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서 본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28강
짜뚜짝까숫땅
Catucakka-suttaṃ
네 바퀴 경(S1:29)
데와따(Devatā)
천신
2. 짜뚜짝깡 마와드와랑 뿐낭 로베나 상유땅,
Catucakkaṃ navadvāraṃ puṇṇaṃ lobhena saṃyutaṃ,
빵까자땅 마하위라 까탕 야뜨라 바윗사띠띠.
Paṅkajātaṃ mahāvīra kathaṃ yātrā bhavissatīti.
2. 네 개의 바퀴와 아홉 개의 문을 가져
탐욕으로 채워졌고 묶여 있으며 진흙에서 생겼습니다.
위대한 영웅이시여.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없습니까?
바가와(Bhagavā)
세존
3. 체뜨와 낫딩 와랏딴짜 잇차 로반짜 빠빠깡,
Chetvā naddhiṃ varattañca icchā lobhañca pāpakaṃ,
사무랑 딴하맙부야 에왕 야뜨라 바윗사띠띠.
Samūlaṃ taṇhamabbuyha evaṃ yātrā bhavissatīti.
3. 채찍과 가죽 끈을 자르고
소망과 탐욕을 끊어버리며
갈애를 뿌리째 뽑아버리면
이와 같이 여기서 벗어날 것이다.
짜뚜 짝까(catu cakka)는 네 개의 바퀴를 말합니다. 짜뚜(catu)는 네 개이고, 짝까(cakka)는 바퀴입니다.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 담마짝까(Dhamma cakka)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법의 수레바퀴라는 법륜(法輪)입니다. 여기서 네 가지 바퀴는 수행을 할 때 네 가지 자세(catu-iriyāpatha)를 말하는데 걷고, 서고, 앉고, 눕는 것입니다. 이것을 행주좌와(行住坐臥)라고 합니다.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몸을 알아차리는 신념처(身念處)에서 수행을 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나와 드와라(nava dvāra)는 아홉 개의 문입니다. 나와(nava)는 아홉 개이고, 드와라(dvāra)는 문입니다. 우리 몸에는 9개의 문이 있습니다. 아홉 개의 문은 눈 두개, 귀 두개, 코 구멍 두개, 입, 항문, 성기를 뜻합니다. 이것은 몸을 알아차리는 명상에서 부정관(不淨觀)을 할 때 아홉 가지 문을 알아차립니다. 이 천신이 부정관을 아는 신이거나 인생의 무상함을 아는 천신 같습니다. 부정관(不淨觀)은 몸의 32가지를 차례로 알아차리고 역순으로 알아차리면서 몸의 더러움을 아는 수행입니다. 이런 더러움으로 오온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한 수행입니다. 하지만 이 수행을 하다 몸에 대한 염오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해서 반드시 이 수행을 한 스승의 지도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뿐낭(puṇṇaṃ)은 가득 찬, 충만한, 그래서 꽉 찼다는 뜻입니다. 더러운 대변과 불순한 것들이 몸에 꽉 찼다는 것입니다. 사실 부정관 할 때 몸을 더러운 것으로 꽉 찬 항아리로 비유합니다. 이때 더러움으로 가득 찬 항아리를 뿐나가따(puṇṇaghaṭa)라고 합니다. 몸이라는 항아리가 외부에서 볼 때는 예쁘지만 내부는 지저분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몸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구가 된 후 21살에 병원에 가서 몸을 자르는 것을 봤습니다. 의사들이 사람을 칼로 자르고 죽는 모습을 항상 보고 있으면 우울증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는 것을 보기 때문에 마음이 힘들 것 같은데 이 분들이 부정관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무엇이나 받아들여서 이해하면 마음의 상처가 되지 않고 받아들이지 못해서 이해가 안 되면 마음의 상처가 될 것입니다. 의사들이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서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합니다. 어차피 만지는 것이니 술을 줄이고 부정관 수행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천신이 부처님께 여쭤봅니다. 이때 로베나 상유땅(lobhena saṃyutaṃ)에서 로베(lobhe)는 로바(lobha)를 말하는데 탐욕을 의미합니다. 상유땅(saṃyutaṃ)은 묶인, 결합된, 속박된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로베나 상유땅(lobhena saṃyutaṃ)은 탐욕으로 묶여있는, 입니다.
