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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 사회·경제
[조선 후기의 경제]
농본주의와 자급자족주의의 이상에 입각한 조선 왕조의 경제 구조는 임진왜란 이후 계속 변화를 겪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앙법(移秧法) 등 농업 기술의 진보로 농업면에서 광작(廣作)현상이 일어나고, 시장 판매를 위한 상업적 농업이 전개되었다.
이 밖에도 사금 채취를 주로 하는 광업이 발달하고, 수공업면에서도 관장제수공업(官匠制手工業)에서 사영수공업(私營手工業)으로 이행되는 등 커다란 사회적·경제적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 자생적으로 자본주의의 맹아가 발아하였다.
또 청·일 등 외국과의 무역으로 치부한 의주의 만상(灣商), 부산의 내상(萊商), 주로 인삼을 취급하는 개성의 송상(松商), 한강을 활동 무대로 한 강상(江商)들의 대두는 상업 경제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양반집권층은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하는 정책을 실시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개항기 조선의 경제 상태는 자본주의적 맹아가 형성되었다고는 하나, 충분히 개발되지 못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 침탈]
경제사적으로 볼 때, 19세기 이후의 세계사는 산업화에 성공한 선진 산업국가가 후진 농업국가를 자본주의적인 세계경제 체제에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 선진국가가 후진국가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자본 자체의 속성, 선진국가간의 경쟁, 자국내의 정치·사회상의 모순, 후진국가의 국내 여건 등에 따라 양상이 다른 제국주의 정치가 전개되었다.
제국주의의 침략은 포함외교 혹은 ‘달러외교’를 통한 불평등조약 체제의 구축 현상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조선은 유치 산업의 보호를 위한 보호관세를 실시할 수 없었다. 또 부등가교환(不等價交換)으로 잉여자본의 축적이 불가능했으며, 각종 임산·수산·광산 자원을 마구 침탈당하였다.
반면에 제국주의 열강들은 무역·이권 취득·차관 공여 등의 방법으로 조선 경제를 침탈해 자본을 축적하였다. 그리고 축적된 자본을 재투자하여 경제 침략을 강화하였다. 특히, 조선에 침투한 제국주의 국가 중 선두주자였던 일본은 조선과의 통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어 원시적 자본 축적을 이룩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1876∼1882년의 기간에 일본은 조선의 무역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면서 일본의 상권은 침식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대청·대일 수입액의 비율은 1885년 19 : 81에서 1892년 45 : 55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패배로 조선에서의 청나라 상권은 쇠퇴했고, 일본과 구미열강의 상권 진출이 두드러졌다. 일본의 경제적 침투는 아관파천 뒤 잠시 주춤했으나 이내 조선의 대외무역액 가운데 수입의 과반, 수출의 8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1885∼1893년 간 조선의 대외무역 수지는 수입·수출의 비가 2.5 : 1이나 되는 만성적인 입초 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만성적인 국제 수지의 불균형으로 조선 정부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조선의 수출품은 쌀·콩·금·인삼 등이었다. 쌀은 대일 수출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조선 정부는 필요에 따라 방곡령(防穀令)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수입품은 영국산 면제품이 대종을 이루었고, 중국으로부터는 서적·약재 등도 수입하였다.
청·일 상인은 영국 제품을 조선 시장에 파는 중개무역을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산업화를 추진한 일본은 점차로 자국산 제품을 수출하기 시작, 1901∼1906년 간에 조선의 수입품 중 일본 상품이 차지한 비율은 61.6∼77.3%로 비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무역 못지 않게 밀무역도 성행하였다.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상인의 밀무역을 방지하고 세수(稅收)를 확보할 효과적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1890년대 외국 상사의 조선진출 상황을 보면, 1896년 총 258개의 외국인 상사 중 일본 상사가 210개일 정도로 일본 상인의 진출이 압도적이었고, 그 다음이 청국 상인이었다.
다음으로는 미국·영국·러시아·독일의 상사들이 진출하였다. 이들 외국 상사들은 상업과 무역 외에도 선운(船運)·광업·대금업·제조업·염업·농업·요업 등 광범한 영역에 투자하였다.
