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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선 미술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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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자료 스크랩 아름다운 우리 그림?, 민화 (25~33)-민화의 시공간,조형원리, 민화의 형식과 내용,
느린선 추천 0 조회 146 16.02.24 23: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아름다운 우리 그림, 민화 (25~33)

-[민화의 시공간,조형원리,잘그린그림과 못 그린그림, 민화의 형식과 내용, 화가의 서명, 제목없는 그림,생명점과 이끼. 야나기 무네요시의 허접한 논리 ]-

 

 

 25. 민화의 시공간

 

우리그림에 대한 무지가 낳은 촌극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미술계의 사건이 하나 있었다.  1980년대 초반,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작품이 있었다.


서양화가 주도하던 미술계에서 이례적으로 동양화가가 대통령상을 수상했는데 그 작품은 연꽃 아래 한 쌍의 원앙을 그린 민화였다. 이 작품을 두고 서양화가들 일부에서 심사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작품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 김은숙 作/나들이/종이에 수채.  

이 그림은 대통령상을 받은 작품과 다르지만 참고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이 작품에는 연꽃과 청둥오리가 나오는데 청둥오리도 원앙처럼 철새이긴 마찬가지이다. 여름 꽃인 연꽃과 겨울새가 같은 공간에 등장해 생태적인 원리에 맞지 않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는 생태원리를 넘어선 조형원리가 숨어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연꽃은 여름에 피는 꽃이고 원앙은 추위를 피해 겨울에 남하하는 철새인데 여름 꽃과 겨울새가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생태적 특징에 맞는 않는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에 당혹감을 느낀 심사위원회에서는 해당 작가를 불러 해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작가는 그저 윗대 선생에게 배운 대로 그린 것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작가나 작가를 가르친 선생도 왜 이런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어쨌든 심사위원회에서는 격론 끝에 수상작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은 현실이 아니라 상상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구의 유명한 화가인 ‘달리’나 ‘샤갈’의 작품에서도 사람이 하늘을 날고 총구에서 호랑이가 튀어나오는 따위의 초현실주의 작품경향이 있었다.

 

만약 연꽃과 원앙을 그린 작품을 부정한다면 서양화법 전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동양화를 연구한 학자가 한마디 거들었다.  동양의 그림은 형상이 아니라 뜻이 우선하는 ‘뜻 그림’인데 이런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생긴 사건이라고 비판했다.

 

다시 말해 연꽃과 연꽃의 열매를 한자로 쓰면 ‘연과(蓮果)’가 되는데 이는 ‘연달아 과거시험에 합격한다.’라는 ‘연과(連科)’라는 말과 발음이 같기 때문에 연꽃을 그린 것뿐이다. 또한 원앙은 부부금슬을 상징하는 새이기에, 이 둘을 합쳐 ‘가정이 화목하고 과거시험에 합격하기를 기원합니다.’라는 뜻으로 그렸기에 연꽃이나 원앙의 생태적인 특성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결국 이 사건은 서양화와 동양화의 특징을 서로 이해하지 못해 생긴 촌극으로 끝났다. 

하지만 동양화 이론가도 모르는 부분이 있다.  동양화가 뜻 그림이긴 하지만 뜻이나 내용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모든 게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용과 형식이 통일되어야 미술작품이 되는 것이다.


미술에는 내용을 만들고 파악하는 이론도 존재하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독특한 조형방법이 있다.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 즉 조형방법은 창작가의 몫이다. 연꽃과 원앙이라는 작품에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현하는 조형방법, 즉 역원근법과 이에 따른 여러 시점이 들어가 있었다.


여러 시점이란 그림에서 시간을 뜻하는데 여름과 겨울이라는 시간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창작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창작방법에 대해 작품을 그린 작가도 몰랐고, 심사위원과 서양화가도 몰랐으며 동양화 이론가는 조형적 파악에 관심이 없었다.

여러 개의 원근법을 결합하면 역원근법이 만들어진다
모든 예술은 인간의 삶을 표현한 것이고 그 속에는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가상의 공간과 시간이 들어가 있다. 사람은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예술작품을 감상하거나 수용할 수 없다. 사람은 오로지 3차원적인 시공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에서 원근법이나 역원근법은 모두 시간과 공간을 표현하는 조형방법이다. 원근법이란 개념 안에는 1인칭 시점이 포함되어 있고 역원근법 안에는 여러 시점(다시점)이 내재되어 있다.  (역)원근법이 공간을 표현한다면 시점(視點)은 시간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원근법은 한 사람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나 사물의 그 순간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한 사람의 시점 즉 보는 시간이 바뀌면 공간은 달라진다. 반대로 보는 위치(공간)가 달라지면 시간도 바뀐다. 한 사람이 같은 시간에 다른 공간을 동시에 볼 수 없다. 또한 서로 다른 공간에 같은 시간대에 있을 수도 없다.


이 둘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 민화에서 사용하는 역원근법 안에는 여러 사람의 시점, 혹은 한 사람의 여러 시점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다른 공간을 같은 시간대에 표현하고 다른 시간을 한 공간에 드러낸다.  하나의 공간 속에 사계절이 공존하고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그림의 조형적 핵심인 역원근법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다. 역원근법은 그야말로 먹고 싶지만 먹을 수 없는 ‘뜨거운 감자’와 같았다. 그 이유는 역원근법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근법을 함께 언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원근법의 반대 개념으로 역원근법을 설정해야 하는데 이는 둘 중에 하나는 틀렸거나 잘못된 것이라는 전제를 동반한다. 현실에서 서양화법의 핵심인 원근법을 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근법은 서구사람들이 세상을 보고 인식하는 방법인데 이것을 부정하면 서구문명 전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세상 전체와 싸워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나 또한 오랜 세월동안 서양화법을 공부했다. 원근법과 명암법, 여기에 걸맞은 상징과 구도, 표현방법을 익히는데 수 십 년의 시간을 보냈다. 이런 내가 역원근법을 공부한다고 지금까지 쌓아온 원근법의 세계를 한순간에 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역원근법에 대한 공부를 지속할수록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그림은 원근법을 부정하거나 충돌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역원근법 안에는 여러 개의 원근법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원근법 안에는 일인칭시점이 내재되어 있는데, 만약 일인칭시점을 사용하지 않고 여러 시점을 사용하면 곧바로 역원근법 구도가 만들어진다. 역원근법 속에 있는 여러 시점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의 시점만 사용하면 원근법으로 바뀐다.


역원근법은 여러 개의 원근법과 시점(시간)이 결합된 형태이므로 공간은 확장되고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이 겹쳐진다. 역원근법이란 말 중에 ‘역(逆-거스르다. 배반하다. 어기다.)’이라는 단어 때문에 오해를 할 수도 있다. 언젠가는 고쳐 사용해야 할 말이지만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다면 ‘확대원근법’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 시점에 따른 사물의 변화를 도형으로 만들어 보았다. 한 사람의 시점으로 보면 원근법이 적용되어 사물이 작아지고 가려진다. 여러 사람의 원근법을 겹쳐 적용하면 사물은 작아지거나 겹쳐지지 않는다. 역원근법은 이렇게 다양한 원근법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조형방법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역원근법은 여러 개의 원근법이 겹쳐졌다고 했는데 이것을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만약 여러 그루의 나무와 여러 사람이 있는 풍경을 사진기로 찍는다고 가정해 보자.


작가는 멀리서 보이는 전체 풍경을 먼저 찍는다. 그리고 앞으로 혹은 옆으로 걸어간다. 앞에 있는 나무를 보고 한 장을 찍는다. 좀 더 가면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나오는데 또 한 장 찍는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 장, 혹은 수 십장의 사진을 결합하여 하나의 화면에 구현하는 것이다.


물론 아침에 한 장을 찍고 점심을 먹고 난후 한 장을 찍고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저녁에 한 장을 찍을 수도 있다. 그러면 낮과 밤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원근법을 적용하면 공간은 계속해서 넓어져서 결국 역원근법이 된다. 한발씩 걸어들어가면서 본 일인칭시점을 겹치면 물체는 결코 작아지거나 가리지 않는다. 가려지는 물체 앞에서 다시 원근법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의 시점이 겹쳐질 때마다 시간도 달라지고 겹쳐진다.   이렇게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겹쳐 그리는 방식인데, 일반적으로는 그 형상이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사물이 시간 차이에 의해 서로 겹쳐지면 사물 고유의 형태가 깨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마치 앞면과 옆면을 결합시킨 피카소 인물화처럼 괴기스러운 모습이 연출되기도 한다.


결국 원근법과 역원근법, 일인칭 시점과 여러 시점을 절묘하게 결합시켜야 이런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 어쨌든 아름답게 보여야 하는 것이 미술의 본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술조형방법은 일반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작가들의 전문적인 영역이다. 다만 우리그림에 엄격하고 체계적인 조형원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하다.


 

▲ 역원근법으로 표현된 책거리 그림이다. 상상의 새라는 봉황이 책 위에 앉아 있고, 현실의 새인 매가 매화와 함께 표현되어 있다. 기발하게도 책 위에 괴석을 얻고 그 위에 매를 그렸다. 용맹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시공간이 자유로워 표현의 한계가 없어졌다. 이 모두가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관념의 세계이다. 하지만 각 사물의 형상과 내용은 누가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도록 그려졌다. [자료사진 - 심규섭]


역원근법으로 구현한 세상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는 다르다.  여전히 현실은 원근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니까 역원근법은 현실의 원근법을 여러 개 합쳐 현실에 없는 세상을 표현하는 방법인 것이다.  흔히 동양이나 우리의 그림을 관념적이라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현실적인 그림이 우월하거나 더 뛰어난 것은 아니다.  아름답다거나 맛있다는 현실적인 감각 또한 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현실의 세계와 관념의 세계를 구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현실을 기반으로 관념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관념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다. 역원근법으로 표현한 그림처럼 현실과 관념은 서로 뒤엉켜있고, 현재에는 과거와 미래가 겹쳐져 있다.


수많은 장님이 만진 코끼리의 느낌을 결합하여 하나의 온전한 코끼리의 모습을 완성할 수도 있다. 또한 한 사람의 장님이 오랫동안 여러 군데를 만져 온전한 모습에 가까운 코끼리를 상상하기도 할 것이다.
이 모두가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세상을 알아야 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자연의 이치와 진리를 찾는 방법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26. 민화의 조형원리

 

 민화가 가지고 있는 조형원리의 가장 큰 특징은 ‘확대원근법(역원근법)’이다.  서양화법의 핵심인 원근법에는 3차원의 공간과 일인칭시점이 들어가 있다.  원근법은 현실세계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러한 원근법 여러 개를 유기적으로 겹쳐 표현하는 방법이 바로 ‘확대원근법(역원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조형방법을 사용하면 현실을 심하게 왜곡시키지 않으면서도 공간을 확장하고 여러 시간을 한 화면에 표현할 수 있다.  역원근법이 우리 민화가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조형원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민화에만 이런 조형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곳곳의 고대 고분벽화나 전통그림에서도 역원근법이라는 조형방법은 널리 사용되었다.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유산이란 말이다.  서양화를 대표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피카소라는 화가도 역원근법의 조형방법으로 그린 작품을 남겼다.
 
 
<좌측-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일인칭시점으로 모나리자의 눈과 작가의 눈높이가 일치한다. 하지만 배경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렸다. 하나의 화면에 두 개의 시점과 두 개의 서로 다른 공간이 겹쳐있다. 그럼에도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모나리자의 눈높이와 배경의 눈높이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원근법에 따른 일인칭시점에 서로 다른 공간을 함께 배치한 천재화가다운 탁월한 화면구성이다. 이런 화면구성방법은 현대의 컴퓨터 그래픽에서 사진이나 영상합성기법의 뿌리가 되었다.
<우측 위-행복한 시골 풍경/장 뒤뷔페/1944> 밭과 길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본 시점으로 그리고 사람, 동물, 집은 앞에서 본 시점으로 그린 전형적인 역원근법 구도이다. 유아들의 그림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구도법은 다양한 사물을 한 화면에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른 말도 수많은 정도를 한 화면에 담을 수 있어서 관광지도나 브리핑그림, 시청각교재 그림 혹은 물건의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보여주는 단면도에 활용된다.

<우측 아래-과일이 있는 정물/모이즈 키슬링/1953> 자연스러운 정물화 구도로 보이지만 탁자가 뒤로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탁자의 시점과 과일들의 시점이 다른 역원근법 구도를 사용해 뒤쪽 공간이 확장되어 넓은 느낌을 준다. [자료사진 - 심규섭]
 
‘확대원근법(역원근법)’의 조형원리에서 가장 큰 난제는 여러 시점과 여러 시간을 하나의 화면에 구현하면서도 사물의 고유한 형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이다.  잘못 표현하면 사물이 심하게 왜곡되어 징그럽게 보이기도하고 아예 무슨 사물인지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실제 서양의 입체파 화가들이 그린 작품들은 역원근법을 사용했지만 형태가 심하게 왜곡되어 표현된다.  하지만 역원근법을 사용한 ‘궁중모란도’나 ‘책거리 그림’은 자연스런 형태를 유지한다.
 
