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개마을의 한주고택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이 길게 뻗어 있다. 이곳 골목길은 기와와 토담이 담쟁이와 한데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daegu.com%2Ffiles%2F2013%2F05%2F23%2F01010101401.20130522.000154794.02.jpg)
조선 전기의 명재상인 정인지는 성주목 관아 북쪽에 있던 임풍루라는 누각의 기문(記文)을 쓰면서, 성주에 대해
“성주 고을은 생긴 것이 산천이 수려하고 기이하며, 인물이 번화하여 상주·진주·경주·복주(안동)와 더불어 남방에서
서로 상하를 다툰다. 내가 옛날에 벼슬할 때에 두세 번 이르렀는데, 한없는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고 고운 땅이었다.”
라는 평가를 남겼다.
성주 고을의 산천과 출신 인물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을
안에서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 크게 성세를 누려 성주 고을을 빛낸 마을 하나가 있으니, 월항면 영취산 자락에
위치한 한개(大浦) 마을이 바로 그것이다.
◆ 반촌(班村)의 모습으로 거듭난다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5호로 지정된 한개 민속마을을 찾았던 것은 봄꽃이 마지막 절정을 이루고
있던 5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주산인 영취산에서 뻗어 내린 좌청룡·우백호의 두 능선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마을에는 경상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교리댁, 북비고택(응와종택), 한주종택, 월곡댁, 하회댁, 극와고택, 진사댁, 도동댁 등 고래등 같은 골기와집이
신록으로 뒤덮힌 고목과 더불어 그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한편에서는 새로 복원된 초가집들이 붉은 황토벽을 드러낸 채 드문드문 들어서고 있었고, 운치 가득한 골목길에는
급속한 산업화가 남긴 가슴 아픈 유산인 시멘트 포장을 걷어내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민속마을의 정취를 단번에 빼앗아 가는 흉물스러운 전주와 전선에 대해서도 지중화(地中化) 사업이 추진될 예정이라고
하니, 한개 마을은 머잖아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반촌(班村)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한개 마을은 마을 자체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일뿐더러, 고택 하나하나마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면의 제약으로 각각의 고택에 담긴 사람 이야기를 하나씩 끄집어 낼 수는 없을 것 같다.
한개 마을의 지세는 멀리 백두대간 황악산 삼도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지맥이 가야산 줄기로 이어져 금오산에 이르고,
여기서 연결된 능선이 도고산을 거쳐 한개마을의 주산(主山)인 영취산에 이른다.
마을 앞에는 성주읍 방면에서 마을을 향해 이천(伊川)이 흘러 들어와 서북 방향에서 동남으로 흐르는 백천(白川)과 합류
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풍수지리에서는 한개마을이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의 형국을 하고 있다고 전한다. 마을 입구에 청룡 능선에서 백호
능선을 향하여 인공 제방을 쌓아 마을로 들어오는 통로를 좁혀 놓은 것은 마을의 기(氣)가 빠져 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흔적일 것이다.
이 마을은 전체적으로 영취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전저후고(前低後高)형의 지세이다. 그래서
마을의 어떤 살림집에 들어가도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뒷집 마루에 앉아 앞을 조망하면 앞집의 지붕을 넘어
넓게 시야가 열리는 이른 바 계단식 구조로 되어 있어, 집집마다 전망이 좋고 어느 집이나 햇빛이 잘 드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 시야가 멀리 안산을 향해 남서쪽으로 열려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으로 대부분의 집들이 남서향을
하고 있다.
마을을 둘러본 관광객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으로는 골목길이 있다.
