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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들어가는 말 2. 한국의 대표적 유교자산 향교와 서원 3. 전국 및 경기도 향교 서원 현황 4. 향교 서원에 대한 가치 재인식 5. 경기 서원 관리운영의 새로운 방향 모색 6. 나가는 말 |
1. 들어가는 말
1) 교육입국의 위대한 역사
한국은 위대한 교육입국의 전형적 국가이다. 단적으로 한국의 향교와 서원의 숫자를 단순계산해도 이를 알 수 있다. 향교는 공립학교로 선현에 대한 봉사와 강학을 수행하였다면 서원은 특정 선현에 대한 향사와 사립학교 기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성종 17년(1488)까지 전국에 “1읍1교(一邑一校)”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중앙에서 교수와 훈도(訓導)가 파견되어 교육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8도에 모두 328개소의 향교가 존재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지방관제와 비교해 볼 때 거의 모든 읍에 향교가 설립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사원(祠院)의 숫자는 909개였으니 1개 읍에 평균 3개의 사립학교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조선시기에 존립했던 공사립학교는 1,200여 개소에 달했다. 보는 사람에 따라 서원이 조선 말기 당쟁의 근원지로 전락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경쟁적으로 서원을 건립해서 후학을 양성하던 치열한 교육전쟁이 우리 국민의 인문학적 민도를 높였다면 단점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으로 남은 서원사우는 47개소였다. 빈대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워버린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었다. 서원의 기능 가운데 향속을 핑계로 군림하던 제도적 문제점만 보완하면 되었던 것을 모조리 철폐시키는 학교 폐쇄령이 아닐 수 없었다.
세월은 흐르고 그 혹독한 동면의 계절 일제침략기 식민국가에서도 우리 조상들은 교육입국의 유전자를 버리지 못했다. 일제 강제합병 이후에도 서원의 본래적 기능회복이라는 봉사와 향학 열망은 지속되었고 2013년 오늘 기준으로 전국에 다시 672여개의 서원이 건립되어 있으며 현재도 서원은 전국적으로 복원되거나 신설되고 있다.
2) 불변의 서원 향교 가치 세계문화 유산으로 곧 등재되어
향교(중국에서는 문묘 혹은 공묘라 칭함.)와 서원이 존립했던 국가는 중국과 한국, 일본, 그리고 중국의 영향을 받았던 동남아 일부 국가이다.
서원제도는 중국에서 비롯되었지만 중국과 한국, 일본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난다. 중국의 서원은 강학위주이고 일본의 경우는 기술전수학교 임에 반해 한국의 서원은 교화와 제향기능이 같이 중시된 전인적 인격함양을 통한 인재양성이 중시되었다. 특히 서원의 기능 중 제향의례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경우는 한국뿐으로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물 ‘제향’의 전통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조선말기 중앙정부와 지방 사림들과의 갈등으로 훼철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바로 복원되어 향사기능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는데 반해서 중국의 서원은 근대학제로 바뀌거나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문묘와 함께 거의 파괴가 되어 온전한 서원의 건축과 기능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서원건립의 정신이 본래의 뜻대로 유지되는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 하겠다.
한국은 자원과 인구가 빈약한 작은 나라이다. 인재양성이라는 교육입국의 철학이 없었다면 수많은 전란을 통해 나라의 존립과 정체성을 지켜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향교와 서원을 중심으로 한 강학과 향사기능을 보존해왔던 위대한 교육입국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영원히 보존 계승하고자 한국의 대표서원에 대한 인류의 문화유산 지정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2015년이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전망이며 대표서원 등재 후 점차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으로 있다.
오직 전인적 인재양성만이 자산일 수밖에 없는 작은 나라 대한민국 불굴의 역사에는 서원과 향교가 배경에 자리 잡고 있었고 교육에 대한 열망이 바탕이 된 학교 중시와 입신양명을 통한 출세의 전통은 지금도 전쟁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 한국의 대표적 유교자산 향교와 서원
1) 역사
향교(鄕校)가 조선시대의 공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지방의 교육기관이라면 서원(書院)은 조선 중기 이후 명현(名賢)을 제사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한 사설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의 공적 교육기관인 향교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쇠퇴해간 반면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은 조선 중기 풍기군수(豊基郡守)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에 의해 백운동(白雲洞) 서원이 최초로 설립된 이후로 점점 번성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혈연(血緣)·지연(地緣) 관계나 학벌(學閥)·사제(師弟)·당파(黨派) 관계 등과 연결이 되어서 지방에 소재하는 양반층들의 이익집단화(利益集團化)하는 경향을 점차로 띠게 됐다.