이렇게 자연스런 형태를 유지하는 방법은 원근법의 일인칭시점과 역원근법의 여러 시점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사물의 특징이나 성격에 맞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사물에 여러 시점을 동시에 구현하기도 하고, 일인칭시점으로 본 각각의 사물을 여러 개 결합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정한 규칙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핵심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최대한 살려내는 것이다.
 
 
▲ 서구 입체파 화가인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들. 모두 여러 시점인 역원근법을 이용하여 그렸다. 우는 여자의 얼굴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고 닭의 모습도 괴기스럽다. 다양한 시점이 뒤엉킨 정물화와 풍경화는 무질서하게 나열되어 사물 고유의 모습이 흐트러지고 공간이 뒤엉킨다. 쓰임새가 아니라 철저하게 사물의 구조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사물의 특징을 드러내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사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질이다.  사물을 원형, 사각형, 삼각형, 직선, 곡선, 부피, 질량 따위와 같이 구조적으로 나눈 다음, 여러 시각에서 재결합하여 표현한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 특징을 중시하는 이 표현방법은 서구의 입체파 화가들이 즐겨 사용했다.

 

구조적으로 파악하여 그린 정물은 맛있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을 그려도 누군지 모른다. 오로지 복잡한 구조들이 뒤엉켜있을 뿐이다. 이런 작품에는 인간의 삶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보고 파악하는 원리가 들어가 있다.

 

 

▲ 우리 그림에서는 사물이나 대상의 쓰임새나 상징을 근간으로 역원근법을 구현한다. 사람이나 동물은 형태의 왜곡을 최대한 줄이면서 외형적 특성과 상징을 살리고 있다. 또한 수많은 물건이 들어가고 여러 시점이 구현된 서구의 정물화와 비슷한 책거리 그림에서도 사물의 모양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게 그렸다.

 

집과 사람과 구름, 나무, 바위산에 들어가 있는 ‘곽분양행락도’에는 역원근법 구도로 건물은 위에서 아래로 본 시점이고, 사람과 나무는 정면 시점이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집의 구조가 자연스럽게 보이고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쉽게 포착된다.

 

우리그림에서 역원근법을 사용하게 되면 배경을 아예 없애거나 구름 따위로 숨긴다. 배경에서 수평선이 보이면 곧바로 일인칭시점이 만들어져 공간이 뒤틀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둘째, 사물의 쓰임새나 사회적 상징이다.  사물의 특성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정보뿐만 아니라 사회적 쓰임새와도 연관된다. 사회적 쓰임새란 사람과의 관계를 말한다.  이 사회적 상징은 특별한 개인이나 뛰어난 화가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을 통해 사회구성원들의 정치, 문화, 생활적 합의를 거쳐 형성된다.

 

장미라는 꽃이 가지고 있는 상징이 곧 장미의 전부가 된다. 사람은 이름과 직위가 곧 상징이다. 만약 호랑이를 그린다고 했을 때, 사회적 상징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다.  용맹과 전사의 상징으로 이해한다면 커다란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는 무섭고 두려운 호랑이를 그릴 것이다

 

반대로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상징으로 그린다면 사람을 도와주는 친근한 모습으로 그릴 것이다.
이런 사회적 상징에 부합되는 모습이 곧 그 사물의 특징이 되는 것이다.

 

 

▲ 우리민화에서 사물에 여러 시점을 적용하는 방법이다.
책거리 그림에서 화병이나 향로를 보면 세 개의 시점이 결합되어 있다. 병 끝의 동그란 부분은 위에서, 몸통은 정면에서, 바닥부분은 아래에서 본 시점이다. 이렇게 세 개의 시점을 결합시킨 이유는 병이 동그란 구멍을 가지고 있으며 몸통이 좌우대칭으로 통통하고 바닥에 세울 수 있는 물건임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생황이란 악기가 탁자 위에 놓여 있는데 바닥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이것은 생황이 바닥에 놓이는 물건이 아니라 들고 연주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석류는 옆구리가 벌어져 알갱이가 보이는데 많은 알갱이는 다산을 뜻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렇게 그려야 사물의 상징과 특성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우측 그림에서의 빗자루는 책 위에 세워져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좌측 그림처럼 걸어두기도 한다. 서있지 못하는 빗자루를 억지로 세우느냐 아니면 자연스럽게 걸어두느냐 하는 문제는 작가의 취향이나 사물의 배치에 따라 달라진다. 역원근법은 여러 원근법의 결합이기에 현실공간과 비현실적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궁중모란도에서 이파리는 세 개의 시점과 보이지 않은 하나의 시점이 결합되어 있다. 이파리의 앞면과 뒷면, 그리고 측면을 동시에 표현하고 보이지 않는 생장점(태점)을 넣고도 무리 없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시점이 한 사물에 구현되면 앞면 이파리, 뒷면 이파리, 옆면 이파리를 각각 그리는 경우보다 단순해지고 반복을 통한 집중력을 높일 수 있다.

 

모란꽃의 경우는 하나의 꽃에 여러 시점을 구현하면 형태가 흐트러지기에 정면, 측면, 뒷면에서 본 각각의 모습을 한 화면에 구현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모란은 풍요의 상징이기에 많은 꽃을 다양한 모습으로 넣어 상징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꽃그림에 이 방법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매화의 경우는 하나 내지 두 가지 모습으로 수 백 개의 꽃을 반복해서 그린다. 초봄에 피는 매화의 생태적 특성이 곧 상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양한 꽃모양은 별 의미를 갖지 않는다. [자료사진 - 심규섭]

 

우리민화는 사물의 사회적 관계와 상징을 중심으로 역원근법을 구현한다.  우리 그림에서 인물을 그릴 때 측면은 그리지 않는다.  정면이거나 반측면 구도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측면과 뒷면의 모습은 사람의 사회적 특징에서 벗어나 누군지를 알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화병은 주둥이는 타원형으로 그리고 바닥에 닿은 아랫부분은 평평하게 그린다. 사물이 둥글어 뭔가를 담을 수 있다는 쓰임새에 따른 모양과 바닥에 세울 수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쓰임새에 따른 사물의 특징을 여러 시점을 통해 드러내면서 동시에 공간성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 민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사물은 사회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모란, 매화, 국화, 닭, 개, 호랑이, 고양이, 거문고, 붓과 벼루, 사슴, 소나무 따위는 모두 사회적 상징을 가지고 있다. 사회적 상징이 없는 사물은 아예 그리지 않는다.

조약돌, 옻나무, 개미, 오소리, 디딜방아, 물레방아, 망태기, 지게 따위의 사물도 일상에 존재하지만 사회적 관계 즉, 상징이 없기 때문에 그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민화에 나오는 사물들은 일정한 시점이 고정되어있다.

 

누가 그리든 사물은 일정한 패턴에 따라 표현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무한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흐름과 작가의 정서나 기량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것을 ‘변주’라고 한다.

우리그림의 특징은 여러 원근법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시공간을 확장시키면서도 사물의 고유한 특징을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낮과 밤이 하나의 화면에 공존하고 사계절의 시간이 함께 표현되어도 공간이 뒤틀리지 않는다.
이것은 시공간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표현하는 뛰어난 조형능력이 적용된 탓이지만 무엇보다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는 우리 민족의 세계관이 그만큼 넓고 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7. 잘 그린 그림과 못 그린 그림

 

처음 민화를 접했을 때, 민화에 대한 애정을 듬뿍 가지고 있었음에도 내내 불편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지지리도 못 그린 그림’이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서양화법 미술을 공부한 탓이다.

 

서구화법인 원근법의 관점으로 민화를 본다면 명암도 없고 찌그러진 형태, 엉망인 채색, 불안전한 구도에 제멋대로인 선묘의 그림에 다름 아니다.  민화를 보는 새로운 관점과 기준이 필요했다.  하지만 민화에서 일정한 조형규칙과 원리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 민화의 조형방법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린 그림이다. 말의 다리를 사람다리처럼 그리고 태양을 파랗게 칠하는 것은 파격이 아니라 성의가 없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관찰이나 이해도 없다. 이런 그림은 민화의 본모습, 참맛이 아니다. 그저 초짜가 장난쳤거나 재미삼아 그린 그림일 뿐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어떤 이론가는 이렇게 못 그린 그림이야말로 민화의 특징이자 맛이라고 했다.  ‘어떤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표현, 충만한 감성에 의한 즉흥성과 파격’이 민화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민화에 이런 요소가 있긴 하지만 현란한 말장난처럼 들렸다.


‘자유로움, 어떤 형식, 파격’ 따위는 결국 엄격한 형식이 있었을 때 가능한 표현이다.  형식이 없는데 어떻게 파격적인 표현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표현의 자유로움도 결국 그 자유를 억압하는 형식이 있어야 가능한 문제이다.

 

엄격한 조형적 형식을 모르는 작가가 어떻게 형식을 부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먼저 그 엄격한 형식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 우선이다.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일본인 문예 이론가는 미국 대통령 링컨의 연설문을 베껴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민화는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그림이다.’  ‘민중’이라는 말 때문에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상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그림’은 존재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 그럴 가능성도 없다.

결국 ‘야나기 무네요시’의 주장은 ‘잘 그린 전문작가의 그림은 양반문화가 되어버리기에 민화는 못 그려야 제 맛이다’는 것이다.  잘 그리면 안 되는 그림, 제 멋대로 그려야 되는 그림, 못 그려야 잘 그린 그림이 민화라니.  이건 말도 되지 않는다.

 

 

▲ 파격적인 구도와 표현의 민화처럼 보이지만 그냥 연습용 그림이다. 종이가 아까워 한 화면에 여러 요소들을 겹쳐 그렸을 뿐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못 그린 그림, 잘 그린 그림이란 말에는 어떤 기준이 포함되어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은연중에 드러낸 기준은 바로 사대부, 즉 양반들의 그림이다.  내용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인화와 시서화일체, 풍류나 절제, 청빈, 기다림 따위의 선비정신이 반영된 양반그림은 붓질의 기운생동(氣韻生動)이나 여백 따위의 엄격한 형식이 존재한다.

 

여기에 반해 민화는 기운생동이나 준법(?法),여백이 없다. 또한 내용도 청빈, 절제, 풍류와 같은 고고한 정신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원초적 욕망인 장수, 행복, 부귀, 다산, 출세 따위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엄격과 내용과 형식을 가진 선비그림을 기준으로 민화의 형식적, 내용적 파격과 자유로움이 나왔다는 말이다.  

 

민화를 지배와 피지배라고 하는 계급적 입장에서만 보았을 때는 그럴싸하다.  하지만 세계미술사에 지배와 피지배 미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양반의 사상과 백성들의 사상은 충돌하지 않았다. 서구의 부패한 기독교 성직자와 마찬가지로 성경과 교리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핍박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기독교나 믿음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조선말기 양반들이 유학의 법도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탄압하고 착취했기 때문에 동학이나 민란이 일어난 것이다.  실제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도 유학을 공부했고 과거의 전통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무튼 민화의 자유로움과 파격이 양반그림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는 억지가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교묘한 논리로 양반과 백성을 이간질하고 있다. 이렇게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묘한 논리에 이광수 같은 천재도 무너졌다.

 

 

▲ 황당한 모습의 까치호랑이 그림이다. 까치호랑이 그림은 정초에 잠깐 붙이고 봄이 오면 버리는 세화이기 때문에 조형적으로 평가할 가치가 없다. 호랑이와 까치만 등장하면 된다. 아마도 전문화공이 되기 위한 초급자가 그렸을 것이다.

 

좌측-호랑이는 하늘을 날고 까치는 땅에 앉아있다. 이 정도의 재미라면 세화로써 충분하다.
중간-대나무와 호랑이를 그렸는데 엄청 못 그린 것이다. 세화는 아니고 전형적인 일본식의 호랑이 그림이다.  

우측-호랑이가 아니라 괴수의 얼굴을 하고 있다. 호랑이와 인간이 손을 잡고 악귀를 물리쳐야 하는데 도리어 사람을 잡아먹게 생겼다. 이건 세화의 기본 원리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자신의 세계만을 구축하고 표현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 어설픈 화가도 여럿 존재한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이 문제를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했던 기억이 난다. 한 친구는 ‘표현은 자신의 고유한 문제이고 타인의 평가나 취향을 반영할 필요가 없다’라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나는 ‘미술이 자신의 표현이긴 하지만 내재된 조형적 규칙과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견을 말했다.

 

이 논쟁은 결국 미술의 사회적 참여, 정치와 운동권에 대한 문제로 확대되어 버렸다.  밑도 끝도 없는 논쟁에 지친 나는 거칠게 한 마디를 남기고 술자리를 빠져 나왔다.


“나의 작품은 마치 남들이 읽기를 바라는 나만의 일기장과 같은 거야. 그렇다고 나의 솔직한 표현을 남들이 모두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야. 내가 기분이 아주 나빠. 그래서 술판을 엎었어. 지나가는 사람을 때렸어. 이런 행위가 자신의 표현이라는 이유로 합리화가 될 수 있어?”  

 

작품세계의 기준은 곧 자신이고 타인의 평가와 취향은 필요 없다던 그 친구는 결국 교수에게 꼬박꼬박 학점을 받아 졸업했고, 무슨 국내외의 미술공모전에 출품하여 여러 번 입상을 하기도 한 잘 나가는 중견작가가 되었다.

