 있어서 유루(有漏)와 무루(無漏)를 구별하네.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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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실되지 않는 법[不失法]은 채권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업(業)은 취한 물건과 같다. 이 망실되지 않는 법은 욕계(欲界)에 매여 있는 것이든가, 색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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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界)에 매여 있는 것이든가, 무색계(無色界)에 매여 있는 것이든가, 아무 계(界)에도 매여 있지 않는 것이든가이다. 선ㆍ악ㆍ무기(無記) 중에서 어느 것인가 구별해 보면 이것은 무기일 따름이다. 이 무기의 의미는 아비달마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12) |
4제를 봄으로써 끊어지는 것[見諦所斷]13)이 아니다. 한 과보에서 다른 한 과보에 이르는 도중에 사유(思惟)함으로써 끊어지는 것[思惟所斷]14)이다. 그러므로 모든 업들에는 망실되지 않는 법 때문에 과보가 발생한다.15) |
만약 4제(諦)를 봄으로써 끊어지고 업이 서로 유사하게 이전(移轉)한다고 한다면 업(業)을 파괴하는 과실을 얻게 된다. 이것은 아비달마에서 자세히 말하고 있다.16) |
또 망실되지 않는 법이란, 한 계(界)에서 모든 업이 서로 유사하든 유사하지 않든 최초로 몸을 받을 때 과보가 홀로 발생한다.17) |
현재의 몸에 있어서 업에서 다시 업이 발생한다. 이 업에는 두 종류가 있다. 무거움에 따라서 과보를 받는다. 어떤 이는 “이 업은 과보를 받고 난 후에도 업이 여전히 남아 있다. 찰나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18) |
‘(망실되지 않는 법이) 과보를 넘어서고 난 후나 죽고 난 후에 소멸하네’란, 수다원(須陀洹) 등은 과보를 넘어서고 난 후에 (망실되지 않는 법이) 소멸하고, 모든 범부와 아라한은 죽고 난 후에 소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있어서 유루와 무루를 구별하네’란, 수다원 등의 모든 성인들에서 유루와 무루 등을 구별한다는 것이다.19) |
[답] 이 주장들은 모두 단멸과 상주의 과실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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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상은 게송 13을 풀이한 것이다. |
13) 견도(見道)에서 끊어지는 것이라는 견도소단(見道所斷)과 같은 의미이다. |
14) 수도(修道)에서 끊어지는 것이라는 수도소단(修道所斷)과 같은 의미이다. |
15) 이상은 게송 14를 풀이한 것이다. |
16) 이상 게송 16를 풀이한 것이다. |
17) 이상 게송 17를 풀이한 것이다. |
18) 이상 게송 18를 풀이한 것이다. |
19) 이상 게송 19를 풀이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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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정할 수 없다. |
[문] 만약 그렇다면 업과 과보가 없는 것이 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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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공하다 해도 단멸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한다 해도 상주하는 것이 아니네. |
업과 과보의 망실되지 않는 법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네.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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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서에서 말하는 이치는 단멸함과 상주함를 떠난 것이다. 왜 그러한가? 업(業)은 완전히 공해서 적멸해 있기 때문이다.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떤 법이 단멸할 수 있고 어떤 법이 망실될 수 있겠는가? 전도(顚倒) 때문에 생사를 윤회하는 것이다. 또한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만약 법이 전도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이것은 허망해서 진실이 없는 것이다. 진실이 없으니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 또 전도를 탐착(貪著)해서 실상(實相)을 알지 못하기에 “업의 망실되지 않는 법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네” 하고 (게송에서) 말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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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업은 본래 발생하지 않네. 확정된 자성이 없기 때문이네. |
모든 업은 소멸하지도 않네.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네.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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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업에 자성이 존재한다면 이는 상주하는 것이네. |
짓지 않은 것도 업(業)이네. 상주하는 것은 짓지 못하네.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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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짓지 않은 업이 존재한다면 짓지 않았는데도 죄가 있게 되고 |
범행을 끊지 않았는데도 청정하지 못하다는 과실이 있게 되네.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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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모든 세간 언설의 법을 파괴하게 되네. |
또한 죄를 짓는 것과 복을 짓는 것의 차별이 없어지게 되네. (24) |
만약 업이 확정되어 있어서 자체에 자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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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를 받고 난 후에 다시 받게 될 것이네.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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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모든 세간의 업이 번뇌에서 발생한다고 한다면 |
이 번뇌가 실체가 없는데 업에 어떻게 실체가 있겠는가?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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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제일의(第一義)에서 모든 업(業)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발생하지 않기에 소멸하지 않는다. 상주하기에 소멸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20) |
그렇지 않다면 업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할 것이다. 만약 업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이는 상주하는 것이다. 상주하는 것이라면 업을 짓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상주하는 법은 (무엇이든) 짓지 못하기 때문이다.21) |
또 만약 짓지 않은 업이 존재한다면 다른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도 이 사람이 과보를 받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이 범행(梵行)22)을 끊었는데도 이 사람이 죄가 있게 되어 세속의 법을 파괴하게 된다. 만약 먼저 존재한다고 한다면 겨울이 봄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봄이 여름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등 이와 같은 과실들이 있게 될 것이다. 또 복을 짓는 것과 죄를 짓는 것의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보시나 지계 등의 업을 일으키는 것을 복을 짓는 것이라고 하고 살생이나 도둑질 등의 업을 일으키는 것을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 짓지 않았는데도 업이 존재한다면 구별이 없게 될 것이다.23) |
만약 업이 확정되어 있어서 자성이 존재한다면 일시에 과보를 받고 난 후에 또 다시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망실되지 않는 법이기 때문에 과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와 같은 과실들이 있게 된다.24) |
또 만약 업이 번뇌로부터 발생한다고 한다면 이 번뇌는 확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표상하는 분별[憶想分別]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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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상 게송 21를 풀이한 것이다. |
21) 이상 게송 22를 풀이한 것이다. |
22) 청정행(淸淨行)으로 음욕(婬欲)을 끊는 행위 등을 뜻한다. |
23) 이상 게송 23과 24를 풀이한 것이다. |
24) 이상 게송 25를 풀이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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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번뇌가 실체가 없는데 업이 어떻게 실체가 있겠는가? 왜냐 하면, 자성이 없는 것에 의존하기에 업도 또한 자성이 없는 것이 때문이다.25) |
[문] 모든 번뇌와 업이 자성이 없고 실체가 없다고 하는데 금세의 과보의 몸이 지금 분명히 존재하니 실체가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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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모든 번뇌와 업은 몸[身]의 인연이라고 말씀하시네. |
모든 번뇌와 업이 공한데 하물며 모든 몸이랴?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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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인들께서 번뇌와 업은 몸의 인연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중에서 갈애(渴愛)가 능히 생(生)을 윤택하게 하고 업(業)이 능히 상(上)과 중(中)과 하(下)나 아름답고 추하거나 귀하고 천한 따위의 과보를 생기게 한다. 이제 모든 번뇌와 업은 여러 가지로 구해 보아도 확정된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하물며 모든 몸에게 확정된 것이 존재하겠는가? 과보는 인연을 따르기 때문이다. |
[문] 그대가 비록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업과 과보를 타파했지만 경전에서 곧 “업을 일으키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업을 일으키는 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업이 존재하고 과보가 존재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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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에 덮여 있고 갈애에 묶여 있으니 |
본래의 지은 자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네.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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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경(無始經)』에서는 “중생은 무명에 덮여 있고 갈애의 결(結)26)에 묶여 있어서 무시의 생사를 윤회하며 여러 가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업보를) 받는 자는 앞서 지은 자와 같지도 않고 다르지 않다. 만약 (업보를 받는) 바로 그 사람이 죄를 지었기에 소의 형체를 받는다고 한다면, (답한다) 사람은 소가 되지 않고 소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만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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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이상 게송 26를 풀이한 것이다. |
26) 중생을 미혹의 경계에 결박한다는 뜻이다. 번뇌의 다른 이름이며 결사(結使)라고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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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고 한다면, 업과 과보를 상실하게 되어 원인이 없다는 견해에 떨어진다. 원인이 없다면 단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받는 자는 앞서 지은 자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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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업은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
그러므로 업을 일으키는 자는 있지 않네.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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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도 있지 않고 (업을) 짓는 자도 있지 않은데 어떻게 업이 과보를 생기게 하겠는가? |
과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과보를 받는 자가 있겠는가?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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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도 있지 않고 업을 짓는 자도 있지 않은데 어떻게 업에서 과보가 생기겠는가? 과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과보를 받는 자가 있겠는가? 업에는 세 종류가 있다. 5온(蘊)에 임시로 사람이란 이름을 붙여 짓는 자[作者]라고 하는 것이다. 이 업이 선처(善處)나 악처(惡處)를 생기게 하는데, 이것을 과보라 한다. 업을 일으키는 자도 없는데 하물며 업이 있고 과보가 있고 업을 일으키는 자가 있겠는가? |
[문] 그대가 비록 여러 가지로 업ㆍ과보ㆍ업을 일으키는 자를 타파했지만 지금 분명히 중생이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것이 보인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
[답]마치 세존께서 신통력으로 만들어 낸 화인(化人)이 있고 |
이 화인이 다시 화인을 화작(化作)해 내는 것과 같네.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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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처음의 화인이 짓는 자이고 |
화인이 만들어 낸 것이 업(業)인 것과 같네.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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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번뇌와 업, 짓는 자와 과보는 |
모두 환영이나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고 메아리와 같네.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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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만들어 낸 화인(化人)이 있고 이 화인이 다시 화인을 화작(化作)해 내는 것과 같다. 마치 화인이 실체가 없고 단지 눈에 보이기만 하는 것과 같다. 또 화인은 입으로 설법을 행하고 몸으로 보시 따위를 행하는데 이 행위[業]들은 실체가 없지만 눈에 보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태어나고 죽는 몸의 짓는 자와 업도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27) |
모든 번뇌란 3독(毒)을 말한다. 자세히 나누어 말하면 98사(九十八使),28) 9결(九結)29), 10전(十纏)30), 6구(六垢)31) 따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뇌들이 있다. 업이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의업(意業)을 말한다. 금세와 후세에 의거해서 구별하면, 선과 불선과 무기, 고보(苦報)와 낙보(樂報)와 불고불락보(不苦不樂報), 현보업(現報業)32)과 생보업(生報業)33)과 후보업(後報業)34)이 있다. 이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짓는 자[作者]들을 모든 번뇌와 업을 일으키고 과보를 받는 자라고 한다. 과보란 선업이나 악업에서 무기의 5온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업들은 다 공해서 자성이 없으니 마치 환영과 같고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고 메아리와 같다.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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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이상 게송 31ㆍ32를 풀이한 것이다. |
28) 98수면(睡眠)이라고도 한다. 번뇌들의 근본인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의 10수면(睡眠)을 3계(界)의 5부(部)에 배당한 것이다. 3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이고 5부는 고제, 집제, 멸제, 도제의 4제(諦)와 수도(修道)를 합한 것이다. 결국 98수면은 88견혹(見惑)과 10수혹(修惑)를 말한다. |
29) 애(愛)ㆍ에(恚)ㆍ만(慢)ㆍ무명(無明)ㆍ견(見)ㆍ취(取)ㆍ의(疑)ㆍ질(嫉)ㆍ간(慳) 등이다. 이는 여섯 근본번뇌에다 질(嫉)과 간(慳)을 더한 것이다.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악견(惡見)이 여섯 근본번뇌인데 이 가운데 악견을 다섯으로 나누어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은 견결(見結)이라 하고 견취견(見取見)과 계금취견(戒禁取見)은 취결(取結)이라 하기 때문에 일곱이 되는 것이다. |
30) 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질(嫉)ㆍ간(慳)ㆍ회(悔)ㆍ수면(睡眠)ㆍ도거(掉擧)ㆍ혼침(惛沈)ㆍ분(忿)ㆍ부(覆)의 10수번뇌(隨煩惱)이다. |
31) 뇌(惱)ㆍ해(害)ㆍ한(恨)ㆍ첨(諂)ㆍ광(誑)ㆍ교(憍)의 6수번뇌이다. |
32) 금생(今生)에 과보를 받게 하는 업이다. |
33) 바로 다음 생(生)에 과보를 받게 하는 업이다. |
34) 다음 생 이후의 생에 과보를 받게 하는 업이다. |
35) 이상 게송 33을 풀이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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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법을 관찰하는 장[觀法品] 12偈 |
[문] 만약 모든 법이 완전히 공하고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면 이것을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라고 한다. (모든 법의 실상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
[답] ‘나[我]’와 ‘나의 것[我所]’에 대한 집착을 없앴기 때문에 모든 법들이 공(空)하고 무아(無我)인 지혜를 얻는다. 이것을 (모든 법의 실상에) 들어간다고 한다. |
[문] 어떻게 모든 법들이 무아라는 것을 아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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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만약 ‘나’(我)가 곧 5온이라면 ‘나’는 생멸하는 것이리라. |
만약 ‘나’가 5온과 다르다면 5온의 상(相)을 갖는 것이 아니리라.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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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나의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
‘나’와 ‘나의 것’을 소멸시켜서 무아의 지혜를 얻는다고 하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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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의 지혜를 얻은 사람은 진실을 보네. |
무아의 지혜를 얻은 사람은 드무네. (3) |
안이든 바깥이든 ‘나’와 ‘나의 것’이 모두 소멸해서 있지 않으니 |
취착[受]들이 소멸하게 되네. 취착이 소멸하니 몸도 소멸하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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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과 번뇌가 소멸했으니 이를 해탈이라 하네. |
업과 번뇌는 실재하지 않네. 공성에 들어가면 희론이 소멸하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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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처님께서는 ‘나가 있다’고도 말씀하시고 ‘나가 없다’고도 말씀하시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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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 187] 쪽 |
모든 법들의 실상(實相)에서는 ‘나가 있다’고도 ‘나가 없다’고도 말씀하시지 않네.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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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들의 실상에는 마음의 작용과 언설이 끊어져 있네. |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아 적멸해서 열반과 같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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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진실이다, 진실이 아니다, 진실이기도 하고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 |
진실인 것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네.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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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아는 것이기에 다른 것을 따르지 않으며, 적멸해 있고, 희론이 없으며, |
수다한 것이 없고, 분별이 없는 것, 이것을 실상이라고 하네.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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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법이 연에서 발생했다면 연과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네. |
그러므로 실상은 단멸하는 것도 상주하는 것도 아니네.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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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단멸하는 것도 아니네. |
이것을 모든 세존들의 교화(敎化)의 감로의 맛이라 하네. (11) |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아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
모든 벽지불들의 지혜가 세속을 멀리함으로부터 나오네.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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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나[神]’36)가 있다고 말한다. (이 ‘나’는)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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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원문의 신(神)은 아뜨만(ātman)를 한역한 것이다. 아(我)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말이기에 ‘나’로 번역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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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온이 곧 ‘나’이든가 5온을 떠나 ‘나’가 있든가이다. 만약 5온이 곧 ‘나’라면 ‘나’는 생멸의 상(相)을 띨 것이다. 게송에서 “만약 ‘나’가 곧 5온이라면 생멸의 상을 띨 것이네” 하고 말한 바와 같다. 왜 그러한가? 발생하고서 괴멸하는 것이니 생멸의 상을 띠기 때문이다. 5온은 무상하다. 5온이 무상한 것과 같이 발생과 소멸 두 법도 또한 무상하다. 왜 그러한가? 발생과 소멸도 또한 발생하고서 괴멸하는 것이니 무상하다. 만약 ‘나’가 곧 5온이라면, 5온이 무상하기에 나도 또한 무상해서 생멸의 상을 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5온을 떠나 ‘나’가 있다면 나는 5온의 상(相)을 띠지 않을 것이다. 게송에서 “만약 ‘나’가 5온과 다르다면 5온의 상을 띠지 않을 것이네” 하고 말한 바와 같다. |
그러나 5온을 떠나 다시 법(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5온을 떠나 법이 있다면 어떤 상(相)의 어떤 법이 있겠는가? 만약 ‘나’가 허공과 같아서 5온을 떠나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6계(界)를 타파하는 장」37)에서 이미 타파되었다. 허공은 법이 있지 않은 것이기에 허공이라 한다. 만약 믿을 수 있기에 ‘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믿을 수 있는 것에는 네 종류가 있다. 첫째, 감관에 지각되는 것[現事]은 믿을 수 있다. 둘째, 추리[比知]는 믿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연기를 보고 불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셋째, 비유(譬喩)는 믿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나라에 구리[鍮石]가 없을 때 그것을 금과 같다고 비유하는 것이다. 넷째,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기에 믿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인께서) 지옥이 있고 천계가 있고 울단왈(鬱單曰)38)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보지 않은 사람은 성인의 말씀을 믿기에 아는 것이다.39) 이 ‘나’는 모든 믿을 수 있는 것에서 얻을 수 없다. 감관[根]에 지각되는 것에도 없고 추리되는 것에도 없다. 왜 그러한가? 추리란 이전에 본 것이기 때문에 후에 추량해서 아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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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제5 「6계를 관찰하는 장[觀六種品]」을 가리킨다. |
38) 범어 uttarakura의 음역으로 수미산 4대주(大洲)의 하나이며 북쪽에 위치한다. 북구로(北拘盧)라고도 한다. |
39) 이상 네 종류의 믿을 수 있는 것을 순서대로 현량(現量)ㆍ비량(比量)ㆍ비유량(譬喩量)ㆍ성언량[聖言量]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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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전에 불에 연기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후에 연기만을 보고서도 불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누가 이전에 ‘나’와 5온이 합해 있는 것을 보고서 후에 5온을 보고서 ‘나’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인가? |
만약 세 종류의 추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첫째는 전에 본 대로 아는 추리[如本]이고, 둘째는 남아 있는 것을 아는 추리[如殘]이고, 셋째는 공통점을 보아서 아는 추리[共見]이다. ‘전에 본 대로 아는 추리’[如本]란, 이전에 불에 연기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지금 연기를 볼 때 전에 본 대로(如本) 불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을 아는 추리’[如殘]란, 예를 들어 밥을 지을 때 쌀 한 톨이 익었어도 남은 것들이 모두 익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공통점을 보아서 아는 추리’[共見]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 곳에서 가서 저 곳에 다다르는 것이 눈에 보일 때 그 가는 것(去)도 보이듯이, 태양도 그러해서 동쪽에서 나와 서쪽에 다다를 때 가는 것이 보이지 않더라도 사람에게 가는 것[去相]이 있기 때문에 태양도 간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괴로움과 즐거움, 미움과 사랑, 지각[覺]과 인식[知] 등도 의지하는 곳이 있어야 한다. 마치 백성을 볼 때 (그들이) 반드시 왕에게 의지하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공통점을 보아서 아는 추리[共相]에서 생기는 믿음은, 이전에 사람과 가는 것[去法]이 합해서 다른 곳에 다다르는 것을 보고서 후에 태양이 다른 곳에 다다르기에 (태양에) 가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전에 5온과 ‘나’가 합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후에 5온을 보고서 ‘나’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공통점을 보아서 아는 추리[共相比知]에 의거해서도 ‘나’가 있지 않다. 성인의 말씀에 의거해서도 ‘나’가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성인의 말씀은 모두 전에 눈으로 본 것을 후에 말씀하신 것이다. 또 성인들께서 하시는 다른 말씀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옥 따위를 말씀하셔도 믿을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전에 ‘나[神]’를 보고서 후에 말씀하시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믿을 수 있는 것 등 믿을 수 있는 것 중에서 ‘나’를 구할 수 없다. ‘나’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5온을 떠나 별도로 ‘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근(根)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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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파하는 장」40)에서 봄ㆍ보는 자ㆍ봄의 대상이 타파되었기에 ‘나’도 또한 같은 방식으로 타파된다. 또 눈에 보이는 거치른 법[鹿法]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허망한 기억과 표상 따위에 의해 존재하는 ‘나[神]’이랴? 그러므로 ‘나[我]’가 없다는 것을 안다.41) |
‘나[我]’가 있기에 ‘나의 것[我所]’이 있는 것이다. 만약 ‘나’가 없다면 ‘나의 것’이 없을 것이다. 8성도(聖道)의 분지를 수습(修習)해서 ‘나’와 ‘나의 것’의 인연을 소멸시켜서 ‘나’가 없고 나의 것이 없는 결정적인 지혜를 얻는다.42) |
또 ‘나’가 없고 ‘나의 것’이 없는 것이란,제일의제에서는 또한 얻을 수 없다. ‘나’가 없고 ‘나의 것’이 없는 사람은 모든 법들을 진실되게 볼 수 있다. 범부는 ‘나’와 ‘나의 것’이 혜안(慧眼)을 덮기에 진실을 볼 수 없다. 이제 성인은 ‘나’와 ‘나의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번뇌들이 소멸하고, 모든 번뇌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모든 법들의 실상을 볼 수 있다.43) |
안과 바깥에서 ‘나’와 ‘나의 것’이 소멸했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모든 취착이 소멸했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후세의 몸이 모두 또한 소멸한다. 이것을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고 말한다.44) |
[문] 유여열반(有餘涅槃)은 무엇인가? |
[답] 모든 번뇌와 업이 소멸했기에 마음은 해탈을 얻는다고 한다. 이 모든 번뇌와 업은 다 기억과 표상의 분별에서 발생한 것이라서 실체가 없다. 모든 기억과 표상의 분별은 다 희론에서 발생한 것이다. 모든 법들의 실상인 완전한 공성을 얻으면 모든 희론이 소멸한다. 이것을 유여열반이라고 말한다.45) |