특히, 나라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의 경우에는 부속된 토지는 면세되고 노비는 면역(免役)이 되었기 때문에 양민(良民)의 투탁(投託)을 유인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는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서원은 양민(良民)이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軍役)을 기피하는 곳으로 변질돼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군정(軍丁)의 부족을 초래했고 불량(不良)한 유생(儒生)들의 협잡소굴(挾雜巢窟)이 되는가 하면 서원세력을 배경으로 지방의 수령(守令)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등 작폐(作弊)도 극심했다.
또한 면세의 특권을 남용(濫用)한 서원전(書院田)의 증가로 인해 국고(國庫)의 수입을 감퇴시켰으며 유생(儒生)들은 관학(官學)인 향교(鄕校)를 외면하고 서원에 들어가서 붕당(朋黨)에 가담해 당쟁(黨爭)에 빠져 향교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이처럼 서원이 본래의 설립 목적과 기능에서 벗어나 부정한 정치권력과 부패의 소굴이 된 나머지 결국 고종(高宗) 2년인 1865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해 전국에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되기에 이른다.
2) 현대사회와 서원
서원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현존(現存)하는 서원은 이미 그 역사적 의미와 기능을 다한 구시대(舊時代)의 유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서원은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아니 경제적인 여건이 유족(裕足)해짐에 따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해 철폐된 서원들이 하나 둘씩 복구(復舊)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과거 자기 조상들이 운영했던 서원의 영화(榮華)를 이 시대에 되살려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존재나 자기 가문을 과시(誇示)하기 위한 것으로 간단하게 치부(置簿)해 둘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범주에 드는 서원들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오늘날 서원 본래의 설립 목적과 가능을 잘 살려서 현대 사회에 알맞은 교육과 연수, 시민들의 삶 속으로 다가가는 성공적인 서원도 존재하고 있기에 이 시점에서 서원의 활용문제를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검토하고 고민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서원은 선현(先賢)과 향현(鄕賢)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를 아울러 갖추게 됐다.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서재(書齋) · 서당(書堂) · 정사(精舍) · 선현사(先賢祠) · 향현사(鄕賢祠) 등과 문익점(文益漸)을 제사하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1401년(태종1) 경상남도 산청군의 단성(丹城)에 세워졌다.
이 같은 서원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현재 서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보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곁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 복구되고 있는 서원의 문제를 애써 외면할 수만은 없다.
특히 서원의 양대(兩大)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제향(祭享)과 교육(敎育) 기능 가운데 현재의 서원들은 대부분 제향 기능만 남아 있고 교육의 기능은 사라진 상태에 있다.
그러다보니 서원은 건축물만 덩그렇게 남아있고 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하며 언제나 문이 닫힌 채 흉물(凶物)처럼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엄청난 재원(財源)을 투입해 복구한 서원을 우리들이 현재처럼 별다른 활용이 없이 방치해 두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와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시급하게 현재의 문제점을 진단하여 파악하고 이를 현실에 맞게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시급히 모색해 방치된 서원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몇몇 서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에 산재(散在)하는 대부분의 서원에 해당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3. 전국 및 경기도 향교 서원 현황
1) 향교현황
(1)전국 향교 현황
지역별 |
향교수 |
비고 |
서울, 인천, 경기 |
30 |
서울(1), 인천(4) |
강원 |
16 |
|
대전, 충남 |
38 |
대전(2) |
충북 |
18 |
|
전북 |
26 |
|
광주, 전남, 제주 |
32 |
광주(1), 제주(3) |
대구, 울산, 경북 |
45 |
대구(3), 울산(2) |
부산, 경남 |
29 |
부산(2) |
합계 |
234 |
|
(2) 서울, 인천, 경기도 향교현황
향교명 |
주 소(연락처) |
陽川鄕校(양천향교)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 |
江華鄕校(강화향교)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938-2번지 |
喬桐鄕校(교동향교)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148 |
富平鄕校(부평향교) |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972-8 |
仁川鄕校(인천향교) |
인천광역시 남구 학익동 463-83 |
加平鄕校(가평향교)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읍내리 551-2- |
高陽鄕校(고양향교)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603-1 |
果川鄕校(과천향교)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81 |
廣州鄕校(광주향교) |
경기도 하남시 하산곡동 206-3 |
交河鄕校(교하향교) |
경기도 파주시 금촌동 71-7 |
金浦鄕校(김포향교) |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 253-3 |
南陽鄕校(남양향교) |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남양리 335 |