 

잘 나가는 중견작가를 비난하거나 배 아파하는 것은 아니다. 그때는 어렸고 질풍노도의 시기였을 뿐이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기법이나 표현방법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되어 보이지 않는 사상과 창작의 형식과 규칙이었다.  하지만 교수들은 좀처럼 그 비밀을 알려주지 않았다.

미술표현에서 작가의 감성이나 즉흥성이 중시되기는 하지만 미술도 엄연히 학문이다.  학문은 체계적인 이론과 조형방법을 내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공모전을 통해 등수를 매길 수 있고, 미술대학에서 실기를 통해 학생을 선발하기도 하고 학점도 구분하여 줄 수 있는 것이다.  

 

미술이라는 학문 안에는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미학과 미술적 조형방법, 재료학에 따른 표현기법, 숙련도, 표현능력, 시대성, 역사성, 대중성, 독창성 따위의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이것은 모든 작가와 작품들에게 적용된다. 이런 내용에 합의한 작가들과 작품들이 모인 곳을 흔히 ‘미술계’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국가 공모전과 같은 ‘살롱’에 떨어진 것에 반발해 낙선자들 끼리 길바닥에서 전시를 열어도, 이들은 모두 ‘미술계’에 속한 사람들이다.  서구에서 파격과 혁신적인 미술유파가 나타나 주류가 되어도 과거의 엄격한 형식과 공존할 뿐이지 없애지는 않는다.  파격의 대상이 된 엄격한 미술형식도 예전에는 혁신적이고 자유로운 형식이었다.

서양화법은 배운다는 것은 단지 기법이나 표현기술 따위를 익히는 것이 아니다.
서양화법 안에는 서구사상과 그 사상을 담는 미술적 형식과 서구인의 정서와 역사, 정치, 문화를 통째로 배우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서양미술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오랜 창작경험으로 본다면 못 그린 그림과 잘 그린 그림은 확연히 구분된다.  사물을 완벽하게 재현한 작품이 있어도 높은 가치를 매기지 않는다. 또한 화려한 색상과 환상적인 화면을 연출한 그림에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반대로 형태가 틀리고 이상한 방법으로 채색을 했어도 흥미를 끌고 높은 가치를 매기는 작품이 있다.
화려한 색상과 치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꽃그림보다 칙칙하고 형태가 어설픈 세잔의 작품이 훨씬 뛰어나다. 아름다운 여인을 자세하게 그린 작품보다 괴기스러운 피카소의 인물이 더 가치가 높다. 세잔이나 피카소의 작품에는 서구사상의 핵심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형태나 색상을 중심으로 판단하겠지만 미술전문가들은 작품 속에 흐르는 엄격한 형식과 규칙에 따라 작품을 평가한다.  

 

형식과 규칙이 없으면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모더니즘 따위의 사조나 인상파, 입체파와 같은 유파도 존재하지 않는다. 미술 사조나 유파는 그 시대를 반영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또한 그 형식과 규칙은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창작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 좌측-책거리그림은 원래 궁중회화이다. 가로로 넓은 그림을 현실적 요구에 의해 세로 화면으로 만들어 새로운 구도를 창조했다. 가로 화면을 세로 화면으로 바꾸는 일은 엄청난 파격이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궁중회화의 원리를 제대로 구현했기 때문에 조형성이 높으면서도 격을 유지하고 있다.

우측-궁중모란도를 변주한 그림이다. 괴석과 모란가지, 모란 이파리의 표현이 파격적이면서도 재미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궁중모란도의 조형적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변주한 것이기에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앞면, 뒷면, 측면, 태점같은 여러 시점이 결합된 모란 이파리를 보라색과 초록색, 갈색으로 변주해 표현했다. 이렇게 되면 양식화가 일어나 자수나 자개와 같은 공예영역으로 확산되는데 근간이 된다. [자료사진 - 심규섭]

 
민화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낯선 그림이나 사조가 아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엄격한 예법이 강조되는 주자성리학과 제사법이 일반백성들에게 전파되는데 근 400~500년이 걸렸다. 원래 대중들은 생소한 것을 싫어한다.

 

대중들이 민화를 좋아하고 공감했다면 이미 오래전부터 민화의 형식과 내용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못 그린 그림처럼 보여도 그 당시의 사람들은 민화의 내용과 표현방법에 공감하고 동의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공감한 형식과 내용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민화와 양반그림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안에서는 민화의 형식을 찾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형식을 통합하는 더 높은 형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궁중회화이다.  

 

궁중회화는 민화와 양반그림의 뿌리이자 결정체이다.  궁중회화는 엄격한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 안에는 조선의 철학과 조형방법, 재료학과 표현기법 따위가 빈틈없이 녹아있다. 이런 엄격과 형식과 내용은 도화서 화원들과 자비대령화원들에 의해 500년 간 대를 이어 지켜졌다.

 

이런 엄격한 형식과 내용을 기준으로 작품의 높낮이가 판단되고 변주나 파격 따위가 결정된다.
민화의 자유로움과 파격은 양반그림에 대항해 나온 것이 아니라 궁중회화의 형식을 대중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민화의 다양한 형식은 모두 궁중회화에 있다.  민화의 원초적 욕망이라는 내용도 모두 궁중회화에 있다. 다시 말하면 대중적인 궁중회화, 궁중회화를 흉내 낸 그림, 궁중회화의 일부를 차용한 그림, 쉬운 궁중회화, 격이 떨어지는 궁중회화가 자유로운 민화이고 파격적인 민화인 것이다.

민화에서 잘 그린 그림과 못 그린 그림을 구분하는 일은 궁중회화의 조형적 형식을 이해한다면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1. 철학과 미학-생명력이 넘치는 이상세계
조선의 건국이념은 주자성리학이다. 엄격한 형식의 예법과 학문을 통해 태평성대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홍익인간, 재세이화, 선도, 풍류도 우리민족의 전통사상과 폭넓게 결합하여 모든 생명이 풍요롭게 확장되는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2. 조형방법-역원근법, 확대원근법, 복합원근법, 원근법의 유기적 결합에 의한 시공간의 확장
생명력이 넘치는 이상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시공간의 확장이 필요하다. 좁은 현실적 공간에는 이상적인 세계를 담기 어렵다. 또한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고 포함하는 시간의 순환을 통해 생명의 연속성과 무한함을 드러낸다.  그래서 현실적인 원근법을 바탕으로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시점을 사용한다. 공간이나 사물에서 명암을 없애고 선묘와 채색을 중심으로 표현한다.

3. 조형방법의 재생산, 미술교육-본그림
여러 시점이 뒤엉켜있는 상상의 공간에 현실에서는 보기 어려운 사물을 표현하는 일을 구체적 사생을 통한 학습은 불가능하다. 그림의 조형정보가 담겨있는 본을 이용하여 베껴 그리면서 조형방법이 재생산된다. 모든 미술교육도 본그림을 베껴 그리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3. 재료에 따른 표현기법-종이, 비단, 선묘, 진채(채색), 병풍
미술의 표현기법은 재료에서 나온다. 어떤 재료를 사용하고 어떤 방식으로 유통하는가가 바로 표현기법을 결정하는 것이다. 종이는 쉽게 구할 수 있으면서도 저렴하다. 그래서 양반이나 전문 화공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종이는 보존성이 떨어진다.

 

궁중에서는 주로 비단에 그림을 그렸다. 비단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아주 어렵다. 세밀한 필선과 여러 번의 채색이 들어간다. 비단에 선묘를 넣고 채색을 하는 방법이 곧 표현기법이 된다.  작품의 쓰임새에 따라 작은 그림은 족자에 넣고 장생도와 같은 큰 그림은 반드시 병풍으로 만든다. 병풍은 하나의 그림이 8~10폭으로 쪼개지는 결과를 낳는데 여기에 맞게 화면이 구성된다.

이 외에도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  위의 내용이 충족되었다면 나머지는 작가 개인의 능력이다.

숙련미와 세련미- 붓과 물감, 혹은 재료를 다루는 숙련된 기술은 작품의 수준을 높인다. 또한 붓질의 강약과 물감의 혼합, 배치, 채색방법에 따라 작품의 세련미가 생기는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시대성, 사회성-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정치와 문화적 내용을 작품에 반영하는 능력이다. 당대의 가치를 얼마만큼 제대로 반영했는가도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독창성-우리그림에서 독창성은 전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변주능력을 뜻한다. 장생도는 모두 비슷하지만 똑같은 작품은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 그리는 화원의 수준이나 취향, 혹은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조금씩 변주된다. 그 변주능력도 작품의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혁신성-새로운 재료를 도입하거나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여 과거의 그림보다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했는가도 주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궁중회화는 개인이 그린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집단이 그린 것이다.  그래서 궁중회화작품에는 개인서명이 없다.  그에 반해 선비그림이나 대중적인 민화는 전문 화공 개인이 그린 것이다.

김홍도나 신윤복같이 뛰어난 화원도 도화서를 벗어나면 개인 화가이자 전문 화공에 불과하다.  궁중회화와 개인 화공의 작품을 단순 비교하여 높낮이를 따지는 일은 무리이다. 

 

궁중회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엄격한 형식과 내용은 여러 계층의 정서와 수준에 맞게 재해석하고 변주하는데 바탕을 제공한다.  

 

그래서 작품의 높낮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고 작품의 격을 따지는 잣대가 되었다.  궁중회화가 완성한 형식과 내용은 우리민족만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는 물론이고 유럽과 미국,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민화의 아름다움이나 가치는 자유로움과 파격, 못 그린 그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보편성이 있다.  

 

 

28. 민화의 형식과 내용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형식과 내용 중에 어느 것이 우선하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 한다.  ‘내용’이 중요하다고 답하는 사람이 많고 두 가지가 모두 중요하다고 애매한 대답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얼핏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라는 초등학생 같은 질문이 생각난다.

 

과학의 발전으로 계란보다는 닭이 먼저라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지만, 꼭 과학적인 연구가 아니더라도 당연히 ‘닭’이 먼저라는 것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은 ‘계란’은 ‘닭’을 낳을 수 없지만 ‘닭’은 ‘계란’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낳거나 창조한다는 것은 완성되었다는 말이다. 완성된 것이 미완성 된 것보다 우선한다.  지식인이라면 1초 안에 ‘형식’이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내용의 총화가 바로 형식이기 때문이다.  

뭔가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 천재들은 모두 과거의 형식을 엄격하게 배우고 난 다음에 현실적 내용과 정서를 바탕으로 변주를 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전통적 형식을 바탕으로 했고, 불교는 힌두교의 형식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으며 동학은 유불선의 형식 위에 ‘인내천과 반외세사상’을 담았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담을 그릇이 없다면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바보들은 내용을 배우고 똘똘한 사람들은 형식을 먼저 배운다.  이것은 우리 속담의 ‘미운 아들에게 떡 하나 더 주고, 사랑스런 아들에게는 매를 준다.’는 말과 비슷하다. 여기서 ‘떡’은 내용이고 ‘매’는 형식이다.  

 

또한 ‘물고기를 주지 말고 낚시 법을 가르쳐라.’는 말도 같은 의미이다.  현명한 부모나 스승은 물고기를 가지고 관심을 끌면서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흔히 ‘형식과 내용’의 문제를 ‘숲과 나무’의 관계로 비유하기도 한다.

 

형식은 상징과 관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에 비해 내용은 구체성을 가지고 있다.  ‘숲’는 관념이고 ‘상수리나무’, ‘느티나무’는 구체성이다.  미술교육에서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대부분의 초보자들은 눈, 입술, 코 따위의 세부적인 모양을 그리고자 하지만 정작 전체적인 모습에 따른 균형에는 관심이 없다. 이렇게 되면 형태는 엉망이 된다.  미술에는 체계와 질서가 있다.  그 체계와 질서가 바로 조형적 형식이다.

 

그림을 배운다는 것은 미술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 체계와 질서를 익히는 일이지 꽃이나 나무를 그리는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형식은 상징과 관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미술작품 또한 상징과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술작품 속의 예수나 부처는 구체적인 인물이 아니다. 기독교의 상징이고 불교의 상징이다. 미술작품 속의 예수나 부처의 얼굴은 모두 다르지만 일정한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인물로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의 모습은 ‘하느님의 사랑, 믿음, 평등, 신과의 관계, 구원, 속죄’ 따위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고 부처의 모습은 ‘연기(緣起)와 해탈’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 전형적인 궁중회화 작품들이다. 모두 ‘생명력이 풍성한 이상세계’라는 내용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우리민화는 상징과 관념의 산물이다.  당연히 상징과 관념은 엄격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민화의 형식을 이해하는 것은 곧 민화의 전부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민화의 조형적 형식은 확대원근법, 본그림을 통한 재생산과 변주, 비단과 선묘, 진채라는 표현기법과 병풍이라는 화면구성방법 따위가 있다.