실상(實相)의 법은 이와 같다.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모든 지혜[一切智]로써 중생을 관찰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니, ‘나가 있다’고도 말씀하시고 ‘나가 없다’고도 말씀하신다. 만약 마음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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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제3 「6근을 관찰하는 장[觀六情品]을 가리킨다. |
41) 이상 게송 1를 풀이한 것이다. |
42) 이상 게송 2를 풀이한 것이다. |
43) 이상 게송 3을 풀이한 것이다. |
44) 이상 게송 4를 풀이한 것이다. |
45) 이상 게송 5를 풀이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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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면 아직 열반의 요소를 갖고 있지 않고 죄를 두려워할 줄 모른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나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도(道)를 얻은 사람이라면 모든 법들이 공해서 단지 가명(假名)에 의해서만 ‘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나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해도 과실이 없다. 또 보시나 지계 등 복덕(福德)이 있는 사람이라면 생사의 고뇌를 싫어하고 멀리하지만 열반이 영원한 소멸은 아닐까 두려워한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위해 ‘나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법들은 단지 인과 연들이 화합한 것일 뿐이라서 발생할 때는 공(空)하게 발생하고 소멸할 때는 공하게 소멸한다. 그러므로 ‘나가 없다’고 말씀하시고 단지 가명(假名)에 의해서만 ‘나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또 도(道)를 얻은 사람은 ‘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되 단멸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가 없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해도 과실이 없다. 그래서 게송에서 “모든 부처님께서 ‘나가 있다’고도 말씀하시고 ‘나가 없다’고도 말씀하시네. 진실(眞實)에서는 ‘나가 있다’고도 ‘나가 없다’고도 말씀하시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
[문] 만약 ‘나가 없다’는 것이 진실인데 단지 세속에 의해서 ‘나가 있다’고 말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답] ‘나[我法]’가 타파된 것에 의존해서 ‘나가 없다’는 것이 있는 것이다. ‘나’의 확정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나가 없다’는 것이 있겠는가? 만약 ‘나가 없다’는 것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이것은 단멸(斷滅)이고 그래서 탐착(貪著)이 발생한다. 『반야경』에서 “보살은 ‘나가 있다’고 하며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나가 없다’고 하며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46) |
[문] 만약 ‘나’ㆍ‘나’가 없음[無我]ㆍ공함ㆍ공하지 않음을 말하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가르침[佛法]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
[답] 부처님은 모든 법들의 실상을 말씀하신다. 실상에는 언설의 길이 없고 마음의 작용이 소멸해 있다. 마음은 상(相)을 파악하는 연(緣)에 의해 발생하고 선세의 업의 과보로서 존재하는 것이어서 법들을 진실되게 볼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의 작용이 소멸해 있다고 말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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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이상 게송 6를 풀이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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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모든 범부들의 마음이 진실을 볼 수 없다면 성인들의 마음이 진실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모든 마음의 작용이 소멸해 있다고 말하는가? |
[답] 모든 법들의 실상이 곧 열반이다. 열반은 소멸이다. 이 소멸47)은 열반으로 향하기 때문에 소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곧 진실이라면 왜 공(空) 등의 해탈문48)을 쓰겠는가? 모든 선정 중에서 왜 멸진정을 으뜸으로 여기겠는가? 또 그리하여 마침내 무여열반으로 돌아가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마음의 작용은 다 허망한 것이고 허망한 것이기에 소멸한다. 모든 법들의 실상이란, 모든 심소법들을 일어나게 하지만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다. 적멸해 있는 것이 마치 열반과 같다. |
[문] 경전에서 “모든 법들은 본래 적멸해 있는 것이어서 곧 열반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왜 굳이 열반과 같다고 말하는가? |
[답] 법에 집착하는 자들은 법에 두 종류 즉 세간과 열반이 있다고 분별해서, 열반을 적멸이라고 말하지 세간을 적멸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 논서에서는 모든 법들이 공해서 적멸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법에 집착하는 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열반을 비유로 삼은 것이다. 열반의 특징[相]은 공하고 상(相)이 없고 적멸해 있고 희론이 없다. 모든 세간의 법들도 이와 같다.49) |
[문] 만약 부처님께서 ‘나’, ‘나가 없다’, ‘마음의 작용이 소멸해 있다’, ‘언설의 길이 끊어져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을 때는 어떻게 사람들이 모든 법들의 실상을 알게 하도록 하시는가? |
[답]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무량한 방편의 힘으로 모든 법들은 확정된 상(相)이 없기에 중생을 제도하고자 어떤 때는 “모든 것이 진실이다”고 말씀하시고, 어떤 때는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다”고 말씀하시고, 어떤 때는 “모든 것이 진실이기도 하고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고 말씀하시고, 어떤 때는 ‘모든 것이 진실인 것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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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마음의 작용의 소멸을 뜻한다. |
48)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해탈문의 3해탈문을 말한다. |
49) 이상은 게송 7를 풀이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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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실이다‘란,모든 법들의 진실성을 궁구해 보면 모두 제일의(第一義)의 평등하고 동일한 상(相), 말하자면 상(相)이 없는 것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마치 강물들은 색깔이 다르고 맛이 다른데 큰 바다로 들어가면 색깔도 같아지고 맛도 같아지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다’란, 모든 법들이 아직 실상(實相)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 각각을 구별해서 관찰해 보면 다 진실성이 없고 단지 연들이 화합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진실이기도 하고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란,중생은 상과 중과 하 세 부류가 있어서 상급의 중생은 모든 법들의 상(相)이 진실인 것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관찰하고, 중급의 중생은 모든 법들의 상(相)이 모두 진실이고 모두 진실이 아니라고 관찰하며, 하급의 중생은 지혜의 힘이 얕기 때문에 모든 법들의 상(相)이 일부는 진실이고 일부는 진실이 아니라고 관찰한다는 것이다. 즉 열반은 무위법(無爲法)이라서 파괴되지 않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관찰하고 생사는 유위법(有爲法)이라서 허위(虛僞)이기 때문에 진실이 아니라고 관찰한다. ‘진실인 것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란, 진실이기도 하고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을 타파하기 위해 진실인 것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
[문] 부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非有非無]도 떠나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가? |
[답] 다른 곳에서는 네 가지의 탐착50)을 타파하고자 말씀하셨지만 여기서는 그 4구(句)51)에 희론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도(道)를 얻는다. 그래서 진실인 것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2) |
[문] 부처님께서 이 4구(句)을 방편삼아 말씀하신 것은 알겠다. 또 모든 법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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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있는 것[有], 없는 것[無], 있는 것이면서 없는 것[亦有亦無],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非有非無]에 대한 네 가지 탐착이다. |
51) 모든 것이 진실이다’,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다’, ‘모든 것이 진실이기도 하고 진실 아니기도 하다’, ‘모든 것이 진실인 것도 아니고 진실 아닌 것도 아니다’의 4구이다. |
52) 이상 게송 8을 풀이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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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실상을 얻은 사람을 어떤 특징을 보고 알아낼 수 있겠는가? 또 실상이란 무엇인가? |
[답] 만약 다른 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모든 법들의 실상을 얻은 사람이다.) 다른 것을 따르지 않는다란, 만약 외도(外道)가 비록 신력(神力)를 나타내어 ‘이것이 도(道)이다’, ‘이것은 도(道)가 아니다’ 하고 말하더라도, 스스로 그 마음을 믿기에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 더 나아가 변신(變身)을 했을 때 비록 부처님이 아닌 줄은 알지 못하더라도 실상을 잘 요해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돌어서질 않는다. 이것에는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기에 적멸의 상이라고 한다. 적멸의 상이기에 희론에 의해 희론되지 않는다. 희론[戱論]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애론(愛論)53)이고 또 하나는 견론(見論)54)이다. 이것에는 이 두 희론이 없다. 이 두 희론이 없기에 기억하고 표상하는 분별[憶想分別]이 없어서 다름의 상(相)이 없다. 이것을 실상(實相)이라고 한다.55) |
[문] 만약 모든 법들이 완전히 공하다면 단멸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또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면 행여 상주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
[답] 그렇지 않다. 앞에서 “실상에는 희론이 없으며 마음의 상이 적멸해 있고 언설의 길이 끊어져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대는 지금 탐착해서 상(相)을 취해서 실상(實相)에 있어서 단멸이나 상주를 보는 과실을 범하고 있다. 실상을 얻은 사람은 모든 법들이 연들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원인과 같지도 않고 원인과 다르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단멸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결과가 원인과 다르다면 단멸이고, 만약 (결과가) 원인과 다르지 않다면 상주이다.56) |
[문]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하면 어떤 이익들이 있는가? |
[답] 만약 도(道)를 행하는 사람이라면 능히 이와 같은 이치를 통달한다. 즉 모든 법에 있어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과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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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정적(情的)인 집착을 담고 있는 언설(言說)을 말한다. |
54) 지적(知的)인 집착을 담고 있는 언설(言說)을 말한다. |
55) 이상 게송 9를 풀이한 것이다. |
56) 이상 게송 10을 풀이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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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않음의 이치를 통달한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을 수 있다면, 모든 번뇌와 희론을 소멸시켜서 영원한 즐거움[常樂]의 열반을 얻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감로의 맛으로써 교화하신다고 말한 것이다. 마치 세간에서 천계의 감로즙을 얻으면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 없고 쇠약해져서 괴로움을 받는 일이 없다고 말하듯이, 이 실상의 법은 진짜 감로의 맛이다.57) |
부처님께서 실상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모든 법들의 실상을 얻었기에 모든 번뇌들이 소멸했다면, 성문(聲聞)의 법이라고 한다. 만약 대비(大悲)를 내어 위 없는 마음[無上心]을 일으켰다면, 대승(大乘)의 법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지 않아 부처님의 가르침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 벽지불(辟支佛)은 (세간을) 멀리 벗어나서 지혜를 낳는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고 난 후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 남긴 법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 만약 선세에 만약 도(道)를 얻게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면 ‘싫어해서 벗어나는 것[遠離]’의 인연을 다소 관찰해서 홀로 산림에 들어가 어지럽고 떠들썩함을 멀리 벗어나서 도(道)를 얻게 되는데, 이를 벽지불이라고 한다.58) |
19. 시간을 관찰하는 장[觀時品] 6偈 |
[문] 시간이 존재한다.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성립한다.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하고, 현재 시간에 의존해서 과거 시간과 미래 시간이 존재하고, 미래 시간에 의존해서 과거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한다. 위와 가운데와 아래, 같음과 다름 등의 법도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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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만약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한다면 |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은 과거 시간 속에 존재할 것이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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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이상 게송 11를 풀이한 것이다. |
58) 이상 게송 12를 풀이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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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한다면 과거 시간 속에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어떤 법은 이 어떤 법이 의존하는 법이 놓여 있는 장소에 존재한다.59)예를 들어 등불에 의존해서 밝음이 성립한다면 등불이 놓여 있는 곳에 밝음이 있는 것과 같다. 그렇듯이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한다면 과거 시간 속에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할 것이다. 만약 과거 시간 속에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한다면, 세 부류의 시간이 소진한 것을 과거 시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과거 시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일체의 시간이 과거 시간 속에 소진했다면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없을 것이다. 과거 속에 소진했기 때문이다. 만약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거 시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과거 시간은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에 의존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 시간이라 하는 것이다.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한다면, 그렇듯이 또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에 의존해서 과거 시간이 성립해야 한다. 이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니 과거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먼저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한다고 말한 것이지만, 이 주장은 옳지 않다. |
만약 과거 시간 속에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한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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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과거 시간 속에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어떻게 과거 시간에 의존하겠는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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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과거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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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어떤 장소에 있는 어떤 법[甲]에 의존해서 이 법[乙]이 성립한다면 이 장소에 이 법이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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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하겠는가? 왜 그러한가? 만약 세 부류의 시간이 상이하다면 서로 의존해서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물단지와 옷 따위의 사물이 각자 독립해서 성립하고 있어서 서로 의존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과거 시간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하지 않고, 현재 시간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과거 시간과 미래 시간이 성립하지 않고, 미래 시간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과거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대가 앞에서 “과거 시간 속에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한다”고 말했는데, 이 주장은 옳지 않다. |
[문] 만약 과거 시간에 의존하지 않고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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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과거 시간에 의존하지 않으면 미래 시간이 존재하지 않고 |
현재 시간도 존재하지 않네. 그러니 두 부류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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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간에 의존하지 않으면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약 과거 시간에 의존하지 않고서 현재 시간이 존재한다면 어느 곳에 현재 시간이 존재하는 것인가? 미래 시간도 이와 같으니 어느 곳에 미래 시간이 존재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과거 시간에 의존하지 않으면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서로 의존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
이와 같은 이치가 있기에 다른 두 부류의 시간, |
위와 가운데와 아래, 같음과 다름 이 법들이 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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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이치 있기 때문에 다른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도 존재하지 않고, 위와 가운데와 아래, 같음과 다름 따위 법들도 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위에 의존해서 가운데와 아래가 존재하지 위 없이는 |
가운데와 아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위 없이 가운데와 아래가 존재한다면 서로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같음에 의존해서 다름이 존재하고 다름에 의존해서 같음이 존재한다. 만약 같음이 실재한다면 다름에 의존해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다름이 실재한다면 같음에 의존해서 실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법들도 또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논파된다. |
[문] 이를테면 년ㆍ월ㆍ일ㆍ찰나[須庾] 등의 구별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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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시간이 머무는 것은 얻을 수 없네. 시간이 가는 것도 얻을 수 없네. |
시간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시간의 상(相)을 말하겠는가?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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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의존해서 시간이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사물을 떠나서 시간이 있겠는가? |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데 하물며 시간이 존재하겠는가?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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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시간이 머물지 않는다면 (시간을) 얻을 수 없다. 시간이 머무는 일도 없다. 시간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시간의 상(相)을 말하겠는가? 만약 시간의 상이 없다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에 의존해서 생기기 때문에 시간이라 한다. 만약 사물을 떠난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사물들을 논파했다.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시간이 존재하겠는가? |
20. 원인과 결과를 관찰하는 장[觀因果品] 24偈 |
[문] 여러 인연이 화합한 것에서 결과가 현재에 분명히 발생하기 때문에 이 결과는 뭇 연[緣]이 화합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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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만약 연들이 화합해서 결과가 발생한다면 |
화합 속에 이미 존재하는데 왜 화합해서 발생하는 것을 기다리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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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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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러 인연이 화합해서 결과가 발생한다. 이 결과가 화합 속에 이미 존재한다. 그래서 화합한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결과가 이미 확정된 자체 속에 존재한다면 화합해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
[문] 뭇 연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하진 않지만 결과는 뭇 연에 의해 발생한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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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만약 뭇 연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
어떻게 뭇 연이 화합한 것에서 결과가 발생하겠는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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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뭇 연이 화합한 것에서 결과가 발생한다면 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으면서 화합한 것에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사물에 자성이 없다면 이 사물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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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뭇 연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한다면 |
화합한 것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제로는 얻을 수 없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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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뭇 연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한다면, 색이라면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색이 아니라면 사유[意]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화합한 것 속에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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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뭇 연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
그렇다면 여러 인연(因緣)은 인연들이 아닌 것과 동일할 것이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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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뭇 연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뭇 연(緣)은 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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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 아닌 것과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유가 타락[酪]의 인연인 경우를 보자. 만약 우유 속에 타락이 없다면 물 속에도 타락이 없다. 만약 우유 속에 타락이 없다면 (우유는) 물과 동일할 것이니 (타락이) 우유에서 나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연들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은 옳지 않다. |
[문] 원인이 결과를 위해서 원인이 되고서 소멸하는 것이기에 원인과 결과가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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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만약 원인이 결과에게 원인이 되고서 소멸한다면 |
이 원인은 두 자체가 있게 되네. 하나는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멸하는 것이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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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원인이 결과에게 원인이 되고서 소멸한다면 이 원인에는 두 자체가 있게 된다. 하나는 주는 원인[與因]이고 또 하나는 소멸하는 원인[滅因]이다. 이 주장은 옳지 않다. 한 법에 두 자체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인은 결과에게 원인이 되고서 소멸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
[문] 만약 원인이 결과에게 원인이 되지 않고서 소멸해도 또한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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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원인이 결과에게 원인이 되지 않고서 소멸한다면 |
원인이 소멸했는데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니 이 결과는 원인이 없는 것이네.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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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원인이 결과에게 원인이 되지 않고서 소멸한다면, 원인이 소멸했는데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니 이 결과는 원인이 없는 것이다.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모든 결과가 현재에 분명히 보이니 원인이 없이 발생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원인이 결과에 대해 원인이 되지 않고서 소멸해도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
[문] 연들이 화합하고 있을 때 결과가 발생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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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 187]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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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연들이 화합하고 있을 때 결과가 발생한다면 |
발생하게 하는 것과 발생하는 것이 동시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 될 것이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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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연들이 화합하고 있을 때 결과가 발생한다면, 발생하게 하는 것[生者]과 발생하는 것[可生]이 동시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 되리라. 그러나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은 동시에 생겨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대가 연들이 화합하고 있을 때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
[문] 만약 먼저 결과가 발생하고 나중에 연들이 화합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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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먼저 결과가 발생하고 나중에 연들이 화합한다면 |