水原鄕校(수원향교) |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교동 43 |
安城鄕校(안성향교) |
경기도 안성시 인지동 362-2 |
楊根鄕校(양근향교) |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옥천리 817 |
陽城鄕校(양성향교) |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동항리 114 |
楊州鄕校(양주향교)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266 |
陽智鄕校(양지향교) |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양지리 379 |
驪州鄕校(여주향교)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홍문리 193-46 |
漣川鄕校(연천향교) |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차탄리 245 |
龍仁鄕校(용인향교) |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언남리 335 |
利川鄕校(이천향교) |
경기도 이천시 창전동 408-10 |
積城鄕校(적성향교)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516 |
竹山鄕校(죽산향교)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314 |
砥平鄕校(지평향교) |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343 |
振威鄕校(진위향교) |
경기도 평택시 청북면 고잔리 1030 |
通津鄕校(통진향교) |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 서암리 714-7 |
坡州鄕校(파주향교)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파주리 335 |
平澤鄕校(평택향교) |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187-26 |
抱川鄕校(포천향교) |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신읍리 23-2 |
2) 서원현황
(1) 서원 숫자의 증가
최근 자료(2012년 12월 31일 현재)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존립하고 있는 서원의 숫자는 총 672개(표1 참조) 서원으로 조사되었다. 대원군 시기 서원철폐령으로 남은 47개 사원 가운데 서원으로 남한에 존속되었던 숫자가 22개소였음.에도(표2 참조), 현재 672개소로 다시 복원 혹은 신설되거나 명칭을 변경 하는 등을 통해 증대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
書 院 名 |
所 在 地 |
年 度 |
配 享 人 物 |
姓氏 |
용연서원 (龍淵書院) |
경기 포천시 신북면 신평2리 |
1691년(숙종 17) |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1561-1631) 용주 조 경(龍洲 趙 絅 1584-1669) |
廣州 漢陽 |
노강서원 (鷺江書院) |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
1695년(숙종 21) |
정재 박태보(定齋 朴泰輔 1654-1689) |
潘南 |
우저서원 (牛渚書院) |
경기 김포시 감정동 |
1648년(인조 26) |
중봉 조 헌(重峯 趙 憲 1544-1592) |
白川 |
파산서원 (坡山書院) |
경기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 |
1568년(선조 1) |
율곡 이 이(栗谷 李 珥 1536-1584)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1493-1564) 우계 성 혼(牛溪 成 渾 1535-1598) 절효 성수종(節孝 成守琮 1495-1533) 휴암 백인걸(休菴 白仁傑 1497-1579) |
德水 昌寧 昌寧 昌寧 水原 |
덕봉서원 (德峰書院) |
경기 안성시 양성면 덕봉 |
1695년(숙종 21) |
양곡 오두인(陽谷 吳斗寅 1624-1689) |
海州 |
심곡서원 (深谷書院) |
경기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 |
1649년(효종 0)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 |
漢陽 |
사충서원 (四忠書院) |
경기 하남시 상산곡동 |
1725년(영조 1) |
몽와 김창집(夢窩 金昌集 1648-1722) 소재 이이명(疏齋 李頥命 1658-1722) 한포재 이건명(寒圃齋 李健命1663-1722) 이우당 조태채(二憂堂 趙泰采1660-1722) |
安東 全州 全州 楊州 |
행주서원 (杏洲書院) 기공사(紀功祠) |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162-1 |
1842년(헌종 8) |
장렬공 권 율(莊烈公 權 慄, 1537~1599) |
安東 |
대로서원 강한사(江漢祠) |
경기 여주군 여주읍 하리 201-1 |
1785년(정조 9년 |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
恩津 |
현절사(顯節祠) |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
1688년(숙종14년) |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 |
安東 |
(2) 문화재 지정추이
유형별 |
서원수 |
비지정 |
402 |
문화재자료 |
144 |
유형문화재 |
51 |
기념물 |
42 |
향토유적 |
21 |
사적 |
10 |
민속자료 |
2 |
총계 |
672 |
672개소의 현존 서원 가운데 문화재로 지정된 서원은 270개소(사적10, 문화재자료144, 유형문화재51, 기념물42, 향토유적21, 민속자료2)이며, 2010년 12월 기준 문화재청의 조사통계 당시 문화재지정 총 숫자가 167개에 불과했지만 2년 동안 103개가 증가된 것을 볼 수가 있으며 이와 같은 양상은 점차 확대 추세에 있다고 하겠다. 총 672개소 가운데 비지정 문화재 서원은 402개소로 비지정 서원과 문화재 지정 서원은 60%:40% 정도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다양한 원인에 의한다고 할 수 있는데 서원 문화재에 대한 인식의 확대에 의한 바도 그 영향이 크겠으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복원된 서원의 증개축과 관련되어 서원 자체의 재정적 역량으로는 이를 감당키 어려워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지원을 받아야 하는 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서원이 유림들의 소유가 많은 관계로 이를 공공재로 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서원 개보수에 필요한 재원을 유림들이 충당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서둘러 문화재로 지정하려는 경향이 전국적으로 고르게 나타나고 있다. 일부 서원에서 주향되어 있는 문중에서 재정을 부담하기도 하여 증개축과 향사비용을 조달하기도 하지만 향내 유림들의 자존심과 관련되어 문중이 주도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가급적 문화재 지정을 통해 서원 증개축과 향사봉행에 필요한 비용을 지자체에서 지원 받고자 노력하고 있다. 서원 출입자들의 연령 또한 고령화가 가속되어 서원을 관리 운영할 수 없게 된다는 위기감이 반영되는 경우이기도 하다.