한편, 이들 상사들을 후원하는 은행도 진출했는데, 그 중 일본의 금융 진출이 가장 두드러졌다. 일본의 국립제일은행·제18은행·제58은행 등은 1890년부터 조선에 지점을 설치해 일본 상인에게 자금을 공급하였다. 또 조선산 금을 매입했으며, 조선 정부에 차관을 제공하는 등 금융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국립제일은행은 보통 은행업무 외에 조선 정부의 해관세업무·우편위체자금의 보관 사무, 그리고 1905년 이후에는 통화발행권을 확보해 조선 정부의 준(準)중앙은행 구실을 하였다. 러시아도 1897년에 한러은행 설립을 시도했으나 독립협회의 반대로 중지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은 열강들의 이권 쟁탈장으로 바뀌었다. 이 때 러시아는 북부 지방의 광산채굴권·삼림벌채권, 동해의 포경권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미국·영국·독일 등의 구미제국도 조선의 이권 쟁탈 대열에 참가, 철도부설권이나 광산채굴권 등을 따냈다. 구미열강의 이권 침탈은 주로 개인자본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반면, 일본의 경우는 주로 정부의 주도 하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은 조선에서 서구자본가가 이미 획득한 이권을 사들이고, 또 한국인의 자발적 민족기업 설립운동을 저지하면서 경제적 이권을 탈취하였다.
개항 후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얻은 이권은 철도부설권·광산채굴권·어업권·포경권 등 다양하였다. 일본의 경제적 침투는 농촌에까지 미쳐 일본 투자가는 조선 농민의 토지까지 매점하였다.
청일전쟁 후 일본의 대자본가에 의한 토지 약탈은 가속화되었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는 한국인 실업가들의 반대로 중지되었지만, 1907년 통감부의 압력에 의한 「국유미간지이용법 國有未墾地利用法」의 제정으로 일본인의 토지 약탈이 합법화되었다.
이후 일본자본가들은 한국농업주식회사·한국흥업·한국실업 등 농업회사를 설립, 조선에서 대농장을 경영하였다. 특히 1908년에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는 일제 하에서 가장 큰 지주로 성장하였다. 일본 농민의 이주와 자본가의 토지 투자 등에 의해 진행된 일본의 토지 약탈은 강점 후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가일층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재정 구조]
아래의 [표 2] 는 1896년도의 한국 최초 예산안으로서, 당시 재정 규모는 500만원 정도로 일본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표 2] 1896년도 예산안 (단위 : 원)
금 액
예 산 내 역 | |||
세 입 | 조 세 | 지 세 | 1,477,681 |
호 포 세 | 221,338 | ||
잡 세 | 9,132 | ||
인 삼 세 | 150,000 | ||
사 금 세 | 10,000 | ||
항 세 | 429,882 | ||
기왕연도소속수입 | 130,000 | ||
조 세 소 계 | 2,428,033 | ||
잡 수 입 | 5,000 | ||
주 조 화 | 1,282,450 | ||
전 년 도 보 계 잉 여 | 1,693,927 | ||
세 입 총 계 | 4,809,410 | ||
세 출 총 계 | 6,316,831 | ||
주 : 官報(1896.1.12.). |
이 [표 2] 에서 볼 수 있는 조선 정부의 재정 구조는 1910년까지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세입에는 지세와 항세, 즉 해관세(海關稅)가 주세입이었고, 상공업 부문으로부터의 수세는 적었다.
이것은 당시 조선 경제가 농촌 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근대적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위의 예산의 특징은 화폐 발행액이 세입의 5분의 1 이상을 점하고 있고, 재정 적자가 150만원에 달하고 있는 점이다.
당시 정부는 개항 후 개화·자강 정책의 실현을 위해 근대적 시설의 운영, 외국인 고문과 기술자의 초빙, 해외 사절 및 유학생 파견 등을 추가로 필요로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전세(田稅)의 증수는 물론 상공업 분야에서의 새로운 세원(稅源)의 확보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상공업 부문에서의 세입은 미약하였다. 정부는 오히려 지불 보증이 없는 화폐를 증발(增發), 경비를 마련한다는 고식책을 택하였다. 실질가치보다 명목가치가 높은 당오전 같은 화폐의 발행은 금지금(金地金)의 확보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물가 등귀와 인플레 등 유통 질서를 혼란시키는 역기능을 수반하였다.
때문에 화폐를 무한정 발행할 수 없었고 이를 위해 외국의 차관을 도입해야만 하였다. 1881년부터 1894년까지의 외국차관액수는 일본에 69만원, 청나라에 100만냥(兩) 정도였다. 1894년에는 일본으로부터 300만원의 차관을 도입한 일이 있고, 1905년 이후에는 대일차관액이 1300만원, 1910년경에는 2400만원에 달하였다.