이것은 인연을 벗어난 것이니 원인이 없는 결과이리라.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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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연들이 아직 화합하지 않았는데 먼저 결과가 발생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결과가 인연(因緣)을 벗어났으니 원인이 없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연들이 아직 화합하지 않았을 때 먼저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
[문] 원인이 소멸했을 때 변해서 결과가 된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답] 만약 원인이 변해서 결과가 된다면 원인은 결과에 다다른 것이 되네. |
그렇다면 앞에 발생한 원인이 발생하고 나서 다시 발생하는 것이 되리라.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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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앞에 발생한 것[前生]이고, 또 하나는 동시에 발생하는 것[共生]이다. 만약 원인이 소멸했을 때 변해서 결과가 된다면 이 앞에 발생한 원인이 다시 발생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사물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만약 이 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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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이 변해서 결과가 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이것 그대로라면 변한다고 하지 않는다. 만약 변한다면 이것 그대로라고 하지 않는다. |
[문] 원인이 완전히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름[名字]이 소멸하고 원인 자체는 변해서 결과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흙덩어리가 변해서 물단지가 될 때 진흙덩어리란 이름이 상실되고 물단지란 이름이 생기는 것과 같다. |
[답] 진흙덩어리가 먼저 소멸하고 물단지가 생기는 것을 변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진흙덩어리 자체에서 물단지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동이ㆍ항아리 등도 다 진흙덩어리에서 나온다. 만약 진흙덩어리에 단지 이름만이 있다면 변해서 물단지가 된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변한다는 것은 마치 우유가 변해서 타락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대가 원인인 이름은 소멸했지만 변해서 결과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
[문] 비록 원인이 소멸해서 상실되더라도 결과를 발생하게 해서 결과가 존재하므로, 이와 같은 과실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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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원인이 소멸해서 상실됐는데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
또 만약 원인이 결과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원인이 결과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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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원인이 소멸해서 상실됐다면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원인이 소멸하지 않고서 결과와 합한다면 어떻게 다시 결과를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
[문] 이 원인이 결과에 편재해서 결과를 발생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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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만약 원인이 결과에 편재한다면 다시 어떤 결과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
원인은 결과를 보든 보지 않든 이 두 경우 모두 발생하게 하지 않네.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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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원인이 결과를 본다고 한다면, 결과를 발생하게 하지도 못하는데 하물며 어떻게 (결과를) 보겠는가? 만약 원인 자체가 결과를 보지 못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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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발생하게 하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만약 결과를 보지 못한다면 결과는 원인을 따르지 않는다. 또 아직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만약 원인이 미리 결과를 본다면 다시 (결과를) 발생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결과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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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과거의 원인을 말한다면, 과거의 결과나 |
미래나 현재의 결과와 이것은 결코 합하지 않네.6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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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미래의 원인을 말한다면, 미래의 결과나 |
현재나 과거의 결과와 이것은 결코 합하지 않네.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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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현재의 원인을 말한다면, 현재의 결과나 |
미래나 과거의 결과와 이것은 결코 합하지 않네.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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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결과가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원인과 합하지 않는다. 미래의 결과가 미래나 현재나 과거의 원인과 합하지 않는다. 현재의 결과가 현재나 미래나 과거의 원인과 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세 종류의 결과는 결코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원인과 합하지 않는다. |
만약 합하지 않는다면 원인이 어떻게 결과를 발생할 수 있겠는가? |
만약 합한다면 원인이 어떻게 결과를 발생할 수 있겠는가?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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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원인과 결과가 합하지 않는다면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원인이 결과를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약 원인과 결과가 합하고 있을 때 원인이 결과를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결과가 원인 속에 존재한다면, 원인 속에 결과가 이미 존재하는 것인데 어떻게 다시 (결과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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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아래의 풀이를 보거나 산스끄리뜨 게송을 볼 때 이 게송은 잘못 번역된 듯싶다. 원인을 결과로 바꿔 “만약 과거의 결과를 말한다면, 과거의 원인이나 미래나 현재의 원인과 이것은 결코 결합하지 않네”[若言過去果 而於過去因 未來現在果 是則終不合]로 번역되어야 할 것 같다. 이하 두 게송도 마찬가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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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원인이 공해서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원인이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
만약 원인이 공하지 않아서 결과가 존재하다면 원인이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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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원인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에 원인은 공하다.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회임(懷妊)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경우와 같다. 만약 원인에 이미 결과가 존재한다면 이미 결과가 존재하니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
또 이제 결과를 설명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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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공하지 않기에 발생하지 않네. 결과는 공하지 않기에 소멸하지 않네. |
결과는 공하지 않기에 발생하지 않고 소멸하지도 않네.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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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공하기에 발생하지 않네. 결과는 공하기에 소멸하지 않네. |
결과는 공하기에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네.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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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결과가 공하지 않다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결과가 원인 속에 미리 실재한다면 다시 발생할 필요가 없다. 발생이 없으니 소멸도 없다. 그러므로 결과는 공하지 않기에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 만약 결과가 공하기에 발생과 소멸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결과가 공하다면 공함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발생과 소멸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결과가 공하기에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
또 이제 같음과 다름으로 원인과 결과를 논파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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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과 결과가 같다면 이것은 결코 옳지 못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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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네.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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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원인과 결과가 같다면 발생하게 하는 것과 발생하는 것이 같을 것이네. |
만약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면 원인은 원인 아닌 것과 같을 것이네.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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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결과에 자성이 실재한다면 원인은 무엇을 발생하게 하겠는가? |
만약 결과에 자성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원인은 무엇을 발생하게 하겠는가?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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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원인이 결과를 발생하게 하지 않는다면 원인의 상(相)이 없는 것이네. |
만약 원인의 상이 없다면 무엇에 이 결과가 있겠는가?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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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인연들의 화합에서 발생한다면 |
화합이 자체를 발생하지 않는데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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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결과는 인연들의 화합에서도 화합하지 않음에서도 발생하지 않네. |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디에 합함이 존재하겠는가? (24) |
이 뭇 연의 화합[衆緣和合法]은 자체를 발생하게 하지 못한다.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겠는가? 그러므로 결과는 뭇 연의 화합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뭇 연의) 화합하지 않음에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디에 합함[合法]이 존재하겠는가? |
21. 생성과 괴멸을 관찰하는 장[觀成壞品] 20偈 |
[문] 모든 세간의 사물들은 분명히 괴멸의 상(相)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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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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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생성을 떠나서도 생성과 함께해서도 괴멸은 있지 않네. |
괴멸을 떠나서도 괴멸과 함께해서도 생성은 있지 않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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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이 있든 생성이 없든 괴멸이 있지 않다. 괴멸이 있든 괴멸이 없든 생성이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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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을 떠나서 어떻게 괴멸이 있겠는가? |
마치 태어남이 없이 죽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옳지 않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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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과 괴멸이 함께 있는데 어떻게 생성이나 괴멸이 있겠는가? |
마치 세간의 태어남과 죽음이 동시에 함께 있다는 것이 옳지 않듯이. |
(3) |
괴멸을 떠나서 어떻게 생성이 있겠는가? |
무상함은 모든 법에 어느 때든 있지 않을 때가 없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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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을 떠나서 괴멸을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만약 생성을 떠나 괴멸이 있다면 생성에 의존하지 않고 괴멸이 있는 것이니 괴멸은 원인이 없는 것이다. 또 생성[成法]이 없이 괴멸할 수 있게 된다. 생성은 뭇 연(緣)이 취합(聚合)하는 것이고 괴멸은 뭇 연이 이산(離散)하는 것이다. 만약 생성을 떠나 괴멸이 있다면 생성이 없는데 어떻게 괴멸하겠는가? 마치 물단지가 없을 때 물단지가 깨졌다[壞]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러므로 생성을 떠나 괴멸은 있지 않은 것이다. 61) |
만약 생성과 함께 해서 괴멸이 있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법(法)이 먼저 따로 성립하고 난 후에 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합함[合法]은 다름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괴멸이 다름을 떠나서 괴멸한다면 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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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이상 게송 2를 풀이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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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성과 함께 해서도 괴멸이 있지 않다. 만약 괴멸을 떠나서도 괴멸과 함께 해서도 생성이 있지 않다면, 만약 괴멸을 떠나 생성이 있다면, 생성은 상주하는 것이 된다. 상주하는 것은 괴멸의 상(相)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괴멸의 상을 갖지 않는 상주하는 법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괴멸을 떠나 생성이 있지 않다. 만약 괴멸과 함께해서 생성이 있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생성과 소멸은 모순되는 것인데 어떻게 동시에 함께 하겠는가? 마치 사람에게 머리카락이 있음과 머리카락이 없음이 동시에 함께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생성과 소멸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괴멸과 함께 해서 생성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법(法)을 분별하는 자가 생성 속에 항상 괴멸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생성 속에 괴멸이 있다면 머묾[住法]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머묾이 있다. 그러므로 괴멸을 떠나서든 괴멸과 함께해서든 생성은 있지 않다.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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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과 괴멸이 함께해서도 성립하지 않고 (서로) 떠나서도 성립하지 않네. |
이 둘이 모두 가능하지 않거늘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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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생성과 소멸이 함께해서도 성립하지 않고 (서로) 떠나서도 성립하지 않는다면, 만약 함께해서 성립한다면, 두 법이 모순되는 것인데 어떻게 동시에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서로) 떠나서 성립한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다. 두 문(門)이 모두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생성과 괴멸이) 성립하겠는가? 만약 성립한다면 논해 보아라. |
[문] 멸진(滅盡)의 상(相)을 갖는 법이 지금 분명히 있다. 이 멸진의 상을 갖는 법은 멸진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멸진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와 같으니 생성과 괴멸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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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이상 게송 3과 4를 풀이한 것이다. |
[답] 멸진하는 것에는 생성이 있지 않네. 멸진하지 않는 것에도 생성이 있지 않네. |
멸진하는 것에는 괴멸이 있지 않네. 멸진하지 않는 것에도 괴멸이 있지 않네.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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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들은 밤낮으로 찰나찰나 항상 과거 속으로 멸진한다. 마치 물이 흘러서 머물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를 ‘멸진하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파악할 수도 없고 언설할 수도 없다. 아지랑이에서 확정된 자성을 얻을 수 없듯이 이 멸진에서도 확정된 자성을 얻을 수 없다. 어떻게 생성이 있다고 분별해서 언설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게송에서는) “멸진하는 것에는 생성이 있지 않네” 하고 말하는 것이다. 생성이 있지 않으니 괴멸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멸진하는 것에는 괴멸이 있지 않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찰나찰나 생멸하고 항상 상속해서 단절이 없기 때문에 ‘멸진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법은 확정되어 상주해서 단절이 없다. 어떻게 지금이 생성하는 때라고 분별해서 언설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멸진하지 않는 것에도 생성이 있지 않네” 하고 말하는 것이다. 생성이 있지 않으니 괴멸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멸진하지 않는 것에도 괴멸이 있지 않네” 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궁구해 보아도 실체[實事]를 얻을 수 없으니 생성도 있지 않고 괴멸도 있지 않다. |
[문] 생성과 소멸은 일단 제쳐놓자. 법(法)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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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생성과 소멸을 떠나서 법이 있지 않네. |
법을 떠나서 생성과 소멸이 있지 않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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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과 소멸을 떠나서 법이 있지 않네’란,만약 어떤 법에 생성이 없고 괴멸이 없다면 이 법은 무(無)이거나 상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간에는 상주하는 법[常法]이 없다. 그대가 생성과 괴멸을 떠나서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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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 187] 쪽 |
[문] 법을 떠나서 생성과 괴멸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답] 법을 떠나서 생성과 괴멸이 있다는 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법을 떠난다면 무엇이 생성하고 무엇이 괴멸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법을 떠나서 생성과 괴멸이 있다는 것 이것은 옳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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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법의 자성이 공하다면 무엇에 생성이 있고 괴멸이 있겠는가? |
만약 법의 자성이 공하지 않다면 생성과 괴멸이 있지 않네.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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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모든 법의 자성이 공하다면, 공한데 어떻게 생성과 괴멸이 있겠는가? 만약 모든 법의 자성이 공하지 않다면, 공하지 않으니 확정되어 존재하는 것이므로 또한 생성과 괴멸이 있지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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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생성과 괴멸이 같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
만약 생성과 괴멸이 다르다면 이것도 옳지 않네.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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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생성과 괴멸이 같다는 것은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다른 것[異相]이기 때문이고 여러 면에서 구별되기 때문이다. 또 생성과 소멸이 다르다는 것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고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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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발생과 소멸을 눈으로 본다고 말한다면 |
무지[癡妄] 때문에 발생과 소멸을 보는 것이네. (10) |
또 만약 발생과 소멸을 눈으로 본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언설로써 (이를) 타파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63)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발생과 소멸을 눈으로 본다면 무지[愚癡]에 의해 전도(顚倒)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자성이 공해서 확정돼 있지 않은 것이 마치 환영과 같고 꿈과 같음을 보는데, 단지 범부가 전세(前世)에서 전도된 인연 때문에 이 눈을 얻어 금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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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발생과 소멸이 눈에 보인다는 것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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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 187] 쪽 |
기억과 표상으로 분별하는 인연 때문에 발생과 소멸을 눈으로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일의(第一義)에는 발생과 소멸이 실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相을 타파하는 장」64)에서 자세하게 말한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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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法)에서 법이 발생하지 않네. (법에서) 법 아닌 것이 발생하지 않네. |
법 아닌 것에서 법이 발생하지 않네. 법 아닌 것에서 법 아닌 것이 발생하지 않네.6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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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법(法)에서 법이 발생하지 않네’란,망실한 것이든 도달한 것이든 둘 모두 옳지 않다. 법에서 법이 발생할 때 망실해서 발생하거나 도달해서 발생하거나 하는데, 그렇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 된다. 원인이 없는 것이라면 단멸이나 상주에 떨어진다. 만약 이미 도달해서 법에서 법이 발생한다면, 이 법은 이미 도달한 것이니 발생한 것[生]이다. 그렇다면 상주하는 것이다. 또 발생한 것이 다시 발생하는 것이 되며 또한 원인이 없이 발생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이미 망실해서 법에서 법이 발생한다면 이것은 원인을 망실한 것이다. 발생하는 것은 원인이 없다. 그러므로 망실한 것에서도 또한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 ‘법에서 법 아닌 것이 발생하지 않네’에서법 아닌 것은 무[無所有]이고 법은 유[有]이다. 어떻게 유에서 무가 발생하겠는가? 그러므로 법에서 법 아닌 것이 발생하지 않는다. ‘법 아닌 것에서 법이 발생하지 않네’에서법 아닌 것은 무이다. 무에서 어떻게 유가 발생하겠는가? 만약 무에서 유가 발생한다면 이것은 원인이 없는 것이다. 원인이 없다면 큰 과실이 있다. 그러므로 법 아닌 것에서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 ‘법 아닌 것에서 법 아닌 것이 발생하지 않네’에서법 아닌 것은 무이다. 어떻게 무에서 무가 발생하겠는가? 마치 토끼의 뿔에서 거북이의 털이 생겨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법 아닌 것에서 법 아닌 것이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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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제7장 「삼상을 관찰하는 장[觀三相品]」을 말한다. |
65) “종비법불생 법급어비법[從非法不生 法及於非法]”은 있는 대로 번역하면 “법 아닌 것에서 법이나 법 아닌 것이 발생하지 않네”이겠지만, 주석을 보면 이렇게 번역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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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 187] 쪽 |
하지 않는다. |
[문] 법과 법 아닌 것 따위 여러 가지로 분별해 보아도 발생하지 않으니, 단지 법이 법을 발생하게 할 따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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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법은 자기에게서 발생하지 않네. 타자에게서도 발생하지 않네. |
자기와 타자에게서 발생하지 않네. 어떻게 발생이 있겠는가?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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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 있지 않기 때문이고, 또 자기 자체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은 자기에게서 발생하지 않는다. 만약 법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또한 타자가 없다. 타자가 없으니 타자에게서 발생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또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자기가 없다. 자기가 없으니 타자도 없다. 양자66)에게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세 종류67)에서 발생하지 않는데 어떻게 법에서 법이 발생하는 일이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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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법을 받아들인다면 단멸이나 상주에 떨어지네. |
받아들이는 법은 상주하는 것이거나 무상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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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법을 받아들인다’란, ‘이것은 선(善)이다’, ‘이것은 불선(不善)이다’, ‘(이것은) 상주한다’, ‘(이것은) 무상하다’ 따위를 분별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반드시 상주의 견해[常見]나 단멸의 견해[斷見]에 떨어진다. 왜 그러한가? 받아들이는 법에는 두 종류가 있다. 상주하는 것과 무상한 것인데 둘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상주하는 것이라면 상주의 극단[常邊]에 떨어지고, 만약 무상한 것이라면 단멸의 극단[斷邊]에 떨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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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법을 받아들이는 자는 단멸이나 상주에 떨어지지 않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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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자기와 타자을 말한다. |