(3) 관리 주체별 서원의 관리 현황
현재의 서원 형태 조사에서 이를 관리 주체별로 조사해 볼 때 유림이 관리하는 곳은 375개소(65%)로 나타났고 그 다음이 문중으로 255개소(38%)에 달했으며 그 다음으로 지자체 관리 10개소, 사단법인 5개소, 학교법인 5개소, 개인관리 20개소 등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유림이라 할 때는 소유권과 관리권을 지역 유림들이 가지고 관리 운영하는 것을 말하며 문중이라 할 때는 단일 문중에서 설립한 서원이거나 혹은 유림들이 관리가 불가능한 경우 주향의 후손들이 소유권과 관리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지자체의 경우는 소수서원이나 도산서원처럼 관리사무소를 서원에 두어 직접 관리 운영하는 경우와 새로 복원 혹은 중수 되는 과정에서 관리 운영이 자치단체로 기부채납 되거나 소유권만 자치단체로 이관시킨 경우를 말한다. 사단법인으로는 5개소(사충, 설봉, 송록, 장절, 충현서원)가 있으며 학교로 귀속된 곳 또한 5개소(병산, 역동, 구계, 화산, 백학서원)이며 20여 개소는 개인 소유로 되어있거나 관리하고 있다.
(4) 최초설립연도별 통계
연대별 |
서원수 |
1400년 |
11 |
1500년 |
87 |
1600년 |
195 |
1700년 |
175 |
1800년 |
113 |
1900년 |
69 |
2000년 |
3 |
미상 |
19 |
총계 |
672 |
현존하는 서원의 설립연도에 대한 현황을 년도별로 분류한 자료이다. 대부분의 서원들이 명종(1534~1567) 년간부터 임진왜란을 거쳐 숙종(1661~1720)년도에 건립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만조 교수의 서원 철폐령 이전의 서원 사우 현황표에 의하면 순조(1790~1834) 년간까지 서원 471개소, 사우 492개소로 총 사원(祠院)이 933개소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의 서원수(672개소)와 미복원 서원수(273)를 합치면 944개소에 이르고 있어 신설된 서원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우(祠宇)가 서원(書院)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고 볼 수 있다.
|
경상 |
전라 |
충청 |
경기 |
황해 |
강원 |
평안 |
함.경 |
계 |
명종 |
12(5) |
3 |
1(2) |
1(2) |
1 |
1 |
2(4) |
1 |
22(13) |
선조 |
25(3) |
3(9) |
7(3) |
6 |
8(1) |
|
3(4) |
1(2) |
63(22) |
광해군 |
12(3) |
5(4) |
6(1) |
2 |
1 |
2 |
|
1(1) |
29(9) |
인조 |
11(9) |
6(7) |
5(1) |
2(2) |
(1) |
2(2) |
1(2) |
1(1) |
28(25) |
효종 |
10(2) |
5(3) |
2(1) |
4 |
3 |
2(3) |
1 |
(1) |
27(10) |
현종 |
14(6) |
8(4) |
8(3) |
5(2) |
2 |
4 |
4(1) |
5(3) |
46(23) |
숙종 |
76(61) |
27(40) |
27(25) |
19(8) |
5(8) |
4(8) |
6(15) |
2(9) |
166(174) |
경종 |
2(5) |
3(4) |
3(2) |
|
(1) |
(2) |
(4) |
(2) |
8(20) |
영조 |
6(46) |
4(22) |
1(14) |
1(7) |
1(16) |
2(14) |
1(17) |
2(9) |
18(145) |
정조 |
(2) |
2(1) |
|
(3) |
|
|
|
|
2(6) |
순조이후 |
|
|
|
1 |
|
|
|
(1) |
1(1) |
미상 |
5(9) |
1(14) |
(6) |
(3) |
1(3) |
(7) |
|
(1) |
7(43) |
계 |
173(151) |
77(108) |
60(58) |
41(28) |
22(30) |
13(40) |
18(47) |
13(30) |
417(492) |
(5) 현존 서원의 복원 및 중수 관계 통계
연대별 |
서원수 |
1400년 |
0 |
1500년 |
2 |
1600년 |
8 |
1700년 |
3 |
1800년 |
16 |
1900년 |
496 |
2000년 |
62 |
미상 |
85 |
총계 |
672 |
철폐된 서원 사우들은 대원군이 하야한 후 다시 복원 혹은 중수되기 시작하여 대부분의 서원들은 1900년대에 복원 혹은 중수되었다. 표에 나타나듯이 1900년대에 복원 혹은 중수된 서원은 496개소에 달하는데 이를 시기별로 보면 일제강점기 시대에 78개소가 복원되고 해방 후부터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1969년까지가 109개소, 1970년부터 1999년에 이르는 동안 295개소의 서원이 다시 복원되거나 중수되었으며 200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64개소가 복원 정비되었다.
