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교회 건축특징과 내부장식
오늘날의 교회건물 형태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기독교가 3세기동안의 박해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신앙활동을 하게된 것은 AD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부터다.기독교에 평화와 자유가 찾아오자 지하에서 비밀리에 예배드리던 기독교인들은 공공연하게 예배와 성찬의식을 행할 장소가 필요하게 됐다.
예배장소는 고대의 신전을 본뜬 것이어서는 안됐다.왜냐하면 그 기능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고대 신전의 내부는 흔히 신상(神像)을 모셔놓은 작은 성소로 이루어져 있었고 제사나 의식은 건물 밖에서 행해졌다.그러나 기독교는 사제(司祭)가 미사를 드릴 높은 제단과 설교할 강단,신자가 한 곳에 모일 넓은 장소가 필요했다.
초대 기독교교회의 건축 양식에는 직사각형의 바실리카와 둥근 원형 등 기본적으로 두 종류가 있었다.
이들은 이교도의 신전을 본뜨지 않고 고대 로마시대 `바실리카'(Basilica)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커다란 집회소를 예배장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바실리카'는 왕궁(누가복음 7:25) 행랑(행 3:2,5:12) 등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이곳은 당시 법정,공민의 집회소이고 상인들이 모이던 장소였다.이 건물은 지붕이 있는 커다란 직사각형의 방과 기둥들로 구분된 양옆의 보다 좁고 낮은 복도로 이루어져 있다.맨 끝에는 반원형의 후진(後陣)이 자리잡고 있다.이 부분은 집회의 의장이나 재판관이 자리를 잡는 곳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는 교회로 이용하기 위해 이러한 바실리카를 건립케 했다.반원형의 후진은 예배드리는 신자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주제단으로 이용되었으며 후에 이 곳은 성가대석으로 그 기능이 바뀌었다.
신자들이 한군데 모이는 커다란 중심부는 나중에 신랑(身廊)으로 알려지게 됐다.이 말은 `배'(船)를 의미한다.양쪽 옆의 천장이 낮은 복도를 측랑(側廊)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날개'(翼)를 의미한다.바실리카에서는 대개 이 신랑을 회중석으로 사용했다.대표적인 예배당이 지금의 바티칸을 짓기 위해 16세기에 헐어버린 초대교회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초대교회 교회형태의 또다른 하나는 둥근 원형건물인데 성 코스탄차성당이 대표적이다.이 성당은 원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딸 코스탄차의 묘당(墓堂)으로 건축됐으나 나중에는 예배당으로 사용됐다.원형성당의 모델은 판테온 신전에서 직접 영향을 받았으나 판테온의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과는 달리 벽의 육중한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벽에서 상당히 떨어져 2개씩 짝지어 원형으로 돌아가면서 세운 기둥들이 원통형의 돔(Dome) 무게를 떠받치도록 설계됐다.그래서 쌍기둥들과 벽 사이로 교인들이나 순례자들이 실내를 한 바퀴 돌아나갈 수 있게 된다.
원형교회의 중앙에는 예배나 성찬예식에 필요한 네모난 높은 제단이 있다.벽체의 4개의 오목하게 팬 벽감에는 길이가 똑같은 십자가가 하나씩 장식되어 있다.십자가 테두리의 둥근 원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과 영생을 상징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그리스 신전보다 로마의 바실리카나 원형교회에 관심을 가졌다.그런 건물 양식이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주제를 더 잘 표현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바실리카와 원형교회는 후대의 예배당 양식의 중요한 모델이 되었는데 두 양식을 하나로 절충하려는 시도들이 많았다.
이렇게 예배당이 설정되자 사람들은 교회의 내부 장식에 관심을 쏟았다.그것은 매우 어렵고 심각한 문제였다.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에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었다.한 가지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즉 신의 집에서는 조상(彫像)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제 막 새로운 신앙으로 개종한 소박한 이교도들이 교회 안에서 그러한 조상들을 본다면 무슨 수로 그들이 과거에 가졌던 낡은 신앙과 새로운 복음사이의 차이점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열성적인 기독교인들은 조각에는 한결같이 반대했지만 회화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했다.회화가 이교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받아들인 가르침을 상기하도록 도와주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해 주므로 쓸모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로마제국의 서부지역 라틴계 사람들은 주로 이러한 견해를 지지했고 6세기 말의 교황인 그레고리우스도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회화적 표현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마치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그림책이 필요한 것처럼 형상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교회 내부장식을 위해 사용된 것은 주로 회화와 모자이크였다.그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모자이크화다.
모자이크는 대리석이나 유리,금속,색기와 등의 조각을 모아 붙인 벽이나 천정 등에 그림과 도안으로 장식하는 것이다.본래 페르시아 지방의 수직물 도안에서 영향를 받은 것인데,고대 헬라와 애굽 등지에서 시작돼 4세기에는 그리스 로마에서 장족의 발전을 보였고 아우구스투스황제 때는 돌을 박아 만든 로마의 도로에도 기하학적 모양의 장식을 했었다.
기독교인들은 이 모자이크를 이용해 교회 내부의 벽면과 천장을 장식하기 시작했다.이렇게 시작된 모자이크화는 발전을 거듭해 로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여러 지방의 교회에 보급됐고 특히 스테인드글라스의 발전을 가져오게 됐다.모자이크는 점차 로마에서 동방으로 옮겨갔고 콘스탄티누스황제 이후 비잔틴 미술의 한 양식으로 전개됐다.
기억할만한 것은 교회의 건축과 내부 장식이 황실의 적극적인 후원과 감독 하에 진행됐다는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는 개혁의지를 엿볼 수 있다.이와함께 황실의 돈독한 신앙에 바탕을 둔 새 정권의 이상도 읽을 수 있다. // 이강미