67) 자기ㆍ타자ㆍ양자를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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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과 결과가 상속하니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네.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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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믿고 받아들여 법들을 분별해서 말한다 하더라도 단멸이나 상주에 떨어지지 않는다. 경전에서 “5온은 무상하고 고(苦)이고 무아(無我)이다”고 말하고 있으니, 단멸하지 않는다. 비록 “죄나 복은 무한한 겁 동안 망실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으나, 상주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 법의 원인과 결과는 항상 생멸하며 상속하기 때문에 윤회하며 단절되지 않는다. 발생하고 소멸하기에 상주하지 않고,상속하기에 단멸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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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원인과 결과가 생멸하며 상속하기에 단멸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
소멸한 것은 다시 발생하지 않으니 원인이 단멸한 것이 되네.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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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대가 법들의 원인과 결과는 상속하기 때문에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면, 소멸한 법[滅法]은 이미 소멸했기에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인이 단멸한 것이다. 원인이 단멸했는데 어떻게 상속하겠는가? 이미 소멸한 것은 다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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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자성에 머물고 있다면 있음과 없음이 존재하지 않네. |
열반에서는 상속이 소멸하니 단멸에 떨어지네.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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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법이 있음 그대로[有相中]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그 때에는 없는 일[無相]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물단지가 물단지 그대로[甁相]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그 때에는 깨지는 일[失壞相]이 없다. 물단지가 존재할 때 그대로를 따르기에 깨지는 일이 없다.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을 때도 깨지는 일이 없다. 왜 그러한가?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깨지는 일[所破]이 없다. 이런 이치가 있기 때문에 소멸을 얻을 수 없다. 소멸을 여의었기 때문에 또한 발생도 없다. 왜 그러한가? 발생과 소멸은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또 상주 따위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법(法)에 있음과 없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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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대는 앞에서 원인과 결과는 생멸하며 상속하기 때문에 비록 법들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단멸과 상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그대는 “원인과 결과가 생멸하며 상속하기 때문에 3유(有)68)의 상속이 있다. 상속이 소멸한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열반의 시기에는 단멸에 떨어질 것이다. 3유의 상속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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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전의 유(有)가 소멸한다면 후의 유가 존재하지 않네. |
만약 전의 유(有)가 소멸하지 않는다면 후의 유가 존재하지 않네.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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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전의 유(有)란 금세의 유를 말하고, 후의 유란 내세의 유를 말한다. 만약 전의 유가 소멸하고서 다음에 후의 유가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전의 유가 소멸하고서 후의 유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전의 유가 소멸하지 않는다면 또한 후의 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전의 유가 아직 소멸하지 않았는데 후의 유가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한 시기에 두 유가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전의 유가 소멸하지 않으면 후의 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
[문] 후의 유는 전의 유가 소멸해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전의 유가) 소멸하지 않고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전의 유가) 소멸하고 있을 때 (후의 유가) 발생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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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전의 유(有)가 소멸하고 있을 때 후의 유가 발생한다면 |
소멸하고 있는 것이 한 유이고 발생하고 있는 것이 한 유일 것이네.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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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전의 유가 소멸하고 있을 때 후의 유가 발생한다면 두 유가 동시에 함께 존재하게 된다. 한 유는 소멸하고 있는 것이고, 한 유는 발생하고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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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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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
[문] 소멸하고 있는 것과 발생하고 있는 것인 두 유(有)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단지 전의 유가 소멸하고 있을 때 후의 유가 발생하는 것을 분명하게 볼 따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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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발생하는 것과 소멸하는 것이 동시라고 말한다면 |
이 온[陰]에서 죽을 때 바로 이 온에서 태어날 것이네.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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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발생하고 있는 것과 소멸하고 있는 것이 동시여서 두 유(有)가 존재하지 않고 전의 유가 소멸하고 있을 때 후의 유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지금 어떤 온(蘊)에서 죽는 그대로 이 온에서 태어나지 다른 온에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죽는 자가 그대로 태어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죽음과 태어남이라는 모순되는 법들은 시간을 같이하고 장소를 같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앞에서 “소멸하고 있는 것과 발생하고 있는 것이 동시여서 두 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전의 유가 소멸하고 있을 때 후의 유가 발생하는 것이다”고 말한 것은 옳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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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세에서 유(有)의 상속을 구한다 해도 얻을 수 없네. |
삼세에 있지 않은데 어떻게 상속이 있겠는가?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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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3유(有)란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이다. 무시(無始)의 생사에는, 진실의 지혜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3유의 상속이 있다. 이제 삼세(三世)을 자세히 살펴서 (유의 상속을) 구한다 해도 얻을 수 없다. 삼세에 있지 않은데 어디에 유의 상속이 있겠는가? 유의 상속이 있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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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무지[愚癡]에 의해 전도(顚倒)되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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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제4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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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보살 지음 |
요진삼장 구마라집한역 |
범지 청목주석 |
박인성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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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여래를 관찰하는 장[觀如來品] 16偈 |
[문] 모든 세간에서 존귀하신 분을 들라면 오직 바르게 변지(遍知)하시는 여래가 있을 뿐이다. 법왕(法王)이라 불리는 일체지자(一切智者) 이 분은 존재하신다. |
[답] 이제 자세히 생각해 보라. 만약 존재한다면 파악되어야 한다.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의해 파악되겠는가? 왜 이렇게 말하는가? 여래는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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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온이 아니네. 5온을 떠난 것이 아니네. 이 분과 그것이 서로의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네. 어디에 여래가 존재하겠는가?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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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래가 실재한다면 5온이 곧 여래이겠는가, 5온을 떠나 여래가 존재하겠는가, 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겠는가, 5온 속에 여래가 존재하겠는가, 여래가 5온을 소유하겠는가? 이것들은 모두 옳지 않다. 5온이 곧 여래인 것은 아니다. 왜 그러한가? 생멸의 상(相)을 갖기 때문이다. 5온은 생멸의 상을 갖는다. 만약 여래가 곧 5온이라면 여래는 생멸의 상을 갖는 것이 된다. 만약 생멸의 상을 갖는다면 여래는 무상해서 단멸 따위의 과실이 있을 것이다. 또 취착하는 자[受者]와 취착[受法]이 하나가 될 것이다. 취착하는 자는 여래이고 취착은 5온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가 곧 5온인 것은 아니다. |
5온을 떠나서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5온은 떠나 여래가 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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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면 생멸의 상을 갖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래는 상주 따위의 과실이 있을 것이다. 또 눈 등의 감관[根]들은 보거나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5온을 떠나 또한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
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만약 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는 것이 마치 그릇 속에 과실이 있고 물 속에 물고기가 있는 것과 같다면, 다름이 있게 된다. 다름이 있다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상주 따위의 과실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
또 5온 속에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만약 5온 속에 여래가 존재하는 것이 상 위에 사람이 있고 그릇 속에 우유가 있는 것과 같다면, 그렇다면 다름[異]이 있게 되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과실이 있다. 그러므로 5온 속에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만약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이 마치 사람이 자식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면, 그렇다면 다름이 있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위와 같은 과실이 있게 되니,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으니 어떤 것들이 여래이겠는가? |
[문] 이와 같은 주장[義]으로 여래를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5온이 화합해서 여래가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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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5온이 화합해서 여래가 존재한다면 자성이 없는 것이네. |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에 의존해서 존재하겠는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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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래가 5온이 화합해서 존재한다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5온의 화합에 의존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
[문] 여래는 자성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타성에 의존해서 존재할 따름이다. |
[답]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에 의존해서 존재하겠는가? 왜 그러한가? 타성 또한 자성이 없는 것이다. 또 서로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타성을 얻을 |
수 없고,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타성이라 하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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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법(法)이 타성에 의존해서 발생한다면 이것은 ‘나(我)’가 없는 것이네. |
‘나’가 없는 법인데 어떻게 여래이겠는가?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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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어떤 법이 뭇 연(緣)에 의존해서 발생한다면 (이 법은) ‘나’가 없는 것이다. 마치 다섯 손가락에 의존해서 주먹이 있을 때 이 주먹에는 자체(自體)가 없듯이, 그렇듯이 5온에 의존해서 ‘나’라 할 때 이 ‘나’에는 자체가 없는 것이다. ‘나’에는 중생ㆍ사람[人]ㆍ천신ㆍ여래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만약 여래가 5온에 의존해서 존재한다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자성이 없기에 ‘나’가 없다. ‘나’가 없는데 어떻게 여래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게송에서 “만약 어떤 법이 타성에 의존해서 발생한다면 이것은 ‘나’가 없는 것이네. ‘나’가 법(法)인데 어떻게 여래이겠는가?”라고 읊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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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이 있겠는가? |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무엇을 여래라 하겠는가?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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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자성이 없다면 타성 또한 있지 않다. 자성에 의존하기에 타성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기에 저것도 없다. 그러므로 자성과 타성 둘 모두 없는 것이다.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무엇을 여래라 하겠는가? |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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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5온(陰)에 의존하지 않고 먼저 여래가 존재한다면 |
지금 5온을 취착(取著)하는 것이기에 여래라 말하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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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실제로는 5온을 취착하지 않으니 다시 여래가 존재하지 않네. |
(5온을) 취착하지 않아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데 지금 어떻게 취착하겠는가?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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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아직 취착하지 않았다면 취착되는 것[受法]1)을 취착이라 하지 않네. |
취착이 없다면 여래라 하지 않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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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같음과 다름에 의거해서 여래를 구할 수 없다면 |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여래가) 존재하지 않거늘 어떻게 취착 속에 존재하겠는가?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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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취착되는 것인 5온은 자성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네. |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이 있겠는가?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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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5온을 아직 취착하지 않았는데 먼저 여래가 존재한다면 이 여래는 지금 5온을 취착해서 여래가 된 것이리라.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 5온을 취착하지 않았을 때는 먼저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데 지금 어떻게 (5온을) 취착하겠는가? 아직 5온을 취착하지 않았다면 5온을 취착(取著)이라 하지 않는다. 취착이 없다면 여래라 하지 않는다. 또 여래는 같음과 다름에 의거해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5온 속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럴진대 5온 속에 여래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취착되는 것인 5온은 자성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타성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자성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타성에 의해서 존재하겠는가? 왜 그러한가? 자성이 없기 때문에 타성 또한 없다. |
이런 이치가 있기에 취착함도 공(空)하고 취착하는 자도 공하네. |
어떻게 공한 것으로 공한 여래를 말하겠는가?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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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치로 사유해 보면 취착함[受]과 취착하는 자[受者] 모두 공하다. 만약 취착이 공(空)하다면 어떻게 공한 취착으로 공한 여래를 말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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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온(蘊)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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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 187] 쪽 |
[문] 그대는 취착함도 공하고 취착하는 자도 공하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공한 것이 확정되어 존재하는가? |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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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한 것은 언설할 수 없네. 공하지 않은 것은 언설할 수 없네. |
공한 것이면서 공하지 않은 것, 공한 것도 아니고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은 언설할 수 없네. 단지 가명(假名)으로 말할 따름이네.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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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들은 공하니 언설할 수 없다. 법들은 공하지 않으니 또한 언설할 수 없다. 법들은 공한 것이면서 공하지 않으니 또한 언설할 수 없다. (법들은) 공한 것도 아니고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또한 언설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2) 모순되는 것을 타파하고자 가명(假名)으로 언설했을 따름이다. |
이와 같이 바르게 관찰하고 사유해 보건대, 법들의 실상(實相)에 대해서 이런 저런 공박으로 공박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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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에는 ‘상주한다’나 ‘무상하다’ 따위의 네 가지가 있지 않네. |
적멸에는 ‘한계가 있다’나 ‘한계가 없다’ 따위의 네 가지가 있지 않네. |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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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들의 실상(實相)은 이와 같이 미묘한 적멸(寂滅)이다. 단지 과거세에 의거해서 네 종류의 그릇된 견해을 일으킨다. 즉 ‘세간은 상주한다’, ‘세간은 무상하다’, ‘세간은 상주하는 것이면서 무상한 것이다’, ‘세간은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다’이다. 적멸에는 (이 견해들이) 모두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법들의 실상은 완전히 청정해서 취할 것이 없다. 공성(空性)은 취착하지 않는 것인데 어찌 하물며 네 종류의 견해가 있겠는가? 네 종류의 견해는 모두 취착[受]에 의존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법들의 실상에는 취착에 의존하는 것이 없다. 네 종류의 견해는 모두 자기의 견해는 귀하다고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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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런데 왜 언설했느냐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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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 187] 쪽 |
남의 견해는 천하다고 한다. 법들의 실상에는 이편이나 저편이 없다. 그래서 적멸에는 네 종류의 견해가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과거세에 의거해서 네 종류의 견해가 있듯이, 미래세에 의거해서 네 종류의 견해가 있는데 또한 그와 같다. 즉 ‘세간은 한계가 있다’, ‘세간은 한계가 없다’, ‘세간은 한계가 있는 것이면서 한계가 없는 것이다’, ‘세간은 한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이다. |
[문] 이와 같이 여래를 타파하는데 그렇다면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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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그릇된 견해가 깊고 두터운 자는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네. |
여래의 적멸에 대해서도 있다거나 없다고 분별하네.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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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견해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세간의 즐거움을 파괴하는 것이고 하나는 열반의 도(道)를 파괴하는 것이다. ‘세간의 즐거움을 파괴하는 것’이란, 추대(麤大)한 그릇된 견해로, ‘죄나 복이 없다’, ‘여래 등의 성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릇된 견해를 일으켜서 선을 버리고 악을 행한다면 세간의 즐거움을 파괴하는 것이다. ‘열반의 도를 파괴하는 것’이란, ‘나’(我)에 탐착(貪著)해서 있다거나 없다고 분별하는 것이다. 선을 일으키고 악을 멸한다면 선을 일으키기 때문에 세간의 즐거움을 얻지만, ‘있다’거나 ‘없다’고 분별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만약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깊고 두터운 그릇된 견해이다. 이에 세간의 즐거움을 잃는데 하물며 어찌 열반을 잃지 않겠는가? 만약 여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그릇된 견해이다. 왜 그러한가? 여래의 적멸에 대해서 갖가지로 분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멸 속에 여래가 존재한다고 분별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
이와 같이 자성이 공한데 여래가 멸도(滅度)한 후에 |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네.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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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들의 실상은 공하기 때문에 여래가 멸도한 후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유해서는 안 된다. 여래는 본래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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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 187] 쪽 |
터 완전히 공한데 하물며 어찌 멸도한 후에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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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는 희론을 넘어서 있는데 사람들은 희론을 만드네. |
희론은 혜안(慧眼)을 망치니 이들은 모두 부처님을 보지 못하네. |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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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론’이란 기억하고 표상해서 이것 저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부처가 ‘멸도했다’, ‘멸도하지 않았다’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희론을 만들어서 혜안(慧眼)을 덮기에 여래 법신(法身)을 볼 수 없다. |
이 「여래를 관찰하는 장」에서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을 거쳐서 사유해 보아도 여래의 확정된 자성[定性]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이렇게 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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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의 자성은 세간의 자성이네. |
여래에게 자성이 없으니 세간에도 자성이 없네.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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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에서 사유하고 궁구해 보건대 여래의 자성은 곧 모든 세간의 자성이다. |
[문] 어떤 것들이 여래의 자성인가? |
[답] 여래에게는 자성이 없다. 세간에 자성이 없는 것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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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전도(顚倒)를 관찰하는 장[觀顚倒品] 24偈 |
[문] 기억하고 표상하는 분별[憶想分別]에서 탐욕과 증오와 무지가 발생하네. |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顚倒)는 모두 뭇 연에서 발생하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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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에서는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顚倒)에 의존해서 기억하고 표상하는 분별[憶想分別]에서 탐욕[貪]과 증오[恚]와 무지[癡]가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탐욕과 증오와 무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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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 187]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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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에 의존해서 3독(毒)3)이 발생한다면 |
3독은 자성이 없는 것이네. 그러니 번뇌는 실체가 없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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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번뇌들이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에 의존해서 기억하고 표상하는 분별[憶想分別]에서 발생한다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들은 실체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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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我]’의 있음이나 없음 이것은 결코 성립하지 않네. |