(6) 경기지역 서원 현황(2012.12.31. 현재)
서원명 |
서원명 |
소재지 |
문화재 지정여부 |
관리주체 |
최초설립연도 |
훼철 여부 |
최후 중수 |
沂川書院 |
기천서원 |
경기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
문화재자료 |
유림 |
1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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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
鷺江書院 |
노강서원 |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산146-1 |
기념물 |
반남박씨 |
1695 |
비훼철 |
1969 |
大浦書院 |
대포서원 |
경기 김포시 양촌면 대포리 산32 |
향토유적 |
남원양씨 |
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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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
德峰書院 |
덕봉서원 |
경기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
유형문화재 |
해주오씨 |
1695 |
비훼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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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陽書院 |
덕양서원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433 |
비지정 |
유림 |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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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山書院 |
매산서원 |
경기 여주군 능서면 번도리 산321 |
향토유적 |
유림 |
14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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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
文憲書院 |
문헌서원 |
경기 오산시 내삼머동 753-2 |
비지정 |
유림 |
1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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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
沙川書院 |
사천서원 |
경기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24 |
비지정 |
유림 |
1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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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
四忠書原 |
사충서원 |
경기 하남시 상산곡동 100-2 |
비지정 |
사)사충서원 |
1726 |
비훼철 |
1968 |
雪峯書院 |
설봉서원 |
경기 이천시 경충대로 2709 |
향토유적 |
사)설봉서원 |
15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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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
蘇山書院 |
소산서원 |
경기 시흥시 신천동 산12 |
향토유적 |
진주하씨 |
14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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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
水谷書院 |
수곡서원 |
경기 양평군 지제면 수곡631 |
향토유적 |
안동권씨 |
18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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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
深谷書院 |
심곡서원 |
경기 용인시 수지읍 상현동 |
유형문화재 |
유림 |
1650 |
비훼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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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谷書原 |
안곡서원 |
경기 화성시 서산면 상안리 586 |
향토유적 |
상주박씨 |
1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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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
玉屛書院 |
옥병서원 |
경기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산210 |
향토유적 |
유림 |
16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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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
龍江書院 |
용강서원 |
경기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
비지정 |
음.성박씨 |
16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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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
龍淵書院 |
용연서원 |
경기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
유형문화재 |
유림 |
1691 |
비훼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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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州書院 |
용주서원 |
경기 파주시 월릉면 덕은리 291 |
향토유적 |
유림 |
15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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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
牛渚書院 |
우저서원 |
경기 김포시 감정동 492 |
유형문화재 |
유림 |
1648 |
비훼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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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溪書院 |
운계서원 |
경기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산7 |
문화재자료 |
평양조씨 |
15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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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
臨漳書院 |
임장서원 |
경기 연천군 연천읍 동막리 |
향토유적 |
임상준 |
1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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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
紫雲書院 |
자운서원 |
경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
기념물 |
유림 |
1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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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忠烈書院 |
충렬서원 |
경기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
유형문화재 |
유림 |
15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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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忠賢書院 |
충현서원 |
경기 광명시 소하2동 |
기념물 |
유림 |
1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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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6 |
坡山書院 |
파산서원 |
경기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 |
문화재자료 |
유림 |
1568 |
비훼철 |
1966 |
杏洲書院 |
행주서원 |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
문화재자료 |
유림 |
1841 |
비훼철 |
1999 |
花山書院 |
화산서원 |
경기 포천시 가산면 방죽리 산16-1 |
기념물 |
유림 |
1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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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
4. 향교 서원에 대한 가치 재인식
1) 서원의 가치
서원은 앞서 말했듯이 향촌사회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던 곳이다. 학자의 자율성에 바탕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양성하며 인간을 주체적으로 탐구하는 동양경전을 통한 내면의 진리를 탐구하던 인격도야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인적 인격을 완성해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시했던 교육방식은 선현을 본받는 것이었다. 인격교화의 대상으로서 선현에 대한 경모의 마음가짐은 물론 향사(享祀)를 통해 현존하는 정신적 거울로 선현을 대했다. 아울러 지방 풍속(風俗)과 예속(禮俗)을 교화하는 지역문화 중심이기도 했다. 향촌 사회에 윤리를 보급하고 향촌 질서를 재편성하는 중심이었으며 향촌 지역공동체를 이끌어 간 정신적 지주였다고 할 수 있다.