마하위라(mahāvīra)는 성직자를 부르는 명칭입니다. 인도의 자이나교 성직자를 마하위라(mahāvīra)라고 불렀습니다.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 인도에서는 마하위라(mahāvīra)가 큰 스승을 부르는 명칭으로 유명했습니다. 부처님 시대의 마하위라(mahāvīra)는 10번째 마하위라(mahāvīra)입니다. 예를 들면 티베트의 달라이라마 처럼 마하위라(mahāvīra)도 그 다음 마하위라(mahāvīra)가 있습니다. 천주교 교황의 첫 번째 교황과 두 번째 교황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마하(mahā)는 크다는 뜻이고, 위라(vīra)는 용감하다는 뜻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공을 크게 세운 이순신 장군 같은 사람을 마하위라(mahāvīra)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부처님에 대한 호칭을 ‘위대한 영웅이시여’로 했습니다. 한국의 사찰에 대웅전(大雄殿)이 있는데 바로 위대한 영웅이신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야뜨라(yātrā)는 수레. 자동차, 말차, 수레 등을 말합니다. 수레는 건너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냐? 이때 수레가 필요합니다. 빵까(paṅka)는 진흙이고, 빵까 자따(paṅka jāta)는 진흙에서 생겨난, 이라는 뜻입니다. 진흙에서 생겨났다는 것은 이 몸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것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낫디(naddhi)는 채찍입니다. 채찍은 분노의 시작을 말합니다. 채찍을 볼 때마다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분노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증오로 바뀝니다. 그래서 폭력이 생기고 나쁜 헤어짐이 생깁니다. 증오는 헤어진 뒤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괴로움 속에서 삽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아서 싸우고 헤어지면 인연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할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분노가 엮여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분노가 되었다가 나중에 증오가 됩니다. 이처럼 강한 분노를 뜻합니다. 증오가 지속되면 원한이 됩니다. 이것이 모두 느낌이 단계적으로 커지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생긴 마음은 항상 들뜸과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들뜸은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항상 들뜬 상태로 불안하게 살아야 합니다.
와랏따(varatta)는 가죽입니다. ‘가죽이란 채찍과 가죽 끈과 밧줄을 차례대로 자르고’라는 게송에서의 말은 갈애를 뜻합니다. 그리고 밧줄은 견해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게송에서는 나머지 오염원들을 가죽 끈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갈애를 버리고 잘못된 견해를 자르고 나머지 부수적으로 생기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모두 부셔버려서 소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성냄에는 항상 질투, 인색, 후회가 숨겨져 있습니다. 부처님과 데와닷따의 관계가 처음에는 분노로 시작되어 나중에 증오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증오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해야 합니다.
잇차(icchā)는 소망으로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잇차 로바(icchā lobha)에서 소망은 처음에 생긴 힘이 약한 것입니다, 수행자는 좋아하는 마음인 잇차(icchā)에서 탐욕인 로바(lobha)로 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나고 다시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잇차(icchā)는 뭔가를 갖고 싶은 소망. 처음에 생긴 힘이 약한 것입니다. 하지만 소망이 생긴 뒤에 더 전개되는 것은 강한 것으로 이것이 탐욕입니다. 이때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는 것은 소망입니다. 그러나 얻은 대상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 것은 탐욕입니다. 여기에 집착으로까지 가면 돌이킬 수 없는 업을 생성하여 괴로움뿐인 태어남이 생깁니다. 이처럼 사소한 소망이 나중에는 큰일을 저지르는 결과가 생깁니다.
예를 들면, 백만 원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잇차(icchā)입니다. 그런 뒤에 로바(lobha)는 백만 원을 반드시 갖겠다고 집착을 해서 챙기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얻고 싶은 마음에 정작 자신은 쓰지도 못하고 얻으려고 하는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얻은 것은 남을 주지도 않고 자기가 쓰지도 않는 것입니다. 라가(raga)는 욕망으로 욕정, 애욕, 야망을 포함하는 탐욕이 강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로바(lobha)보다 더 힘이 강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는 것이 우빠다나(upādāna)라고 하는 집착입니다.
삼무랑 딴항(Samūlaṃ taṇhaṁ)에서 물라(mūla)는 뿌리이고 딴항(taṇhaṁ)은 갈애입니다. 삼무랑 딴항(Samūlaṃ taṇhaṁ)은 일반적인 딴하(taṇha)보다 강한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애 전체를 뜻합니다. 압부야(abbuyha)는 뽑아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뿌리 전체를 뽑아 버린다는 말입니다. 삼무랑 딴항(Samūlaṃ taṇhaṁ)는 그냥 갈애가 아니고 갈애의 근본원인인 무명을 뜻합니다. 그래서 갈애를 뿌리 뽑는다는 것은 무명을 뿌리 뽑는 다는 것입니다. 뿌리는 토대가 되는 것으로 근본원인입니다. 이러한 토대를 제거하면 아라한이 됩니다. 그래서 무명을 완전하게 뿌리 뽑으려면 아라한의 도로써 뽑아야 합니다.