‘나’가 없으니 번뇌들의 있음이나 없음도 성립하지 않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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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에 있음이나 없음이 성립할 이유[因緣]가 없다. 이제 ‘나’가 있지 않으니 번뇌들에 어떻게 있음이나 없음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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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이 번뇌를 소유하는 것인데 이 사람이 성립하지 않네. |
만약 이 사람 없이 있다면 번뇌는 속하는 데가 없는 것이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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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란 남을 뇌란[惱亂]하는 것이다. 뇌란을 당하는 남이란 중생이다. 이 중생은 모든 곳에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만약 중생 없이 오직 번뇌만 있다고 말한다면 이 번뇌는 속하는 데가 없는 것이다. |
만약 비록 ‘나’가 없다 해도 번뇌는 마음[心]에 속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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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있다는 견해를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듯이 |
번뇌는 염오심(染汚心)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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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탐욕[貪]ㆍ증오[恚]ㆍ무지[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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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 187] 쪽 |
몸이 있다는 견해를 5온 속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듯이, 번뇌들도 염오심[垢心] 속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또 염오심도 번뇌들 속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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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는 자성이 없네. |
어떻게 이 둘에 의존해서 번뇌들이 발생하겠는가?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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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란, 전도(顚倒)는 허망(虛妄)을 말한다. 허망하다면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다면 전도가 없다. 전도가 없는데 어떻게 전도에 의존해서 번뇌들이 발생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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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그리고 법(法)은 여섯인데 |
이 여섯 가지는 3독의 근본이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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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섯 입처(入處)는 3독(毒)의 근본이다. 이 여섯 입처에 의존해서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가 발생한다.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에 의존해서 탐욕과 증오와 무지가 발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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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그리고 법(法) 자체 여섯 가지는 |
모두 공해서 신기루나 꿈과 같고 간다르바성과 같네.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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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섯 가지 중 어느 것에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
마치 화인[幻化人]과 같고 또 마치 거울의 영상과 같네.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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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法) 자체가 아직 마음과 화합하지 않았을 때는 공해서 있는 바가 없다. 마치 신기루와 같고 꿈과 같고 화인[化]과 같고 거울 속의 영상과 같다. 단지 마음을 속이고 미혹하게 하는 것일 뿐 확정된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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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 187] 쪽 |
(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여섯 중 어느 것에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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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함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청정하지 않음이 없네. |
청정함에 의존해서 청정하지 않음이 있네. 그러니 청정하지 않음이 있지 않네.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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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청정함에 의존하지 않고서 먼저 청정하지 않음이 있는 것이 아닌데, 무엇에 의존해서 청정하지 않음을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청정하지 않음이 있지 않다. |
|
청정하지 않음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청정함도 없네. |
청정하지 않음에 의존해서 청정함이 있네. 그러니 청정함이 있지 않네.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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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청정하지 않음에 의존하지 않고서 먼저 청정함이 있는 것이 아닌데, 무엇에 의존해서 청정함을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청정함이 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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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함이 있지 않은데 어디에 탐욕이 있겠는가? |
청정하지 않음이 있지 않은데 어디에 증오가 있겠는가?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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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이 있지 않기에 탐욕과 증오가 발생하지 않는다. |
[문] 경전에서 상주함 따위의 네 가지 전도를 말하고 있다. 만약 무상한 것에서 상주함을 본다면 이것은 전도된 것이다. 만약 무상한 것에서 무상함을 본다면 이것은 전도되지 않은 것이다. 나머지 세 가지 전도도 이와 같다. 전도가 있기에 전도된 자도 있는 것인데 왜 도무지 있지 않다고 말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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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무상한 것을 상주하는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이것을 전도라 하네. |
공함[空]에 있어서는 상주하는 것이 없는데 어느 곳에 상주함의 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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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 187] 쪽 |
가 있겠는가?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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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무상한 것을 상주하는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전도라 한다. 법들의 자성이 공한 것에는 상주하는 것이 있지 않다. 이 중의 어느 곳에 상주함의 전도가 있겠는가? 나머지 세 가지4)또한 이와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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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무상한 것을 무상한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면 |
공함에 있어서는 무상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전도 아닌 것이 있겠는가?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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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무상한 것을 무상한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면 법들의 자성이 공한 것에는 무상한 것이 있지 않다. 무상한 것이 있지 않은데 무엇이 전도 아닌 것이 되겠는가? 나머지 셋도 또한 이와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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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되는 것, 집착하는 자, 집착함, 집착 수단, |
이것은 모두 적멸해 있는데 어떻게 집착이 있겠는가?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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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집착되는 것[可著]’이란 (집착의) 대상[物]이다. ‘집착하는 자[著者]’란 (집착의) 행위자이다. ‘집착함[著]’이란 행위[業]이다. ‘집착에 쓰이는 법[所用著法]’5)이란 (집착에) 쓰이는 사물[事]이다. 이것은 모두 자성이 공해서 적멸해 있다. 「여래를 관찰하는 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집착이 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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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집착이 있지 않다면 누가 그릇된 것을 전도라고 말하겠으며 |
누가 바른 것을 전도가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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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苦)를 낙(樂)이라고 집착하는 것, 무아(無我)를 아(我)라고 집착하는 것, 청정하지 않음을 청정함이라고 집착하는 것의 세 가지를 말한다. |
5) 고려대장경에는 “소용법(所用法)”으로 되어 있다. 송(宋)ㆍ원(元)ㆍ명(明) 3본(本)을 따라 “소용저법(所用著法)”으로 바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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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 187]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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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집착’이란 이것이다, 저것이다, 있다, 없다 따위를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런 집착이 있지 않다면, 누가 그릇된 것을 전도라고 하겠으며 누가 바른 것을 전도 아닌 것이라고 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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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가 있는 자에게는 전도가 발생하지 않네. 전도가 없는 자에게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네. |
전도된 자에게는 전도가 발생하지 않네. 전도되지 않는 자에게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네.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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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전도되고 있는 자에게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네. |
누구에게 전도가 발생하는지 그대 스스로 관찰해 보거라.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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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미 전도된 자에게는 다시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미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전도되지 않은 자에게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 전도가 없기 때문이다. 전도되고 있는 자에게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 두 과실6)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 지금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누가 전도를 행하는 지를 스스로 잘 관찰해 보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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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가지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런 주장이 있을 수 있겠는가? |
전도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전도된 자가 있겠는가? (19) |
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타파했기 때문에 전도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따른다. 그 사람은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에 탐착해서, 발생하지 않는 것[不生]이야말로 전도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게송에서 ‘왜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나아가 무루법도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 하지 않는데 어찌 하물며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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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미 전도된 자의 과실과 아직 전도되지 않은 자의 과실을 말한다. |
겠는가? 전도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전도된 자가 있겠는가? 전도에 의존해서 전도된 자가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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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상주함[常]ㆍ즐거움[樂]ㆍ아(我)ㆍ청정함[淨]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
이 상주함ㆍ즐거움ㆍ아ㆍ청정함은 전도가 아니네.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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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상주함[常]ㆍ즐거움[樂]ㆍ아ㆍ청정함[淨] 이 넷의 자성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상주함ㆍ즐거움ㆍ아ㆍ청정함은 전도가 아니다. 왜 그러한가? 실체[實事]가 확정되어 존재하는데 어떻게 전도라 말하겠는가? 만약 상주함ㆍ즐거움ㆍ아ㆍ청정함 이 넷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상함[無常]ㆍ괴로움[苦]ㆍ무아(無我)ㆍ청정하지 않음[不淨] 이 넷이 실제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상주함ㆍ즐거움ㆍ아ㆍ청정함은) 전도가 아니다. 전도와 모순되기에 전도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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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상주함ㆍ즐거움ㆍ아(我)ㆍ청정함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
무상함ㆍ괴로움ㆍ청정하지 않음이 존재하지 않네.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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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상주함ㆍ즐거움ㆍ아ㆍ청정함 이 넷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상 등 네 가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서로 의존하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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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전도가 소멸하기에 무명도 소멸하네. |
무명이 소멸하기에 행들도 소멸하네. (22) |
또 ‘이와 같이’란 그 의미와 같이라는 뜻이다. 전도들이 소멸하기에 12연기(緣起)의 근본인 무명(無明)도 소멸한다. 무명이 소멸하기에 세 종류의 행[行業] 내지 늙음과 죽음(老死) 등도 소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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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번뇌의 자성이 실재하고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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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 187] 쪽 |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누가 그 자성을 끊을 수 있겠는가?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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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번뇌들이 전도이고 그 자성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누가 그 자성을 끊을 수 있겠는가? 만약 번뇌들은 모두 허망해서 자성이 없기 때문에 끊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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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번뇌가 허망해서 자성이 없다면, (누군가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누가 자성이 없는 법을 끊을 수 있겠는가?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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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들은 허망해서 자성이 없으니, 속하는 데가 없는데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누가 자성이 없는 법을 끊을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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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사제를 관찰하는 장[觀四諦品] 40偈 |
[문] 네 가지 전도(顚倒)7)를 타파해서 4성제(聖諦)를 통달하면 네 가지 사문의 과보[四沙門果]를 얻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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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모든 것이 다 공해서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면 |
그렇다면 4성제가 있지 않을 것이네. (1) |
4성제가 있지 않기에 고(苦)를 보는 것, (번뇌와 업의) 집(集)을 끊는 것, |
멸(滅)을 증득하는 것, 도(道)를 수습(修習)하는 것이 모두 있지 않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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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것이 있지 않기에 네 과보(果報)도 있지 않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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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앞 장에서 말한 무상한 것을 상주하는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고(苦)를 낙(樂)이라고 집착하는 것, 무아(無我)를 아(我)라고 집착하는 것, 청정하지 않은 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의 네 가지 전도를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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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 187] 쪽 |
네 과보가 있기 않기에 (과보를) 얻은 자도 (과보로) 향하는 자도 있지 않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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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덟 부류의 성자가 있지 않다면 승보(僧寶)가 있지 않네. |
4성제가 있지 않기에 또한 법보(法寶)도 있지 않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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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과 승보가 있지 않기에 또한 불보(佛寶)도 있지 않네. |
이와 같이 공함을 말한다면 이는 3보(寶)를 파괴하는 것이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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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모든 세간이 다 공해서 있지 않다면, 발생하지 않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을 것이다.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기 때문에 4성제가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집제(集諦)에서 고제(苦諦)가 발생한다. 집제는 원인이고 고제는 결과이다. 고제와 집제를 소멸시키는 것이기에 멸제(滅諦)이다. 멸제에 다다르게 하는 것이기에 도제(道諦)이다. 도제는 원인이고 멸제는 결과이다. 이와 같이 4성제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으니, 만약 발생함도 없고 소멸함도 없다면 4성제가 있지 않을 것이다. 4성제가 있지 않으니 고(苦)를 보는 것, (번뇌와 업의) 집(集)을 끊는 것, 멸(滅)을 증득(證得)하는 것, 도(道)를 수습(修習)하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 고를 보는 것, (번뇌와 업의) 집을 끊는 것, 멸을 증득하는 것, 도를 수습하는 것이 있지 않으니 네 사문(沙門)의 과보가 있지 않을 것이다. 네 사문의 과보가 있지 않으니 네 부류의 (과보로) 향하는 자8)와 네 부류의 (과보를) 얻은 자9)가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여덟 부류의 성자가 있지 않다면, 승보(僧寶)가 있지 않을 것이다. 또 4성제(聖諦)가 있지 않으니 법보(法寶)도 있지 않을 것이다. 법보와 승보가 있지 않은데 어찌 불보(佛寶)가 있겠는가? 법(法)을 얻은 이를 불(佛)이라 한다. 법이 없는데 어찌 불이 있겠는가? 그대가 모든 법이 다 공하다고 말한다면 3보10)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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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예류향(豫流向)ㆍ일래향(一來向)ㆍ불환향(不還向)ㆍ아라한향(阿羅漢向)을 가리키는 말이다. |
9) 예류과(豫流果)ㆍ일래과(一來果)ㆍ불환과(不還果)ㆍ아라한과(阿羅漢果)을 가리키는 말이다. |
10) 승보(僧寶), 법보(法寶), 불보(佛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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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 187] 쪽 |
파괴하는 것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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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空法]은 원인과 결과를 파괴하고 죄와 복도 파괴하고 |
모든 세속의 법도 파괴하네.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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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공성[空法]을 받아들인다면 죄와 복, 죄와 복의 과보, 세속의 법도 파괴한다. 이와 같은 과실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은 공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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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그대는 지금 공성[空]과 공성의 목적[空因緣]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 |
그리고 공성의 대상[空義]를 알지 못하네. 그래서 스스로 번민을 만들어 내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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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空相]이 무엇인지, 무슨 목적[因緣]으로 공성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고, 또 공성의 대상[空義]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여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의심을 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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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처님들은 이제(二諦)에 의지해서 중생을 위해 설법하시네. |
하나는 세속제이고 다른 하나는 제일의제이네.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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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람이 이제의 구별을 알지 못한다면 |
심원한 부처님 가르침의 진실한 의미를 알지 못하네.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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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속제’란,모든 법의 자성은 공한데 세간의 전도(顚倒) 때문에 허망한 법이 발생한다. 세간에 있어서는 이것이 진실이다. 성인들은 전도성(顚倒性)을 핍진하게 알기 때문에 모든 법들이 다 공하고 발생이 없다는 것을 안다. 성인에게 있어서는 이 제일의제(第一義諦)가 진실이다. 부처님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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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 187] 쪽 |
이 이제에 의지해서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다. 만약 사람이 이제의 구별을 여실하게 알지 못한다면 심원한 부처님 가르침의 진실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만약 모든 법의 발생하지 않음인 제일의제는 제2의 속제(俗諦)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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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속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네. |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지 못하네.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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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의제는 모두 언설(言說)에 의존한다. 언설은 세속제이다. 그러므로 만약 세속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를 언설할 수 없다. 제일의제를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열반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법이 비록 발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제(二諦)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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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을 올바르게 관찰할 수 없어서 근기가 약한 자는 스스로를 해치네. |
마치 주술에 능하고 못하고 뱀을 잡는 것에 능하지 못한 것과 같이. (11) |
|
또 만약 어떤 사람이 근기가 약하다면 공성[空法]을 잘 알지 못한다. 공성[空]을 상실해서 그릇된 견해가 일어난다. 마치 이득을 위해 독사를 잡으려다 제대로 잡지 못해 도리어 해가 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주술로 무엇을 만들려다가 제대로 만들지 못해 도리어 스스로를 해치는 것과 같다. 근기가 약한 자가 공성을 관찰하는 것도 이와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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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께서는 이 법이 매우 깊고 오묘해서 |
근기가 약한 자가 미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려 하지지 않으셨네.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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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존께서는 이 법이 매우 깊고 오묘해서 근기가 약한 자가 알 바가 아니기에 말씀하시려 하지 않으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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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 187] 쪽 |
그대는 내가 공성에 집착하기에 내가 과실을 범한다고 말하네. |
그대가 지금 말하는 과실은 공성에는 있지 않네.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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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대가 만약 내가 공성에 집착하기에 내가 과실을 범한다고 말한다면, 내가 말하는 성질의 공성은 공성[空]도 또한 공한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과실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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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의 이치가 있기에 모든 법이 성립하네. |