각 서원들은 학령과 원규를 갖추어 자율적으로 준수하게 하였고 비형식적인 자득(自得)교육을 중요한 교육방식으로 삼았다. 서원은 주로 선현들의 연고지에 건립되었다. 출생한 곳이거나 목민으로서 선정을 베풀던 곳 혹은 정치적 수난으로 귀양을 갔던 곳이나 사망한 지역에 사원이 건립되었다. 중국 서원의 영향을 받아 자연 경관의 일부로서 서원이 건축되었으며 최대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배산임수한 지역에 건립하였으며 대부분 경사를 이용해 주변경관을 건축물 내부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즉 천인합일적 사상에 바탕하여 자연이 인격감화에 미칠 수 있는 최대한의 건축적 배려였다고도 할 수 있다.
2) 서원의 공간구성 및 시설현황
서원은 기본적으로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을 위주로 하여 다양한 부속건물로 구성되었다. 이를 기능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공간구분 |
건 물 |
진입공간 |
㉠ 홍살문, ㉡ 하마석(下馬石), ㉢ 외문(外門), 누문(樓門) 및 누(樓) |
강학공간 |
㉠ 강당, ㉡ 재사(齋舍), ㉢ 장판각, 장서각 |
제향공간 |
㉠ 신문(神門), ㉡ 사당(祠堂) |
부속공간 |
㉠ 고직사, ㉡ 전사청, ㉢ 제기고 |
시설물 |
㉠ 생(牲)단, ㉡ 관세(盥洗)위, ㉢ 망례위, ㉣ 석등, 정료대 |
강학과 제향기능 이외에 서원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가 도서관과 출판 기능을 갖춘 사립학교라는 점이다. 제지기술과 인쇄술의 발달에 의한 도서수집, 출판, 보존의 역할을 수행하는 중심 거점이었다.
3) 서원의 국가 유산화 필요성
중국에서의 서원은 관학적 성격이 강했으며 국가에서 제공해주는 각종 책들을 보관하는 도서관적 기능이 강했다. 반면에 한국의 서원은 사액(賜額)이라는 후원정책은 있었으나 철저하게 사립학교의 형태를 취했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시대에 전국에 700개소의 서원이 산재했으며 직업교육이 아닌 인문교육을 통해 전인적 인격체를 양성하던 교육방식은 세계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지식교육체계였다고 하는 말은 근간에 지어진 말은 아니다. 400여년 전에 보편적 인성과 사회인으로서의 덕목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킨 교육기관인 700개의 사립학교가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교육혁명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명문 대학입학과 고시로 대변되는 교육제도의 전형이 바로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서원의 교육제도에 기인하는 바가 크리라는 상상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즉 한국 교육열의 근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서원은 현재에도 그 필요 충분한 의미를 갖추고 있다.
첫째는, 역사적 의미로서 단순 서원 건물 그 자체가 아니라 서원이 가지고 있던 강학정신과 의례정신이 녹아있다는 점이다. 비록 갑오경장으로 전통적인 교육제도가 완전히 변모는 되었지만 선현봉사라는 중요한 서원 본연의 전통은 그대로 면면히 계승되고 있고 유림활동의 근거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둘째는, 서원태동에 바탕이 되었던 철학 즉 성리학적 인간본성의 연구에 대한 부분이다. 지역 학자들과 유림을 중심으로 각 지역이 배출한 선현들의 연구를 통해 지역문화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를 확충해 나가는 일의 중심으로서 서원의 존재를 자산화하는 부문이다.
셋째, 한국서원의 세계사적 존재의미를 부각시킬 수 있는 세계자산화 노력이다. 근래에 들어 한국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일련의 작업이 진행 중이다. 우선 한국의 서원 가운데 진정성(Authenticity), 완전성(Integrity), 탁월한보편적 가치(OUV)를 갖춘 9개 서원을 세계유산등재 1차 목표로 추진하고 이를 확대하여 전국의 서원으로 확대해 간다는 취지하에 201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4) 경기서원의 정체성
첫째, 기호학의 본고장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자운서원(율곡), 파산서원(우계 성혼), 대로서원(송시열), 노강서원(박세채와 박태보)을 중심으로 충청 호남 황해도로 확대되어 가게 된다.
둘째는 개혁정신의 진원이라는 특징으로 조선건국을 통한 국가개혁의 발원이었거나(정도전 문원사) 훈구세력에 대항한 사림정치의 발로지 였다 (조광조 용인 심곡서원, 기묘명현 박세희를 모신 화성 안곡서원)
셋째는 구국과 위정척사 운동의 구심점이라는 점이다.
구국의 선봉에 섰던 조중봉(우저서원)과 권율(행주서원), 이항로(포천화산서원). 이덕형(용연서원, 서희 장군이(설봉서원)한 축이요, 또 한축은 한말 위정척사의 구심점이었던 이항로(노산사, 최익현(채산사) 등을 예로 들 수가 있다.