아산 마하위하라 화원에 풀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이 풀은 뿌리를 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풀이 잔디처럼 생겼는데 굉장히 예쁩니다. 그런데 뿌리가 아주 깊습니다. 그 풀은 다른 풀보다 쉽게 자라버립니다. 보기에는 아름답고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뿌리가 깊습니다. 에왕(evaṃ)은 예, 이렇게, 이와 같이, 라는 뜻입니다. 야뜨라 바윗사띠(yātrā bhavissati)는 벗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부정관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부정적입니다.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는 것도 중도가 아니고 극단적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정관 수행을 하시는 분들은 작은 것에도 굉장히 화를 내고 조그마한 소리하나 나는 것도 굉장히 예민합니다.
오래 전에 스리랑카의 교수실에는 문이 없었습니다. 바로 앞에 연구실이 있는데 연구실과 연구실 사이의 칸막이가 없어서 서로가 서로의 방을 볼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심리학 교수가 당신은 왜 나를 보느냐고 철학 교수에게 말했습니다. 철학 교수는 당신이 나를 보니까 그렇습니다. 나를 보지 않았으면 본 것에 대한 느낌이 없습니다. 그 교수님은 그냥 유리를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인데 상대 교수는 자기를 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고의 틀에서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더러운 몸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염원과 견해를 자르고
좋아하는 것과 대상을 움켜쥐는 것을 끊어버리고
무명을 뿌리로 하는 갈애를 뽑아버리면
더러운 몸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천신이 갈애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이 게송을 설하신 것 같습니다.
에니장가숫땅
Eṇijaṅghasuttaṃ
사슴 장딴지 경(S1:30)
데와따(Devatā)
천신
2. 에니장강 끼상 위랑 압빠하랑 아로루빵,
Eṇijaṅghaṃ kisaṃ vīraṃ appāhāraṃ alolupaṃ,
시항 웨까짜랑 나강 까메수 아나뻭키낭,
Sīhaṃ vekacaraṃ nāgaṃ kāmesu anapekkhinaṃ,
우빠상깜마 뿟차마 까탕 둑카 빠뭇짜띠띠.
Upasaṅkamma pucchāma kathaṃ dukkhā pamuccatīti.
2. 사슴 장딴지를 가졌고 날씬하고 용감하며
음식을 적게 먹고 탐욕이 없고
사자나 코끼리처럼 혼자 다니고
감각적 욕망에는 관심이 없으신 분
그 분을 친견하여 저희들은 여쭙니다.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납니까?
바가와(Bhagavā)
세존
3. 빤짜 까마구나 로께 마노찻타 빠웨디따,
Pañca kāmaguṇā loke manochaṭṭhā paveditā,
엣타 찬당 위라제뜨와 에왕 둑카 빠뭇짜띠띠.
Ettha chandaṃ virājetvā evaṃ dukkhā pamuccatīti.
2 세상에는 다섯 가닥 감각적 욕망이 있고
마음이 여섯 번째 욕망으로 알려진
여기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나면
이와 같은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이상이 사슴 장딴지 경의 내용입니다.
천신이 부처님께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천신은 무상에 대해 아는 천신입니다. 무아에 대한 개념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분입니다.
여기서 사슴 장딴지를 가졌다는 것은 날씬하고 용감하다는 것입니다. ‘사슴 장딴지를 가짐’은 32 대인상(三十二相) 가운데 11번째 상(相)에 해당합니다. 그때 당시 부처님은 사슴 장딴지를 가진 고귀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튼튼한 육체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탁월한 능력을 가진 운동선수 같은 몸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인도에 가면 돈 많은 부자들은 대부분 배가 나와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날씬하다는 말은 없어 보인다는 뜻으로 좋지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수행자에게는 좋은 말입니다.
