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실은 완행열차는 탈선하지 않는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봄날, 치매 병동
박성민
저녁이면 창밖을 내다보는 할머니
손 뻗어 더듬거리면 꽃망울 돋아나고
땅거미 내려올 때면 자꾸 등이 가렵다
마음속 희망들은 3인칭으로 바뀌지만
저녁놀엔 아직도 피가 살고 있는지
기억이 커피포트에 부글부글 끓는다
대바늘 두 개에 꿰어 있는 털실 뭉치
시계는 흘러내리고 마른기침 쏟아지고
저 멀리 횡단보도엔 봄비만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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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도 실선으로 혹은 그나마 운이 좋으면 점선으로 분할될 때 있다. 오래된 기억은 뇌리에 있지만 최근의 기억은 뇌리를 떠나며 시작되는 ‘치매’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처럼 예기치 않고 있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당하는 슬픈 분할이 그 시작이다. 종종 예술에 갖다 붙이는 황금분할이니 하는 입에 발린 그런 분할이 아닌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분할이며 결국은 소멸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가는 완행열차를 타고 홀로 떠나는 아주 느린 이별 여행의 동의어가 치매다.
‘자꾸 등이 가려’ 울 때 긁어주던 이가 더 이상 정확히 누구였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을 때 ‘저녁이면 창밖을 내다보는 할머니’의 습관성 관찰력은 언제나 ‘꽃망울’을 피운다. 그것은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오래된 그녀일 것이다. ‘땅거미’의 등에 올라탄 시간이라는 벌레가 자꾸만 그녀의 등을 떠미느라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그곳의 가려움을 탓하고 있다.
‘마음속 희망들은 3인칭으로 바뀌지만’이라는 표현에서 시인의 인칭에 대한 천이遷移 과정에 주목하는 것을 느끼며 무릎을 치게 된다. ‘마음속 희망’과 할머니라는 1인칭의 “거취”가 갈수록 불투명해지면서도 아직은 그러니까 아직은 바라보는 병동 밖의 서쪽 붉디붉은 ‘저녁놀’이 피의 거주지가 되어 타오르고 있고 커피포트는 ‘기억’의 거주지로 은유의 힘줄이 가닿는다. 분할된 기억이 서서히 공백이 되기 전까지 ‘저녁놀’은 타오르고 ‘커피포트’는 끓어 넘칠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왜곡된 “시계처럼 흘러내리는 시간“의 끝없는 행보일지라도 그것을 불투명한 의식 속에서도 대바늘로 ‘털실’을 꿰어가며 마른기침으로 매듭을 하는 그녀는 ‘비 오는 어느 봄날’, 어느 삶의 ‘횡단보도’를 1인칭으로 건너고 있다고 가정하고 싶다.
기억을 실은 완행열차는 탈선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