만약 공성의 이치가 없다면 모든 법이 성립하지 않네.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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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공성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법이 다 성취된다. 만약 공성의 이치가 없다면 모두 성취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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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지금 자신에게 과실이 있으면서 나에게 돌리네. |
마치 사람이 말을 타고 있을 때 (말을) 탄 것을 스스로 잊어 버리는 것과 같네.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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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대는 있다고 하는 것에 과실이 있는데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공하다 하는 것에서 과실을 본다. 마치 사람이 말을 타고 있으면서 그 (말을) 탄 것을 잊어 버리는 것과 같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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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대가 법들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고 본다면 |
법들에 인(因)이 없고 연(緣)이 없다고 보는 것이네. (16) |
또 그대는 법들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법들에 인(因)이 없고 연(緣)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발생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법에 인과 연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만약 법들이 인과 연에서 발생한다면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법들에 자성이 존재한다면 인과 연이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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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 187] 쪽 |
만약 법들에 자성이 확정되어 머물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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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과 결과, 행위와 행위자와 행위 수단[作法], |
또 모든 사물의 발생과 소멸을 파괴하는 것이 되네.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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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들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면 원인과 결과 등의 모든 것이 있지 않게 된다. |
이렇게 게송으로 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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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因)과 연(緣)들에서 발생하는 법을 나는 ‘공한 것[無]’이라고 말하네. |
가명(假名)이라고도 하고 중도(中道)의 이치라고도 하네.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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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 연들에서 발생하지 않는 법은 하나도 없네. |
그러니 모든 법은 공하지 않은 것이 없네.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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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因)과 연(緣)들에서 발생하는 법을 나는 ‘공한 것[空]’이라고 말한다. 왜 그러한가? 인과 연들이 다 갖춰지고 화합해서 사물이 발생한다. 이 사물은 인과 연들에 귀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 있지 않다. 자성이 있지 않기에 공하다. 공함도 또 공하다. 단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가명(假名)으로 말하는 것이다. ‘있다’와 ‘없다’의 양 극단을 여의었기에 중도(中道)라 한다. 이 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공하지 않기 때문에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법에 자성이 있다면 인과 연들에 의존하지 않고서 있는 것이다. 만약 인과 연들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법이 있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은 법은 없다. |
그대가 위에서 말한 공성[空法]에 과실이 있다고 한다면 이 과실은 이제 다시 그대에게 있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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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모든 법이 공하지 않다면 발생과 소멸이 없을 것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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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 187] 쪽 |
그렇다면 4성제[聖諦法]도 없을 것이네.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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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모든 법이 각각 자성이 있어서 공하지 않다면 발생과 소멸이 없을 것이다. 발생과 소멸이 없기 때문에 4성제[聖諦法]가 없다. |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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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苦)가 연들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고가 있겠는가? |
“무상한 것은 고이다”고 설파하네. 확정된 자성(自性)은 무상하지 않네. (21) |
|
고(苦)가 뭇 연(緣)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고가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경전에서는 “무상한 것은 고이다”고 설파하고 있다. 만약 고에 자성이 있다면 어떻게 무상하겠는가? 자성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
|
만약 고(苦)에 자성이 있다면 왜 (업과 번뇌의) 집(集)에서 발생하겠는가? |
그러니 집(集)이 있지 않네. 공성의 이치를 파괴하기 때문이네.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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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고에 자성이 있다면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이미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집제가 있지 않을 것이다. 공성의 이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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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고(苦)에 자성이 있다면 멸(滅)이 있지 않을 것이네. |
그대가 자성에 집착하기 때문에 멸제를 파괴하는 것이 되네.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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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고에 자성이 있다면 멸이 있기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자성이 있다면 멸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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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고(苦)에 자성이 있다면 도(道)를 수습(修習)하는 일이 없을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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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 187] 쪽 |
이네. |
만약 도를 수습할 수 있다면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네.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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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법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도를 수습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법이 실재한다면 상주하는 것일 터이고, 상주하는 것이라면 증대[增益]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도를 수습할 수 있다면 도는 자성이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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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가 없고 그리고 집제와 멸제가 없는데 |
고를 멸할 수 있는 도에 대체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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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법들에 미리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고제와 집제와 멸제가 없을 것이다. 이제 고를 멸하는 도는 고를 멸하는 어떤 곳에 다다르는 도이겠는가? |
|
만약 고(苦)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
지금 어떻게 보겠는가? 그 자성이 상이하기 때문이네.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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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앞서 범부의 시절에 고(苦)의 자성을 볼 수 없었다면 지금도 볼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자성이 확정된 것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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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苦)를 보는 것이 그렇지 못하듯이 (업과 번뇌의 집을) 끊는 것, 멸(滅)을 증득하는 것, 도(道)를 수습하는 것, |
그리고 네 가지 과보 이것들도 모두 그렇지 못하네.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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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제(苦諦)의 자성을 전에 보지 못하는 자는 후에도 보지 못하듯이 그렇듯이 (업과 번뇌의 집을) 끊지 못하고, 멸을 증득(證得)하지 못하고, 도를 수습(修習)하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이 집(集)의 자성을 이제껏 끊지 못했다면 지금도 끊지 못할 것이다. (집의) 자성은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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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 187] 쪽 |
을 이제껏 증득하지 못했다면 지금도 증득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껏 증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를 이제껏 증득하지 못했다면 지금도 수습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껏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성제(四聖諦)의 보는 것, 끊는 것, 증득하는 것, 수습하는 것인 네 가지 수행[行]이 모두 있지 않다. 네 가지 수행이 있지 않기 때문에 네 가지 도(道)의 과보도 있지 않다. |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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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네 가지 도의 과보는 이제껏 얻을 수 없었는데 |
법들의 자성이 확정된 것이라면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28) |
|
또 만약 법들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있다면 네 가지 사문의 과보를 이제껏 얻을 수 없었는데 이제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만약 얻을 수 있다면 자성이 확정된 것이 아니다. |
|
만약 네 가지 과보가 없다면 (과보를) 얻은 자도 (과보로) 향하는 자도 없네. |
여덟 부류의 성인이 없으니 승보(僧寶)가 없네. (29) |
|
또 네 가지 사문의 과보가 없기에 (과보를) 얻은 자도 (과보로) 향하는 자도 없다면, 여덟 부류의 성인이 없는 것이니 승보(僧寶)가 없다. 그러나 경전에서 여덟 부류의 성인을 승보라고 말하고 있다. |
|
4성제가 없으니 또한 법보도 없네. |
법보와 승보가 없는데 어떻게 불보(佛寶)가 있겠는가? (30) |
|
또 4성제를 수행하면 열반을 얻는다. 만약 4성제가 없다면 법보가 없는 것이다. 두 가지 보(寶)가 없는데 어떻게 불보(佛寶)가 있겠는가? 그대는 이와 같은 이유를 들어 법들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3보(寶)를 파괴한다. |
[문] 그대가 법들을 타파했지만 완전무결한 도(道)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11)는 있다. 이 도가 있기에 불(佛)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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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보리(菩提)에 의존하지 불(佛)이 있고 |
또한 불에 의존하지 않고서 보리가 있는 것이 되네. (31) |
|
그대가 법들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보리(菩提)에 의존하지 않고서 불(佛)이 있고 불에 의존하지 않고서 보리가 있는 것이 된다. 이 두 자성은 항상 확정돼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
부지런히 정진(精進)해서 보리의 도를 수행하더라도 |
만약 미리 불성(佛性)이 없다면 성불할 수 없을 것이네. (32) |
|
또 미리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쇠에 금의 자성이 없어서 설사 갖가지로 단련한다 해도 결코 금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
|
만약 모든 법이 공하지 않다면 죄나 복을 짓는 자가 없을 것이네. |
공하지 않은데 무엇을 짓겠는가? 그 자성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
(33) |
|
또 만약 법들이 공하지 않다면 결코 사람이 죄나 복을 짓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죄나 복의 자성이 이미 확정돼 있기 때문이다. 또 짓는 일과 짓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
|
그대가 죄나 복이 있어도 과보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
그렇다면 죄나 복 없이 과보가 있는 것이 되네. (34) |
|
또 그대가 죄나 복의 인연이 있어도 전혀 과보가 없다고 한다면 죄나 복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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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범어 anuttara-saṃyak-saṃbodhi의 음사이며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으로 한역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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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 187] 쪽 |
인연 없이 과보가 있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과보가 인연에 의존해서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
[문] 죄나 복 없이는 선악의 과보가 있을 수 없다. 단지 죄나 복에서 선악의 과보가 생길 따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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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죄나 복에서 과보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
과보가 죄나 복에서 발생했는데 어떻게 공하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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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죄나 복 없이는 선악의 과보가 없다면 어떻게 과보가 공하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12) 짓는 자 없이 죄나 복이 없을 것이다. 그대가 앞에서 모든 법은 공하지 않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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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모든 법의 인연성[因緣法]13)과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
세속의 모든 다른 법을 파괴하는 것이 되네. (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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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대가 만약 여러 인연성[衆因緣法]과 제일(第一)의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모든 세속의 법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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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지어야 할 것이 없고 |
짓지 않아도 짓는 일이 있고 짓지 않아도 지은 자라 할 것이네. (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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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모든 결과에는 전혀 짓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원인이 없었을 것이다. 짓지 않아도 짓는 일이 있을 것이다. 또 모든 짓는 자들에게는 지어야 할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 또 짓는 자 없이 업(業)이 있고 과보가 있고 받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그러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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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만약 죄나 복 없이는 선악의 과보가 없다면’이라는 뜻이다. |
13) 모든 법의 인연성이란 연기(緣起)를 가리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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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을 파괴하는 것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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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확정된 자성이 있다면 세간의 갖가지 상(相)은 |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아 상주해서 괴멸하지 않을 것이네. |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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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법들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면 세간의 갖가지 상(相) 즉 천신ㆍ사람ㆍ축생ㆍ사물들은 모두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아 상주해서 괴멸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실재하는 자성이 있는 것은 변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사물들은 각각 변이의 상(相)이 있어서 생멸하고 변이한다. 그러므로 확정된 자성이 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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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공성이 없다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지 못할 것이고 |
번뇌를 끊는 일도 없을 것이며 고(苦)가 멸진하는 일도 없을 것이네. |
(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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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공성[空法]이 없다면 세간과 출세간의 공덕(功德)을 아직 얻지 못한 자는 모두 (그 공덕을) 얻지 못할 것이다. 또 번뇌를 끊는 일도 없을 것이다. 또 고(苦)가 멸진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자성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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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경전에서 “만약 인연성[因緣法]을 본다면 |
부처님을 보게 되고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보게 된다”고 말하고 있네.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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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법들이 인과 연들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본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볼 수 있다. 지혜를 증대시켜서 4성제인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볼 수 있다. 4성제를 본다면, 네 가지 과보를 얻기에 모든 고가 소멸한다. 그러므로 공성의 이치[空義]를 파괴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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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안 된다. 만약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인연성[因緣法]을 파괴하는 것이 되고, 인연성을 파괴한다면 3보(寶)를 파괴하는 것이 되고, 3보를 파괴한다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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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열반을 관찰하는 장[觀涅槃品] 24偈 |
[문] 만약 모든 법들이 공하다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데 |
무엇을 끊고 무엇을 멸하기에 열반이라 부르는가?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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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모든 법들이 공하다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다.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데 무엇을 끊고 무엇을 멸하기에 열반이라 이름하는가? 그러므로 모든 법들은 공하지 않다. 모든 법들이 공하지 않기에 모든 번뇌들을 끊고 5온을 멸할 수 있는 것이니, 이를 열반이라 이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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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모든 법들이 공하지 않다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데 |
무엇을 끊고 무엇을 멸하기에 열반이라 부르는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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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모든 세간의 법들이 공하다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데 무엇을 끊고 무엇을 멸하기에 열반이라 이름하는가?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14)의 두 문(門)을 통해서 열반에 다다르지 못한다. 열반이란,다음 게송에서와 같다. |
획득되지도 않고 도달되지도 않으며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으며 |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을 열반이라 이름하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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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득되지 않는다’란, 수행[行]과 과보[果]가 획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달되지 않는다’란, 도달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단멸하지 않는다’란, 5온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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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공하지 않음과 공함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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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완전히 공하기 때문에 도(道)를 획득해서 무여열반에 들어갈 때 단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주하지 않는다’란,분별되는 법이 있다면 이 법을 상주한다고 한다. 열반은 적멸이어서 분별되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상주한다고 하지 않는다. 발생함과 소멸함도 이와 같다. 이와 같은 상(相)을 갖는 것을 열반이라 이름한다. 또 경전에서는 “열반은 존재[有]가 아니며, 비존재[無]가 아니며,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것이 아니며, 비존재[非有]인 것도 아니고 존재[非無]인 것도 아니다. 모든 법을 그 안에 수용하지 않고 적멸해 있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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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은 존재[有]가 아니네. 존재라면 늙음과 죽음의 상(相)이 있네. |
늙음과 죽음의 상을 떠난 존재[有法]는 결코 없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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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물들이 다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 눈에 보이니, 이것15)은 늙음과 죽음의 상을 갖는 것이다. 만약 열반이 존재라면 늙음과 죽음의 상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기에 열반을 존재라 하지 않는다. 또 발생과 소멸, 늙음과 죽음을 떠나서 별도로 열반이라 하는 확정된 법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만약 열반이 존재라면 발생과 소멸, 늙음과 죽음의 상이 있을 것이다. 늙음과 죽음의 상을 떠났기 때문에 열반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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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열반이 존재라면 열반은 유위일 것이네. |
무위인 법은 결코 한 법도 없을 것이네. (5) |
또 열반은 존재가 아니다. 왜 그러한가? 모든 사물들은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유위이다. ‘무위인 법은 결코 한 법도 없을 것이네’란,비록 상주하는 법을 임시로 무위라 이름하기는 하지만, 이치에 의거해서 추구해 보건대, 무상한 법도 있지 않거늘 하물며 볼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상주하는 법이 있겠는가? |
만약 열반이 존재라면 어떻게 취착이 없는 것이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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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존재(有)를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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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착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존재[有法]라고 이름하는 것은 없네.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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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열반이 존재[有法]라고 말한다면 경전에서 “취착이 없는 것이 열반이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취착이 없는 것이면서 있는 존재[有法]는 없다. 그러므로 열반은 존재가 아니다. |
[문] 만약 존재가 열반이 아니라면 비존재가 열반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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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존재가 열반이 아닌데 하물며 비존재가 열반이겠는가? |
열반에 존재가 있지 않은데 어디에 비존재가 있겠는가?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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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有]가 열반이 아닌데 어떻게 비존재[無]가 열반이겠는가? 왜냐 하면, 존재에 의존해서 비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존재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비존재가 있겠는가? 경전에서는 “전에는 있다가 지금 없는 것을 비존재[無]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열반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존재가 변이해서 비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존재도 열반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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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비존재가 열반이라면 어떻게 취착이 없는 것이겠는가? |
취착이 없는 것이면서 비존재[無法]라 이름하는 것은 없네.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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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비존재가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경전에서 “취착이 없는 것이 열반이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취착이 없는 것이면서 비존재[無法]라 이름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반은 비존재가 아니다. |