누적된 적자 재정은 외국의 차관을 필요로 했고, 또 청·일 양국은 차관 공여를 미끼로 조선을 정치적·경제적으로 예속화하려고 하였다. 1907년에 범국민적으로 벌어진 국채보상운동은 바로 이 누증하는 외채를 상환하자는 국민들의 자발적 운동이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민족 산업의 형성]
개항전후 시기에 조선의 상업 활동은 주로 육의전(六矣廛) 상인, 공인(貢人) 등의 어용 상인, 그리고 객주(客主)·여각(旅閣) 등 사상(私商)이 담당하였다. 객주·여각 등은 개항 후 거간과 보부상들을 매개로 일본 상인과 거래하였다.
그러나 일본 상인들이 점차 이들 중개 상인을 거치지 않고 조선인 소비자 내지 생산자들과 직접 거래하자 조선 상인들은 위협을 느꼈다. 또, 1880년대에는 개화사상가들에 의해 근대적 회사 설립의 필요성이 역설됨에 따라, 객주와 여각은 상회사(商會社)를 설립, 외국 상인들에 대항하였다.
일종의 동업조합인 상회사는 1883년 원산에서 최초로 설립되었다. 그 뒤 일반 상인들이 양조회사·출판사 등을 설립하는가 하면, 정부는 1883년에 보부상을 보호하기 위해 혜상공국(惠商公局)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1894년까지 설립된 상회사의 수는 30여 개에 이르렀다.
정부는 1883년에 기기국(機器局)·박문국(博文局)·전환국(典圜局) 등을 설치해 각각 무기 제조·인쇄·조폐 업무를 담당하게 하는 한편, 1887년에는 광무국(鑛務局)을 두어 광산 개발을 감독하였다. 이외에도 정부 주도로 해운업이 운영되었다.
그런데 1894년 이전까지의 조선의 근대 기업은 정부가 주도하는 관설회사(官設會社)가 많았다. 더욱이 사기업이라 해도 관리들이 참여하거나 정부의 허가 또는 보호 하에 운영되는 관허회사(官許會社) 형태의 것이 많았다.
그러나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독립협회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근대적인 민족산업이 크게 발전했는데, 특히 이 때는 민간인의 기업 진출이 활발해졌다.
공업 분야에서는 방직업(紡織業)에 관심이 기울어져 1897년에 안경수(安駉壽)는 대한직조공장을, 그리고 1900년에 종로직조사(鍾路織造社)를 설립, 운영하였다. 방직업 외에도 요업·제분정미업·금속세공업·연초제조업 등의 분야에도 기업인들이 진출하였다. 이러한 상공업의 발전에 발맞추어 은행도 설립되었다.
우리 나라 사람의 손으로 세워진 최초의 은행은 1896년 김종한(金宗漢)·안경수 등이 설립한 조선은행(朝鮮銀行)이었다. 이를 필두로 경강상인(京江商人)들과 김종한이 합작해 설립한 한성은행(漢城銀行), 1899년 민영휘(閔泳徽) 등이 세운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 호남의 백인기(白寅基)가 세운 한일은행(韓一銀行) 등이 있었다.
이들 은행은 대체로 거상 배경의 자본가들과 전직 관리들의 합자로 설립되었다. 이들 한국인이 설립한 은행은 일본인 은행에 비해 자본과 경영 실적면에서 열세였다.
개항 후부터 강점 때까지 근대적 산업을 이끌어간 기업가는 관료, 객주·여각 등의 상인, 지주,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의 출신이었다. 그러나 김종한·안경수·이용익(李容翊) 등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현직 관료 혹은 관료 출신 기업가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것은 조선의 산업화가 관주도였음을 시사해주는 것으로서 이는 일본의 경우와는 다르고 중국과 유사하였다.