 

이 모두는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것처럼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민화의 형식 안에는 어떤 내용이 함축되어 담겨있을까?  흔히 민화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출세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많은 자식을 낳고 가정이 화목하게 사는 것’, ‘악귀를 쫓고 복을 받는 것’, ‘유유자적 풍류를 즐기며 사는 것’ 따위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공통된 욕망이기도하고 모든 예술의 핵심적 내용이기도 하기에 천박하고 세속적이라고 폄하하거나 비아냥거릴 필요는 없다.

 

우리그림 어디에도 원초적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살인, 사기, 강간, 음해, 전쟁, 도둑질을 하라는 내용은 없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궁중회화는 한 나라의 역사와 전통, 이상을 담고 있다.  궁중회화인 ‘장생도’를 그저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그림’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조선은 학문으로 이상세계를 건설하고자 했던 나라이다. 당연히 이상세계에는 ‘홍익인간, 이화세계’ 따위의 전통적 세계관도 함께 담겨있다.  지금도 세계 모든 나라의 대통령은 ‘인류의 평화와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국민 앞에서 선서를 한다. 아파트나 명품을 주겠다는 공약은 기업의 사장이나 하는 소리이다.

 

인간은 공동체의 상생과 협력과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을 필요로 한다.  인간을 돈이나 아파트를 위해 사는 존재라고 보는 것은 사람을 노예, 개, 돼지로 보는 반인간적, 반자연적 행위이다.

궁중회화의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생명력’이란 인간의 생명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생명력이다.  궁중회화에는 장생도(해학반도도, 일월오봉도), 책거리, 궁중모란도, 요지연도, 곽분양 행락도, 화조도, 백자도 따위가 있다.  

 

‘장생도’는 생명력이 풍부한(크고, 길고, 높은) 자연의 요소가 들어간 이상적인 세계를 담은 그림이고,
‘궁중모란도’는 생명의 만개함을,  ‘책거리 그림’은 생명의 가치를 높이는 내용이며,  ‘요지연도’는 신과 인간의 결합을 통한 생명의 존엄을 담았으며,  ‘곽분양 행락도’는 생명의 가치를 높여 얻은 풍성함을, 백자도(百子圖)는 풍부한 생명의 씨앗을 기원하고, ‘화조도’는 음양의 원리에 따른 생명의 아름다움을 담은 그림이다.

 

문자화의 일종인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는 생명의 풍요로움을 담았고, ‘연화도’는 세상에 참여하여 생명의 가치를 높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궁중회화, 우리민화의 내용적 가치는 바로 ‘생명’에 있다.
그 안에는 ‘생명에 대한 예찬’, ‘생명의 풍성함’과 ‘생명의 무한한 확장’이라는 세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내용은 우리민화의 조형방법인 확대원근법과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확대원근법이란 조형방법은 여러 개의 원근법을 결합해 공간을 무한하게 확장하고 여러 시간(시점)의 결합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한 화면에 통합하여 구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무한하게 확장되는 공간의 표현을 통해 생명이 존재하는 공간 혹은 생명이 활동하는 공간을 확장시킨다. 이것은 동시에 생명 자체를 무한히 확장하는 효과를 얻는다.  하나의 시간대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은 탄생과 죽음이라는 과정을 피할 수 없다.  

 

현재를 중심으로 지나간 시간은 과거이고 오지 않은 시간은 미래이다.  하지만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은 현재 밖에는 없다. 과거는 탄생의 기억이고 미래의 끝은 죽음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생명은 죽음 앞에서 작아지고 소멸된다.

 

확대원근법 안의 여러 시점(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 사계절, 낮과 밤 따위를 한 화면에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은 하나의 순환 고리로 통합된다.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는 지점이 된다. 이런 원리를 통해 생명의 연속성과 영원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궁중회화는 뛰어난 개인 화가들의 총합에 의해 창작된 작품이 아니다.  물론 도화서 화원이나 자비대령화원은 모두 뛰어난 기량을 가진 천재적인 화가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국가의 이상적인 세계를 담은 내용을 엄격한 형식에 담아 창작할 따름이다.  화가의 개인성은 인정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궁중그림은 조직적으로 창작되었고 개인의 서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 선비그림(士人畵)은 선비 스스로가 그린 문인화와 전문 화원들이 선비의 취향에 맞게 그린 그림으로 나뉜다. 여기에서 문인화는 미술적 가치가 없다. 문인화의 조형적 평가 기준은 미술이 아니라 서예에 있다.

 

대부분의 선비그림은 도화서 화원 수준 정도의 전문 화원들이 궁중회화의 형식과 내용을 선비들의 수준에 맞추어 변주하여 그렸다. 물론 이런 작품들은 주문에 의한 창작과 지전, 표구사와 같은 화상을 통한 판매방식으로 소통되었다. [자료사진 - 심규섭]


궁중회화는 선비그림이나 일반백성의 실용그림에 대한 내용적, 형식적 표준이 된다.  선비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가치는 궁중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은 차이가 난다. 선비 자신에 대한 가치를 규정하고 행동지침을 표현한 것이 바로 선비그림이다.


선비 자신의 이상적인 가치를 스스로 표현한 그림을 ‘문인화’라고 한다.  ‘문인화’는 그림의 형식보다는 내용에 더 가치를 둔다.  또한 전문미술수업을 받은 경험이 없지만 서예에 능통한 선비들은 필력과 여백을 문인화의 형식적 가치로 삼았다.  하지만 ‘문인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비미술은 도화서 화원에 준하는 전문 화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생명의 가치를 높이는 ‘책거리 그림’의 내용은 선비그림에서 학문을 통한 자기수련이 된다.  ‘장생도’는 학문과 정치를 통해 구현해야 하는 정치적 이상의 세계가 된다.  ‘궁중모란도’는 정치적 이상을 활짝 피워 태평성대를 이루는 뜻이 된다.

‘곽분양 행락도’는 학문과 정치적 업적을 통한 가문의 융성함을, ‘윤리 문자도’는 학문을 통해 백성을 교화하는 내용이 된다.  ‘연화도’는 어려움을 이겨내어 학문을 통해 세상에 참여한다는 내용이고, ‘화조도’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가정의 화목을 이루는 뜻이 된다.

 

선비그림은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라는 궁중회화의 핵심내용을 훼손시키지는 않는다. 단지 선비들의 현실적 조건과 위치에 따라 구현하는 방법적인 내용이 중심을 차지한다.  물론 양반과 소통해야 하는 필요에 따라 그림의 형식도 변주된다.  

확대원근법을 사용하지만 정형성에서 다소 벗어난 그림이 등장하고 화가 개인의 특성이 드러나거나 중국의 영향에 의해 새로운 형식이 유입되기도 한다.

백성들이 원하는 그림의 내용은 상징적이고 관념화 된 ‘생명’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의 생명’이었다. 구체적인 생명은 삶의 본능, 원초적 욕망 따위와 관련이 있다.


악귀를 물리쳐 생명을 보호하는 세화,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란그림,
열악한 생존조건을 극복하고자 하는 장수도,
자식을 통해 미래를 보장받는 다산그림,
지식에 대한 목마름을 담은 문자도,
불안한 미래를 알려주는 무당, 무속그림,
복을 바라는 부적그림

 

따위는 백성들의 현실적 처지와 요구를 반영한 전문 화공들에 의해 그려지고 유통되었다.  하지만 백성들이 원하는 민화의 형식과 내용은 모두 궁중회화에서 나온 것이다.  궁중회화나 선비그림에서 필요한 부분만 떼어내 그리거나 원하는 내용이 담긴 형상은 과장되게 그렸다.

 

그림을 사고팔았던 지전(紙廛, 지물포), 표구사의 사장들은 백성의 요구를 정확히 알았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대중원리에 따라 백성들이 좋아하는 요소만을 골라내고 반복과 과장된 표현을 통해 조형성을 높이고 대량생산을 통해 작품의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작품가격을 낮추기 위해 값싼 종이와 안료를 사용했다. 또한 품이 많이 들어가는 치밀한 묘사와 여러 겹의 채색보다는 즉흥적이며 오방색에 준하는 원색을 사용했다. 

궁중회화에서 선비그림, 백성의 실용화로 연결되는 핵심에는 엄격한 형식과 내용의 궁중회화가 있었다. 자유로운 변주이나 형식적 파격도 궁중회화의 형식이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백성들의 실용화는 대부분 ‘생명’이라는 상징적 내용을 현실의 생활에 맞게 변주해 그려졌다.
구복과 벽사, 장수와 다산(多産)을 중심으로 생존이라는 원초적 본능과 생활이라는 절박한 현실을 반영한 그림이 대부분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선비그림은 선비들의 처지와 필요성에 의해 궁중회화를 변주한 그림이고, 백성들의 실용화는 백성들의 처지와 필요에 의해 변주된 그림이다.

 

궁중회화와 관계없는 선비그림은 그저 중국의 영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아류 그림에 불과해진다. 또한 궁중회화와 관련 없는 백성의 실용화는 전문적으로 그림 수업을 받은 적이 없는 떠돌이 화공의 낙서나 장난질로 전락한다.  

 

그래서 민화를 사랑하고 연구하는 학자나 작가들이 일반백성의 실용화만을 ‘민화’라고 고집하면 자기 얼굴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29. 화가의 서명

 

역사적으로 미술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넣은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화가’라는 전문직종이 따로 있지 않고 모두 ‘공예’ 영역에 속했다.  공예는 그야말로 생활이나 장식에 필요한 도자기, 가구, 의복, 장신구와 같은 물품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공예품은 대부분 필요에 의해 주문생산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공예품은 개인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집단으로 역할분담을 하여 생산한다. 만약 왕비의 머리 장신구를 만든다고 한다면 금이나 은, 각종 쇠를 녹이고 주물을 뜨는 철광업자와 대장장이, 세공하는 사람, 여러 요소를 모아 장식하는 사람, 주문을 받고 납품하는 사람, 자금을 관리하는 회계 따위로 역할이 통합되어야 한다.  

 

이렇게 각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을 공방이라고 부른다.  이런 조건에서 특정 한 사람의 이름을 내세우기는 어렵다.  특정인의 이름과 공방 이름(브랜드)은 넓은 시장에서 다른 업체와 경쟁을 할 때 필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거래는 돈과 권력이 있는 왕실이나 양반가문과 독점계약에 의해 이루어졌고 입소문이나 소개만으로도 충분했다.

 

 

▲ 강희언/사인휘호(士人揮豪)/종이에 채색/조선 후기/개인소장  

 

바른 선비가 되기 위해 그림을 배우는 모습이지만 유명화가의 화실에서 그림을 수학하는 학생들의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우리민화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화원, 화가, 화공, 떠돌이 환쟁이’로 분류할 수 있다.

1)화원(畵員)-국가미술기관에 소속되어 국가가 인정한 작가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서, 자비대령화원에서 엄격한 시험과 검증을 거쳐 선발한 전문 화가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도화서와 같은 기관에서 양성하기도 하고 화원의 개인화실에서 수학하여 시험을 통해 화원이 되기도 한다. 화원들은 국가 소속의 정식 공무원이기에 신분보장과 녹봉(월급)이 지급된다. 가끔 탁월한 실력을 갖춘 화가에게는 시험이 아닌 임시로 화원의 자격을 주는 경우도 있다.

 

화원의 임무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미술작업을 하는 것이다.  어진을 그리는 일, 궁궐을 장식하는 그림, 국가 행사를 그림으로 그려 기록하는 일, 왕실에서 하사하는 미술작품을 그리는 일, 지도를 제작하는 일 따위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그림은 엄격한 형식과 관례에 따라 조직창작형식으로 그려진다.  조직창작이란 정부조직의 명령과 규정에 따라 기획, 역할분담, 창작, 소통되는 일련의 창작체계를 말한다.  모든 미술기획, 재료나 창작 공간, 소통, 표현기법이나 기술 따위는 정부에서 제공한다.

 

국가미술기관에서 창작한 모든 작품은 국가의 소유가 되고 국가에서 보증한다.  작품의 소통도 공공성 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국가미술기관에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개인이 모여 있지만 창작에 있어 개인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국가미술기관에서 창작한 작품에 개인의 서명을 넣는다는 것은 국가미술기관을 이용해 개인소유의 창작을 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는 국가미술기관을 사유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 바로 도화서나 자비대령화원에서 창작된 궁중회화작품에 작가의 서명이 없는 이유이다.

2)화가(畵家)-자신의 독창적인 창작세계를 완성한 자  

화가는 전통 형식을 익히고 난 후 변주를 통해 자신의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한 작가를 말한다. 물론 작가의 독창적인 화풍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국가미술기관이나 미술계, 감상자들의 평가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도화서나 자비대령화원 출신들은 국가미술기관이 보증하는 화가이다. 조선시대의 김홍도, 신윤복, 심사정, 김득신 같은 유명한 화가들은 대부분 국가미술기관 출신들이다. 이 외에도 겸재 정선 같은 선비 출신의 화가도 있고, 장승업처럼 화공 출신도 있다.  

 

이들 화가들은 선비들이 그린 ‘문인화’와 더불어 ‘선비그림’의 세계를 형성했다. 선비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그림인 ‘문인화’에는 반드시 서명이 들어간다. 어떤 선비가 그렸는지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선비의 글과 서명이 없는 문인화는 아주 못 그린 그림에 불과하다. 아무튼 화가의 작품은 돈과 권세가 있는 양반들에 의해 대부분 소통되었다. 겸재 정선과 같은 화가의 작품은 청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았고 비싼 값에 매매되었다고 한다.  