[문] 만약 열반이 존재가 아니고 비존재가 아니라면 어떤 것들이 열반인가? |
인연들을 받기 때문에 생사 속을 굴러가네. |
인연들을 받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 하네.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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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실하게 전도(顚倒)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5취온(取蘊)에 의존해서 생사를 왕래한다. 전도를 여실하게 알기 때문에 다시 5취온에 의존해서 생사를 왕래하지 않는다. 자성이 없는 5온(蘊)은 다시 상속하지 않기 때문에 열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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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 187] 쪽 |
이라 말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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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경전에서 유(有)도 끊고 비유(非有)도 끊으라고 말씀하셨네. |
그러니 열반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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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유(有)란 3유(有)이다. 비유(非有)란 3유가 단멸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두 가지를 끊으라고 말씀하셨으니 열반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문] 존재도 비존재도 열반이 아니라면 이제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 합한 것이 열반인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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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을 열반이라 말한다면 |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것이 해탈일 것이네. 이것은 옳지 않네.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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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가 합한 것이 해탈일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존재와 비존재는 서로 모순되는 것인데 어떻게 한 장소에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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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
열반은 취착이 없는 것이 아닐 것이네. 이 둘은 취착에서 생기는 것이네.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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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경전에서 “열반은 취착이 없는 것이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는 취착에서 생기는 것이고, 서로 의존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는 합함을 얻더라도 열반이 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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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비존재가 함께 합해서 성립한 것이 어떻게 열반이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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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은 무위이고 존재와 비존재는 유위인데.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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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는 함께 합하더라도 열반이라 할 수 없다. 열반은 무위이고 존재와 비존재는 유위이다. 그러므로 존재와 비존재는 열반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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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가 함께한 것이 어떻게 열반이겠는가? |
이 둘은 장소를 같이하지 않네. 마치 밝음과 어둠처럼.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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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는 열반이라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존재와 비존재는 마치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지 않는 것처럼 서로 모순되는 것이어서 한 장소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일 때 비존재는 없고 비존재일 때 존재는 없는 것인데 어떻게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 합한 것을 열반이라 하겠는가? |
[문]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 합하지 않은 것이 열반이 아니라면, 이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열반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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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을 열반이라 한다면 |
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무엇에 의해 분별되겠는가?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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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열반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면, 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은 무엇에 의해 분별되겠는가? 그러므로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을 분별해서 이것을 열반이라 하는 것이네. |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성립한다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성립할 것이네.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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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대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을 분별해서 이것을 열반이라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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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 187] 쪽 |
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성립한다면 그런 연후에 존재와 비존재가 성립할 것이다. 존재와 모순되는 것을 비존재라 하고, 비존재와 모순되는 것을 존재라 한다. 이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것은 제3구(第三句)에서 부정되었다.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것이 없는데 어떻게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열반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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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가 멸도(滅度)한 후에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다고도 말하지 말라. (17) |
|
여래가 현재에 있을 때도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다고도 말하지 말라.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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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래가 멸도한 후든 현재에 있을 때든 여래가 존재한다는 것도 인정되지 않고,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되지 않고, 여래가 존재하기도 하고 여래가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는 것도 인정되지 않고, 여래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다는 것도 인정되지 않는다. 인정되지 않으니 ‘열반이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따위를 분별해서는 안 된다. 여래를 떠나서 누가 열반을 얻겠으며,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떤 법으로 열반을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때 모든 종류로 열반의 상(相)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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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은 세간과 어떤 차이도 없네. |
세간은 열반과 어떤 차이도 없네.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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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5온(蘊)이 상속하고 윤회하기 때문에 세간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5온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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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 187] 쪽 |
자성은 완전히 공하고 취착이 없으며 적멸해 있다. 이 이치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모든 법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기 때문에 세간은 열반과 차이가 없고, 열반은 세간과 차이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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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의 한계와 세간의 한계 |
이 두 한계는 아주 적은 차이도 없네.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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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간과 열반의 한계를 완벽하게 궁구해 보아도, 한계가 생기는 일이 없고 평등해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적은[毫釐] 차이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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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도한 후에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따위, ‘유한하다’ 하는 따위, ‘상주한다’ 하는 따위 |
견해들은 열반과 미래세와 과거세에 의거한 것이네.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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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래가 멸도(滅度)한 후에 ‘여래가 존재한다’,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가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고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도 하다’,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세간은 유한하다’, ‘세간은 무한하다’, ‘세간은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 ‘세간은 유한한 것도 아니고 유한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세간은 상주한다’, ‘세간은 무상하다’, ‘세간은 상주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이기도 하다’, ‘세간은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다’ 하는 이 세 부류의 열두 견해 중에서, 여래가 멸도한 후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따위의 네 견해는 열반에 의거해서 생기는 것이고, ‘세간은 유한하다’, ‘무한하다’ 하는 따위의 네 견해는 미래세에 의거해서 생기는 것이고, ‘세간은 상주한다’, ‘무상하다’ 따위의 네 견해는 과거세에 의거해서 생기는 것이다. 여래가 멸도한 후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따위를 얻을 수 없듯이 열반도 그러하다. 세간은 과거세[前際]로부터 ‘상주한다’, ‘무상하다’ 하는 따위와, 세간은 미래세[後際]가 ‘유한하다’, ‘무한하다’ 하는 따위를 얻을 수 없듯이 열반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간과 열반 따위는 차이가 없다. |
모든 법들이 공한데 무엇이 유한한 것이고, 무엇이 무한한 것이며, |
무엇이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며, 무엇이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은 것인가? (22) |
|
무엇이 같은 것이고 무엇이 다른 것이며, 무엇이 상주하는 것이고, 무엇이 무상한 것이며, |
무엇이 상주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이기도 하며, 무엇이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닌 것인가?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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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法)들은 인식할 수 없고, 모든 희론들이 적멸하네. |
어떤 사람에게도 어떤 장소에서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없네.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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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모든 때 모든 종류의 모든 법은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공해서 자성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 중에서 무엇이 유한한 것이고 누가 유한한 것을 행하며, 무엇이 무한한 것이며, 무엇이 유한한 것이기도 하고 무한한 것이기도 하며, 무엇이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고 누가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은 것을 행하는가? 무엇이 상주하는 것이고 누가 상주하는 것을 행하며, 무엇이 무상한 것이며, 무엇이 상주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이기도 하며, 무엇이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고 누가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닌 것을 행하는가? 몸과 ‘나[神]’가 같다는 것은 무엇이고, 몸과 ‘나’가 다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예순둘의 그릇된 견해들은 완전한 공함 속에서는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인식이 다 지식(止息)하고, 희론이 다 적멸한다. 희론이 적멸하기 때문에 법들의 실상(實相)에 통달해서 안은(安隱)한 도(道)를 얻는다. |
「인연을 관찰하는 장」에서부터 지금까지 법들을 구별해서 궁구해 보아도, 존재하는 것[有]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 것[無]도 없고,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한 것[有無]도 없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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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 187] 쪽 |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非有非無]도 없다. 이것을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라고 한다. 또한 진여ㆍ법성ㆍ실제(實際)ㆍ열반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어떤 때에도 어떤 곳에서도 사람을 위해 열반의 확정된 상(相)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게송에서는) “모든 인식이 다 지식(止息)하고 희론이 다 적멸하네”라고 말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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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2연기를 관찰하는 장[觀十二因緣品] 9偈 |
[문] 그대는 대승의 법에 의거해서 제일의(第一義)의 도를 말해 왔다. 나는 이제 성문(聲聞)의 법에 의거해서 제일의의 도에 들어가는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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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중생은 무지[癡]에 덮여 있어서 후생(後生)을 위해 3행(行)을 일으키네. |
이 행(行)을 일으키기에 행에 따라서 6취(趣)에 떨어지네. (1) |
|
모든 행(行)을 인연으로 해서 식(識)은 6도(道)의 몸을 받네. |
식의 집착이 있어서 명색(名色)이 증장(增長)하네. (2) |
|
명색이 증장하기에 그것을 인연으로 해서 6입(入)이 생기네. |
근[情]과 경[塵]과 식이 화합해서 6촉(觸)이 생기네. (3) |
|
6촉을 인연으로 해서 3수(受)가 생기네. |
3수를 인연으로 해서 갈애(渴愛)가 생기네. (4) |
|
갈애를 인연으로 해서 4취(取)가 생기고, 4취를 인연으로 해서 유(有)가 생기네. |
취착하는 자가 취착하지 않는다면, 해탈하기에 유가 없을 것이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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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 187] 쪽 |
유(有)로부터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으로부터 늙음과 죽음[老死]이 있네. |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근심ㆍ비애ㆍ고뇌가 있네. (6) |
|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은 다 태어남[生]으로부터 있는 것이네. |
이런 인연들 때문에 거대한 고(苦)의 집적이 집기(集起)하네. (7) |
|
이것을 태어나고 죽는 행(行)들의 근본이라고 말하네. |
지혜가 없는 자[無明者]가 만드는 것이지 지혜가 있는 자[智者]가 만드는 것이 아니네. (8) |
|
이것이 소멸하기에 이것이 발생하지 않네. |
오직 고(苦)만의 집적이 바르게 소멸하네. (9) |
|
범부는 무명(無明)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의업(意業)으로 후생(後生)의 몸을 위해 6취(趣)16)의 모든 행(行)을 일으킨다. 일으키는 바의 행에 따라서 상과 중과 하가 있다. 식(識)17)은 6취에 들어가 행(行)에 따라서 몸을 받는다. 식의 집착을 인연으로 해서 명색(名色)이 집기(集起)한다. 명색이 집기하기에 6입(入)18)이 발생한다. 6입을 인연으로 해서 6촉(觸)19)이 발생한다. 6촉을 인연으로 해서 3수(受)20)가 발생한다. 3수를 인연으로 해서 갈애(渴愛)21)가 발생한다. 갈애를 인연으로 해서 4취(取)22)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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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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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6도(道)라고도 한다. 미혹한 중생이 업에 따라 나아가는 천신ㆍ인간ㆍ축생ㆍ아귀ㆍ아수라ㆍ지옥 등이다. |
17)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 |
18) 6입처(入處) 또는 6처(處)라고도 한다. 안처(眼處)ㆍ이처(耳處)ㆍ비처(鼻處)ㆍ설처(舌處)ㆍ신처(身處)ㆍ의처(意處)등 이다. |
19) 안촉(眼觸)ㆍ이촉(耳觸)ㆍ비촉(鼻觸)ㆍ설촉(舌觸)ㆍ신촉(身觸)ㆍ의촉(意觸). |
20) 고수(苦受)ㆍ낙구(樂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
21) 애욕(愛欲)에 탐착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욕애(欲愛)ㆍ유애(有愛)ㆍ무유애(無有愛)를 말한다. |
22)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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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 187] 쪽 |
발생한다. 4취를 취착할 때 신업과 구업과 의업으로 죄나 복이 일어나서, 후의 3유(有)23)를 상속하게 한다. 3유로부터 태어남[生]이 있다. 태어남으로부터 늙음과 죽음[老死]이 있다.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근심ㆍ비애ㆍ고뇌의 여러 가지 환난(患難)들이 생겨서 거대한 고(苦)의 집적이 집기(集起)한다. 그러므로 범부는 지혜가 없어서 태어나고 죽는 행(行)들의 근본을 일으킨다. 지혜가 있는 자[智者]는 (그것들을) 일으키지 않는다. 여실하게 보기에 무명이 소멸한다. 무명이 소멸하기에 행들이 소멸한다. 원인이 소멸하기에 결과도 소멸한다. 이와 같이 12연기가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을 관찰하는 지혜를 수습(修習)하기에, 이것이 소멸한다. 이것이 소멸하기에 나아가 태어남, 늙음과 죽음, 근심, 비애, 거대한 고(苦)의 집적이 모두 여실하게 바르게 소멸한다. ‘바르게 소멸하네’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다. 이 12연기가 발생하고 소멸하는 이치는 아비달마 경전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27. 그릇된 견해를 관찰하는 장[觀邪見品] 31偈 |
[문] 이제까지 대승의 법으로 그릇된 견해를 타파하는 것을 들었다. 이제 성문의 법으로 그릇된 견해를 타파하는 것을 듣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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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내가 과거세에 존재했는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
세간이 상주하는가 하는 따위의 견해들은 모두 과거세에 의거한 것이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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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래세에 존재하겠는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
(세간이) 유한한가 하는 따위의 견해들은 모두 미래세에 의거한 것이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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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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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 187] 쪽 |
내가 과거세에 존재했는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는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았는가, 이것들은 ‘상주한다’ (‘무상하다’) 따위의 견해들인데 과거세에 의거하는 것이다. 내가 미래세에 존재하겠는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겠는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겠는가, 이것들은 ‘유한하다’, ‘무한하다’ 따위의 견해들인데 미래세에 의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그릇된 견해이다. |
무슨 이유로 그릇된 견해라 하는가? 이것에 대해 이제 설명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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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세에 내가 존재했다는 것은 얻을 수 없네. |
과거세의 나는 금세의 나가 되지 않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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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바로 그 사람이지만 몸이 다르다고 말한다면 |
몸을 떠나서 어디에 별도로 ‘나’가 있겠는가?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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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떠나서 ‘나’가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성립했네. |
만약 몸이 곧 ‘나’라고 말한다면 그대에게는 도무지 ‘나’가 있지 않은 것이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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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몸은 ‘나’가 아니네. 몸은 생멸하기 때문이네. |
어떻게 취착이 취착하는 자이겠는가?2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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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몸을 떠나서 ‘나’가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
취착이 없이 ‘나’가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얻을 수 없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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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의 ‘나’는 취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바로 그 취착인 것도 아니며 |
취착이 없는 것도 취착이 없지 않는 것도 아니네. 이것은 확정된 이치이네.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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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어떻게 취착을 취착하는 자로 삼겠는가?’라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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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 187] 쪽 |
내가 과거세에 존재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선세의 ‘나’는 금세의 ‘나’가 아니다. 상주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상주한다고 한다면 무한한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가령 사람이 복을 닦은 인연 때문에 천신이 됐다가 이후에 다시 사람이 된 경우에, 만약 선세의 ‘나’가 금세의 ‘나’라면, 천신이 그대로 사람일 것이다. 또 사람이 죄업(罪業)의 인연 때문에 전다라(旃陀羅)가 됐다가 이후에 다시 바라문(婆羅門)이 된 경우에, 만약 선세의 ‘나’가 금세의 ‘나’라면 전다라가 그대로 바라문일 것이다. 비유하자면 제바달(提婆達)이라 하는 사위국(舍衛國)의 바라문이 왕사성(王舍城)에 갔어도 제바달이라고 부르지 왕사성에 갔다고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선세에는 천신인데 후세에는 사람이라면 천신이 그대로 사람일 것이고, (만약 선세에는 전다라인데 후세에는 바라문이라면) 전다라가 그대로 바라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천신이 그대로 사람인 것이 아니고, 전다라가 그대로 바라문인 것이 아니다. 이 상주의 과실들이 있기 때문이다. |
선세의 ‘나’가 금세의 ‘나’가 아니라고 말하자, 이렇게 반박한다. |
“가령 사람이 옷을 빨때는 빨래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풀 벨 때는 풀 베는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빨래하는 사람이 풀 베는 사람과 다르진 않지만 빨래하는 사람이 그대로 풀 베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나’가 천신의 몸을 받았을 때는 천신이라고 부르고, ‘나’가 사람의 몸을 받았을 때는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다르지 않지만 몸은 다르다.” |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그대로라면, 천신이 사람이 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빨래하는 사람은 풀 베는 사람과 다른가, 다르지 않은가? 만약 다르지 않다면, 빨래하는 사람이 그대로 풀 베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듯이 선세의 천신은 그대로 사람일 것이며 전다라는 그대로 바라문일 것이니, ‘나’에게도 또한 상주의 과실이 있다. 만약 다르다면, 빨래하는 사람이 풀 베는 사람이 되지 못하듯이, 천신은 사람이 되지 못하니 ‘나’ 또한 무상해서 ‘나’의 특징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로라고 말할 수 없다. |
[문] ‘나’는 그대로이다. 단지 취착에 의해서 ‘이것은 천신이다’, ‘이것은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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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 187] 쪽 |
이다’고 분별할 따름이다. 취착이란 5온의 몸을 말한다. 업의 인연 때문에 ‘이것은 천신이다’,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전다라이다’, ‘이것은 바라문이다’라고 분별하는 것이지 ‘나’는 실제로 천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과실이 없다. |
[답]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몸이 천신이 되고 사람이 되고 전다라가 되고 바라문이 되는 것이어서, ‘나’가 아니라면 몸을 떠나 별도로 ‘나’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죄나 복을 지어 생사 윤회하는 것은 모두 몸이지 ‘나’가 아니다. 죄의 인연 때문에 3악도(惡道)25)에 떨어지고, 복의 인연 때문에 3선도(善道)26)에 태어난다. 만약 괴로움ㆍ즐거움ㆍ미움ㆍ기쁨ㆍ두려움 따위가 모두 몸이지 ‘나’가 아니라면 ‘나’를 어디에 쓰겠는가? 마치 속인의 죄를 다스리는데 출가인을 참여시키지 않는 것과 같다. 5온의 인연이 상속해서 죄나 복이 상실되지 않기 때문에 해탈이 있는 것이다. 만약 모두 몸이고 ‘나’가 아니라면, ‘나’를 어디에 쓰겠는가? |
[문] 죄나 복 등은 ‘나’에 의지한다. ‘나’에는 인식 작용[所知]이 있지만 몸에는 인식 작용이 없기 때문에, 인식하는 자는 ‘나’이어서 업(業)을 일으키는 인연이다. 죄나 복은 지어진 것[作法]이기에 짓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짓는 자는 ‘나’이고 몸은 ‘나’가 사용하는 것이고 ‘나’가 거주하는 곳이다. 비유하자면 집 주인이 풀ㆍ나무ㆍ진흙ㆍ매흙[墍:벽에 바르는 흙] 등을 써서 집을 고칠 때 스스로 몸을 위해 쓰임에 따라서 집을 고치기에 좋은 데도 있고 좋지 않은 데도 있다. ‘나’도 이와 같아서, 선이나 악을 짓는 것에 따라서 아름답거나 추한 몸을 받으니 6도(道)의 생사가 모두 ‘나’가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죄나 복의 몸은 모두 ‘나’에 속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집은 주인에게만 속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
[답] 이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왜 그러한가? 집 주인은 형체가 있고 감촉이 있어서 힘이 있기에 능히 집을 고칠 수 있지만, 그대가 말하는 ‘나’는 형체가 없고 감촉이 없어서 짓는 힘이 없다. 자기에게 짓는 힘이 없기에 다른 것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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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축생ㆍ아귀ㆍ지옥. |