[교통·통신 시설의 발달]
19세기 후반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군사적·경제적 이유로 가장 중시했던 이권 중의 하나가 철도였다. 철도의 중요성은 이미 조선 정부측에서도 인식하고 있어서 국왕은 1883년 미국공사에게 철도건설 계획을 상의하고 1891년에는 경의선 부설 계획도 구상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자금 및 기술 부족과 청·일·미 등의 협조 결여로 좌절되었다. 청일전쟁 중 일본은 경인·경부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자 노력한 결과, 1896년에는 일본에 의해 최초로 경인선이 준공되었다. 이러한 외국인에 의한 철도 건설에 자극받아 한국인 자력으로 철도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즉 전직 관료였던 박기종(朴琪淙)은 1898년에 부하(釜下)철도회사, 이듬해 대한철도회사 등을 설립해 정부로부터 부산∼낙동강 하류간의 철도와 경의선의 부설 허가를 받기까지 하였다. 또한 1902년에는 이용익 등이 서북철도회사를 설립해 프랑스의 원조로써 경의선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1904년 유길준(兪吉濬)도 호남철도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 또는 관료 주도의 철도부설운동은 일본의 방해, 자금 및 기술의 부족 등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해서 일본이 경부선·경의선을 완공함으로써 한국과 만주 침략의 기간교통로로 삼았다.
조선 정부는 근대적 수상 교통을 위해 1899년에 기선회사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1892년에 관민합병회사인 이운사(利運社)로 흡수되었다. 광무연간에는 민간해운업이 발달하였다. 대한협동우선주식회사·인천우선회사·인한수선주식회사(仁漢輸船株式會社) 등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그러나 한국인이 경영하는 해운회사는 활동 영역이 국내의 하천과 연안에 국한되었고, 해외 운수업은 외국 기업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조선에 부설된 최초의 근대적 전신 시설은 청나라가 1883년에 군사·경제적 목적으로 개설한 서울―인천―의주간의 서로전선(西路電線)이었다. 일본은 이보다 조금 앞서 1883년에 부산∼나가사키(長崎)간의 해저 전선을 개통한 바 있다.
1888년에는 조선전보총국 관할 하에 서울∼부산간의 전신선으로서 남로전선(南路電線)이 개통되었다. 이것은 조선 정부가 주관했으나 1905년에 관할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 뒤 1891년에는 서울∼원산, 1899년에는 서울∼함흥간의 전신이 가설, 개통되었다. 남로전선이 개통되면서 처음으로 모스부호를 이용한 한글전신부호가 제정되었다.
조선 정부는 1884년에 홍영식(洪英植)의 건의에 따라 미국의 우편제도를 모방해 우정국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그 업무는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다. 그 뒤 1893년에 전우총국, 1895년에 우체사(郵遞司)를 두어 우편 사무를 재개했으며, 1900년에는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였다.
[사회]
개항에서 병합에 이르는 시기는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난 일대 전환기였다. 조선 후기에 빈발했던 민란을 통해 전통적인 사회신분제가 해체되고, 그 대신 새로운 사회 질서가 형성되고 있었으나 아직 정착되지 못한 유동적인 상태였다.
임진왜란 후에 나타난 중인층의 성장, 노비의 해방, 양반 특권의 동요 등의 현상이 개항 이후 더욱 촉진되었다. 그러다가 갑오경장을 통해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구분되는 엄격한 세습적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에 서자나 중인 출신이 많이 참여한 점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준양반계층의 사회 진출이 두드러졌다. 개항장의 객주·여각 등 사상(私商)들은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으며, 일반 상인이나 양반 지주들도 근대적 회사나 공장 설립에 참여하는 등 근대적 경제 활동을 벌였다.
전통 사회에서 천대받던 상인계층은 자기들이 축적한 부를 기반으로 갑신정변·갑오경장·독립협회운동·애국계몽운동 등에 참여했으며, 그 중 일부는 관계(官界)로 진출하였다. 이러한 상인 및 기업가의 대두와 함께 부두·광산·공장 등에서는 근대적인 임금노동자계층이 창출되었다. 이들 노동자들은 대부분 농촌 사회를 이탈한 농민들이었다.
조선 왕조의 지배층은 주로 기호지방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개항 후에는 전통시대에서 소외되었던 지역, 즉 서북지방과 영남·호남지방의 인사들이 정치·경제·문화 등 각계 분야에 지도층으로 대두하였다. 기독교 수용이 가장 활발했던 서북지방 인사들은 애국계몽운동에서 선도적 구실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유교 교양을 갖춘 양반 지식인보다는 서구의 근대 문물을 몸에 익힌 개화 지식인이나 개신 유학자 등 자립적 중산층 인사들이 사회 지도층으로 부상하였다. 이들은 전통 사회의 신분 차별·가족주의·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거족적·평등주의적인 민족국가 수립을 지향하였다.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농촌 사회의 구조가 점차 해체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도시와 농촌에서 성장한 각종 신흥 세력은 1919년 3·1운동에서 그들의 단합을 과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