 

도화서에서 나오는 녹봉(월급)으로는 생활이 어려웠던 화가들은 미술작품을 팔아야 했다. 따라서 최대 고객인 양반들의 수준에 맞게 중국화풍을 따라 하거나 양반들이 추구하는 가치, 취향, 정서를 반영한 그림을 그렸다.  

 

화가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그림을 팔거나 유통해야 했기 때문에 작품에 서명을 하고 낙관을 찍었다. 화가 자신의 이름과 명성이 작품을 보증하는 유일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곧 양반의 가치, 즉 권세와 재력, 정신세계를 높이는 것과 같았다. 유명화가의 작품을 얻거나 사기 위해 비싼 값을 지불하기도 하고 몇 달씩 기다리는 일도 많았다. 이름 난 화가의 병풍그림은 집 한 채 값에 맞먹었다. 그러다보니 위작과 모작이 많이 유통되었고 그럴수록 진품의 가치는 높아졌다.

 

 

▲ 시장에 좌판을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환쟁이의 모습이다. 이미 그려 놓은 그림을 팔기도 하고 주문을 받으면 즉석에서 그려주기도 했을 것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3)화공(畵工)-미술가게나 상점에 소속되어 회사가 요구하는 그림을 반복, 대량 창작하는 미술 기능공

조선시대에는 그림을 유통하던 가게, 상점이 있었다. 지전(紙廛), 지물포, 표구사 같은 이름의 가게들은 이름난 화가들의 고급스런 작품이나 생활그림, 장식그림, 세화, 액막이그림 따위를 사고팔았다.

 

더불어 미술품 제작의 재료가 되는 종이와 비단, 붓과 벼루, 물감, 본그림을 팔기도 하고 작품을 보존하고 장식하는 표구작업, 병풍과 족자를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들 가게는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상점이다. 유명화가의 작품을 사다가 비싼 값에 팔기도 하고 인기가 있거나 잘 팔리는 그림은 대량으로 복제하여 저렴한 가격에 팔기도 했다.

화공들은 이런 가게에 취업하여 그림을 복제하거나 대량으로 제작하는 일은 하는 기술자들이다.
그림으로 생계와 삶을 이어가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화원이나 화가가 되지는 못한다.

 

도화서에서 그림을 배웠던 사습생도(肆習生徒), 유명화가의 화실에서 그림을 사사받던 학생들 중에는 화원이 되지 못하고 배운 그림 재주로 생활을 해야 했던 사람도 많았다.

 

또한 재주는 뛰어나지만 돈이 없어 유명화가에게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 중에는 평생 유명화가의 조수로 생활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런 자리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지전과 같은 가게에 취직하여 전문 화공으로 살았다.

 

화공에게는 자신의 독창적인 화풍은 필요하지 않았다. 회사가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재주와 기술만 있으면 되었다.  한 두 명의 화공을 데리고 있는 작은 미술가게도 있지만 10여 명의 화공을 거느린 대형미술가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작업은 화공들의 역할분담과 협업으로 이루어진 집단창작 형식이었다.  

 

그래서 화공들에 의해 창작된 미술작품에는 화공 개인의 서명이나 낙관은 필요 없었다. 유명화가의 작품을 복제하거나 모사한 그림에는 유명화가의 서명이나 낙관을 넣어야 했고, 집단창작한 세화나 장식용, 실용화에도 개인의 이름을 넣을 수 없었다.

 

또한 구매자는 이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값에 맞는 그림을 구매할 뿐이었다.

 

 

▲ 떠돌이 환쟁이들은 주로 세화와 같은 액막이 그림, 간단하면서 꽃그림이나 화조도를 많이 그렸다. 대중들이 좋아했기 때문이다. 혁필그림은 가죽 붓으로 알록달록한 색상효과를 낸다. 문자도가 변형된 형태이지만 글자에 알록달록한 색상을 입히는 것은 전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이나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일제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글자와 이름, 그림, 색상, 즉흥성, 빠름, 기교 따위가 결합해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어 1970년대까지 살아남았다. [자료사진 - 심규섭]

 
4)떠돌이 환쟁이-약간의 그림재주로 시골장터 같은 곳을 떠돌면서 싸구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낮추어 부르는 말.

 

환쟁이라는 말은 화가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그림을 뜻하는 ‘화(畵)와 ‘쟁이’가 결합한 말이다. 그러니까 환쟁이는 ‘그림을 좀 그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환쟁이는 화가도 아니고 화공도 아닌 사람이다. 떠돈다는 것은 일정한 소속이 없고 정착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미술가게에서 화공 일을 하다가 이러저러한 사유로 그만 둔 사람,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웠지만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사람, 화가에게 그림을 배웠으나 화공으로 취업하지 못한 사람들이 지방 장터를 떠돌면서 혁필그림이나 세화, 간단한 꽃그림, 화조도, 문자도 따위를 즉흥적으로 그리고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을 것이다. 이것도 힘든 경우에는 머슴을 살거나 막노동을 했을 것이다.

 

떠돌이 환쟁이는 정말 생활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판매하는 사람이다.  떠돌이 환쟁이 중에는 나름대로 그림공부를 한 사람도 있고,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운 사람도 있었겠지만 소속이 없었기 때문에 엄격한 형식이나 규율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백성들이 원하는 그림이라면 뭐든지 비슷하게 그리면 되었다. 당연히 자유롭고 즉흥적인 그림이 많았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요소만 뽑아 결합하고 글과 그림을 합치기도 했다. 싸구려 종이와 물감을 사용해 가격을 낮추는 대신 자극적이면서도 빠르게 그리는 재주를 결합해 시선을 끌었다.  

떠돌이 환쟁이의 그림에는 굳이 서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림이지만 실용성이 강한 공예품 정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대나무 광주리를 만드는 사람, 장독이나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 물건에다 자신의 이름을 넣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화원, 화가, 화공, 환쟁이들은 각자의 처지가 환경이 달랐다. 이들은 자신의 직분과 능력에 맞게 그림을 그렸고 소통했다. 화원과 화공이 경쟁할 일은 없었다. 화가의 작품과 환쟁이의 그림을 비교 평가할 일도 없다. 
 

 

평가와 경쟁은 화가들 끼리, 화공들 끼리, 환쟁이들 끼리만 했다.  궁중회화는 자체로 완결된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있다. 화가, 화공들의 그림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말이다.  

 

완결된 궁중회화를 바탕으로 하여 화가의 방식으로, 혹은 화공이나 떠돌이 환쟁이의 방식으로 풀어서 활용했을 뿐이다.  그래서 궁중회화는 우리그림의 시작점이자 곧 완결점이기도 하다. 

 

 

 

30. 제목이 없는 그림

 

‘일월오봉도’의 가장 큰 의문은 작품의 제목이다. ‘일월오악도’, ‘일월곤륜도’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그림은 그야말로 제목이 없다.  ‘일월오봉도’라는 제목을 궁중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했는지도 불분명하다.

‘일월오봉도’라는 제목은 그림에 해와 달이 있고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제목이다. 그냥 그림의 대표적인 소재를 따서 지은 제목에 불과하다. 제목만으로는 그림에 어떤 상징과 내용이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은 우리그림의 특징이기도 하다.  ‘궁중모란도’는 모란꽃을 그린 그림이다. ‘궁중’이라는 말은 일반 모란그림과 구분하기 위해 후대 사람이 지은 것인데 그냥 ‘궁모란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궁중모란도 중에 괴석이 들어간 그림을 ‘석모란도’라고 하는데 이것도 괴석이 들어간 모란그림과 괴석이 없는 그림을 구분하기 위해 누군가가 임의로 지은 말이다.

책과 책장이 있는 그림은 ‘책가도’, 장생하는 영물을 넣은 그림은 ‘장생도’, 바다와 학과 천도봉숭아가 들어가 있는 그림은 ‘해학반도도’, 많은 아이들은 그리면 많다는 의미의 ‘백(百)’이란 글자를 넣어 ‘백자도(百子圖)’, 까치와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 ‘호작도’, 꽃과 새가 들어간 ‘화조도’처럼 그림의 소재가 곧 제목이고 제목이 곧 그림이다.

 

같은 모란그림이라도 그리는 사람과 구도나 표현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같은 소재로 수 백점의 다른 그림을 그려도 제목은 그냥 ‘모란도’이다. 작품의 특성이나 개인성은 전혀 제목에 반영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제목이 없는 것이다.

그림의 제목은 보통 그림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예수가 그의 12명의 제자와 함께 저녁을 먹는 모습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제목은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한 마지막 식사자리를 담은 그림이지만 ‘최후의 만찬’이라는 제목에 상징하듯이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과 제자들의 여러 군상과 심리묘사가 복합적으로 담겨있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그림에 담았지만 ‘최후’라는 제목을 통해 보다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작품을 우리그림 방식으로 제목을 지었다면 대략 ‘예수와 제자들의 저녁식사’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아마도 밋밋하고 재미가 없다고 느낄 것이다.

현재도 화사한 꽃을 그려놓고 ‘신의 은총’, 장독대를 그려 놓고 ‘어머니의 노래’, 여성의 누드를 그려 놓고 ‘원초적 갈망’ 따위의 제목을 붙인다.  마치 소설 제목이나 영화 제목을 정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이런 제목에 익숙하다.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거나 작품과 연결되지 않는 제목을 보면 아주 불편해 한다.  작품 제목은 작가의 의도를 한 줄로 정리한 것과 같고 작품을 이해하는데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사과를 그려놓고 작품 제목을 ‘사과’라고 하면 사람들은 시시해 한다. 최소한 ‘결실’, ‘이브의 심장’, ‘비너스의 눈물’ 정도는 되어야 뭔가 심오한 뜻이 있을 것이라 여긴다.

 

같은 소재나 주제를 사용하여 다른 작가가 그리면 다른 제목을 붙인다. 작가의 특별한 의도와 생각이 반영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그림에 ‘장생도’나 ‘궁중모란도’ 따위의 제목은 있으나마나 하다. 모란을 그려놓고 작품 제목을 ‘모란그림’이라고 말하는 것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우리그림의 작품제목에 불편해하지 않는다. 각각 다른 장생도에 모두 장생도라는 제목을 붙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그림에서 제목은 그저 그림의 종류를 분류하는 정도에 그친다. 작품의 종류에 따라 분류하는 제목은 모두 같고 두 가지 종류를 함께 그리면 작품의 제목과 결합한다.  

나비와 꽃을 그린 작품은 ‘화접도’인데 여기에 ‘문자도’를 결합하여 한 화면에 표현한 그림의 제목은 ‘윤리문자 화접도’가 되는 것이다. 또한 까치와 호랑이, 소나무를 함께 그린 작품을 ‘호작도’라고 하지만 까치를 빼고 호랑이와 소나무만 그리면 ‘송호도’라는 제목이 만들어진다. 

 

 

▲ 여러 종류의 모란그림이다. 궁중의 화원들의 그림부터 화공, 환쟁이들이 그린 모란그림은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모두 ‘모란도’라고 한다. ‘모란도’라는 분류 안에 작품의 내용과 상징, 형식 따위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제목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그림에 특별한 제목이 없다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목을 짓지 않았다는 것은 제목이 필요 없다는 말과 같다.  그림을 보기만 해도 그 내용과 뜻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면 제목은 필요하지 않다.  그림에 나오는 각각의 소재가 무엇을 상징하고 어떤 이유로 화면이 구성되고 표현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다면 제목은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우리그림의 제목은 이미 정해져 있다.  작품의 제목 안에 그림의 상징과 의미, 내용, 형식 따위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상징은 오랜 세월동안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의하고 합의해야 가능한 것이다. 이런 상징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손자로 이어진다.

한번 정해진 작품의 제목은 특별한 개인이라도 함부로 바꾸지 못한다. 화제(畵題), 즉 그림의 제목이 결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작가의 역할은 얼마만큼 제목에 충실하게 표현하느냐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 고유의 표현방식이나 기법에 따른 서정성과 조형성, 독창성 따위가 드러난다.

왕이 집무를 보거나 기거하는 곳을 장식하고 있는 ‘일월오봉도’는 그야말로 왕의 권위를 상징하고 위엄을 드러낸다. 또한 ‘조선’이란 나라 자체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그럼에도 ‘일월오봉도’의 내용은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시경에 나오는 ‘천보’의 시를 그림으로 옮겼다는 설과 ‘음양오행론’에 입각해 우주의 이치를 담았다는 설, 태조 이성계와 연관된 이야기 따위가 난무한다.  하지만 어느 것도 속 시원하지 않다.

궁중회화에서 왕과 왕비만을 위한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왕이 있는 자리에 있거나 왕비가 거처하는 곳에 주로 장식을 했더라도 왕과 왕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실용성에 따른 적절한 배치의 결과일 뿐이다.  왕의 상징으로 그려진 ‘일월오봉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궁중회화는 양반이나 일반백성들의 생활공간에 널리 퍼졌다.