기와가 덮인 토담이 구불구불 이어진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골목길이 이어진다. 이 마을의 골목길은 마치 처음부터 계획
적으로 설계된 느낌을 준다. 마을의 동구에 들어서면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곧장 마을의 북쪽 끝까지 올라가며 좌우측에 고택과 살림집이 들어서 있고, 다른 한 갈래는 동쪽으로 마을 앞을
지난 다음 북쪽의 영취산 자락까지 이어진다. 이 두 갈래 골목길은 다시 마을 가운데를 가로질러 동서로 연결되어 있어,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편리한 동선(動線)까지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 골목길만으로도 한개는 민속마을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의 한개마을은 영취산 자락에 위치해있다. 뒷집 마루에서 앞을 조망하면 앞집의 지붕을 넘어 넓게 시야가 열리는 계단식 구조로 된 이곳은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5호로 지정돼 있다. 대부분 가옥이 17~19세기 건립돼 몇차례 개축됐으며 성산 이씨의 집성촌 이기도하다. <br />
정훈진 기자 jhj131@idaegu.com](http://www.idaegu.com/files/2013/05/23/01010101401.20130522.000154793.02.jpg)
정훈진 기자 jhj131@idaegu.com
◆ 배산임수의 전형인 전저후고형 지세
한개마을은 고려 개국공신 이능일을 시조로 하는 성산이씨의 집성촌이다.
입향조는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와 경기좌도 수군첨절제사를 역임하였던 이우로서, 그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세거하고
있다. 그 후 시조로부터 21세가 되는 이정현은 호가 월봉으로,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광해군 때 문과식년시에
급제하여 홍문정자(弘文正字)가 되었지만 26세에 요절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중기에도 가끔씩 과거 급제자를 배출해 왔던 한개 마을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크게 번창
하였고, 영남을 대표하는 양반 마을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이 마을에서는 광해군 때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대과 급제자 9명과 소과 급제자 24명이 나왔다. 영조 연간에 사도세자를
측근에서 모시다가 세자가 뒤주에서 죽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은거했던 북비공 돈재 이석문, 문과 급제 후 사헌부 집의
등을 지낸 이석구, 이조정랑을 역임한 이해진, 정조 때 장원급제하여 사헌부 장령 등을 지낸 이규진 등이 저명하며, 조선
말에는 공조판서를 지낸 응와 이원조와 그의 조카로서 이 시기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한주 이진상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전기와 관련된 일화들은 너무나 다양하여 많다.
일제 강점 초기 일제는 전국에 걸쳐 반촌(班村)의 실태를 조사한 바 있었다.
향촌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며 조선 독립의 기개를 버리지 않고 있었던 양반들의 존재 양상을 파악하여 원활한 식민지배
정책을 추진하려는 의도에서 시행된 조사였지만, 조선 후기 이래의 양반 마을의 대체적인 모습을 전해주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이에 의하면 한창 번성했을 당시의 한개 마을은 약 120호에 이를 정도의 큰 마을이었다. 그러나 근래의 산업화 과정에서
여느 촌락과 마찬가지로 많은 주민이 도시로 떠나, 지금은 5동의 재실을 포함하여 70호 정도가 남아 있고, 그 중에서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50호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현존하는 고택들은 가장 빠른 것이 17세기경에 세워진 것이고, 대개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건립되어 몇 차례의 증개축을 거친 것들이다.
한개 마을은 비록 같은 성씨가 모여 살았던 성산이씨 집성촌이지만, 마을의 살림집이 모두 거창한 고가였던 것은 아니다.
각자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 주택의 규모가 달라졌음은 물론이다. 넓은 대지를 차지하고 솟을 대문에 여러 채의 골기와
건물을 갖춘 저택이 있는가 하면, 삼간초옥도 마을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민속마을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고택을 복원하는 노력과 더불어, 소박하지만 정감이 가는 초가삼간까지
복원하여 전체 마을을 옛날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문제의식이 필요하고 그에 걸맞는 복원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
야만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민속마을로서 우리에게 다가서게 될 것이다.
성주군청 관계에 의하면 앞으로 약 10년에 걸쳐 한개 민속마을에 대한 복원 사업이 추진될 예정이라고 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본 모습을 잃어버리거나 변형된 가옥들을 원형 복원하고, 소방방재시설을 철저히 갖추는 한편 관광객을 위한 편의
시설의 설치까지 계획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휴일 날, 손주들을 거느리고 한개 마을로 역사 여행을 떠나 조선 후기 양반 마을의의 정취를 마음껏
맛보게 될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이문기
경북대 역사교육과 교수·전 사범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