압빠하랑(appāhāraṃ)은 음식을 적게 먹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오후 불식을 하고 계셔서 음식을 적게 먹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사자도 용감한 사자는 혼자 다닙니다. 젊은 사자는 혼자 다니고 늙은 사자들은 여러 마리가 모여 다닙니다. 코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길을 가다가 떼를 지어 다니는 코끼리를 만나면 위험하지 않은데 혼자 다니는 코끼리는 위험합니다. 단체로 있을 때는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혼자 다니는 코끼리는 왕따가 된 코끼리라서 무섭습니다. 왕따가 된 사람은 굉장히 좋거나 굉장히 나쁜 사람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알로루빵(alolupaṃ)은 탐욕을 버린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탐욕이란 스님들에게 올리는 4가지 필수품에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님들은 4가지 밖에 없는데 그것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가사 3벌만 가지게 했습니다. 비구의 가사 한 벌이 21m입니다. 그때 당시 천을 21m를 가지고 있으면 부자였습니다. 옛날에 가사는 만드는 스님이 계셨는데 이 스님은 가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면 좋은 천은 무엇이 이상하다고 핑계를 대고 나쁜 천으로 가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천은 자기가 가졌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아시고 그러면 계율에 어긋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님들이 발우에 몽땅 챙겨가는 분들도 계십니다. 일반 재가자들이 볼 때는 작은 것 가지고 싸우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다 버리고 출가했는데 집착의 대상을 만들어 버립니다. 아난 존자와 사리불 존자는 항상 가사공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스님들은 가사를 받아서 다시 보시했습니다.
지금은 절에 가사가 많습니다. 스님들은 가사를 대체적으로 3~4년 이상을 입으십니다. 가사는 입어야 의미가 있지 입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6월 보름에서 10월 보름까지 안거를 하고 안거가 끝나면 까티나 행사(kathina cirana) 때에만 가사를 올리라고 말씀드립니다. 까티나(kathina) 가사는 스님들께서 3개월 동안의 안거를 마친 후 올리는 가사이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스님들은 안거를 해야 1살을 먹습니다. 법랍이 1년 더해지는 것입니다. 안거 후 10월 보름에서 11월 보름까지 스님들께 가사를 올릴 수 있습니다.
1950년대에는 스리랑카에서 가사 한 벌 만드는데 6개월 걸렸다고 합니다. 요즘 몇 년 사이에 가사를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가사 만드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국은 지금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에서 가사를 가지고 와서 올려야 합니다. 그런데 상황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어떤 질병이 생기는 상황이 되면 통행이 금지되어 오고 갈 수가 없습니다. 미얀마도 내전 때문에 지금 아주 심각하고 스님들을 찾아뵙기도 힘듭니다.
나가(nāga)는 뱀, 용(龍), 코끼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용이라고 할 때는 거대한 뱀을 상징하는데 장수(長壽)의 힘이 있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용은 상상의 동물 같지만 지구에서 멸종된 동물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실재하는 동물일 수 있습니다. 나가(nāga)를 코끼리로 말할 때는 초월적인 사람을 상징하는 의미로 부처님이나 아라한을 말합니다.
바라지 않고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나면 아니뻭키나(anapekkhina)라고 합니다. 바라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염병이나 자연재해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천신은 부처님께 까탕 둑카 빠뭇짜띠(kathaṃ dukkhā pamuccatī)라고 했는데 이는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납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천신의 이와 같은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빤짜 까마구나 로께 마노짯타 빠웨디따,
Pañca kāmaguṇā loke manochaṭṭhā paveditā,
엣타 찬당 위라제뜨와 에왕 둑카 빠뭇짜띠.
Ettha chandaṃ virājetvā evaṃ dukkhā pamuccatī.