보통 서구나 다른 나라의 경우, 왕을 상징하는 그림은 최대한 크고 화려하고 복잡하게 그린다.
그에 반해 ‘일월오봉도’는 비교적 단순한 그림이다. 극단적으로 정형화, 추상화, 상징화 되어 있다. 좌우대칭 구도에 추상적인 소재, 양식화되고 반복적인 표현방법을 통해 군더더기를 모두 없애고 핵심만 추려내어 화면을 구성했다.

궁중회화에서 가장 많이 그려졌다는 ‘장생도’보다도 단순하고 크기가 작고 ‘궁중모란도’보다 덜 화려하다. 또한 ‘요지연도’나 ‘곽분양 행락도’에 비해 턱없이 단조롭고 제작의 공력도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일월오봉도’는 왕이란 신분을 가진 개인을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니라 조선의 이상적 가치를 최대한 압축하여 정형화시킨 그림이다.

‘일월오봉도’는 독립적인 그림이 아니다.  이 그림의 뿌리는 ‘장생도’이다. ‘해학반도도’가 ‘장생도’의 한 부분이듯이 필요에 따라 ‘장생도’를 압축하여 왕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다.

첫째, 우리그림의 특징으로 보면 작품의 제목과 그림의 내용이 일치해야 한다.  하지만 ‘일월오봉도’는 소재와 제목은 일치하지만 내용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제목을 봐도 무슨 내용인지를 모른다는 말이다. 우리그림에서 유일하게 내용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이유이다.

‘장생도’의 내용은 ‘생명이 충만한 이상세계’이면서 우리그림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그러니까 왕의 뒷자리를 장식한 ‘일월오봉도’는 ‘생명이 충만한 이상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왕의 의지와 역할을 함축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 위-장생도/중간-해학반도도/아래-일월오봉도.  

‘해학반도도’는 장생도에서 바다 부분을 특화시킨 것이고 ‘일월오봉도’는 왕의 위엄과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양식화시킨 것이다. ‘일월오봉도’를 독립적인 그림으로 규정하면 엉뚱한 내용의 그림이 되어 버린다. [자료사진 - 심규섭]

 
둘째, ‘일월오봉도’는 ‘장생도’의 조형성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해(日), 소나무, 산과 바위, 폭포, 바다와 파도는 모두 ‘장생도’가 가지고 있는 형상들이다.  여기서 혼란이 일어난 부분은 바로 다섯 개의 봉우리와 해의 반대편에 그려진 달(月)이다.  이것 때문에 ‘음양오행론’이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다섯 개의 명산을 표현한 것이니 하는 오해가 나타난다.

그러나 조형적으로 보자면 좌우대칭의 구도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시각적 효과와 주목성을 높인다. 만약 해만 있고 달이 없다면 좌우대칭구도는 깨어진다. 하지만 달은 해와 동격이 아니다. 달을 왕비와 같은 여성의 상징으로 보는 것은 여성의 가치를 낮게 보는 것이며 동시에 호랑이띠와 용띠를 가진 사람은 서로 싸운다는 논리처럼 허접하다.  ‘일월오봉도’에서 표현된 달은 좌우대칭을 맞추기 위한 방편이고 해의 또 다른 분신으로 봐야 한다.

다섯 개의 봉우리는 화면의 구성상 그 정도의 숫자가 적절하기 때문에 표현된 것이지 특별한 상징은 없는 걸로 보인다. 좌우상하의 비율에 따른 여러 소재들이 적절히 결합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소재의 크기가 결정되어야 한다.

만약에 봉우리가 세 개가 되면 가로로 긴 화면에서 산은 옆으로 길쭉하게 표현되고 여섯 개나 일곱 개가 되면 세로로 뾰족한 봉우리가 되어 일반성을 벗어나게 된다. 실제 세로화면으로 제작한 이동식 ‘일월오봉도’는 조형적 안정성이 흐트러져 보기가 좋지 않다.

셋째, ‘장생도’와 다르게 학이나 사슴, 거북이 같은 상상의 동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십장생도(十長生圖)’는 우리나라 방식의 ‘장생도’이다. ‘십장생도’라고 하지만 10개 요소만 정확히 골라 그리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 그 숫자는 고무줄처럼 늘어나거나 줄기도 한다.

그러니까 동물이 빠진다고 ‘장생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월오봉도’에는 장생의 요소인 해, 하늘, 바다, 산과 바위, 소나무 따위가 많이 들어가 있다.  또한 동물의 표현은 양식화, 도식화하는데 거추장스러운 요소들이다.

동물이 들어가려면 동물의 묘사와 더불어 차지하는 공간이 표현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화면은 복잡해지고 이미 도식화된 산이나 바다 따위에 어울리지 않게 된다.

우리그림에 특정한 제목이 없고 분류만 있는 것은 작품의 형식과 내용, 상징을 이미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라고 하는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현실이나 처지에 맞는 출세나 장수, 다산, 풍요 따위의 이중 상징법을 사용하여 모든 사회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 공감하는 그림이다. 

 

 

31.[일월오봉도]에 대한 조형적 분석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서는 창의와 상상력이 필요하다.  빈약한 유물과 기록에만 의존하는 역사는 조작되고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는 일제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고 조작, 말살되었다.  일제가 남겨놓은 기록과 유물은 일제의 입맛과 요구에 충실한 것이 대부분이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통해 자원과 물자, 사람만을 수탈한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 자체를 멸족시키려고 했다. 이름을 바꾸고 말과 글을 없애 민족공동체를 파괴하고 황국의 신민, 노예로 만들려고 했다.

우리의 역사에는 우리의 시각과 감성, 정서가 녹아있다.  일본이나 미국, 중국의 눈이 아닌 우리의 가슴과 공명하는 상상력과 결합해야 진정한 우리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다.

우리그림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궁중회화는 창작자의 이름도 없고 창작연유와 과정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무엇보다 어떤 내용으로, 어떠한 조형원리로, 어떠한 방식으로 그렸는지가 명쾌하지 않다.

궁궐을 가득하게 장식한 ‘장생도’를 그저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다르지 않다.

500년 이상을 이어온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학문과 예법으로 세상을 다스리고자 했던 선비(지식인)의 나라에서, 조선 최고의 화가들이 국가미술기관에 모여 고작 ‘장수하는 그림’이나 ‘부귀영화’를 누리고 ‘출세’를 바라는 그림이나 그리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일월오봉도’는 공식 명칭이 아니다. ‘일월오악도’, ‘일월곤륜도’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는 말은 공식적으로 정해진 제목이 없다는 말과 같다.  도감의궤나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기록에는 ‘오봉도, 오병풍, 오병병, 오악도’가 주로 쓰였다.

오봉을 그린 그림, 혹은 오병을 그린 병풍이라는 뜻인데 그냥 편의상 제목을 정해 부르고 있다. 명색이 한 나라의 왕을 상징하는 그림인데 제목이 없거나 애매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통 우리그림에서 작품의 제목과 소재와 분류는 일치한다.모란꽃을 그린 그림은 ‘모란도’, 장생하는 여러 소재를 그린 그림은 ‘장생도’, 꽃과 새를 그리면 ‘화조도’라고 한다. ‘장생도’의 일부분을 특화시킨 ‘해학반도도’는 바다와 학과 복숭아라는 소재를 표현한 그림이다.

여러 사물이 복합적으로 나올 때는 범위가 넓은 제목을 사용한다. 이를테면 책과 이와 관련된 여러 사물을 그리는 ‘책거리’그림은 ‘책과 거리’가 합쳐진 말인데 ‘거리’는 ‘볼거리, 저자거리, 먹을거리’처럼 책과 관련한 여러 종류의 사물을 뜻한다.

 

또한 ‘연화도’에서 연꽃 이외에 두루미나 물고기, 파랑새, 여뀌, 철새 따위가 나오는데 모두 연꽃이 가진 상징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연화도’는 ‘연화거리 그림’이라고 해도 틀린 제목이 아니다. 그래서 책과 연꽃만 있으면 어떤 사물을 넣어도 모두 ‘책거리그림’, ‘연화도’가 되는 것이다.

‘일월오봉도’는 해와 달, 오봉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다와 파도, 두 개의 폭포, 네그루의 소나무와 바위가 화면에서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 위와 중간의 장생도에서 산봉우리와 소나무와 바다와 해, 폭포, 바위를 따서 아래의 그림처럼 새로운 일월오봉도를 만들었다. 단순한 컴퓨터 그래픽의 합성만으로도 그럴싸한 오봉도가 만들어졌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합성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완벽한 일월오봉도를 만들어 낼 자신이 있다.

이 작업을 통해 오래 전부터 있었던 장생도의 요소를 결합해 왕의 상징으로 특화된 오봉도를 창안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좌우대칭의 요소는 왕이 앉아있는 상황을 반영한 구도이지만 그렇다고 전혀 다른 내용이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확대원근법의 원리를 적용시키면 ‘일월오봉도’에 나오는 모든 요소는 주인공이다. 그래서 여러 종류의 ‘일월오봉도’는 조금 다른 형상을 하고 있지만 핵심 소재는 모두 빠짐없이 표현되어 있다.  네그루의 소나무와 바다가 없는 ‘일월오봉도’는 조형적으로 무너질 뿐만 아니라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는 이상한 그림이 되어 버린다.

우리그림에서 제목을 정하는 규칙을 ‘일월오봉도’에 적용시키면 ‘일월오봉사송이폭해도(日月五峰四松二瀑海圖)’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일월오봉도’에 이런 긴 제목은 필요하지 않다. ‘일월오봉도’라는 제목도 필요 없다.  ‘일월오봉도’의 진짜 제목은 ‘장생도’이기 때문이다.

‘왕을 상징하는 도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선의 이상적 가치를 담은 ‘장생도’의 요소를 도식화, 추상화 시킨 작품이다.  ‘장생도’의 내용이 ‘생명력이 충만한 이상세계’라고 한다면 왕의 상징인 ‘일월오봉도’는 ‘생명력이 충만한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사람, 혹은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해석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만약 ‘일월오봉도’가 왕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그림이라면 ‘장생도’보다도 작고, ‘모란도’보다도 화려하지 않으며, ‘책가도’보다도 장식성이 떨어지고 ‘요지연도’보다도 구성이나 묘사가 허접하겠는가?
‘일월오봉도’의 내용과 형상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것은 ‘일월오봉도’라는 틀린 제목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먼저 ‘일월오봉도’를 ‘음양오행론’과 연관시키는 오류이다. ‘일월’과 ‘음양’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음양’은 ‘남과 여’, ‘낮과 밤’, ‘하늘과 땅’처럼 한 몸이지만 서로 다른 요소를 동격으로 표현한 것이다. 태극 문양을 상상하면 된다. 하지만 ‘해와 달’은 동격이 아니다.

 

해는 태양계의 중심이고 생명의 근원이다. 반면에 달은 지구행성의 위성에 불과하다. 자전도 하지 않고 생명도 없는 땅이다. 이런 달을 해와 동격으로 놓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일월오봉도’에는 실제 금속을 사용해 만든 ‘일월경’을 그림 위에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이후 금박과 은박을 붙여 사용하다가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왕의 명령에 의해 물감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도교나 원시신앙의 영향을 받은 ‘일월경(日月鏡)’ 두 개가 ‘해와 달’로 변화했다는 말이다.
사실 청동거울 비슷한 ‘일월경’이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고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도 잘 모르겠고, 무협영화에 나오는 ‘일월교’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것이 왜 왕을 상징하는 그림에 들어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연구하여 깊게 들어가 보았자 결국 미궁에 빠진다.  이것보다는 그냥 태양의 상징으로 청동거울을 달았다고 보는 게 훨씬 감성이 맞는다.

금과 은이라는 금속을 색상으로 표현하면 노란색과 하얀색에 가깝다. 하지만 그림에는 금(金)은 붉은 색, 은(銀)은 하얀색으로 그렸다.  색의 상징을 도입하면 노란색은 달, 붉은 색과 하얀색은 태양이다. 이와 같은 색의 상징은 세계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림에서 달의 상징색인 노란색은 나오지 않는다.  상징체계 혹은 생태적 이유에 따르면 그림에 달을 표현했다는 근거는 없다. 

 

 

▲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삼성미술관 Leeum의 일월오봉도를 사용해 조형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일월오봉도는 좌우대칭구도를 사용했다. 하지만 완벽한 좌우대칭은 아니다. 좌우의 사물이 약간씩 다르게 그려 변화를 주었다.

 

화면중심에 있는 큰 봉우리가 중심이다. 큰 봉우리를 중심으로 조금씩 작은 두 개의 봉우리를 좌우에 배치했다. 각 봉우리의 모양은 정삼각형에 가까웠다. 우측의 붉은 해는 좌우대칭의 구도에 따라 좌측의 하얀 해로 복사되었을 것이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 조형원리, 즉 화면을 구성하고 표현하는 방법에서 찾는 게 빠르다.
‘일월오봉도’는 도식화, 추상화하는 과정에서 좌우대칭이라는 화면구성법을 사용했다.  궁중회화에서 보기 어려운 좌우대칭구도를 사용한 것은 왕의 상징과 쓰임새에 부합하는 맞춤형그림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궁중회화에서 사용하는 구도는 우측에서 좌측으로, 혹은 좌측에서 우측으로 움직이는 시선흐름이 대부분이다.