영남이 주로 사승관계에 따른 계보 중심의 서원이 주종이라면 경기 서원의 정체성은 기호학적 성리관의 현실주의적 특징이 중심 되면서 실학으로, 또는 실천 철학으로 연계되어가는 하나의 큰 흐름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5. 경기 서원 관리운영의 새로운 방향 모색
1) 서원 운영 조례의 제정 필요(자치단체의 적극적 참여)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문화재로 지정된 서원들에 대한 보존과 운영에 관한 조례들이 증가추세에 있다. 그러나 현행 조례나 규칙의 경우 대부분이 입장료에 관련된 것이거나 시설물 관리 및 사용에 관한 규제 범주의 조례에 국한하고 있다. 즉 적극적인 서원 관리 운영과 활용, 프로그램 지원 등의 활성화를 위한 목적이 아닌 보존 관리에 그 초점이 맞추어진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근래 경기도(경기문화재단)에서 도차원의 향교 서원 운영 조례를 제정하고자 내용을 정비하고 있는 일은 시기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조례는 앞서 살펴보았던 현재의 관련 조례처럼 시설사용을 규제하거나 단속하기 위한 강제적 조례가 아니라 향후 서원 향교가 지역문화 자산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조례 내용을 담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경기도에서는 도차원의 조례제정을 먼저 추진하여 도내 서원 향교를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고 적극적으로 실질적 지원을 강화하여 지역 정체성 고양을 위한 기지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이 조례제정 프로젝트는 어느 지역보다 진일보된 미래지향적 서원 향교 발전 방안을 담고 있어 경기도와 도내 자치단체를 넘어서서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던져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 서원의 기부채납 혹은 공익법인으로의 전환(서원의 적극적 참여)
서원을 유림이나 문중, 혹은 개인의 재산적 가치로 판단하여 개방과 활용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서원이나 문중 단일 선조를 배향하는 서원에 대해서 공공재로 판단토록 요구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림이 소유한 서원 가운데 정상적인 서원시설을 갖춘 서원이나 문화재로 지정된 서원은 이미 공공화 된 민족 교육문화 자산의 영역에 이미 편입된 것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유림들이 재정부족과 노령화, 전문 인력 부족 등으로 관리할 수 없거나 서원 본연의 기능으로 운영할 수 없을 때 사회적 자산으로 환원하여 더 많은 국민들이 서원의 가치를 향유해야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런 겨우 유림들의 동의하에 제향공간을 제외하고 기타 공간에 대해 자치단체에 기부 채납하여 관리운영의 정상화를 기하거나 공공재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공공법인으로 전환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서원의 관리운영에 사회적 공익적 기부가 가능하도록 하는 일은 서원이 모시고 있는 선현들의 정신적 자산과 유산을 더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서원 활용을 위한 네트워크 필요
서원은 더 이상 유림들만의 자산은 아니다. 규모면에서 실질적 교육공간으로 활용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겠으나 유림들이나 후손의 힘만으로 향교와 서원을 유지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포천시청과 관련 유림, 이를 교육현장에 활용하려는 교육청과 문화원, 문화사회단체가 공동으로 운영에 참가해야 이를 보존할 수 있을뿐더러 극대화시킬 수 있다. 대부분의 서원은 유림들이 겨우 향사나 지낼 뿐 유지 관리에 많은 애로를 느끼고 있다.
이를 위해 일부지역에서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지역 문화자산을 보존 활용하기도 하고 제향을 제외한 모든 시설들을 자치단체에 기부 채납하여 자치단체가 직접 관리운영을 하거나 문화단체에 위탁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활용단계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우선 보존과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지역주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서원 향교와 지역 네트워크는 가장 1차적 보존활용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 초중고등학교와 서원간 1:1 네트워크 구축으로 자매결연 및 부설 교육장으로 활용하거나 대학 혹은 대학내 관련기관(국문학, 사학, 철학, 한문 등)과 1:1 서원 네트워크 혹은 지역내 1행정기관과 서원간의 1:1 네트워크 등을 통해 서원 사우의 청결유지와 보존 활용이라는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 갈 필요가 있다. 근간에 지역사회 출신의 정년퇴임 교수를 서원장으로 초빙하여 상설 강좌를 개설하거나 일반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는 등의 노력들이 엿보이는 서원들이 있다.
4) 서원시설의 위탁에 대한 유림 내부적 합의의 필요성
많은 유림들은 서원이 존현(尊賢)의 공간인 관계로 외부인들의 출입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근암서원이나 설봉서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서원의 공공화는 서원 관리운영의 효율화뿐만이 아니라 서원이 받들고 있는 분들의 선양에 훨씬 유리한 측면이 많다. 향사시설을 제외한 서원 공간에 대한 운영의 위탁이라는 항목을 서원 유림들은 눈여겨 보아야 한다. 서원답의 적은 소출로 제향도 어려운 현 상황에서 춘추향을 제외하고는 자물쇠로 잠가놓는 서원으로는 국민들의 동의를 끌어내기가 어렵다. 목재건축은 갈고닦고 사람의 훈기가 없이는 보수만 반복할 뿐이다. 자치단체, 문화원, 문화예술단체, 학자, 교육기관 등과 협력적 위탁은 서원의 수명을 오래 끌고 갈 것이다.