26) 인간ㆍ아수라ㆍ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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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짓도록 시키지도 못한다. 만약 세간에 형체가 없고 감촉이 없으면서도 능히 지을 수 있는 것이 한 법이라도 있다면, 인식 작용[知]이 짓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믿고서 받아들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나’가 짓는 자라면 스스로 괴로운 일[苦事]을 짓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나’가) 기억하는 자라면 즐거운 일을 탐내는 것을 잊고 말 것이다. 만약 ‘나’가 괴로움[苦]을 짓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이 어찌할 수 없이[强] 생기는 것이라면, 여타의 모든 것도 다 스스로 생기는 것이지 ‘나’가 지은 것은 아닐 것이다. |
만약 보는 자가 ‘나’라면 눈이 능히 색을 볼 수 있으니 눈이 ‘나’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눈이 보는데 ‘나’가 아니라면, 보는 자가 ‘나’라는 앞에서 말한 것과 어긋나게 된다. 만약 보는 자가 ‘나’라면,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등 다른 경계를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보는 자라는 것은 옳지 않다. |
만약 마치 풀 베는 사람이 낫을 써서 풀을 베는 것과 같이 ‘나’도 이와 같이 손 등을 써서 능히 짓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 경우는 낫을 떠나서 별도로 풀 베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몸과 마음과 감관을 떠나서 별도로 짓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짓는 자가 비록 눈[眼]ㆍ코[鼻] 등으로 지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짓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석녀의 자식이라 해도 능히 짓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감관[根]들은 다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
만약 오른쪽 눈이 사물을 보아도 왼쪽 눈이 그것을 인식하므로 별도로 보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지금 오른 손이 익힌 일을 (후에) 왼 손이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별도로 짓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별도로 짓는 자가 존재한다면 왼 손이 익힌 일을 오른 손도 할 수 있어야 할 터이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시 짓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
또 ‘나’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과일을 먹는 것을 보면 입에서 침이 나오는데, 이것이 ‘나’의 상(相)이다”고 말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것은 기억[念]의 힘이지 ‘나’의 힘이 아니다. 또 이것은 ‘나’를 타파하는 이유가 된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침이 나오는 것을 부끄러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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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데도 침이 저절로 흘러나와 제어가 되지 않으니,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또 전도의 과오가 있게 된다. 선세에는 아버지이던 자가 금세에는 아들이 될 때 아버지와 아들은 ‘나’는 하나인데 몸은 다르다고 하는 것이 된다. 마치 한 집에서 다른 한 집으로 가는 것과 같다. (선세에) 아버지였기에 (금세에도) 아버지이다. 다른 집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나’가 존재한다면 이 두 사람은 동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큰 과실이 있는 것이다. |
만약 무아(無我)인 5온의 상속(相續)에도 이 과실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5온은 비록 상속하지만 어떤 때는 작용이 있고 어떤 때는 작용이 없다. 비유하면 계(戒)를 지키는 자는 포도즙은 마셔도 되지만 포도주는 마셔서 안 되는데, 만약 변질되어 포도산[苦酒]이 되면 다시 마셔도 되는 것과 같다. 5온의 상속도 이와 같아서 작용이 있을 때가 있고 작용이 없을 때가 있다. 만약 시종 동일한 ‘나’가 존재한다면 이와 같은 과실이 있겠지만, 5온의 상속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없다. 단지 5온이 화합한 것일 뿐이기에 임시로 ‘나’라고 이름붙인 것이니 확정된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대들보와 서까래가 화합해서 집이 존재하는 것이기에 대들보와 서까래를 떠나서 별도로 집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5온이 화합해서 집이 존재하는 것이기에 5온 없이 별도로 ‘나’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단지 임시로 이름붙인 것[假名]일 뿐이지 확정된 실체[定實]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그대는 앞에서 “취착을 떠나서 별도로 취착하는 자가 존재한다. 취착에 의해서 취착하는 자를 분별해서 ‘이것이 천신이다’, ‘이것이 사람이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취착만이 존재할 뿐이지 별도로 취착하는 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취착을 떠나서 별도로 ‘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취착을 떠나서 ‘나’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나’의 상(相)을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상이 없는데도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취착을 떠나서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다.) |
만약 몸을 떠나서 ‘나’가 존재하지 않고 몸이 바로 ‘나’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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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몸에는 생멸의 상(相)이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또 어떻게 취착이 곧 취착하는 자이겠는가? 만약 취착을 떠나서 취착하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만약 5온을 취착하지 않고서 취착하는 자가 존재한다면 5온을 떠나서 별도로 취착하는 자가 존재할 것이니, 눈[眼] 등의 감관[根]에 의해서 지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지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취착을 떠난 것도 아니고, 취착 그대로인 것도 아니며, 취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취착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확정된 이치이다. 그러므로 과거세에 ‘나’가 존재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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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세의 ‘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옳지 않네. |
과거세의 ‘나’가 금세의 ‘나’와 다르다는 것도 옳지 않네.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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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없어도 지금의 것이 존재할 것이네. |
‘나’가 과거세에 머물러 있고 금세에 ‘나’가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네.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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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단멸이니 업과 과보를 상실하는 것이네. |
그 자가 지었는데 이 자가 받는 이와 같은 과실들이 있네.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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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금세에 존재한다는 것에도 과실이 있네. |
‘나’가 지어진 것이고 원인이 없는 것이네.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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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세의 ‘나’가 금세의 ‘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네. 왜 그러한가? 과거세의 ‘나’는 금세의 ‘나’와 다르지 않다. 만약 금세의 ‘나’가 과거세의 ‘나’와 다르다면, 그 세(世)27)의 ‘나’가 없이 금세의 ‘나’가 존재할 것이다. 또 과거세의 ‘나’는 그 세(世)에 머물러 있고 이 세(世)의 몸은 스스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단멸의 극단에 떨어져서 모든 업과 과보를 상실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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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과거세이다. |
된다. 또 그 자가 죄를 지었는데 이 자가 과보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은 무한한 과실들이 있다. 또 이 ‘나’가 선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금세에 존재하게 되는데 이것도 과실이 있다. ‘나’는 지어진 것이고 원인이 없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세의 ‘나’는 금세의 ‘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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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이 과거세에 나는 존재했다, 존재하지 않았다, |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다는 견해들은 모두 옳지 않네.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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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와 같이 궁구해 보니, 과거세에 대한 그릇된 견해들, 즉 ‘존재했다’,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았다’ 하는 그릇된 견해들은 앞에서 그 이유를 말한 과실이 있기 때문에 모두 옳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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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래세에 존재할 것이다,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이와 같은 견해들은 모두 과거세의 경우와 같네.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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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래세에 존재할 것이다’,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이와 같은 4구(句)28)는 과거세의 경우와 과실이 같으니, 그 속에 들어 있는 대로 설명해야 한다. |
만약 천신이 그대로 사람이라면 상주의 극단에 떨어지네. |
천신은 태어나지 않을 것이네. 상주하는 것은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네.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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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천신이 그대로 사람이라면 이것은 상주하는 것이 된다. 천신이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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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존재할 것이다,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의 4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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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 187] 쪽 |
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람이라 하겠는가? 상주하는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주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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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천신이 사람과 다르다면 이것은 무상한 것이 되네. |
만약 천신이 사람과 다르다면 이것은 상속이 없는 것이네.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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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천신이 사람과 다르다면 무상한 것이 된다. 무상하다면 단멸 등의 과실이 있게 된다. 앞에서 말한 과실과 같다. 만약 천신이 사람과 다르다면 상속이 없는 것이다. 만약 상속이 있다면 어떻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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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반은 천신이고 반은 사람이라 한다면 상주함과 무상함이라는 |
두 극단에 떨어지게 되네. 이것은 옳지 않네.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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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중생이 몸의 반은 천신이고 몸의 반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상주함과 무상함이 있게 된다. 반인 천신은 상주하는 것이고 반인 사람은 무상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한 몸에 두 상(相)이 있다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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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상주하는 것과 상주하지 않는 것 이 둘이 동시에 성립한다면 |
그렇다면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이 성립할 것이네.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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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상주하는 것과 상주하지 않는 것 둘이 동시에 성립한다면 연후에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이 성립할 것이다.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것29)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지금 실제로는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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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상주함과 무상함이 동시에 있는 것을 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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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 187] 쪽 |
않은 것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
또 이제 생사에 시작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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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법에 오는 것이 확정되어 존재하고 가는 것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
생사에는 시작이 없을 것이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은 없네.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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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법에 어디에서 오는 것이 확정되어 존재하고 어디로 가는 것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생사에는 시작이 없을 것이다. 이 법을 지혜로써 구해 보아도 어디서 오는 것을 얻을 수 없고 어디로 가는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생사에는 시작이 없다. 이것은 옳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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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상주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상주하지 않는 것, |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것,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이 존재하겠는가?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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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그렇다면, 지혜로써 구해 보아도 상주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상주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상주하는 것에 의존해서 상주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상주하면서 무상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이 존재하겠는가?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것에 의존해서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과거세에 의거해서 ‘세간은 상주한다’ 등의 4구(句)30)는 얻을 수 없다. |
‘유한하다’, ‘무한하다’ 등의 4구31)는 미래세에 의거하는 것인데 이것은 얻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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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상주한다, 상주하지 않는다,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다,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는다의 4구이다. |
31) 유한하다, 무한하다, 유한하면서 무한하다,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다의 4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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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 187] 쪽 |
수 없다. 이제 설명하겠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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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세간이 유한하다면 어떻게 후세가 존재하겠는가? |
만약 세간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후세가 존재하겠는가?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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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세간이 유한하다면 후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실제로 후세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세간이 무한하다면 또한 후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후세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간이 무한하다는 것도 옳지 않다. |
또 이 두 극단은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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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온[陰]의 상속은 등불의 불꽃과 같네. |
그러니 세간은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네.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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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온(蘊)에서 다시 5온이 발생한다. 이 5온은 순차적으로 상속한다. 마치 뭇 연(緣)이 화합해서 등불의 불꽃이 있을 때 만약 뭇 연(緣)이 소멸하지 않으면 등불이 소멸하지 않고 뭇 연이 소멸하면 등불이 소멸하듯이. 그러므로 세간이 유한하다거나 무한하다고 말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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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전의 5온이 괴멸하고 이 5온에 의존해서 |
다시 후의 5온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세간은 유한할 것이네.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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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전의 5온이 괴멸하지 않고 또 이 5온에 의존해서 |
후의 5온의 발생하지 않는다면 세간은 무한할 것이네. (24) |
또 만약 전의 5온이 괴멸하고 이 5온에 의존해서 다시 후의 5온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세간은 유한할 것이다. 만약 전의 5온이 괴멸했을 때 다시 다른 5온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 때를 한계[邊]라고 한다. 한계는 최후의 몸[末後身]을 말한다. 만약 전의 5온이 괴멸하지 않고서 이 5온에 의존해서 후의 5온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세간은 무한할 것이니, 이것을 상주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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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 187] 쪽 |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세간은 무한하다는 것은 옳지 않다. 세간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국토 세간과 중생 세간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중생 세간이다. |
또 『사백관론(四百觀論)』32)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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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가르침, 말하는 자, 듣는 자를 얻기가 어려우니 |
그러니 생사는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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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가르침을 얻을 수 없기에 생사 윤회는 유한하지 않다. 어떤 시기에 참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어 道를 얻기 때문에 무한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다시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것을 타파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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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세간의 반은 유한하고 세간의 반은 무한하다면 |
이것은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것인데, 옳지 않네.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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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세간의 반은 유한하고 반은 무한하다면 이것은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한 법에 두 상(相)이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
왜 그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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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5온을 취착하는 자가 어떻게 한 부분은 파괴되고 |
한 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옳지 않네. (26) |
취착도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한 부분은 파괴되고 |
한 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는가? 이것도 옳지 않네.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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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온(蘊)을 취착하는 자가 어떻게 한 부분은 파괴되고 한 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는가? 한 가지의 것이 상주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이기도 할 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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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성천(聖天)의 『四百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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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 187] 쪽 |
없다. 취착도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한 부분은 파괴되고 한 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는가? 상주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이기도 하다는 두 상(相)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간이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것은 옳지 않다. |
이제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다는 견해를 타파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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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이 둘이 성립할 수 있다면 |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다는 것도 성립할 것이네.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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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한 것과 반대되기에 무한한 것이 존재한다. 마치 긴 것과 반대되기에 짧은 것이 존재하듯이. 있는 것[有]이나 없는 것[無]과 상반되기에,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 존재한다.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한 것과 상반되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존재한다. 만약 유한한 것이기도 하고 무한한 것이기도 한 것이 확정되어 성립한다면,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닌 것이 존재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미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제3구(第三句)를 타파했으니 어떻게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서로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구해 보아도, 미래세에 의지해서 세간은 유한하다 등의 네 견해들 모두 얻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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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들이 공한 것인데, 세간은 상주한다 등의 견해들, |
어느 곳에서 어느 때에 누가 이 견해들을 일으키겠는가?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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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위에서는 성문의 법으로써 견해들을 타파했다. 지금은 이 대승의 법에서는 모든 법들이 본래부터 완전히 공한 것[空性]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공성[空性法]에는 사람도 있지 않고 법도 있지 않으니 그릇된 견해든 바른 견해든 내서는 안 된다. ‘어느 곳[處]’이란 대지[土地]를 말한다. ‘어느 때[時]’란 년ㆍ월ㆍ일을 말한다. ‘누가’란 사람을 말한다. ‘이[是]’란 견해들 자체를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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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 187] 쪽 |
한다. 만약 ‘상주한다’, ‘무상하다’ 등이 확정된 견해라면 이 견해들을 내는 사람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나’를 타파했으니 이 견해들을 내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색이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처소도 타파되거늘 하물며 시간과 장소이랴? 만약 견해들이 존재한다면 확정된 실체[定實]가 존재할 것이고, 만약 확정된 것이라면 타파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까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타파해 왔으므로 견해들에는 확정된 자체[定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그런 견해들을 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게송에서 “어느 곳에서 어느 때에 누가 이 견해들을 내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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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성인 구담(瞿曇)께서는 연민을 품고서 이 진리를 말씀해 주셔서 |
모든 견해들을 다 끊게 하셨으니, 나는 이제 머리를 조아려 절을 드리네.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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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견해들이란 간략히 말하면 5견(見)33)이고 자세히 말하면 62견(見)이다. 이 견해들을 끊게 하기 위해 진리[法]를 말씀하셨다. 위대한 성인 구담[瞿曇]은 지혜가 무량하고 무한하며 불가사의한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조아려 절을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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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유신견(有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 |
출처 -동국역경원 -전자불전연구소
.황산덕 중론 해설보기는--:아름이네서 얘기 나누기 원문보기▶ 글쓴이 : 어진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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