‘일월오봉도’는 어좌의 뒤편을 장식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 왕은 그림의 중앙에 위치하게 된다.
그림의 형상이 좌측이나 우측에서 한 방향으로 흐르면 그림 중앙에 앉아있는 왕에게 시선에 집중되지 않고 흐트러져 버린다. 이렇게 되면 왕을 부각시키는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왕이 그림 속에 파묻히는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좌우대칭구도는 시선을 중앙으로 모으는 역할을 한다. 왕이 앉아있는 중앙부분에 집중력을 높이면서도 반복을 통해 조형적 안정성을 얻는 탁월한 방법인 것이다. 이 ‘좌우대칭 구도’에 의해 우측의 붉은 해가 좌측의 하얀 해로 복사된 것이다.  그러니까 ‘해와 달’이 아니라 ‘붉은 해-아침 해(조정), 하얀 해-낮 해’를 표현한 것이다.

또한 다섯 개의 봉우리는 ‘오행론’과 아무 관련이 없다. 궁중회화에서 숫자의 상징은 사용하지 않는다. 모란그림에서 모란꽃이나 이파리의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 화면의 크기나 작품의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또한 장생도에 나오는 학이나 사슴, 거북과 같은 상상의 동물의 숫자도 규칙성이 없고 불로초나 소나무, 대나무의 개체 수는 제각각이다.

다양하게 변주된 ‘일월오봉도’에는 봉우리의 숫자가 다섯 개가 아니라 여섯 개나 일곱 개 혹은 딱히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것도 좌우대칭구도라는 조형원리를 적용하면 쉽게 이해된다. 산봉우리의 모습은 불규칙하다. 높이나 모양이 제멋대로인 봉우리를 좌우대칭에 맞게 구성하여 그리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산봉우리는 최대한 단순하고 추상적이며 반복적인 형상으로 표현했다.

문제는 산봉우리의 배치이다. 소나무를 중앙에 배치하는 것은 좌우대칭이 아니라 화면을 둘로 쪼개는 문제가 발생한다. 당연히 좌우 끝 쪽에 각각 두 그루의 소나무를 배치하여 균형을 잡는다. 화면을 둘로 쪼개지 않으면서 중심축의 역할을 하는 요소는 산봉우리 밖에 없다.

그래서 일단 커다란 산봉우리 하나를 중심에 그린다. 이렇게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에 맞게 적절히 산봉우리를 배치한다.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이렇게 배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가로 화면의 좌우대칭구도에는 다섯 개 정도의 산봉우리가 가장 적절했기 때문에 조형적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내용에 해당하는 ‘장생도’가 이미 궁궐 곳곳에 장식되어 있었고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왕을 상징하는 특화된 그림이지만 내용과 형식을 모두 ‘장생도’에서 가져왔기에 특별히 따로 그림의 제목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단지 ‘장생도’와 구분하기 위해 ‘오봉도’ 정도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일반사람들은 이런 조형적인 분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왕을 상징하는 그림에는 뭔가 특별한 상징이 숨어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뭔가 자극적인 사연과 비밀 같은 이야기를 찾는다. 이런 대중의 요구를 무시하긴 어렵다.

아무리 고급스럽고 높은 수준의 내용이라도 대중에게 전달되지 못하면 소용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중의 눈높이에서, 대중의 정서와 공감하는 이야기도 필요하다. 단, 핵심가치가 녹아있으면서 왜곡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우리그림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나 아이들, 혹은 애인에게 ‘오봉도’를 설명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일월오봉도]는 조선의 왕을 상징하는 그림이야. 왕이 집무를 보는 근정전부터 생활하는 거처, 침실에도 이 그림이 있었어. 심지어는 건물 밖에서 업무를 볼 때도 이동식 그림을 만들어 사용했고 죽어서도 이 그림과 함께 했지.

그림에는 양쪽으로 해와 달이 그려져 있는데, 해는 왕을 뜻하고, 달은 왕비를 상징하지. 다섯 개의 봉우리가 나오는데 크게는 우리민족의 발원지라고 하는 곤륜산이나 태백산을 뜻하지. 또한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같은 한반도의 아름다운 명산을 뜻하기도 하고, 작게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둘러싼 다섯 개의 산을 상징한다는 말도 있어.

양쪽에 네그루의 소나무가 나오는데, 이 소나무는 우리나라의 방방곡곡에 빠짐없이 자라는 나무야. 그러면서도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우주목’ 역할을 하는 신령스런 나무라고 해. 소나무 색깔이 좀 이상하지? 응. 빨간색이야. 이건 말이야. 경북 봉화나 춘양이라는 지역에서 자라는 ‘적송’이라는 소나무야. 적송, 그야말로 붉은 소나무라는 뜻이지.

이 적송은 다른 소나무와는 달리 크고 두껍고 곧게 자라는 특성이 있어. 그래서 궁궐을 지을 때는 반드시 적송을 사용했다고 해. 지금 보고 있는 이 경복궁도 모두 적송으로 만든 거야.  왕을 상징하는 그림에 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만든 적송을 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리고 이건 좀 어려운 이야기지만, 그림은 크게 삼등분으로 나뉘어져 있어. 바다, 산 그리고 해와 달이 떠 있는 하늘이야. 그림에서 가로로 선을 그어 삼등분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이 그림은 평소에는 미완성 상태로 놓여 있다가 왕이 그림 앞에 앉아야 비로소 완성이 된다는군. 신기한 그림이지. 그림이 왕을 알아보는 거야. 

무슨 말이냐구?   왕을 뜻하는 한자는 [王] 이렇게 생겼는데 그림의 구성은 [三] 이런 모양으로 되어있다고 했지? [三] 모양의 그림 앞에 왕이 앉으면 세로로 작대기가 하나 만들어지는 거야. 그러면 정말 왕을 뜻하는 [王]자가 완성되는 거지. 어때? 참 신기하고 놀라운 그림이지?

아. 뭘 뜻하는 그림이냐구? 해와 달이 온 세상을 두루 비추어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왕의 역할과 의지를 담은 그림이야.  정말 좋은 뜻이지? 요즘 대통령이나 정치인도 이런 마음으로 정치를 하면 얼마나 좋겠니.”  

 

 

32. 생명점과 이끼

 

그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이나 가치를 상징화시켜 시각적으로 풀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백 마디 말이나 백 권의 책보다 훨씬 이해가 빠르고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다.  그럼에도 궁중회화에는 알쏭달쏭한 비밀이 곳곳에 숨어있다.

상징에 관련한 것과 있고 조형적인 부분도 있다.  원래는 별다른 비밀이 있거나 숨겨놓은 의미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쏭달쏭하다는 것이나 비밀스럽다는 말은 잘 모른다는 말이다.  우리의 전통그림을 우리가 잘 모른다는 것인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시대적 변화에서 오는 가치와 상징의 변화이다.  현재는 조선시대가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운 조선과 그 당시를 사는 사람들의 현실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또한 역사는 끊임없이 현대에 수렴된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부분들은 크게 확대되고, 필요 없는 부분은 축소되기 마련이다.

1881년 자비대령화원이 폐지되고, 1894년 도화서마저도 없어진다.  이로써 궁중회화의 전통은 완전히 끊어졌다.  그 이후 궁중회화는 개인 화가의 손에 의해 변형되고 왜곡된다. 화가들은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작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정서와 요구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조선과 궁중을 대표하는 상징은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상징으로 바뀌거나 뒤엉켰다. 

 

이런 시대적 흐름이나 요구에 따라 ‘생명력이 충만한 이상세계’를 담은 ‘장생도’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장수도’로 바뀌고, ‘생명의 만개(滿開)’의 상징인 ‘모란도’는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몇 세대를 거치면서 굳어져 원래의 상징은 찾기가 어려워진다.  여기에 일제의 비호를 등에 업은 일본미술의 영향으로 궁중회화의 상징이 변질되는 경우도 있다.

지금도 정확한 상징을 몰라 논란이 되고 있는 요소 중에는 태점이 있다.  궁중회화에서 ‘모란도’나 ‘장생도’에서 주로 보이는 태점은 바위나 산봉우리, 나무, 꽃 따위에 주로 그려져 있다. 그 생김새가 작은 구슬처럼 동글동글하고 밝게 빛난다. 하지만 일반상식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이 많다.  

바위나 산봉우리에는 식물이 있어야 하는데 왜 구슬처럼 생긴 이상한 모양이 박혀있는지 잘 모른다. 또한 소나무나 모란나무, 복숭아나무에는 태점이 박혀있는데 대나무에는 없는 이유도 모른다. 이파리 끝에 쌀알 같은 태점이 붙어있는 모란그림이 있는가 하면 아예 없는 그림도 있다.

나중에는 구슬처럼 보이는 태점이 아예 이끼처럼 표현된 것도 있다.  이런 구슬 같은 태점이 언제부터 궁중회화에 적용되었는지 어떤 형태로 발전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의문투성이이다. 태점에 관한 논란은 태점을 ‘생명점’이냐, 아니면 ‘이끼’로 볼 것인가이다.

이런 논란이 생긴 이유는 얼핏 보면 태점이 이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끼는 눈에 보이는 요소이지만 ‘생명점, 생장점’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다시 말하면 태점을 도식화 된 상징으로 보느냐, 아니면 상식에 맞게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 궁중회화에 표현된 생명점 즉, 태점의 모습이다. 주로 산, 바위, 나무에 둥근 보석모양처럼 그려져 반짝거리는 느낌을 준다. 이 생명점의 표현으로 우리그림은 높은 내용적, 형식적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료사진 - 심규섭]


현재 태점에 대한 연구는 『조선궁궐의 그림』이라는 책에서 일부 발견된다.

‘태점은 동그란 윤곽선 안에 녹색을 칠한 단순한 형태와 윤곽선을 따라 흰점을 찍고 초록색과 검은색을 메운 부정형의 큼직한 형태가 있다. 후자의 태점은 태점이라기보다 이끼의 장식적인 표현에 가까운데 19세기 말 이후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양식이다. 일본의 채색화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나타나는 특징으로 16세기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궁중회화에 이런 태점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이 시기에 밀려온 일본미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조선궁궐의 그림』 중에서 발췌)

태점을 한자로 표현하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이 밸 태(胎)’, ‘점 (點)’이다. 그러니까 태점(胎點)의 뜻은 생명점, 생장점이 된다. 반면에 ‘이끼 태(苔)’를 사용하면 이끼가 피는 지점이라는 뜻이다. 위 책에서 연구자들은 태점(胎點)을 생명점이라고 보고 있지만 그 역할과 가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생명점’과 ‘이끼’가 주는 느낌은 판이하게 다르다. ‘생명점’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여 활기찬 미래를 밝힐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 반면, ‘이끼’는 다른 생명에 기생하는 생태적 특성을 가진 식물이다. 마치 오랫동안 방치하여 관리가 되지 않는 물건이나 죽거나 병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태점(胎點)을 생명점으로 보느냐 아니면 이끼로 보느냐에 따라 그림의 내용이 달라진다. ‘생명점’으로 보면 ‘생명력이 충만한 세상’을 표현한 것이라는 상상과 추론이 가능하지만 ‘이끼’로 본다면 쓸데없는 요소를 과도하게 표현한 어설픈 그림이 된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이면 이미 조선은 실질적으로 일제의 의해 망한 상태였다. 궁중회화에서 생명을 상징하는 태점(胎點)이 하잘것없는 ‘이끼’로 변질되는 시기도 이때쯤이다. 우리 궁중회화의 본질과 핵심을 훼손하기 위한 치밀한 의도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우리역사와 전통을 말살하고자하는 일제의 잔대가리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집요하고 끈질겼다.
그래서 일제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창덕궁 재건벽화에는 생명점 대신에 이끼가 당당하게 등장하고 바위나 산봉우리에는 생명점도 아니고 이끼고 아니고 준법(?法)도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점들이 무수하게 찍혀있다.  이 정도로 혼란을 만들어내면 생명점의 상징은 영영 사라져 버리게 된다.

태점(胎點)은 궁중회화에 나타나는 조형적, 상징적 특징이다.  태점(胎點)을 통해 궁중회화의 화면은 보석처럼 빛이 나고 활기가 살아난다. 또한 태점(胎點)으로 인해 높은 차원의 격을 유지한다.

여러 번 말하지만, 미술작품은 현실을 그대로 화폭에 옮겨다 놓은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꿈과 상상과 가치를 현실적인 요소를 빌어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감나게 표현했다”는 말은 현실과 똑같다는 말이 아니라 이러한 ‘꿈과 상상의 세계’가 마치 실현된 것처럼 느껴진다는 의미이다. 

 

 

▲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그림에서 나타나는 태점인데 일본미술의 영향으로 이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창덕궁 재건벽화의 돌산에 박혀있는 동그란 점은 태점도, 이끼도, 준법도 아닌 정체를 모를 정도로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생명력이 충만한 이상세계’는 그림의 곳곳에 별빛처럼 혹은 보석처럼 표현된 ‘생명점’을 통해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이다.  