6. 나가는 말
전통서원에 대한 문화코드로의 인식전환 필요
옛날에 왕조에서 사액서원이라는 당근으로 교육열을 채찍질 했다면 현대사회에서 서원을 중앙과 지방의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은 이미 교육기구에서 문화코드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성을 갖춘 자랑스러운 문화코드를 구시대의 유물로 내버려두는 일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 우리의 손실이라고 하겠다.
서원의 관리운영은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한 일이다. 이미 가장 중요했던 양사의 기능이 없어진지 오래인 만큼, 관리운영자로 합의된 소수의 유림들이 서원이 훼멸되지 않도록 적절히 보수하고 부속된 전답의 소출을 받아 봄가을로 향사를 올리면 사실은 그것으로 끝일 수도 있다.
서원의 세계유산등재 추진 운동은 망각되고 정체된 우리의 빛나는 문화유산을 찾아내어 국가적 자긍심으로 삼고 그 본래의 기능이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승계되어가기를 바라는 국민적 여망을 담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관리 운영의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관리 운영의 대안을 찾아가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서원 관리와 운영의 축이 변화하고 있다. 이미 관리 측면은 문화재적인 국가적 차원으로 인식이 전환되고 있으며 단순한 향사만을 위한 운영조직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엄중한 요구가 많아지고 있다. 관리 측면에서 문화제보호라는 제도적 측면이 보강되어가듯이 운영 측면에서도 지차제와 사회단체, 유림단체, 문화예술단체, 교육기관 등과의 적극적 협업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한 것으로 보이며 조례나 규칙 제정 등을 통해 유림들의 과도한 노고도 줄여들여야 하고 모두가 협력해서 문화자산으로 양성해 가는 문호(門戶)를 열 단초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경기국학센터의 건립 필요
경기도에 기호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 및 활용 센터가 건립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에 거론 되었다. 2012년 사적으로 지정된 자운서원은 기호학의 진원지이며 기호학이 위정척사의 호국 의병운동, 경기실학으로 확대되어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충청도에서는 천안에 한국기호학연구소를 개설할 준비를 하고 있고 논산시 또한 김장생, 김집을 중심으로하는 대대적인 기호유교 선양기지를 만들기 위해 정책적 검토를 하고 있다. 경북이나 경남에서는 한국국학진흥원과 남명학연구소 등 위대한 사상가를 중심으로한 연구와 편찬, 사회계도 및 세계적인 한국철학 거점으로서의 기구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활동을 하고 있고 이를 세계유교문화축제나 남명축제 등과 연계하여 한국인문학의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다.
비록 늦었지만 경기 유교문화의 중심 거점이 건립되어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으로 거점을 옮겨가고 있는 기호학을 세계화할 수 있는 경기국학센터의 건립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겠으며 한국 지성사적 맥락에서 경기 북부에 이를 건립하는 정책적 준비가 필요하다.
한국 경제 문화융성- 서원 인재 양성의 역사에 근원
한국의 서원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 ‘소통과 화합’ ‘나눔과 배려’의 정신과 교육적 이상의 귀중한 가치가 담겨져 있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대한민국이 반세기 만에 한국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힘의 원천은 한국 국민의 높은 교육열에 기인한다고 할 것이며 우리 국민들이 역사의 고비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일념으로 교육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가질 수 있었던 근간을 서원의 교육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지성교육 뿐만 아니라 인성교육이 강조되었다는 점이 오늘날에도 이어받을 뜻 깊은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서원과 향교를 중심을 한 전통시대의 교육문화자산은 제도적으로 보면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그 정신적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들 피속에 남아있는 역동적 개혁과 사회발전,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 동방의 유태인이라 비유하는 것처럼 재빠른 산업화와 마케팅은 결국 한국 서원문화가 지향했던 3가지 정신의 현대적 표현이며 지금도 역동적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서원이 전통시대에 국가를 이끌어가던 지식인들의 용광로 였다 할 수 있다. 서원의 기능이 전통시대와 같을 수는 없지만 역사적 자긍심을 확인할 수 있고 현대사회에서도 함께 더불어 갈 중요한 문화코드의 하나로서 자리매길 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들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전통교육과 서원(書院) 목적하던 정신적 기반 즉, 인문학에 바탕한 휴머니즘(仁)과 사회정의(義)와 국내외의 평화적 질서구축(禮), 운영주체인 인간의 청빈과 검소 나아가 환경생태 보호(智)를 바탕으로 세계사에 기여(信)할 때 인류평화의 주체(大同和平)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꿈꾸는 새로운 교육 계몽운동의 산실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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