빤짜(Pañca)는 다섯 가지이고, 까마구나(kāmaguṇā)는 감각적 욕망입니다. 로께(loke)는 세상입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세상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상도 있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곧 수행자가 말하는 세상은 다른 것입니다. 로까(loka)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면 첫 번째가 세계, 세상, 현상세계, 유정세간, 세간, 세속, 사회입니다. 유정세간에서 유정(有情)이란 마음이 있는 생명이 사는 세속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가 세속적인 것, 세계의 구분, 물질의 요소를 말합니다. 세 번째가 인간, 인류, 중생, 뭇 삶을 말합니다. 여기서 세 번째의 인간은 오온을 말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에게 세상은 자신의 몸과 마음인 오온을 의미합니다. 수행의 대상은 몸과 마음이라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은 깨달음이기 때문에 돌고, 돌고, 돌아와도 결국 마지막에는 오온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이 오온으로, 오온이 다시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돌아옵니다. 다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하는 12처로 돌아옵니다. 마지막으로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을 포함한 18계가 인간이 전부입니다. 이때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여섯 가지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없으면 번뇌라는 도둑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합니다. 이처럼 오온의 괴로움을 소멸시키려면 오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는 것이 가르침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열반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마노찻타(manochaṭṭhā)는 마노(mano)와 찻타(chaṭṭhā)의 합성어입니다. 마노(mano)는 정신적 감각기관의 의(意)이지만 마음에 속하므로 마음입니다. 그리고 찻타(chaṭṭhā)는 여섯 번째입니다. 여기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은 육체적인 감각기관인 안, 이, 비, 설, 신을 말합니다.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할 때의 감각적 욕망을 말합니다. 여기에 여섯 번째로 정신적 감각기관인 의(意)를 더해서 여섯 가지의 감각적 욕망을 모두 포함시켰습니다. 부처님께서 보통의 경우는 오욕락을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는 모든 감각기관을 전부 포함시켜 육욕락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욕락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안, 이, 설, 신이 다섯 가지 감각대상인 색, 성, 향, 미, 촉과 접촉했을 때 일어나는 육체적 감각기관의 욕망입니다. 하지만 육욕락은 이상 다섯 가지 감각기관에 의(意)가 마음의 대상인 법(法)과 접촉했을 때 일어나는 정신적 욕망을 포함한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적 감각기관과 정신적 감각기관이 모두 동원된 욕망입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 육욕락을 말씀하시지 않는 것은 마음은 어렵기 때문에 다루지 않지만 가르침을 듣는 존재의 수준에 따라서 다르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답변의 첫 문장의 마지막 단어는 빠웨디따(paveditā)는 알려진, 보고된, 발표된, 입니다. 그러니까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과 여섯 번째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이 알려진 것처럼’이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엣타(Ettha)는 여기에, 지금, 이점에 관해서라, 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정신과 물질인 나마 루빠(namā rupā)를 말합니다. 찬다(chanda)는 욕망, 소망, 의향, 의지, 의욕, 열의, 열정, 충동, 투표라는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결국 찬다(chanda)는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빨리어로는 투표해서 뽑는 선거를 찬다(chanda)라고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뽑기 때문입니다. 찬다(chanda)는 마음의 작용 중에서 행에 속하는데 이때 이것이 의도가 행위라서 업입니다. 그런데 열정이 지나쳐서 욕망이 되면 불선업이고 적절한 의지로 중도의 열정이면 선업이 됩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도 지나침이 없어야 합니다. 괴로운 결과는 반드시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똑같은 행이지만 의도를 말하는 쩨따나(cetanā)는 기본적인 것이라서 항상 있는 것입니다. 이때의 의도는 업이 아닙니다. 그러나 찬다(chanda)는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고, 또 선한 의도일 때도 있고 악한 의도일 때도 있는 선택적인 것입니다. 이때는 선업과 불선업이 됩니다.
게송에 나오는 위라제뜨와(virājetvā)는 버리고 나서, 라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단어가 있느데 위라자띠(Virājati)는 빛이 난다는 동사입니다. 그리고 위라제띠(Virājeti)는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게송의 ‘엣타 찬당 위라제뜨와(Ettha chandaṃ virājetvā)’는 ‘여기에 대한 욕구를 버리고 나면’입니다. 이때 여기에 대한 욕망이란 바로 탐욕과 성냄과 무명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세 가지를 버리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탐욕이 라가(rāga)이고, 성냄이 도사(dosa)이고, 무명이 아윗자(avijjā)입니다.
일반적으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어리석음이라는 모하(moha)를 사용하지 않고 무명이라는 아윗자(avijjā)를 사용하셨습니다. 모두 똑같은 어리석음이지만 윤회의 근본원인이 무명과 갈애이기 때문에 더 강력한 표현으로 무명을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여기서 탐욕과 성냄과 무명은 버리고 지혜는 계발해야 하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버리는 것과 계발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때 수행은 마음을 계발하는 행위입니다.
이 경은 천신들의 이야기라서 정신과 물질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천신이 무상과 무아에 대한 개념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분입니다. 정신과 물질이 욕구의 토대가 되는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과 수〮, 상〮, 행〮, 식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오온(五蘊)이 오취온(五取蘊)이 된 상황에서 여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다시 오온으로 돌아오면 오온을 집착하지 않아 괴로움에서 완전하게
벗어납니다.
이상으로 제 3장의 칼 품이 끝났습니다.
세 번째 칼 품에 포함된 경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칼 경 2. 닿음 경 3. 엉킴 경 4. 마음제어 경 5. 아라한 경
6. 광채 경 7. 흐름 경 8. 큰 재산 경 9. 네 바퀴 경 10. 사슴 장딴지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