 

 

33. 우리그림에 대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허접한 논리

 

우리그림을 서양화와 비교하면서 천박하거나 수준 낮게 보는 시선이 많다.  이런 현상은 일반사람들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분야의 전문가들 사이에도 팽배하다.  무엇보다 이런 분위기를 선도한 사람들이 다름 아닌 미술전문직에 종사하는 화가, 미술평론가, 화랑 관계자, 미술생도들이란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 미술을 스스로 부정하고 남의 미술을 떠받드는 현실은 가슴 아프다. 원래 문화는 다른 나라의 다양한 요소를 수용하고 되씹어서 발전한다. 자기의 것만 제일이라고 여기고 다른 문화를 배척하는 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중심문화가 있어야 한다. 뭔가를 수용한다는 것은 주체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체, 중심이 없는 문화의 수용은 강압이나 강제의 상태가 되는 것이고, 스스로 노예라고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습게도, 우리가 우리그림을 천박하게 여겨 시궁창에 처박고 있을 때, 정작 일본이나 미국, 유럽 사람들은 엄청난 양의 우리그림을 수집해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전시하거나 숨겨두었다는 것이다. 

 

 

▲ 야나기 무네요시의 모습. 그의 이론은 출발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있지도 않는 개념을 만들어 우리그림에 억지로 적용시켜 왜곡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우리 예술의 본질을 ‘비애미’라고 규정하는데 철저히 부정적이고 편파적이다. 도대체 우리그림 어디에 ‘비애미’가 들어있단 말인가? 오히려 생명력이 넘치는 활기찬 그림이 대부분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한국전쟁 이후 사회체제나 생각이나 정서 따위가 급격하게 서구나 미국중심으로 바뀌면서 상대적으로 우리 전통의 가치가 무너진 것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제국주의가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말살하기 위해 조작해서 퍼트린 ‘식민사관’이 문제이다. 일제는 패망해 섬으로 도망갔지만 그들이 심어 놓은 식민사관의 뿌리가 스멀스멀 자라나면서 지금까지 우리의 눈과 귀를 막고 영혼을 괴롭히고 있다.

알다시피,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사람은 일본사람인 ‘야나기 무네요시’이다.
처음에는 ‘민속 회화’의 준말로 일본 절이나 신사에서 기도를 할 때 사용하는 허접하고 단순한 그림 따위를 지칭했지만 나중에는 우리그림을 대표하는 용어가 되었다.

“대체로 회화에는 정통회화와 비정통회화의 두 흐름이 있다. 전자는 예술가로서의 화가의 작품을 말하고 후자는 대부분 그림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지 못한 무명화가나 떠돌이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지칭하는 것이다. 전자는 감상을 위해 그린 것이며 후자는 실용성이 수반되는 그림이다.

 

전자는 같은 그림을 한 장 이상 그리지 않으나 후자는 똑같은 것을 몇 장이나 반복해서 그렸다. 따라서 전자는 창조를 본질로 하고 후자는 서민들의 일상적인 생활양식이나 관습 등과 연관이 있는 것이 많다.[조선의 민화-야나기 무네요시]”

야나기 무네요시의 주장은 그럴듯하다. 특히 진짜와 가짜를 섞어 본질을 흐리게 한 후 자신의 논리를 주입하는 방식은 치밀하다 못해 교활하기 이를 데 없다.  보통 모략가는 상대를 무력화시킬 때 강온양면전략을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옷을 벗기는 방법에는 거센 바람과 뜨거운 햇빛이 모두 필요한 것이다. 강한 바람으로 옷을 날려버리는 것은 흔히 폭력과 강압의 의한 방법이고 이는 일반백성에게 잘 통한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논리가 정연한 지식인에게 폭력과 강압이라는 바람을 사용하면 도리어 움츠리는 역효과가 난다. 탄압을 하면 할수록 의지는 더 튼튼해지고 백성들의 영웅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는 햇볕정책 즉, 교묘한 논리이 이용해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든다. 이렇게 스스로 옷을 벗으면 자기를 합리화하는 논리가 생겨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앞장서서 일제에 헌신하게 된다.

이런 논리로 무장한 일본제국주의의 지식인들은 ‘대동아 공영론’으로 이광수와 같은 천재 지식인마저도 친일파로 만들고 ‘조선의 화가는 조선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야 한다.’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박람회의 그럴듯한 심사기준으로 숱한 화가들을 일제를 위해 일하게 만든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주장을 비판해 보자.
먼저 회화를 ‘정통 회화와 비정통 회화’로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정통 회화와 비정통 회화의 구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회화에는 주류와 비주류가 있을 뿐이다.

프랑스의 ‘살롱’이라는 공모전에 탈락한 젊은 화가들은 따로 모여 ‘낙선자들 전시’를 열었다. 이들은 주류미술(정통 회화)을 비판하고 새로운 화풍을 제시했지만 공모전에 낙선하는 수모를 겪은 비주류 화가(비정통 회화)들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길거리에서 낙선자 전시를 열었던 비주류 화가들은 주류가 되었다. 시대의 흐름이나 발전에 따라 비주류 화가가 주류 화가로 바뀌기도 하고 반대로 영화를 누리던 주류미술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림공부를 전문적으로 받아도 무명인 화가도 많고, 그림공부를 전문적으로 받지 않은 떠돌이 화가가 이름을 날린 경우도 많다. 이런 논리는 마치 미술대를 나오면 정통회화를 하는 화가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전통 회화를 하는 떠돌이 화가가 된다는 말인데 필요조건을 교묘하게 충분조건으로 뒤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류나 비주류 화가는 둘 다 화가이듯이, 정통 회화나 비정통 회화도 모두 회화일 뿐이다. 공부를 못해도 학생은 학생이다. 그림을 못 그려도 화가는 화가일 뿐이고, 비주류라고 하더라도 결국 미술세계의 한 일원이다.

하지만 야나기 무네요시는 정통 회화는 선비그림이고, 비정통 회화는 백성의 그림이라고 상정하고 이 둘을 적대관계, 혹은 대립관계로 만들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  결국 선비와 백성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는 것이다.

사상과 조직, 자본을 가지고 있는 선비와 일반백성들을 분리시키고 대립시켜 흔히 ‘분리해서 각개격파’하는 제국주의 지배방식을 지식인에 입맛에 맞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 야나기 무네요시는 1924년 조선미술관을 설립한다. 우리 미술을 사랑하여 설립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 미술관을 통해 조선미술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왜곡시키는 사령탑 역할을 한 것이다. 일제가 조선에 철도와 전기를 설치한 것은 조선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침략전쟁을 수행하거나 착취를 용의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조선미술관의 설립도 같은 맥락이다. 일제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 놓고 우리더러 고마워하란다. 밥은 자기들이 먹고 밥값은 우리더러 내라고 하는 도둑놈 심뽀와 뭐가 다른가. [자료사진 - 심규섭]


그 다음은 ‘감상용 그림과 실용성을 강조된 그림’을 구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세시절 성당이나 교회를 장식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종교화는 감상용인가, 실용성이 강조된 그림일까? 절의 대웅전을 장식한 불화나 탱화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그렸을까, 감상용으로 그렸을까? 선비의 공부방에 걸린 수묵산수화나 난초그림은 감상용이었을까, 아니면 장식용이었을까?

이런 논리에 따르면 유럽의 성당이나 혹은 왕과 귀족이 거처하는 성안에 걸린 그림이나 조선 궁궐에 걸린 그림은 모두 실용성이 강조된 장식화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성당을 장식했던 그림, 왕궁이나 성을 장식했던 작품을 제외하면 유럽의 미술은 껍데기만 남는다. 조선 궁궐을 장식했던 그림을 감상용 그림과 구분하면 궁중회화는 떠돌이 화가, 무명화가의 그림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서구의 성당이나 성, 혹은 조선 궁궐의 그림은 모두 그 시대 최고의 화가가 그린 것이다.
모든 감상용 미술작품에는 장식성이라는 실용성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모든 장식성이 강한 실용적 그림에도 평론과 감상이 가능하다.

미술작품에서 감상과 장식, 실용은 떨어지지 않는다. 구분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구분해서 서로 싸움을 붙이고 있다. 결국 야나기 무네요시는 말도 되지 않는 이론으로 우리그림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궁중회화를 장바닥에 처박아 버린 것이다.

또한 야나기 무네요시는 정통 회화는 같은 그림을 한 장 이상 그리지 않으나 비정통 회화는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린다고 했다.  정말 미술창작행위라고 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자기가 베끼는 사람이다. 이것저것을 그리는 것은 베낄 수 있는 하나의 원본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방울 그림을 완성한 작가는 물방울만 그린다. 입체주의 완성한 피카소는 항상 그런 방식으로 그린다. 소재가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그림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조형방법이 핵심이다. 자신만의 조형방법은 마치 붕어빵을 찍어내는 무쇠 틀과 같다. 같은 틀이면 소재와 같은 내용물이 달라져도 결국 같은 물건이 나온다.

유명한 화가일수록 자신이 작품을 더 많이 복제한다. 유명하다는 것은 작품이 많이 팔리기 때문이다. 비슷비슷한 그림을 제자들과 함께 그려 서명만 해서 파는 경우는 지금도 흔하다. 또한 그림에서 복제는 공장에서 공산품을 찍어내는 것과 전혀 다르다.

모든 그림은 같은 소재와 주제를 사용해도 다르게 표현된다. 심지어는 똑같은 소재와 주제, 똑같은 조형방법을 사용해도 그리는 작가마다 다르게 표현된다. 그것은 마치 같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마다 느낌이 다른 것과 같다. 시골장터에서 ‘각설이타령’을 부르는 각설이도 저마다 다르다.

미국의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마릴린 먼로’라는 영화배우 사진을 실크스크린이라는 방식으로 대량복제해 팔았다. 대량복제하는 과정에서 불량품이 나오기 마련인데 오히려 이런 불량품이 희귀하다는 이유로 더 비싼 가격으로 팔렸다. 과연 하나의 작품을 대량으로 복제한 ‘앤디 워홀’은 떠돌이 환쟁이에 불과한 사람인가?

우리그림에서 가장 흔하고 대량으로 복제된 그림이 세화이다. 목판을 사용해도 찍어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혹은 목판의 파손정도나 물감의 양의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목판이 아닌 손으로 직접 베껴 그리는 경우는 더욱 변화가 심하고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렇게 다양한 ‘까치호랑이그림’은 숱하게 복제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그림이다.

어떤 헛똑똑이는 미술의 장식성과 실용성은 다르다고 항변한다. 장식성은 색과 조화를 추구하는 회화의 고유한 영역이고 실용성은 공예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나전칠기나 장롱가구 따위의 공예가 실생활에 필요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방안을 장식하는 역할도 동시에 한다. 그럼 실생활에 사용하지 못하는 달항아리나 화려하고 거대한 도자기는 감상용 작품일까, 공예일까?

공예품인 도자기가 감상 영역에 들락날락하듯이 감상용 그림도 여러 쓰임새로 활용된다. 수묵산수화를 병풍으로 만들어 놓고 어떤 때는 감상하는 작품으로 사용하고 어떤 때는 제사를 지낼 때 배경으로 쓰고 평소에는 바람을 막거나 공간을 나누는 가리개로 활용하는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주장에서 가장 결정적인 헛소리는 바로 ‘창조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창조를 하려면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우고 감상용 그림만 그려야 하며 한 장 이상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그대로 실천하면 세상의 모든 화가는 붓을 꺾어야 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조선의 화가들은 아예 창조를 하지 마라.’는 것이다. 

 

 

▲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광화문을 철거하려고 했을 때 적극 반대한 인물이다. 이때는 이미 조선은 망하고 없었다. 조선궁궐은 대부분 파손되어 사라졌고 일부만 남은 상태였다. 왕이 없고 사람이 살지 않으며 외부로부터 지킬 것이 없는 광화문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광화문과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패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에 불과했다. 지금에 와서 일제가 착취나 약탈을 조금 덜 한 것을 우리가 고마워해야 하는가?

3.1절이나 8.15광복절 때마다 독립운동가의 자녀들은 거지꼴을 하고 친일파는 떵떵거리면 산다는 기사가 방송이나 신문에 나온다. 이런 기사를 통해 일제잔재를 청산하고 친일파를 발원본색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독립운동을 해 보았자 패가망신한다.’는 교훈만 심어줄 뿐이다. 경복궁을 보존한 것이 마치 조선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교묘하게 비하하는 전술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지식인을 무력화하는 임무를 맡은 일본제국주의의 첨병이었다. 두터운 옷을 벗겨내는 햇빛전략을 사용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우리그림을 궁중회화, 선비그림, 민화로 구분해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 결과 궁중회화는 철저하게 은폐되었고, 백성들이 좋아했던 그림은 떠돌이 환쟁이, 무명화가의 허접하고 촌스러운 그림으로 전락했으며, 중국의 영향에 의해 좌우되거나 색채도 없고 크기도 작은 선비그림이 우리그림을 대표하게 된다. 그의 전략은 훌륭하게 성공했다.

온갖 영화를 누리다가 1960년대 초반에 사망했지만 아직도 우리그림을 보는 눈은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그림에 우리 스스로 침을 뱉고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는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이런 야나기 무네요시는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연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인 1984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출처] : 심규섭 :  아름다운 우리 그림, 민화 /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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